연세대 대학원신문(155호)에 실었던 서평을 옮겨놓는다(출처는 담비이다). 최근 화제가 되었던 두 권의 책,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김영사, 2007)과 슬라보예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길, 2007)에 관한 것이다. 타이틀은 "우리시대의 신과 종교, '문제는 사랑이다'"로 나갔다.

 

 

 

 

'스타’ 과학자와 철학자가 신에 대해 묻는다

종교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바닥에서부터 재고해보도록 요구하는 책 두 권이 나란히 출간됐다. 영국의 다윈주의 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과 슬로베니아의 라캉주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가 그 두 권의 책이다. 국역본으로는 『만들어진 신』이 약간 먼저 나왔지만 원저의 경우엔 『죽은 신을 위하여』(원제는 ‘꼭두각시와 난쟁이(The Puppet and the Dwarf)’)가 지난 2003년에, 그리고 『만들어진 신』(원제는 ‘신이라는 망상(The God Delusion)’)은 2006년에 출간되었다. 각기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두 ‘스타’ 과학자/철학자의 근접 조우는 그런 빌미로 마련된다.

그렇다고 해서 도킨스와 지젝이 직면 대면하는 것은 아니다. 더 나중에 출간된 만큼 도킨스가 지젝을 참고할 만하지만 『만들어진 신』에서 『죽은 신을 위하여』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도킨스가 소위 ‘포스트모던 철학’에 혐오감을 보이며 앨런 소칼의 ‘지적 사기’론에 동조했던 걸 고려하면 반(反)영국적인 헤겔철학(독일)과 라캉정신분석(프랑스)을 이론적 거점으로 한 지젝의 ‘사변’을 도킨스가 인내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모든 분야의 지식을 종횡무진으로 넘나드는 지젝은 보다 적극적으로 진화생물학과 인지과학을 참조하지만 그가 보다 자주 거론하는 인물은 도킨스가 아니라 대니얼 데닛 같은 과학자이다(데닛은 도킨스의 책 『확장된 표현형』의 서문을 쓰기도 했다). 거기에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 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라는 제사(題詞)를 달고 있는 『만들어진 신』이 종교 일반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반해서 『죽은 신을 위하여』는 기독교를 특권화해서 다루고 있다는 점도 예비적으로 알아두어야겠다(지젝의 책에서 제사 역할을 하는 건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이다).



무언가의 부산물일 뿐인 종교
“종교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라”고 제안하는 『만들어진 신』은 전반부 대부분을 “신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 걸 입증하는 데 할애한다. “신은 반드시 존재한다”고 믿는 독실한 맹신자들에게는 반감어린 호기심을 유발하겠지만 일반 독자가 읽기에 보다 흥미로운 건 ‘종교의 뿌리’와 ‘도덕의 뿌리’ 등을 다룬 다른 장들이다. 다윈주의 과학자로서 도킨스가 갖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종교적인 욕구를 충동질한 자연선택의 압력들은 무엇이었을까?” 좀스러울 정도로 ‘경제성’을 따지는 다윈주의자가 보기에 종교는 너무 낭비적이고 너무 사치스럽기 때문이다. 대니얼 데닛의 표현에 따르면 “마치 햇빛이 드는 숲속의 빈터에 앉아 있는 공작 수컷들처럼.”

그렇다면, “왜 신 중추를 성장시키는 유전적 성향을 지닌 조상들이 그렇지 않은 경쟁자들보다 더 많은 후손을 가진 것일까?” 말하자면 종교적인 본성의 유전적 이익이란 게 어떤 것일까를 따져보는 것인데, 도킨스나 다른 진화생물학자들이 보기에 그러한 성향은 직접적인 이익과 무관한 듯하다. 그것은 감기가 종교와 흡사한 양상으로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이지만 우리에게 혜택을 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거기서 얻어지는 자연스런 결론은 종교가 다른 무언가의 부산물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종교는 달을 기준으로 날아가도록 진화한 나비의 본성이 촛불을 향해 뛰어드는 ‘실수’를 범하게 되는 것과 같은 차원의 부산물이자 부작용이다. 요컨대 “다른 상황에서는 유용한 혹은 과거에는 유용했던 심리적 성향의 불운한 부산물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종교가 다른 무엇의 부산물이라면 그것은 무엇일까란 질문이 자연스레 제기되는데, 아직은 ‘가설’들만이 제시돼 있는 수준이다. 도킨스의 가설은 소위 ‘잘 속는 아이’ 이론이다. 아이들은 앞선 세대의 지식과 축적된 경험을 습득할 필요가 있으며 자연선택은 아이의 뇌에 부모나 다른 어른이 어떤 말을 하든 믿는 경향을 심어놓았다(교회는 어릴 때부터 보내야 한다!). 그렇게 믿고 따르는 것이 보통은 생존에 유익하기 때문이다(하지만 그 이면은 노예처럼 속는 것이다).

또 다른 흥미로운 가설은 종교의 비합리성이 뇌에 들어 있는 특정한 메커니즘의 부산물이라는 것이다. 바로 사랑에 빠지는 성향이다. 이미 잘 알려진 것이지만 사랑에 빠질 때 우리의 뇌에는 신경물질들이 활성화되면서 독특한 뇌 상태를 이루게 된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소위 ‘한눈에 반하게 만드는’ 이러한 비합리적인 현상이 오랫동안 아이를 함께 키울 수 있도록 배우자에게 충실하게 하는 메커니즘으로서 진화해왔다고 본다. 그리고, 역시나 비합리적인 종교는 원래 사랑에 빠지도록 뇌에 새겨진 비합리적 메커니즘의 부산물이 아닐까라는 것이다. 실제로, 사랑에 빠지는 것과 종교라는 ‘두가지 열병’은 활성화되는 뇌 영역이 다르면서도 많은 유사점을 갖고 있다는 게 정설이다.

한데 이러한 ‘부산물로서의 종교’는 원래의 진화적 본성(메커니즘)으로부터 분리해낼 수 있는 것일까? 가령 우리는 사랑에는 빠지면서 종교에는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조절할 수 있는 것일까? 나방은 달을 향해 날아가는 본성은 유지하면서 한편으론 촛불로 달려드는 실수를 피해갈 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비합리적 신앙 대신에 합리적 이성의 판단에 따르기까지는 혹 ‘진화적 시간’이 요구되는 것은 아닐까?

기독교의 도착적 핵심, 사랑
사랑의 역설은 ‘기독교의 도착적 핵심’을 다루고 있는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도 중요한 주제이다. 체스터턴의 말을 재인용하면, “이 세상 모든 종교 중에 신이 전능하다는 이유로 불완전할 수 있다고 느꼈던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다. 신이 온전한 신이 되기 위해서는 신이 왕이 돼야 하는 동시에 반란자가 돼야 한다고 느꼈던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다.”(27쪽) 더불어, “자기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제자들에게 자기를 배반할 것은 요구하는 신은 오직 그리스도뿐이다.”(28쪽) 지젝의 책 전체는 이 도착적 핵심에 대한 새로운 독해이자 헤겔적/라캉적 해석의 시도이다.

그리스도와 배반자 유다와의 관계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교훈을 멜로드라마 버전으로 바꿔서 말하면 이렇게 된다.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의 사랑을 얻으려면 그녀 없이 살아갈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 자신의 사명 혹은 자신의 직업이 그녀보다 중요함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즉 당신은 나의 전부지만, 나는 당신 없이 살아갈 수 있고, 나의 사명 내지 직업을 위해 당신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34쪽)는 게 진정한 사랑의 메시지이다.

그것이 사랑의 근원적인 역설이다. 즉 사랑은 그것이 절대적이기에 언제나 직접적인 목표가 아닌 부산물의 지위에 있어야 하며 과분한 은혜의 산물로 간주돼야 한다(그런 의미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은 혁명가 커플의 사랑, 혁명이 요구하면 언제고 기꺼이 상대방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랑일 거라고 지젝은 말한다).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면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러한 역설을 체현하고 있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궁극적 타자가 신 자신인 한에서, 타자의 타자성을 동일성으로 환원시킨 것이 기독교의 획기적인 업적이다”라고 지젝은 주장한다. “기독교에서는 신 자신이 인간이요, ‘우리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223쪽) 따라서 ‘타자성의 심연’은 기독교와 무관하며 진정한 일신교로서의 기독교는 관용적일 수밖에 없다(일신교의 배타적 폭력은 자신이 ‘거짓 신들’과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신교의 가면을 쓴 다신교의 행태이다).



신 자신에 대해 죽는 기독교의 신
신이 자기를 믿지 않는 인간들 때문에 죽는 전형적인 무신론에서와는 달리 기독교에서 신은 “신 자신에 대해서 죽는다(God dies for Himself).”(27쪽)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을 남기고 신(그리스도)은 혼자서 죽는다. 기독교의 은밀한 도착적 핵심은 신을 신 자신으로부터 분리하는 이러한 균열, 신 자체가 되는 이 균열에 놓인다. 이러한 균열의 장면을 우스갯소리 버전으로 바꾸면 이렇게 된다. 셋이 각자 자기소개를 한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이유로 사자 밥이 되었소!” “나는 그리스도를 조롱했다는 이유로 화형 당했소!”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내가 바로 예수요!”

이러한 마지막 역전의 순간에 ‘창조의 토대로서의 예외’, 곧 신은 “신 자신의 창조물 속으로 타락하고, 보잘것없는 일련의 피조물 속으로 삽입된다. 이러한 진입의 순간은 기독교가 아니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강생의 신비이다.”(223쪽) 지젝이 기독교의 핵심으로 분리해내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신비이다. 그의 마지막 메시지는 이것이다. “기독교의 보물을 지키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희생해야 한다. 기독교가 출현하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죽어야 했듯이.”

도킨스는 ‘종교의 뿌리’를 탐문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나방들은 촛불을 향해 날아들며, 그것은 우연 같지가 않다. 그들은 스스로를 번제(燔祭)의 제물로 바친다. 우리는 그것을 ‘자기희생 행동’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으며, 그 도발적인 명칭을 대하면 도대체 어떻게 자연선택이 그것을 선호할 수 있는지 궁금증이 인다.”(263쪽) 그것은 달빛에 대한 나방의 ‘망상’이었겠지만 ‘죽은 나방을 위하여’는 그렇게만 말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닐까 한다.

07. 0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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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온 책 테리 이글턴의 <성스러운 테러>(생각의나무, 2007)는 근래에 읽은 책들 가운데 (지젝의 책들을 제외하면) 가장 재미있다. 테러리즘에 관한 원고를 쓰기 위해 여러 책을 만지작거렸지만 결국엔 이글턴의 책이 낙착된 이유이다(소개된 책들만 고려하더라도 한국어 이글턴은 다시 '중흥기'를 맞고 있는 감이 있다. 그의 소설 <성자와 학자>, 그리고 이론서 <우리 시대의 비극론>이 모두 최근 1년 안에 출간된 책들이고, 아마도 그의 책 두어 권 이상이 앞으로 1년 안에 더 출간될 것으로 보인다).  

 

 

 

 

필요 때문에 책과 관련된 리뷰 기사들을 읽어봤는데, 재미있는 내용들도 눈에 띄었다. 이 페이퍼가 목표한바 <성스러운 테러>의 서문을 다루기 전에, 미리 읽어본다(한겨레의 리뷰가 보이지 않는 게 좀 특이하다). 먼저 동아일보의 리뷰.  

9·11테러 이후 일상으로 침투한 테러를 근대 이후의 예외적 현상으로 바라볼 게 아니라 인간성의 심연에 내재된 일반적 어둠으로 이해할 때 진정한 극복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담았다. 신화와 문학, 미학과 철학, 정신분석학과 정치학을 종횡무진 오가며 테러는 본질적으로 원초적 폭력에 대한 저항적 폭력임을 환기시킨다. 그러나 테러가 폭력을 먹고 자라기 때문에 정의의 실현을 통해서만 종식시킬 수 있다는 주제의 변주치고는 지나치게 현학적인 내용이 많다.

이글턴이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바이지만 책은 테러에 대한 일종의 '형이상학'을 다루고 있다. "테러가 폭력을 먹고 자라기 때문에 정의의 실현을 통해서만 종식시킬 수 있다는 주제의 변주치고는 지나치게 현학적인 내용이 많다"는 촌평은 혹 이 책에서 형이상학적 통찰보다는 시사적인 비판을 더 기대했던 탓이 아닐까? 이러한 '빗나간 기대'에 대한 낭패감을 보기 흉할 정도로 드러내놓고 있는 것이 중앙일보의 리뷰이다.

최근 언론 보도를 통해 품게 된 테러에 대한 관심을 충족시키려는 목적이라면 이 책 말고 다른 걸 고르는 게 낫다. 여간 풍부한 문학적 상상력이 없는 독자라면 10분을 못 버티고 책을 던져 버릴 게 분명하다. 저자가 서문에서 미리 밝히고 있듯 이 책은 수많은 테러리즘 연구에 한 항목을 보태기 위해 쓰인 책이 아니다. 그보다는 테러라는 개념을 “형이상학적이라 부를 수 있는 맥락에 위치시키려는 시도”다.

'최초의 테러리스트는 디오니소스?'란 타이틀의 이 리뷰는 논설위원의 글답게 첫문장에서부터 '고압적'이다. '테러에 대한 관심'을 충족시키려는 독자라면 물론 다른 책들을 참조하는 게 나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제외되어야 할 이유를 나는 책을 읽으면서 찾지 못했다. 필자가 인용한 대목에 바로 이어지는 것이지만 "이 책은 최근에 내가(=이글턴이) 작업해온 형이상학적 혹은 신학적 연구의 국면에서 나온 성과"이며, 그런 점을 얼마간 고려하면 되는 것 아닌가. "여간 풍부한 문학적 상상력이 없는 독자라면 10분을 못 버티고 책을 던져 버릴 게 분명하다"? 내 생각엔 10분만 집중해서 읽을 수 있는 독자라면 책을 손에서 놓기 어려울 것이다.

"형이상학적 혹은 신학적 연구의 국면"은 "metaphysical or theological turn"을 옮긴 것인데, 'turn'은 물론 어떤 '방향전환'이나 '전회'를 가리킨다. 그의 오랜 독자들이라면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비평가' 이글턴이 웬 형이상학 혹은 신학 타령이냐, 라고 반문을 가질 법하고(그러니까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외도' 아니냐는 의혹을 받을 수도 있겠다), 또 이글턴 자신이 그런 반응을 예상치 못하는 게 아니다. "혹자는 나의 이러한 연구를 환영했지만, 혹자는 경계와 실망을 타내기도 했다."라는 진술이 바로 이어지는 것이다(그가 각주로 미리 선수를 쳐놓았지만, 가령 '성스러운 테리Holy Terry'라고 놀림감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한 종류의 반문에 대한 이글턴의 대답은 이렇다: "나는 좌파 진영의 친구들에게 사탄이나 디오니소스, 희생양과 악마 등 다소 이국적인 논의들이 담고 있는 정치학이 결코 오늘날의 정통 마르크스주의 담론보다 덜 급진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싶다." 나는 이글턴의 말에 공감한다. 리뷰를 마저 읽어본다.   

그런 눈으로 봐야 우선 『성스러운 테러』라는 제목에 반감을 버릴 수 있다. 그리스 신화 속에서 대지의 풍요를 주재하는 신이자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최초의 테러리스트 지도자”로 언급하는 저자의 도발적 글쓰기는 서구 문명사를 구성하는 신화와 문학, 철학, 심리학, 정치학을 아우르고 고대와 현대의 시간적 경계를 무시로 넘나들며 테러에 대한 내재적 접근을 시도한다.

디오니소스의 예가 암시하듯 저자에게 테러는 이성과 광기의 양가성(兩價性) 개념이다. 디오니소스와 신도들의 광적 주신제(酒神祭)를 폭력으로 제압하려 했던 이성적인 테베의 왕 펜테우스는 결국 파멸하고 만다. “광기를 인정하는 것이 정신의 명료함인 반면 광기를 이성으로 굴복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망상일 뿐”인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문명과 야만이 오랜 적대자인 동시에 가까운 이웃”이었으며 “인류가 문명 진화와 함께 야만을 휘두를 세련된 기술을 발전시켜왔음”을 본다. 테러는 결국 인간 자신에 내재한 폭력성에서 비롯된 것이며 테러를 막으려면 인간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말은 쉬운데 여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곳곳에서 발견되는 해석의 자의성은 때론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시사적 의미로 테러의 역사가 궁금한 독자보다는 테러라는 주제로 호사스런 문학적 유희를 만끽할 준비가 돼있는 독자에게 추천할 만하다. 화려한 언어의 향연 속에서 머리에 쥐가 났을 게 분명한 번역자의 고통을 은근히 즐기는 악취미를 가진 독자라면 더욱 그렇다. 

서평이야 취향에 따라 제각각일 테지만 "말은 쉬운데 여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곳곳에서 발견되는 해석의 자의성은 때론 고통스럽기까지 하다."란 촌평에 나로선 공감하기 어렵다(고통스럽기까지 한 해석의 자의성?). 때문에 "시사적 의미로 테러의 역사가 궁금한 독자보다는 테러라는 주제로 호사스런 문학적 유희를 만끽할 준비가 돼있는 독자에게 추천할 만하다"라는 기이한 추천의 변은 '분풀이'로 읽힌다(혹은 내가 '호사스런 문학적 유희를 만끽한 준비가 돼있는" 독자일는지도). 거기에 마지막 문장은 가관이다. "화려한 언어의 향연 속에서 머리에 쥐가 났을 게 분명한 번역자의 고통을 은근히 즐기는 악취미를 가진 독자라면 더욱 그렇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읽기는 즐거웠지만 번역하기는 어려운 책이었다"니까 혹 '머리에 쥐가 났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번역에 하자가 있는 건 아니며 읽기에 특별한 장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요즘 나오는 번역서들에 비하면 상당히 준수한 수준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심지어 나는 순전히 같은 역자의 '작품'이어서 앨리슨 먼로의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뿔, 2007)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정도이다(<니체>와 <역사의 요동>은 이미 구매한 책들이다). 취향은 자유라고 하지만, 리뷰는 아무래도 취향을 남용한 게 아닌가 싶다.

"반어적이고 풍자적인 이글턴 문제 특유의 뉘앙스" 때문에 고생했을 역자의 노고를 높이 평가하면서 나대로 아쉬움을 표하자면,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가 두 번이나 '토스토예프스키'로 오기되고 찾아보기에도 'ㅌ'항에 배치된 것은 비록 '재미'는 선사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몇 군데 약간 부정확한 번역과 부정확한 조사 등은 또한 책이 다소 급하게 나왔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꺾을 정도는 아니다(물론 이글턴의 책을 처음 손에 든 독자라면 다소 어려울 수는 있겠다).

서문에서 밝힌 이글턴의 변은 이렇다. "고대의 제전에서부터 중세 신학, 18세기의 숭고 개념과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이르기까지 내가 추적한 테러리즘의 계보학은 자의적일 뿐만 아니라 자격 미달의 비역사적 연구로 보일 수도 있을 터이다. 테러만이 그 계보를 추적할 수 있는 전(全)역사적 현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분명 이 연구의 자의성이 지적될 순 있겠지만, 이 연구를 비역사적이라고 비판하는 후자의 견해에 대해서라면 이는 역사에 대한 심각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반박하고 싶다."

'전(全)역사적 현상'이라고 한 건 'pre-history of the phenomenon'의 번역이므로 '전(前)역사적 현상'으로 교정되어야겠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의도한 '테러리즘의 계보학'이 자의적이고 비역사적이란 비판은 가능하지만 그때 비역사적이란 비판은 "in a somewhat impoverished understanding of the historical", 즉 "역사에 대한 빈곤한 이해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심각한 오해'까지는 아니다. 왜냐면 그런 식의 역사 이해도 가능하기에. 앞에서 인용한 리뷰가 가능한 것처럼). 거꾸로 역사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가진 독자라면 <성스러운 테러>와의 만남은 말 그대로 '향연'이다...

07. 09.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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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강의를 위해 참조하거나 해야 할 책들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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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READ 셰익스피어
니콜러스 로일 지음, 이다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9,000원 → 8,100원(10%할인) / 마일리지 4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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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앗, 이 책이 있다는 걸 이제서야 알았다! 어디에 뒀나?..
햄릿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7,000원 → 6,300원(10%할인) / 마일리지 35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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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가장 많이 읽히는 번역. 하지만 베스트는 아니다. 운문 번역에 치중하느라 우리말의 자연스러움이 많이 희생됐다(<햄릿>은 시어이기도 하지만 연극의 언어 아닌가?). 거기에 '있음이냐 없음이냐'가 고민거리일까?..
햄릿- 전예원세계문학선 301, 셰익스피어전집 1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1989년 6월
9,000원 → 8,100원(10%할인) / 마일리지 450원(5% 적립)
2007년 09월 12일에 저장
절판

극언어로서의 가독성은 좋은 편. 일부 부정확한 대목들이 있다 한다. 셰익스피어 전집을 번역한 신정옥 교수의 번역(시중에 다 있는 책이 웬 품절?). 알라딘에 안 뜨지만 4대 비극만 묶은 판본도 새로 나와 있다.
햄릿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여석기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0월
9,000원 → 8,100원(10%할인) / 마일리지 4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5월 8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07년 09월 12일에 저장

역시나 읽을 만한 번역. '사느냐 죽느냐'를 '죽느냐 사느냐'로 번역하는 게 역자의 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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瑚璉 2007-09-12 22:10   좋아요 0 | URL
최재서 씨가 번역한 정음사 판 햄릿도 추가해보시면 어떨까요?

로쟈 2007-09-12 22:24   좋아요 0 | URL
정음사판이 아직 나와 있나요?..

웽스북스 2007-09-12 22:35   좋아요 0 | URL
강의를 위해 이렇게 많은 책들을 섭렵하시는 로쟈님의 강의를 듣는 분들이 부럽네요
부디 두루 섭렵하셔서 좋은 강의 하시길 바랍니다
나중에 강의계획표 이런 것도 올려주시면 흥미롭게 더 부러워하며 궁금해할 것 같아요 ^^

로쟈 2007-09-12 22:55   좋아요 0 | URL
참고할 '생각'이 있는 책들까지 포함한 목록이구요, 실제로는 7-8권 정도를 훑어보는 정도입니다...

다락방 2007-09-12 23:56   좋아요 0 | URL
민음사판으로 읽었는데 그것이 베스트는 아니군요. 참고해야겠어요.

로쟈 2007-09-13 00:15   좋아요 0 | URL
시리즈물이라는 걸 빼면 그다지 매력이 없는 번역서입니다...

瑚璉 2007-09-13 08:32   좋아요 0 | URL
아, 현재 유통 중인 책만 포함하신 거로군요. 정음사 판은 저도 한 질 가지고 있기는 합니다만, 도서관에서도 비교적 쉽게 찾으실 수 있을 듯 한데요.

로쟈 2007-09-13 08:42   좋아요 0 | URL
원초적으로 알라딘에 이미지가 뜨지 않습니다.^^;

瑚璉 2007-09-13 09:02   좋아요 0 | URL
파크 호넌의 셰익스피어 평전을 권해드리려 했더니 이것도 그새 품절이군요. 하긴 제가 구입한 지도 꽤 지났으니... (-.-;)

로쟈 2007-09-13 13:04   좋아요 0 | URL
호넌의 책도 추가는 해놓았습니다.^^
 

아침에 만원전철에서 읽은 기사를 옮겨놓는다. 며칠전 구내서점에서 눈여겨 본 시집이기도 한데, 시단의 '완전소중' 황병승의 두번째 시집 <트랙과 들판의 별>(문학과지성사, 2007) 출간 관련 인터뷰기사이다. 경향신문의 내일자 기사까지 같이 옮겨놓는다. 한국시의 최신 '트랜드'가 궁금하신 분들은 한권씩 사서 꽂아두시길. 단, 주변에 권하지는 마시길. 혼자 즐기시길(알라딘의 이미지는 왜 이리 커졌나?).

한국일보(07. 09. 12) 우리의 詩를 버리면 그의 詩가 읽힌다"

'한국 시단의 첨단' 황병승(37) 시인이 두번째 시집 <트랙과 들판의 별>(문학과지성사 발행)을 냈다. 2년 전 모호한 성(性)의 퀴어적 주체들을 둘러싼 낯설고도 잔혹한 세계를 감각적으로 그린 첫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를 내놓은 그에겐 "시 아닌 것을 긁어 모아 시를 만들어 내는 연금술사"(평론가 신형철), "우리 시단에 새로운 시의 지도를 그리는 자"(시인 김혜순), "한국 현대시의 지루한 표준성을 날려버릴 강력한 뇌관"(평론가 이광호) 등의 절찬이 쏟아졌다. 잠잠하던 시단에 '미래파 논쟁'이란 첨예한 전선이 그어진 것도 이 '괴물 시인'의 돌출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이번 시집은 여러 혼종 주체를 내세워 분열적인 목소리를 낸다는 면에서 전작과 유사하고, 퀴어적 요소를 줄이고 이야기를 살렸다는 점에서 차별된다. 황씨는 "이미지나 언술을 비틀어 표현하는 재미에 충실했던 첫 시집에 비한다면 서사적인 면이 강화된 이번 시집은 독자에게 좀 더 쉽게 다가갈 것"이라고 말했다.

서사에 충실하다보니 책에 실린 시 40편의 분량이 180쪽에 이를 만큼 긴 시가 많다. 황씨는 시구를 반복하거나, 시 속에 짧은 시를 이탤릭체로 삽입하는 등의 방식으로 긴 시에 음악성을 부여했다. "시와 소설의 모호한 경계에서의 밀고 당기는 재미"가 그가 밝히는 장시 쓰기의 묘미다.

이번 시집에서 그는 확실히 친절해졌다. '음악이 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아름다운 센텐스'를 찾아 방랑하는 마약 중독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시 '눈보라 속을 날아서'의 경우 심플한 구도로 처연한 아름다움을 전해주는 작품이다. 불륜과 폭력, 연민으로 얽힌 9명을 한꺼번에 살인사건에 연루시키는 고난도 퍼즐을 짰던 이전 시집의 '혼다의 오ㆍ세계 살인사건'과 대별된다.

하지만 상당수의 작품은 여전히 읽어내기 녹록치 않다. "이야기를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하는 대신, 부조리한 상황, 분열된 인물 등을 통해 비틀어 낯설게 표현하는 것이 내 시적 지향"이라고 말하는 황씨는 독자와의 손쉬운 소통을 위해 작품 속 복잡한 알레고리를 설계하는 즐거움을 포기할 마음이 전혀 없다. 그러니 우리가 다가서는 수밖에. 고무적인 것은 우리가 시에 대해 품고 있던 정형화된 관념을 버릴수록 그의 시가 조금씩 '느껴진다'는 것. 이해를 독촉하는 이성 대신 모호한 혼종의 세계에 몸을 맡기면, 쓰지 않고 버려뒀던 감각들이 저릿저릿해온다는 것.

'목구멍에 고무호스를 달고 사는 큰오빠/ 나의 메리 고 라운드/ 현기증이 일거든, 눈을 감고 암흑 속에 펼쳐지는 빛들의 춤을 봐/ 아주 짧은 시간의, 황홀한 축제/ 눈을 뜨려고 애써봐야 그 시간은 어차피 현기증의 것'('썸 비치들의 노래'에서). 황씨는 "세상에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난해한 시는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황씨는 이제 '시코쿠'들의 세계가 재미없어졌단다. 그는 "이번 시집을 <여장남자 시코쿠>의 속편이자 완결편으로 삼으려 한다"며 "세 번째 시집에선 완전히 새로운 것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충만하다"고 말했다. '시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놀이'라는 그에게 갱신의 고통 없이 익숙해진 놀이는 더 이상 놀이가 아닐 것이다.(이훈성기자)

경향신문(07. 09. 13) 황병승 두번째 시집 ‘트랙과 들판의 별-러브 앤 개년’ 출간

‘나의 연인은 말한다 우리가 아침에도 만났고 낮에도 만난다면 우리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인지 너는 조금씩 모르게 될 거야 어째서 사랑은 그런 것일까 나의 연인은 말한다 우리가 늦은 밤에도 만나고 새벽에도 만나고 공원에서 들판에서도 만난다면 우리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인지 결국 영원히 모르게 될 것이고 밤과 낮 공원과 들판에 대해서도 까맣게 잊어버리겠지 어째서 어째서 사랑은 그런 것일까 나의 연인은 소리친다 입 닥쳐 개년아 어째서라니 네가 그 사실을 자주 잊어버릴수록 너는 더 미친 듯이 사랑에 목말라해야 하고 이곳에 없는 나를 찾아 밤새도록 공원을 숲 속을 개처럼 헤매게 될 거다….’(시 ‘트랙과 들판의 별-러브 앤 개년’ 일부)

장정일이 1990년대 문학판을 휘저어놓은 것처럼 2000년대 문학의 이단아로 등극한 시인 황병승. 그의 두번째 시집 ‘트랙과 들판의 별’(문학과지성사)이 나왔다. 2005년 나온 첫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는 시집으로는 드물게 5쇄를 찍었다. 그의 시는 외부 사물을 시인의 자아로 끌어들이는 서정시의 전통을 거부하고, 자유연상과 시어의 물질성에 집착하는 ‘미래파’의 대표 주자로 꼽힌다. 평론가들의 칭찬도 자자하다. “기표의 놀이를 통해 우리가 잃어버렸던 세계의 원형을 복원하려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작업을 해내고 있다”(권혁웅), “한국 현대시의 진정성에 대한 이념과 그 지루한 표준성을 날려버릴 강력한 뇌관”(이광호) 등이다.

시가 어렵다는 생각을 버리고, 무장해제한 채 황병승의 시를 읽으면 체제와 기성세대를 거부하는 반항아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중얼거림, 랩의 리듬이다. 시에서 소재 찾고 주제 찾고 비유 찾는 식의 독법을 버리자고 하는데 황병승의 시는 한 방에 그런 문제를 해결해준다.

이번 시집은 40편의 시를 200여쪽의 분량에 담았다. 시 1편당 평균 5쪽, 가장 긴 시는 9쪽에 이른다. “시도 되고 소설도 되는, 시도 안되고 소설도 안되는, 시와 소설의 모호한 경계에서의 밀고 당기는 재미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길이보다 놀라운 건 금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하위문화, 분열된 주체, 퀴어, 잔혹극, 무국적성, 텍스트의 콜라주가 특징이다.

‘냐라키는 처음 만난 아랍 남자들과 소파 위에서 뒹굴고 있었다 파티 내내 오스본이 곁에서 지켜보는 줄도 모르고/…/부끄럽지도 않니, 뒤죽박죽이 끝난 뒤 오스본이 힐책하듯 묻자, 냐라키는 고개를 떨군 채 오스본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웅얼거리듯 말했다/“…고멘나사이(미안해)…시카시(하지만), 시카시…”.’(시 ‘눈보라 속을 날아서’ 일부) 눈보라는 코카인에 취한 황홀한 상태를 의미한다.

블로그와 블로그를 옮겨다니며 젊은 독자들에게 인기를 모으는 황병승에게 “시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의 답변은 “집에서 혼자 할 수 있는 최고의 놀이 중 하나”라는 것이다.(한윤정기자)

07. 09. 12.

P.S. 관련 페이퍼로는 '황병승, 혹은 똑똑한 오리들이 쓰는 시'(http://blog.aladin.co.kr/mramor/105103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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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담비에서 리뷰 기사를 하나 옮겨온다. '두 얼굴의 근대국가'가 리뷰대상이 된 논문의 제목이자 리뷰의 제목이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MAIN&rsec=MAIN&idxno=5859). 필자는 '리뷰팀'이어서 성별은 모르겠지만, '논문 읽어주는 남자'도 우리 주변엔 '책 읽어주는 여자'만큼이나 요긴하다.  

담비(07. 09. 11) 두 얼굴의 근대국가

<한국사회학> 제41집 3호(2007)에 ‘두 얼굴의 근대국가: 상상의 국가와 실재의 국가’라는 논문이 실렸다. 미시간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이병호 씨의 논문이다. 그는 이 논문이 제프리 페이지 교수의 아이디어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서두에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근대국가의 두 얼굴은 무엇인가. 먼저 이 씨가 논문을 작성한 목적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그는 첫째, 근자의 국가에 대한 이론적 정체상태를 극복하고자 했다. 맑스 대 베버로 상징되는 이항대립적 구도를 지양하고 국가관료제에 대한 맑스와 베버의 논의로 다시 돌아가 둘 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재검토한다. 둘째, 그간의 연구들이 그다지 인식하지 못했던 상상과 실재가 병존하는 ‘두 얼굴’의 근대국가라는 개념을 제안한다고 한다.

근대국가는 한편으론 비인격적인 속성을 가진 국민이란 ‘관념적 허구’로 구성되어 있지만, 다른 측면에선 외교와 안보행위 같이 사회영역이 가지지 않는 국가 고유의 기능들을 수행하는 ‘구체적 행위자’다. 즉 국가는 신화적인 허구이자 동시에 구체적인 실재이다. 그동안 전자의 논의는 국가의 실재를 부정하는 일부 맑스주의자들이, 후자는 국가권력의 자율성을 강조한 베버주의 진영에서 나타난다. 그 두 관점을 엮으려는 시도는 제솝의 ‘전략-관계적’(strategic-relational) 국가론이나 푸코의 ‘통치성’(governmentality) 이론 등을 제외하고는 찾기 힘들었다.

이 씨는 국가관료제에 대한 맑스와 베버의 의견을 종합하면서 다음과 같이 입장을 밝힌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맑스와 베버의 대립은 국가 관료제론에서는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먼저 맑스와 베버 모두 국가 관료제의 근대적 속성을 지적했다. 맑스는 국가형식주의인 관료제는 오로지 근대적인 현상이라고 보았고, 베버는 전근대적인 가산적 관료제가 근대국가에 들어와 비개인적이고, 객관화되고, 계산가능하고, 합리적-법적 근거로 작동하는 관료기구로 전환되었음을 주목한다. 베버가 보기에, 국가관료제가 정당성을 가지고 독점하는 물리적 폭력수단은 바로 비인격적 규범과 힙리적이고 명문화된 규칙에 의한 합리적-법적 권위를 바탕으로 한다. 맑스는 국가를 구성하는 공민이란 주체는 비인격적 투명인간이며, 국가 관료기구의 권위는 모든 공민들의 동등성과 형평성을 외치는 ‘허구적 보편성’에서 얻어진다고 인식했다.

따라서 합리화된 형식주의가 지배하는 관료기구를 운용하는 주체는 실존하는 개인들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들의 생각은 일치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모두 비인격적 국가 관료제가 실재적-구체적 형태로 인간을 지배하고 통제해 나간다고 보았다. 베버는 합리적 지배를 달성하는 관료제의 불가피성을 예측하면서도, 한편으론 관료제란 유령이 그 창조자인 인간 위에 군림하며 인간성이 말살된 세상을 만들 가능성을 강하게 경고한다. 이에 대한 베버의 해결방안은 민주주의적이면서 책임정치를 구현하는 정치리더십이다. 그는 이러한 정치가들이 “관료 지배를 상쇄하는 권력을 가져야만 한다”고 역설한다.

한편 맑스는 이런 관료적 지배를 종식시키고 완전한 인간해방을 이루려면 “사회 위에 군림하는 기관으로서의 국가를 철저히 사회에 종속시키는 전환”을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해결책으로 꼬뮨주의를 제시했다. 국가 관료기구를 움직이는 관념화되고 비인격화된 개인들은 분명 명목적이고 허구적이지만, 관료기구는 인간의 생각과 행위를 다스리고 통제해가는 사회적 과정을 통해 객관화된 실재로 공민들에게 다가간다. 이런 물화과정을 정당화시키는 ‘비밀’은 도덕적인 존재로 의인화되는 국가이념인데, 이는 체제를 떠받치는 관료집단과 이들이 이용하는 물적 행정수단들에 의해 체현되는 것이다.

국가란 과연 무엇인가? 국가는 인간의 귀와 같이 손에 잡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이데올로기적 허구라고만 할 수도 없다. 국가는 신화적 허구이자 복합적 실제라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국가란 허구적 관념은 공민의 실제 행위유형과 사고체계를 틀 지우고 다스린다. 맑스가 말하듯, 이런 근대국가의 양면성은 모순적 현상이다. 이점에서 근대국가는 얼마 전 작고한 보드리야르가 말했듯 모든 실재의 인위적 모조품인 ‘시뮬라크르’가 지배하는 가상현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맑스가 말했듯 허구적 보편성으로 가득 찬 가상적 주권 하에서 도덕적 공민이란 존재로 살아간다.

모든 실재가 0과 1의 디지털 코드로 변환된 가상현실이 인터넷이란 물적 기반을 토대로 블로그, 사이버뱅킹, 사이버몰, 디지털음악 등의 형태를 통해 우리들 일상생활의 일부분이 되어가듯, 근대국가란 가상현실 또한 국가 관료기구를 토대로 벌이는 다양한 형태의 국가사업(국민의무교육, 국립대학, 국민연금, 국민의료보험, 훈장수여, 대중선전, 사법자본 독점, 사적 소유권 통제와 조정, 전쟁, 외교활동, 인구센서스 등)을 통해 점점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고 그들의 행동으로 구체화된다. (*국가가 가상적, 허구적 이데올로기라는 생각이 인터넷의 실재성에 의해 깨지고 있다)

국가가 국민들의 마음 속에 들어가려면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프로젝트가 필요하다. 근대국가는 민족주의, 법치주의, 공화주의와 같은 국가이념을 만들어가고 이를 다양한 채널을 통해 선전한다. 맑스적 입장에서 이런 국가 지배이데올로기는 언제나 지배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만든 허구이며, 베버적 시각으로는 국가에 의한 합리적-법적 지배를 정당화시키는 명분이다. 국가는 그 구성원들에게 이러한 국가이념을 충직하게 따르는 도덕적 공민이 될 것을 요구 또는 강요하며, 이에 대한 저항은 국가폭력을 통해 제압해간다. 국가의 허구적 보편성에 의해 규정된 도덕적 공민은 관념적 주체이며 어떠한 인간적인 속성을 갖지 않는 투명인간이다.

이런 공민의 이미지는 계급, 인종, 젠더라는 물화된 관념들을 경계로 양분된다. 즉, 부르주아-백인-남성이란 관념적 주체가 도덕적 공민의 원형이며, 그 허상의 반대편에는 프롤레타리아-흑인-여성이라는 또 하나의 허상이 존재한다. 비록 구체적 담론과 시각 차는 존재하지만, 맑스의 ‘도덕적 공민’, 베버의 ‘금욕적 청교도’, 푸코의 ‘규율화된 자아’는 모두 근대국가의 주체가 어떻게 이념화되고 관념화되는지를 보여준다. 근대국가의 대다수 공민들은 이런 관념화된 범주들을 당연시하고 실재하는 것으로 믿는다.

국가란 행위자는 공민들에 대한 자원동원을 극대화하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는 베버와 부르디외가 말하듯 국가의 물리적-상징적 폭력수단에 대한 정당한 독점을 전제로 하며, 자율화된 국가 관료기구가 물적 행정자원을 이용해 달성해간다. 가령 징병제도는 국가가 물리적 억압 혹은 상징적 폭력을 사용해 공민으로부터 육체적 자원을 동원하는 것이다. 또한 세금은 국가가 독점하는 경제적 기반이며, 세금징수는 국가의 관료적 행정기구가 강제력을 동원해 이뤄진다. 따라서 국가 안에서 유적존재인양 간주되는 공민들은 실상 관례화된 국가폭력을 겪는다. 그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혹은 강요된 도덕적 역할을 수행할수록 본래적 자기로부터 소외되고 더 물화되어간다.

국가란 행위자를 움직이는 동력은 근대성에서 유래하는 비인격적 국가 관료제이다. 관료제는 비개인적 인간관계가 그물망처럼 얽혀진 관념적 허상이며, 그 자체가 자기영속화 하려는 속성을 가진 거대한 통치기구이다. 국가 관료제는 또한 물리적 강제력과 상징적 폭력을 독점해가면서 주권국가 영역 안의 공민들을 동원하며, 통제하며, 그들의 일상생활을 ‘실질적으로’ 바꿔간다. 바로 이것이 국가 관료제가 가지는 구체적 효과이며, 동전의 양면과 같은 근대국가가 가진 두 가지 얼굴의 본질이다.



이 씨는 근대성이 나타내는 여러 현상들이 관념적 허구와 구체적 실재가 병존하는 두 얼굴을 동시에 가진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근대성의 양면성은 국가 영역만이 아니라 다른 영역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를테면 신용카드가 대상이 될 수 있다. 신용카드는 말 그대로 사용자들이 이를 돈으로 신용한다는 ‘주관적인 관념’을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현금지급기와 카드결제기는 이런 사람들간의 계약을 가능하게 만드는 물적 장치들이다. 이런 시스템을 통해 사람들이 경제행위를 하는 것은 실재적-구체적 행위과정이다. 만약 사람들이 이런 믿음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신용카드란 추상화된 체계는 아무런 효과를 낼 수 없다.

민족과 민족주의 역시 두 얼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민족공동체의 기본적인 구성 원칙은 베버의 주관주의적 명목론-즉, 민족은 존재하며 또 그래야만 한다는 신념을 갖는 개인들의 유의미한 행위에서만 발견된다-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민족관념은 언어, 지역, 정치체제, 집합적 기억, 신화 등의 기반을 통해 구체적인 사회과정에서 실체화된다.

그 좋은 예가 얼마전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단군이란 ‘신화’를 ‘역사적 실재’로 ‘개정’하기로 한 정부의 결정이다. 이보다 더 극적으로 ‘신화적 허구’이자 ‘구체적 실재’라는 민족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을까? 한편 현재 사회과학계에선 민족허구론과 민족실재론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최근 신용하(2006)는 민족실재론의 입장에서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론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이 씨는 두 얼굴을 가진 민족공동체라는 개념을 통해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를 지양해야한다고 강조한다.(리뷰팀)

07. 0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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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9-11 15:35   좋아요 0 | URL
논문 읽어주는 남자라는 것도 있군요 :) 읽기 어려운 논문을 좀 쉽게 전달한다는 측면에서 저같은 사람도 관심있는 논문을 찾아 볼 수 있겠군요.

로쟈 2007-09-11 22:10   좋아요 0 | URL
저도 '리뷰어' 역할을 할 때가 있지만, 여러 물적/시간적 여건상 우리 주변에 리뷰어나 리뷰팀이 더 많아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헤르메스들이죠...

kos3378 2007-09-12 10:48   좋아요 0 | URL
'헤르메스들'을 어떤 뜻에서 사용하셨는지, 무식을 무릅쓰고라도 여쭙고 싶습니다. ^^;

람혼 2007-09-12 11:37   좋아요 0 | URL
Michel Serres가 사용한 의미로 쓰신 게 아닐까요? ^^;
그나저나 글 잘 읽었습니다. '정리되는' 느낌을 받는데, 그것이 '리뷰어'의 장점이자 의의겠지요? ^^

바벨의도서관 2007-09-12 13:43   좋아요 0 | URL
헤르메스는 신들의 전령이지요. 신의 말씀을 대언(곧 번역)하는 것, 그것은 곧 해석이겠지요? 가령 수천년 전의 종교 경전인 성서를 우리 시대에 한글로 전달한다면, 그것은 곧 해석이지요. 그래서 해석학hermenutics의 어원이 헤르메스인 것입니다. 헤르메스란, 그저 해석자를 가리킬 뿐입니다. 미셸 셰르까지 가실 필요는 없을 듯^^;

로쟈 2007-09-12 19:20   좋아요 0 | URL
ㅎㅎ 모처럼 댓글이 여럿 달렸네요.^^ 별다른 뜻은 아니고 그냥 전달자 내지 심부름꾼 정도의 의미로 썼습니다(헤르메스가 제우스의 심부름꾼이니까요). 물론 무얼 전달하느냐에 따라서 '꾼'의 급도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