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파 관련 기사를 옮겨놓은 김에 미래파의 '산파' 중 한 사람으로 불리는 이장욱 시인에 대한 기사도 옮겨놓는다. 소설가와 비평가도 겸하고 있는 그이지만 이번에 미당 문학상 후보작을 소개하는 기사에 오른 이름이기에 '시인'으로 호명한다. 오후에 후배와 잡담을 나누다가 우연히 그의 시가 최종후보작에 포함됐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는데, 찾아 읽어보니 '미래파'와는 무관한, '소박한' 시여서 마음에 든다. '소규모 인생 계획'에서 열외가 아니기에 공감하는 바도 있고(그가 이런 시를 더 써주었으면 좋겠다). '비둘기' '펭귄' '북극곰' 등이 클리셰로 등장하지만 소시민적 상상력이란 게 본래 클리셰들로 채워지는 법이다...  

중앙일보(07. 08. 22) 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⑨

“만만치 않은 문장력과 사회에 대한 통찰… 최근에 나온 소설 중 가장 돋보인다.”(소설가 공지영)

“한국 시의 모더니티의 한 극한에서 서정성 자체를 낯설게 하는 첨예한 시적 감각을 만나려 한다면, 그를 읽는 것은 강렬한 경험이 될 수 있다.”(평론가 이광호)

“김행숙·황병승·김민정 등의 첫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해설은 모두 한 사람이 썼다. 그는 소위 ‘미래파’의 산파 중 하나다.”(평론가 신형철)

찬사에 또 찬사가 이어진다. 맨 앞의 것은 소설가를, 다음 것은 시인을, 맨 나중의 것은 비평가를 향한 상찬의 변(辯)이다. 그러나 이 모든 찬사는 오로지 한 사람만을 가리킨다. 이장욱. 그는, 문학 장르가 갈수록 쪼개지는 오늘, 시·소설·비평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그리고 장르마다 자신만의 입지를 구축한 전방위 문인이다.

문단에서 그는 소위 ‘미래파’라 불리는, 난해한 요즘의 젊은 시를 옹호하는 비평가로 더 알려져 있었다. 등단은 시가 가장 이르지만, 신형철의 말마따나 이장욱은 권혁웅과 함께 ‘미래파의 산파’로 통하던 참이었다. 그러던 그가 2005년, 소설가로 전격 데뷔한다. 처음 써봤다는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이 덜컥 ‘문학수첩 작가상’을 받은 것이다. 앞서 약력에선 시인의 이력인 시집 두 권만 적었지만, 그의 저작은 소설·비평집을 합쳐 다섯 권에 이른다. 그리고 올해, 그는 미당문학상 최종 후보로 선정됐다. 가장 궁금한 건 역시, 이장욱의 정체였다.

-정체를 밝혀라.

“끌리는 데로 가겠지. 시에 가장 오래 몸을 담고 있던 건 확실하다.”

-장르마다 당신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느낌은 물론 다르다. 밤과 낮의 느낌 같다고 할까. 내 경우는 시는 밤, 소설은 낮의 느낌에 가까웠던 것 같다. 어떤 시나 소설은 밤과 낮이 뒤섞이는 황혼의 느낌이었을 수도 있겠고.”

이장욱은 또 열심히 공부하는 문인으로 유명하다. 한때는 동네 독서실에서 온갖 부류의 고시생과 나란히 앉아 시를 읽고 시를 썼다(지금은 안 다닌단다). 하여 ‘공부해서 쓰는 시’란 쓴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공부해서 쓴 시라면 이처럼 처량하진 않을 터이다. 여기서 인용한 ‘소규모 인생 계획’은 거대 도시를 사는 소규모 인생의 옹색한 삶을 서글프게 드러낸다. ‘식빵 가루를/비둘기처럼 찍어먹고’나 ‘친구들은 하나 둘/의리가 없어지고/밤에 전화하지 않았다’란 대목에선 무언가가 얹힌 듯, 가슴 언저리가 먹먹했다.

비평가 이장욱은 환상에 기댄 시 세계를 지지하지만, 시인 이장욱은 자잘한 일상의 복판에 쪼그리고 앉아 있길 좋아한다. 동사무소나 오후의 공터, 횡단 보도, 엘리베이터 등 일상 속 공간이 두루 보이는 건 시인에게 “소시민의 자의식”(이광호 예심위원)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요일’이란 시어가 반복되는 것도 흥미롭다. 요일은, 기필코 되돌아오는, 하나 결코 이탈할 수 없는 일상의 족쇄와 같은 이미지를 자아낸다.

아마도 이장욱은 다음 세 가지 중 하나일 터이다. ‘우울한 모던 보이’(평론집 제목)이거나 ‘악무한의 쳇바퀴를 벗어나기 위한 다람쥐’(두 번째 시집 자서)이거나. 아니면 ‘유연하고 무표정한 고양이’(소설 작가의 말)거나. 아니다, 셋 모두일 수 있겠다.(손민호 기자)

07. 09.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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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7-09-04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시 신문에서 스크랩 해놓고는 처음 듣는 이 시인에 대해 궁금했었는데, 으흠...이런 사람이었군요.

수유 2007-09-04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연하진 않지만 무표정한 고양이 아닐까요? 해지는 현대백화점 옥상을 기웃거리는..
저는 <중독>을 좋아합니다. 수상했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이광호의 '서정성 자체를 낯설게 하는 첨예한 시적 감각' 에 동감합니다.

그리고 가져갈께요. 요즘 제 블록 너무 가난해서리..

로쟈 2007-09-04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어제의 거리를 다시 걷는 오후. 현대백화점 너머로 일몰. 이건 거의 중독이야. 하지만 어제는 또 머나먼 일몰의 해변을 거닐었지.

이제 삼차원은 지겨워. 그러니까 깊이가 있다는 거 말야. 나를 잘 펴서 어딘가 책갈피에 꽂아줘. 조용한 평면, 훗날 너는 나를 기준으로 오래된 책의 페이지를 펴고. 또 아무런 깊이가 없는 해변을 거니는 거야.

완전한 평면의 바다. 그때 바다를 바라보는 너로부터 검은 연필로 긴 선을 그으면, 어디선가 점에 닿는 것. 그 점을 섬이라고 하자. 그리고 그 섬에서 꿈 없는 잠을. 너는 나를 접어 종이비행기를, 나를 접어 종이배를, 나를 접어 쉽게 구겨지는 학을.

조용한 평면처럼 어떤 내부도 지니지 않는 것들과 함께. 그러므로 모든 것이 어긋나 버렸는지도 모르지. 서서히 늪에 잠겨가는 사람처럼, 현대백화점 너머로 일몰. 일몰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백화점 옥상에서, 지금 막 우울한 자세로 이륙하는 종이비행기.

2007-09-04 2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람혼 2007-09-05 0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기사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이른바 장르를 넘나드는 '전방위 문학인'이라 보다 더 기대하게 되고 애착이 가는 것 같습니다.

로쟈 2007-09-05 18:33   좋아요 0 | URL
'애착'까지요?!..

람혼 2007-09-06 03:07   좋아요 0 | URL
애착이 아니라면, 동병상련이랄까요? ^^; ㅎㅎ
 

오래만에 작년 문학판의 주요한 이슈였던 '미래파' 관련기사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내친 김에 이슈 정리기사까지. 특정한 유파라기보다는 젊은 시인들의 시적 상상력의 어떤 경향을 지칭하는 말로 제시된 것이 '미래파'였는데, 문단에서는 여러 가지 파문을 불러일으켰었다(지금은 한 풀 잦아진 듯하다). 아무래도 '-파'가 함축하는 '패거리'의식이 호오를 불러일으킨 빌미였던 듯하다. 한 잡지에서 미래파라는 '비평적 호명'에 대해서 정작 시인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다소 뒤늦은 '반응'을 다루고 있다는데, 이들이 보여줄 '미래파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약간) 궁굼하다(사실 나는 젊은 시인들이 '소통가능성'에 대한 히스테리와 '시적 자유'에 대한 강박증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도 싶다). 결국엔 읽을 만한 시(인)들이 남게 될 것이다...

 

한국일보(07. 09. 03) "우리는 '미래파 논쟁' 에 갇혀있지 않겠다"

2005년 초 문학평론가 권혁웅씨가 낯선 시풍으로 무장한 일군의 젊은 시인을 ‘미래파’로 명명한 이래 한국 시사(詩史)엔 ‘미래파 논쟁’이란 굵은 획이 그어지고 있는 중이다. 명칭이 적절한지, 이들 시인을 한 무리로 묶을 수 있는지 등의 기초적 문제부터 미래파의 작풍에 대한 미학적 가치판단까지 논의는 무성하지만, 많은 논쟁이 그렇듯 ‘미래파 논쟁’에 미래파의 목소리는 없는 상황이었다.

최근 발행된 시 전문 계간지 <시로 여는 세상> 가을호가 마련한 특집 ‘미래파의 자기 진단과 미래파의 미래’는 미래파로 거명되면서도 논쟁의 객체에 머물렀던 시인들이 작심하고 자기 입장을 밝히고 있어 흥미롭다. 기고한 시인은 김언, 서영처, 유형진, 이근화, 이민하, 장석원, 장이지, 조동범, 진은영씨 등 9명.

 

 

 

 

 

 

 

 

  

 

기고자 대부분은 시인들을 범주화하는 움직임을 경계했다. 유형진씨는 “개성적 시인들을 카테고리화해서 그 담론에 묶어두는 일은 그들의 행보를 위축시키고, 나아가 문단 내부의 단절을 심화시킬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동범씨는 “미래파 논쟁이 과거 참여-순수 논쟁처럼 자기 영역을 고집하는 양상을 보인다”고 우려하며 “젊은 시인들의 작품은 기존의 시적 흐름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계승해 새롭게 만든 것”이라고 썼다.

장이지씨는 “부정과 파괴를 통해 새로운 전통을 세우려는 전위적 충동이 미래파라면 황병승, 김민정, 김경주 등 세 명의 시인만 이에 해당할 것”이라며 “결국 모두 서정시를 쓰고 있는데 미래파의 시는 서정시가 아닌 듯 말하는 것은 묘한 기만”이라고 비판했다.

미래파 담론 이면의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는 의견도 있었다. 김언씨는 “미래파 논쟁을 시단의 중심에 떠오르게 한 일등 공신은 다름아닌 그 반대파 평론가들”이라며 “이들이 스스로 일으킨 논쟁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가장 싫어했던 시인들을 띄워주는 우를 범한 것”이라고 조소했다.

이근화씨는 미래파 담론을 “그 속에 무엇이든지 채워넣을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음식인 만두”에, 장석원씨는 “먼 곳에서 널 사랑한다는 주문을 외며 나를 협박하는 님의 사랑 고백”에 빗대며 논의의 ‘불순함’을 지적했다.

서영처, 이민하씨는 젊은 시인들의 시풍이 이전과는 차별된다는 점을 인정하는 입장이다. 서씨는 “이들의 다양한 불협화음과 추함은 새로운 표현양식이자 미의 추구”라고 규정했고, 이씨는 “뻔한 맛보다는 뻔뻔한 맛을 즐기는 감각의 전문가”들에 대한 동질감을 표했다. 하지만 이들 역시 다채롭고 변화무쌍한 시적 흐름을 고정된 틀에 가두려는 시도에 대해선 부정적 견해를 보였다.

다른 필자들과 달리 진은영씨는 젊은 시인들에게 낯선 이미지들의 수집에 머물지 말고 현실에 대해 집요한 탐구를 할 것을 주문해 눈길을 끌었다. 시 작업을 낚시에 비유한 진씨는 “풀의 배내옷으로 덮은 바구니에 담아온 물고기처럼 신선한 이미지들에 깔려 예감됐지만 의지박약 때문에 발견되지 못한 현실이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보라고 권했다.

이번 특집에 기고하지 않았지만 미래파의 대표 주자로 꼽히는 김경주 시인은 지난달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한국 시 역사에서 반복되고 있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싸움에서 현재는 ‘미래파’란 이름으로 모더니즘이 앞서나가는 형국”이라며 “그런 경향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이며, 시인은 예술의 전위로서 정형화되지 않기 위한 긴장을 부단히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이훈성 기자)

중앙일보(06. 06. 05) '미래파' 논쟁 "젊은 시인들의 낯선 어법, 새 상상력"

한국 문단에 화끈한 논쟁 한 판이 벌어졌다. 이른바 '미래파' 논쟁이다. 최근 주목받는 몇몇 젊은 시인들의 새롭고 낯선 어법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놓고 편이 갈렸다. 6~7년 전 문단권력 논쟁 이후 오랜만의 본격 논쟁이란 점에서 흥미롭다.

# 미래파의 등장
'미래파'란 어휘는 지난해 '문예중앙'봄호에서 처음 선보였다. 평론가 권혁웅은 '미래파-2005년, 젊은 시인들'이란 글에서 "새로운 세대가 생산하는 시는 요령부득의 장광설이거나 경박한 유희의 산물이 아니"라며 "이들의 작품이 가까운 미래에 우리 시의 분명한 대안이라는 것을 인정할 날이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권혁웅은 위 글에서 장석원.황병승.김민정 등 젊은 시인 셋을 인용했다. 이들은 모두 지난해 첫 시집을 발표했고, 첫 시집으론 이례적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여장남자 시코쿠'(랜덤하우스중앙)를 발표한 황병승은 중진 비평가 황현산이 "완전소중 시코쿠"('창작과비평'2006년 봄호)라고 평가했을 정도다.

흥미로운 건 1년 사이 미래파 숫자가 확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미래파가 한 평론가의 재기 발랄한 호명을 넘어 문단 이슈로 떠오른 까닭이 여기 있다. 애초에 호명된 건 셋이었지만, 2000년 전후 등단한 비슷한 어법의 또래 시인들, 예컨대 김행숙.김언.이민하.유형진.이장욱 등도 미래파로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다. 언제부턴가 미래파는 '길고 낯설고 섬뜩한 시를 생산하는 요즘 시인들'이란 뜻의 보통명사처럼 쓰이고 있다.

# 미래파에 대한 반격
미래파에 대한 급작스런 주목은 끝내 반발을 불러왔다. 몇몇 계간 문예지들이 최근 발간된 여름호에서 미래파를 비판하고 나섰다. 가장 적극적인 건 시 전문 계간지 '시작'이다.


'시작'은 "환상.전복.엽기.난해성.무의식 등을 특징으로 한 일군의 젊은 시인과 '다른 미래'를 꿈꾸고 사유하는 시인들을 선정한다"며 김선우.김이듬.박상수.박판식.손택수 등 젊은 시인 18명을 특집으로 다뤘다. 이 특집에서 비평가 이명원은 "권씨는 문단연령론과 문학세대론을 반복함으로써 시단의 혼란을 가중시켰다"며 "선배 시인들의 후배 세대에 대한 이유 있는 경계심을 오히려 부추기는 데 앞장섰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작가세계'도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의 시 세계 비판'이란 특집을 기획했다. "새롭고 낯선 징후들에 바쳐진 요란한 찬사를 걷어내고 차분한 시선으로 2000년대 상반기의 시적 현상을 돌아볼 필요"를 제기하며, 황병승.장석원.김민정 등에게 "자기 상처를 들여다보는 데서 한걸음 물러나 관계에 대해 성찰하고 자기 언어의 전략과 한계에 대해서도 새로운 고민을 시작하기 바란다"(이경수)고 충고했다. 이외에 '창작과비평'이 '2000년대 한국문학이 읽는 시대적 징후'란 특집에서, '실천문학'이 '탈주체론을 넘어서'란 특집에서 젊은 시인들을 다뤘다.

# 미래파는 정의가 아니라 수사다
논쟁의 진원지 '문예중앙'도 여름호에서 관련 특집을 실으면서 전선을 확대했다. 권혁웅은 '행복한 서정시 불행한 서정시'란 글에서 서정시를 두 종류로 나눴다. 시적 주체와 대상이 일치되는 이른바 전통적 방식(또는 정서)의 서정시가 행복한 서정시이고, 그렇지 못한 것이 불행한 서정시라고 구분한 것이다.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는 말장난이나 실험시가 아니라 "시적 주체와 세계가 엇갈리는 비정합적인 불행한 서정시"란 주장이다.



권혁웅의 반론은 문단 일각의 오해에 대한 해명이기도 하다. 권혁웅은 미래파를 '청록파'나 '시문학파'처럼 일종의 동인(同人)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요즘 젊은 시인들의 어법이 기존 문법과 다르다고 해서 말장난이나 환상으로 치부하지 말기를, 또 하나의 진지한 문학으로 바라보기를 당부한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권혁웅의 미래파는 "정의(定義)가 아니라 수사(修辭)"(김수이, '세계의문학' 2006년 봄호)다.

'미래파 논쟁'은 한국문학이 새 국면에 진입했음을 암시하는 일종의 지표다. 그들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그들의 낯선 어법과 새로운 상상력은 일단 인정된 사실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 개인의 별난 실험이 아니라 집단적 움직임을 보인다는 점에서 미래파는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비평가 박수연은 '서정과현실' 2006년 상반기호에서 "한국적 아방가르드의 진폭은 그들 각각의 개별적 성취로만 여겨졌을 뿐 유사한 지향과 형식을 갖춘 집단을 형성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적 경향은 문학사적 사건임이 분명하다"고 의의를 밝혔다.(손민호 기자)

07. 09.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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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05 17: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9-05 18:31   좋아요 0 | URL
랭보도 오래 쓰진 않았죠.^^
 

대학신문에 게재한 글을 옮겨놓는다. '21세기의 사유들'이란 기획연재의 첫번째 꼭지로 나간 것인데, 주말에 '초읽기'에 몰리면서 쓴 글들 중의 하나이다. 기획의 취지는 이런 것이다. "사상과 현실이 유리되고 있는 시대에 그 관계를 다시 활발히 밀착시키고자 하는 사상가들이 있다. 그들이 이 시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시대의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어떤 사유를 제시하고 있는지 알아본다." 하지만 취지와 무관하게 나로선 '펑크'를 내지 않는다는 데 더 주안점을 둔 것이어서 결과적으론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할 수 있겠다(어쨌든 민폐는 면했으니까). 물론 '고생한' 편집자는 생각이 다를 수 있겠다(초고에서의 '-이다'형 어미들이 '-다'로 수정되면서 글은 좀더 스피디해졌다). 미안한 마음을 적어둔다.

대학신문(07. 09. 03)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다시 정의하는 것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은 라캉주의 분석가이자 포스트모던 철학자이고 문화비평가다. 혹은 자신의 표현을 빌면, ‘정통 라캉주의적 스탈린주의자’다. 그는 히치콕, 레닌, 오페라, 9ㆍ11 테러, 인권, 근본주의, 사이버공간, 포스트모더니즘, 다문화주의, 전체주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등 광범위한 주제에 대해 많은 책들을 썼다. 그가 목표하는 바는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과, 대중적 환상 혹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신분석적 폭로다. 그 자신의 겸손한 정의에 따르면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다시 정의하는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그가 다룬 거의 모든 주제들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가장 먼저 재고의 대상이 된 건 이데올로기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해인 1989년 지젝이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으로 영어권 지식계에 ‘정식’ 데뷔한 것은 우연의 일치이지만 상징적이다.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했던 그 시기에 그는 이데올로기의 바깥은 없다고 주장하며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했다. 그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이름은 ‘냉소주의’다.

냉소주의는 더이상 “그들은 자기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는 마르크스식의 허위의식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잘 알고 있지만 여전히 그것을 한다”는 역설로 규정된다. 계몽된 허위의식의 역설이다. 가령, 우리는 지폐가 종잇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 ‘알지만’ 돈에 대한 물신주의적 태도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급진적’ 지식인들은 이민자의 온전한 권리와 국경 개방을 요구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지식인으로서의 특권적 지위가 계속 보장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무지’의 폭로는 더이상 아무런 파괴력도 갖지 못한다.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행위와 일상에 구조화돼 있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어느 시대보다도 더 많이 믿는다.

지젝에 따르면, 우리는 지난 세기에 두 가지 유토피아의 종말을 경험했다. 하나는 70여년을 버티던 ‘정치적 유토피아’로서의 현실 사회주의의 종말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이후 10여년을 구가했던 ‘전지구적 자본주의’, 곧 자유민주주의 유토피아의 종말이다. 전자의 종언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 베를린 장벽 붕괴였다면, 후자의 종언을 보여준 ‘실재적’ 사건은 바로 2001년의 9ㆍ11이다. 이러한 종말 이후에, 새로운 갈등의 장벽들이 실재적 역사로 회귀했다. 따라서 유토피아의 종말 이후에 우리가 ‘역사의 종말’에 접어들었다고 하는 바로 그 관념이야말로 유토피아적 환상이다.

사실 이념이라는 대타자(the Other)의 몰락 이후에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자유롭고 관용적이며 쾌락적인 시대를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젝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의 부자유를 말할 수 있는 언어를 갖고 있지 못하기에 자유롭다고 ‘느낄’ 따름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오늘날의 쾌락주의는 절제의 쾌락주의다. 카페인 없는 커피나 섹스 없는 섹스, 혁명(유혈) 없는 혁명에 대한 기대와 권장에서 볼 수 있듯이 법의 부재는 아예 금지를 일반화한다.

가령 지젝이 자주 예로 드는 권위적인 아버지와 관용적인 아버지의 경우를 대비해보자. 권위적인 아버지는 “너는 그것을 해라!”라고 명령한다. 반면에 관용적인 아버지는 “그것을 해라, 하지만 네가 하고 싶지 않다면 하지 않아도 좋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배려는, 하지만 “너는 자발적으로 그것을 해라!”라는 보다 더 강한 요구를 숨기고 있다. 이것이 관용의 역설이며 자유주의의 역설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다고 믿지만 아무것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오늘날 지구의 종말을 상상하는 게 손쉬워진 만큼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변화는 점점 더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것이 우리시대의 패러독스이며, 우리는 유토피아를 다시 발명해내야 한다. 유토피아는 가장 긴급한 요구의 문제다”라고 지젝은 말한다. 그가 말하는 유토피아는 무엇인가?



지젝에 따르면, 유토피아는 ‘불가능한 이상적 사회’란 관념과는 어떠한 관련도 없다.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자리가 없는’ 공간의 건설이다. 왜 자리가 없는가? 기존의 사회에서는, 즉 사회적 좌표계 내에서는 자리가 할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토피아적인 제스처의 사례로 지젝이 자주 드는 것은 1917년의 레닌이다. 레닌주의의 핵심은 자유주의적 ‘선택의 자유’ 대신에 선택 자체를 선택하는 데 있다. 즉 정치적 활동(activity)이 아닌 행위(act)란 현 상황이 제시하는 강요된 선택 대신에 그러한 ‘정치적 계산’을 돌파하는 어떤 광기다. “난 인간이 아닙니다. 난 괴물입니다.”라고도 지젝은 말했다. 스스로에 대한 새로운 정의다.

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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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타 2007-09-03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럴수가. 로쟈님의 정체를 이제야 알아버렸습니다.^^;; 왠지 신문 보고 로쟈님일것이란 생각이.(글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07-09-03 21:52   좋아요 0 | URL
좀 늦으셨군요.^^

치타 2007-09-03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말입니다; 이제 한 학기 남았는데 수업 듣고 졸업하기 힘들겠네요ㅜㅡ

로쟈 2007-09-04 08:37   좋아요 0 | URL
저야 공식적으론 러시아문학만 강의하죠.^^;

marr 2007-09-04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벌꿀인줄 알고 먹고 있었는데 다시 보니 설탕섞은 물엿이었다고 말하는 건 지나친 비유겠죠? 지젝의 글은 너무 달콤해서 분간이 어려워요.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다시 정의하는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좀 고민해봐야겠네요. 문득 알튀세가 생각나는군요.

로쟈 2007-09-04 08:36   좋아요 0 | URL
물엿 맞습니다.^^ 다만 저는 벌꿀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eEe 2007-09-04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지젝이 스스로를 스탈린주의자라고 표현한 것은 어떤 맥락에서인가요?

로쟈 2007-09-04 23:42   좋아요 0 | URL
저는 그러한 '반응'까지 고려한, 그러니까 농담이기도 하고 진담이기도 한 양면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젝은 출입문 현관에 스탈린 초상화를 걸어두고 있기도 합니다.^^

eEe 2007-09-05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치있는 분이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어젯밤 등록 버튼을 누르는 순간 먹통이 되어 날아간 글을 다시 퍼온다(그나마 퍼온 글이어서 화를 참았다). 작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곧 100만부를 돌파한다는 소식이다. 100만부 이상 팔려나간 문학작품이 없는 건 아니지만 '베스트셀러'로서는 이례적인 일이라고 한다. 사실 내가 기억하는 '베스트셀러'의 개념도 온전하게 <난쏘공>에 빚지고 있다. 초등학생시절과 중학생시절에 가끔씩 TV나 잡지에서 접한 베스트셀러 순위에 언제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수위로 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게는 '동시대 현대문학'과 거의 동일시된 작품이 <난쏘공>이었다. 비록 대학 1학년에 들어와서야 나는 작품을 읽었지만. 아무려나 작가의 노고를 다시금 되새기게 되며 우리시대의 <난쏘공>에 값하는 작품은 무엇일지 생각해보게 된다.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둔다.   

한겨레(07. 09 03) '난장이가 쏘아올린 공’ 100만부 넘었다

‘난장이’가 마침내 100만번째 공을 쏘아올렸다. 조세희(67)씨의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이 100만부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1978년 6월5일 문학과지성사에서 초판이 출간된 뒤 29년여 만의 일이다. 

문학과지성사에 이어 2000년 7월부터 <난쏘공>을 내고 있는 도서출판 ‘이성과 힘’의 조중협 대표는 2일 “8월15일 227쇄로 99만9800부까지를 찍었으며 다음주 중에 100만부 기념쇄로 228쇄를 찍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조 대표는 “100만부 기념쇄에는 문학평론가 권성우 숙명여대 인문학부 교수의 표사 글을 새로 싣고 띠지를 씌워서 <난쏘공> 100만부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한다”고 말했다.

대중성에 초점을 맞춘 베스트셀러 소설들이 짧은 기간에 100만부를 넘겨 팔리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순문학 작품으로 30년에 걸쳐 100만부를 넘긴 것은 매우 드문 일. 문단에서는 한국 현대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난쏘공>은 산동네 철거민 출신으로 공장 노동자가 된 난쟁이 일가를 통해 도시빈민과 노동자 등 70년대 민중의 고통스러운 삶을 다룬 작품이다. 75년 말에 발표된 <칼날>에서부터 78년 여름에 발표된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까지 단편 열두 편으로 이루어진 이 연작은 ‘서울특별시 낙원구 행복동’과 서해안 항구도시 ‘은강’을 한국 문학의 지도 속에 확고히 편입시켰다.

민중의 삶을 핍진하게 그리면서도 세련된 문체와 독특한 형식실험을 구사한 <난쏘공>은 사회성과 예술적 완성도를 아울러 성취한 드문 사례로서 한국 현대문학의 고전으로 우뚝 자리잡았다. 80년대 대학생들의 필독서였으며, 그 뒤로도 중·고등학생들을 위한 추천도서로 자주 선정되고 있다. 96년 초에 최인훈씨의 소설 <광장>과 함께 100쇄 기념잔치의 주인공이 된 데 이어 2005년 말에는 200쇄를 넘어섰다.

<난쏘공> 초판 발간 30돌이 되는 내년 6월에 맞추어서는 <난쏘공>과 조세희씨의 문학세계를 집중 점검하는 기획 단행본 <조세희 깊이 읽기>(가제)도 나올 참이다. 권성우 교수가 편집을 맡은 이 책은 작가와의 집중대담, 작가론 및 작품론, 작가에 관한 인물 에세이 등이 실릴 예정이다.(최재봉 문학전문기자)

한겨레(07. 09. 03) "난쟁이 가족 불행, 아직 끝나지 않았다”

조세희씨의 연작소설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이 세상에 첫선을 보인 것은 1978년 6월 5일이었다. 그러나 책에 수록된 연작 열두 편의 무녀리 격인 단편 〈칼날〉이 처음 발표된 것은 75년 12월호 〈문학사상〉에서였다. 78년 여름호 〈창작과 비평〉에 연작의 마지막 편인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가 발표됨으로써 이 책-폭탄은 세상을 향해 발사될 준비를 마쳤다.

“책을 내고서 작고한 평론가 김현을 출판사 근처 다방에서 만났어요. 김현은 ‘밤새워 읽었다. 좋다. 8천부는 나갈 거다’라며 흥분하더군요.(웃음) 그게 벌써 30년 전입니다. 그랬던 김현은 일찍 죽고, 저도 여기저기 몸이 아프고…. 무언가 마무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인데, 100만부가 되었다네요.”

명민한 평론가 김현이 ‘8천부’를 장담했던 〈난쏘공〉은 그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선전에 선전을 거듭했다. 90년대 초의 어느 무렵에는 순문학으로서는 드물게 100쇄를 넘어서서, 60년에 초판이 나온 최인훈씨의 소설 〈광장〉과 함께 뒤늦은 100쇄 기념행사도 열었다(1996년). 초판 출간 30년을 앞두고 100만부를 넘어섰으니 평균으로 치자면 매년 3만부 남짓이 팔렸다는 얘기다. 신작들도 1만부를 넘기기 힘든 상황을 고려하면 놀라운 기록이다.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는 봄에, 그리고 여름방학에 특히 많이 나가더군요. 올여름에도 제법 나간 것 같아요. 초판이 나왔을 때 5단 5센티미터짜리 광고 한번 한 게 다였고 지금도 광고는 전혀 안 하고 있는데 신통한 일입니다.”

〈난쏘공〉은 광고의 도움 없이 알려지고 팔려나가는 책이다. 지난 80년대에는 대학가의 필독서로 읽혔고 지금은 중고등학교의 추천도서로 사랑받고 있다. 2002년에는 어느 문학잡지가 문학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20세기 최고의 한국 소설’로 뽑히기도 했다.

“처음 책을 낼 때는 몇 부가 팔릴 거라는 식의 예상보다는, 검열에 걸리지 않고 세상에 나가 제 몫을 다할 수 있기만을 바랐어요. 이제 30년이 지나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100쇄 기념판’ 출간 같은) 흉한 짓을 하는 이유도 지금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사회가 풍요롭고 자유로워진 것 같지만, 〈난쏘공〉을 처음 내던 때와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고 봅니다. 난장이 가족의 불행은 아직 끝나지 않은 거죠.”

〈난쏘공〉 출간 30주년이 되는 내년 6월에 맞추어 〈난쏘공〉과 조세희씨의 문학세계를 전반적으로 되짚어보는 기념 도서도 준비되고 있다. 문학평론가 권성우(숙명여대 인문학부 교수)씨가 편집을 맡은 이 책에는 시대와 문학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들어보는 집중대담, 작가론과 작품론, 그리고 작가와 가까운 이들이 쓴 인물 에세이 등이 실릴 예정이다. 권성우씨는 “조세희 선생님처럼 한 작품에 문학적 염결성과 진정성을 몽땅 쏟아 부은 작가도 흔치 않다”며 “〈난쏘공〉 30년의 발자취는 한 시대의 정치·사회적 핵심과 대결한 작가 정신의 산 증거”라고 말했다.

〈난쏘공〉과 소설집 〈시간 여행〉(1983년), 사진산문집 〈침묵의 뿌리〉(1985년) 이후 작가는 신작을 쓰는 대신 카메라를 들고 노동자와 농민 등의 집회장을 찾아다녔다. 피 흘리는 노동자·농민의 사진 등 한 시대를 증거할 그의 사진들은 정리를 기다리고 있다. 90년대 초 이후 퇴고에 퇴고를 거듭하며 붙들고 있는 장편 ‘하얀 저고리’도 마무리는 하고 싶은데 몸이 따라 주지를 않는다.

“첫머리와 결론 부분을 싹 바꾸고 싶은데, 글을 보고 있으면 어지럽고 정신이 없어서 엄두를 못 내고 있어요. 내년의 〈난쏘공〉 30주년 기념 도서에 맞추어 책으로 내고 싶은데, 그럴 수 있을지….”(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07. 09. 03.

P.S. 생각난 김에 <난쏘공>의 시나리오와 사진집 <침묵의 뿌리>를 주문했다. 최불암, 안성기, 전영선, 금보라 등이 출연했던 영화는 언젠가 TV에서 본 적이 있다(관련 DB는 http://www.kmdb.or.kr/movie/md_basic.asp?nation=K&p_dataid=03547). <침묵의 뿌리>는 당연히 절판된 줄 알았는데, 아직 남아 있다. 

영화 포스터는 상당히 후지군(전형적인 80년대 스탈). 이원세 감독의 1981년작이다. 아래는 몇 개의 스틸사진이다. 덧붙여 새로 제작된다는 영화 관련기사도 옮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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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06. 01. 17) '난쏘공’ 스크린서 ‘거인’ 된다

조세희 작가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을 원작으로 한 영화 <거인>이 제작된다. <웰컴 투 동막골> <박수칠 때 떠나라> 등을 제작했던 영화사 ‘필름있수다’(대표 장진)는 “지난 6일 조세희 작가와 원작 사용에 관한 계약을 체결했으며, 신인 김중 감독이 시나리오와 연출을 맡는다”고 16일 밝혔다.

<난쏘공>은 지난 1981년에도 <전우가 남긴 한마디>를 연출했던 이원세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 적이 있다. 하지만 <거인>은 <난쏘공>의 12작품 가운데 하나인 ‘칼날’과 신애네 등 <난쏘공>의 등장인물에서 모티프를 가져와 김중 감독이 현대적으로 새롭게 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영화화될 예정이어서, 원작이나 1981년작과는 크게 달라진 내용을 담게 될 예정이다.

<거인>의 이은하 프로듀서는 “원작을 그대로 영화화 하거나 원작의 시대적 배경인 1970년대를 그대로 반추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난쏘공>이라는 뛰어난 작품의 환경과 인물을 빌려 이 시대 가장 낮은 곳에 살고 있는 소시민 가족들의 정신적인 소통과 애정, 사랑을 다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제작자인 장진 대표는 “가능성 있는 감독이 진정성 있는 작품을 영화화 한다는 점에 매력을 느껴 제작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필름있수다 쪽은 원작의 작품성과 완성도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계약 체결 전 조세희 작가에게 시나리오 초고를 보여줬으며, 조 작가도 직접적으로 시나리오 수정 과정에 관여하지는 않지만 <난쏘공> 집필의 이유와 배경 등에 대해 제작진에게 도움을 줄 예정이다.

<거인>은 드라마와 멜로와 판타지적인 요소가 두루가미된 독특한 작품으로, 비주얼 등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순제작비만 최소 20~25억이 투입된다. 연출을 맡은 김중 감독은 서던캘리포니아대학(USC) 영화학과를 졸업하고 아메리칸영화연구소(AFI)에서 프로덕션 디자인을 공부했으며, <웰컴 투 동막골>의 비주얼 수퍼바이저를 담당하기도 했다. <거인>에는 김중 감독 외에도 <복수는 나의 것>과 <말아톤>, <웰컴 투 동막골> 등 작품성을 인정받은 작품에 참여했던 스테프들이 대거 참여한다. 필름있수다 쪽은 클랭크 인 시기를 7~8월께로 잡고 있으며, 이르면 내년 봄께 개봉할 예정이다.

한편, 조세희 작가의 원작 소설 <난쏘공>은 1975년 <문학사상> 12월호에 실린 <칼날>을 비롯해 여러 잡지에 발표된 중·단편 소설 12편을 묶어 1978년 문학과지성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도시화의 광풍 속에서 벼랑 끝에 몰린 하층민들의 삶을 자유로운 형식에 담아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지난해 연말에는 200쇄를 돌파해 한국 문학계에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전정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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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9-03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로쟈님도 날리셨군요. -_- 어제 여기저기 오류가 났나봅니다. 이런 말들이 좀 들리던데. 날려먹었다고.

로쟈 2007-09-03 19:40   좋아요 0 | URL
네, 바로바로 등록을 안 하면 꼭 한번씩 당하는군요.--;

twinpix 2007-09-03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한 기록들이네요. 올해 난쏘공을 늦게나마 읽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올해 가장 인상깊은 책이었고요.^^

로쟈 2007-09-03 19:41   좋아요 0 | URL
작가들의 평생 100만부짜리 한권씩만 쓰면 작가나 독자나 모두 편할 텐데요.^^;
 

이번주에 눈에 띄는 신간은 특이하게도 모두 경제학책들이다. <부의 기원>에 이어서 리처드 세일러의 <승자의 저주>(이음, 2007)가 많은 신간들 가운데 유독 눈길을 끌었으니 말이다. 당연 관련기사들을 스크랩해놓는다.  

문화일보(07. 08. 31) 경제학으로도 못푸는 ‘이상한 경제’

<문제1> 석유가 매장돼있을지도 모르는 좋은 땅이 나왔다. 처음에는 3개 회사가 입찰을 했다. 100억원 정도에 입찰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7개 회사가 더 참여해 모두 10개 업체가 경매에 참여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애초에 생각했던 금액보다 입찰가를 올려야 할까, 내려야 할까.

<문제2> A에게 1만원을 준 뒤 B와 나눠 갖도록 배분 몫을 정하게 한다. 일단 A가 배분몫, 즉 B에게 나눠줄 금액을 제시하면 B는 제안금액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수 있다. 그런데 B가 거절하면 둘 다 한푼도 갖지 못한다. 이때 A는 얼마를 제시해야 하는가.

<문제3> 주식시장에서 매년 초, 매달 초, 공휴일 직전에는 수익률이 높게, 매주 월요일에는 수익률이 낮게 나타난다. 그렇다면 모두가 1월에 주식을 팔고, 월요일에 주식을 산다면 1월의 수익률은 점점 떨어지고 월요일 수익률은 높아져야 하지만 1월의 수익률이 높고 월요일 수익률이 낮은 현상은 계속되고 있다. 왜 그럴까?


먼저 문제1의 답. 더 낮게 적는다. ‘승자의 저주’를 피하기 위해서다. 만일 있을지도 모르는 석유 매장량 예상치는 입찰자들의 예상치 평균과 일치한다고 가정했을 때 이 경매의 승자는 매장량을 가장 낙관적으로 예측한 사람이다. 그는 매장량을 과대평가했기 때문에 실제가치보다 더 높은 가격을 적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그는 경매에서 이기고도 적자를 보게 된다. 이것이 그 무섭다는 ‘승자의 저주(The winner’s curse)’다. 여기서 ‘승자의 저주’는 ‘승자가 내리는 저주’가 아니라 ‘승자에게 내려지는 저주’다. 오해의 여지가 있지만 이 용어는 이미 국내 학계에서 ‘승자의 저주’로 굳어져 버렸다. 비슷한 말로 ‘피로스의 승리’라는 말이 있다. 고대 그리스의 명장 피로스는 로마와 싸워 승리를 거뒀지만 자신도 적지 않은 손해를 봤다. 작은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종합적인 ‘전쟁’에서는 진 것이다. 지느니만 못한 승리를 ‘피로스의 승리’라고 부른다.

문제2는 최후통첩게임이다. 이론대로라면 배분자는 0에 가까운 금액을 제안해야 하고, 수령자는 조금이라도 +의 값을 갖는 금액이 제안된다면 무조건 받아야 한다. 그러나 실험결과 보통 가장 많은 배분몫은 50%였다. 배분자들은 제안을 거부할 위험이 없는 때 조차도 50대50을 선택하는 ‘무른’경향을 보인 반면, 수령자들은 “고작 그것만 줄 바에는, 그냥 그것 갖고 뒈져버려라(Take your offer of epsilon and shot it!)”고 외치는 ‘단호’한 경향을 보인다.

문제3은 주식시장에서 유명한 캘린더 효과다. 효율적 시장가설에 따르면 주식가격은 랜덤워크(random walk·불규칙보행)를 따라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캘린더 효과는 최소 90년 넘게 계속되고 있으며 또 그 사실이 최소한 50년 넘게 잊어져 왔다. 이와 관련, 시장으로의 자금 유입과 유출에 영향을 주는 관습적 요인, 펀드매니저들이 계절에 맞춰 남들이 보기 민망한 보유분을 제거하는 분식회계, 나쁜 뉴스를 금요일 장이 마감될 때 기다려 발표하는 타이밍 등의 설명이 제기되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없다. 실증이 이론을 앞서고 있다는 학설이 있지만 저자는 아직 이론으로 넘어오지 않았다며 경제학자들이 풀어야 할 숙제라고 설명했다.

이 책은 이밖에 ▲무임승차가 가능한 상황에서의 협조적 현상 ▲똑같은 일을 하면서 어느 산업에 종사하느냐에 따라 임금수준이 달라지는 현상 ▲선호역전 ▲시점간 선택 ▲소득과 소비의 상관관계 ▲폐쇄형 뮤추얼펀드의 할인 거래 등 합리성과 이기성의 가정으로 구축된 경제학으로서는 잘 이해되지 않는 13개의 경제학 역설과 이상현상들을 다양한 실험과 분석을 통해 재미있게 설명한다. 시장은 효율성의 굴레에만 갇혀 있지 않으며, 인간은 언제나 합리적이고 이기적으로만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통쾌하게 증명한다.(김승현기자)

매일경제(07. 09. 01) 승자가 스스로 재앙을 부르다니 경제는 정말 이론대로 안되는군

복잡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경제학의 기초는 의외로 간단하다.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가능한 많은 것을 얻고자 하며, 아주 영리해서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 방법을 알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한다는 가정, 즉 `이기성`과 `합리성`이라는 두 가지 가정만으로 모든 경제 현상을 분석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 영역에서는 경제학의 이론적 틀로는 해명되지 않는 역설과 이상현상이 비일비재하다. 이 책은 이러한 경제의 이상현상 13가지를 다루고 있다. 이상현상 중 대표적인 것은 책 제목이기도 한 `승자의 저주(Winner`s curse)`다. `승자의 저주`는 경매시장에서 사람들이 승자가 되기 위해 너무 높은 가격을 부른 나머지 실제로는 손해를 본다는 말.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 보자. 많은 석유회사가 어떤 지역에서 원유 시추권을 획득하려 경쟁하고 있다. 이 시추권의 실제 가치(원유 매장량)는 경매에 참여한 모든 기업에 동일하다. 하지만 각 기업이 예상하는 가치는 서로 다르다. 어떤 기업은 원유 매장량을 실제 매장량보다 적게 평가할 것이고, 어떤 기업은 그 반대일 것이다. 경매에 참가하는 석유회사들은 각기 전문가를 고용해 매장량을 예측하는 만큼 이들이 제시하는 추정치의 평균은 실제 매장량과 일치한다고 하자.

경매에서 어떤 기업이 승리하게 될까. 당연히 가장 높은 가격을 적어 낸 기업이다. 가장 높은 가격을 적어 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원유 매장량을 과대평가했다는 말이다. 이 경우 경매에서는 이기지만 금전적으로는 손해를 보게 된다.

현실에서 `승자의 저주`는 매우 자주 발생한다. 프로야구 FA(free agentㆍ자유계약선수) 계약에서부터 출판권 경매, 기업 인수ㆍ합병(M&A), 주파수 경매 등 사례가 무궁무진하다. 실험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 보스턴대학에서 MBA 학생들을 대상으로 8달러어치의 동전이 담긴 동전 단지를 경매에 붙였는데 총 48번의 실험에서 승자들은 평균 10.01달러를 적어 냈다. 2.01달러만큼을 손해 본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합리성의 가정에 위배된다. 경매 참가자들이 계속 체계적인 실수를 한다는 것인데, 합리성의 가정은 사람들이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가 비합리적인 행동을 할 수도 있지만, 다른 편의 비합리적인 행동 때문에 효과가 상쇄돼 전체적으로는 합리성이 유지된다는 게 경제학자들의 논리다.

이상현상의 사례는 `승자의 저주` 외에도 많다. 경마장을 떠올려 보자. 경마시장이 효율적이라면 어떤 말에 돈을 걸더라도 건 돈에 대한 기대수익의 크기는 같아야 한다. 합리적인 경제 주체는 기대수익이 큰 쪽을 선택하게 마련인데, 어느 한쪽이 높다면 사람이 몰려 기대수익이 낮아지고 종국에는 다른 나머지와 같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실증분석에 의하면 우승확률이 높은 말에 돈을 걸면 다른 말에 비해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이 승률은 낮지만 일단 우승하면 대박을 터뜨리는 말에 몰리기 때문이다. 이른바 `한탕주의`인데, 이는 경제이론과는 배치되는 행동이다. 또 사람들은 이길 확률이 높은 대신 상금이 낮은 도박과 이길 확률은 낮지만 상금이 큰 도박 중에서 선택을 하라고 하면 대부분 전자를 택한다. 하지만 두 권리에 대해 가격을 책정하라고 하면 대부분 후자에 더 높은 가격을 매긴다. 명백한 선호체계의 모순이다.

주식시장은 어떤가. 주식시장에는 `캘린더 효과`라고 불리는 현상이 있다. 매년 초, 매월 초, 공휴일 직전에는 수익률이 높고 매주 월요일에는 수익률이 낮은 것을 일컫는 말이다. 이러한 현상 역시 경제이론과는 어긋난다. 1월의 수익률이 높다면 12월에 주식을 사 1월에 팔면서 이득을 올릴 수 있을 테고,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1월의 수익률은 점점 떨어져야 정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책은 이처럼 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사람들이 비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사례와 실험연구를 통해 보여준다.(노현 기자)

07. 09. 02.

P.S. <승자의 저주>는 '경제현상의 패러독스와 행동경제학'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덕분에 떠올린 책이 도모노 노리오의 <행동경제학>(지형, 2007)이다. 이건 구입해놓은 책이기도 한데, 그러고 보면 경제학에 대한 나의 관심은 '복잡계 경제학'과 '행동경제학' 쪽으로 정향돼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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瑚璉 2007-09-02 16:14   좋아요 0 | URL
참고로 말씀드리면 승자의 저주는 게임이론에서도 나오더군요.

로쟈 2007-09-02 21:14   좋아요 0 | URL
그렇더군요. 저도 검색하다가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