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에 잠시 들렀다가 '노 땡큐' 연재를 몇 개 읽어봤다. 그러고 보니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연재가 없어지고 들어선 게 이 연재인 모양이다(그냥 내 추측이 그렇다). 김규항의 글이 격주로 연재되고 있기에 그런 인상을 갖게 하는지도 모르겠다(*하지만, 착각이다.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는 씨네21의 꼭지이니). 몇 달 전 칼럼이긴 한데, '공부의 내력'(http://h21.hani.co.kr/section-021031000/2007/06/021031000200706070663010.html)을 옮겨놓는다(장정일의 <공부>도 떠올리게 해주는군).

안 그래도 초등학교 1학년인 아이에게 논술을 가르쳐야 하느냐로 잠시 옥신각신 하던 차였다. 아이까지도 '논술 강사'도 했다는 아빠가 봐주지 않는다고 서운해하는 눈치였다. 이럴 땐 머리가 더 커야 논술도 하는 거야, 란 내 원칙이 '고집'으로 전락하고 만다(나는 그저 아이가 더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면 하지만, 같이 놀아주지도 못하면서 그러란 소리를 입밖에 꺼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래도 '어린이 교육'은 내 적성이 아닌 듯하다.

김규항의 칼럼에는 예의 김건/김단과의 에피소드가 등장하는데, 말미에는 (그가 늘 자부심을 토로해온) 80년 세대의 자성을 적고 있어서 이채롭다. "지금 아이들의 부모, 즉 우리는 청년 시절에 공부란 ‘무작정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던 사람들이다. 우리는 아무도 허락하지 않는 ‘진짜 공부’를 하기 위해 몰래 동아리를 지어 인문과학과 사회과학 책들을 파고들었다. 우리는 그 공부를 통해 처음으로 벅찬 지적 희열을 느꼈다. 그 공부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이란 나르시시즘은 여전하지만...  

한겨레21(07. 06. 07) 공부의 내력

밥상에서 김건이 말했다. “빨리 5학년이 되면 좋겠어.” “왜?” “역사 공부 하니까.” “재미있을 것 같아?” “응. 왕건이나 대조영 같은 거 너무 재미있어.” “그래, 역사는 재미있는 거야. 그런데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는 생각보다 재미없을 거야.” “왜?” “그건 말이야..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는 역사가 아니거든.” “역사가 아니라니?” 김건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본다. “역사가 뭐지?” “응, 옛날에 있었던 사건이나 전쟁 같은 거 아냐?” “큰 사건이나 전쟁만 역사는 아니야. 우리 집에도 역사가 있고 건이에게도 역사가 있지. 여기 부러졌던 일 기억하지?” “당연하지.”

무조건 열심히…

녀석은 세 살 때 어느 날 미끄럼틀에서 놀다 다리가 부러졌다. 아이가 자라면서 어디 한 번 부러지는 거야 그리 큰일은 아니지만 그게 사건이 된 건 그러고 울지도 않고 잠이 들었다는 것이다. 잠이 깨서 나오는 아이가 한쪽 다리를 짚지 못해 병원에 가보니 골절이라고 했다. 깁스를 하는 의사가 웃을 만큼 어이없는 사건이었다. 그 사건은 김건의 어린 시절을 상징하는 작은 역사가 되었다.

“그게 몇 년 몇 월 며칠이었지?” “몰라.” “그럼 깁스한 병원은?” “몰라.” “의사 이름은?” “몰라, 아빤 기억해?” “아빠도 기억이 안 나.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날짜, 병원 이름, 의사 이름만 알아내선 그 사건에 대해 건이보다 더 잘 안다고 말한다면 어때?” “바보 같지.” “학교에선 그런 걸 역사라고 배워.” “정말?” “누나한테 물어봐.” “누나!” 김건은 제 누나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나는 그의 누나가 5학년 첫 시험을 준비하면서 역사 때문에 힘들어하던 걸 떠올렸다. 부여의 첫 도읍지는 어디였는지, 두 번째 도읍지는 어디였는지 따위를 외우면서 말이다.(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동양의 전통적인 공부법은 ‘무작정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었다. 동양의 공부란 사람이 되기 위해 꼭 알아야 할 지식과 깨우침이 담겼다고 사회적으로 합의된 몇 권의 고전을 거듭 공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서양의 공부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라면 동양의 공부는 지적 통찰을 체득하는 정신 수련이었다. 사방이 책으로 빼곡한 서양 학자의 서재와는 달리 동양의 학자 공부방에는 몇 권의 책만 있었다.

서양식 공부가 도입되고 아이들이 배우는 건 ‘사회적으로 합의된 몇 권의 고전’이 아니게 되고도 한참 동안 부모들은 동양식 공부법에 젖어 있었다. 부모들은 아이가 ‘무작정 열심히’ 공부하길 기대했고 요구했다. 대략 지금 아이들의 할아버지 세대까지 그랬다. 그러나 지금 아이들의 부모, 즉 우리는 청년 시절에 공부란 ‘무작정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던 사람들이다. 우리는 아무도 허락하지 않는 ‘진짜 공부’를 하기 위해 몰래 동아리를 지어 인문과학과 사회과학 책들을 파고들었다. 우리는 그 공부를 통해 처음으로 벅찬 지적 희열을 느꼈다. 그 공부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우리는 어떤 공부를 강요하는가

그런 우리는 지금 아이들이 어떻게 공부하게 하는가? 우리는 오히려 공부에 대한 깨우침이 없었던 우리 부모들보다 더 한심하고 무지스럽게 아이들에게 역사 아닌 역사, 국어 아닌 국어, 수학 아닌 수학을 강요한다. 우리는 한술 더 떠 우리에게 난생처음으로 벅찬 지적 희열을 주었던 인문 사회과학 책들을 모조리 다이제스트판으로 달달 외우게 한다. ‘논술 필수 고전’이라 불리는 그 명단엔 심지어 <공산당선언>까지 들어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아이들이 진짜 공부를 하지 못하도록 20여 년을 달달 볶는 동시에 그들이 입시에서 빠져나와 처음으로 지적 희열을 느끼기 위해 보존되어야 할 지적 감수성의 부위들마저 하나하나 불로 지져 영원한 지적 불감아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게 이른바 부모가 된 우리가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매일같이 반복하는 교육적 실천이다. 그렇게 하루의 실천을 마친 우리는 인사동이나 신촌의 지적인 카페에 둘러앉아 지적인 얼굴로 “요즘 애들은 책을 안 읽어” “인문학의 위기는 인류의 위기야” 떠들어댄다. 아, 우리는 대체 어떻게 된 인간들인가?

07. 09. 18.

P.S. 공부가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인생은 바꾼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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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9-18 22:42   좋아요 0 | URL
글 봐달라는 아이와 싫다는 아빠가의 모습이 떠오르는군요. 얼마전 봤던 로쟈님의 사진과 아이의 사진을 떠올리며. :)

로쟈 2007-09-18 22:48   좋아요 0 | URL
글을 안 봐주는 건 아니고요.^^; 글쓰는 걸 도와주란 요구입니다...

2007-09-18 2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9-18 22:49   좋아요 0 | URL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고 구박을 받습니다.^^;

책읽는나무 2007-09-18 23:51   좋아요 0 | URL
아이가 정말로 공부란 것에 스스로 재미를 느껴 행했음 하는 욕구는 강하지만 그게 또 마음같이 느긋해지지가 않으니 가끔은 학습지를 풀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면 정말로 정말로 미안해질때가 많습니다.더욱더 반성하게 만드는 페이퍼로군요..ㅡ.ㅡ;;

로쟈 2007-09-19 19:09   좋아요 0 | URL
원론적으론 인구 과밀 때문에 빚어지는 일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자꾸 내모는 것이...

코스모폴리스 2007-09-19 08:44   좋아요 0 | URL
김규항의 글 가운데 동양의 공부법과 서양의 공부법에 대한 설명은 동의하기 어렵군요.

로쟈 2007-09-19 19:09   좋아요 0 | URL
단순화는 '논객'의 특징이죠...

biosculp 2007-09-19 11:32   좋아요 0 | URL
짧은 글에 대해 토다는 것은 뭐하지만 공부라는것이 주되게 책과 연관되어 있군요.
냇가에 가서 물고기 잡고, 여러 벌레들 잡고 애기하고 분류한다든지, 산에가 열매나 씨가 맺는 꽃과 나무에서 씨를 모은다든지,반쪽이 빠진. 뭔가 허전한 공부에 대한 생각이아닌가 합니다.

로쟈 2007-09-19 19:11   좋아요 0 | URL
공부의 제한된 용례는 칼럼에 국한된 건 아닌데요. 학과시간에 냇가에 가서 물고기 잡는 학교에 전국에 몇 될라구요...

2007-09-19 2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20 14: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LAYLA 2007-09-19 23:36   좋아요 0 | URL
김단양 사진 첨 보는데 딱 그 캐릭터 같습니다. 이쁘네요 ^^

로쟈 2007-09-20 01:10   좋아요 0 | URL
눈매가 닮은 거 같습니다...

lyh1999 2007-09-20 04:56   좋아요 0 | URL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는 씨네21에 들어가는 칼럼 제목인데요...^^

로쟈 2007-09-20 07:53   좋아요 0 | URL
그렇네요.^^;

노자읽기 2007-09-20 12:46   좋아요 0 | URL
'지식'이란, 어쩌면 살아움직이는 사실들을 정리해 말린, 표본이나, 박제와 같다고도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을 습득하게 된다면, 결국 우리도 박제가 되겠지요.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은 박제가 되는 일일 지 모르겠습니다...

로쟈 2007-09-20 14:21   좋아요 0 | URL
그런 문제제기도 가능하겠습니다. 하지만, 제 기본적인 입장은 '박제'라도 그게 어디냐는 것이죠. '살아움직이는 사실들' 곧 '생'은 그 자체로 자재하고 자족적인 것이서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을 테니까요...
 

<삼국지>를 빼면 몇 권 빼고 다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필요 때문에 다시금 손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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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열의 수난- 장정일 문학의 변주
문광훈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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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 사봐야겠다.
장정일의 독서일기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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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공부- 장정일의 인문학 부활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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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읽을 책.
생각- 장정일 단상
장정일 지음 / 행복한책읽기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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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도서관에서 빌려봐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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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좀 특이한 영화관련서들이 눈에 뜬다. 당장 읽을 여력은 없어서 대신 적절한 리뷰들을 찾아 옮겨놓는다. 로버트 그레그의 <영화 속의 국제정치>(한울아카데미, 2007)와 리처트 포튼의 <영화, 아나키스트의 상상력>(이후, 2007)이 그 책들이다(포튼의 책은 지난주에 서점에서 봤다). 리뷰들은 소략하지만 그나마 이 책들을 다룬 지면 자체가 아주 드물다.

동아일보(07. 09. 15) 숨겨진 ‘국제질서’ 읽기…‘영화 속의 국제정치’

아프리카 어느 마을. 하늘을 날던 비행기 조종사가 뭔가를 ‘툭’ 버렸다. 마침 지나가던 원주민이 주워 든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빈 콜라병을 들고 난감해하던 표정. 1980년대 인기를 끌었던 영화 ‘부시맨’의 시작이다. 가볍게 즐겼던 코미디 영화였으나 저자는 고개를 젓는다. ‘한없이 무거운’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의 책 ‘문명의 충돌’을 거론한다. “헌팅턴은 국제정치의 근본적인 분쟁이 국가와 집단의 여러 다른 문명으로 인해 벌어짐을 지적했다. 서구 문명과 전통적인 토착문화의 조우. 영화 부시맨은 이런 국제관계를 살피는 좋은 텍스트가 된다.”

이 책의 목적은 자명하다. 제목(원제 역시 ‘International Relations on Film’)에 그대로 드러난다. 영화를 통해 국제정치를 배우자. 미국에서 정치외교를 가르치는 교수답게 청강생들의 이해를 도우려 영화를 교재로 사용하는 셈이다.

논의점은 다양하다. 해리슨 포드가 출연했던 ‘레이더스’를 통해 제3세계를 바라보는 제국주의 시선을 다룬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는 국제정치의 의사결정 과정이란 논의를 끌어내는 훌륭한 마중물이다. 윤리와 국제법을 다룰 땐 영화 ‘7월 4일생’과 ‘살바도르’를 언급한다.

묵직한 두께에 빡빡한 활자. 주제마저 무겁다. 그런데 책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오히려 술술 읽힌다. 저자의 의도대로 교재가 ‘영화’인 덕분이다. 어려운 국제정치용어들이 익숙한 영화 화면을 타고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온다.

아쉬운 점도 있다. 영화가 대부분 할리우드산(産)이다. 익숙하지 않은 영화를 거론할 땐 이해도도 떨어진다. 왜곡이 가능한 영화 자체만으론 국제정치를 설명할 수 없음은 저자 역시 동의하는 부분. 배운 건 많은데 뒤끝이 가려운 수업을 들은 기분. 강의평가서에 ‘A+’라고 쓰기가 살짝 망설여지는 이유다.(정양환 기자)

디지털타임즈(07. 09. 06) 영화속 아나키스트에 대한 오해와 편견

아나키스트'(Anarchist)라는 단어에는 왠지 부정적인 이미지가 짙다. 아나키스트하면 시위와 테러 같은 불법 행위가 연상된다. 왜 그럴까. 아나키스트는 사전에 `국가와 사회의 권력을 부정하고 개인의 완전한 자유가 보장될 수 있는 사회 실현을 주장하는 사람'으로 정의된다.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는 이유가 아나키스트의 부정적 이미지를 키운 것일까.

한국영화 시장이 르네상스를 맞으면서 셀 수 없는 영화관련 책이 쏟아져 나왔지만, 아나키스트의 눈으로 영화를 바라본 책은 없었다. 아나키스트들에 대해 소개하는 몇몇의 책들은 있었지만, 이 책들 역시 아나키스트들이 문화 속에서 어떻게 소비되는 지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영화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나키스트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가지게 된 원인을 영화 속에서 찾고 있다. 주류 영화들이 다루는 아나키스트는 폭력과 테러, 범법자들의 전형이었다. 심지어 옷 입는 모양새와 콧수염 기른 모습까지 정형화시키기도 했다.

저자는 영화 속에서 아나키스트들이 그렇게 묘사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정치 철학적으로 추적해 밝혀낸다. 또 아나키즘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아나코 페미니즘' `아나코 생디칼리즘' `아나키스트 교육학' 등에 대한 이론까지 명쾌하게 밝혀놓고 있다.

특히 국내 출판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아나키스트 인물 설명을 부록으로 붙여 둔 것은 국내 독자들에게 좋은 참고 자료가 된다. 또 아나키스트와 관련된 시시콜콜한 자료까지 잘 갈무리해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예를 들어 19세말과 20세기 초 미국에서 무정부주의자로 활동한 엠마 골드만(Emma Goldman)의 자료관을 통해 공개되지 않은 서신을 소개하고, 영화감독들에게 전화나 e메일로 확인한 내용들까지 소개하고 있다. 아나키스트 단체들의 유인물 내용과 아나키스트들이 등장하는 유럽과 미국의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도 총망라하고 있다.(김응열기자)

07. 09. 17.

P.S. 두 권의 두툼한 책들 대신에 내가 어제 주문한 책은 저명한 페미니스트 영화이론가 로라 멀비의 얇은 최신작 <1초에 24번의 죽음>(현실문화연구, 2007)이다. 멀비의 책으론 <시민 케인>(동문선, 2004)이 먼저 소개된 바 있지만 왠지 이 책부터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995년 탄생 100주년을 맞은 영화의 본질적 측면을 탐구한 영화이론서이자, 대중을 위해 쉽게 쓴 영화에세이"라고 하니까 부담 없이 읽을 수 있겠다. 멀비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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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개봉되는 러시아영화 소식을 빠뜨릴 수 없어서 옮겨놓는다. 지난 2005년 러시아 최고 흥행작 <제9중대>가 문제의 영화이다. 아마도 창고에서 자고 있다가 지난번 아프간 인질사태 때문에 배급업자들의 관심을 끌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블록버스터이긴 하나 기본 수준 이상의 작품성을 갖춘 영화로 평가되고 있으므로 한번쯤 관람해보시는 것도 좋겠다(사실 그래야 더 많은 러시아 영화가 소개될 수 있다는 현실적인 고려를 무시할 수 없기도 하고).

세계일보(07. 09. 15) ''명분없는 전쟁''의 허구 고발… 제9중대

13일 개봉한 ‘제9중대’는 인생의 농익은 즐거움과 성숙의 단계를 맛보지 못한 채 아프가니스탄의 바위산 중턱에서 죽어간 옛 소련의 젊은이들이 최후까지 함께했던 전장의 표정을 건조하리만치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서도 전쟁으로 말미암아 파괴되는 인간들의 모습을 사실감 넘치게 그려내고 있다. 영화는 꿈에 대한 열정과 사랑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있는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이들이 피의 전장을 뒹굴어야 하는 이유는 국가의 명분 없는 전쟁 때문이라고 고발한다.

그동안 우리의 ‘눈맛’을 길들여온 할리우드의 전쟁영화들과는 느낌이 다르다. 익숙한 미군 병사 대신 다소 낯선 생김새의 소련군인들이 주인공이다. 총과 군복이 다르고 육중한 헬기의 모습도 영화 속에서 흔히 보아오던 것과 상이하다.

할리우드 전쟁영화 공식과는 달리 하나의 영웅 또는 특정 주인공을 내세우지 않고 훈련소에서부터 전장까지 전 부대원들이 겪는 에피소드에 초점을 맞춘다. 삶과 죽음의 선을 아슬아슬하게 밟고 있는 극단의 상황, 그곳에서 꽃피운 전우애, 그리고 희생을 강요받은 작은 개인들의 비운을 영화는 씁쓸히 낭독하고 있다.

영화의 배경은 옛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9년째인 1988년. 징집에 응한 청년들이 하나둘씩 기차역에 모여든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어느 겨울밤 화가를 꿈꾸는 예술가, 선생님이 되고자 하는 교생실습생, 결혼식을 치른 지 하루 만에 소집되어 온 새신랑, 어린 딸을 둔 가장은 각각 사랑하는 가족과 이별하고 훈련소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전쟁은 이들의 꿈과 희망을 모조리 앗아간다. 지독한 훈련을 거치는 동안 순수한 교사 지망생의 몸은 어느새 살인병기로 바뀌어 간다. 예술가의 손은 이제 붓보다 총이 익숙해졌고, 현실주의자 류타예프는 생존 방법을 부지런히 체득해 나간다.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을 것 같았던 9중대 대원들은 마침내 서로를 이해하고, 모두가 한몸처럼 아끼는 게 살아남는 법이란 걸 깨닫게 된다. 그러나 9중대의 가장 큰 비극은 주둔지가 본 부대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 그래서 전쟁이 끝나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지 못하고, 고지를 사수하다 무자헤딘의 12차례에 걸친 전면 공격에 전멸해간다.

온통 붉은 빛이 감도는 아프가니스탄의 바위산이 이국적이며 바위에 뚫린 구멍 등 지형지물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무자헤딘의 전술이 인상적이다. 영화엔 잔인하고 치열한 전투 장면은 없지만, 명분 없는 전쟁의 허구와 반전의 당위성이 잘 녹아들어 있다. 감독은 후반부로 갈수록 긴장감을 한층 고조시키며 극을 끌어가는 재주를 부린다. 제작비 83억원이 들어간 러시아 블록버스터. ‘전쟁과 평화’의 감독 세르게이 본다르추크의 아들인 표도르 감독의 데뷔작이다.(김신성 기자)

07. 09. 17.

P.S. 감독 표도르 본다르추크는 말미에 언급된 대로 세르게이 본다르추크(1920-1994)의 아들인데, 1967년생이니까 러시아판 대작 <전쟁과 평화>를 한창 찍을 때 태어난 셈이다(세르게이는 주인공 피에르 베주호프 역을 맡기도 했다). 표도르는 이제 보니 러시아 TV에서 자주 보던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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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7-09-17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에서는 사실 반전영화라기보다는 '애국주의' 영화로 수용된 감이 있는데 여하튼 편식은 좋은 게 아닌지라 러시아 영화들도 많이 보셨으면 좋겠네요...
 

테리 이글턴의 <성스러운 테러>(생각의나무, 2007)의 한 대목 읽기이다. 내가 유익하게 읽은 책들은 모두 한 다스 이상의 이런 '읽기'를 허용하지만 모두 다룰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기에 간혹 이런 식의 '견본'으로 입막음을 하는 수밖에 없다(매번 그냥 지나치게 되면 또 우울증에 발목이 잡히게 된다). 그것도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빨리 해치워야겠다. 제3장 '공포와 자유'의 한 대목인데, 당통의 죽음에서부터 시작해보자.

 

 

 

 

"게오르크 뷔히너는 자신의 극 <당통의 죽음>에서 '영원히 파악할 수 없는 미지수 X를 규명하기 위해 우리 인육(人肉)의 수학자들은 앞으로 얼마나 더 피 흐르는 사람들의 팔다리로 방정식을 써 나가야 할 것인가?'라고 당통의 입을 통해 묻고 있다. 이 섬뜩한 이미지 속에서 자코뱅주의자 및 국가 테러리스트들은 육신의 물질성을 경멸하는 사나운 추상성에 사로잡혀 자유, 정의, 진리, 민주주의 따위의 허상을 좇고 있는 인물들로 그려진다."(134쪽)

물론 여기서 자유(Liberty), 정의(Justice), 진리(Truth), 민주(Democracy) 등은 모두 대문자이다. 이글턴이 1장에서 이미 주장한 바에 따르면 "고대의 것으로 간주되곤 하는 많은 다른 현상들처럼 테러리즘 혹은 공포정치 역시 사실상 근대의 발명품이다. 정치사상으로서의 테러리즘은 프랑스혁명과 함께 처음 나타났는데, 그런 점에서 테러리즘과 근대 민주주의 국가는 한 배에서 태어난 일종의 쌍생아라고 할 수 있다."(11쪽) 즉 "당통과로베스피에르 시대에 테러리즘은 국가 주도의 공포정치 형태로 처음 등장한다. 그것은 얼굴 없는 적이 국가주권에 가한 위협이 아니라 국가가 자신의 적을 향해 행사하는 공적 폭력이었던 것이다." 이들의 혁명의 대수학은 어떤 것이었나?

"세계의 물질성을 분할하고 나누어 다시 재배열함으로써 고상학 대수적 공식을 만들어내는 그들은, 자신이 제시한 공식의 답이 신체 없는 추상의 형식이기를 기대한다. 인류를 구원한다는 명목 아래 그들은 언제든지 신체를 공격해 그 안에 숨어 있는 유령적 이념들 손에 넣은 준비가 되어 있다."

이것은 물론 18세기 자코뱅주의자들에게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비슷한 환상에 사로잡힌 몇몇 서구 국가들에서도 똑같은 기획을 발견한다. 그들은 축복받지 못한 나라의 국민을 구하기 위해 우선 그들을 공격해 죽인 후 그들의 심장에 새겨진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찾기 위해 시체의 배를 가르고 있기 때문이다."(134쪽) 민주주의를 위한 이라크 전쟁이 바로 그 비근한 사례 아닌가.

덧붙여서,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나 미국 몬태나 주의 산악지대를 배회하는 테러리즘 역시 폭력과 도덕적 이상주의 결합이 낳은 산물이며, 그런 점에서는 테러리스트들 역시 그들이 저항하고자 하는 서구적 경향의 괴물적 패러디에 다름 아니다."(135쪽)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다음에 '시장(marketplaces)'이 빠졌는데, 이 지역을 배회하는 테러리즘은 하마스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 몬태나주의 산악지대를 배회하는 테러리즘은 1995년 오클라호마 연방청사 폭탄테러사건으로 악명을 떨친 (미시간)민병대이다. 이 두 경우에도 공통적인 것은 '폭력'과 '도덕적 이상주의'의 결합이며, "그런 점에서는 테러리스트들 역시 그들이 저항하고자 하는 서구적 경향의 괴물적 패러디에 다름 아니다."

이 마지막 문장은 "In this sense, it is a monstrous parody of the form of life it opposes."(76쪽)를 옮긴 것인데, 주어 'it'을 어떤 점에서 '테러리스트들'로 볼 수 있는지 모르겠다. 'the form of life'를 '서구적 경향'으로 옮긴 것도 역자의 과도한 개입이 아닌가 싶다. 짐작에 단수 'it'으로 받을 수 있는 건 도덕적 이상주의(moral idealism)이어야 할 듯하다. 그렇게 본다면, "도덕적 이상주의는 그것이 반대하는 삶의 방식에 대한 괴물스런 패러디이다." 도덕적 이상주의가 본시 반대하는 것이 바로 폭력(테러)이 아니겠는가. 

이어지는 건 이와 유사한 자본주의 자체의 이중성에 관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이상주의와 회의주의, 천사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의 기이한 결합이다." 회의주의라고 옮겨진 건 'cynicism'인데, 굳이 '냉소주의'를 '회의주의(skepticism)'와 동일시할 이유는 없어 보이므로 이후의 인용에서는 모두 '냉소주의'라고 바꾸겠다. 그럼, 어째서 기인한 결합인가?

 

 

 

 

"자본주의는 이상주의와 냉소주의의, 천사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의 기이한 결합이다. 그것은 이윤을 위한 자신의 경쟁을 신성한 가치들로 그럴듯하게 포장한다. 이런 현상이 고상한 종교적 열정과 저급한 물질적 이익 모두의 성소인 미국에서보다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없다.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토크빌은 '미국에서 종교적 광기는 흔한 현상'임을 지적한 바 있다."(135쪽)

마지막 문장에 이어서 이글턴이 달아놓은 토가 재미있는데 그는 종교에 대한 서구문명의 태도를 이렇게 정리한다: "영국 역시 예외는 아닌데, 서구 문명이 종교를 대하는 태도는 대개 알코올 중독 카운슬러가 중독자에게 종교를 권하는 입장과 비슷하다는 것 역시 진실이다. 그들은 종교가 자신의 일상을 진지하게 구속하지 않는 한에서만 그것을 받아들인다. 기업 경영자들이 윤리에 대해 취하는 입장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 문장들에 대한 나의 생각은 역자와 다르기에 원문도 같이 옮겨놓겠다: "It is true, however, that Western civilization, not least the British, adheres by and large to what one might call the alcohol counsellor's view of religion: It is all very well as long as it does not begin to interfere with your everyday life. This is also the view which corporate executives tend to adopt of morality."(76쪽)

물론 이런 정도의 대목이야 그냥 읽고 지나쳐도 대세에는 지장이 없지만 'alcohol counsellor's view of religion'란 표현이 재미있어서 짚어보는 것이다. 역자는 이걸 '알코올 중독 카운슬러가 중독자에게 종교를 권하는 입장'이라고 풀어서 이해를 했는데, 바로 앞에 나오는 'what one might call'이란 표현을 간과한 탓인 듯하다. 내가 보기엔 '종교에 대한 알콜 중독 상담자적 관점'이라고 해야 맞다. 

'알콜 중독 상담자'가 종교를 권하거나 하는 건 주제넘는 일일 테고, 그는 보통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을까? "술이 나쁜 건 아닙니다.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만 아니라면 얼마든지요."(It is all very well as long as it does not begin to interfere with your everyday life.) 실상 '알콜 중독'의 문제는 술이 일상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데 있으므로 상담의 초점은 당연히 거기에 맞춰지는 것이다. 그럼, '종교에 대한 알콜 중독 상담자적 관점'이란 무엇인가? 알콜 대신에 종교를 집어넣은 것이겠다. "종교생활, 좋습니다. 일생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만 아니라면 얼마든지요!" 기업가 도덕? "도덕, 아주 좋지요. 기업가는 도덕적이어야 합니다. 단, 기업활동에 지장을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요."

"냉소주의와 이상주의의 이런 결합은 테러리즘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그것은 허무주의를 탐닉하는 악마적 얼굴을 들이밀며, 보라, 모든 가치를 박탈당한 채 불에 탄 신체들의 폐허, 절단된 팔다리들처럼 의미 없이 흩날리는 날것의 물질들, 이것이 바로 너희들의 귀중한 서구 문명이 다다른 귀결점이다, 라고 외쳐댄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정의로운 이념을 내세우며 무너지는 건물을 서구의 눈앞에 들이밀기도 한다. 쓰레기라도 처리하듯 그들의 적대자를 화염으로 몰아넣는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의 거창한 이상들이다."(135-6쪽)

대체로 역자는 가독성을 고려하여 재량권을 한껏 발휘하는 편인데, 원문에 따르면 이 대목에서도 핵심은 두 번 반복되는 '보라'(Look.... Yet look also...)에 있다(번역문에는 '들이밀며... 들이밀기도 한다'로 옮겨져 있다). 즉, 이걸 봐라, 그리고 또 이것도 봐라, 구문이다. 무얼 보란 말인가? 하나는 너희 서구 문명이 꽤나 자랑하던 게(9.11의 경우엔 쌍둥이 빌딩) 어떻게 폐허가 됐는지를 보라(=냉소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너희 앞에서 그렇게 건물을 무너뜨리게 만든 '고결한/천사적 이상들(the angelic ideals)'을 보라(=이상주의)이다. 이러한 이중성의 결합은 하지만, 테러리즘만의 것이 아니다. 이미 적은 대로 그것은 자본주의 자체의 이중성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발흥기에 그것의 천사적인 면과 악마적인 면은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해결책을 통해 좀더 쉽게 공존할 수 있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언어는 세속적인 동시에 비세속적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형이상학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결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서는 이윤 창출 자체가 영적 소명이 될 수 있었다."(136쪽)  

이런 지적은 한국 개신교의 성장사를 통해서 그대로 입증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세속적인 동시에 비세속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결합할 수' 있도록 해준 게 프로테스탄티즘(개신교)이라면 한국 개신교는 미국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프로테스탄티즘의 별종이 아니라 모범이고 정통이라고 해야겠다. 하지만 "이런 프로테스탄티즘 전통은 종교 일반의 쇠퇴 때문이 아니라 산업사회에서 탈산업사회로의 이동, 다시 말해 생산 기반의 자본주의에서 소비 기반의 자본주의로의 이동, 다시 말해 생산 기반의 자본주의에서 소비기반의 자본주의로의 이행 때문에 사라지게 된다."

이글턴의 흥미로운 지적인데, 다만 원문이 'not only... but (also)'구문이므로 "종교 일반의 쇠퇴 때문이 아니라"가 아니라 "종교 일반의 쇠퇴 때문이 아니라"로 교정되어야겠다. 그렇다면, 생산기반 자본주의(=산업사회)에서 소비기반 자본주의(=탈산업사회)로의 이행이 무엇이길래 형이상학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사이의 연계/결합이 약화되게 되는가?

"우리에게 근검절약과 신중함, 욕망의 통제와 권위에의 순종을 요구하는 신의 모습은 쉽게 상상할 수 있지만, 하도코어 포르노를 보고 개인용 비행기를 구입하며 어머어마한 양의 정크푸드를 먹어치우라고 명령하는 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 간의 연결고리는 소비주의에 의해 결국 단절된다."

가령, 똑같이 '축적'이란 차원에서 'After Doritos'를 신의 은총으로 정당화하기는 이제 어렵다는 얘기이다(그것은 더 이상 축복이 아니라 저주로 간주된다). “이 세상, 날씬한 것들은 가라. 곧 뚱뚱한 자들의 시대가 오리니. 먹어라, 네 시작은 비쩍 곯았으나 끝은 비대하리라!”는 알다시피 개그콘서트의 구호이지 현실의 구호가 아니다...

"그러나 이 단절의 지점에서 사람들은 자유라는 개념을 건져 올렸다."라고 하여 이글턴은 '절대 자유'로서의 신 개념이 갖는 의미장을 계속해서 조망해나간다. 하지만 나의 '한 대목 읽기'는 여기까지다...

07. 0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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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근본주의
    from 내가 사귀는 이들, 翰林山房에서 2008-07-31 18:12 
    '알콜 중독 상담자'가 종교를 권하거나 하는 건 주제넘는 일일 테고, 그는 보통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을까? "술이 나쁜 건 아닙니다.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만 아니라면 얼마든지요."(It is all very well as long as it does not begin to interfere with your everyday life.) 실상 '알콜 중독'의 문제는 술이 일상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데 있으므로 상담의 초점은 당연히 거기
 
 
심술 2007-09-17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도 사진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네요.

로쟈 2007-09-17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들 읽어보시라고 열심히 '홍보'하고 있지만 효과는 미지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