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최근 출간된 이광래 교수의 <해제주의와 그 이후>(열린책들, 2007)에 대한 촌평을 적은 바 있는데(http://blog.aladin.co.kr/mramor/1573384), 다소 부정적인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한때 "프랑스 철학의 대변인 같았고 전도사와도 같았던" 저자의 근황과 식견이 궁금하여 책을 구입했다. 니체와 데리다 관련 대목만 약간 훑어보다가 한 문장이 목구멍에 걸렸다. '데리다의 해체실험들'을 다룬 장에 나오는 한 문단의 일부이다:  

"파리 고등사범학교 시절 심리학과 정신 질환 등 무의식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던 푸코와는 달리 데리다는 주로 의식철학, 그것도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가 학위논문을 후설과 현상학적 미학에 관해 쓰려고 했던 것만 보아도 그러한 그의 관심사를 쉽게 알 수 있다. 사실상 최초로 그의 이름이 실려 출간된 책도 <후설의 기하학의 기원: 전통과 도입L'Origine de la geometrie. Tradition et introduction>(1962)이라는 번역서였다. 이 책은 후설의 본문보다 데리다의 서론이 다섯 배 정도나 많았으므로 번역서라기보다는 데리다의 후설 연구서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결국 그는 이 책으로 '카바이예 철학상'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후설이나 현상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이외에 그를 주목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119쪽)

'데리다의 기원'이라고도 부름직한, 후설의 <기하학의 기원>에 대한 데리다의 번역과 해제는 내가 오래전에 영역본으로 읽어보려고 시도했던 책이고 또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어본도 '비싸게' 구입한지라 나름대로 '관심도서'라고 할 수 있다. 한데, 이 책에 대한 저자의 소개는 눈을 의심하게 한다. 책 전체에 걸쳐서 저자와 도서명에 원어가 병기돼 있는 건, 다소 번거롭고 독서를 방해한다 하더라도 출처를 명확하게 밝히겠다는 학술적 고려의 소산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단, 그것이 정확한 정보일 경우이다.

저자는 엉뚱하게도 'L'Origine de la Geometrie. Traduction et introduction'이란 원서명에서('Traduction et introduction à l'origine de la géométrie d'Edmund Husserl '이라고 표기되기도 한다) 'Traduction'(번역)이란 말을 'Tradition'(전통)이란 말로 오기했다(introduction은 왜 '도입'이 된 것인지?). 그리고는 '전통'이라고 옮겼다! 저자가 책을 읽지 않고(심지어 안 갖고 있을 듯하다) 2차문헌에만 기대어 적어놓은 것밖에 되지 않는다.  

데리다가 후설 사후에 출간된 비교적 짧은 텍스트를 처음 번역 소개하면서 우리식의 '해제'를 붙였는데, 그 분량이 상식을 좀 넘어선다. 언급된 대로 '다섯 배 정도'나 많기 때문이다(러시아어본을 기준으로 하면 데리다의 서론은 거의 200쪽 가까운 분량이고 후설의 텍스트는 36쪽 가량이다). 하지만 덕분에 데리다는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고 우수한 인식론 저작에 주어지는 '장 카바이예상'까지 수상함으로써 전도유망한 철학자로서의 첫 발을 내딛게 된다. 어쨌든 이런 식의 내용이야 '전통과 도입'에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냥 접수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나의 독서경험상 이런 사소한 꼬투리들이 많은 걸 암시해주며 또 많은 의혹을 낳는다(그러니 '침식주의'라 부를 만하다). 해서 앞뒤로 몇 페이지를 둘러보는데 116쪽의 데리다 인용문에서는 음소(Phoneme)와 문자소(Grapheme)은 번역 없이, 'Phonene나 Graphene'이라고 오기했다. 오타라 하더라도 너무 눈에 띄는 오타이다. 112쪽에서는 데리다와 카트린 클레망의 인터뷰를 싣고 있는 잡지 <아르크(L'arc>)를 '아르크Arch'라고 오기했다.

Жак Деррида Диссеминация La Dissemination

조금 뒤로 가보니 168쪽의 미주에서 저자가 <파종>이라고 옮기고 있는(보통은 <산종>이라고 옮긴다) 데리다의 'La dissémination'(1972)이 'La deissémination'이라고 오기됐다(이 경우엔 탈자가 생긴 게 아니라 특이하게도 첨자가 생겼다). 지나가는 김에 말하자면, <산종>은 올해 러시아어본이 출간됐다(들뢰즈/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도 올해 러시아어본이 나왔다). 

거기에 본문에서 저자가 "편집증세가 심한 네오-프래그머티스트'로 폄하하고 있는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는 'Richard Rotty'로 오기됐다. 찾아보기에서까지 'Richard Rotty'라고 표기된 걸로 보아 저자는 Rorty가 아니라 Rotty를 읽은 모양이다...

이런 식으로 따지자면 끝이 없겠다. 내가 다 읽어보지 않았기에 저자가 이런 실수들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책을 썼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나의 '취향'은 이미 책을 진지하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데리다에 대한 저자의 판단처럼.

"데리다는 왜 실없는 말을 하려는 것이었을까? 그의 농담은 진담에 대한 진저리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진담을 구토한다. 그는 늘 진담들을 해체하려 한다. 철학은 너무 오랫동안 '진담하기'에 주눅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그 주눅을 벗어던지려 했을까? 그는 철학의 진담들을 모두 단두대에 올려놓아야 한다고 외친다. 해체란 단두(斷頭)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그가 믿기 때문이다."(110-111쪽)

침식주의 또한 진담에 대한 진저리인 것이다...

07. 0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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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2007-09-21 17:41   좋아요 0 | URL
서양철학을 열심히 공부한 이들 중 일부는 서양의 전통에 대한 외상으로 인한 반작용으로 동양의--그리고 한민족 고유의--전통에 대한 집착으로 빠지곤 하는 모습을 봅니다. 영국으로 유학갔던, 서양의 전통과 학문에 대한 위압감으로 정신병까지 얻었던 것과 같은, 소세키의 고민이 그대로 백년후의 한국에서 반복되는 것같은 기시감이 듭니다. 일본어로 일본의 근대를 그대로 받아들였던 시대가 지나--중역의 시대였던-- 한국어로 학문을 해야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나서야 시작되는 근자의 '번역론'에 대한 무성한--하지만 별무실한-- 논의처럼 말이죠.

이광래씨도 그런 고민을 꽤 했던 듯합니다.
그가 습합習合 운운하며 한국의 서양철학 수용사나 일본 학문에 대해 연구한 것 역시 잃어버린 전통에 대한 집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서양 철학에 대한 공부를 이렇게 강박적으로 부인하는 것을 보니 더더욱.
이교수의 공부가 잃어버린(만들어진) 전통에 대한 집착이나 도취가 아니라, 동서양의 이분법을 떠나 보다 급진적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동서양의 이분법에 잘못 빠지면, 김두규씨처럼 전통풍수 운운하는 삼천포로 빠지지요.

강원대와 약간 관련된 지인의 말에 의하면, 이광래교수는 불어보다는 일어에 능하다고 하더군요.초창기 저작들도 일본어 저작들에 많이 의존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마 일본의 근대학문과 그 수용으로서의 한국의 근대 학문에 대한 연구가 나온다면 한국 학계의 많은 미스테리들이 풀리지않을까하는 의문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로쟈 2007-09-21 17:47   좋아요 0 | URL
저로선 그런 집착이나 유혹에 별로 기대하지 않는 편이지만(가령 박동환 교수의 '3표 철학'을 '숭배'하는 후학들의 모습이 저로선 퇴행 이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걸 다 떠나서라도 학문적인 정확성/엄격성은 지켜져야 한다고 봅니다. 대충대충이 '동양적'이라고 강변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책의 266쪽에서는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를 '찰스 앤더슨 퍼스'라고 표기하고 'Charles Sander Peirce'라고 병기해놓았네요(탈자가 있습니다). 이런 책을 진지하게 읽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자꾸때리다 2007-09-21 21:38   좋아요 0 | URL
저도 공부는 많이 해보지 않았지만 열매님의 의견에 많이 동감이 되네요. 동양/한국 철학에 대한 너무 과한 강박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상당수 되는 듯해요. 서양 철학에 대한 무분별한 추종이나 또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긴 동양철학에 대한 강박증에서 모두 자유로워질 수 있는 때가 왔으면 좋겠네요.
 

어제 '들뢰즈 철학사'란 리스트를 만들게 된 빌미가 되기도 했지만 최근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이학사, 2007)란 책이 출간됐다. 철학사에 대한 들뢰즈의 생각들을 알려주는 글들의 선집인데, 책 자체는 들뢰즈가 만든 것이 아니라 역자와 출판사가 기획하여 만든 것이다(이 책의 편제에 대해서는 '이 책에 대하여'란 서문에 나와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코멘트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알라딘에 소개된 내용상으로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실제로 서점에서 책을 들여다보니 많은 글들이 내가 영역본 등의 버전으로 갖고 있는 것이어서 손에 들게 되었다. 특히 내가 관심을 갖는 글 꼭지는 '구조주의를 어떻게 식별할 것인가', '내재성: 생명...' 등인데, 국내에 이미 다른 버전의 번역이 나와 있기 때문에 비교해서 꼼꼼히 읽어봄 직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두 텍스트 중 '내재성: 생명...'은 작년초에 온라인 자율평론에 '내재성: 하나의 삶'으로 번역되어 주석과 함께 게재된 바 있다(http://jayul.net/view_article.php?a_no=874&p_no=1&key=%B5%E9%B7%DA%C1%EE). '들뢰즈와 '하나의 삶''이라는 기획특집의 일환이었다. 이 참에 번역텍스트를 옮겨놓는다(문단은 내가 원문보다 더 잘게 잘랐다). 이번에 새로 나온 번역까지 포함한 두 텍스트에 대한 나의 생각은 나중에 시간이 날 때 적어두겠다(개략적인 것은 이전에 쓴 같은 제목의 페이퍼 http://blog.aladin.co.kr/mramor/735467 참조).

자율평론 제15호(06. 01. 13) 내재성: 하나의 삶

■초역을 올린 후,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있는 양창렬 님이 불어본을 대조하여 나의 번역에서 누락된 부분과 잘못 번역된 부분을 수정한 메일을 보내왔다. 영어본과 차이가 나는 한 대목은 두 개의 번역을 병기했다. 더 나은 번역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준 양창렬 님께 감사드린다.-조정환



내재성: 삶1)

초험적(transcendental) 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대상에 관계하거나 주체(경험적 표상)에 속하지 않는 다는 점에서 경험과 구별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비-주체적 의식의 순수한 흐름, 선-반성적인 비인격적 의식, 자기 없는 의식의 질적인 지속으로서 나타난다. 초험적인 것이 즉각적으로 주어진 그러한 것에 의해 정의된다는 것은 흥미롭게 보일 것이다. 우리는 주체와 대상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모든 것에 반대되는 초험적 경험주의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이 초험적 경험주의에는 거칠고 강력한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당연히 감각이라는 요소(단순한 경험주의)가 아니다. 감각은 단지 절대적인 의식의 흐름 안에서의 한 균열일 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생성으로서, 힘(가상실효적 양)의 증가 혹은 감소로서, 하나의 감각에서 다른 감각으로의 이행이다. 그 두 감각이 아무리 가깝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초험적인 장을, 대상도 자기도 갖지 않은, 시작도 끝도 없는 운동으로서의 순수하게 직접적인 의식으로 정의해야 하는가? (이러한 이행이나 힘의 양에 관한 스피노자의 생각조차도 여전히 의식에 호소한다.)

그러나 의식에 대한 초험적 장의 관계는 단지 개념적인 것일 뿐이다. 의식은 주체가, 그 장의 바깥에 있고 또 “초월적인 것들transcendents”로 나타나는, 자신의 대상으로 동시에 생산되었을 때에만 사실이 된다. 반대로, 의식이 무한한 속도로 어디에나 확산된 초험적인 장을 횡단하는 동안에는, 그것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2) 사실, 의식은, 그것을 대상에 관련시키는 주체에 반사되었을 때에만 표현된다. 그것이 초험적 장이, 초험적 장과 공연장적(coextensive)인 의식에 의해 정의될 수없고, 어떠한 드러남으로부터도 제거되는 이유이다.

초월적인 것은 초험적인 것이 아니다. 의식이 없다면, 초험적 장은 순수한 내재성의 평면으로 정의될 것이다. 그것은 주체와 대상의 모든 초험성에서 빠져나오기 때문이다.3) 절대적인 내재성은 그 자신의 안에 있다. 그것은 어떤 것 안에, 어떤 것에 대해 있지 않다. 그것은 어떤 대상에 의존하지도 어떤 주체에 속하지도 않는다. 스피노자에게서, 내재성은 실체substance에 대한 내재성이 아니다. 오히려, 실체와 양태들이 내재성 안에 있다. 내재성의 평면 바깥으로 떨어진 주체와 객체가 내재성이 그것에 귀속되는 보편적 주체나 임의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지면, 초험적인 것은 완전히 변성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그것은 (칸트와 더불어) 단순히 경험적인 것을 되풀이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재성은 왜곡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그것(내재성-역자)은 그 자신이 초월적인 것에 둘러싸여 있음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내재성은 모든 사물보다 우월한 통합체로서의 어떤 것(Some Thing) 혹은 사물들의 종합을 낳는 어떤 행동으로서의 주체(Subject)에 관계하지 않는다. 내재성이 더 이상 그 자신 이외의 다른 어떤 것에 대한 내재성이 아닐 때에만, 우리는 내재성의 평면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초험적 장이 의식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 것은, 내재성의 평면이, 그것을 포함할 수 있는 주체 혹은 대상에 의해 규정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우리는 하나의 삶(A Life)인,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순수한 내재성에 대해 말할 것이다. 이것은 삶에 대한 내재성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 속에서는 삶이 아닌 내재적인 것이다. 삶은 내재성의 내재성, 절대적인 내재성이다. 그것은 완전한 힘, 완전한 지복이다. 요한 피히테(Johann Fichte)는 자신의 최후의 철학에서 주체와 대상이라는 난제들(aporias)을 넘어서는 정도만큼, 더 이상 존재(Being)에 의존하거나 행동(Act)에 종속되지 않는, 하나의 삶(a life)으로서의 초험적 장을 제시한다. 그것은, 그것의 활동성이 더 이상 존재에 관련되지 않고서, 끊임없이 삶 속에서 제기되는, 절대적으로 직접적인 의식이다.4)

그러므로 초험적 장은 진정한 철학적 진행의 핵심에 스피노자주의를 재도입하는 내재성의 진정한 평면이 된다. 맨느 드 비랑(Maine de Biran)은 그는 (그가 너무 지쳐있었기 때문에 결실을 맺을 수 없었던) 그의 “최후의 철학”에서, 노력의 초험성(transcendence of effort) 아래에서 어떤 절대적으로 내재적인 삶을 발견했다. 이때 그는 이와 유사한 어떤 것을 경험하지 못했던 것일까? 초험적 장은 내재성의 평면으로 정의되고, 다시 내재성의 평면은 삶으로 정의된다.

내재성이란 무엇인가? 삶… 만약 우리가 무한정한 분절(=부정관사)를 초험적인 것의 지표로 받아들인다면, 그 누구도 찰스 디킨즈(Charles Dickens)보다 하나의(a)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잘 기술하지 못했다["내재성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삶 … 그 누구도, 부정관사를 초험적인 것의 지표로 삼은 찰스 디킨즈보다 하나의(une)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잘 기술하지 못했다"-불어본을 참조한 양창렬 님이 보내온 번역]. 모든 사람들로부터 경멸을 당하던, 평판이 좋지 않은 한 남자 도둑이 누워서 죽어 가는 채로 발견되었다. 갑자기, 그의 삶의 기운이 너무 미약해서, 사람들이 커다란 열의, 존경, 심지어 사랑으로 그를 돌보아 준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구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이 가장 사악한 남자는 깊은 혼수상태에서 부드럽고 달콤한 무엇인가가 그에게 스며드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그가 소생하게 됨에 따라, 그의 구원자들은 점점 냉담해지고, 그는 다시 비열하고 거칠어진다. 그의 삶과 죽음 사이, 거기에 죽음과 놀이하고 있는 하나의 삶의 순간이 있을 뿐이다.5)

개체적인 것의 삶은, 내재적이고 외재적인 삶의 우연들로부터, 즉 무엇인가가 일어나는 주체성과 대상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순수한 사건을 해방하는, 비인격적인, 그리고 특이한(singular) 삶에 길을 비켜준다. 모든 사람이 그와 더불어 감정이입을 하는, 그리고 일종의 지복에 도달한 “지고한 인간(Homo tantum)”. 그것은 더 이상 개별화의 각개성(haecceity)이 아니고 특이화의 각개성이다. 순수한 내재성의, 중립적인, 선악을 넘어선 삶. 왜냐하면 그것을 선하거나 악하게 만드는 사태들 속에서 그것을 육화하는 것은 주체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개별성의 삶은, 더 이상 이름을 갖지 않는 사람에게 내재적인 특이한 삶을 위해 사라져간다. 그가, 그 누구도 아닌 것처럼 오해될 수도 있지만 말이다. 특이한 본질, 하나의 삶….

그러나 우리는 삶을, 개별적 삶이 보편적 죽음에 직면하는 그 유일한 순간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 삶은 어디에나 있다. 그것은, 어떤 주어진 살아있는 주체가 경험하는 그리고 어떤 살아진 대상들에 의해 측정되는 모든 순간들 속에 있다. 내재적인 삶은 오직 주체와 대상들에서만 현실화되는 사건들 혹은 특이성들을 실어 나른다. 이 부정관사의 삶[즉 하나의 삶 a life, une vie]은 그 자체로는 순간들을 갖지 않는다. 그 순간들이 서로 가깝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것은 단지, 사이-시간, 사이-순간들을 가질 뿐이다. 그것은 발생하거나come about 후속될come after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직접적 의식이라는 절대적인 것 속에서, 아직 오지 않은 그리고 이미 일어난 사건들을 바라보는, 텅 빈 시간의 거대함을 제공한다.

그의 소설에서, 레르네 올레니아(Alexander Lernet-Holenia)는 무기들 전체를 삼켜버릴 수 있는 중간(in-between) 시간에 사건을 위치시킨다. 하나의 삶(a life)을 구성하는 특이성들과 사건들은 그것에 상응하는 그 삶(the life)의 우연들과 공존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서로 같은 방식으로 묶이거나 분할되지 않는다. 그들은 개별자들이 연결되는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서로 연결된다. 특이한 삶은 어떤 개별성 없이도, 그것을 개별화하는 어떤 부수물 없이도 지낼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아주 어린 아이들은 모두가 서로 닮아 있고 거의 어떤 개별성도 갖고 있지 않지만, 그들은 특이성들을 지닌다. 미소, 제스처, 재미있는 얼굴 ― 이것들은 어떤 주체적인 질들이 아니다. 어린 아이들은, 그들의 모든 수난과 연약함을 통해, 순수한 힘이며 심지어는 축복인 내재적인 삶이 불어넣어진다. 삶의 무한정한 측면들은 내재성의 평면을 부풀리는 정도에 따라 혹은, 마찬가지로, 초험적 장의 요소들을 구성하는 정도에 따라 모든 비결정을 잃는다. (다른 한편, 개별적 삶은 경험적 결정들로부터 분리불가능하게 남아있다.)

그러한 것으로서 무한정은 경험적 비결정의 표시가 아니라 내재성 혹은 초험적 결정가능성에 의한 결정의 표시이다. 무한정한 분절[=부정관사]은, 단지 특이한 것의 결정일 뿐이기 때문에, 개인(the person)의 비결정이다. 일자(the One)는 내재성을 포함할 수 있는 초월적인 것(the transcendent)이 아니라 초험적 장 안에 포함된 내재적인 것(the immanent)이다. 하나라는 것은 언제나 다양체의 지표이다. 사건, 특이성, 삶…. 내재성의 평면의 바깥으로 떨어지는, 혹은 그 자체에 내재성을 귀속시키는 어떤 초월적인 것(a transcendent)을 불러내는(invoke) 것이 항상 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초험성은, 이 평면에 속하는 내재적 의식의 흐름 속에서만 구성된다.6) 초험성은 항상 내재성의 산물이다.

삶은 오직 가상실효적인 것들(virtuals)만을 포함한다. 그것은 가상실효성, 사건, 특이성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가상실효적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실재성을 결여한 어떤 것이 아니라, 그것에 특수한 실재성을 부여하는 평면을 따라 하나의 현실화 과정 속에 참여하고 있는 어떤 것이다. 내재적 사건은 사물의 상태 속에서, 그리고 그것을 발생시킨 살아진 것(the lived)의 상태 속에서 현실화된다. 내재성의 평면은, 그것이 그 자신에게 귀속시키는 주체와 대상 안에서 현실화된다. 그러나 대상과 주체가 아무리 분리불가능하다 할지라도, 내재성의 평면은, 거기에 사는 사건들이 가상실효성들인 한에서는, 그 자체로 가상실효적이다. 사건들과 특이성들은 그 평면에 그것들의 모든 가상실효성을 부여한다.

내재성의 평면이 가상실효적 사건들에 완전한 실재성을 부여하듯이. 현실화되지 않은 (무한정한) 것으로 고려된 사건은 그 어떤 것도 결여하지 않고 있다. 그 사건을, 그와 공존하는 것들, 즉 초험적 장, 내재성의 평면, 삶, 특이성들 등과 관련 속에 놓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상처는 사물들 혹은 삶의 어떤 상태에서 육화 혹은 현실화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삶으로 이끄는 내재성의 평면 위에 있는 순수한 가상실효성 그 자체이다. 나의 상처는 나 이전에 존재했다. 더 높은 현실성으로서의 상처의 초험성이 아니라, 항상 어떤 환경(평면 혹은 장)7) 안의 가상실효성으로서의 그것의 내재성. 초험적 장의 내재성을 정의하는 가상실효적 것들과, 그것들을 현실화하여 초월적인 어떤 것으로 변형하는 가능한 형식들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1) 2005년 3월 20일 조정환 옮김; 텍스트: G. Deleuze, 'Immanence: A Life'(in G. Deleuze, Pure Immanence: Essays on A Life, tran. by Anne Boyman, Zone Books, New York, 2001, pp. 25~33)[불어본: G. Deleuze, 'L'immanence: Une Vie', Philosophie 47, Editions de Minuit, 1995.]

2) “우리가 빛을 그것을 발산하는 표면에 다시 반사시키더라도, 저항 없이 지나친 빛은 결코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Henri Bergson, Matter and Memory, New York, Zone Books, 1988, p. 36)

3) 비인격적, 절대적 내재적인 의식에 관계하는 주체 없이 초험적 장을 정립하는 사르트르를 참조하라. 그에 비교할 때, 주체와 대상은 “초월적”인 것들이다. (La transcendance de l'Ego (Paris: Vrin, 1966), pp.74-87) 제임스에 관해서는, David Lapoujade의 분석, “Le Flux intensif de la conscience chez William James," Philosophi 46 (June 1995)"을 참조하라.

4) 이미 La Doctrine de la science 두 번째 서문에서 “고정된 어떤 것이 아니라 진행이며, 존재가 아니라 삶인 순수 한 활동성의 직관”(Oeuvres choisies de la philosophie première (Paris: Vrin, 1964), p.274)이라 말하고 있다. 피히테에 따른 삶의 개념에 대해서는 Initiation à la vie bienheureuse (Paris: Aubier, 1944), 그리고 Martial Guéroult의 주석(p. 9)을 보라.

5) Dickens, Our mutual Friend(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9), p. 443.

6) 심지어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조차도 이것을 인정한다. “세계의 존재는, 기원적인 증거 내부에서조차, 필연적으로 의식에 초월적이며, 또 필연적으로 초월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초험성이 의식의 삶 속에서, 그 삶에 분리불가능하게 연결되어있는 것으로서, 단독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바꾸지는 않는다. (Méditations cartésiennes (Paris: Vrin, 1947), p. 52) 이것이 사르트르 텍스트의 출발지점일 것이다.

7) Joë Bousquet, Les Capitales (Paris: Le Cercle du Livre, 1955) 참조.

07. 09. 21.

P.S. 이 번역의 대본은 각주1)에 밝혀져 있지만, 텍스트 자체는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의 한 가지 대본이기도 한 <광기의 두 체제: 텍스트와 인터뷰 1975-1995>(2003; 영역본2006)에도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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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가 만든 철학사>가 나온 김에 '들뢰즈 철학사' 관련 리스트를 몇 권만 꼽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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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생성과 창조의 철학사
질 들뢰즈 지음, 박정태 옮김 / 이학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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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송주의- 우리시대의 지성 5-002
질 들뢰즈 지음, 김재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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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철학
질 들뢰즈 지음, 이경신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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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09-20 16:17   좋아요 0 | URL
재미있는 책이 새로 나왔군요. 들뢰즈의 소논문을 모아서 번역한 책인것 같은데..들뢰즈 철학의 변화과정을 감안해서 볼수있다면 좋은 참조가 되겠네요. 요즘 <들뢰즈사상의 분화>를 읽고있는데 위의 "들뢰즈 철학사"리스트에 추가해도 괜찮아 보입니다. ^^

로쟈 2007-09-20 16:19   좋아요 0 | URL
네, 추가했습니다. 마이클 하트의 책과 비교해서 어느 것이 더 추천할 만한지는 모르겠네요...

yoonta 2007-09-20 16:20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는 하트의 책이 더 좋았습니다..사상의 변화과정을 좀더 일관되게 서술한 책이더군요. 다소 어렵다는 단점이 있습니다만..

로쟈 2007-09-21 09:49   좋아요 0 | URL
저도 다 읽진 않았지만 원서 자체가 들뢰즈 자체가 다소 어려운 게 아닐까 싶습니다...

marr 2007-09-21 01:02   좋아요 0 | URL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에 실린 글들은 물론 평소 읽고 싶었던 것들이었는데, 이제 편하게 읽게되었군요. 아무래도 불어로 읽기에는 5배의 시간이 더 소요되지요. 그런데, 이 책 너무 비싸요.
마이클 하트의 책은 쉽게 읽히지 않더군요. 학위 논문이어서 그런지 재미도 없고 게다가 딱딱하고, 글자 한자 한자가 호흡이 거칠어요. 읽기 힘든 글은 이렇게 변명한답니다.

로쟈 2007-09-21 09:50   좋아요 0 | URL
7편의 소논문들만이 제가 갖고 있는 영역본들에서 빠진 거더군요. 하트는 원서와 대조해서 읽어야 할 거 같아요...

marr 2007-09-21 10:42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러시아 혁명기의 아나키스트 혁명가 보리스 사빈코프(싸빈코프)의 소설 두 권에 대해서 언젠가 페이퍼를 만든 적이 있는데(http://blog.aladin.co.kr/mramor/1434756), 보다 자세한 리뷰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6021).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문득 생각이 나게 해주었다. 책은 조만간 구입하든가 대출하든가 해야겠다. 곧 10월이니까...

연세대 대학원신문(제155호) 일기로 기록된 혁명의 ‘현재 시제’

시나 소설을 창작할 수 없는 평범한 인간이라 해도 만약 그가 늦은 밤 홀로 있는데 마침 그 날 하루 혹은 인생이 밀도 있게 다가온다면, 일기를 쓸 것이다. 하루를 인생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며 언어를 조금이라도 부릴 줄 아는 인간에게 허용된 최소한의 미적 행위랄까. 밀도 있게 다가온 일상의 어떤 순간을 망각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조바심과,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시간이 더 두꺼워지고 진해질 수 있을 거라는 설렘이 교차하는 일기는, 기억의 형식이라기보다는 기록의 형식이다. 기억의 윤색과 문학적 형상화로 정제된 자서전 혹은 자전소설과 달리, 일기는 사실적 정황이 갖는 날 것의 느낌을 잃지 않는다.



사랑의 이름으로 살인하는 테러리스트의 일기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기에 러시아 아나키스트 정당인 사회혁명당의 암살단원으로, 께렌스끼 임시 정부의 국방차관으로, 백군 사령관으로 활동했으며, 롭신이란 필명으로 테러와 혁명에 대한 많은 소설과 회상록을 남긴 보리스 싸빈꼬프의 소설, 『창백한 말』(1909)과 『검은 말』(1923)은 모두 1인칭 시점의 일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전자에서 일기를 쓰는 주인공은 1905년 혁명 전후의 테러리스트이고, 후자의 주인공은 1917년 혁명 이후 반(反)볼셰비끼 투쟁을 벌이는 백군 사령관이다.

저자 싸빈꼬프의 전기적인 실제 이력이 투영된 이 두 주인공은 활동하는 시기와 명분은 다르지만, 혁명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번민, 그리고 정의의 이름으로 행하는 살육의 정당성에 대한 회의를 공유한다. 두 작품 공히 가장 많이 언급되는 문구는 ‘살인하지 말라’는 성경의 계명이다. ‘사랑의 이름으로 살 수 있는 힘을 알지 못했고, 사랑의 이름으로 죽을 수 있다는 것만을 이해하는’ 이 뜨거운 혁명가들에게 살인의 계명은, 지젝이 말하는 자기 지양의 법, 즉 모든 것을 금지하는 동시에 허용하는 법으로 작용한다.

‘살인하지 말라…….’ 이 말이 또다시 나의 뇌리를 스친다. 누가 그런 말을 한 걸까? 왜……? 왜 연약한 영혼에게 그처럼 힘겨운, 실천하기 어려운 계명을 남긴 걸까?(『검은 말』 중에서)

“바냐, 그럼 ‘살인하지 말라’는?”
“없어, 조지. 살인하게.”
“자네가 그런 말을 하나?”
“그래, 내가 그렇게 말하네. 살인하게, 다른 사람들이 살인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살인하게,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대로 살고, 사랑이 세상을 밝히도록.”
“그건 신성모독이네, 바냐.”
“나도 알아. 그럼 ‘살인하지 말라’는 신성모독이 아닌가?”(『창백한 말』 중에서)



‘열린 국면’, ‘날 것’으로서의 혁명

혁명을 ‘생성 중인’ 역사적 상황, 그 어떤 헤게모니도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한 ‘중간적 국면’이 열린 단락으로 이해한다면, 혁명의 시제는 ‘현재’일 것이다, ‘일기’는 바로 그런 ‘시간이 움직이지 않고 정지해 버린 순간’을 포착하는 현재 시제의 장르이다. 일기는 과거의 시간을 전유하여 현재의 현존으로 과거를 채움으로써 현재와 과거를 직접적으로 결부시킨다. 이는 혁명가들이 역사를 파악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마르크스주의, 인민주의, 애국주의, 반볼셰비즘을 넘나들며 당의 강령에 쉽게 매몰되지 않아 동지들에게조차 늘 경계의 대상이 됐던 싸빈꼬프의 궁극적인 투쟁 목표는, 구세력뿐만 아니라 볼셰비끼의 독재에서도 해방된 ‘제 3의 러시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어떤 헤게모니에 의해서도 전유되지 않은 혁명의 ‘열린 국면’, 즉 혁명의 ‘현재 시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그의 이상주의적 열망은, 이 두 소설의 주인공들이 일기로 기록하는 혼돈으로서의 혁명(상징적 기표로 다 설명될 수 없는 ‘날 것’으로서의 혁명)에도 투영돼 있다.

물론 그가 지켜내려던 혁명의 ‘열린 국면’은 실정적인 이데올로기적 기획, 즉 볼셰비끼의 독재에 의해 곧 닫히게 되었고, 싸빈꼬프는 러시아 혁명 역사의 승자가 아닌 패자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새롭게 도래한 이 ‘현재’를 경험한 이들의 숭고한 열망은 그것이 결국 실패한 몸짓으로 끝났다 해도, 혁명 이후의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유효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원래부터 주어져 있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현재의 토대가, 사실은 인공적이고 우연적인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전유의 결과는 아닌가 라고. 우리가 현실적인 것으로서 조우하는 현재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를 묻는 이 질문은 그저 우연히 한번 만나 단순한 가치판단으로 봉합해버릴 수 있는 게 아니라, 삶의 여러 맥락과 감정의 여러 파고에서 반복적으로 대면해야 하는 근본적 차원의 질문이다.

혁명은 단순히 불합리한 현실의 전복이 아니라, 현실의 토대 자체가 우연적이고 인위적인 봉합에 지나지 않음을 폭로하는 폭력적인 하나의 행위/사건이다. 『창백한 말』과 『검은 말』의 일기 형식을 통해 싸빈꼬프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바로, 모든 이데올로기적인 봉합에 저항하는 날 것으로서의 혁명, 즉 해석이나 통합이 아닌 변혁을 가져오는 행위/사건으로서의 혁명이 아닐까.(김윤하 / 비교문학 박사과정)

07. 0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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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뉴스에서 작가 편혜영의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 인터뷰는 '젊은 창작자를 찾아서'란 기획시리즈의 하나인데 오래전에 시인 김경주 편을 한번 옮겨놓았었다. 공통점은 내가 뭔가를 기대하는 젊은 시인/작가들이라는 것이겠다, 지난번에 나온 소설집 <사육장쪽으로>(문학동네, 2007)은 작가가 (아마도 사소한 인연을 빌미로) 사인본까지 보내주어서 두 권을 갖고 있지만, 아직 절반밖에 읽지 못했다(관련 페이퍼는 http://blog.aladin.co.kr/mramor/1449456). 나는 '편혜영쪽으로' 계속 가고 있는 중이다...

컬처뉴스(07. 09. 19) 나의 일상이 나의 적이 된다면

도시생활의 고단함을 일거에 보상받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연인들(「소풍」)의 모습이나 힘들게 마련한 전원주택단지에서 꿈을 키워가는 소시민(「사육장 쪽으로」)의 삶, 직장상사의 눈에 들어 승진의 기회를 얻고자 하는 회사원(「분실물」)의 고뇌는 우리 삶의 일부처럼 가까운 일상이다. 그런데 그들의 일상이 한순간에 ‘섬뜩’한 악몽으로 변한다면?

전작 『아오이가든』에서 역병이 퍼진 도시에서 개구리비가 떨어지고, 엄마에게 버려진 아이가 쥐의 배를 가르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하드고어(Hard Gore) 원더랜드’라는 평가를 받았던 편혜영이 두 번째 소설집 『사육장 쪽으로』(문학동네)를 펴냈다. 이번 작품집에 실린 작품들도 ‘섬뜩’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전작에 비하면 극단적인 이미지가 줄었고, 아비규환의 ‘아오이가든’ 대신 ‘일상’이라는 공간이 들어섰다.

그런데 이 ‘일상’은 앞서 서술한 것처럼 우리에게 너무나 낯익고 익숙한 것이어서 더 섬뜩하다. 작가는 이번 작품집의 ‘섬뜩’한 일상들을 통해 마치 평화로운 현대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소시민들에게 “당신의 일상은 평화로운가요?”라고 묻고 있는 것 같다. 지난달 인터뷰차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만난 작가에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당신의 일상은 어떤가요?”라고 말이다. 

작가도 누구나 그렇듯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었다. 일반 직장인처럼 “8시에 일어나서 9시에 출근하고 6시에 퇴근”한다는 작가는 “독특할 것이 하나도 없는 평범한 직장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작가’라는 타이틀만으로는 살아가기 힘든 세상에서 작가에게 다른 직업이 있다고 해서 놀랄 일은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사육장 쪽으로』에서 ‘일상의 악몽’을 쫓고 있는 작가가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를 배신감이 밀려왔다.

“제 작품에 나오는 일상이 워낙 무섭고 사람들이 조롱받는 느낌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뻔히 불행한 결말이 보이는데도 아둥방둥 살아가고. 근데 작품에서는 그렇지만 사실 사람들의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하나의 긴 흐름에서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시간의 일부잖아요. 현실에서는 그렇게 불안을 느끼지 않고. 사실 저도 마찬가지인데, 어느 날 이런 나의 평범한 일상이 적(敵)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가는 그렇게 평화롭게만 보이는 일상의 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작가는 자신의 출근길에 대해 “이제 곧 날씨가 추워지면 광화문의 출근길은 마치 장례식장처럼 변해요. 모두가 검은 양복을 입고”라고 묘사했는데, 일상의 한 순간에 포착된 이미지에서 현실의 ‘불안’과 ‘공포’를 보고 있는 작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악몽의 일상’에서 ‘일상의 악몽’으로

“톨게이트를 지나자 안개가 한층 두껍게 내려앉았다. 차들은 빙판길을 지날 때처럼 서행하고 있었다. 얼마 전 한 대교 위에서 십사중 충돌사고가 일어났다. 사망자 열두 명. 부상자가 서른아홉명이나 발생한 대형 사고였다. 안개 때문이었다.” - 「소풍」

“김이 카드를 돌렸다. 박은 슬쩍 카드를 확인하고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조는 확인한 카드를 손에 감추고 칩을 만지작거렸다. 세 사람은 신호라도 되는 듯이 서로 눈을 맞췄다. 게임이 시작되었다.”- 「금요일의 안부인사」

“박은 가방 손잡이를 꼭 쥐었다. 오늘따라 전철 안이 더욱 붐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서두르는 건데 그랬다. 길이 막히더라도 택시를 타는 게 좋았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가방 때문이었다. 가방 안에는 서류가 들어 있었다.” - 「분실물」

인용한 글들은 모두 세 작품의 도입부이다. 도로에서 ‘안개’를 만나거나, 누군가의 집에서 셋이서 ‘카드게임’을 하거나, ‘붐비는’ 지하철을 타는 일은 모두 일상적인 것들이다. 하지만 도입부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안개’와 ‘카드’ 그리고 ‘붐비는 지하철’은 어딘가 모르게 불안한 상황이 닥쳐올 것만 같다.

신형철 평론가는 작가의 이번 작품들을 두고 “편혜영 소설은 이제 ‘악몽의 일상화’가 아니라 ‘일상의 악몽화’를 겨냥한다”고 말한다. 말 그대로 일상의 불안함에서 시작되는 ‘일상의 악몽화’는 이번 작품집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변화를 두고 신형철 평론가는 물론 많은 평자들이 그녀의 소설세계가 “진화했다”고 평가했다. 

“기괴함(grotesquerie)이 낯선 것들과의 조우에서 발생하는 미학적 효과라면 섬뜩함(uncanniness)은 낯익은 것이 돌연 낯선 것으로 전화될 때 발생하는 정치적 효과다. (줄임) 편혜영의 최근작들이 특히 매혹적인 까닭은 편혜영 특유의 실재의 미학(기괴함)이 마침내 실재의 정치학(섬뜩함)으로 진화해가는 국면을 인상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해설 「섬뜩하게 보기」(신형철 문학평론가)

이러한 진화, 혹은 변화에 대해 작가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기계문명도 아니고 ‘진화’라는 표현은 좀 그렇네요.(웃음) 첫 책을 묶고 두 번째 책에 대한 방향성을 따로 세운 것은 아니지만 현실에서 느낄 수 있는 것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하는 생각은 있었어요. 첫 책은 공간자체도 현실에 없을 것 같은 환상의 공간이나 사건이 많았잖아요.(웃음) 하지만 너무 구체성을 띠는 것은 좋아하지 않아서 현실적이기는 하지만 약간 모호한 시공간의 이미지가 그대로 첫 번째 책하고 연결되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작가가 말대로 구체성에 대한 배제는 W시나 D시와 같은 알파벳 지명이나 김, 박, 조 등으로 표현된 사람의 이름들로 나타났다. 이러한 작가의 글쓰기 방식은 구체적인 이름이나 지명이 주는 선입견을 제외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특정한 공간이나 특정한 인물이 아닌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공포감을 배가한다.

이미지로 글쓰기

편혜영 작가의 글쓰기는 서사보다는 ‘이미지’가 이야기를 끌어간다는 측면에서 전통적인 소설쓰기와 구별된다. 하지만 작가에게도 전형적인 소설쓰기의 시절이 있었다. 작가의 등단작이었던 「이슬털기」는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굿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방식이나 내용면에서 기존의 전통적인 방식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랬던 그가 기괴하고, 잔혹한 이미지로 가득한 글쓰기를 시작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그렇게(전통적인 글쓰기로) 소설을 쓰는 것이 재미가 없었어요. 처음에 쓸 때는 개요를 잡아놓고 구성을 생각하면서 썼는데, 그런 작업이 저한테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하루는 이미지 중심으로 막 써내려가는 데 서사는 미약했지만 저한테는 굉장히 즐거운 경험이었어요. 그게 계기가 돼서 이미지로 글쓰기를 시작했어요.”

작가는 “내적인 구조”만 생각하고 글을 쓴다고 했다. 전작 「아오이가든」에서 개구리가 비처럼 내리다가 나중에 누이가 개구리를 닮은 아이를 낳는 것처럼 “이미지의 흐름만 생각하며 글을 써내려 간다”는 것. 물론 그것이 읽는 사람에게는 다소 낯설고 불편할지라도 작가는 스스로에게 “재미있는 글쓰기”를 하고 싶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미지들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작가는 “실제 일어난 사건들에서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변두리 도시의 동물원에서 일어난 코끼리 탈출사건을 그리고 있는 「퍼레이드」의 경우 실제로 2005년 발생했던 코끼리 탈출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같은 작품에 나타나는 대도시 한복판의 벙커 역시 그해 떠들썩했던 ‘여의도 벙커’를 생각하면 만든 이미지라는 것. 그리고 그 이미지를 표현하는 방식은 ‘기괴함’과 ‘그로테스크’인데, 이것과 관련해서는 “80년대나 90년대 어법과는 다른 2000년대 새로운 어법의 한 방식”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80년대는 지나치게 사회적인 억압이 있었고, 90년대는 개인적인 것에 대한 억압이 있었던 시기 같아요. 그런데 2000년대는 그런 방식의 억압이 없어요. 억압이라고 한다면 새로워야 한다는 억압만 있는 것이죠. 그 새로움의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저는 기괴함이나 그로테스크인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은 오히려 아날로그적인 것을 가져오기도 하고, 유머를 가져오기도 하죠.”

더불어 작가는 작품에서 비전이나 전망에 대한 감각은 일부러 떨치려고 한단다. 그는 “처음에 글을 쓰며 힘들었던 것이 작품에 비전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작품에 비전이 있어야 한다는 강박, 그리고 그것에 대한 불만이 너무 싫었죠. 그래서 아예 출구 자체가 막혀있는 것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보니 그게 현실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한 박자 쉬어가기

이번 두 번째 단편집은 첫 소설집 『아오이 가든』 이후 2년 만에 묶은 것이다. 전작이 등단 이후 5년 만에 나왔던 것에 비하면 굉장히 빠른 속도인데다, 총 8편이 실렸으니 1년에 꼬박 네 편씩을 쓴 셈이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이제 좀 “쉬어가고 싶다”고 했다.

“내적으로 고갈된 상태가 된 것 같아요.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한 작품 쓰고 생각을 전환하거나 이전 작품에 대한 생각들을 떨쳐버리고 갈 수 있는데 물리적 시간 때문에 그런 작업들을 하지 못했어요. 그런 리듬을 스스로 조절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니 내가 마치 생산자가 돼서 뭔가를 계속 만들어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이제 한 두 계절 쉬면서 멀찍이 떨어져 보고 싶어요.”

젊은 작가 중에서도 편혜영 작가는 소위 ‘잘’나가는 작가에 속한다. 그가 2년 만에 발표한 원고들을 모아 단편집을 묶을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인데, 그의 ‘쉬고 싶다’는 고민이 행복한 비명처럼 들리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기계처럼 쏟아냈다’는 스스로의 진단이 어떤 쉼으로 이어져 어떤 변화를 만들어낼 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위지혜)

07. 09. 20.

P.S. 나도 궁금해진다! 참고로, <문학동네>(가을호)의 '젊은 작가특집'이 편혜영을 다루고 있으므로 그의 독자들이라면 필히 챙겨두어야겠다. '작가초상'은 동료이자 후배작가 김애란이 맡았다. 작가의 '스타일'을 고려하자면 <사육장쪽으로>의 뛰어난 점을 열 가지 이상 주워섬겨야겠으나, 나는 당장에 볼일은 없을 거라는 예단으로 흠을 잡겠다. 가령 <소풍>과 <분실물>을 지난달에 읽었는데, 나는 '이미지'로 끌고가는 이야기의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눈에 띈다고 생각했다(<사육장쪽으로>의 기억이 워낙에 강렬했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중간쯤 읽으면 이미 결말이 예상되는 소설들이었다. "작품에 비전이 있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탈피한 결과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출구 자체가 막혀있는 것"만이 우리의 현실일까?(그건 또 다른 강박 아닐까?) 작가의 하드고어 원더랜드에 '놀라움'이 더 충전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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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20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불향히도 제 취향은 아니었다는... ㅠㅠ

로쟈 2007-09-21 09:47   좋아요 0 | URL
모든 작가들을 좋아할 수는 없는 일이죠...

자꾸때리다 2007-09-21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 분이 참하게 생기셨네요. 므흣...

마늘빵 2007-09-21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첨 뵙는 분이지만, 므라빈스키님과 같은 말을 하고팠어요. '착하게' 생기셨다고. ('참하게'를 '착하게'로 읽어버렸습니다. -_- )

로쟈 2007-09-21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소설들과의 묘한 '대조'를 이룹니다. '참하게'와 '착하게'는 동의어군요...

2007-09-21 1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