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을 정신없이 보낸 탓에 서재에 들어와보는 것조차 낯선 느낌은 갖게 된다. 어제 밤을 새고 오늘은 아이의 학예회 발표가 있어서 시청 강당에 가 꾸벅꾸벅 졸다가 저녁 나절에 한숨 자고 일어난 것이 이 시간이다. 정신을 좀 가다듬으려고 모처럼 여유를 부려서 '무시무시한 책들을 읽자!'(http://blog.aladin.co.kr/mramor/1641777)에서 꼽아둔 뒤랑의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문학동네, 2007)을 펼쳐들었다. 서문 정도 읽어볼 참이었는데, 웬걸, 시작부터가 만만치가 않다. 이 책 자체가 1960년에 초판이 나온 것이어서 서문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이미 '시간여행'을 요구하고 있는데, 사르트르의 상상력론이 주된 검토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일단 그렇다. 국내에 사르트르 전공자들이 적지 않지만 아직 그의 <상상계>(1940)와 <상상력>(1950)이 번역돼 있지 않다. 뒤랑을 읽어나가는 데 어려움이 있을 거라는 건 미리 짐작해볼 수 있다. 도움이 될 만한 서평이 없나 찾으니 지난주 기사 하나 정도가 눈에 띈다. 그래도 가장 긴 분량을 할애한 서평기사라서 옮겨놓는다.

동아일보(07. 10. 13)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

자유로운 상상력도 일정한 틀과 유형에 의거해 작동하고 있음을 분석한 고전이다. 저자인 질베르 뒤랑(86)은 영미권의 노스럽 프라이와 함께 신화비평이론의 양대 산맥으로 꼽힌다. 1960년 출간된 이 책이 이제 번역이 된 것은 방대하고 난해한 내용 때문이기도 하지만 뒤랑이 국내 소개된 프랑스 구조주의나 후기구조주의와 전혀 다른 전통에 속한 학자라는 낯섦 때문이기도 하다. 뒤랑을 이해하려면 스승인 가스통 바슐라르부터 시작해야 한다.



‘상상력의 해방가’로 알려진 바슐라르는 서구 이성 중심의 전통에서 ‘거짓과 오류의 원천’이자 이성의 어두운 그림자로 비판받아 온 상상력을, 이성과 동등한 위치로 올린 철학자였다. 바슐라르가 이를 과학과 시학으로 양립시켰다면 뒤랑은 상상력의 토대 위에 이성이 작동한다며 “이성은 상상력의 특수한 형태”라고 설파했다. 뒤랑은 상상력이 물 불 공기 흙의 원형이미지의 변형으로 이뤄진다는 스승의 4원소론이 지닌 서구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극복하며 모든 인류에게 적용될 수 있는 상상계의 구조와 체계를 확립했다.



이 책의 서문은 웬만한 학자도 읽어낼 수 없을 만큼 난삽하다. 20세기 상상력연구의 전기를 마련한 사르트르에 대한 비판과 자신의 이론 수립을 위해 국내 독자들에겐 낯선 온갖 ‘주의’를 종횡무진하기 때문이다. 이를 넘어서기 위해선 바슐라르 외에도 정신분석학자 구스타프 융, 러시아의 신경과학자 V M 베흐테레프를 징검다리로 삼아야 한다.

뒤랑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 상상력의 인류학을 위해 베흐테레프가 정립한 반사학의 지배 반사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지배반사란 인간의 조건반사적 행동 중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우선적인 몸짓을 말한다. 그것은 신체의 평형을 유지하려는 자세 지배소와 섭취 지배소, 교접 지배소다. 그는 이 3대 지배몸짓에 융의 원형이론을 적용해 상상계의 3대 구조를 수립한다. 그것이 바로 자세 지배소와 연관된 분열형태구조(영웅적 구조), 섭취지배소와 연관된 신비구조, 교접지배소와 연관된 종합구조(드라마적 구조)다.

분열형태구조는 선악, 빛과 어둠 같은 분열과 대립구도가 중시되며 신비구조는 동화와 내면화를 지항한다. 종합구조는 상이한 요소의 결합을 강조하며 무한한 반복의 힘을 표현한다. 뒤랑은 이런 구조들을 낮과 밤의 양대 체제로 재범주화한다. 분열형태구조는 이미지의 낮 체제에 속하고 신비구조와 종합구조는 이미지의 밤 체제에 속한다. 본문은 바로 이 2체제 3구조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다.

흥미로운 점은 레비스트로스 인류학의 영향 아래 있던 푸코, 들뢰즈, 데리다가 ‘차이’를 강조하는 반플라톤의 지적 전통에 있다면 뒤랑의 인류학은 ‘공통성’을 지향하는 플라톤적 전통에 있다는 발견이다. 인간 내면의 원형으로서 이데아를 강조한 플라톤적 전통은 문학평론가에서 문화인류학자로 변신한 르네 지라르의 모방의 문화인류학에서도 확인된다. 프랑스 지성계의 또 다른 다원성을 보여 준다.(권재현 기자)

07. 10. 26.

P.S. 기사에서 눈길을 끄는 건 러시아의 신경과학자 베흐테레프에 대한 언급. 각주와 참고문헌에 등장하지만 찾아보기에는 빠져 있어서(국역본과 영역본의 색인 모두에서 '베흐테레프'는 등장하지 않는다) 얼마나 비중있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본문에서는 58-64쪽 정도에 걸쳐서 나온다), 여하튼 찾아보면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베흐테레프(1857-1927)이고 러시아에서는 <미래의 정신의학>이란 책이 지난 1997년까지도 출간된 바 있다. 부제는 '병리반사학 입문'이라고 돼 있다(병리반사학?).

В. М. Бехтерев Будущее психиатрии. Введение в патологическую рефлексологию

58쪽의 역주에 따르면 베흐테레프는 "소련의 신경학자로서, 신경심리학에 관심을 갖고 조건 반사의 방법을 이용하여 '반사학'이라는 용어를 창안하였으며, 자극에 대한 반응을 연구함으로써 객관적 심리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가 창도한 반사학은 운동신경계의 조건 반사인 운동 연합 반사를 기초로 고등한 정신활동을 설명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라고 설명돼 있다. 뒤랑이 참고하고 있는 책은, 특이하게도 국역본의 참고문헌에는 빠져 있는데, 역시 58쪽의 저자주를 <새로운 반사학과 생리신경계>(전2권, 1925-1926), <인간의 반사작용의 일반원리>(영역본, 1933), <객관심리학> 등이다. 개인적으론 로만 야콥슨과 베흐테레프 사이의 관계 등이 궁금한데(자세히 찾아보진 않았지만 두 사람의 이름이 같이 검색되는 글들이 있다) 아마도 '실어증'에 관한 연구 등에서 야콥슨이 베흐테레프를 참조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은 든다.

 

 

 

 

정좌하고 읽어야 하는 서문에서 일단 후퇴하여 역자 후기('옮기고 나서')로 넘어가보았다. '뒷계단'을 통해서 들어가보려는 심사다.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뒤랑이 그르노블대학에서 '상상력 연구센터'를 이끌고 있다면 국내에서는 그의 제자들이 '서울 상상계 연구센터' 및 '한국상상학회'를 주도하고 있는데, 그 좌장격은 보들레르 연구자인 유평근 교수였다(말을 붙이자면 '그르노블 마피아'쯤 된다). 역자인 진형준 교수는 또 그 제자여서 '뒤랑-유평근-진형준'식의 계보가 만들어지는 것. 두 사람의 공동저작이 <이미지>(살림, 2001)이고, 유평근 교수는 뒤랑의 <신화비평과 신화분석>(살림, 1998)을 우리말로 옮긴 바 있다. 이런 책들이 모두 살림출판사에서 나온 건 한때 <상상>이란 잡지를 내고 상상력 총서를 발간한 전력과 관련된다(기억에 진형준 교수는 그 총서의 기획자였다). <상상력이란 무엇인가>(살림, 1997) 같은 책 말이다. 그 정도의 예비지식을 갖고서 후기를 읽어봤다.

"유평근 선생님이 권유로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을 읽기 시작한 것이 벌써 30년 가까이 되었다. 프랑스에서 질베르 뒤랑의 지도하에 보들레르를 연구하고 귀국하신 유 선생님이 뒤랑의 역작을 내게 권하시면서 하신 말씀은 두 가지였다. 그중 하나는, 당신도 이 책을 여섯 번 정도 읽고서야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 따라서 공부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며 당장 활용하기도 어려우리라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유 선생님이 하신 이야기는 이 책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저자의 기본정신, 혹은 이 책을 지배하고 있는 근본원리를 이해하려 노력하라는 것이었다. 이 책을 통하여 지식을 습득하거나 논리적인 추론훈련을 할 것이 아니라 저자의 마음을 읽으려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였다."(697-8쪽)

역자와 마찬가지로 한국인 수제자가 여섯 번이나 읽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는 책인지라 위안과 낙담을 동시에 갖게 된다("단번에 이해 못하는 게 당연하군!" "난 열번을 읽어도 이해 못학 거야!"). 하지만 요는 아무리 둔재라 하더라도 '책과의 씨름'을 멈추지 않는 것. "뒤랑을 공부하면서 나는 다원주의의 진정한 의미를 배웠고 주관성의 의미를 배웠으며 상상력이 무엇인가를 배웠다. 그리고 서구의 인식론의 흐름을 보다 거시적인 안목에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어느 정도 획득했으며, 무엇보다 종합적인 정신을 배웠다. 그리고 유 선생님이 이 책 읽기를 권하면서 하신 말씀들의 참뜻을 이해했다."

이쯤 읽으니 떠오르는 책들이 있다. 지금은 뜸한 듯하지만 문학평론가로 활발히 활동하던 저자가 낸 평론집들이다. <깊이의 시학>(문학과지성사, 1986), <또 하나의 세상>(청하, 1988) 등이 그 책들로 내가 대학 1-2학년때 읽었던 것이나 어느새 20년 전 얘기이다(작년에 읽은 책들보다도 기억에는 생생하건만). 관형사 '그'가 거의 매 문장마다 나오는 특이한 문체와 함께 뒤랑의 상상력이론을 자세하게 소개하던 글들이 기억난다. 저자는 이후에 <아주 멀리 되돌아오는 길>(살림, 1997)을 더 냈지만 나는 읽어보지 않았다.

"뒤랑의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이 나온 것은 1960년이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거의 50년 전에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책을 쓸 수 있었던 뒤랑의 혜안이 놀라울 뿐이다.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해서 강연을 한 프랑스의 철학자 뷔넨베르제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바슐라르를 갈릴레이에 비교할 수 있다면 뒤랑은 코페르니쿠스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갈릴레이도 코페르니쿠스와 마찬가지로 지동설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지동설을 하나의 큰 체계로 설립한 사람은 코페르니쿠스이다. 바슐라르가 상상력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이룩한 것, 상상력의 놀라운 기능을 발견한 것은 사실이지만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여 거대한 인식의 체계를 이루는 데 성공한 사람은 바로 뒤랑이라는 것을 뷔넨베르제는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뒤랑의 <상상력의 인류학적 구조들>은 그만큼 새로운 인류학적 틀이면서 거대한 종합적 틀이고 거대한 만큼 섬세한 틀이다."(699쪽)

그 거대한 틀이란 것은 본문의 결론 뒤에 붙은 '상상계의 동위적 분류도'를 통해서 일견할 수 있다. 어쩌면 이 두툼한 책 전체가 이 '분류도'에 대한 해설이 아닐까란 생각마저 든다. 역자의 인용대로 바슐라르-뒤랑을 갈릴레이-코페르니쿠스에 비유한 것은 명쾌해 보인다. 후기의 이어지는 내용은 이제 그 '구조들'의 내용과 의미에 대한 조감이지만, 나는 이쯤에서 걸음을 멈춘다. 장정일의 말대로 공부란 건 내가 반 정도 하고 나머지는 당신이 하는 것이니까...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울나기 2008-01-04 02:29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최근에 나오는 러시아발 기사들이 다들 좀 '사납다'(그래서 '뉴스'가 되는 거겠지만).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러시아의 공세적 외교도 뉴스거리지만 내부적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건 한 '사이코패스', 쉬운말로 한 '살인마'에 관한 이야기인 듯하다. 48건의 살인으로 기소됐다는 이 사내는 실제로는 60명을 넘게 죽였다고도 한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는 자백을 들어보면 '살인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는 게 당연해 보인다. 관련기사를 모아둔다.  

 

 

 

 

 

 

 

 

 

한겨레(07. 10. 26) '러시아판 살인의 추억’ 범인에 ‘유죄’

48명을 살해한 것으로 밝혀진 희대의 러시아 연쇄 살인범에 유죄 평결이 내려졌다. 이번 재판 과정에선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사실들도 상세하게 드러났다. 모스크바 법원의 배심원단은 25일 92년부터 2006년까지 48건의 살인과 3건의 살인 미수 혐의로 체포된 알렉산더 피추시킨(33·사진)에게 만장일치로 유죄 평결을 내렸다. 러시아는 96년부터 사형 판결·집행을 유예하고 있어, 피추시킨에겐 종신형 선고가 내려질 전망이라고 〈모스크바타임스〉는 전했다.

재판 과정에선 모스크바 경찰당국이 피추시킨의 광란 행각을 막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002년 2월 피추시킨은 남자 친구와 결별 위기로 지하철 근처에서 방황하던 마리아 비리체바(24)를 만났다. 피추시킨은 고급 밀수 카메라 상자들을 옮기는 것을 도와주면 절반을 떼주겠다며 비리체바를 콘크리트 하수관 근처로 끌고 갔다. 목적지에 이르자 그는 “목욕이나 하라”며 비리체바를 8m 아래의 하수관으로 밀어넣었다. 하수에 쓸려 내려가다 맨홀 근처에서 행인의 도움으로 운좋게 살아난 비리체바는 경찰에 신고했다. 그러나 경찰관은 비리체바 자신의 잘못으로 하수관에 떨어졌다는 내용의 진술서에 서명하라고 강요했다.

피추시킨의 첫 살인 과정도 밝혀졌다. 피추시킨은 18살 때 급우인 오데이추크를 으슥한 숲으로 유인해 목졸라 죽인 뒤 하수구에 버렸다. 그는 법정에서 “첫번째 살인은 첫사랑과 같아, 결코 잊을 수 없다”는 등 뻔뻔한 태도를 보였다. 그의 체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마지막 피해자이자 피추시킨이 일했던 수퍼마켓의 동료 여직원인 마리나 모스칼레바(36)의 메모였다. 모스칼레바는 아들에게 남긴 메모에서 “피추시킨과 산책을 나간다”며 피추시킨의 휴대전화 번호를 남겨놓았다. 또 피해자의 코트에서 날짜와 시간이 찍힌 지하철표가 발견됐으며, 피추시킨과 걸어가는 장면이 감시카메라에 포착됐다. 피추시킨은 모스칼레바의 주검이 발견된 2006년 6월14일로부터 이틀 만에 붙잡혔다.(이용인 기자) 


 

 

 

 

 

 

 

 

 

 

 

 조선일보(07. 08. 15) 러시아판 살인의 추억?…60여명 죽인 '체스판 킬러'

‘가상의 체스판 64칸을 가득 채우려고 사람을 죽였다.’ ‘가장 악명 높은 연쇄살인범이 되고 싶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나에겐 살인 없는 삶은, 당신들에겐 먹을 것 없는 삶과 같다’

러시아 연쇄살인범 알렉산더 피추시킨(Alexander Pichushkin, 사진)이 지난 13일(현지시각) 마침내 모스크바 법정에 들어섰다. 1992년부터 2006년까지 49명을 죽이고, 3명을 더 살해하려 한 혐의다. 그러나 이날 러시아 당국이 “당초 예상보다 10명 더 많은 62명이 살해됐을지 모른다”고 밝혀 파문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현재까지 러시아 경찰은 희생자 시신 14구만 발견했을 뿐, 구체적인 추가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을 정도로 혼란 상태다.

그는 모스크바 비체프스키 공원(Bitsevsky Park)서 평범한 슈퍼마켓 종업원으로 일했던 33세 평범한 직원이었다. 그러나 그는 살인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면 노숙자나 노인들을 꾀어 망치로 뒤통수를 내리쳤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남성이었지만, 여성이나 어린이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1992년 18살 때 학교 급우를 살해한 것을 시작으로, 2000년에 들어서면서 집중적으로 사람이 죽이기 시작했다. 사건을 맡은 검사는 해외 언론과 인터뷰에서 “그는 ‘안드레이 치카틸로’를 넘어서길 꿈꿨던 것 같다”고 말했다. 안드레이 치카틸로(Andrei Chikatilo)는 ‘괴물의 심장’이라 불린 전설의 러시아 연쇄살인범이다. 지난 90년대 초반 52명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어린이 인육까지 먹어 구소련의 ‘한니발 렉터’라는 별칭도 있다.

피추시킨은 당초 언론에게 “지금까지 63명을 죽였다”고 자랑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살인을 저지를 때마다 가상으로 그려 놓은 가로·세로 8칸짜리 체스판에 꼼꼼히 기록했다. 64칸을 모두 채우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마지막 피해자는 지난해 6월 동료점원 마리나 모스칼요바(Marina Moskalyova,36)였다. 그는 희생자 주검 발견 이틀 만인 지난해 6월 16일에 마침내 경찰에 체포당했다. 한편, 그는 법정 최고형이 확실시되지만 사형 판결을 받을지는 미지수다. 러시아는 사형이 폐지되지는 않았지만, 1996년 이래 판결·집행이 사실상 정지된 상태다.

07. 10. 26.


 

 

 

P.S. 피추시킨 같은 연쇄살인범의 심리가 궁금하다면 로버트 헤어의 <진단명 사이코패스>(바다출판사, 2005)나 로버트 레슬러의 <살인자들과의 인터뷰>(바다출판사, 2004) 등의 책들을 참조해볼 수 있겠다. 특이한 소재의 역사소설이자 추리소설인 노희준의 <킬러리스트>(랜덤하우스코리아, 2006)에 대한 해설을 쓰느라고 작년 이맘땐가 뒤적거렸던 책들이다. 다시 '살인의 계절'이 돌아온 것인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주미힌 2007-10-26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상.. 정말 싸납네요...

로쟈 2007-10-27 00:50   좋아요 0 | URL
이런 경우는 다른 유전인자가 있을 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읽기 리스트.


2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 1- 영혼의 심연을 파헤친 잔인한 천재
콘스탄틴 모출스키 지음, 김현택 옮김 / 책세상 / 2000년 11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2007년 10월 24일에 저장
절판
도스토예프스키 2- 영혼의 심연을 파헤친 잔인한 천재
콘스탄틴 모출스키 지음, 김현택 옮김 / 책세상 / 2000년 11월
17,000원 → 15,300원(10%할인) / 마일리지 850원(5% 적립)
2007년 10월 24일에 저장
절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07년 9월
11,000원 → 9,900원(10%할인) / 마일리지 55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07년 10월 24일에 저장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2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07년 9월
10,500원 → 9,450원(10%할인) / 마일리지 52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07년 10월 24일에 저장



2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닉네임을뭐라하지 2007-10-24 18:41   좋아요 0 | URL
올 겨울엔 까라마조프를 꼭 완독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

로쟈 2007-10-24 23:26   좋아요 0 | URL
꼭 성공하시길.^^

2007-10-25 08: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25 1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살라흐앗딘 2007-10-25 08:27   좋아요 0 | URL
아, 하나만 더 여쭙겠습니다. 위에 있는 열린책들의 <도스또예프스키 읽기 사전>은 어떤 책인가요? ^^;

로쟈 2007-10-25 12:15   좋아요 0 | URL
말 그대로 사전입니다. 작품해제와 인물 소개 등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소경 2007-10-26 19:02   좋아요 0 | URL
모촐스키의 <도스토예프스키> 얼른 관심 갖았던게 다행이군요..

로쟈 2007-10-26 20:53   좋아요 0 | URL
네, 품절 모드로 들어갔네요...
 

컬처뉴스에서 오랜만에 기사를 옮겨온다. '외국문학 리뷰' 코너에서 찰스 부코우스키의 <팩토텀>(문학동네, 2007)을 다루고 있는데, 이 작품을 나는 '10월의 읽을 만한 책' 목록에 올려놓은 바 있다(책은 오늘 손에 넣었다). 리뷰를 워밍업 삼아 읽어둔다. 리뷰의 필자는 <럭키의 죽음>(랜덤하우스, 2007)의 소설가 이재웅씨이며, 이미지는 내가 덧붙인 것이다. 한편, 책에 대한 소개는 '부코우스키와 치나스키'(http://blog.aladin.co.kr/mramor/1596181)를 참조할 수 있다.

컬처뉴스(07. 10. 19) "뭐, 그래서 뭐?" 

하나의 고백을 먼저 해야겠다. 서울행 전철에서였다. 나는 그 때 『팩토텀』(찰스 부코우스키, 문학동네)의 한 부분을 읽고 있었다. 그 부분은 아주 초반 부분으로 마사라는 여자가 팩토텀의 주인공인 치나스키를 덮치고, 그래서 섹스가 이루어지는 부분이었다. 그 때 내 옆에는 마흔이 갓 넘었을 법한 아저씨가 앉아있었는데, 그는 읽을거리가 아무것도 없었고, 그래서 어떤 무료함을 달래려는 듯한 시선으로 내가 쥐고 있던 『팩토텀』을 따라 읽고 있었다. 나는 처음에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잠시 후 그것을 알아차렸고, 묘한 창피함을 느끼며 슬그머니 책을 덮었다. 그 후에도 나는 몇 번인가 더 버스 안에서, 그리고 전철에서 책을 덮었다. 특히, 여자 앞에서는 더욱 그랬다. 어쩐지 그것이 예의일 것만 같았다.

『팩토텀』은 어떤 면에서는 불편한 책이다. 그것은 그 내용이 너무 노골적이고 또 적나라하기 때문이다. 또, 그러면서도 주인공 치나스키가 무례하고 뻔뻔하기 때문이다. 치나스키는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뭐, 그래서 뭐?”

한 때, 어떤 이들은 현대인을 신(新)유목민으로 규정한 적이 있다. 현대인의 개인주의적 성향, 자유로움, 통신과 교통의 발달, 점조직의 네트워크와 국경의 붕괴 등이 이러한 양상의 원인이기도 하고 결과라고도 했다. 혹자는 더 나아가, 이러한 신(新)유목민이 기존의 농경민들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창조적이며, 또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해낸다고도 했다. 이제는 그런 가치들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나는 이것을 그르다고 생각지 않으며, 어떤 면에서는 긍정적인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치나스키는 어떨지 모르겠다. 어떤 면에서 누구보다도 신(新)유목민다운 그는 과연 신유목민의 출현이 좀 더 역동적이고 창조적이고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해야 하는 삶의 조건들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할까? 치나스키는 어쩌면 이러한 담론들이 삶의 불안정성을 포장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충만 못지않게 불안도 충분히 운동적이기 때문이다. 충만에게 넘쳐흐름이 있다면 불안에게도 균열과 붕괴가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치나스키는 자신도 뻔뻔하지만, 세상의 균열을 다른 형식으로 포장이나 해대는 너희들 역시도 나 못지않게 뻔뻔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치나스키라면 그렇지 않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어떻게 섹스를 빠구리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그의 뻔뻔함, 그의 무례함, 그의 직설적이고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언어들은 어떤 면에서는 세상에 대한 빈정거림이자, 또한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전투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야말로 그의 끝없을 듯한 직업 편력이, 그의 이야기가, 마지막으로 그의 『팩토텀』이 우리에게 불편한 이유일 것이다.

누군가는 치나스키를 위악적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또 누군가는 그저 밑바닥 인생의 직업편력기 정도로 읽을지도 모른다. 또 누군가는 과장이라고 말할지 모른다(하지만 세상에 과장이 아닌 게 있단 말인가?). 하지만, 아주 주관적인 서술을 하자면, 나는 이 책이 우리 사회의 누군가들에게는, 더 정확히 말해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큰 공감을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 역시 밑바닥은 아니지만, 밑바닥의 인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가 치나스키처럼 곤욕스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누가 치나스키처럼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있고, 또 그 환멸 앞에서 떳떳하기 위해 본능적이고 습관적으로 과감함과 냉소를 익히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한 발만 삐끗해봐라, 그럼 바로 밑바닥이다!’ 이 불안 앞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유로울까?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정말이지 우리는 이보다 덜 노골적이고 덜 적나라하단 말인가? 치나스키에 대한 공감은 아마 이 지점부터 시작될 것이다.

이 소설은 『팩토텀』(그 뜻이 잡역부, 막일꾼이라고 책 표지에 친절하게 나와 있다) 그 자체의 삶이다. 말 그대로 밑바닥의 삶이다. 밑바닥의 방황이고, 밑바닥의 고독이고, 밑바닥의 슬픔이다. 나는 ‘팩토텀’의 삶을 앞에 두고 굳이 사회의 모순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는 않다. 또, 부르조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개념을 빌려오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이제 너무 진부한 감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은 어떤 면에서 찰스 부코우스키의 의도를 거스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쩐지 찰스 부코우스키가 그려낸 치나스키는 세계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 “뭐, 그래서 뭐 어쨌다구?”하고 말하고 있는 듯 하기 때문이다. 이 전면적 부정과 냉소적 무관심의 차이는 분명 비슷해보이면서도 다른 것이다. 그리고 찰스 부코우스키는 후자 쪽에 더 비중을 둔 듯하다.

그런 면에서 『팩토텀』을 사실적인 팝 문학이라고 해야 할까? 어쩐지 그것을 떨쳐버릴 수 없다. 치나스키에게 인터내셔널가는 어울리지 않지만 비틀즈의 노래는 제법 잘 어울리는 것이다. 결국, 이것이 어떤 면에서 보면 단조롭기만 한 이 이야기를 풍부하게 보이게 하는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치나스키의 망나니같은 자유분방함을 누가 흉내낼 수 있단 말인가? 또한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어떤 면에서 팝적인 요소가 도처에 도사리기 시작한 한국문학에 있어 좋은 본보기가 될 지도 모른다. 『팩토텀』은 봐, 이것이 오리지널 팝이야! 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위선적인 담론에 속하지도 않지만, 혁명성도 없는 것. 하지만 불편한 것. 리얼리즘적이지는 않지만 구체적인 것. 사실적이면서 동시에 표현주의적인 것.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필연적으로 '그리고 나는 내 그것을 세울 수 없었다'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허무적이고 절망적인 세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치나스키는 살아 있으며, 또한 그 안에서 찰스 부코우스키의 숨결도 살아있다는 것이다. "뭐, 그래서 뭐?"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찰스 부코우스키라는 다소 생소한 작가가 한국 독자들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일 것이다. 그리고 그 방식은 너무도 거칠고, 또한 극렬하기에 나는 전철 안에서, 또 여자 앞에서 이 책을 슬그머니 덮었다는 것이고, 이 책이 정말 괜찮은 책이라고 말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치나스키가 너무도 매력적인 친구라고 말하지 못했다는 것이다.(이재웅_소설가)

07. 10. 23.

P.S. <팩토텀>의 한 부분, 그러니까 "아주 초반 부분으로 마사라는 여자가 팩토텀의 주인공인 치나스키를 덮치고, 그래서 섹스가 이루어지는 부분"이 어떤 것이길래, 라는 호기심에 찾아보니까 이런 식의 묘사로 돼 있다.

"땀 때문에 마스카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그녀가 펄쩍 뛰어올라 날르 덮쳤고 나는 미처 피하지 못했다. 그녀의 벌어진 입이 내 입을 찍어눌렀다. 그녀의 입에서는 침 냄새, 양파 냄새, 곰팡내를 풍기는 포도주 냄새, 거기에 (상상해보면 아마도) 남자 한 사백 명분은 될 정액 냄새가 진동했다. 그녀는 혀를 내 입속으로 쑤셔넣었다. 그녀의 혀는 침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나는 웩웩거리며 그녀를 밀쳐냈다. 그러자 그녀는 무릎을 꿇더니 내 바지의 지퍼를 확 내리고는...(하략)"

 

 

 

 

뭐, 이 정도 묘사야 그 흔한 '야설'들에 비할 바는 아니겠다. 이보다 더 선정적인 건 사실 뒷표지에 실린 카피문구들이다. "조지 오웰 이래, 이처럼 실감나게 존재의 궁핍을 기록한 예가 없다."(뉴욕타임즈)고 해서, <동물농장>의 작가를 검색해보니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삼우반, 2003)이 번역돼 있다. 나로선 거기에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창, 1994; 범우사, 2006)을 보탤 수 있겠다. 카프카의 <단식 광대>와 함순의 <굶주림>을 다룬 에세이를 표제작으로 한 폴 오스터의 <굶기의 예술>(문학동네, 1999)도 이 방면으로 읽어볼 만하다(이 책의 열린책들 버전이 <폴 오스터의 뉴욕통신>이다). 하지만 부코우스키가 '굶기의 예술' 계열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뭐, 그래서 뭐?'란 대사가 치나스키의 입에서 나올 수 없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뉴올리언스 시절을 기억했다. 그 무렵 글을 쓸 수 있는 여유를 얻기 위해 일주일 내내 하루에 오 센트짜리 막대사탕 두 개만 빨며 지낸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굶주림은 예술을 돕지 않았다. 그저 방해할 뿐이었다. 인간의 영혼은 위장(胃腸)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어찌 됐든 인간은 한 푼짜리 막대사탕보다는 고급 비프스테이크를 먹고 반 리터들이 위스키를 마신 다음에야 훨씬 더 글을 잘 쓸 수 있다. 궁핍한 예술가라는 신화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나로선 동의할 만한 주장이다. 그러한 판단은 내가 요즘 (강의 때문에) 읽고 있는 <전쟁과 평화>(1869)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1880) 모두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전기적 삶에 있어서 가장 안정된 시기에 씌어진 작품들이기에 더욱 굳어진다. 아내와의 불화가 극에 달했을 때 톨스토이가 쓴 작품은 <크로이체르 소나타>이며, 폐병환자였던 아내의 고통과 죽음을 배경으로 씌어진 작품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이다. 두 중편 모두 문제적인 작품들이긴 하나 <전쟁과 평화>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비할 바는 아니다. '궁핍한 예술가'도 물론 가능하지만 그는 더 잘 쓸 수 있는 가능성을 놓친 불운한 예술가일 따름이다(이걸로 요즘 나의 궁핍한 글쓰기에 대한 변명을 삼고 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릴케 현상 2007-10-24 23:08   좋아요 0 | URL
더 잘 쓸 수 있는 가능성을 놓친 불운한 예술가라는 말씀이 팍 와닿네요^^ 예술가의 불운이 주어온 후광 같은 건 그래도 무시할 수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은 들지만요

로쟈 2007-10-24 23:16   좋아요 0 | URL
궁핍 속에서도 좋은 시는 씌어질 수 있지만 소설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일정 기간의 지속적인 작업을 필요로 하는 '노동'이니까요...

2007-10-25 1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25 1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26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0-27 00:50   좋아요 0 | URL
저만큼이 아니라 저처럼 하시면 안되지요.^^;
 

오늘따라 방문자 수가 많다. 요즘 뜸하게 페이퍼를 올리는데도 '눈팅' 내방객들이 많은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다. '그녀의 책은 거기에 없었다' 같은 제목이 선정적이어서일까?(고로 대개는 '헛걸음'을 한 게 아닐까?) '저널리스트 마르크스'란 타이틀도 자칫 선정적인 것으로 읽힐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무얼 꾸며대는 건 결코 아니며 마르크스가 저널리스트로 쓴 기사모음집이 최근에 펭귄복으로 출간됐고 그 편집자인 레드베터가 한 잡지에 그에 관한 글을 기고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옮겨올 따름이다. 개인적으론 마감을 제때 지키지 못했다는 마르크스의 에피소드에서 매번 마감이 지나서야 가슴을 졸여가며 가까스로 원고를 마무리짓고 있는 나의 처지가 오버랩되어서이다. 그게 말하자면 나와 마르크스의 드문 공통점이겠다. 차이점? "누군가 마감 독촉을 할 때 가장 좋은 글을 썼다"는 마르크스와 달리 나는 매번 '가장 좋은 글을 쓸 뻔 했는데!'라며 한탄한다... 

한겨레(07. 10. 23) "기자 카를 마르크스는 마감 안 지켜’

그는 열정적인 언론인이었다. 굶어죽는 사람들의 고통을 황색지 기자 못지않게 선정적으로 묘사했고, 급진주의적 성향으로 편집자들과 종종 마찰을 빚었다. 하지만 마감 독촉에 시달린 뒤에야 좋은 글을 썼다는 점에서, 그는 천생 언론인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름아닌 칼 마르크스의 이야기다.

마르크스의 언론인 생활에 대한 책을 집필한 미국 언론인 제임스 레드베터는 미국의 진보적 주간지 <더네이션> 최근호에 기고한 글에서 “1852~1862년 <뉴욕트리뷴> 런던 통신원 생활이 마르크스의 사상적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며, 마르크스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를 철학자나 경제학자뿐만 아니라 기자로서도 분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PENGUIN CLASSICS DISPATCHES FOR THE NEW YORK TRIBUNE

당시 진보지 <뉴욕트리뷴>은 발행부수 20여만부의 세계 최대 신문이었다. 신문에는 10여년간 마르크스가 쓴 글 500여개(4분의1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대필)가 실렸다. 이는 오늘날 마르크스-엥겔스 전집의 7분의1을 차지할 정도의 분량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신문사의 관계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어떤 편집자는 그의 글 앞에 “마르크스는 매우 강한 입장을 갖고 있고, 그중 일부는 우리와 매우 다름”이라는 ‘편집자 주’를 붙이기도 했다. 마르크스 역시 엥겔스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이 신문사에서 자본주의적 착취를 당하고 있다며, “이따위 신문사를 위해 글을 쓰는 것은 구역질이 난다”고 불평한 적도 있다.

당시 여행 제한으로 영국에 발이 묶여있던 마르크스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취재’를 할 수 없었다. 대신 그는 대영도서관에서 유럽 각국의 신문을 섭렵하며 미국 독자들이 접할 수 없었던 유럽의 최신 소식을 전달했다. 여기에 그의 역사에 대한 조예와 엥겔스의 특기인 군사적 지식이 버무려져, 마르크스의 칼럼은 ‘유럽 정치의 주요 사안을 가장 정확하게 짚어주는 글’이라는 평가까지 들었다. 1857년 마르크스는 영국 중앙은행이 활동을 중단할 것이라는 ‘특종’ 기사를 썼다. 아편무역과 노예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통렬한 비판은 그의 글 중에서도 가장 ‘마르크스적’인 것으로 꼽힌다.

레드베터는 마르크스가 언론인 생활을 하며 얻은 사실(팩트)이 그의 사상 발전의 거름이 됐다고 지적했다. 레드베터는 또 “마르크스는 누군가 마감 독촉을 할 때 가장 좋은 글을 썼다”며 “공산주의자동맹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1848년 2월1일까지 <공산당선언>을 쓰라는 강력한 독촉 편지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영원히 그 글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서수민 기자)

07. 10. 23.

P.S. 기사의 타이틀에선 '카를 마르크스'라고 해놓고 본문에선 '칼 마르크스'라고 쓴다('카를'은 물론 'Karl'을 독어식으로 읽어준 것이다). 아마도 기자와 데스크간에 의견 조율이 되지 않은 듯한데, '카를'이라고 티낼 것 없이 그냥 통용되고 있는 '칼'로 충분하지 않은가, 라는 게 내 생각이다(찾아보니 프란시스 윈의 평전이 품절됐다. 마르크스에 관한 전기로는 가장 평이 좋은 책이 아닌가 싶다). '한나 아렌트'를 굳이 '해나 아렌트'라고 적어놓아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하는 건 '원칙의 실천'이 아니라 '고집의 과시'로 여겨지기에...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늘빵 2007-10-23 19:34   좋아요 0 | URL
그냥 하나로 통일했음 좋겠어요. 카를(칼), 휴움(흄), 해나(한나), 롤스(롤즈) 등등

로쟈 2007-10-23 20:11   좋아요 0 | URL
'휴움'도 있나요? 흠...

마늘빵 2007-10-23 23:50   좋아요 0 | URL
오늘 읽은 어떤 책에는 그렇게 되어있더라고요. -_- 좀 옛날 분이 쓰신거긴 합니다.

로쟈 2007-10-24 07:05   좋아요 0 | URL
'휴움'의 경우엔 사정이 다른 것 같습니다.^^ 현재 혼용되는 표기는 아니니까요.

푸하 2007-10-23 21:24   좋아요 0 | URL
"매번 '가장 좋은 글을 쓸 뻔 했는데!'라며 한탄"-- 매번 가장 좋은 글 근처까지 가보신다는 말씀이신거죠? 마감의 압박은 좋은 글을 낳게하는 원천으로 볼 수도 있겠어요.^^;

로쟈 2007-10-23 22:24   좋아요 0 | URL
피가 마른다고 하면 과장이겠지만, 적어도 침은 마릅니다.--;

릴케 현상 2007-10-23 22:04   좋아요 0 | URL
벤담은 벤섬이라고 하던데요~

로쟈 2007-10-23 22:27   좋아요 0 | URL
그런 사례는 많지요. 짐멜->지멜, 임마누엘->이마누엘, 베르그송->베르그손, 로랜스->로런스 등등. 대체로 저는 관행을 존중하면서 일관성을 유지하자는 쪽인데, '원칙'을 강조하는 표기들이 너무 '소모적'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virtuepeak 2007-10-24 00:57   좋아요 0 | URL
월러스틴 같은 경우에는 이매뉴얼이라고 적더군요..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이니 이게 자연스러울까요?

로쟈 2007-10-24 06:53   좋아요 0 | URL
처음부터 그렇게 소개된 경우는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고유명사 표기란 게 '차이'를 드러내주는 걸로 족하니까요. 프랑스 작가 '발자크'를 '발작'으로 표기하는 게 비효율적인 것은 그 '차이'를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임마누엘 칸트'를 '이마누엘 칸트'라고 표기함으로써 우리가 어떤 이익을 얻게 되는 것인지 저는 의문입니다...

자꾸때리다 2007-10-25 20:36   좋아요 0 | URL
하이덱거 같은 경우는 어떨까요? 나이 드신 분들은 하이덱거라고 쓰시던데.

로쟈 2007-10-26 20:58   좋아요 0 | URL
현재 '하이데거'로 통용되므로 별 문제는 아닌 거 같습니다.^^

lastmarx 2007-11-04 09:36   좋아요 0 | URL
프랜시스 윈의 [마르크스 평전]은 재밌는 전기인데, 에드먼드 윌슨의 [To the Finland Station] 가운데 맑스 부분에서 가져온 게 많습니다.
예전에 정치부 기자일 때 <맑스는 다른 정치부 기자들과 달리>라는 메모를 한 적이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lastmarx/60018927087

로쟈 2007-11-04 09:52   좋아요 0 | URL
베꼈더라도 '표절'은 아니겠지요. 유명한 저작을 베낀다는 건 '자살'행위일 테니까요. 절판된 윌슨의 책은 다시 나온다는 얘기도 있던데, 가급적이면 원제대로 재출간되면 좋겠습니다...

lastmarx 2007-11-04 11:39   좋아요 0 | URL
표절이 아니라 윌슨이 맑스에 대해 논한 것들을 윈이 가져다가 논하거나 살을 붙이거나 했다는 것이지요. 평전은 각주가 없는 책이고 '생각'의 출처를 다 명시하진 않으니까요. 평전을 먼저 읽고 참 똑똑하다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윌슨의 혜안이었던 것이지요. 클린턴 부부도 청년기에 읽었다던 To the Finland Station 원제로 고쳐 놓고 번역문장과 편집도 잘해서 고급스런 책으로 나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