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만에 미술 전시회에 관한 기사를 옮겨온다. 북리뷰들만 읽다가 진절머리도 나서(왜 아니겠는가!) 잠시 미술쪽으로 눈을 돌렸다가 의외로 '횡재'한 기분이 들게 한 기사이다. 시간이 난다면 이 가을이 가기 전에 미술관으로 걸음을 돌려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최근에 국내외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는 안성하, 배준성, 두 젊은 작가의 전시회인데, 이런 경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해 보인다. 이미지만으로도 활자로 인한 멀미를 잠시 덜어준다(기사에 딸린 이미지들은 각각 미술관전시정보 http://link.allblog.net/6322314/http://www.galleryinfo.co.kr/170 와 갤러리현대 http://www.galleryhyundai.com/new/kr/exhibitions/past84_1.htm 에서 가져온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국일보(07. 11. 05) 클로즈업·각도비틀기… 확 달라진 이미지들

미술시장의 젊은 스타작가 두 명의 개인전이 나란히 열리고 있다. 담배와 사탕을 클로즈업해 그리는 젊은 여성작가 안성하(30)와 서양 명화에 한국여인의 누드사진을 합성해 고전을 비틀어온 배준성(39)이 그들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선보이고 있는 안성하의 신작들은 100~200호의 대작들이 대부분. 전시장에 들어서면 매크로 렌즈로 접사한 듯한 사실적이고도 거대한 화면이 시각을 압도한다. 수십 배로 클로즈업된 이 사소하고도 일상적인 오브제들은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어쩐지 쓸쓸해지는데, 투명하고도 촉촉한 화면이 도회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탓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언뜻 보면 사진처럼 보일 정도로 담배와 사탕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그의 그림들은 유리를 통해 굴절되는 오브제로 인해 몽환적이면서도 추상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극사실적인 구상 밑에 아스라이 배채(背彩)된 추상의 흔적이 묘한 아우라를 느끼게 하는 게 그의 매력. 국내 미술시장은 물론 스페인 아르코 아트페어와 소더비, 크리스티 등 해외경매에서도 각광받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작가는 “담배는 독이며 아름답지 않지만 그것이 가져다주는 정신적 위안이 아름답고, 사탕은 달콤하고 유혹적이지만 결국 독이 되고 만다”고 말한다. 줄곧 사탕과 담배만을 그려온 이유다. 13일까지. Close Window

배준성은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7~25일 열리는 ‘더 뮤지엄’전에서 벨라스케스, 다비드, 앵그르, 베르메르 등 거장들의 명화에 동양 여성의 누드를 슬쩍 끼워넣는 기존 방식에 렌티큘러라는 새로운 매체를 가미한 신작 40여점을 소개한다.

Close Window

렌티큘러는 층층이 쌓인 레이어로 인해 보는 각도에 따라 이미지가 달라보이는 입체 영상 매체. 시각적 교란을 통해 이미지가 움직이는 듯 보이는 렌티큘러를 통해 왼편에서 보면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명화 속 한국 여인이 오른쪽에서 보면 나체의 모습으로 변한다.

Close Window

“움직이는 정물을 그리고 싶었다”는 작가는 프라도 미술관, 루브르 박물관, 에르미타주 박물관 등 12개 유명 박물관들의 내부 전경을 유화로 그린 후 명화가 걸려있던 자리에 자신의 렌티큘러 작품을 덮어씌웠다. 관음의 욕구를 부추기며 훔쳐보기를 위한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작품들이다.(박선영기자)

07. 11. 04.

P.S. 배준성의 예전 작품들은 'The Costume of Painter'(터치아트, 2006)로 출간돼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섬나무 2007-11-05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절머리난 북리뷰 읽기...ㅎ

로쟈 2007-11-05 17:28   좋아요 0 | URL
^^;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할 것 없이 스캔들로 얼룩져가는 게 요즘 '조용한 아침의 나라'이다. 대선이 껴있는 연말까지 이런 추세는 더욱 강화되고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모처럼 청명한 가을 하늘을 바라보면서도 마음이 맑지 않은 이유이다. 개인사는 접어두고서라도 말이다. 책을 읽는 마음 또한 그러하다.

책소개 글들을 정기적으로 쓰고 있기에 매주 나오는 북리뷰들을 일견해보는 것이 '습관'처럼 돼 버렸다(하긴 이건 오랜 습관이다). 가을날 배낭 하나 짊어지고 길 떠나는 팔자는 아닌 것이다. 이번주에는 별로 눈에 띄는/드는 책들이 없는데(내 경우엔 '의외성'이 판단의 중요한 기준이다. '뜻밖의 책'과의 만남이야말로 가슴 뛰는 일이니까), 그냥 담담하게 <중세의 사람들>(이산, 2007)이나 만나보기로 했다. 

중세와 중세사에 관한 책들이 비교적 드물지 않은 상태에서 이 밋밋한 제목의 책이 눈길을 끄는 건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먼저, 저자인 아일린 파워(1889-1940)가 영국의 여성 사학자로서 중세관련으로는 국내에 많이 소개된 프랑스쪽 역사학자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또 한가지는 책이 먼지 흠뻑 뒤집어쓰고 있을 만한 1924년작이라는 것. 80년도 더 된 책이 여전히 출간될 만하다면 '고전'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관심을 갖고 있는 시대가 아니어서 과문하지만 책은 '사회경제사의 고전'이라고 한다. 출판사 소개는 이렇다.  

이 책 <중세의 사람들>은 바로 그 새로운 시각으로 쓰인 사회경제사의 한 전형 같은 역사서로서, 지금은 사회경제사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외국에서는 서양중세사의 기본텍스트로 읽히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비록 초판이 출판된 지 80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완역되었지만, 의외로 비전문가인 학생과 일반인도 적지 않게 이 책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중학교 사회교과서에 이 책 1장의 일부가 인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이 책을 읽어보고 싶은데 책을 찾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쉽게 눈에 띈다.

이 책을 이미 알고 있는 "의외로 비전문가인 학생과 일반인" 축에도 못 끼는 형편이라 쑥쓰럽지만 여러 기대와는 달리 로쟈는 책을 그리 많이 읽는 편이 아니다(독서가 취미는 넘어서지만 직업은 아니기에). 더구나 중세사에 관해서라면 기본서들이나 장서용으로 모아두었다가 지금은 박스에 보관중이니 전문가는커녕 '비전문가'도 못되는 것이다. 아래 리뷰를 보면 "서양의 중세를 이해하는 데 최적의 입문서"라고 강추하고 있다. 나 같이 '무지한' 독자에게 딱 맞는 책이겠다.   

경향신문(07. 11. 03) 중세, 민초의 삶을 더듬다

서양 중세의 일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케임브리지 대학의 경제사 교수인 아일린 파워(1889~1940)가 쓴 ‘중세의 사람들(Medieval People)’은 평범한 6명의 인물을 등장시켜 중세 사람의 다채로운 삶을 손에 잡힐 듯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이 책에서 무겁고 어두운 중세의 종교적 분위기 대신 민초들의 땀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 6명은 샤를 마뉴 치세 하의 프랑크 왕국의 농부 보도, 베네치아 상인 겸 여행가인 마르코 폴로,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 나오는 수녀원장 마담 에글렌타인, 파리의 중간 계급 가정 주부인 메나지에의 아내, 15세기 지정 거래소의 양모무역 상인인 토머스 벳슨, 헨리 7세 시대 에식스의 모직물 업자인 토머스 페이콕 등이다. 등장 인물들 가운데에는 마르코 폴로처럼 매우 유명한 사람도 있고, 마담 에글렌타인처럼 수녀원장도 있지만 나머지는 모두 중세시대에 살던 중간 계급 이하의 사람들이다.

저자는 “이런 평범한 사람들이 중세 사회를 떠받치고 변화를 주도해 결국 자본주의 사회가 열렸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그리면서도 “중세는 결코 ‘암흑시대’라는 말로 단순화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기층의 사람들을 다루고 있지만 굳이 이 책이 ‘민중사’로 불리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등장 인물들의 사회적 스펙트럼이 넓기 때문이다.

아일린 파워는 자신이 여성이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주인공 6명을 남자 3명, 여자 3명으로 설정했다. 저자는 주인공이 남자든 여자든 반드시 그들의 남녀 관계를 다루고 있다. 최근 역사 연구에서 여성사를 제외하면 여성을 남성과 같은 비중으로 다룬 역사서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도 이 책은 20세기 초반에, 그것도 중세사에서 이렇게 구체적으로 여성의 삶과 일상을 소개했다는 점에서 대단한 작업으로 평가될 만하다.

‘중세의 사람들’은 여느 중세 관련 서적처럼 성직자, 영주, 기사의 신앙이나 무용담을 다루는 게 아니다. 생산과 유통을 담당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그 때문에 이 책은 ‘사회경제사의 고전’으로 평가 받는다. 저자는 “사회사는 정치사에 비해 저명한 인물이 등장하지 않아 독자의 관심을 끌기도 어렵고 간혹 모호하고 막연하다는 비판을 받는다”면서도 “개인 위주의 서술 방식이 화려하지는 않아도 결코 재미가 작은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중세의 사람들’은 서양의 중세를 이해하는 데 최적의 입문서라 할 만하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개론적 지식 이상의 것을 얻으면서 역사의 의미를 곱씹어 볼 수 있다. 원저의 초판은 1924년 나왔으나 이번에 국내에서 처음 완역됐다.(설원태 선임기자)

07. 11. 04.

 

 

 

 

P.S. 중세에 관한 너무도 많은 책들 가운데 <중세의 사람들>과 관련해서 떠오르는 건 자크 르 고프 등의 <중세에 살기>(동문선, 2000)와 노만 켄터의 <중세 이야기>(새물결, 2001)이다. 특히 '위대한 8인의 꿈'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중세 이야기>는 직접적으로 아일린 파워의 책을 염두에 두고 씌어진 것이다.

저자 켄터에 따르면, "이 책은 4세기에서 15세기에 살았던 여덟 명의 중세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파워의 책과 마찬가지로 이 책도 일반 독자와 대학생을 대상으로 씌여졌으며, 중세인 여덟 명의 간략한 전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 책은 파워의 고전적인 작품과 몇 가지 분명한 차이가 있다. 파워는 사회경제사가인 반면 나는 문화사와 지성사에 주로 관심을 갖고 있다." 따라서 파워의 책과 나란히 읽어볼 만하다. 특별히 중세의 여성들에 대해서는 르 고프와 함께 중세사의 거장으로 꼽히는 조르주 뒤비의 <12세기의 여인들>(새물결, 2005) 등이 번역돼 있으므로 참고할 만하다. 


댓글(7) 먼댓글(1)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책블로그도 인기 블로그가 될 수 있다?
    from 내 안에 아직 2007-11-04 18:17 
    제가 애용..까지는 아니지만 책을 살 때 주로 이용하는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는 블로그 서비스도 제공합니다.마이리스트, 마이리뷰 등 내가 알라딘에 올린 글들을 모아주고다른 사람이 쓴 글들을 쉽게 불러올 수 있기 때문에알라딘을 많이 이용하신다면 이용해 볼만하다고 하고 싶지만블로그 자체의 기능은 자유도가 많이 떨어지고 제한된 점이 많습니다.말 그대로 '서재'로만 이용하기엔 좋을 듯 합니다.제한되고 협소한 공간임에도 불고하고그 중에서 유명한 블로그가 하나...
 
 
람혼 2007-11-04 13:13   좋아요 0 | URL
<중세의 사람들> 책 소개를 보니, 일전에 새물결 출판사에서 번역 출간되었던 Norman F. Cantor의 <중세 이야기-위대한 8인의 꿈(Medieval Lives)>이 생각납니다. 비슷한 형식으로 또한 흥미롭게 읽은 책은ㅡ비록 중세사에 관한 책은 아니지만ㅡSusan Whitfield의 <실크로드 이야기(Life along the Silk Road)>(이산)가 떠오르는데, 이런 식의 "인물의 '생생한' 생을 통해 본 당대의 역사 이야기"를 저는 상당히 좋아하는 편입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마르크 블로크의 thaumaturgie에 대한 연구나 뤼시엥 페브르의 라블레론, 루터론, 또한 거시와 미시의 씨실과 날실을 직조하는 조르주 뒤비의 여러 책들을 또한 첨가할 수 있을 텐데요, 또 다른 '비전문가' 내지는 '순수'애호가의 입장에서(^^;) 상당히 반가운 책 소식입니다. 감사드립니다.
덧붙여, 어떤 책과의 만남에 있어서 '의외성'과 '뜻밖의 만남'을 중요한 기준으로 생각하시는 로쟈님이, 왠지 더욱 저와 '가깝게' 느껴지는군요.^^

로쟈 2007-11-04 13:12   좋아요 0 | URL
켄터의 책은 빙고입니다. 제가 글을 쓰는 중에 댓글을 달아주셨네요.^^

람혼 2007-11-04 13:17   좋아요 0 | URL
앗, 거의 실시간 댓글이군요. 이미지 올려주신 르 고프의 <중세에 살기>도 재미있는 책이죠.^^ 르 고프가 쓰거나 편집한 책은 국내에도 다종다양하게 나와 있지만, 특히 르 고프 편집의 <고통 받는 몸의 역사>(지호)도 이른바 '병리학의 고고학'이라는 입장에서 가볍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인 것 같습니다.

로쟈 2007-11-04 13:30   좋아요 0 | URL
뒤비나 르 고프의 책들은 이미 서가 하나 정도는 차지할 만큼 소개돼 있어서 제가 중세에 큰 관심이 없다는 게 다행으로 여겨질 정도입니다.^^;

람혼 2007-11-04 13:42   좋아요 0 | URL
하하, 그런 심정은 정말 이해가 가는 바입니다.^^ 글이 진행중일 때 단 제 댓글과 로쟈님의 완성된 글이 이루는 고리를 보니, 역시나 책이 책의 꼬리를 무는 '하이퍼텍스트'의 여러 갈래 길이란 것이 어느 정도는 '공통감각'을 포함하는 '포장도로'라는 생각도 한 자락.^^;

wnsgml 2007-11-04 18:06   좋아요 0 | URL
글 약간 인용할려고 하는데요, 양해부탁드립니다.
트랙백으로 주소 달아드릴게요 ^^

로쟈 2007-11-04 18:27   좋아요 0 | URL
먼댓글 말씀이신가 보네요. 책에 관한 정보라면 저는 '카피레프트'의 입장이기 때문에 북리뷰들을 많이 옮겨오고 있습니다. 블로그란 게 절반은 공적인 공간이니까요(대신 절반은 사적인 공간이기에 제 얘기들을 끼워넣고 있습니다)...
 

개봉대기중인 영화들 가운데 화제를 모으고 있는 작품은 단연 리안의 신작 <색, 계>이다. 이미 여러 저널들의 호평을 접하면서 오랜만에 영화관 외출을 꿈꾸게 하는 작품인데, 눈에 띄는 대로 한겨레21의 리뷰(http://h21.hani.co.kr/section-021015000/2007/11/021015000200711010683007.html)를 옮겨놓고 슬쩍 읽어본다. 감독과 주연 여배우(탕웨이)가 내한하여 기자회견 등도 가졌지만 따로 보태지는 않는다. 대신에 장학우가 부른 주제가는 한번 들어보시길(http://www.youtube.com/watch?v=QDWrZuJKGrk).

한겨레21(07. 11. 01) 색에 빠진 자, 계를 잃을지니

사랑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그의 진심은 과연 무엇인가. 사랑에 대한 오래된 혹은 해묵은 주제다. 이렇게 해묵은 주제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 데, 리안 감독만큼 적임자도 드물다. 고급스런 대중영화의 장인이자 사랑의 감정을 다루는 기술자인 리안 감독은 오래된 이야기 혹은 통속적 사랑을 사랑이 불가능한 상황에 던져둔다. 그리고 희열과 고통으로 얼룩진 인물의 표정을 날카롭게 잡아내 관객의 마음을 후벼판다. 불가능한 사랑만큼 사랑의 애절함을 절절하게 드러내는 사랑도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카우보이들의 동성애는 처연했다. 리안이 이번엔 중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940년대 일본에 점령된 상하이, 친일파 정보부 대장과 그를 암살하려는 여성 사이에 불가능한 사랑이 시작된다. 리안의 <색, 계>(色, 戒)는 서로를 경계(戒)하지만, 서로의 색(色)에 빠져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다.(*예고편은 http://www.youtube.com/watch?v=uqnBNz5xppQ)

일본의 침략을 피해서 홍콩으로 피난온 왕치아즈(탕웨이)는 외롭다. 그의 친구들은 항일운동에 뛰어들고 그도 자신의 운명을 저항운동에 맡긴다. 밀수업자의 아내인 막 부인으로 위장해 친일파 정보부 대장 이(량차오웨이)의 부인(조안첸)에게 접근한다. 그들의 목표는 이의 암살. 어렵게 이 부부에게 접근하지만 갑작스레 부부는 상하이로 돌아가버린다. 사실 왕치아즈는 암살의 주모자인 광위민(왕리훙)을 연모해 암살에 가담했다. 하지만 그들은 목표를 이루지도 못하고 왕치아즈는 상처만 받는다. 그리고 3년의 세월이 흐른다. 광위민이 다시 왕치아즈를 찾아온다. 그리고 왕치아즈는 또다시 막 부인이 돼 이에게 접근한다.

적을 유인하며 연인을 유혹하는 마음

이제 모든 행위는 하나의 의미가 아니다. 막 부인의 행위는 이에 대한 유인이자 유혹이다. 적을 유인하는 일이자 연인을 유혹하는 행위다. 막 부인은 어느새 자신이 죽여야 하는 자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색(色)은 계(戒)를 무장해제시켜버렸다. 이의 거친 숨결은 막 부인의 가슴을 파고들었을 뿐 아니라 마음까지 달구었다. 이제 상황은 바뀌고 진실마저 모호하다. 나의 편인 저항군은 나를 이용하려고만 하고, 적인 그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나를 이용하는 자와 나를 사랑하는 자의 자리가 모호하다. 영화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영화관이 어두워서 영화를 보러가지 않는다는 이도 외롭다. 너무나 오랫동안 아무도 믿지 못했던 이는 의심에 지쳤다. 그래서 이는 막 부인을 “믿는다” 보다는 “믿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모든 행위는 역설이고, 모든 말은 모호하다. 막 부인은 저항군에게 당신들이 그를 죽여버리는 꿈을 꾼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진심인지 그조차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은 언제부터 사랑했을까. 어쩌면 처음부터. 처음으로 이를 만나고 돌아온 왕치아즈에게 친구가 묻는다. “어떻게 생겼어?” 그는 “상상하곤 다르다”고 대답한다.



적나라한 섹스신엔 체념과 위로가

리안의 영화에서는 무엇을 이야기하느냐보다는 어떻게 보여주느냐가 중요하다. <색, 계>는 집요한 상반신 클로즈업으로 인물의 감정을 잡아낸다. 배우들의 완벽에 가까운 연기는 집요한 클로즈업을 끝까지 견뎌낸다. 20여 년을 연기한 량차오웨이도, 첫 번째 영화에 출연한 탕웨이도 완벽하게 리안의 인물로 변신한다. 미인대회 출신인 탕웨이는 미모보다는 연기로 관객을 놀라게 한다. 그리고 조연배우 누구나 자신의 연기를 해낸다. 이렇게 완벽한 연기에 담긴 무심한 행동이나 스쳐가는 말들은 영화의 공기를 서서히 물들인다. 어느새 쌓인 먼지처럼 어느덧 켜켜이 쌓인 감정에 빠져들게 만드는 <색, 계>는 ‘리안표’ 영화다.

<색, 계>는 스캔들의 영화다. 적나라한 섹스신이 화제를 모았고, 성기와 음모 노출 논란도 있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30분가량 삭제된 채로 상영됐고, 미국에서도 17살 이하 관람금지 등급(NC-17)을 받았다. 다행히 한국에서는 제한상영 판정을 받지 않고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으로 심의를 통과했다. 세 번의 섹스신은 색에 굴복해 계를 포기한 자의 체념한 표정으로, 서로의 외로움을 쓰다듬는 위로로 남는다.

오늘날 리안만큼 종횡사해 동서고금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감독은 드물다. 서양과 동양, 시대극과 현대물, 이성애와 동성애, 리안은 무엇을 만들어도 대중성과 작품성의 접점을 찾아내는 능력을 보여왔다. 리안은 뉴욕에 사는 동양인 게이와 그의 아버지 사이의 갈등과 화해를 그렸던 <결혼 피로연>으로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받으며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아이스 스톰>에서 1970년대 미국 중산층의 해체를 그렸던 리안은 <와호장룡>으로 홀연히 옛날의 중국으로 돌아갔다. 한편으론 19세기 영국 배경의 <센스 앤 센서빌리티>도 영화로 옮겼다. <색, 계>는 리안이 <브로크백 마운틴> 이후에 다시 중화권 감독으로 돌아와 만든 영화다. <색, 계>로 그는 2005년 <브로크백 마운틴>에 이어 2년만에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장을 받는 드문 사례를 남겼다. <색, 계>는 중국의 여성소설가 장아이링의 작품을 원작으로 삼았다. 관진펑(관금붕)의 <화이트 로즈, 레드 로즈>, 허우샤오셴의 <해상화>도 장아이링의 소설이 원작이다. <색, 계>는 11월8일 개봉한다.(신윤동욱 기자)

07. 11. 03.

P.S. 그러고 보니 <헐크>를 제외하곤 리안의 영화 대부분을 본 듯하다. <결혼피로연>(1993)의 유쾌한 기억이 어느새 14년전인데, 그 사이에 한 아시아계 영화감독은 세계적인 거장이 되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그 시간의 가치는 저마다에게 다른 것이다. 기사의 말미에 장아이링(장애령)이란 이름이 눈에 띈다(그러고 보니 <화이트 로즈, 레드 로즈>와 <색, 계>의 분위기가 비슷해도 보인다).

이 걸출한 중국(대만) 여성작가의 작품으론 몇 권이 더 번역됐었지만 현재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건 재작년에 출간된 중단편집 <첫번째 향로>(문학과지성사)와 <경성지련>(문학과지성사) 두 권뿐인 듯하다. 이 작품들에 대한 개략적인 소개는 이렇다:

중국의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장아이링(장애령.張愛玲)의 중단편소설집이다. '붉은 장미, 흰 장미', '경성지련'을 포함하여 총 일곱 편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1944년 상하이에서 장아이링의 유일한 소설집이 <전기(傳奇)>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1994년 타이완의 '황관출판사'에서 <장아이링 전집>(전 15권)을 내면서 <경성지련>, <첫번째 향로> 두 권으로 나누어 재출간했다. 한국에 소개되는 두 책은 '황관'의 예를 따랐다.

중국에서는 '루쉰 이후엔 장아이링'이란 평을 듣는다고도 하니까 호기심에라도 읽어봄 직한 작가이다. 이번 늦가을은 장아이링과 함께?..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이드 2007-11-03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래가 정말 좋네요. 장아이링은 보관함으로 ost.는 장바구니로 갑니다.

로쟈 2007-11-03 23:51   좋아요 0 | URL
저도 장학우의 목소리는 오랫만에 듣습니다.^^

수유 2007-11-04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편안하게, 따라 행복감을 느끼며 보는 영화가 될 것 같습니다. 일주일을 잘 견뎌야겠지만.

2007-11-04 2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05 0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1-05 22:34   좋아요 0 | URL
그런 면역력이라면 크게 걱정하진 않아도 되겠네요.^^

섬나무 2007-11-05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안 감독 스스로가 자신이 투영된 작품은 1995년작 '센스 앤 센서빌리티'까지만이고 이후로는 자신의 모습을 양파껍질 벗듯 벗기 시작했다고 하데요. 영화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정직할 수 있는 용기와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라고 보는데 지금은 미치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답니다. 이 영화를 미치기 직전까지 밀어붙였단 말인듯...
양조위에게 그의 눈빛 연기-여자들을 뇌살시키는-는 영화 마지막에만 주문했다던데... 전혀 그렇지 않군요...ㅎㅎ

로쟈 2007-11-05 17:30   좋아요 0 | URL
오늘 필름2.0에서 리안과 탕웨의 인터뷰를 읽었는데, 말들도 잘하더군요...

소경 2007-11-05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보XX에서 '장애령'이라 검색하니 그녀의 다른 책들도 구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로쟈 2007-11-05 22:34   좋아요 0 | URL
저도 도서관에서 검색했던 책들인데, 아쉽게도 <색, 계>는 아직 번역되지 않은 듯합니다...

소경 2007-11-06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색, 계>까지 번역 되었더라면 이거 친구 밥 한끼에도 매몰차게 거절할 수 밖에 없는 빈털털이/수전노임에도 급 선회해서 사려 했을 거에요 ^^; 장학우 노래덕에 <색 계>에 대한 관심이 이만저만 아니라서.
 

한 대학원신문의 '논문리뷰'로 실리게 될 글을 옮겨놓는다. 당초엔 인문학번역에 관한 논문들의 리뷰를 기획했었지만 내가 읽은 두 편의 논문이 모두 '함량' 미달이어서 그냥 가장 손 가까이에 있는 학술지의 논문을 리뷰의 대상으로 골랐다. 소비에트 해체 이후, 즉 포스트소비에트 시기라고 불리는 최근 십수 년간의 러시아 문학장에 관한 개관논문인데, 필자는 대중문학의 대두를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꼽고 있다.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흥미를 가질 법한 내용이어서 자리를 마련한다(아래는 이문영, “포스트소비에트 시기 러시아 문학장의 변화와 대중문학”, <슬라브학보>, 제22권 3호, 2007에 대한 나대로의 요약/정리이다). 이미지와 군말은 새로 덧붙인 것이다(*이 논문을 포함한 저자의 논문집이 <현대 러시아 사회와 대중문화>(한울, 2008)란 제목으로 출간됐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몰락 이후의 러시아를 지칭하는 ‘포스트소비에트’ 시기에 관한 국내외 연구자들의 관심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1991년 사회주의 연방의 해체 이후 현재까지 숨 가쁘게 진행되어온 포스트소비에트 러시아의 변모과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관심대상이다. 우리의 경우에는 거기에다 러시아 연구가 갖는 지정학적 의의를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한반도 주변 4강의 일원이자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한 축으로서 현 러시아의 향방에 주목이 쏠리는 것은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국내에서도 특히 최근 3-4년 동안 포스트소비에트 시기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서의 변화양상에 대한 여러 연구과제들이 수행되었고 그 성과들이 논문으로 발표되고 있다. 이 논문 또한 그러한 성과의 일부이며 체제전환 이후 러시아 문학장(文學場)의 전반적인 변화양상을 ‘대중문학의 비약적인 성장’이라는 관점에서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대중문학의 성장과 그 기능의 확대는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필자의 지적대로 과거 소비에트 문학장에서는 나타날 수 없었던 현상이기에 소비에트와 포스트소비에트를 변별해줄 수 있는 중요한 문화적 요소가 된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에게 소개된 러시아문학 작가와 작품들을 일별해 보아도 ‘대중문학’이란 러시아문학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가장 거리가 먼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로 대표되는 문학이 아니었던가.

 

 

 

 

 

 

 


사실 러시아 문학의 ‘진지성’은 러시아 근대문학의 전통이기도 했다. 비록 본격예술문학과 구별되는 대중문학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러시아 인텔리겐치아가 주도해온 러시아문학은 언제나 “도저한 정신성, 특유의 진지함과 철학적 야심”으로 특징지어졌고 따라서 대중문학은 문학사에서 배제되어왔다. 이러한 경향은 소비에트시기에 더욱 강화되어 상업적 대중문학에 반감은 아예 볼셰비키들의 적의로 대체되었다. 한마디로 대중문학이 자리할 공간이 없었던 셈이다.

   

Владимир Набоков Владимир Набоков. Собрание сочинений американского периода в 5 томах. Том 3. Пнин. Рассказы. Бледное пламя

 

하지만 사회주의체제 몰락 이후 사정은 전혀 다른 것이 되었다. 이른바 러시아 문학장의 전통적인 구조를 뒤흔드는 변화가 발생한 것이다. 논문의 필자는 그러한 변화를 집약해주는 키워드가 바로 대중문학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1990년대 이후 체제전환을 경험한 러시아 사회를 장악한 것은 자본의 논리와 상업화 원칙”이고 이는 문학장의 구조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초기에는 솔제니친과 파스테르나크, 나보코프 등과 같은 반체제 작가, 혹은 망명작가 들이 주로 대중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러한 일시적인 ‘고급문학’ 붐은 시장원리에 따라 곧 ‘대중문학’ 출판붐으로 이어졌다.

과거 국가가 주도하던 출판 시스템이 붕괴하면서 출판시장은 자연스레 위축/둔화되었고 이러한 가운데 소련시기 거대 국영출판사들을 대신하여 러시아 출판시장의 권력으로 등장한 것이 독과점 민영출판사들이었다. “1991년 러시아에서 출간된 신간물 목록의 8%, 그 총발행부수의 21%를 민영출판사가 담당한 반면, 2002년 그 비율은 66%/87%로, 2004년에는 68%/91%까지 높아진다.” 한마디로 출판의 주체가 교체된 것이다.  

 

Дарья Донцова Ангел на метле

 

이렇게 등장한 민영출판사들의 경영원칙은 다품목 소량생산이었고 이러한 전략이 갖는 상업적인 차원에서의 결함을 보완해주는 것이 바로 대중문학 붐이었다. 지난 2005년을 기준으로 할 때, 출판자본에 최단기간 최대이익을 보장해주는 시리즈물 형식의 대중소설은 전체 신간종의 35%, 그 발행부수의 53%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다. 2001년 러시아 최대서점의 통계에 따르면 전체 문학판매량의 38%가 돈초바, 폴랴코바, 다쉬코바, 마리니나 등의 추리소설이었다는 사실도 포스트소비에트 문학장의 특징을 단적으로 말해준다(마리니나의 추리소설은 국내에도 네댓 종이 소개된 바 있지만 별다른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대중소설 작가들이 전면에 부각하게 되는데, 대부분 우리에게 생소한 이름들이긴 하나 이들 대표적인 작가들을 유형별로 거명하면, 첫 번째로 액션소설 영역의 도첸코, 코레츠키, 압둘라예프, 두 번째로 추리탐정소설 영역의 돈초바, 다쉬코바, 마리니나, 세 번째로 역사소설 장르의 아쿠닌, 네 번째로 연애소설 장르의 우스티노바야, 즈나멘스카야, 빌몬트, 그리고 SF 판타지 장르의 알렉세예프, 보즈네센스카야, 세묘노바 등이 있다. 체제전환 직후에는 남성작가가 남성독자들을 주 대상으로 쓴 폭력적인 액션, 범조소설들이 인기를 끌었다면, 2000년 이후에는 여성추리소설이 강세를 보이면서 여성작가들의 약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Борис Акунин Азазель

 

변화된 인기작가군들 가운데 특히 주목의 대상이 되는 인물은 “포스트소비에트적인 작가 페르소나의 가장 전형적이고 성공적인 사례”로 꼽히는 ‘러시아의 에코’ 보리스 아쿠닌이다(아쿠닌의 작품들은 국내에도 곧 소개될 예정이다).

 

 

천만부 이상을 판매할 정도의 대중적인 인기와 함께 평단의 지지까지 얻고 있는 그는 자신이 ‘전문가’로서 ‘시장’에서 일하고 있으며 작품을 가지고 “대중잡지, 무대, 영화 TV로 나아가 이익을 얻을 계획”이라고 떳떳하게 밝힌 바 있다.

 

 

이미 그의 여러 작품들이 TV 드라마나 연극, 영화로 제작되고 있으며 이러한 다매체적 ‘소통’은 또한 포스트소비에트 문학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지적된다(국내에도 루키야넨코의 판타지 <나이트워치>와 <데이워치>가 소개된 바 있다. <나이트워치>의 경우는 2004년 영화로 개봉되어 1600만불 이상의 흥행수익을 올렸다).  

 

 

 

 

 

 

 

 

 


이렇듯 대중문학에 의해 주도되는 포스트소비에트 문학소통구조인지라 독자의 위상이 현저하게 강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독서인구는 점차로 감소하고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컬하다. 한 설문에 따르면 1994년에는 러시아 성인인구의 23%가 책을 전혀 읽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지만 이 수치는 2002년에는 40%로 늘어났다(현재 러시아 인구의 45%가 전혀 책을 사지 않는다고 한다). 대중문학의 득세와 함께 ‘문학예술의 나라, 러시아’의 간판도 곧 내려야 할 듯싶어 씁쓸한 여운을 갖게 된다.

 

07. 11. 03.

 

 

 

P.S. 포스트소비에트 문학의 국내 소개는 지극히 저조하다. 보리스 아쿠닌을 비롯하여 몇몇 작가가 곧 소개될 예정이지만 다른 언어권에 비하면 여전히 초라한 수준이다. 게다가 영화건 소설이건 러시아 대중문학/문화가 국내에서 '재미'를 본 적도 별로 없어 보인다(이런 사정이 악순환을 낳고 있는 것!). 가장 최근에 나온 러시아 대중문학작품으론 '스무살 러시아 여성작가의 발랄하고 충격적인 뉴웨이브 소설'로 소개된 이리나 제네쥐끼나의 <나에게 줘!>(문학세계사, 2007)이다.  

 

Ирина Денежкина Дай мне!

 

'대중문학'이라고 하지만 저명한 문학상 최종심에까지 올라간 작품으로 '신세대' 소설이며(이리나는 1981년생으로 우리작가 김애란보다도 한 살이 어리다), 20여 개국에서 17개 언어로 번역되었다고 하니까 유명세를 짐작하게 한다. 그럼에도 물론 국내에서는 전혀 '소개'되지 않은 작품이다. 제목에서 강조되고 있듯이 포인트는 '나'이다. 사실 소비에트 사회주의사회에서 포스트소비에트 자본주의사회로의 이행은 '우리'에서 '나'로의 이행이기도 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털세곰 2008-08-29 0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제쥐끼나의 책은 역자에게 한권 턱 증정받았기 때문에 지하철에서 오가다 좀 읽었습니다. 그닥 재미는... 데네쥐끼나가 범지구적 유명세를 탄 것은, 기억하길, 2004년 에딘버러 축제에 문학의 나라, 러시아를 대표하는 젊은 작가(?)로 소개되어 BBC를 비롯해 서방의 전파에 무진장 노출되었습니다. 그 영향인듯 싶습니다. 그건 그렇고, 저 현란한 러시아 젊은이들의 속어를 번역하느라 역자는 논문을 한 학기 심지어 미루기까지 했다는 후일담이 있습니다.

로쟈 2008-12-18 23:43   좋아요 0 | URL
댓글을 좀 뒤늦게 봤네요. 역자로부터 번역에 관한 에피소드는 저도 들었지요.^^
 

컬처뉴스에서 롤랑 바르트의 <글쓰기의 영도>(동문선, 2007)에 대한 리뷰를 옮겨온다(http://www.culturenews.net/read.asp?title_up_code=006&title_down_code=002&article_num=8585). 요즘은 출판기획자로 일하고 있는 이재원씨의 리뷰이다(낮에 잠시 담소를 나누었다!). <글쓰기의 영도>에 대해서는 '바르트-글쓰기의 영도-진중권'이란 페이퍼(http://blog.aladin.co.kr/mramor/1501205)에서 출간 소식을 전한 바 있는데, 나로선 쌓아두기만 한 책을 이렇듯 미리 읽고 리뷰를 쓰는 이도 세상엔 있는 것이다! 언론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책인지라 아마도 가장 자세한 리뷰가 될 듯싶다(필자와 나는 취향이 아무래도 비슷한 모양이다).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와 최근 다시 번역돼 나온 <지식인이란 무엇인가>까지 덩달아 다시 읽고 싶어진다...   

컬처뉴스(07. 11. 02) 바르트를 '바르게' 읽는 한 가지 방법

어느 사상가의 사유를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흔하게는 ‘주요 저작’을 징검다리 뛰듯이 읽는 방법도 있고, 해당 사상가에 대한 입문서에서부터 시작하는 방법도 있다. 내가 선호하는 방법은 ‘전작’(全作) 읽기인데, 그것도 발간 연도별로 읽기이다. 이 방식의 단점은 전작이 모두 국역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흔하고, 그럴 경우 원서를 구입해야 하기 때문에 돈이 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말하는 ‘바르게’는 ‘옳게’(right)가 아니라 ‘정당하게’(just)에 가깝다. 즉, 내 식으로 사상가를 읽는 것도 정당한 방법이다, 혹은 그렇게 읽는 것이 한 사상가를 사상가로서 대접해 주는 정당한 방법이다.

어쨌거나 내 식으로 보면 우리는 이제야 롤랑 바르트(1915~1980)를 사상가로서 맞이할 준비를 마친 셈이다. 바르트의 데뷔작 『글쓰기의 영도』(1953)가 ‘드디어’ 국역됐기 때문이다(사실 이 책은 지난 1994년 『영도(零度)의 에크리뛰르: 기호학의 원리』라는 제목으로 국역된 바 있다. 정확히 말하면 국역이라기보다는 ‘외계어’역이라는 표현이 더 가깝다).

바르트는 20세기의 주요 사상을 다 넘나든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맑스주의, 실존주의, 기호학, 구조주의, 정신분석학, 탈구조주의 등 바르트는 단 한 번도 특정한 사조에 오래 매여 있지 않았다. 그래서 바르트를 단 한 단어로 정의해야 한다면 그 단어는 (일체의 수식어를 뺀, 말 그대로의) ‘비평가’일 수밖에 없다. 『글쓰기의 영도』는 바로 그 ‘비평가’로서의 바르트가 지닌 사유의 맹아를 담고 있다. 좀 과장되게 말하면 이 책 이후에 발표된 바르트의 모든 책은 이 책의 기본 논지에 대한 확장이나 수정, 혹은 거기서 벗어나려는 시도에 가깝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상식이 됐듯이 『글쓰기의 영도』는 1964년 노벨문학상을 거부한 것으로 유명한 프랑스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1905~1980)의 『문학이란 무엇인가?』(1947)에 대한 응답으로 씌어졌다. 당시의 젊은 프랑스 지식인들이 사르트르를 비켜가기란 거의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이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바르트와 사르트르의 이론적 조우, 혹은 대결은 남달랐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글쓰기의 영도』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신속한’ 반박이었다. 『글쓰기의 영도』가 출간된 것은 1953년이나, 이 책은 원래 알베르 카뮈(1913~1960)가 편집장을 맡고 있던 일간지 『콩바』의 1947년 8월 1일자에 동명으로 연재를 시작한 기사들이 기반이 된 책이다. 사실 『문학이란 무엇인가?』 자체도 사르트르가 창간한 잡지 『레탕모데른』 17~22호(1947년 2월~7월)에 연재된 기사들이 기반이 된 책이니, 바르트는 사르트르의 연재가 끝나자마자 당시 시간감각으로서는 실시간으로 사르트르를 비판한 셈이다. 가령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비판 중 무게감 있는 또 다른 글로서는 모리스 블랑쇼(1907~2003)의 「문학과 죽음에의 권리」가 있는데, 이 글은 1948년 1월에야 발표됐다(이 글은 조르주 바타이유[1897~1962]가 편집장으로 있던 『크리티크』 제20호에 발표됐다).

게다가 바르트의 비판은 ‘도발적’이기까지 했다. 그 도발성은 『글쓰기의 영도』 제1장의 제목이 「글쓰기란 무엇인가?」라는 점에서도 쉽게 확인되는데(『문학이란 무엇인가?』 제1장의 제목도 「글쓰기란 무엇인가?」이다), 더욱 중요하게는 사르트르의 야심찬 프로그램, 즉 ‘참여문학’(littérature engagée)이라는 프로그램에 직격탄을 날렸다는 점에서 그 도발성은 근본적이기까지 했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참여문학의 핵심은 이런 것이다. 전후의 냉전시기를 살아가는 작가로서는 당대의 지배질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자유(즉, 혁명의 가능성)를 대중들에게 돌려주기 위해서, 그리고 그 지유에 직접 몸담기 위해서 글을 써야만 한다는 것. 그래서 사르트르는 혁명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언어’(langue)를, 대중들이 이해하기 쉬운 ‘스타일’(style)로 전달해야 한다고 믿었다. 사르트르가 시(여기서 사르트르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시를 염두에 두고 있다)가 아니라 산문(여기서 사르트르는 『레땅모데른』 식의 저널리즘을 염두에 두고 있다)을 특권화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바르트가 보기에 스타일은 언어를 담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었다. 혹은 바르트가 보기에 사르트르는 스타일과 ‘형식’(form), 더 나아가 ‘장르’(genre)를 혼동하고 있었다. 바르트에게는 스타일 자체도 언어처럼 “하나의 고유한 자연과 같은 것”이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언어란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것인데 반해 스타일은 ‘개인사적’으로 형성된다는 점뿐이다. 즉, 대문자 역사(Histoire)를 우리가 선택할 수 없듯이, 소문자 역사(histoire) 역시 우리의 선택 밖에 있다는 것이다.

바르트의 주장대로 스타일 역시 우리의 선택 밖에 있다면 우리는 사르트르처럼 특정한 스타일, 더 나아가 특정한 장르(즉, 산문)를 특권화할 수 없게 된다. 요컨대 바르트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특정한 스타일을 낳은 ‘역사’를 비판해야지, 그 스타일 자체를 비판할 수는 없다. 혹은, 다르게 말하면 이미 스타일 자체도 언어와 마찬가지로 지배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있다.

그렇다면 작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작가는 특정한 ‘글쓰기’(écriture)만을 선택할 수 있다. 여기서 바르트가 말하는 글쓰기는 단순히 글을 쓰는 행위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학작품이 지닌 내적인 속성 일체, 예컨대 어조, 에토스, 리듬, 분위기 등의 총체를 말한다. 바르트의 말을 인용하자면 “언어와 스타일은 대상들이다. 반면에 글쓰기는 하나의 기능이다.” 즉, 작가는 이미 자신에게 자연처럼 주어져 있는 언어와 스타일을 버릴 수는 없고, 단지 그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자신만의 목적에 따라 글쓰기라는 방식으로 그것을 변모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바르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바르트에 따르면 글쓰기 자체도 완전한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글쓰기조차 “대문자 역사와 전통의 압력을 받아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 압력 속에서 글쓰기조차 “점진적인 응결의 모든 상태들”을 통과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가로서는 자유로운 언어를 창조하려고 해봤자 소용이 없는데, 언제나 그것은 규격화된 형태로 작가에게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글쓰기의 궁지가 있으며, 그것은 사회 자체의 궁지이다.”



예컨대 바르트가 자기 저서의 제목으로 삼을 만큼 칭찬해마지 않았던 (특히 『이방인』에서의) 카뮈의 글쓰기, 즉 ‘영도’(Degré zéro)의 글쓰기조차 이 궁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스타일의 이상적 부재 상태”를 보여준 글쓰기, 그래서 일체의 이데올로기 혹은 “한 언어의 사회적‧신화적 특징들”에서 벗어난 “중립적인 글쓰기”이자 “무색의 글쓰기”(l’écriture blanche)였던 카뮈의 혁명적인 글쓰기마저 오늘날에는 부르주아 문인들에 의해서 ‘좋은’ 프랑스 문학의 전범으로 제시되지 않는가?

『글쓰기의 영도』가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향한 직격탄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바르트의 주장은 영원히 혁명적일 수 있는 글쓰기(혹은 사르트르의 스타일)는 없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이고, 그런 점에서 참여문학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사르트르가 너무나 간단히 치유하려 했던 “현대 작가들의 상황”이 생각보다 더 복잡하다는 사실을 밝혔던 것이다(사르트르는 이듬해인 1948년과 13년 뒤인 1965년, 각각 「검은 오르페우스」라는 글과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라는 강의를 통해서 바르트의 비판에 대해 신속하게/때늦게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일까? 바르트는 현대 작가들의 임무에 대해 사르트르처럼 명쾌하지 말하지를 않는다. 그렇지만 오히려 사르트르보다 현대 작가들의 상황을 더 정확히 짚어낸다. “문학적 글쓰기는 역사의 소외와 역사의 꿈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필연성으로서 그것[즉, 문학적 글쓰기]은 언어들의 찢김, 계급들의 찢김과 분리할 수 없는 찢김을 증언한다. 자유로서 그것은 이런 찢김의 의식이고 그것을 뛰어넘고자 하는 노력 자체이다.” 소외와 꿈 사이에서 진동하는 ‘시시포스’, 그도 아니면 소외될 것을 알면서도 꿈꾸기를 그치지 않는 ‘시시포스’, 그것이 바로 바르트가 보는 작가들의 형상이다.



바르트는 『글쓰기의 영도』를 쓰던 당시 카뮈를 필두로 한 프랑스 현대 작가들의 글쓰기를 “글쓰기에 대한 하나의 고유한 수난극에서 마지막 에피소드”라고 말한 바 있다. 그때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그 에피소드가 ‘마지막’(last)으로 끝날지 그도 아니면 ‘최근’(latest)의 것이 될지는 오늘날의 작가들이 새로운 에피소드를 일으킬 수 있을지 없을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어쨌든 비평가 바르트는 그때 이후로 30여 권 분량의 책을 집필하며 그 시시포스로서의 운명을 당당히 헤쳐 나가다가 1980년 2월 25일 차에 치었다. 이는 카뮈가 자동차 사고로 죽은 지 약 20년하고도 52일 뒤의 일이었다. 영국의 문예이론가 테리 이글턴(1943~  )의 말을 살짝 비틀어 말해보자면, “신은 실존주의자도, 구조주의자도 아니었다.”(이재원_출판기획자)

07. 11. 02.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닉네임을뭐라하지 2007-11-02 23:15   좋아요 0 | URL
아, 흥미롭군요. 비교해가면서 봐야겠어요.

로쟈 2007-11-03 11:00   좋아요 0 | URL
좋은 독서법이십니다.^^

열매 2007-11-03 02:10   좋아요 0 | URL
이 서평을 읽고 이재원씨가 이번에 번역된 책을 꼼꼼히 읽었는지에 대해서는 평가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교보에서 이 책을 사서 한 챕터 정도 영역본과 비교해 본 결과 이 번역본에 대해서 신뢰를 보낼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지게 된 저로서는 , 이 서평이 번역서평으로서 어느 정도의 의미가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물론 이 책의 가치 평가를 하는 의미 정도는 있을지 모르겠으나--서평자가 번역본으로 읽었는지, 바르트에 관심이 있어 다른 판본으로 읽었는지도 이 글로서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개인적으론 국역본으로 읽은 것 같진 않다는 판단을 합니다.제가 읽은 번역본과 영역본(그 불어 원본)과 판본상의 차이가 있는데 그것을 제시하지 않은 것을 본다면 말이지요 -- 국역본의 가치를 평가해 주는 서평은 아닌 것이지요.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를 읽은 이후에 김웅권 번역에 대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번역 역시 꼼꼼히 체크해봐야 하지 않을까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lefebvre 2007-11-04 10:39   좋아요 0 | URL
열매/ 위 글을 쓴 이재원입니다. ^^;; 예, 사실을 말하면 이번에 번역된 <글쓰기의 영도>는 읽기가 좀 어려운 점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일례로 제가 인용한“글쓰기에 대한 하나의 고유한 수난극에서 마지막 에피소드”라는 구절 중 제가 "수난극"이라고 쓴 부분을, 김웅권 씨는 "열정"이라고 옮겼죠. 그러나 불어본도 그렇고 영어본도 그렇고 대문자 Passion을 써서 (그리고 맥락상으로도) 저는 "수난극"이라고 정정해 인용했습니다(이런 사실까지 적기에는 제게 주어진 지면이 너무 짧아서......). 그런 점에서 확실히 위 서평은 반쪽만 "번역서평"이죠. ^^;; 그러나 <영도(零度)의 에크리뛰르>보다는 확실히 읽기가 편합니다. 그리고 책을 증정받은 출판사에게 미안하기도 하고(돈 주고 샀다면 모르겠는데 말입니다) ㅠ.ㅠ 저는 국역본을 읽다가 어색한 부분을 영어본을 참조해 이해(?)했고, 국역본과 영어본이 너무나 많이 차이나는 부분은 불어본을 참조했습니다. 언제쯤 좋은 책들을 국역본으로 안심하고 읽을 수 있을지...... ^^;;

부리 2007-11-03 09:00   좋아요 0 | URL
맘 잡고 읽었는데 스타일과 쟝르...여기서부터 헷갈리기 시작... 특정한 글쓰기밖에 선택할 수 없다에서는 그냥 외웠답니다^^ 전 바르트가 구조주의자로 알고 있었는데 그런 게 아니라는 것, 샤르트르와 바르트가 서로 대화를 했다는 점 등이 새로 깨달은 점입니다 역시 이런 글은 줄치면서 읽어야....^^

로쟈 2007-11-03 11:03   좋아요 0 | URL
이런 글을 올려야 부리님의 댓글을 접할 수 있군요.^^ 바르트는 구조주의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이 맞습니다. 레비스트로스와 함께 사르트르에게 한방 먹이는. 다만, 구조주의 이전과 이후(포스트구조주의)를 두루 보여준다고 생각되네요...

열매 2007-11-03 15:54   좋아요 0 | URL
워낙 국역본을 안 읽고 서평을 쓰는 학자분들을 많이 보아서인지 흥분한 것 같습니다. 어떤 책이 탄생하게된 그땅의 배경을 짚어주는 것에 못지 않게 그 책이 이 땅에서 가지게 될 의미에 대해 평가하는 것도 서평의 중요한 의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사상을 다루는 사람들은 이 땅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무지한 것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하튼 이 책은 김웅권씨의 상당수 번역이 그러한 것처럼, 국역본 외 다른 판본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읽을 수 없는 판본임에 틀림없습니다. 도대체 이 출판사는 자신들도 읽지 못하는 책들을 지치지도 않고 꾸역꾸역 왜 만들어내는 것일까요? 김웅권씨는 깜냥도 되지 않으면서 사상사적으로 중요한 저작들을 왜 번번히 망치는 것일까요? 신성대사장님께서는 <전교조의 정체>같은 책은 잘 만들어내시면서, 십팔기十八技에만 너무 매진하시지 마시고 자신들이 만든 책에도 신경 좀 써주시길 하는 자그마한 바램이 있습니다. 조그마한 실수에도 목숨이 날아가는 <무덕武德>을 아신다면 말이지요.

로쟈 2007-11-03 16:11   좋아요 0 | URL
번역/오역에 대한 문제제기는 저도 많이 해온 것인데, 김웅권씨의 번역이 모두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라마톨로지> 같은 경우에도 이전에 나온 민음사본이 더 낫다고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전공자라고 해서 반드시 더 나은 번역서를 내는 건 아니라는 게 제 경험적 판단입니다. 이건 단칼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깜냥있는 역자들이 나서주길 기다리기만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닌 것 같아서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번역에 관한 사회적 피드백입니다. 서로 읽고 지적하고 고쳐나가는 '문화'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가운데 좋은 번역들이 걸러지거나 산출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열매 2007-11-04 00:51   좋아요 0 | URL
김웅권씨의 번역에 대한 개인적 느낌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안쓰러운 번역'입니다. 나름 고민하며 정말 애쓴 것도 같은데, 글을 제대로 전달하지도 못하는.
그이의 번역은 저자의 문체를 휘발시켜 버립니다. 아무리 좋은 문장도 그저 전달을 위한 도구로서의 가치밖에 얻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저는 김웅권씨의 번역은 일단 믿지 못하는 편인데, 근래 나온 고전들에 대한 그의 번역들은 별로 신뢰할만하지 않습니다. 그의 과욕이 불러온 것인 만큼 오역에 대한 오욕은 그 스스로가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

<그라마톨로지>는 비전공자가 오랜 전공 공부의 내력이 필요한 책을 맘대로 번역하면 어떤 꼴이 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문장을 토막내서 풀기는 했는데, 어김없이 저자의 개념어에서는 엉뚱한 오역을 합니다.
선생님과 그 책을 한줄한줄 짚어가며 읽으면서 전공서적을 왜 전공자가 번역해야 하는지에 대해여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로쟈 2007-11-04 00:45   좋아요 0 | URL
오역에 대한 지적도 구체적으로 해주시면 좋겠네요(열매님의 활동을 기대합니다.^^). 굳이 번거로운 일을 벌이지 않는 게 한국 학계의 풍토이지만 덕분에 발전이 없는 것도 한국 인문학이 아닌가 싶습니다. 애써 번역하지 않고, 애써 지적하지 않고, 애써 '진탕'에 발을 빠뜨리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남는 건 냉소(주의)밖에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