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리뷰들에서 <인간 없는 세상>(랜덤하우스, 2007)과 함께 눈길을 끄는 책은 제레미 시브룩의 <다른 세상의 아이들>(산눈, 2007)이다. 부제대로 '세계화 시대의 야만, 어린이 노동'을 다루고 있는 책인데, 그러고 보니 모두 '조화'와 '신의 섭리'에 대한 이반 카라마조프의 맹렬한 비판의 논거로 쓰임직한 책들이다. 내가 읽은 리뷰들을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7. 10. 27) '경제성장’만이 아동착취를 막을수 있을까

서구 국가들은 1999년 시애틀 세계무역기구(WTO) 회담을 통해 제3세계 국가들의 아동 노동 착취와 학대를 문제 삼으며 ‘문명세계의 표준’을 제시하려 했다. 그러자 방글라데시와 같은 후발개도국들은 강력 반발했다. “왜 너희들은 이미 다 해놓고, 우리는 못하게 하느냐.” 그들은 서구 국가들의 ‘사악한 보호주의’를 읽었던 것이다. 어린이 노동을 문화적 야만성 또는 도덕적 문제로 간단하게 치부할 수 없는 한 단면이다. 이는 마치 이라크를 침략한 미국 네오콘이 일상적으로 “폭력만은 안돼”라고 말하는 것에서 보듯 폭력에 대한 논의가 간단치 않은 것과 비슷하다.

영국인 시민활동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산업혁명 초기인 19세기 영국의 아동 노동과 21세기 방글라데시의 아동 노동을 오버랩시키며 아동 노동에 대한 서구의 논의가 얼마나 위선적인지, 그리고 문제의 근본이 어디에 있는지 짚고 있다. 저자는 서구의 인권단체와 국제기구들이 제3세계 아이들을 가혹한 노동환경에서 구해내야 된다고 할 뿐, 그 아이들이 ‘구출된’ 뒤에는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왔다고 꼬집는다. 게다가 그들 중에는 아직도 이 문제가 경제 성장으로 해결되리라고 믿는 이들이 많다. 마치 17세기 북미의 노예무역과 19세기 영국 공장에서의 아동 착취라는 악습이 사회 전체의 부가 쌓이고 그것이 빈곤층에까지 흘러넘치며 완화됐듯이 말이다. 하지만 영국이 식민지라는 자국 아동 노동을 대체할 보루가 있었던 반면 방글라데시는 그런 식민지를 가질 수는 없다. 더 가난한 부족민들이 사는 지역을 공략할 수는 있을지언정 말이다.

어린이 노동을 문화적 야만성이나 도덕성의 문제로 생각하는 서구의 논의는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짚지 못하는 것이다. 사진은 학교를 가는 대신 일을 하고 있는 네팔 어린이의 모습.

많은 이들이 말한다. 현재로서는 가혹한 아동 노동에 대해서만 철저히 규제하도록 하고, 근본적으로는 세계화와 시장 원리에 충실함으로써 더 많은 부를 창출하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루는 것만이 아동 노동의 폐해를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 논리는 모순임이 드러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핵심은 국가가 자국민의 복지, 건강, 교육, 영양분야에 개입하는 것을 차단하는 것인데, 바로 이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노동시장으로 유입된다. 그런데 해결책이라는 것이 그 세계화와 자유시장에 의한 부의 창출밖에 없다니. 모든 대안들이 사라지고 아이들을 노동시장으로 끌어들이는 바로 그 원인이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아이러니인 것이다.

그래도 이해가 안된다고 하는 사람들을 위해 저자는 두바이의 인공섬과 아랍에미리트연합에 낙타경주 기수로 팔려온 남아시아 어린이들을 예로 든다. “두바이의 인공섬은 진보한 현대 사회의 문명을 한눈에 보여준다. 하지만 남아시아의 3~4세 아이들이 돈 몇 푼에 팔려와 아랍에미리트연합에서 낙타 등에 꽁꽁 묶인 낙타경주 기수로 이용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공포에 질린 아이들의 비명은 낙타를 자극해 더욱 빨리 달리게 만들고, 밧줄이 풀려 아이들이 죽기도 한다. 경제성장과 기술진보에 의한 부의 창출이 모든 인류에게 자유를 가져다 주리라는 믿음은 비현실적이며, 근거 없는 희망이다.”

그러면 노동을 전혀 하지 않는 서구 아이들은 행복한가. ‘일과 완전히 분리된 유년’이라는 신화 자체가 최근에 생긴 것이다. 최상층만을 제외하면 세계화 이전에도 아이들은 소 풀을 먹이거나 집에서 떡(케이크) 만드는 것을 돕는 식으로 노동을 해왔다. 서구의 아이들은 제3세계 아이들이 돌을 깨기 위해 망치를 잡는 그 나이부터 소비의 주체가 됨으로써 노동하는 아이들과 불가분의 운명체로 묶이게 된다. 이들은 ‘공부’ 외에는 어떤 직분도 부여받지 못한 채, ‘쓸모없는’ 성인으로 성장하기 쉽다. 아동들에게도 일과 여가 사이의 적정한 선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아이들을 이 양 극단에 놓음으로써만 비로소 안도하는 사람들은 시장원리를 외치는 많은 어른들이 아닐까.(손제민기자)

 

 

 

 

 

 

 

 

 

 

 

 

 

 

 

 

 

 

 

 

 

 

 

  

한국일보(07. 10. 27) 무서운 세상이, 너희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웠구나

#1 쇠가죽 채찍이나 잘 마른 가죽끈에 못 이겨 시계태엽처럼 일하는 소년들, 또는 여자아이들도 심심찮게 목도할 것이다. 열한살 먹은 어느 아이는 나무 뭉둥이에 다리가 부러졌고, 또 다른 소녀는 면직공장의 감독관 형상을 한 무자비한 괴물에게서 판자로 얻어맞았다.

#2 열네살의 한 소년은 트럭운전사 보조다. 새벽 5시에 일을 시작하는데 운행일정은 종종 밤 11시나 12시가 되어도 끝나지 않는다. 그는 한 달에 약 2만원을 버는데 그 가운데 3분의 2는 가족- 그는 9남매 중 한 명이다- 에게 보낸다. 그는 트럭에서 살고 좌석에서 잔다.

19세기초 영국의 사회개혁가 존 필든이 당시 미국 노동현장을 기록한 보고서(#1)와 현재 세계 최빈국인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에 사는 한 소년 노동자의 일상에 대한 르포(#2)를 읽어보자. 어떤 차이를 느낄 수 있는가? ‘안티 나이키 운동’이 잘 보여주듯 제3세계에서 자행되는 어린이 노동착취의 문제가 세계적 이슈로 떠오른 지도 꽤 됐다. 그것이 ‘제도화된 가장 극악무도한 부정이고, 성장ㆍ개발 모델의 수치’라는 주장을 반박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반(反)세계화 운동가이자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제레미 시브룩은 이 책을 통해 어린이 노동착취의 문제에 폭넓은 시각으로 접근한다.

복잡하게 얽힌 역사ㆍ경제ㆍ문화적 맥락을 신중히 들여다봐야 문제의 근절, 그것이 어렵다면 최소한 개선이라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우선 ‘이런 일은 경제적으로 낙후되고 문화적으로 열등한 나라에서나 생기는 일이라는 식의 시각은 위선’이라며 어린이노동 착취 문제에 대한 시각의 교정을 주장한다. 그는 엥겔스나 영국 학자 E P 톰슨을 인용, 현재 제3세계의 어린이 노동착취는 18,19세기 영국의 노동지대나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대농장에서 벌어졌던 비극의 반복임을 주지시킨다.

‘어린이 노동은 비윤리적이니만큼 당장 폐지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도 대의명분은 훌륭하지만 수혜자들의 상황을 고려하지 못한 순진한 논리다. 가령 1995년 영국의 한 TV가 모로코의 12~15세 여자아이들이 영국에서 마크 앤 스펜서로 납품되는 잠옷을 만들어왔다고 폭로하자, 많은 모로코 소녀들이 해고됐다. 소녀들의 가정은 이 정도의 노동은 충분히 받아들일 만하다고 봤지만 결과적으로 어린이노동의 금지는 소녀의 가족들을 더욱 깊은 가난으로 몰아넣었다.

동의하기 쉽진 않겠지만 문화의 상대성도 고려해야 한다. 가령 벵골어에는 태어나서부터 열여덟살까지를 의미하는‘미성년’이라는 단어가 없다. 따라서 방글라데시에서는 ‘노동에 대한 어린이들의 권리’라는 말이 거부감없이 동의를 얻는다. 하지만 세계자본주의 착취구조의 최하부에 어린이들의 노동이 깔려있고 이를 인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 책의 기본 전제다. 저자는 3, 4세의 어린이를 낙타 위에 밧줄로 묶고 경주를 위해 이들의 공포감을 자극하는 아랍에미리트의 낙타경주나, 먼지와 기름을 뒤집어쓰고 금속성의 굉음에 시달리는 10대 초반의 소년을 무급으로 부려먹는 방글라데시의 자동차정비소의 사례를 들어 이런 노동의 비인간성을 폭로한다.

그렇다면 제3세계 어린이들의 노동착취 문제를 빠른 시간 안에 해결할 수 있을까? 문제는 다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로 환원된다. 저자는 비관적이다. IMF 같은 국제금융기구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프로그램 때문에 각국 정부는 건강, 영양, 교육 같은 사회보장 프로그램을 축소하고, 이는 빈곤층에 가장 큰 타격을 준다. 그것은 곧바로 결손가정, 아동 성매매, 노동시장에 유입되는 아동의 증가로 이어진다. 저자는 어린이노동을 당장 근절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기보다 우선 가장 위험하고 유해한 노동부터 금지시키는 일이 실천적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원제 ‘Children of Other Worlds’(2001).(이왕구기자)

07. 10. 28.

P.S. 제레미 시브룩의 경우에도 <세계의 빈곤, 누구의 책임인가?>(이후, 2007)가 지난봄에 소개되었기에 구면이다. 빈곤 문제에 대한 독서 리스트를 내달에는 만들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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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문제와 인간종말을 다룬 책이 모처럼 언론리뷰들에서 크게 다루어졌다. 나도 리뷰들을 읽고서야 책에 관심을 갖게 됐는데, 앨런 와이즈먼의 <인간 없는 세상>(랜덤하우스, 2007)이 문제의 책이다. 타임지에서 이미 '올해 최고의 논픽션'으로 꼽았다고도 하니까 '명불허전'을 기대봄 직하다(국역본도 초스피드로 출간된 셈이군). "어느날 갑자기 인류가 사라진다면"이란 상상 자체도 제법 '유쾌'하다. 내가 읽은 기사들을 모아둔다.  

경향신문(07. 10. 27) “인류가 지구에서 사라진다면…”

이 책(원제 ‘The World Without Us’)이 매력적인 건 이 도발적인 상상력 탓이다. 하지만 ‘기발한 상상’에 그쳤을 질문을 인류에게 던지는 ‘묵직한 울림’으로 바꿔놓은 것은 다양한 시공간과 학문을 넘나드는 저자의 꼼꼼한 취재와 열정, 명징하면서도 서정적인 문체, 그리고 인간과 지구의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다.

‘인간 없는 세상’의 모습은 어떠할 것인가. 인류와 함께 없어질 것들은 무엇이고, 인류가 남길 유산은 무엇인가. 책은 이 같은 질문들의 해답을 찾아 떠난 지적 모험이다. 미국의 유명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폴란드-벨로루시 국경의 원시림, 아프리카 탕가니카 호수, 키프로스섬 바로샤, 하와이 킹맨 환초(環礁), 한국의 비무장지대 등 세계 곳곳을 둘러봤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진화생물학자·지질학자·고고학자·박물관큐레이터·환경운동가 등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아냈다.

저자가 그려낸 ‘인간 없는 세상’의 연대기에 따르면 인간이 사라진 바로 다음날, 자연은 ‘집 청소’부터 하기 시작한다. 곰팡이가 벽을 갉아먹고, 빗물은 못을 녹슬게 하고 나무를 썩게 한다. 우리가 살던 집들은 50년이면 대부분 허물어진다. 인간이 사라진 이틀 뒤면 습지와 강을 메워 만든 도시 뉴욕의 지하철은 물에 잠길 것이다. 20년 후엔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 대통령이 “이 시대 최고의 토목공사”라고 말한 파나마 운하는 막혀버리고 남북 아메리카는 다시 합쳐진다. 300년 후 세계 곳곳의 댐들이 무너지고, 삼각주 유역에 세워진 휴스턴 같은 도시들은 물에 씻겨나가 버린다. 1000년 후 인간이 남긴 인공구조물 가운데 제대로 남아있는 것은 영불해협의 해저터널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또다른 ‘유산’들이 있다. 인간세상이 18세기부터 과배출한 이산화탄소가 인류 이전 수준으로 떨어지려면 10만년이 걸린다. 태평양을 쓰레기장으로 만들고 있는 플라스틱을 분해하는 데는 몇 천년, 몇 만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납이 토양에서 전부 씻겨나가려면 3만5000년, 크롬은 그 두 배의 기간이 소요된다. 인류가 남긴 약 3만개의 핵폭탄의 플루토늄이 자연 상태의 배경 복사 수준이 되려면 25만년쯤 걸린다. 그러고도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441개의 핵발전소와 싸워야 한다.

결국 저자가 미래의 ‘인간 없는 세상’이라는 가정을 통해 되새기고자 하는 것은 오늘날의 ‘인간 있는 세상’이다. 수많은 사례들을 통해 아프게 드러나는 건 지금까지 인류가 지구와 다른 생명체들에게 얼마나 엄청난 짓을 저질렀는가라는 사실이다. 한 이론에 따르면 인류가 신대륙에 도착할 때마다 마주친 동물들은 전멸당했다. 더 큰 문제는 이 같은 ‘킬러 본능’만이 아니라 멈출 줄 모르는 ‘탐욕의 본능’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의도하지 않더라도 다른 존재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치명적으로 박탈해버리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인간이 사라진다고 세상이 안타까워할까?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쉬지 않을까. 저자는 인간의 부재를 아쉬워하는 생물이라곤 이, 진드기, 바퀴벌레, 쥐같이 인간에 기대 살았던 동물들뿐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사라지면 오히려 수많은 생명체가 지구상에 번성할 것이라는 지적은 그래서 뜨끔하다.

그렇다고 이 책이 독자들의 두려움만을 키우는 종말론적 계시록은 아니다. 저자는 답사의 중간중간 상처 입은 지구의 경이로운 치유의 모습들을 보여준다. 생명의 요람인 바다는 인류가 하늘에다 뿜어낸 탄소를 흡수하고 있고, 핵발전소 사고로 오염된 체르노빌에서도 생명은 왕성히 살아나고 있다. 저자는 특히 동족이 원수가 되어 싸우던 지옥에서 수많은 생물들로 넘쳐나는 천국으로 변한 비무장지대에서 희망의 근거를 찾는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비무장지대 방문 경험이 “사람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자연이 화해하게 할 수 있다는 꿈을 꾸게 했다”라고 밝혔다.

저자는 인류가 지구를 파괴하면서까지 부여잡으려고 애쓴 것들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묻는다. 뭇 생명체들이 그러하듯 인간이라는 생물종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인간이 사라진 뒤 영원히 남는 것이라곤 우주 공간으로 퍼져가는 전자 신호 정도일 뿐. “창공은 영원히 푸르고,/ 대지는 장구히 변치 않으며 봄에 꽃을 피운다./ 그러하나 사람아,/ 그대는 대체 얼마나 살려나”라는 이백의 시가 울림을 갖는 건 이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 책은 ‘영리한 책’이다. 환경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제시해 지적 자극과 재미를 동시에 준다. ‘인간 없는 세상’을 상상함으로써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며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이 책이 “딱딱하기 쉬운 과학 논픽션의 새로운 전범을 제시했다”는 미국 현지 매체들의 극찬을 받은 이유다. 그들의 말을 빌려 모처럼 좋은 책의 전범을 보여주는 책을 만났다고 말하면 과찬일까.(김진우기자)


중앙일보(07. 10. 27) `인간과 자연, 공생 해법 DMZ에 있다`

환경문제를 다룬 책들은 대체로 공포스럽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한 시골 마을이 무분별한 살충제 사용으로 점차 죽음의 공간으로 변해버린다는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 그랬고, 생태계 파괴와 기상 이변 등 지구 온난화의 위험한 결과를 보여주는 앨 고어의 『불편한 진실』이 그렇다. 읽을수록 마음이 무거워만지니, 독자 입장에서 유쾌한 종류의 책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저널리스트 앨런 와이즈먼이 쓴 이 논픽션은 ‘우울하다’는 기존 환경관련서의 한계를 벗은 신선한 책이다. 점점 망해가는 지구를 묘사하는 대신, ‘어느날 지구상에서 인류가 몽땅 사라진다면’을 가정하고 그 이후 자연의 신비스러운 복원과정을 보여준다. 과학적인 지식과 상상력을 결합해 완벽한 지구 부활 시나리오를 만들어낸 그를 전화 인터뷰했다. 와이즈먼은 25일 매사추세츠주(州) 커밍턴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았다.

그는 “2003년 11월 한국의 비무장지대(DMZ)를 방문했던 경험이 이 책을 쓰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50여년 동안 인간의 발길이 끊어진 곳. 그래서 이젠 반달가슴곰·스라소니·사향노루·고라니 등 멸종위기 야생동물의 피난처가 된 곳이다. 그는 “DMZ에서 희귀동물인 빨간 머리 두루미 무리를 발견했을 때 무척 감격스러웠다”고 회상했다. 와이즈먼은 DMZ 외에도 폴란드-벨로루시 국경의 원시림과 체르노빌·미크로네시아·아프리카·아마존·북극 등 지구 구석구석을 발로 누비며 자연의 생명력을 직접 확인했다. 또 수백명의 과학자들의 만나 인터뷰하고, 또 수백 권의 책과 논문을 읽으며 자료를 모았다. 꼬박 3년 동안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그는 자연이 어떻게 인간이 남기고 간 것들을 다룰지 유추해 냈다.



그는 “인간이 사라지면 인간이 만든 인공구조물들도 사라지기 시작한다”고 설명한다. 대부분의 집은 보통 50년, 길어야 100년 안에 주저앉는다는 것이다. 지붕과 벽면에 빗물이 스며들고 곰팡이가 자리잡는 게 출발이다. 겨울철엔 배관이 얼어터지고, 다람쥐·너구리·도마뱀 등이 벽에 구멍을 낸다. 나무는 썩고, 석고보드는 물에 씻겨 땅으로 되돌아가고, 시멘트도 조금씩 부스러져 가루가 된다. 포장된 도로도 엉망이 된다. 땅이 얼었다 녹았다 반복하면서 아스팔트와 시멘트가 갈라진다. 그 틈에서 겨자·토끼풀ㆍ갈퀴넝굴 같은 풀이 자라면서 틈은 더욱 벌어지고 곧 나무도 뿌리를 내리게 된다. 도시에 줄지어 서 있는 건물들은 화재로 무너질 확률이 크다. 20년이면 피뢰침이 삭아 꺾이기 때문에, 벼락이라도 한번 치면 도시가 불타는 건 순식간이다.

물론 자연의 복원과정이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특히 핵은 심각한 위협거리다. 지금 당장 인류가 사라진다 해도 3만 여개의 핵탄두와 441개의 핵발전소가 남는다. 와이즈먼은 “인간 없는 세상에서 핵탄두가 폭발할 위험은 없다. 대신 포탄의 외피가 부식해 내용물이 노출된다”고 내다봤다. 대륙간탄도미사일 속에 들어있는 플루토늄의 양은 4∼9㎏. 그 방사능의 강도가 자연 상태로 줄어들려면 무려 35만년 쯤 걸린다는 계산이다. 그래도 와이즈먼은 희망을 내비친다. “생명체가 방사능에 대한 내성이 강해지는 쪽으로 진화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그 지역에 사는 들쥐들이 다른 지역 들쥐들보다 수명은 훨씬 짧아졌지만 성적(性的)으로 일찍 성숙해 새끼를 빨리 낳음으로써 개체 수는 줄지 않았다는 게 추론의 근거가 됐다.

그의 계산법에 따르면, 인간이 사라진 뒤 300년이 지나면 댐들이 무너져 강 유역에 세워진 도시들이 물에 씻겨 나가고, 3만5000년 후엔 토양에서 납이 전부 사라진다. 그가 이렇게 경이로운 지구의 자기 치유 모습을 보여주는 이유는 뭘까.



와이즈먼은 저술 동기를 묻자 “이젠 인간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자연이 회복될 수 있는 길은 없겠냐는 질문을 던지기 위해”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에너지 절약▶녹색 에너지 개발 ▶숲 파괴 중지 ▶산아제한 등을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위한 해법으로 제안했다. ‘산아제한’은 "나흘마다 100만명씩 느는 세계 인구 증가의 속도를 제어하지 못한다면, 자원 부족으로 인류가 멸망하고 말 것”이란 우려에서 나온 해결책이란다. “모든 가임여성이 아이를 하나만 낳는다면, 현재 65억인 세계인구가 2100년이면 16억으로 줄어들어 세상이 나날이 아름다워질 것”이라는 그는 “하지만 한 집에 아이 하나씩만 낳자고 요구(require)하는 건 아니다. 다만 부탁(ask)할 뿐이다”라며 조심스러워했다.(이지영기자)

07. 10. 27.

P.S. 과문한 탓에 모르고 있었는데, 와이즈먼의 책으론 <가비오따쓰 - 세상을 다시 창조하는 마을>(월간말, 2002)이 이미 소개돼 있었다. "'가비오따쓰'는 서구식 근대화에 회의를 느낀 한 무리의 이상주의자들이 콜롬비아에서도 가장 척박하고 황량한 초원지대에 건설한 계획공동체이다. 그들은 1970년대 초반에 선진국에서조차 걸음마 단계에 있던 태양열시대를 활짝 열어 제쳤고, 태양력이나 풍력과 같은 대체 에너지만을 이용하여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하였다. 가비오따쓰에 모여든 사람들은 서구사회가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지속가능한 사회를 찾아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하였다. 또한 자신들이 파괴해 버린 인디언 원주민 문화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보기도 한다."란 소개글이 내용을 짐작하게 한다. 더불어, 그의 신작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란 사실도 새삼 일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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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주의 일거리들을 챙기기 위해 연구실에 나왔다가 권혁웅 시인의 새 시집 <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민음사, 2007)가 들어 있는 우편물을 뜯는다. 이어서 이번주 <한겨레21>의 비닐 포장도 뜯고. 시인의 '연애시집'을 읽기 위해서 나란히 빼온 책들은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문학동네, 2005)와 나탈리 엔지어의 <여자 - 그 내밀한 지리학>(문예출판사, 2003)이다. 이왕이면 데즈먼드 모리스의 <벌거벗은 여자>(휴먼&북스, 2004)까지 펴놓으면 좋으련만, 문득 이 책을 안 갖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당신이 없는 사이에' 나온 책들이 대개 이 모양이다).    

 

 

 

 

나탈리 엔지어 책은 이번에 보니까 표지가 바뀌어 다시 나왔다. 예전 표지의 그 둔감한 이미지와 비교해보면(게다가 '회색'이었다!) 새 표지가 얼마나 잘 빠졌는지 알 수 있다(그래도 이 정도는 돼야 손길이 갈 게 아닌가). 물론 원저의 표지 자체가 좀 심심하긴 했지만... 

"이 책은 여성의 몸을 찬양하는 책이다"라고 시작하는 엔지어의 책은 "나는 우리가 여성적이라고 부르는 부위들을 작업 지도로 그리고, 그 바탕에 깔린 원동력을 설명하기 위해 과학과 의학을 불러내려 한다."는 것으로 취지를 해명한다. 그리고는 "나는 우리의 내밀한 지리학의 기원을, 말하자면 왜 우리의 몸은 이런 모습을 하고 있으며 왜 이런 움직임을 보이는지, 왜 매끄럽고 둥근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꼽사납고 서툰 행동을 하는지를 규명하기 위해 다윈과 진화론에 의지하려 한다. 나는 특정한 신체부위나 신체적 특징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찬사를 받아왔는지 파악하기 위해 역사와 미술과 문학을 뒤지지려한다..."는 식으로 나간다. 나는 이런 책이 맘에 든다. 그래서 모셔두고 있는 것인데, 문득 몇 권의 책이 더 생각난다. 우리 몸 사전류의 책들 혹은 의학서들.

 

 

 

 

여하튼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게 생겼지만 '그 얼굴에 입술을 대기 위해서' 같이 펴들 만한 책들이다. 시인은 자서(自序)에서 "바라건대 내 입술이 그의 윤곽을 제대로 더듬었기를."이라고 적었다. '그'는 물론 '그녀'의 완곡어법이자 중성적인 어법일 테고, '윤곽을 제대로 더듬'는 것 정도가 목표라면 제목이 미리 암시해주듯이 아주 '얌전한' 연애시일 거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적어도 "우악스런 농사꾼 내 몸뚱이는 너를 파헤쳐/ 대지의 밑바닥에서 아들놈이 튀어나오게 한다"(네루다) 같은 식은 아닌 것이다(얼굴에 입술 정도 갖다대는 게 '목표'이니 말이다!). '상상동물 이야기' 시편이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나는 시집이 '연애의 상상' 정도에 머무는 게 아닌가 싶다. 실상 '신화에 숨은 열여섯 가지 사랑의 코드'란 부제를 단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 또한 온통 '신화' 이야기였던 것이니. 그 책의 서문에서 시인은 이렇게 적었다.

"사춘기 때 나는 죄의식으로 똘똘 뭉친 작고 약한 소년이었다. 교회가 내게 죄를 가르쳐주엇고 학교가 죄짓는 사람들을 확인시켜주었으며, 집은 가난하고 시그러웠다. 나는 늘 상상 속으로 달아나곤 했다. 삼국지를 읽거나 프로야구를 보며, 내가 아는 사람들을 장수나 선수로 둔갑시켜 머릿속에서 전쟁을 벌이거나 경기를 치렀다. 나는 지금도 어린아이들이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는 게 무섭고 패싸움이 싫고 술주정이 혐오스럽다. 그때 시쓰기를 배웠다. 시는 내 머릿속의 상상을 거리낌없이 펼쳐내는 방법이었다. 시를 읽고 쓰다가 시에서의 비약이 바로 신화의 초현실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7-8쪽)

권혁웅 시의 '비밀'을 너무도 환하게 드러내놓는 고백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미노타우로스가 황소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가졌고 미궁에서 살고 젊은 처녀를 잡아먹는다 한 젊은 여자가 황소와 교접하여 그를 낳았다고 하니, 탄생의 경로도 미궁은 미궁이다"(83쪽) 같은 '신화'보다 내가 관심을 갖는 쪽은 언제나 '현실'이다. 시집의 마지막에 배치된 시 '마흔 번의 낮과 밤' 같은.

불혹은 일종의 부록이거나/ 부록의 일종이다  

몸 여기저기 긴 절취선이 나 있다 꼬리를 떼어 낸 자국이다. 아무도 따라 흔들리지 않았으므로 몸은 크게 벌린 입처럼 둥글다 제 자신을 다 집어넣을 때까지 점점 커질 것이다 저녁은 그렇게 온다

그렇게 시작하는 시를 읽으니 시집 전체가 '불혹'을 맞이한 소회 내지는 위기의식으로 읽힌다(이제 배만 불룩해지는 '부록'의 여생을 살아야 하다니!). 시인은 무엇보다도 온갖 감각과 정신의 '유혹'에 민감해야 하거늘, '불혹'이라니! 

   

해서, 요는 우리의 감각을 좀더 긴장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 시간은 시의 적이기도 하므로!..

07.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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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10-27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의 감각을 긴장시킬만한 입술은 아니군요.. 페넬로페 크루즈의 입술을 추천합니다. :-)

로쟈 2007-10-27 22:50   좋아요 0 | URL
광고사진인 만큼 '표준'적인 입술입니다(치아가 드러나고 입술이 약간 젖어있는 등). 더 자극적인 입술이 필요하면 불혹도 훌쩍 넘어갔다는 얘긴데요. 흠...

2007-10-31 1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더 좁게는 이번주 신간들 가운데 가장 '비싼' 책은 할 포스터 등 쟁쟁한 미술사가, 이론가들이 쓴 <1900년 이후의 미술사>(세미콜론, 2007)이다. 704쪽 분량이고 정가로는 95,000원. 방대한 미술사책이어서 도판이 안 들어갈 수 없고 그만큼 가격도 '업'된 경우이겠지만 이 정도면 바로 원서로 구입해야 하나 좀 망설여지긴 한다(도서관에서 몇 번 볼 때마다 주문을 해야 하나 망설이긴 했지만). 보급판(2005)으로 나온 원서의 경우 두 권을 합한 가격이 67달러이므로 배송료를 더해도 국역본보다 저렴하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한국의 책값은 이젠 '번역료'에다 '저작권료'가 더해져서 영미권의 원서보다 비싸다.

아무려나 그 두께와 가격만큼 올해 나온 가장 비중있는 미술책으로 보인다. 세미콜론이란 출판사는 낯선데, 알고보니 <씬시티>나 <300> 같은 프랭크 밀러의 만화책을 출간한 곳이다. 아직 언론리뷰들은 뜨지 않아서 출판사의 소개 정도만 읽어본다.

1900년 이후부터 최근인 2003년까지 연도별로 서술된 현대미술사 저술의 결정판. 이보다 더 명성 있는 저자들, 상세한 내용, 명쾌한 분석, 풍부한 도판을 만날 수 있는 책은 당분간 만나기 힘들 듯하다. 각 저자들은 현대미술사의 핵심인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 반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등 20세기 이후 미술사의 쟁점들을 점검하고 주요 미술가, 작품, 저작, 전시 등에 대해 서술하여 복잡한 현대미술의 갈래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준다. 오늘날 미술사 연구에서 각광받고 있는 정신분석학, 예술사회학, 구조주의와 형식주의, 후기구조주의의 방법론에 대해 개설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각 저자들의 난상토론이 담긴 두 편의 라운드테이블, 현대미술과 철학 관련 용어 해설, 자세한 찾아보기 등을 수록하여 현대미술사를 공부하는 학생은 물론, 심도 있는 논의를 원하는 연구자 및 미술가들에게 귀중한 자원이 될 것이다.

"공부하는 학생은 물론, 심도 있는 논의를 원하는 연구자 및 미술가들"이 아닌 경우에는 그냥 장서용으로 꽂아둠 직하다. 그런 게 '교양'이므로...

07. 10. 27.

P.S. 20세기 미술사에 관한 참고서가 더 있나 찾아보니 <옥스퍼드 20세기 미술사전>(시공사, 2001)이 눈에 띈다. <1900년 이후의 미술사>와 같이 보면 좋겠다 싶은데, 품절이다. 대략 이런 책이라 한다.

20세기는 미술사에 있어 그 어느 시기보다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미술 활동이 전개되었던 시기. 미술사 전반을 포괄하면서 현대 미술의 뚜렷한 특징이 되어 온 사조와 사상, 그리고 개성적인 미술가들을 상세하고 명료하게 소개하고 있는 미술사전이다. 1,800여 명에 달하는 전 세계 미술가의 생애와 활동, 작품 경향과 20세기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상세하고 깊이 있게 다루며, 세잔, 고갱 등 20세기 미술의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19세기 말의 주요 미술가도 보완 수록하고 있다. 그리고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등 19세기 말의 미술 경향부터 신표현주의, 비디오 아트, 페미니즘 미술 등 최근의 모든 주요 사조와 운동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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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10-27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서용으로 '그냥' 꽂아두기엔 너무 비쌉니다. 할 포스터가 쓴 부분만 읽고 올까요? 서점은 책을 사는곳이지 읽는곳은 아님에도...?

수유 2007-10-27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고 말하면서 책을 검색하니 아니살 수가 없네요. 그러니 꼭 읽어야 할테지요. 간만에 인터넷으로 주문 들갑니다.

로쟈 2007-10-27 22:51   좋아요 0 | URL
빠르시네요.^^

2007-10-29 0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0-29 08:39   좋아요 0 | URL
역시나 교재로 널리 쓰이는군요...
 

학술저널 담비에서 고대대학원신문 창간 20주년 기념인터뷰를 옮겨온다. 고대 명예교수인 김우창 교수와의 인터뷰이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MAIN&rsec=MAIN&idxno=6763). 주된 화제는 '한국에서 학문을 한다는 것'. 최근에 출간된 <백낙청 회화록>(창비, 2007) 중의 일부를 읽으면서 생각해본 화두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학문을 한다는 것', 그리고 '한국어로 학문을 한다는 것', 한국의 인문학도들이라면 내내 끌어안고 씨름해야 하는 문제들이다. 김우창 교수의 대답은 좀 '낙관적'이다...

고대대학원신문(143호) "학문은 선입견 없이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다"

2007년 10월로 ‘고려대학교 대학원 신문’은 창간 2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1987년 10월 20일 고려대학교 대학원 총학생회 산하 편집부에서 창간을 하게 된 본지는 민주화 항쟁 이후 급박하게 전개돼 온 한국사회의 변동에 대학원생들이 스스로의 학문적인 연구와 분석을 통해 능동적으로 참여해 나아가려는 의지를 결집해 만들어진 자치활동의 산물이다.

본지는 창간 20주년을 맞아 기획한 ‘창간 20주년 기념 특별인터뷰’에서 '한국에서 학문을 한다는 것'이라는 주제로 ‘한국인문학의 거장’이자 본교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인 김우창 교수를 만났다. 교수신문의 지적처럼(2002년 10월호) 김우창 교수는 우리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 가운데 한명이다. 그의 첫 저서 ‘궁핍한 시대의 시인’(민음사 刊)이 출간된 1978년 이후, 김우창이라는 텍스트는 수많은 지식인들의 내면에 사유의 자양분으로 쌓여왔다. ‘심미적 이성’으로 대표되는 그의 사상은 개성적이기보다는 보편적이며, 그 보편적 결론으로 다가가는 과정이 개성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기자는 먼저 '한국에서 학문을 한다는 것'이라는 커다란 주제 중에서 '한국'이라는 공간적 특수성에 주목했다. 현재 한국에서 '학문의 장'은 어떠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을까? 평상시 원우들과의 대화를 통해서나 그간 대학원 생활을 하며 느낀 점들을 생각해보았다. 대략 3가지 정도가 떠올랐다. 첫째, 협애한 이데올로기 지형, 둘째, 시장가치 물신화, 셋째, 학문의 미국화가 그것이다. 말하자면 '한국'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협애한 이데올로기 지형과 시장가치의 물신화, 미국적 시각 및 사고방식의 내면화 문제와 직접 대면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문은 선입견 없이 진리를 탐구하는 것
기자는 먼저 김우창 교수에게 한국에서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의 협애한 이데올로기 지형에 관한 견해를 물었다. 김 교수는 대학원생정도 되는 사람들은 흔히 들을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수사에 의해서 사고가 좁아지면 안 된다며 더 이상 냉전반공주의는 지배적인 것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또한 기자의 질문이 학문의 범위를 좁힌 것이라 지적했다.

"반공이든, 친공이든 이것에 영향을 받는 것은 사회, 인문과학입니다. 자연과학과 의학은 그렇지가 않지요. 자연과학이나, 공학, 의학을 공부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사회, 인문과학도 마찬가지지만 바로 경제논리에 학문이 지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학문은 기본적으로 선입견 없이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데올로기나 맹목적으로 시장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열린 형태의 학문 수행에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논의는 자연스럽게 시장가치 추구에 대한 것으로 넘어갔다.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물결이 한국사회 특히나 학문의 장에도 스며들고 있는 현실을 새삼 떠올려 보았다. 한국의 많은 학자들이 수입을 올릴 수 있거나, 단기적인 연구성과를 올릴 수 있는 연구프로젝트에 집착하여 대학원생들을 동원하고 있다. 대학원이 점점 국가나 기업의 '프로젝트 하청공장'으로 전락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연구자는 당연히 자신의, 현실의 삶, 생활 속에서 문제의식을 제기, 발전시키고 그에 대한 엄밀한 고찰을 해나가야 한다. 그러나 돈이나 상징자본의 획득을 위해 대부분 현실과 괴리되어, 자신의 문제의식과는 상관이 없는 방향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에 자의든, 타의든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것을 어떻게 봐야할까? 한국에서 '죽은 학문', '화석화된 문제의식'등이 득세하는 것도 이런 경향들과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안 된다.

학문에 특정관점만을 강조하면 안 된다.
김우창 교수는 신자유주의는 경제를 운영, 지배하는 하나의 조류일 뿐이고 이보다 포괄적인 개념이 바로 경제논리, 시장논리인데 이것이 모든 영역을 지배하게 되면 문제가 심각해 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김 교수는 경제적 관점은 매우 중요하고 그것 나름의 커다란 의미가 존재한다고 이야기했다. 문제는 그것이 전부가 되는 것이다. 지나치게 실용적인 경제관점에서 진리탐구를 재단하면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시장가치를 말하기에 앞서 목적에 대한 성찰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학문은 총괄적인 것이기 때문에 특정 관점만을 강조하면 안 된다고 김 교수는 여러 차례 역설했다. 하지만 그는 현실의 모든 문제를 신자유주의 탓으로 돌리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했다.

"신자유주의는 분명 우리사회, 사고를 좌우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학문세계까지 그것의 논리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또한 공산주의, 전체주의와는 달리 민주주의, 자유주의는 강제력에 의해서 집행되는 체제가 아니죠. 신자유주의 자체에 직접적인 강제력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은 현실의 문제를 모두 신자유주의 탓으로 돌리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좋건 나쁘건 분명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합니다. 마치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받아들이면 그에 순응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김우창 교수는 수사적으로, 표피적으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무책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리 자신의 책임들, 우리가 실천적으로 할 수 있는 일에 관해서 생각해 봐야한다는 것이다.

연구기금을 위해 하는 연구
'시장가치의 확장'문제와 관련지어서 김 교수는 학문의 이니셔티브는 연구기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연구자에서 나와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연구자는 자신이 중요시하는 연구를 해야 합니다. 국가는 주제를 정해놓고 그에 맞추어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좋은 연구를 하는 이들을 찾아서 지원을 해주어야 하는 거에요.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요? 모든 것이 전도되어 있습니다. 학술진흥원 같은 곳도 이미 프로젝트 주제를 정해놓고 입찰을 받는 식으로 일을 진행합니다. 그러다보니 연구에 연구기금이 따라야 하는데 연구기금에 연구가 따르고 있습니다. 잘못된 거죠."

그는 옛날 시골훈장의 사례를 들며 요즘의 세태를 비판했다. 훈장들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사명으로 했고, 경제적 수입이라는 것은 그 과정에서 얻는 부수적인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훈장이 돈을 버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고 아이들을 가르치면 어떻게 되겠는가?   

국가, 경제 제일주의에서 벗어나자.
위의 맥락에서 김 교수는 한국에서 모든 행동을 정당화라는 논리가 두 가지 있다며 그것이 ‘민족주의’와 ‘경제성장’이라고 지적했다. 여전히 '부국강병'의 논리가 여러 곳에서 지배적인 가치로 통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본교가 영국 타임지 선정 세계 150대 대학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국가나 민족의 명예차원에서 사안을 볼 뿐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황우석사건'은 이에 대한 가장 적나라한 사례이다. 국가의 명예나 기대되는 경제적 가치에만 주목한 채 어쩌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진리탐구라는 이슈는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학문은 인간과 진리에 대한 끝없는 탐구를 통해 이러한 국가, 경제제일주의를 뛰어넘어 이를 초월할 수 있는 여지를 갖아야 한다.

"민족주의와 경제성장의 논리로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심각한 사고의 왜곡을 가져옵니다. 학문의 엄정성이 손상되는 것은 물론이고요. 세상에 크게 해악을 끼칠 일도 민족과 국가, 경제성장의 논리에 의해 정당화되고 있어요. 학문을 하는 이들은 이러한 논리들을 넘어서야 합니다."

기자는 한국에서의 '학문의 미국화'에 대한 그의 견해를 물었다. 미국학문에 종속되어 미국박사만이 숭상되며, 한국의 현실을 한국의 눈으로 설명하는 '자생적 이론의 부재'문제를 그간 여러 차례 느꼈기 때문이다. 김우창 교수는 기자의 질문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적이라며 중요한 것은 구체적이고 엄격한 사고에 입각한 객관적인 태도라고 강조했다. 문제를 다른 차원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학문 그 자체에 국가적인 편견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중요한 것은 미국박사냐 한국박사냐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전체적인 균형은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김 교수가 강조하는 것은 다름 아닌 논문의 질에 대한 엄정한 평가이다. 학문성과에 대한 선입견 없는 구체적인 판단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거대이론이 사라진 이유
논의의 범위를 '한국'이라는 공간적 특수성에 대한 강조에서 '학문을 한다는 것'이라는 일반적인 것으로 넓혔다. 근래에 들어 학자 중에 '대가'라는 칭호를 들을 만한 이들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또한 더 이상의 '거대이론'역시 출현하지 않고 있다. 개별 학문 분과를 넘나들 수 있는 사고력과 철학적 깊이를 갖춘 사람이 있다손 치더라도, 학문 분과를 넘나드는 것에 대해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것이 현실이다. 즉 학문의 분과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권력내지 지형으로 고착화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에 따라 과거와 같은 거대 이론도 출현하지 않는다. 인문학을 전공한 김우창 교수에게 '거대이론', '대가'의 부재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김 교수는 두 가지를 이야기 했다. 공산주의의 몰락과 자본주의발전에 따른 소비사회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먼저 공산주의의 몰락을 언급했다. 공산주의 유토피아의 몰락이후 사회를 고쳐야 한다는 말은 많지만 역사 그 자체를 설명하는 이론은 소멸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맑스를 비롯한 많은 혁명가들이 공유했던 '역사는 발전한다'는 개념자체에 대한 회의가 커져버렸다. 또 한편에서는 자본주의는 여전히 발전의 여지가 많아 보이고, 생태적인 문제와 연관지어서 지금 '서구의 선진사회가 과연 살만한 사회인가?'인가 하는 자각이 커졌다. 그렇기 때문에 거대 이론이나 새로운 역사적인 프로젝트는 이제 다시 나오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2차 대전이후 서구에서 자본주의발전에 따른 소비주의 사회가 등장했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소비의 유혹이 커지면서 생각은 흔들리고 사물을 크게 보고 움직이는 것 자체가 어려워진 것입니다. 즉 창조적인 관점에서 자기 삶을 영위하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여러 가지 문제가 새로 발생하면서 사는 보람도 많이 떨어지는 것이고요. 어찌 보면 푸코나 알튀세르 같은 당대의 이론가들도 역사와 더불어 움직이지 않은, 소비주의에 맞춰 들어간, 소비주의에 충실한 사회이론가들이라 볼 수 있어요."



중요한 것은 작은 실천이다.
김 교수는 거대 이론은 사라졌지만 우리들이 살아가는데 정말 필요한 가르침들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삶을 충실히, 정직하게, 성실하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행복과 보람을 약속해주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이 중요한 것이죠.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이들도 매우 소비적이고, 또한 큰 자동차를 타고 다닙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작은 실천, 일상생활 속에서의 실천입니다. 비 온다고 비 탓만 하면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에요. 개인적인, 사회적인 구체적인 대책을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대 담론에만 주목하면 안 되죠. 이론과 자신의 행동이 일치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소비주의, 판타지의 세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작지만 근원적인 인간의 가치를 추구해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근원적인 인간의 가치라는 큰 이론은 여전히 남아있는 셈이죠." 

기자는 다른 이도 아닌 평상시 다른 이들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검소한 생활로 유명한 김우창 교수의 지적이기에 그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주변의 이른바 '강단좌파'들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들의 실제 삶과 유리된 학문내지 사상이라는 것이 어떠한 위험성을 갖는지에 대해서도. 누구나 머리만 좀 좋고, 약간의 노력만 한다면, 좌파이론가들의 이름과 저작, 이론들을 줄줄 꿸 수 있고, 이는 실제로 그들에게 남들과 구별되는 일종의 상징자본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자신의 실존적 삶 내지 현실역사와 유리된 앎이라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아니 오히려 모르니만 못한 것이다. 잘 모르는 이들은 적어도 어딘가에 가서 혹세무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니 말이다.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
김우창 교수는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항상 열려있어야 하고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준수해야 한다며 무엇보다도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하는 것은 '학문은 무엇보다도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라 역설했다. 연구자는 항상 자기가 추구하는 분야에서 참된 것을 추구해야 한다. 시장가치나 민족주의와 같은 것이 현대를 지배하는 중심적인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이에 자신의 학문이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학문의 기본은 진리를 탐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헌신과 도덕적 성실성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사회에서는 경제주의나 출세주의가 지나치게 만연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제가 굶어죽으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에요. 열심히 공부를 하다보면 이런 것은 다 따라오게 되어있습니다. 제가 아까 훈장이야기를 했었죠?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 목적이 전도되면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연애하다보니까 종족이 번성되는 것이지 종족 번성을 위해서 연애를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무릇 대학원생들은
김우창 교수는 인터뷰 내내 학문의 기본은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열린 사고를 갖되, 엄격하고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랫동안 연구 활동을 해오고, 학생들을 지도해왔던 스승의 입장으로서 후학들인 대학원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뭐라고 생각하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3가지를 강조했다.

첫째, 공부를 하는 사람은 학문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한다. 무언가에 '빠져서' 끊임없이 정진해야 한다. 둘째, 대학원생들은 장래의 불안감을 극복해야 한다. 김 교수는 두 가지의 방안을 이야기했다. 하나는 학문에 몰두하면서, 끊임없이 정진하면서 불안감을 극복하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국가정책을 통해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는 학문발전을 위해 일정부분 지원을 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연구자들이 직업을 잡는데도 신경을 써주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학생-교수 비율의 문제를 생각해보죠. 교수의 숫자를 늘려서 교수들이 연구나 강의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건 제가 예전부터 계속 교육부에 건의를 했던 것인데요, 교육부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직접적인 간섭은 안하더라도 대학교원의 수급상황에 대한 통계는 발표를 해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자료가 있어야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대학원생의 수급을 적절히 조정할 수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대학이 학생들을 일단 많이 뽑으려 합니다. 경제논리를 따르는 거죠. 교육부에서 이런 통계를 발표해서 교원-학생 수급에 따라 학생 수를 조정하는데 일조를 해야 합니다. 우리 정부는 이런 일을 안 하고 있어요."

셋째, 공부를 하는 이들은 학문을 하는 것에 대한 소명감이 있어야 한다. 김 교수에 따르면  대학원생들은 공부를 단순한 직업(job)이 아닌 하나의 부름(calling)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는 기자에게 졸업가운의 의미를 아는지를 물어왔다. 어리둥절해 하는 기자에게 김우창 교수는 졸업가운은 과거 신부들의 수도승 복장과 유사한데 이는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는 '수신'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공부를 하려는 사람은 그럴 정도의 소명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막스 베버(Max Weber)의 '직업으로서의 학문'(사실은 '소명으로서의 학문'으로 번역되어야 할)을 인용하면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소명의식이 있어야 하고 너무 세속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했다.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다른 이들이 앞서나가는 것을 참고 견디어야 하고, 어느 정도의 가난도 감내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빈곤을 참아내야 하고 연구비는 정말 필요한 곳에만 사용해야 한다.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봐야
마지막으로 본교에서 오랫동안 학생들을 지도하고 대학원장을 역임한, 고려대학교의 스승이라는 입장에서 후학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물었다. 김 교수는 비록 전보다 유혹은 많아졌지만 열심히 공부를 하는 학생들이 없는 것은 아니라며, 학생들의 학문에 대한 정열이나 공부하는 마음은 과거와 크게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앞서 자신의 말들을 정리하며 다음과 같은 당부를 덧붙였다.

"학문을 하는 이들은 냉정하게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 현실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베버가 언급했듯이 공부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고 소명의식을 가진 이들이 해야 합니다. 연구자들의 취직문제는 정부가 앞서 이야기한 일들을 하며 해결노력을 해야 하고요.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저는 외국유학을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에 눈을 돌려 직업시장을 넓힐 필요도 있습니다. 비록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유목민처럼 살 각오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학교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학교는 건물이나 외양에만 치중된 시설투자는 그만하고 공부를 하는데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설투자가 아닌 공부투자가 절실합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한 시간 여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며 기자는 김우창 교수와의 대화들을 음미해 보았다. '인문학의 거장'이라는 그에 대한 찬사답게 그의 말과 주장들은 매우 부드럽고 유연한 것 같으면서 강한 메시지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또한 당연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그의 말은 잘 음미해 보면 많은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예를 들어 어찌 보면 누구나, 심지어 술자리에서도,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 같은 아는 것과 행동의 일치를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도 기자는 매체나 주변을 통해 들은, 그가 묵묵히 실천하고 있다는 검소한 삶을 떠올리며 숙연해 질 수 밖에 없었다. 진정성에서 나오는 '말의 힘'을 느낀 것이다.

김우창 교수와 한 시간 여 동안 '한국에서 학문을 한다는 것'을 주제로 인터뷰를 한 후 기자는 마치 책에서나 읽었던 완숙기의 '막스 베버'를 만난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기자의 짧고 얕은 공부로는 막스 베버나 김우창 교수 사상의 정수나 인식론, 삶의 철학을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학문은 무엇보다도 선입견 없이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라는 김 교수의 주장, 일체의 결정론이나 단정적 태도, 이데올로기를 배격하고 사물의 다차원성을 강조하는 것, 공부를 하는 이들은 반드시 소명의식을 가지고 엄격하면서도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현실을 바라봐야 한다는 그의 주문은 기자의 짧은 지식에도 불구하고 막스 베버의 풍모를 연상케 하기에 충분했다.

07.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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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10-27 09:34   좋아요 0 | URL
"첫째, 공부를 하는 사람은 학문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한다. 무언가에 '빠져서' 끊임없이 정진해야 한다. 둘째, 대학원생들은 장래의 불안감을 극복해야 한다. ... 셋째, 공부를 하는 이들은 학문을 하는 것에 대한 소명감이 있어야 한다."

학문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아닌 저로서는, 학문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참 존경스러워집니다. '장래에 대한 불안감'은 수능점수 상위 몇개 학교를 제외하고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고, 이로 인해 첫번째 또한 달성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고 - 자꾸만 딴 곳을 바라보게 되니깐요 - 세번째는 그래야하는 당위이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군요. -_-

로쟈 2007-10-27 10:39   좋아요 0 | URL
모든 당위가 그렇듯이 실천은 쉽지 않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