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출간된 책으로 보관함에 들어있는 책들 중 하나는 이환 교수의 <몽테뉴와 파스칼>(민음사, 2007)이다. 발레리의 <말라르메를 만나다>(문학과지성사, 2007)처럼 대번에 주문하지 못한 이유는 물론 책값에 대한 부담 때문이다(요즘 1만원은 책값이 아니다!). 250쪽이 안되는 책이지만 정가로는 18,000원이나 하니 말이다. 대학 교재용 책들에는 턱없는 가격이 매겨져 있는 경우가 많지만 이젠 웬만한 교양서들도 분량과 무관하게 2만원 안팎에서 책값이 결정된다. 도서정가제가 강화되면 거품이 걷힐 수 있을까? 두고 볼 일이다. 여하튼 가격만 관심사에서 제쳐놓는다면 책은 교양서로서 충분한 값어치를 할 거라고 믿는다. 저자가 이미 파스칼과 몽테뉴에 대한 연구서들을 내놓은 이 분야의 권위자이기 때문이다. 책의 부제는 '인본주의냐 신본주의냐'인데, 물론 몽테뉴와 파스칼을 각각 이르는 말이겠다. 관련리뷰를 옮겨놓는다.

 

한겨레(07. 11. 10) 몽테뉴와 파스칼, 시대가 만든 영원한 라이벌

‘모랄리스트’란 프랑스의 고유한 지적 계보에 속하는 일군의 작가를 가리킨다. 수필이나 잠언 같은 비체계적 글쓰기 형식 안에 인간성에 대한 냉정하고도 신랄한 철학적 성찰을 담아낸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철학과 문학 중간쯤에서 독특한 사유를 펼친 사람들인 셈인데, 이 모랄리스트 계보의 맨 앞자리에 선 두 사람이 미셸 드 몽테뉴(1533~1592)와 블레즈 파스칼(1623~1662)이다. 1세기 가까운 시차를 두고 태어난 두 사람은 같은 모랄리스트이면서도 여러 지점에서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지적 라이벌이다.

몽테뉴는 <에세>라는 저작을 남겼고, 파스칼은 <팡세>라는 작품을 썼다. 몽테뉴는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유명한 질문으로 자신의 회의주의적 사색을 요약했고,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명제로 사상사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을 새겼다. 특히 삶에 관한 두 사람의 관점은 정반대라 할 정도로 달랐다. 몽테뉴가 무신론적 인본주의자였다면 파스칼은 신앙에서 출구를 찾은 기독교인이었다. 두 사람이 마주앉는다면 그 대결이 자못 격렬할 것이다. 불문학자 이환 서울대 명예교수가 쓴 <몽테뉴와 파스칼>은 사색의 두 대가를 링 위에 올려 놓고 대결시킨 책이다.

지은이는 불문학 중에서도 파스칼 전공이다. “젊은 시절 파스칼에 이끌린 뒤로 줄곧 파스칼을 붙들고 살았다.” 그렇게 오래 매혹당하는 동안 <파스칼 연구>와 <파스칼의 생애와 사상>을 썼다. 그리고 파스칼에게서 자극받아 뒤늦게 몽테뉴에 도전해 몇 년 전 <몽테뉴의 ‘에세’>를 펴냈다. 이 정도면 두 사람을 한 링에 세울 만큼 준비가 된 셈이다.

세대가 다르니 만큼 두 사람이 실제로 대결할 기회는 없었지만, 가상의 대결을 펼친 적은 있다. 파스칼이 몽테뉴를 맞상대로 삼아 퍼부은 공격의 내용이 <팡세>를 비롯한 유작 이곳저곳에 남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파스칼이 마냥 몽테뉴를 거부했던 것만은 아니다. 파스칼은 몽테뉴의 <에세>를 평생의 애독서로 가까이 했고, 기독교 <성서> 다음으로 많이 읽었다고 한다. 파스칼에게 몽테뉴는 애증이 교차하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 책에서 두 사람의 대결 지점은 ‘삶을 어떻게 살 것이냐’로 모인다. 몽테뉴가 살던 시대는 종교개혁의 후폭풍으로 신교와 구교 사이에 참혹한 내전이 벌어지던 때였다. 사람들은 서로 자신들의 신을 믿으라고 강요하며 유럽을 피로 물들였다. 몽테뉴가 본 것은 인간의 광기였다. 그 광기를 낳은 것은 ‘우리가 믿는 신만이 진짜 신’이라는 맹목적 신앙이었다. 몽테뉴는 이 독단적 맹신이야말로 삶을 파괴하는 요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그가 내린 처방이 ‘회의’였다. 회의의 정신을 몽테뉴는 이렇게 묘사했다. “뒤흔들고, 의심하고, 따져묻고, 어떤 것도 단정하지 않고, 어떤 것도 다짐하지 않는 것.”

몽테뉴는 이렇게 발본적으로 의심하는 과정을 통해 모든 맹목적 믿음에서 해방될 수 있고 정신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자유로워진 정신이 볼 때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신 없는 세계의 유한한 삶’뿐이다. 몽테뉴는 절대니 영원이니 하는 불가능한 것을 포기하고 삶의 유한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말했다. 이 유한한 삶에 자족하고 거기서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의 평안은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데서 온다.

파스칼 시대에 몽테뉴의 가르침은 꽤 널리 퍼진 일반 교양이 되었다. 그러나 파스칼은 몽테뉴와는 전혀 다르게 생각했다. 종교전쟁이 끝나고 유럽이 안정기로 접어든 이 시기에 파스칼은 ‘불안’을 보았다. 그에게 인간이란 ‘위대함’과 ‘비참함’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존재였다. 인간은 갈대와 같은 존재여서 무한한 우주에 비하면 한없이 비참하다. 그러나 그렇게 미약한 존재가 전 우주를 사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없이 위대하다. 파스칼의 강조점은 ‘비참’ 쪽에 찍혀 있었다. ‘무’와 ‘무한’ 사이에 걸려 있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불안을 안고 살 수밖에 없다고 파스칼은 생각했다.

파스칼이 보기에 몽테뉴는 이 근본적인 문제를 덮어버리고 그 위에서 적당히 삶을 즐기려고 한다. 몽테뉴처럼 의심만 하고 끝내서는 안된다. 의심의 끝을 뚫고 ‘초월’로 나아가야 한다. 기독교의 신에게 귀의함으로써 불안과 불행을 극복하고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파스칼의 생각이었다. <팡세>는 이렇게 기독교 변호론을 펼치는 책이다.

지은이는 두 사람의 대결이 “인간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영원한 대결의 한 표본”이라고 말한다. 몽테뉴는 삶이라는 것이 수많은 결함을 지녔음을 알면서도 낙관과 긍정으로 그 삶을 감싸려고 하고, 파스칼은 삶의 결함을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절대자를 불러들인다. 절대자만이 이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을 극복할 길을 열어준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두 사람의 견해를 중립적으로 보여주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최종적으로는 파스칼 쪽으로 향한다.(고명섭 기자)

07. 11. 09.

Мишель Монтень Опыты. О человеческих поступкахБлез Паскаль Мысли

P.S. 이미지는 러시아어 문고본의 <엣세>와 <팡세>(나는 흔히 '경험'이라고 번역되는 러시아어 'opyt'가 불어 'essai'의 번역어라는 걸 얼마전에야 깨달았다). 리뷰를 읽으며 다시 확인하는 것이지만, 저자의 '최종적인' 입장과는 다르게 나는 (분류하자면) 몽테뉴주의자이다. 한편, 프랑스 계몽주의의 두 라이벌 볼테르와 루소라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생긴다(당신은 누구의 편을 들겠는가?). 이 또한 누가 책을 써주면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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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북리뷰들을 잠깐 훑어보다가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책에 대한 리뷰가 있기에 옮겨놓는다. 국제정치학자 케네스 월츠의 <인간 국가 전쟁>(아카넷, 2007)이 최근에 나온 책이고, 저자의 명망과 책의 의의에 대해서 전재성 교수가 짚어주고 있다. 월츠의 책으론 <국제정치이론>(사회평론, 2000)이 소개된 바 있다.

경향신문(07. 11. 10) 국제정치 현상의 본질

2차 세계대전 이후 활동한 미국의 국제정치학자 중 가장 영향력 있는 한 사람을 꼽으라고 하면 단연 케네스 월츠가 거론될 것이다. 그만큼 월츠는 미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 중의 한 명이다. 국제정치학의 가장 중요한 이론 패러다임인 현실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많은 공헌을 하였고, 유럽에 비해 저발전되어 있던 20세기 미국의 국제정치학 이론의 초석을 놓는 데 많은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반 미국은 현재와 같은 세계적 주도국의 위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따라서 국제정치에 대한 관심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 시기 미국의 국제정치학은 한스 모겐소와 같이 유럽에서 건너온 정치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월츠는 미국의 시각에서 미국적 이론관을 가지고 미국의 외교정책에 도움이 되는 국제정치학을 시작한 국제정치학자이다. 냉전의 현실적 상황과 미국의 과학적 이론관의 배경에서 국제정치학 이론, 특히 신현실주의 이론을 만들어낸 중요한 학자이다.

book jacket

월츠의 ‘인간, 국가, 전쟁: 전쟁의 원인에 대한 이론적 고찰’은 출판된 지 50년이 되어 가지만, 여전히 세계적으로 읽히고 있는 20세기의 고전이다. 수학과 경제학으로 학문을 시작한 월츠는 국제정치를 과학적으로 이론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시도하였다. 월츠 이전의 국제정치학 이론들이 역사와 철학을 중시하였다면, 월츠는 더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이론에 입각하여 국제정치이론을 만들고자 시도하였다.

1959년에 출간된 이 책은 컬럼비아대에서 작성한 박사학위 논문을 발전하여 출간한 책이다. 월츠는 이후의 인터뷰 등을 통하여 ‘인간, 국가, 전쟁’을 미시경제학의 실증이론, 과학철학, 그리고 인류학 및 철학 등을 광범위하게 종합하여 저술한 책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만큼 국제정치 현상을 다른 학문 분과와 구별하여 과학적으로 이론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부제는 전쟁의 원인에 대한 고찰이지만, 월츠는 이 책에서 전쟁을 비롯한 다양한 국제정치 현상들의 원인을 밝히고자 노력하고 있다. 월츠는 인간, 국가, 국제정치 구조의 세 가지 분석 수준에서 국제정치 현상을 분석하는 시각을 논하면서, 각각 ‘이미지’라는 비유를 붙이고 있다. 국제정치를 보는 첫 번째 이미지는 전쟁을 비롯한 국제정치 현상을 인간의 본성에 비추어 보는 방법이다. 두 번째 이미지는 국가의 성격, 즉, 민주주의, 독재 등 정권의 모습에 비추어 보는 방법이다. 세 번째 이미지는 국제정치의 독특한 구조에 비추어 국제정치 현상을 분석하는 견해이다. 월츠는 전쟁과 같은 국제정치 현상의 원인이 무엇보다 세 번째 이미지, 즉, 국제정치구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사회나 국내정치와 달리 국제정치는 주권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권국가는 국제기구, 세계정부와 같이 상위의 권위체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권한과 군사력을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무정부상태’적 조직원리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월츠는 이 책에서 기존의 다른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 자신의 현실주의 이론을 만들어가고 있다. 월츠는 첫 번째 이미지를 강조하는 대표적인 철학자인 스피노자, 두 번째 이미지를 강조한 칸트를 비판적으로 보면서, 국제정치구조의 세 번째 이미지를 제시한 루소의 시각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월츠는 루소의 ‘사슴사냥’ 이야기를 하나의 사례로 들어, 국제정치의 본질을 설명하고 있다. 사냥에 나선 사냥꾼들은 협동하여 사슴을 잡으려 하지만, 자신의 배를 채울 수 있는 토끼 한 마리가 나오면 다른 사냥꾼들과의 약속을 깨고 대오를 이탈한다는 것이다. 결국 사냥의 대오와 같은 관계의 짜임새, 상호작용의 구조가 개체들의 행동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다.

냉전이 전개되면서 월츠의 이론은 미국의 외교정책은 물론, 다른 국가들의 정책관, 그리고 많은 학자들의 상상력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국제정치구조가 냉전과 같이 양극체제로 되어 있는가, 혹은 다극, 패권체제로 구성되어 있는가 하는 구조적 원인이 중요하다는 통찰력 때문이다. 냉전이 종식되고, 미국 주도의 패권체제로 21세기를 맞이하고 있는 지금, 이러한 월츠의 통찰력이 미국과 다른 국가들의 외교정책에 어떠한 지혜를 줄지가 궁금하다. 더구나 냉전의 영향력이 아직도 남아있는 한반도와 동북아의 국제정치를 생각할 때 국제정치구조의 영향력은 여전히 고려해야 할 요소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번 월츠의 번역서는 매우 시의적절하고, 바람직한 일이라 하겠다.(전재성|서울대 교수·국제정치학)

07. 11. 09.

P.S. 책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기 위해서라도 참조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같은 지면에 실린 리뷰로, 석유 지정학과 20세기 전쟁을 다룬 윌리엄 엥달의 <석유 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길, 2007)에 관한 기사도 눈길을 끈다. 전쟁은 왜 일어나는가? 저자에 따르면 단연 석유 때문이다.

경향신문(07. 11. 10) 석유와 무관한 전쟁은 없다

“미녀는 석류를 좋아해. 자꾸자꾸 예뻐지면 나는 어떡해. 거울 속의 나를 보면 정말 행복해. 미녀는~ 미녀는 석류를 좋아해.” 꽃미남 배우 이준기가 출연한 한 음료 CF송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재기발랄한 누리꾼이 댓글을 달았다. “미국에서도 유사품 출시 예정. ‘부시는 석유를 좋아해’” 또 다른 네티즌의 패러디 버전이 이어진다. “미국은 석유를 좋아해. 자꾸자꾸 빼앗으면 우린 어떡해. 석유로 번 돈을 보면 정말 행복해. 미국은~ 미국은 석유를 좋아해.”

대량살상무기 제거를 구실삼아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과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속셈은 막상 석유에 있다는 것을 비아냥거리는 풍자다. 최근의 전쟁들이 이처럼 한결같이 석유 지배권을 둘러싼 다툼이라는 것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도 아니다. “세계를 지배하고 싶은가. 그러면 석유를 지배하라. 모든 석유를, 어디에서든.” 벨기에 저술가 미셸 콜론이 미국의 행태를 보며 씁쓸하게 던진 한 마디다. 사실 이 말은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에너지를 지배하라, 그러면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이미 오래 전에 갈파한 것과 수사만 다를 뿐이다.



윌리엄 엥달이 쓴 ‘석유 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원제 A century of war, Anglo-American oil politics and the new world order)은 바로 그 석유의 눈으로 본 한 세기의 역사다. 그것도 패권국가 영국과 미국의 세계지배전략을 겨냥한 것이다. ‘겨냥했다’는 표현은 미국의 언론인이자 비주류 경제학자인 글쓴이의 극히 비판적인 시각을 반영한다. 음모론이 전편(全篇)을 지배하는 게 아니냐고 또 다른 음모론적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를 만큼 신랄하다. 문장이 신랄한 게 아니라 고갱이가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다양한 비밀문서와 자료를 바탕으로 읽는 이의 마음을 빼앗아간다.

저자는 먼저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오래도록 남아 있었던 것은 바로 석유의 중요성을 맨먼저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1882년 9월 영국에는 장차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는 비결은 석유에 있다는 전략적 함의를 꿰뚫고 있던 피셔 제독이 있었다. 당시 함장이던 그는 부피가 큰 석탄 화력추진형 군함에서 새로운 석유 연료형 군함으로 바꿔야 한다고 정부 관리들을 논리적으로 설득해 나갔다.

석유를 때는 디젤 모터로 동력을 얻는 전함은 연기를 전혀 내지 않아 적에게 들킬 염려가 없는 데 반해 석탄을 때는 배는 내뿜는 연기가 10㎞ 밖에서도 선명하다. 석탄 배의 모터는 4~9시간이 지나야 완전 가동되지만 석유 모터는 30분이면 충분하다. 전함 한 척에 기름을 공급하려면 12명의 인원이 12시간 작업하면 끝이지만 석탄 배는 500명의 인원이 5일 동안 작업해야만 한다. 다른 장점도 수없이 많지만 이 정도만 해도 더 비교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괴짜 몽상가 취급을 당하던 피셔 제독의 의견이 먹혀들지 않았으면 영국의 미래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20세기 초 영국이 1차 세계대전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끌었던 데는 석유가 있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종전협정 직후 연합군의 전승 만찬장에서 프랑스 상원의원이자 전시 석유총위원장인 앙리 베랑제가 “석유가 승리의 피였다”고 만찬사를 요약한 것만 봐도 알만하지 않은가. 독일이 철과 석탄에 대한 자국의 우위를 과신해 석유에 대한 연합군의 우위를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석유를 가장 먼저 안 것은 막상 독일이었지만 앞을 내다보지 못했다.

석유가 세계사에서 또 하나의 중대한 고비가 된 것은 ‘일곱 자매(Seven Sisters)’로 불리는 영·미 카르텔의 탄생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경제질서를 형성한 브레턴우즈 체제가 미국과 영국의 세계 석유지배권과 맞닿아 있으며, 유럽부흥계획인 마셜 플랜도 미국의 5대 석유회사와 영국의 2대 회사가 결정적인 배후세력이었다고 저자는 논증한다. ‘일곱 자매’라는 별명을 처음 만들어 붙이고 이들 골리앗 카르텔과 맞서 싸우던 다윗이었던 이탈리아의 민족주의자 엔리코 마테이가 어느날 갑자기 비행기 사고로 숨지는 슬픈 비화에서는 비장감이 배어나온다.

냉전기간 동안 석유가 세계 곳곳에서 미국의 대외정책을 규정하고 소련이 붕괴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지은이는 정곡을 찌른다. 이라크 전쟁을 비롯해 냉전 종식 이후 벌인 미국의 군사행동을 규율한 석유는 구 유고슬라비아연방이 해체되는 과정과도 직결돼 있다고 분석한다. 흔히 인종청소의 반인륜 범죄를 처단하기 위해 밀로셰비치 정권을 붕괴시킨 것으로 알고 있지만 내막은 미국의 석유 전략이 깊숙이 개입돼 있다는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현대전쟁 가운데 석유와 무관한 전쟁은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코소보 전쟁은 물론 아프리카 내전, 영국의 아르헨티나 공격 등도 하나같이 석유 때문이었음이 드러난다.

이 책에서는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흥미로운 사실도 적지 않게 밝혀진다. 오일쇼크를 일으킨 주체는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아니라 그들을 뒤에서 조종한 영국과 미국의 세력이었다든가, 핵발전소 건설을 반대하는 각종 환경단체들이 석유업계의 후원을 받았다는 점 등이다. ‘검은 황금’ ‘현대 문명의 으뜸 재화’로 불리는 석유의 배럴당 100달러 돌파가 시간문제라는 기사가 연일 지면을 장식하는 지금 이 책은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지혜를 주고도 남을 듯하다.(김학순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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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내리고 있는 알바니아의 세계적인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의 새로운 소설이 번역돼 나왔다. <아가멤논의 딸>(문학동네, 2007).

소개에 따르면, "희생과 공포, 인간의 정신적 몰락에 대한 등골 서늘한 비극. 한 여인의 불길한 희생을 고대 그리스에서 일어난 이피게네이아의 희생과 오버랩시켜, 권력과 공포의 본질을 날카롭게 통찰"하고 있는 작품으로 "공산 독재정권 하의 조국 알바니아의 혼과 집단기억을 문학을 통해 생생하게 되살려온 이스마일 카다레가 1985년에 쓴 장편소설"이라고 한다.

아직 리뷰들이 뜨지 않아서 책소개만을 참고하면 "원고의 '외부 반출'이 공식적으로 금지된 알바니아에서 카다레는 1986년부터 자신의 원고를 몇 장씩 빼내 비밀리에 프랑스로 내보내기 시작했고, 프랑스의 한 출판사가 원고를 안전한 곳에 보관했다가 후에 출간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20여 년 만에 출간된 작품들 중 하나가 바로 <아가멤논의 딸>(2003년 출간)이다."

 

 

 

 

무슨 내용인지 궁금하지만 짧은 분량이기에 그냥 단숨에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참고로 말하면 읽어야 할 책은 '카다레의 모든 책'이다). 국역본은 불어본을 대본으로 하고 있는데, 영역본도 이미 나와 있다.

다음주가 지나면 시간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07. 11.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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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11-09 21:43   좋아요 0 | URL
사랑하시는 "이스마일 카다레" 네요. H 서류와 부서진 사월. 나는 요즘 리스본으로 가는 야간열차에 탑승해 있습니다만, 저 책도 독서목록에 넣어야겠네요.

로쟈 2007-11-10 00:14   좋아요 0 | URL
'알바니아'란 나라를 기억하게 해주는 유일한 '끈'이 저에겐 카다레니까 문학은 굉장한 것이긴 합니다...
 

'로쟈의 페이퍼'로 기고한 글을 옮겨놓는다. '최근에 나온 책들' 소개이기 때문에 '11월의 읽을 만한 책'(http://blog.aladin.co.kr/mramor/1670896) 목록과 얼마간 중복되기도 한다. 눈에 띄는 책이 중복되는 거야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단, 대학원신문에 게재되는 글이라서 조금 '학술적인' 책들도 여기서는 다루게 된다. 물론 분량상 이번에도 빠지게 된 책들이 다수 있지만,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지각하는 책들이 있다. 허다한 고전들이 아직 번역되지 않은 형편이므로 제 때 나오지 않았다고 나무랄 수는 없겠다. 번역은 혁명만큼이나 기나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지도 모르는 일이고. 영국의 대표적인 좌파 문화비평가 레이먼드 윌리엄스(1921-1988)의 <기나긴 혁명>(문학동네)이 최근에 출간됐다(*보통은 '윌리엄즈'로 표기돼 왔지만 새 표기법에 따르면 '윌리엄스'인 모양이다). 원저는 1961년에 나왔으니 역자의 토로대로 “출간된 지 반세기가 다 되어가고, 저자가 사망한 지도 내년이면 20년이 된다.” 90년대 팽배했던 문화연구의 열풍이 한풀 꺾이고 나서야 영국 문화연구 ‘원조’의 주저가 나온 셈이니 말 그대로 ‘기나긴 시간’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이 책은 1958년에 나온 <문화와 사회 1780-1950>(이화여대출판부, 1988)의 연장선상에서 기획되고 쓰인 것이다(원저의 속편이 3년 만에 출간되었다면 한국어본의 속편은 20년 만에 나온 것이 된다). 국내에 그보다 먼저 소개되었던 책이 <이념과 문학>(문학과지성사, 1982)으로 번역된 <마르크시즘과 문학>(1977)이었다(이 책은 <문학과 문화이론>(경문사, 2003)이란 제목으로도 출간됐다. *번역은 모두 불만스럽다는 평이다). 연이어 <문화사회학>(까치, 1984) 등도 소개되었으니 한때 윌리엄스는 ‘상종가’였다. 그리고 20여년이 지나서 우리는 그 ‘전설’과 뒤늦게 재회하게 되었다.

흥미로운 건 윌리엄스의 선배비평가이자 라이벌이었던 F. R. 리비스(1895-1978)의 비평서 <영국소설의 위대한 전통>(나남)이 나란히 출간된 사실이다. 이 책은 1948년작이니까 거의 6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리비스와 윌리엄스를 다룬 연구서 <비평의 객관성과 실천적 비평>(창비, 1993)에서 김영희 교수는 “특히 리비스의 경우에는 소개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고 서문에 적었는데, 그 ‘소개’의 몫은 결국 저자 자신이 지게 되었다. 리비스와 윌리엄스를 ‘비판’하고 있는 다음 세대 비평가 테리 이글턴의 <문학이론입문>(창비, 1986)이 소개되고도 20년이 더 지난 뒤이다.  

따지고 보면 1960년대 영국의 이론적 정세는 ‘문학연구에서 문화연구로’란 방향설정이 우리의 90년대와도 흡사한데 이에 대한 풍부한 배경지식을 전해주는 책으로는 ‘1960년대 이후 영국 문학이론의 정치학’을 부제로 달고 있는, 김용규 교수의 <문학에서 문화로>(소명출판, 2004)가 있다(*김영희 교수의 책과 마찬가지로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이다).

 

 

 

 



사실 거슬러 올라가기로 작정하면 거칠 것도 없다. 서양 중세사회경제사의 고전으로 이미 평가받고 있는 아일린 파워(1889-1940)의 <중세의 사람들>(이산)도 최근에 출간됐다. 1924년작이다. 제목 그대로 중세의 ‘사람들’과 그들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책인데, 파워의 영향하에 쓰인 노만 켄터의 <중세이야기>(새물결, 2001)와 함께 읽어볼 만하다. 아울러 중세를 다루고 있는 책으로 클라우스 리젠후버의 <중세사상사>(열린책들)도 눈길을 끈다. 저자는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총 20권에 달하는 <중세사상원전집성>을 발간하였다고 하며 이 책은 일종의 안내서라고. 말하자면 1500년에 걸친 방대한 중세사상으로 들어가는 ‘문’인 셈이다(*이미 출간된 책으로는 에티엔느 질송의 <중세철학사>(현대지성사, 1997)가 고전에 속한다).  

 

 

 

 

 

 



중세보다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만난다. 그의 <형이상학>(이제이북스, 2007)이 드디어 완역돼 나왔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서구 형이상학의 ‘기원’이라 할 고전이다. 가장 근본적인 물음들, 예컨대 '있는 것(존재)'이란 무엇인가란 물음 자체를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이참에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까치, 1998) 등과 함께 형이상학적 사유로의 여행을 위한 묵직한 배낭을 꾸려볼 수도 있겠다. 곧 찬바람이 불고 ‘기나긴 밤’들이 도래하지 않겠는가. 


 

 

 

 

 

 

 

 

이런 여정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렇다, 문명 이전의 세상, 아예 인간 없는 세상이다! 그 먼 과거에 대한 상상력까지 부추기는 책은 우리의 먼 미래를 상상하는 앨런 와이즈먼의 <인간 없는 세상>(랜덤하우스)이다. 어느 날 인류가 갑자기 사라진다면, 인류와 함께 없어질 것들은 무엇이고, 인류가 남길 유산은 무엇인가를 탐문해가는 여정에서 그가 계산해주는 바에 따르면 인류가 과배출해낸 이산화탄소가 인류 이전 수준을 회복하는 데 10만년이 걸린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는, 아니 흔적은 지워져갈 것이다. 그래도 혹 영혼은 남을까? 칼 지머의 <영혼의 해부>(해나무)와 트레이시 키더의 <새로운 기계의 영혼>(나무심는사람)에서 해답을 얻을 수 있지 모르겠다. 흠, 책 읽을 시간이 많지 않다...

 


07. 11.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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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에 쓴 시를 한편 더 옮겨놓는다. 이 또한 '코믹시'로 분류해야 할 듯싶은데, 사실 출전은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으나 스피노자의 경구로 잘 알려진 "내일 지구에 종말이 와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이 내겐 언제나 유머로 들렸다. 시는 왜 그것이 유머인지를 나대로 '증명'하고자 한 시도였다...

한 그루의 사과나무

내일 지구에 종말이 와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그런 농담으로!)
왜 사과나무뿐이겠니
감나무 배나무 살구나무
자작나무 미루나무 은행나무 은사시나무
왜 한 그루뿐이겠니
여기에 한 그루 저기에 두 그루
뒷집 마당에도 한 서너 그루
강 건너라고 가리겠니
한 열 그루 심자꾸나
너는 구덩이를 파고 또
너는 물주전자를 가져오려무나
내일이 종말이란다
어서들 심자꾸나
이때가 아니면 또 언제
우리가 철인(哲人)이 되겠니
어차피 종말이란다
뭔들 못하겠니
나무나 심자꾸나
용되자꾸나
어서 어서들 모이거라

자, 사과나무에
이젠 목매달자꾸나
내일이 종말이라는데
아, 기분 한 번 내보자꾸나
자, 어서 어서들- 

07. 11.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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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11-08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르틴 루터가 한 말이래요. 그러면

<이때가 아니면 또 언제
우리가 기독인이 되겠니> 가 되나요?

로쟈 2007-11-08 12:29   좋아요 0 | URL
사실 누가 말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경구이기도 합니다. 경건해뵈는 그럴 듯한 누군가라면.^^

닉네임을뭐라하지 2007-11-08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로쟈님도 20대가 있었던 거군요 ㅎㅎ
20대의 느낌이 팍팍 묻어나네요 ^^

로쟈 2007-11-08 12:30   좋아요 0 | URL
10대도 있었던 걸요!^^

마늘빵 2007-11-08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로쟈님의 20대라니. 상상이 안갑니다. 시도 쓰시고.

로쟈 2007-11-08 21:15   좋아요 1 | URL
문학 전공자들이 본래 시나 소설 습작들을 합니다.^^;

심술 2007-11-08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그림 동화책 표진가요?

로쟈 2007-11-08 21:15   좋아요 0 | URL
그런 거 같습니다. 저는 그냥 적당한 이미지만 가져왔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