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식을 먹으며 클릭해본 사이트에서 뜻밖의 재미있는 기사를 읽었기에 옮겨놓는다. 뭐 그래봐야 또 책 얘기지만 이번엔 블로그 얘기이기도 하다. '블로그 에세이'를 묶은 책이라고 하니까. <사야까의 한국고고씽>(미다스북스, 2007)의 저자는 고마츠 사야까라는 일본 학생이며 '내 눈으로 본 한국, 한국(http://sayaka.tistory.com)이란 블로그 운영자라 한다. 이미 500만명이나 다녀간 인기 블로그의 주인장이라고 해서 들어가 보니 현재 420만에 근접해가고 있다(그럼에도 대단한 방문자수임에는 틀림없다. 1일 방문자수만 해도 이곳의 10배 이상이다. 하니 연말쯤에나 30만에 턱걸이할 걸로 보이는 이 서재와는 비교가 안된다). 다들 '로쟈'는 몰라도 '사야까'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나만 빼고.) 기사가 길게 느껴지는 분은 막바로 책에서 인용한 '야스쿠니 신사 참배 때마다 생기는 일’ 같은 글꼭지를 읽어보시길. 거의 '사야까 콘서트'이다!..

세계일보(07. 10. 12) 500만명이 중독된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에 관한 보고서!!

'사야까의 한국고고씽’은 사야까라는 일본 처녀가 한국에 와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체험들을 특유의 솔직발랄하고 재치 있는 시선으로 풀어낸 한국문화에 관한 하나의 보고서이자 개인적 체험견문기 형식의 블로그 에세이다. 한국인이라고 해도 깜빡 속을 만큼 말솜씨는 물론이거니와 글솜씨도 뛰어난 저자 고마츠 사야까는 한국을 직접 체험하고 경험한 이야기들을 혼자만 가슴에 담아두기 싫어서 올해 여름부터 다음(Daum)에 블로그(sayaka.tistory.com)를 직접 만들어 글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사야까의 글은 연재하자마자 네티즌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화제를 몰고 있는데, 그 인기는 블로그 개설 두 달 만에 500만 명 이상의 블로거를 열광시키고 있다. 바야흐로 지금의 시대는 인터넷 개인 사용자들이 자발적으로 올리는 글과 그림과 영상들이 글로벌 시대의 주인공임을 일본에서 온 고마츠 사야까와 그의 블로그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때문에 그의 블로그를 방문하는 수많은 독자들은 한일 간의 문화 체험을 통해 솔직하고 진지한 모습으로 한일간의 가교역할을 하는 사야까에게 민간외교관 역할을 톡톡히 한다는 칭찬들을 하고 있다.

▲한국인의 속살(‘문화적인 얼굴’)을 낱낱이 파헤치고 생생하게 그려낸 블로그 에세이!
최근 ‘미녀들의 수다’라는 TV 프로그램을 통해 외국인들의 한국 문화 적응이 화두로 되고 있다. 그만큼 이제 한국은 단일민족 국가가 아니라 다민족이 모여 사는 21세기적 국가로서의 모습을 띄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녀들의 수다’에 나오는, 외국에서 온 미녀들의 시선 속에 비춰지는 한국의 모습은 현상적이고 표피적인 면이 많이 존재한다.

그에 비해 ‘사야까의 한국 고고씽’의 저자 고마츠 사야까가 보여주는 한국 이야기에는 오히려 한국인들도 모르는 한국이 담겨 있다. 저자는 무엇보다 한국인만이 지닌 독특한 정서에 깊이 공감하고 그것에 큰 매력을 느껴 한국으로 온 외국인이다. 그래서 저자가 겪게 되는 황당하고 엽기적인 사건들도 비록 시선은 외국인의 시선이지만 정서는 한국의 정서에 깊이 닿아 있어 많은 한국인으로부터 공감과 감동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식당에 가면 밑반찬을 한정 없이 주는 푸짐한 음식문화에서부터, 초대받은 한국 가정에서의 더할 나위 없는 융숭한 대접과 온가족의 환대문화, 지하철에서 노약자석은 자리가 비어 있어도 앉지 않고 혹여 자리가 없는데 노약자가 타면 순식간에 자리를 양보하는 문화, 남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여기고 도와주는 한국 사람들의 모습이나 나아가 일본 지하철에서 자신의 목숨을 던져가면서까지 남을 구하는 한국인의 희생적인 정신, 또는 비디오가게의 주인아줌마나 목욕탕 아줌마 할 것 없이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정도까지 질문을 해대는 한국인의 이웃사촌문화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한국인의 일상 속에 드러난 한국인의 ‘인간적 기질’과 ‘정의 문화’를 속살 그대로, 날 것의 모습으로 드러낸다.

또한 이러한 문화적 속살에 대한 탐구와 해부는 긍정적인 모습에만 해당되지 않고, 부정적인 모습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한국인의 빨리빨리 문화, 한국인들의 여성무시문화, 일요일에 느닷없이 문을 두드리며 방문하는 기독교의 과잉된 종교적 열정, 보신탕 집에서 나비탕으로 쓰려던 고양이를 파는 모습 등 한국인들의 먹고 마시고 노는 문화는 그녀의 순진하지만 예리하기 이를 데 없는 시선 속에서 발가벗겨진다.

▲한국과 일본, 한국인과 일본인에 대한 적나라한 문화적 비교 체험!
때문에 저자 특유의 재치 있고 예리한 시선으로 풀어낸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과 만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일상에 속하는 숱한 일들이 외국인인 그녀에겐 하나의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인들이 일상적으로 겪고 살아가는 모습이 그녀에겐 문화적 충격으로 느껴지면서 그 충격에 대해 솔직하고 투명한 시선으로 접근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본질적인 접근까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그녀의 글을 통해 우리의 속모습을 자연스럽게 돌아보고 성찰할 수도 있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녀의 글에는 한국을 대하는 기본적인 ‘반성’의 자세가 담겨 있다. 때문에 한국인들이 일본이나 일본인들에 대해 감정적으로 흥분해도 그것의 역사적 연원을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 자신이 한국인들에게 흠뻑 빠져 있기 때문이다. 요즘도 그녀의 블로그에는 10년 전쯤 친한파였다가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한국을 비판하는 미즈노에 대한 부정적인 글이 실리지만 그녀는 언제나 정직하게 순수하게 한국을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또한 그것은 역사에 대한 이해와 함께 오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한국과 한국인, 한국의 문화에 관한 공부를 더 하려고 한다.

아울러 각 챕터마다 조금씩 실려 있는 블로거와 저자 사이에 오간 생생한 댓글들은 그야말로 촌철살인의 짧은 대화 속에 한국과 일본의 정서적 차이, 한국인과 한국인 간의 정서적 감응 차이 등이 담겨 있어 보는 재미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각 파트 뒤에는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 자라난 평범하면서도 전형적인 일본 가정과 사회의 모습을 짧게나마 소개하고 있다. 정년퇴직을 한 뒤에 한국문화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는 부모님과 위로 두 명의 언니가 있는 중산층의 평범한 가정에서 막내로 살아가다 한국에 빠져 한국으로 건너온 사야까. 그리고 앞으로도 여건만 된다면 한국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면서 오래도록 살아가고 싶어 하는 사야까의 일본에서의 일상이 짧게나마 담겨 있다. 그리고 책 맨 뒤에는 사야까의 어린 시절 사진과 한국에서 찍은 최근의 사진, 그리고 친필로 쓴 에필로그가 있어서 한 일본 여성의 내면 형성에 대한 궁금증도 풀어주고 있다.

고마츠 사야까=1980년 동경에서 세 딸 가운데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깨끗한 향기를 풍기는 여성이 되라’는 뜻으로 ‘사야까(?香)’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고, 전형적인 일본 가정에서 명랑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미국에서 한 달 동안 홈스테이를 하면서 이국 문화를 접했고, 그때부터 ‘외국에서 일본어 교사가 되고 싶다’라는 꿈을 갖게 되었다.

세이토쿠 대학 일문과에 다니다 뉴질랜드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그곳에서 한국 유학생들을 만나면서 한국과 한국인들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게 되었다. 그 뒤 바로 한국으로 무작정 건너와 열심히 어학당을 다녔다. 결국 세이토쿠 대학을 중퇴하고 부산 대학교 일문과에 입학해 2007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5년 넘는 시간 동안 부산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부산 아지매들’에 버금가는 사투리를 구사한다. 축구는 보는 것도 좋아하지만 하는 건 더 좋아한다. 박지성이 나오는 경기를 보느라 새벽까지 잠을 못 자 다음 날 수면부족에 허덕이기도 한다. 한국에서 가장 불편한 건 바로 신호등의 길이. 다리가 짧은 사야까에게 안 좋다. 그리고 한국 군인의 종이가방 속에는 뭐가 들어 있는지가 늘 궁금하다.

한국의 음식에도 빠져서 주 5일 동안 스트레이트로 삼겹살 먹는 걸 좋아하고, 청국장에 마요네즈를 발라서 먹는 걸 좋아하며, 김치를 너무 좋아해 이제는 케이크와 같이 먹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게다가 얼마 전부터는 드디어 생마늘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현재 ‘내 눈으로 본 한국, 한국인’이라는 블로그(http://sayaka.tistory.com/)를 통해 한국과 일본의 정겨운 다리 역할을 했으면 하는 꿈을 꾸며, 온라인 일본어 교육 사이트에서 교재를 개발하는 일을 하면서 어렸을 때의 꿈인 외국에서 일본 문화와 일본어를 가르치는 일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다.(조정진기자)

■책 속에서
▲‘내 이름은 사회학과’ 중에서
10 시간 후 아직 머리가 빙 돌고 있는데 어떻게든 사진관까지 갔다. 내가 “사진 찾으러 왔는데요”라고 말하자 친절해 보이는 아저씨가 “학생 이름은 뭐예요?” 라고 물어봤다. “사야까입니다”라고 말하자, 아저씨는 “아, 사야까군요!” 하면서 사진 봉투를 건네주었다. 나는 빨리 그 사진을 보고 싶었지만 속이 안 좋아서 사진관 근처에 있는 돼지국밥집으로 달려갔다. 거기서 수육백반을 시켜 해장했다.

집에 도착해서 사진을 꺼내 보니 분명히 혼자서 찍었는데 거기에는 학생들이 농활하고 있는 사진이 들어 있었다!!!! 뭐야 이거~~!!!! 내 사진이 아니다~~~!!! “아저씨 잘못 줬네…”라고 하면서 봉투 이름을 보니까 거기에는 확실히 ‘사회학과’라고 적혀 있었다.
‘사야까’=‘사회학과’

사진관 아저씨는 잘못한 게 없어요. 내가 들어도 헷갈리니까…
창피했지만 사진을 바꾸러 갔고 이 일로 한동안 친구들한테 놀림을 받아야했다…ㅠㅠ
내가 만약 사회학과에 입학했다면 난 어떻게 되었을까??????

▲‘야스쿠니 신사 참배 때마다 생기는 일’ 중에서
‘혹시 한눈에 내가 일본인이라는 걸 안 걸까?’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저씨는 일본 정부와 K 전 총리에 대해서 엄청나게 흥분하고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라디오에서도 K 전 총리의 이야기가 나와 아저씨는 더 열 받으면서 나한테 말했다. “아가씨! 일본놈들 진짜 나쁘지 않아요?” “이 일을 어떻게 하나?” 등등…
나는 본능적으로 지금 내가 일본인이라는 걸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아저씨 이야기에 오직 “예”라고만 말했다.

게다가 탄 지 한 5분 정도 지났는데도 아직 행선지조차 말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때 마침 아저씨는 “아! 죄송해요 어디까지 가세요?”라고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말했다. ‘양정역까지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양정역’이라고 절대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양정역까지요’에는 받침이 세 개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제일 어려워했던 ‘ㅇ’, ‘ㅇ’의 연속 받침 단어이다.

만약에 ‘양정역까지요’라고 말하면 분명히 발음이 이상해져서 ‘얀전여그까지요’라고 말해서 아저씨한테 들키고 만다. 나는 일부러 작은 목소리로 “얀전여그까지요”라고 말해 보았다. 아저씨는 아니나 다를까 “예?”라고 했다. 못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나는 순간 고민했다. 양정과 가까운 서면은 ‘소묜’, 냉정역은 ‘낸전여그’, 동래역는 ‘돈네여그’, 범내골역은 ‘보무내고를여그’, 부전역은 ‘부존여그’ 온통 받침 있는 역들뿐이었다.ㅠ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번엔 큰소리로 자신 있게 말했다.
“아저씨! 부대까지요.(-_-)”

▲‘선생님 거시기에는 문제가 있어요’ 중에서
시트콤 장면…
서민정이 병원 진료실에 누워 의사 선생님한테 진찰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서민정이 의사 선생님을 보면서 진지하게 물었다.
“선생님 거시기에는 문제가 있어요??”
“앗!! 저런!!!!”
나는 소리를 지르면서 덮고 있던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근데 옆에 누워 있던 친구들은 화난 목소리로 대꾸할 뿐이었다.
“뭐야! 안 들리잖아~”
“지,,,지,,지금 이상한 말했다 아이~~가.”
“뭔데?”
둘 다 못 들었던 것인지, 아니면 좀 안 보는 사이에 한국 방송이 이렇게 야하게 바뀌었나 싶어서 나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하고 혼자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 혼자만의 고민…

분명히 서울말이니까 전라도 사투리의 뉘앙스는 아닐 것이고 사투리의 뉘앙스라면 말이 자연스럽지 않았다. 그럼 분명… 으으(-_-) 그런데 왜 친구들은 가만히 있지?
내가 잘못 들었나? 아니야 난 확실히 들었어. 서민정 그렇게 안 봤는데 의외로 변태네. 아니야 한국방송이 그렇게 변할 리가 없지… 아니지 그럼 내가 들은 건 뭐야?
그래도 여긴 한국인데… 아니지 케이블 TV에도 야한 게 꽤 나오니 이제 많이 바뀐 거야… 모야… 으으으… 도저히 모르겠다.

심각한 고민 끝에 과감히 친구들한테 작은 목소리로 “지금 서민정이 ‘거시기’라고 말했지?”라고 물어보자 친구 둘은 왕 썩소(-_^)를 나에게 날렸다.
둘은 몇 분간 말을 잇지 못했고 어이가 없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지금 서민정은 ‘선생님 보시기에는 문제가 있어요?’라고 말한 거야~! 무슨 생각을 한 거야!!!!!! 꺄~ 사야까 저질~~”

▲‘남의 일을 내 일처럼 도와주는 정신’ 중에서
나도 일본에서 대학을 다닐 때 인생에서 딱 한 번 치한을 당한 적이 있다. 그때 일본 사람들은 다 다른 쪽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소리칠 용기도 없었고 소리쳐 봤자 도와줄 사람도 없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억울해 할 수밖에 없었다.(-_-)
일본 만원 지하철에서 남자들은 치한으로 의심을 받지 않도록 양손을 만세 하는 것처럼 위로 올려 신문이나 잡지를 읽고 있다.

남자들은 자기 방어에만 필사적이라서 주위로는 눈을 돌리지 않는 것 같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뉴스에서도 자주 나오는 것을 보면 이런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아 난 이런 게 대빵~ 부럽게 느껴진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 사는 한국 여자들은 정말 행복하겠다.(^.^)
일본인들은 남에게 절대 폐를 끼치지 않는다. 하지만 남을 도와주는 경우도 거의 없다.
이제까지 내가 본 한국인들은 위기 속에서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인 사람이 많았다.
어떨 때는 남에게 폐를 끼치기도 하지만 위기에 처한 사람을 보면 목숨을 걸고라도 도와준다.
그 대상이 일본인일지라도...........

http://home.nownuri.net/~gibson71/
한국어를 배운 뒤 가끔 가는 故 이수현 씨의 홈페이지입니다. 우리 일본인들은 이수현 씨의 그 정신을 절대 잊지 않을 거예요! (ㅠㅠ) 갑자기 안구에 습기가…
요즘 방문도 별로 없고 하늘에서 쓸쓸하겠어요.
여러분들도 가끔 방문하셔서 그분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___^)

07.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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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10-15 23:19   좋아요 0 | URL
"다들 '로쟈'는 몰라도 '사야까'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크크. 이 바닥에서는 아프락사스는 몰라도 이상한게 아니지만 로쟈님을 모르면 이상한거에요. 이거라도 위안 삼으심이.

가봤더니 그 분 블로그 방문자 숫자도 그렇지만 글 하나에 달린 댓글 숫자가 완전 '혜교' 못지 않습니다. 다 읽지도 못할듯.

로쟈 2007-10-15 23:38   좋아요 0 | URL
블로그를 그대로 책으로 옮겨놓은 것에도 공감하기 어렵지만(저는 !나 ? 남발을 혐오하는 편이라)'블로그 시대'가 어떤 건지 보여주는 사례 같습니다. '책'은 좀 다르죠(500만명이 사야까의 책을 사진 않으니까).^^

마늘빵 2007-10-16 00:01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저걸 그대로 책으로 옮기면 문제가 확 달라지죠. 잡지 구석에 실릴 에피소드 같은건데 책으로 묶는건... -_-

릴케 현상 2007-10-16 00:28   좋아요 0 | URL
저도 몇 번 펌질 해 봤던 사람이네요~

로쟈 2007-10-16 08:28   좋아요 0 | URL
알라딘 검색에는 뜨지 않던데요. 다른 블로그에 옮겨놓으신 듯.^^

람혼 2007-10-16 04:51   좋아요 0 | URL
저처럼 웹서핑에 '인색한' 사람도 알고 있는 블로거니, 정말 유명하다고 해야할 듯. 저 역시 '남발'은 혐오하는 편입니다만.^^

로쟈 2007-10-16 08:28   좋아요 0 | URL
제가 포털의 블로그들은 거의 클릭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저야 말로 수전노 수준이네요.^^

자꾸때리다 2007-10-16 16:09   좋아요 0 | URL
저는 로쟈님은 알아도 사야까는 모릅니다. (Mravinsky 에서 바꿨어요)

로쟈 2007-10-16 16:36   좋아요 0 | URL
Grimaud님은 정체를 알 수가 없습니다.^^;

소경 2007-10-18 21:00   좋아요 0 | URL
'한국 군인들의 종이가방에 무엇이 들었는지?.' 요거 보고 숨죽여 웃었습니다. ^^
 

읽어야 하는 책들이 널려 있지만 머리가 무겁다는 핑계로(마음이 무거운지도 모른다) '사는 법'에 대해서나 좀더 배워보도록 한다.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이제이북스, 2007)의 이어 읽기이다(지난번 읽기는 http://blog.aladin.co.kr/mramor/1627022). 실상은 이 책의 헌사와 관련하여 데리다와 크리스 하니에 관한 페이퍼를 지난주에 좀 쓰다가 중단한 적이 있다(<마르크스의 유령들>은 남아공의 공산당원이자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가였던 크리스 하니에게 바쳐진 책이다). 이런 페이퍼로 먹고 살지 않기에 간단히 요약해서 적는다.

 

 

 

 

대학 등에서 강의를 하다 보니 주로 책의 내용을 풀어주는 일을 많이 하게 된다('강사lector'란 '읽는 사람'이자 '읽어주는 사람'이란 뜻이기도 하고).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연구자로서 쓰는 논문과 강사로서 맡게 되는 강의의 수신자(독자)는 각기 다르며 둘 사이에는 아직은 제거될 수 없는 간극이 놓여 있다(즉 '연구'와 '강의' 사이의 먼 거리가 현재 대학 교육의 현실이다). 가령 이 헌사의 첫문단에서 당신은 무엇을 읽는가?

"다른 이름을 위한 한 이름, 전제를 위한 한 부분, 우리는 항상 아파르트헤이트(인종격리 정책)의 역사적 폭력을 하나의 환유로 취급할 수 있을 것이다. 아파르트헤이트의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에서도, 우리는 항상 아파르트헤이트가 지닌 폭력의 독특성을 통해, 현재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폭력들을, 다양한 경로에 따라(응축, 전위, 표현이나 표상) 해독해볼 수 있을 것이다. 부분이자 원인, 결과, 증상, 사례로서 저쪽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곳에서, 항상 이곳에서 - 우리가 어디에 있든, 우리가 어디서 바라보고 있든 - 집에서 좀더 가까운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번역해준다. 무한한 책임, 곧 모든 형태의 떳떳한 양심에 대해 금지된 휴식."

어려운 내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 경험에 의하면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이 문단이 뚯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수년 전 일이지만 신문의 만평을 해석해보라는 시험문제에 40%의 학생들만이 제대로 답안을 써냈다. 영상세대라고 하지만, 시사만화의 '독해'조차도 어려워하는 세대인 것이다!). 인문서의 독자층이 점점 엷어지고 있는 현실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내가 여전히 계몽의 필요성을 지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른 이름을 위한 한 이름'으로서 데리다의 독자가 300이 아닌 3000쯤 되면, 좁게 말해서 우리의 독서문화가 어떻게 달라질지 궁금하다. '로쟈'의 일거리가 떨어질 그런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먼저 첫문장. "다른 이름을 위한 한 이름, 전체를 위한 한 부분, 우리는 항상 아파르트헤이트(인종격리 정책)의 역사적 폭력을 하나의 환유로 취급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다른 이름을 위한 한 이름, 전체를 위한 한 부분'이 '환유(metonymy)'의 정의라는 걸 아는 독자라면 이 페이퍼는 더이상 읽지 않아도 된다. 남아공의 가혹했던 인종격리정책인 '아프르트헤이트'가 '역사적 폭력'인 것은 그것이 이미 종식된 과거의 폭력이기 때문이다.

국내외의 저항과 반발을 가져온 남아공 백인정부의 이 인종차별정책은 흔히 만델라의 정치적 역정과 병치되는데, 사전적 설명에 따르면 "1993년의 신헌법으로 흑인과 기타 인종집단에 참정권이 부여되고 1994년 다인종총선거에서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의장인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됨에 따라 남아프리카에서는 최초의 흑인정권이 탄생했으며 이로써 적어도 법률상으로는 아파르트헤이트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래서 '역사적 폭력'이다.

데리다는 이것이 '다른 이름을 위한 한 이름', 곧 '다른 폭력을 지칭하기 위한 폭력', '전체를 위한 한 부분', 곧 '폭력 전체를 지칭하기 위한 한 폭력'으로, 다시 말해서 다른 폭력과 폭력 일반에 대한 환유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제안한다. 그럼으로써 고유명사로서의 '아파르트헤이트'는 모든 차별적인 폭력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된다. 두번째 문장이 뜻하는 바가 그것이다. "아파르트헤이트의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에서도, 우리는 항상 아파르트헤이트가 지닌 폭력의 독특성을 통해, 현재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폭력들을, 다양한 경로에 따라(응축, 전위, 표현이나 표상) 해독해볼 수 있을 것이다."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폭력들"은 아파르트헤이트의 응축으로서, 전위로서, 표현이나 표상으로서 해독될 수 있다는 것. "아파르트헤이트가 지닌 폭력의 독특성"에서 '독특성'은 'singularity'의 번역이다. 들뢰즈 번역서들에서 '특이성'이라고 옮겨지고, 가라타니 고진은 '단독성'이라고 옮기는(애용하는!) 개념이다. 여기서는 아파르트헤이트가 '소수 백인과 다수 유색인종의 관계를 지배했던 남아공의 특정한 정책'을 가리키기에 독특하다고 표현한 것이다. 즉 아파르트헤이트의 폭력은 딴데는 없고 남아공에만 있었다는 점에서 유일하지만 유사한 사례들을 대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편적이다(차별과 폭력은 세상 어디에나).

세번째 문장 "부분이자 원인, 결과, 증상, 사례로서 저쪽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곳에서, 항상 이곳에서 - 우리가 어디에 있든, 우리가 어디서 바라보고 있든 - 집에서 좀더 가까운 아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번역해준다."는 두번째 문장을 한번 더 풀어준 것이다('번역해준다'는 '해독해준다'란 뜻으로 읽어도 된다). 요점은 "저쪽에서 일어나는 일은 곧 이곳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 곧 아파르트헤이트는 남아공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우리 주변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란 얘기다. "남 얘기가 아니"라는 것(예컨대, 장애인과 이주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차별, 외모와 학력에 대한 우리 가까이의 차별들).

이러한 인식의 자연스런 귀결이 마지막 문장이다. "무한한 책임, 곧 모든 형태의 떳떳한 양심에 대해 금지된 휴식." 조금 풀어서 말하면 "우리는 무한책임의 주체이며, 떳떳한 양심을 갖고 있다면 우리에게 휴식은 없다."("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가 아니라 "열심히 일한 당신, 더 열심히 일하라!"인 것.) 레비나스식으로 말하면 이 윤리적 주체는 '그까이꺼 대충'의 주체가 아니라 '불면의 주체'이다(누가 자빠져 자는가?). 잠들 수 없는 나날들...

이러한 도입부에 이어지는 건 이 헌사가 씌어지기 바로 며칠 전, 곧 1993년 4월 10일 "한 명의 폴란드 이민자와 공범들"에 의해 암살된 크리스 하니에 대한 추모이다. 데리다는 그를 '공산주의자 그 자체', '공산주의자로서의 공산주의자'라고 부른다. '탁월한 공산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 중의 공산주의자'라는 뜻이다(역자가 요즘 유행하는 '코뮤니스트'란 번역어로 비껴가지 않은 것은 다행스럽다). 따라서 그의 죽음은 단지 '한 남자'의 죽음이 아니다. 그렇다고 상징도 아니다. 그의 삶도 마찬가지며, 그것은 "하나의 고유명사가 언제나 명명하는 바"의 어떤 것이다(<마르크스의 유령들>은 이 명령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아파르트헤이트 반대투쟁의 대중적인 영웅이었던 이 사람은, 모순에 빠져 있던(*내분에 빠진) 소수파 공산당에 다시 한번 헌신하기로 결정한 뒤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고위직 자리를 그만두었다. 아파르트헤이트에서 자유롭게 된 나라에서 아마도 앞으로 그가 맡게 될 공식적인 정치적 역할, 심지어 정부 관료 역할 역시 포기한 바로 그 순간에 갑자기, 위험스러운, 참을 수 없는 인물이 되어 버린 것 같다. 크리스 하니를 추모하고 이 강연을 그에게 바칠 수 있게 허락해 주기 바란다."

역시나 '사는 법'을 배울 시간은 부족하다(어서 다른 일들을 해야 한다). 한 문단만 인용하겠다: "산다는 것은, 말뜻만으로 볼 때 배우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배우는 것도 아니며, 삶으로부터 배우는 것도, 삶이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다. 오직 타자로부터, 죽음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어떤 경우든 타자로부터 삶의 가장자리에서, 내적인 가장자리 또는 외적인 가장자리에서, 그것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타자에 의한 교육인 것이다."(10쪽) 데리다가 크리스 하니에게서 배우고 우리가 데리다에게서 배우는...

07.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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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15 14: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0-15 14:26   좋아요 0 | URL
수정했습니다. 이런 거 눈에 잘 안 띄죠.^^;

2007-10-15 2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0-15 21:15   좋아요 0 | URL
꼼꼼하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타가 생각보다는 많지 않네요.^^

marr 2007-10-16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일 데리다의 말처럼 모든 폭력이, 폭력 일반이 차이에 근거하여 발생하는 것이라면 폭력의 근원이 권력의 문제라는 점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차이"라는 개념에 주목하는 현대 프랑스 철학이 아주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0%부족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로쟈님이 지적하고 있는 폭력의 문제를 "차이"에 근거하여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사회에서, 서로 적대적인 계급으로 대립하고 있는 사회에서 폭력은 권력의 문제일 수밖에 없는 거죠. 권력은 "차이"에 근거해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에서, 사적 소유에서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오래된 영화이긴 하지만, 베리 레빈슨이 감독한 "폭로"에서 마이클 더글라스는 자신의 옛 연인이자 회사의 상관인 데미 무어에게 성희롱을 당합니다. 뭐 거의 성폭력 수준이죠.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게, 폭력의 문제에 대해서 (성)폭력이 단순한 차이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해도 될까요? 마이클 더글라스의 변호를 맡은 여성 변호사의 한마디. "성폭력은 힘(power)의 과시다." 문제는 폭력이, 어떤 형태이건, 사회적 모순의 논리적 결과라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차이”의 문제가 지엽적이라거나 덜 중요하다는 건 아닙니다. 폭력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문제니까요.
아, 그러고 보니 갑자기 이 글이 떠오르는군요. 맑스가 “철학의 빈곤”에서 프루동을 비판하기 위해 인용하는 글입니다.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은 최초의 근본개념을 명확히 해명하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통치수단들이 연원하는 원천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사물을 그 근저에까지 파고들어갈 때, 우리는 모든 통치형태, 모든 사회적, 정치적 불공정은 현재의 지배적인 사회체제에서, 즉 현재 존재하고 있는 바의 소유제도에서 연원함을, 따라서 우리가 단 일격에 우리 시대의 불공정과 빈곤을 종말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사회의 현재 상태를 뿌리 째 전복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
이제까지 사람들은 현재 존재하고 있는 상태와 같이 자연에 반하는 상태를, 그것들의 불평등의 원인은 그대로 존속하도록 내버려 두고도 현존하고 있는 불평등을 파괴할 수 있다는 헛된 희망에 매달려왔다. 그러나 우리는 곧 통치란 결코 원인이 아니며 오히려 작용임을, 창조자가 아니라 피조물임을 보게 될 것이다. 즉, 한마디로말해 그것은 소유의 불평등의 산물이며, 또 이 소유의 불평등은 현존의 사회제도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이글의 저자인 Bray는 맑스의 언급에 따르면 오웬의 추종자이자 ‘노동화폐’이론을 발전시켰다고 합니다. 사족이지만, 물론 Bray는 올바른 전제에서 출발하지만, 공상적인 방안으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하, 이거도 사족인데, 맑스는 누굴 칭찬하기 위해 그 사람의 글을 인용하는 데는 상당히 인색한 것 같습니다. 인용한 Bray의 글도 그가 양심을 가진 우직(愚直)한 사람이지만 그의 글은 부르주아의 환상이라고 비판합니다.

로쟈 2007-10-16 00:30   좋아요 0 | URL
"만일 데리다의 말처럼 모든 폭력이, 폭력 일반이 차이에 근거하여 발생하는 것이라면 폭력의 근원이 권력의 문제라는 점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에서 '데리다의 말'은 무엇을 가리키는 건지요? '차이'라는 말은 데리다도 그렇고, 저도 본문에서 쓴 적이 없는 듯한데요. 아파르트헤이트의 '폭력'은 공권력에 의한 폭력('법'에 의한 폭력)이었는데, '권력의 문제'를 놓치고 있다는 지적은 이해되지 않습니다...

marr 2007-10-16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제가 좀 일반화시킨 면이 있군요. 데리다의 "차이"개념을 로쟈님께서 쓰신 "고유명사로서의 '아파르트헤이트'는 모든 차별적인 폭력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된다."는 문장에 슬쩍 대입시켜봤습니다. 하지만, 데리다와 들뢰즈, 좀 더 나아가서 레비나스의 '차이'나 '타자'에 대한 관점이 체제의 근본적인 문제를 의도적이든 아니든 비켜가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한 번 제기해봤습니다.

로쟈 2007-10-16 08:27   좋아요 0 | URL
'차이의 정치학'에 대한 비판은 데리다보다 들뢰즈를 타겟으로 하는 게 더 적합해보입니다(지젝의 비판이 있기도 하고).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비판을 기대하겠습니다...

람혼 2007-10-16 0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는 법을 배우기'의 한 방향은, 아마도 '읽는 법을 배우기' 혹은 '번역하는 법을 배우기'로부터 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항상 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학생들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 문제는 미국의 학생들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게 해당될 것으로 보입니다만, 예를 들어 저는 최근에 <이론 이후 삶>을 읽다가 실소와 동시에 분노까지 자아내게 만든 부분을 발견하였는데, 청중과의 일문일답 부분이 바로 그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레비나스의 수혜를 받은] 데리다의 개념 "무한 책임"을 제대로 '독해/이해'하지 못하는 실로 '바보 같은' 질문들이라는 인상을 받은 것이죠(뭐 그래서 또 '질문'이라는 것을 하고 '답변'이라는 것을 하는 것이겠지만). 미국의 예를 들자면, 일반적으로 볼 때,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 태어나 거의 모든 저명한 책들이 영어로 번역되는 상황에서 그들의 '언어'에 대한 이해의 한계가 그대로 '사상'에 대한 이해의 한계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가 몹시 염려될 때가 있습니다. 문득 예전에 만났던 한 아랍인 청년이 제게 스치듯 던졌던 한 마디가 생각납니다. 저의 질문: "너는 참 영어를 잘 하는구나. 왜 영어를 배우니?" 그의 대답: "소통하고 싶어서." 실로 '우문현답'이라는 사자성어에 값하는 대화가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제게 사는 법을 배우기란 곧 읽는 법을 배우기, 번역하는 법을 배우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외국어들에 대한 저의 많은 공부 욕심도 그러한 '증상'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부끄럽게도 아직 러시아어는 모릅니다만).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읽게 되는 페이퍼, 감사드립니다.
덧붙여, 다섯 번째 문단에서 오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다른 이름을 위한 한 이름, 전제를 위한 한 부분'이 '환유(metonymy)'의 정의라는 걸 아는 독자라면 이 페이퍼는 더이상 읽지 않아도 된다"에서 '전체(le tout)'가 '전제(présupposition)'로 오식된 경우입니다.

로쟈 2007-10-16 08:25   좋아요 0 | URL
가슴으로 읽게 되는 댓글입니다.^^ 러시아어까지 아신다면 거의 에코 수준이 되는 거 아닌가요?! 마지막에 지적하신 오타는 윗줄의 같은 오타를 고치면서 깜빡 했네요.^^;

딸기 2007-10-16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석을 못하는 대학생들이 문제가 아니라...
저정도면 한글 모르는 사람 or 번역기가 쓴 것으로 읽히는데요, 제 눈에는 ^^;;

로쟈 2007-10-16 17:15   좋아요 0 | URL
이론서들을 직역해놓으면 대개 상형문자화되는 경향이 있기는 합니다.^^;
 

한국 현대시 100년을 맞아 '10대 시인'을 선정했다고 한다(선정과정은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710/h2007101420053984290.htm 참조). 그 리스트를 보니 선자들이 고심했다고는 하나 별로 '이변'이라 할 만한 것은 없어 보인다. 이미 교과서에 다들 수록돼 있는 시인들이고 그들의 시이기 때문에(윤동주의 <서시> 대신에 <또다른 고향>이 대표시로 선정된 것 정도가 일반 독자들의 취향과 차이나는 것이겠다. 물론 서정주의 경우에도 <동천>보다 더 친숙한 건 <국화 옆에서>일 테고). 자료삼아 기사를 옮겨놓으면서 드는 생각은 차라리 11-20위까지의 시인들 명단이 궁금하다는 것. 생존 시인들까지도 포함해서. 오히려 그게 '진짜' 리스트가 아닐까란 생각마저 든다.   

한국일보(07. 10. 15) 한국 현대시 10대시인 뽑았다

1908년 최남선의 신시(新詩)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기점으로 올해 100년을 맞은 한국 현대시사(詩史)의 대표 시인 10명은 누구일까. 한국시인협회(회장 오세영ㆍ이하 시협)가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는 국문과 교수 10명에게 작고 시인을 대상으로 10대 시인 및 대표작 선정을 의뢰한 결과 김소월 <진달래꽃>, 한용운 <님의 침묵>, 서정주 <동천>, 정지용 <유리창>,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김수영 <풀>, 김춘수 <꽃을 위한 서시>, 이상 <오감도>, 윤동주 <또다른 고향>, 박목월 <나그네>가 뽑혔다.

선정 작업은 평론가들이 각자 한국 현대시사에서 가장 의미있는 성과를 남겼다고 생각하는 작고 시인 10명과 시인별 대표작을 추천하고, 이들 후보군에서 추천을 많이 받은 순서대로 10대 시인 및 대표작을 정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문화 외적인 요소가 개입할 소지를 최소화하기 위해 생존 작가는 논의 대상에서 제외했다.

선정 위원엔 최동호(고려대), 이숭원(서울여대), 정과리(연세대), 이광호(서울예대), 유성호(교원대), 오형엽(수원대), 방민호(서울대), 문혜원(아주대), 홍용희(경희사이버대), 이재복(한양대) 교수가 참여했다. 오세영 시협 회장은 "오늘날 시대정신이 선호하는 시인들이 누군지 알아보고, 아울러 시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환기시키고자 했다"며 선정 취지를 밝혔다.

10대 시인의 대표시는 11월24일 서울 국립극장에서 열릴 예정인 시예술 행사 '시인만세'에서 시 낭송, 음악, 무용 등 다채로운 방식으로 공연된다. 기획 및 총연출은 연극인 이윤택씨가 맡는다. 시협 창립 50주년 및 '시의 날' 제정 20주년 기념을 겸한 이번 행사는 한국일보, 시협, JEI재능교육이 공동 주최한다.(이훈성기자)

한국일보(07. 10. 15) [한국 현대사 10대 시인] <1>김소월

오늘부터 주 5회(월~금)씩 2주에 걸쳐 한국 현대시 100년을 빛낸 10대 시인의 대표시를 소개합니다. 선정에 참여한 문학평론가 10명이 해설을 맡았습니다. 시 전문은 해당 시인의 정본(正本) 혹은 그에 준하는 작품집에 수록된 내용을 따르고 그 출처를 밝힙니다. <편집자 주>

진달래꽃
- 김소월 -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히 보내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출처 : 권영빈 엮음, <김소월시전집>, 문학사상사, 2007 (*출처의 편자는 '권영빈'이 아니라 '권영민'이다.)

△1902년 평북 구성 출생. 본명 정식(廷湜) △1915년 오산학교 입학. 이곳에서 시 스승인 김억(金億)을 만남 △배재고보 졸업, 도쿄상대 중퇴 △1920년 <창조>에 ‘낭인의 봄’ 등 발표하며 데뷔 △1922년 <학생계>에 ‘진달래꽃’ 발표 △1924년 <영대>에 ‘산유화’ 발표 △1925년 유일한 시집 <진달래꽃> 발간 △1934년 12월 음독 자살할 때까지 154편의 시를 남김

◆'진달래 꽃' 작품해설
1922년 <개벽>에 발표된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남녀 간의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을 노래한 낡은 시가 아니다. 이 시는 1920년대라는 시대적 단위를 넘어서서 사랑의 보편성을 노래한 20세기 한국의 명시라 평가해도 무리가 아니다.

이 시에서 주목되는 것은 우선 형식과 언어이다. 알려진 것처럼 7ㆍ5조 또는 3ㆍ4ㆍ·5음절의 3음보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이 시는 매연 3행 모두 12연의 기ㆍ승ㆍ전ㆍ결의 구조적 완결성을 지니고 있다. 미적 형식으로서 견고한 완결성이 이 시에 풍요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일상적 어휘들 또한 시적인 완결성을 위해 긴밀하게 변주되어 하나의 명편이 탄생된 것이다.

다음으로 논할 수 있는 것은 여성적인 화자의 목소리가 전해 주는 절절한 호소력이다. 여성적인 화자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고 해서 이 시의 화자가 여성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매 연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곡진한 종결 어미들은 모두 이별의 정서를 절실하게 전하는데 있어서 유감이 없다. 남성도 사랑하던 사람과 이별하는 순간에는 이처럼 여성적인 어조로 말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의 화자는 지금 이 순간의 이별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일단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가실 때’라고 분명히 화자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가 역겨워서 ‘가실 때’는 님이 가시는 미래의 그 어느 때이다. 언젠가 닥쳐올지 모를 이별의 슬픔을 예견하면서 사랑의 기쁨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 이 시의 묘미이다. 사랑의 기쁨을 직접적인 언사로 말하지 않는 것이 한국인들이 우회적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방식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시의 화자가 이별의 그 순간 눈물을 흘리느냐 흘리지 않느냐의 문제이다. 이 시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로 끝나고 있다. 이별을 부정하는 ‘아니 눈물’을 흘린다고 했으니 그것은 이별의 눈물은 흘리지 않겠다고 말한 것으로 해석된다. 부정의 눈물이 통곡의 눈물보다 더 깊은 호소력을 갖는다는 것을 김소월은 깨달았던 것이다. 김소월을 한국의 대표적인 서정 시인으로 만든 작시법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최동호 문학평론가ㆍ고려대 교수)

07.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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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10-16 0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투표 분위기일까요? ^^; 저는 제 성향(?)상 이상, 김수영, 김춘수에 한 표씩을 '행사'하고 싶습니다.^^

로쟈 2007-10-16 08:30   좋아요 0 | URL
분위기까지야... 10위까지의 랭킹은 다들 비슷할 거 같고, 각자의 취향이 드러나는 건 11-20위권에서가 아닐까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20명 정도 꼽으려면 한국시의 애독자이기도 해야겠고...

릴케 현상 2007-10-16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대시인 선정과정에서 이렇게 나왔군요^^ --->김종삼은 말할 것도 없고, 이상화 김영랑 이육사 김현승 이용악 조지훈 신동엽 박재삼 기형도 등 이날 입에 오르내린 시인들은 이 중 누구를 최종 명단에 올리더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시적 성취를 보여줬다는 평이다.

로쟈 2007-10-16 16:51   좋아요 0 | URL
새로운 이름들이 아니어서 좀 식상합니다.^^;

기인 2007-10-16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등단연도는 아닌 것 같고, 1위부터 10위 순위인가 보죠? 헐;; 투표라.. 어렵네요;; 1위를 뽑는 것은 어렵고 20명 꼽는 것이 더 쉬울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아마; 백석? ^^;

로쟈 2007-10-16 16:52   좋아요 0 | URL
사실 1-7명까지는 쉽게 견적이 나오는데, 그 이후 20위까지가 유동적인 듯하고 그래서 각자의 취행을 더 잘 반영해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알다시피 지난주에 발표된 올 노벨문학상은 영국의 여성작가 도리스 레싱에게 돌아갔다. 이미 10년쯤 전에 수상했더라도 아무도 놀라지 않았을 단골 후보였는데(미국 작가 필립 로스나 조이스 캐롤 오츠도 그런 식이다. 다들 오래 살아야겠다), 좀 미뤄진 탓에 올해 88세가 되는 최고령 수상작가가 됐다(2004년 옐리네크의 수상이 얼마나 파격적이었던가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러시아 작가로는 지난 1987년, 그러니까 딱 20년 전에 망명시인 이오시프 브로드스키가 수상한 이래로 수상작가가 없어서 은근히 거명되기를 기대했지만 '이변'은 없었다. 레싱의 수상소감대로 "그들은 '언젠가 그 여자에게 상을 줘야 할텐데'라며 걱정했을" 테고, 이번에 그 걱정을 덜었을 뿐이다.    

개인적으로 레싱의 작품을 읽은 바 없다. <풀잎은 노래한다>(지학사, 1986) 등이 서점에 꽂혀 있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한번도 손길이 간 적은 없다. 이유는 이 작가가 무얼 쓰는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흔한 말로 주파수를 맞출 수 없었던 것. 수상직후 작품세계를 소개하는 기사들을 몇 개 읽어보아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아예 저렴한 소설 두 권을 주문했다(<황금 노트북>은 이달중에 다시 나온다고 한다). 내달에나 읽어볼 계획으로(노작가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책은 모레나 받을 것 같고 미리 소개기사나 모아놓는다.

한겨레(07. 10. 13) 페미니즘 문학 선구자…사회성 짙은 소설 즐겨

다음주면 만으로 88살이 되는 도리스 레싱은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중 최고령자에 해당한다. 1950년 장편 <풀잎은 노래한다>를 발표하면서 시작된 그의 문학 경력은 어느새 반세기를 훌쩍 넘어섰지만, 그는 최근까지도 신작을 발표하는 등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1919년 지금의 이란에서 태어난 뒤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성장한 레싱은 열네 살 이후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고 이후 다양한 사회 경험을 하면서 독학으로 문학을 공부했다. 두 번 이혼한 뒤 1949년 영국으로 건너간 그는 지금 런던 교외 햄스테드에서 살고 있다.

백인 농부의 아내와 흑인 하인 사이의 관계를 통해 인종 간 갈등을 비판한 <풀잎은 노래한다>에서 보듯 초기의 레싱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백인들의 아프리카 식민 통치와 흑인에 대한 억압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때문에 그는 1956년부터 남아공 입국이 거부되었다가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 정책이 무너지고 흑인 정부가 들어선 1995년에야 입국이 허용되었다. 또한 그는 1952년에 영국 공산당에 입당했다가 1956년 헝가리 봉기를 계기로 탈당한 바 있는데, 이 무렵 그의 소설들은 진한 사회주의적 경향과 강렬한 반핵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러나 레싱 문학의 트레이드마크는 역시 페미니즘이라 할 수 있다. 스웨덴 한림원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황금 노트북>(1962)이 “초창기 페미니즘 운동의 선구적 업적이며 남녀 관계에 관한 20세기적 관점에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책에 속한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정작 레싱은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규정하는 데에 부정적이다. 페미니즘이 “지나치게 이념적이고 남녀 관계를 과도하게 단순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해명이다. <황금 노트북>은 자서전적 (논)픽션과 노트, 수기, 일기 등이 다양하게 오가는가 하면 메타소설적 구성을 짜는 등 현란한 형식 실험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국내에서도 평민사에서 한때 출간되었다가 절판되었으며, 도서출판 ‘뿔’에서 이달 중에 다시 나올 예정이다.

레싱의 숱한 작품 중에서도 한 젊은 여성이 테러 조직에 가담하는 이야기를 다룬 <선량한 테러리스트>(1985)는 테러와 반테러가 격돌하는 21세기 초 지금의 상황에서도 의미 있는 울림을 준다.
레싱은 근년 들어 본격문학에서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 과학소설을 잇따라 발표하면서 문학계의 논쟁을 낳고 있다. 스웨덴 한림원은 <마라와 단>(1999)과 2005년작인 그 속편 등의 과학소설에 대해서도 “인류를 원시적 상태로 되돌려놓을 수 있는 전지구적 재앙의 가능성이 도리스 레싱에게 각별한 의미를 지녔던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최재봉 문학전문기자)

조선일보(07. 10. 13) 리얼리즘에서 SF까지… 펜을 마술봉처럼 휘둘러

노벨 문학상 수상자 도리스 레싱(Doris Lessing·88)은 이란에서 태어나 아프리카에서 자랐다. 대영제국의 몰락을 목도하고 반항적 에너지로 충만한 60년대를 온몸으로 견뎠다. 그녀는 두 번 결혼하고 두 번 이혼했다. 당대의 평론가들이 그녀를 존 오스번·아이리스 머독 같은 또래 작가들과 함께 ‘성난 청년들’(Angry Young Men)이라고 불렀다.

레싱은 1919년 10월 이란 바흐타란에서 은행원 아버지와 간호사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레싱이 여섯 살 때 일확천금을 꿈꾸며 짐바브웨로 이주했지만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14세에 학교를 중퇴한 그녀는 보모·전화교환수·속기사·기자 등을 전전했다. 1949년 레싱은 두번째 결혼에서 낳은 아들을 데리고 런던에 이주했다.

데뷔작 ‘풀잎은 노래한다’(The Grass is Singing·1950)에 이어, 1952년부터 69년까지 ‘마사 퀘스트’라는 여주인공을 등장시킨 ‘폭력의 아이들’(Children of Violence) 연작 다섯 편을 발표해 문명을 얻었다. 특히 연작 마지막 작품인 ‘네 개의 문이 있는 도시’(The Four- Gated City·1969)가 걸작으로 꼽힌다.

60년대에는 여류작가인 주인공 ‘아나 울프’가 인생을 성찰해가는 과정을 담은 소설 ‘황금 노트북’(The Golden Notebook·1962)으로 페미니스트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이 소설은 정교한 구성을 보여준다. 자서전적 논픽션, 신문 기사, 수기, 일기 등 다채로운 형식을 소설에 도입했고, ‘소설 속에서 소설 쓰기’ 기법을 취했다.

1979년부터 84년까지 차례로 발표한 ‘아르고 선의 카노푸스: 기록(Canopus in Argo: Archives)’ 연작에서 레싱은 핵전쟁 이후 인류를 소재 삼아 SF까지 영역을 넓혔다. 80년대 이후에는 사실주의적인 소설로 돌아왔다. 당대의 좌파와 여성 운동가들을 풍자한 소설 ‘좋은 테러리스트’(The Good Terrorist·1985), 자서전 ‘내 살갗 아래서’(Under My Skin· 1994), 대영제국의 마지막 시기를 다룬 소설 ‘가장 달콤한 꿈’(The Sweetest Dream· 2001) 등이 근작이다.

레싱은 1952~56년 영국 공산당원이었고, 열렬한 반핵 운동가였다. 인종주의와 독재를 신랄하게 비판해 90년대까지 남아공·짐바브웨 정부의 ‘입국 금지 대상자’ 명단에 올라 있었다. 격렬한 청춘을 보낸 이 노대가는 그러나 노벨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뒤 독일 DPA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유명해진 다음엔 너무 많이 주목을 받는다”며 “눈길을 받지 못하는 좋은 작가들이 많다”고 겸손해했다. 노벨상에 앞서 레싱은 서머싯 몸상, 메디치상 등을 받았다.(김수혜 기자)

07. 10. 15.

P.S. 당연한 것이긴 하지만 하도 최근(노년)의 사진들만 뜨기에 작가의 젊은 시절 사진들을 좀 찾아봤다(일련의 초상은 http://www.dorislessing.org/portraits.html 참조). 그 중 하나로 1962년 사진이니까 43살 때이다. 오르손에 담배를 꼬나들고 있는 모습이 맘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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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15 0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15 08: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유 2007-10-15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져갑니다.

로쟈 2007-10-15 18:34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오셨네요.^^

필라멘트 2007-10-15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상자 발표된지 몇일 지났는데 관련 포스트가 없길래, 혹시 로쟈님이 내심 기대했던 러시아 작가가 선정안됐다고 서운해서 그냥 패스하셨나 혼자 오해를 했었답니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올려주셨네요.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러시아 작가 수상소식을 접한지도 꽤 오래됐네요. 이제 받을 때도 된 것도 같은데 몇년안에 받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2000년대 들어 영국작가들은 벌써 3명이나 수상했네요.

로쟈 2007-10-15 22:27   좋아요 0 | URL
레싱의 작품을 읽어본 게 없어서 좀 늦어진 것이죠.^^; 탈 만한 작가들이 수상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왠지 아쉬운 것도 사실입니다...
 

책장이 펼쳐진 책들만 열 권이 넘게 책상과 그 주변에 널려 있어서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이다. 그만큼 벌여놓은 일들이 많기 때문이긴 한데, 현실적/물리적으로 다 마무리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어서 마음만 무겁다. 일단 하나라도 처리하고자 무릎에 올려놓은 책이 존 맥킨지의 <오리엔탈리즘: 예술과 역사>(문화디자인, 2006).

책은 작년 가을에 나왔지만 벌써 품절되어서 지난주에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국역본은 '예술과 역사'란 부제를 달고 있지만 역시 지난주에 구한 원서 <오리엔탈리즘>(1995)의 부제는 'History, theory and the arts(역사, 이론, 예술)'. 목차를 보면 부제가 그리 붙은 이유를 단번에 알 수 있다. '오리엔탈리즘 논의'와 '동양, 문화, 제국주의'를 다룬 1, 2장에 이어지는 장들은 각각 미술, 건축, 디자인, 음악, 연극에서의 오리엔탈리즘을 다루고 있다. 아울러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비판도 겸하고 있기에 여러 모로 유익한 책이다.

뒷표지에 실린 그 비판의 요점은 이렇다: "<오리엔탈리즘, 역사와 예술>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두 가지 관점에서 비판을 한다. 하나는, 사이드는 역사의식을 결여하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사이드는 문학만을 다루었기 때문에 서구 예술의 오리엔탈리즘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책의 윤곽을 다룬 서평기사를 미리 읽어두고 몇 가지 코멘트를 적어두기로 한다.     

경향신문(06. 09. 23) '서양’의 잃어버린 이상향 

단숨에 사람의 머리를 베어내고도 눈하나 깜짝 않는 잔인함(르뇨의 ‘판결없는 처형’), 수많은 부인을 거느린 호색한(레폴의 ‘파샤와 그의 부인의 방’), 백인여성의 목욕시중을 들고 있는 노예(제롬의 ‘무어욕실’)….(*아래가 제롬의 <무어욕실>이다. 원서에는 직접 들어가 있지 않으며 국역본의 서두에 삽입된 그림들 중의 하나이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비판한 서양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은 이런 형태로 요약된다. 18~19세기 서양화가들이 묘사한 비도덕적이고 야만적인 동양인의 모습은 제국주의 지배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도구로 쓰여졌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이 책은 오리엔탈리즘의 고전이 된 사이드의 이분법적 시각에 이견을 제기한다. 오리엔탈리즘 비평가들은 코란 학교에서 공부하는 이슬람 아이들의 느슨한 이미지를 놓고 동양의 무기력과 게으름을 묘사한 것이라 비판하지만, 저자는 종교적 신념으로 가득찬 학습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또 동양을 표현한 ‘야만적’이란 단어도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에도 불구, 부정적 의미로만 해석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 저자는 오리엔탈리즘이 유행하면서 악인과 선인의 대립구도를 지니는 서양의 오페라에 동양인의 등장이 잦아졌지만, 도덕적 구분선이 민족적 구분선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 중 하나로 든다.

저자는 오리엔탈리즘이 동양을 부패하고 뒤떨어진 문명으로 그렸다기보다는, 자신들이 잃어버린 이상형을 동양에서 찾으려 했던 것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마상시합에서 단독결투를 하는 아랍인들의 모습에는 서양 중세의 기사도 정신이 재창조돼 있고, 유럽의 승마열기는 고귀한 아랍족장이 기품있는 아랍말 위에 타고 있는 모습으로 이상화됐다. 그들에게 중동 사람들은 성경에서 막 걸어나온 사람들이었고, 이집트의 사막은 산업화된 문명의 썩은 악취에서 자유로운 거대한 정화의 힘을 지닌 곳이었다. 그래서 구달과 루이스, 칸딘스키와 클레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화가들은 틈 날 때마다 이집트와 사막으로 달려갔다.

저자는 서두를 통해 이질적인 세계에 대한 적대감이 높아지는 현재의 국제적 정세에서 자신의 책이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고 고백한다.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이 세계주의와 이질적 존재에 대한 공포 사이에서의 충돌을 거쳐, 동서양의 상호적인 문화교류를 통해 더욱 창조적인 예술로 진보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을 일깨우고 싶다는 바람으로 읽힌다.(정유진기자)

먼저 이 책의 의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자 해설'을 먼저 읽어두는 것이 좋겠다. 대표 역자로서 박홍규 교수는 이렇게 적고 있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 출판된 이래 그것에 대한 비판은 꾸준히 제기되어왔으나, 학문적으로 경청할 만한 내용은 거의 없었다. 반면 이 책은 제국주의를 연구하는 역사학자의 입장에서, 제국주의의 실제 역사에 입각해 사이드와 그의 학파를 비판하고 있다. 이 책은 사이드의 주장이 역사학적으로 검증될 때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검토한 데서 큰 의미를 갖는다."(407쪽)

 

 

 

 

그렇다고 해서 비판을 위한 비판을 제시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오리엔탈리즘, 역사와 예술>은 그동안 내가 읽은 사이드에 대한 그 어떤 책보다도 사이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의 취지에 뜨겁게 호응하는 책이기도 하다. 그런 애정에서 나온 비판이기에 그것은 다른 어떤 비판보다도 설득력이 있다. 저자는 역자도 느꼈던 사이드에 대한 여러 의문을 풀어주면서도, 그의 사상에 누구보다도 더 깊은 애정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최적의 비판서라 할 만하다.

역자가 <탈식민주의! 저항에서 유희로>(한길사, 2001)에서 인용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저자인 무어-길버트는 이 책에 대해서 "다른 학문 분야에서 이루어진 연구 중에서 (적어도 분량 면에서는) 가장 비중 있는" 책으로 평가했다고. 거기에 역자는 이렇게 덧붙인다: "그러나 분량면에서가 아니라, 그 책이 검토하는 방대한 영역 면에서 가장 포괄적인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오리엔탈리즘의 역사와 이론뿐만 아니라, 미술, 건축, 디자인, 음악, 대중예술 전반에 걸쳐 오리엔탈리즘 현상을 분석한 책으로서는 이 책이 유일하다."(409쪽)

곁들여 챙겨둘 만한 사실은 사이드에 대한 비판서로서 이 책과 함께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마드의 <이론 속에서: 계급, 민족, 문화>(1992)라는 것. 역자가 귀뜀해주는 바에 따르면 아마드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입장에서 (마르크스주의에 적대적인) 사이드에 맹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고.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론에 대한 저자 맥켄지의 사려 깊은 비판은 한국어판 서문과 원저 서문에서 읽어볼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 흥미를 갖는 부분은 음악(클래식)과 관련한 것이다. 이미 언급한 대로 다양한 예술분야에서의 오리엔탈리즘을 두루 살펴보는 의도와 의의에 대해서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 책에서 이렇게 광범위한 예술 분야를 다루는 의도는 다음 두 가지이다. 즉 문학에만 얽매이는 데에서 탈피함으로써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스트 명제를 얼마나 더 긍정적이고도 건설적인 방향으로 수정할 수 있는지 살피고, 서로 다른 문화 형태의 관련성을, 특히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양면에서 고찰하기 위함이다(사이드는 그 자신도 인정했듯이 대중문화를 잘 알지 못했다)."(32-3쪽)  

비판의 주된 논점은 오리엔탈리즘과 제국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저자는 사이드의 제국주의관이 그가 교육받은 미국식 제국주의에 근거하고 있다고 보며 그것은 유럽의 제국주의와 양상이 좀 다르다는 점을 지적한다). 제국주의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라는 저자의 식견인지라 음미해볼 만하다(맥켄지는 <제국주의와 대중문화> 등의 저작을 갖고 있다).

"사이드와 그 추종자들은 제국주의라는 모체 안에 있는 특정 예술 분야들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그들은 제국주의에 정통한 역사가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제국주의'는 애매한 감이 없지 않다. 즉 그들의 개념은 제국주의 시대의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은 하나의 일반화된 개념으로서 역사적 동태성이 부족하다. 또한 제국주의에 관한 이론, 다시 말해 제국주의의 다양한 형태가 갖는 복잡성과 경제적, 정치적 관계의 다양성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 비약적으로 발전한 역사학자들의 시대 구분을 통해 사이드가 주장한 오리엔탈리스트 개념들을 살펴보면 맞지 않는 구석들이 많다. 다음의 여러 장에서 볼 수 있듯이 오리엔탈리즘과 제국주의는 매우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다."(35-6쪽)

마지막 문장은 "Orientalism and imperialism, as the subsequent chapters will demonstrate, did not march in parallel."을 옮긴 것이다. '동양에 대한 제국주의적 사고와 문화=오리엔탈리즘'이란 등식은 곤란하다는 이야기겠다. 맥켄지는 이 점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 음악을 든다. 19세기 말 제국주의의 전성기에도 서양의 작곡가들은 동양에 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자신의 예술적 언어를 확장하기 위해 동양 음악의 여러 가능성을 발견하고 활용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음악에 나타나는 동양적 요소를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일면적이라는 지적이겠다.



"사이드는 음악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이하게도 자신의 이론을 서구 클래식 음악에 접목시키려 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이는 그가 서구 음악의 미적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36쪽)

사이드가 음악 애호가였다는 점은 잘 알려진 것인데(바렘보임과의 대담집 <평행과 역설>을 내기도 했다. 국역본은 조야하다는 평이 주류여서 유감이지만). 그런 점을 고려하면 마지막 문장은 이해되지 않아서 원문을 찾아봤다. 이렇게 돼 있다. "Curiously, despite his great interest in music, Said has made little attempt to apply his model to western classical forms, perhaps because he seems to be highly ambivalent about their degree of aesthetic autonomy."

역자는 음악의 미적 자율성에 대한 사이드의 'highly ambivalent'한 태도를,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로 간주했는데, 나로선 '양가적'이거나 '유동적인' 태도로 이해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서양 클래식 음악의 경우 여러 양식들(western classical forms)이 있는데, 그들의 미적 자율성 수준(their degree of aesthetic autonomy)이 제각각이라고 본 거 아닐까? 높은 수준의 미적 자율성을 갖는다는 말은 그것이 외부의 물적/이념적 조건과 상대적으로 무관하다는 뜻이 된다. 반대로 그 수준이 낮다는 말은 외부적 조건에 좌지우지되며 그것으로 환원시켜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고. 

문맥으로 보아 사이드는 순수음악의 경우엔 높은 수준의 미적 자율성을 갖고 있고 오페라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낮은 자율성을 갖고 있다고 본 듯하다(이것이 음악에 대한 그의 양가적 태도이다). 그럴 경우 순수 클래식은 제국주의 혹은 오리엔탈리즘과 연관시킬 건덕지가 별로 없고 다만 오페라의 경우는 그와 연관지어 이해해볼 수 있다. 이어지는 건 그와 관련된 것이다.    





 
 

"이와 관련된 그의 최근 저서인 <문화와 제국주의>(1993) 중에 이러한 경향이 나타난다. 그 글은 이른바 제국주의적 맥락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를 분석하고 있다. 원래 이 논문은 1988년 브라이턴에서 개최된 영국 예술사학자협회 회의의 기조 연설문이었다. 당시 그 내용에 의문을 가졌던 나는 몇 가지 유보를 제기했다. 이러한 나의 생각은 사이드의 분석 결과가 책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더욱 확고해졌다."(37쪽)

이어지는, <아이다>에 대한 사이드와 맥켄지의 의견 차이다. 맥켄지가 보기에 사이드는 "오페라의 진정한 의미를 완전히 바꾸어놓았으며 결론을 오해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유럽 내 갈등, 특히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갈등이라는 측면에서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했고, 국가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베르디의 시각을 적절하게 설명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사실 베르디의 <아이다>는 국적의 상이를 초월하는 사랑의 힘만을 그리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베르디가 각색한 이집트 장군과 에티오피아 공주의 개인적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정복에 의한 지배 세력과 피지배 세력 사이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거기에 역자가 각주에서 보태는 지적: "사이드는 베르디의 오페라가 19세기 오페라 전체를 대표하고, 나아가 오페라는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유럽의 고급문화를 대표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페라를 이렇게 단정짓거나, 베르디의 오페라를 제국주의라고 보기는 힘들다. 베르디가 제국주의에 적대적이었다는 해석은 이미 음악계에서는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 자신 외세의 지배에 저항한 중요한 독립투사였음은 <비바 오페라>(박홍규 지음, 가산문화사, 2002, 132-175쪽)에서 이미 설명되었다."(37쪽)

 

 

 

 

결론은 무엇인가? "만약 '오리엔탈리스트'의 해석에서 서구의 동양 관련 작품과 동양적 형식의 각색에서 나타나는 복잡성과 이중성이 간과된다면 이는 역사적 관점을 무시한 처사다."(39쪽) "사이드의 방법론과 결론에 대한 나의 의구심, 특히 <문화와 제국주의>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접근법과 기존의 역사적인 연구가 일치하지 않는 점 때문에 나는 사이드를 부정하기에 이르렀지만, 한편으로 그를 존경하는 마음은 전혀 변함이 없다. 문화에 대한 그의 관심, 학자로서의 바른 자세, 그리고 때로는 순진한 세계주의에 가깝기는 하지만 세계인의 이해를 구하려는 그의 노력은 칭찬할 만하다.(...) 전세계 학자들은 문학 및 역사 교육과 관련해 심각하게 왜곡된 접근방식을 밝혀내고 바꾸려는 사이드의 노력에 동참해야 한다."(41-2쪽) 

내가 동참하는 길은 현재로선 이런 페이퍼로 거드는 일 정도이다...

07.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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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실이 2007-10-15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는걸로도 거들수 있겠죠?*^^*

로쟈 2007-10-15 08:22   좋아요 0 | URL
읽는 걸로는 부족합니다. 추천도 하셔야죠!^^

Jade 2007-10-15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리엔탈리즘 예술과 역사' 막 읽고싶어지는데요~? ㅎㅎ 좋은책 소개 감사합니다~

로쟈 2007-10-15 11:39   좋아요 0 | URL
책은 품절이라니까 구하시는 데 약간 애로가 있을 수 있습니다...

yoonta 2007-10-15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리엔탈리즘 예술과 역사>이 책 온라인에서 파는 곳 아는데..알려드리면 품절될것같으니 몰래 어서 구입해야겠네요..로쟈님한테만 혹시 궁금하시면 알려드릴께요.

로쟈 2007-10-15 12:47   좋아요 0 | URL
이게 나름 '고가'인 책이라 구입하지 않았었는데 소장할 만한 책이란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읽는 건 도서관들을 이용할 수 있지만서도...

2007-10-15 1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0-15 13:52   좋아요 0 | URL
감사.^^

무소속 2008-03-22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리엔탈리즘 예술과 역사>는 알라딘 중고샵에서 새책을 구하실 수 있습니다

로쟈 2008-03-22 22:41   좋아요 0 | URL
페이퍼를 쓰고 곧 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