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대선판의 '뇌관'이라는 BBK사건의 핵심 당사자인 김경준씨가 오늘 입국했다. 뉴스특보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오늘의 최대 화제인 듯하다. 뉴스에 따르면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16일 BBK 주자조작 사건의 핵심 인물인 김경준씨의 귀국과 관련 "귀국을 안 하려던 사람이 대선을 목전에 두고 갑자기 오는 것은 좋지 않다"며 "이것이야 말로 여의도식 정치"라고 말했다." 한다. '청와대식 정치'가 아닌 '여의도식 정치'가 표적이 된 것이 좀 특이해 보인다. 뉴스 기사를 더 읽어내려다가다 마저 읽은 대목은 이렇다(사진 왼쪽은 김경준씨의 누나라는 변호사 에리카 김). 

"이 후보의 경제정책이 '상위 20%를 위한 정글자본주의'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정글자본주의는 있지도 않은 말이고, 정치적 용어"라며 "정 그렇다면 내가 타잔이 될 용의가 있다. 그 사람들(비판하는 사람들)은 타잔 될 능력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경쟁력 있는 강한 사람에 대해서는 정부가 지나친 간섭도 지원도 할 필요도 없다"며 "정부의 역할은 약자를 위한 것이다. 장애인 노약자, 이런 측면은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고 설명했다."(뉴시스)

'정글자본주의와 타잔'이란 수사학에 이끌려 떠올리게 된 시가 있다. 대학 1학년 때 쓴 <타잔>이란 시다(그해 겨울에도 대선이 있었군.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당의 선거참관인이란 걸 했었다). 종강파티에서 시낭송 퍼포먼스까지 했던 기억이 떠오르는데, 그때와는 조금 다른 뉘앙스로 읽게 된다.  

타잔

그는 타잔
도시의 질탕한 밀림을
맨발로 뛰어다니는 타잔
악어 비슷한 거라면
모조리 죽이려 드는
매끈한 악어의 배를 가르며
넘치는 쾌감을 느끼는 사나이
악어백이며 악어가죽이며
도저히 참지 못하지
아아아악……어!
미친 듯이 달려가는 타잔
요즘은 미꾸라지까지 잡으러 다니며
먹어도 악어탕 추어탕만 먹는 사나이
그러다 가끔은 이상한 식인종에
쫓기기도 하지만 자랑스런
밀림의 사나이 그는
타아잔
당신은 치타!

07. 11. 16.

 

 

 

 

P.S. 이명박 후보의 책들도 생각보다 훨씬 많이 출간돼 있다. 판매량순으로, 신화는 없다, 온몸으로 부딪쳐라, 청계천은 미래로 흐른다, 이명박의 흔들리지 않는 약속, 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이 보인다, 이명박 혁명까지이다. 거꾸로 읽어도 좋겠다. '이명박 혁명'부터 '신화는 없다'까지. 신화는 없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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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11-16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타잔 하면 윤도현밴드 1집 수록곡이 생각나네염.

로쟈 2007-11-17 11:00   좋아요 0 | URL
타잔 세대가 아니신가요?..

yoonta 2007-11-16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악……어!" <-------이부분에서 뒤집어졌습니다..ㅎㅎㅎㅎㅎㅎㅎ

로쟈 2007-11-17 10:59   좋아요 0 | URL
ㅎㅎ

소경 2007-11-18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부분에 대칭되는 퍼포먼스 생각에 자지러졌어요. ㅋㅋ

로쟈 2007-11-19 12:29   좋아요 0 | URL
'현장'에서도 그런 반응이 있긴 했습니다...

유엔미블루 2007-11-20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은 북리뷰계의 동방신기라지요?

로쟈 2007-11-20 19:42   좋아요 0 | URL
제가 동방신기를 잘 잘 몰라서.^^; '신화'와 'H.O.T'도 있나요?..
 

새로 번역돼 나온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학사, 2007)을 읽고 있는 탓에 눈길을 주게 되는 책은 스티브 풀러의 <지식인>(사이언스북스, 2007)이다. <쿤/포퍼 논쟁>(생각의나무, 2007)로 연초에 소개되었던 저자인지라, 게다가 출판사도 교양과학서를 전문으로 내는 곳인지라 과학자-지식인에 관한 책인 것으로 짐작했지만 리뷰들을 읽어보니 그렇지는 않다. 말 그대로 '지식인'을 다루고 있고, 부제도 '현대사회에서 지식인으로 살아남기'이다. 국역본의 표지 또한 그럴 듯하데 분량도 만만한 만큼(그에 비하면 책값은 만만치 않다) 한번 읽어볼 작정이다. 관련 리뷰를 먼저 읽어둔다.

경향신문(07. 11. 16) 침묵은 禁, 저항하고 비판하라

무릇 지식인은 소크라테스보다 소피스트들을 본받는 게 낫다고 설파한다면 수긍하겠는가? 석가모니, 공자, 예수와 더불어 4대 성인의 반열에 올라 있는 소크라테스보다 ‘궤변론자들’을 따르라니 말이나 될 법한가. 하지만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석학 스티브 풀러는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이 오늘날의 젊은 지식인들에게 가르칠 만한 가치가 있는 ‘지식인의 원형’이라고 우긴다. 소피스트들은 ‘경박한 박식가’ ‘거만한 허풍선이’라는 낙인과는 달리 대중이 험난한 현실을 헤쳐 나가는 데 요긴한 지식과 방법론을 양심과 능력에 따라 전수했다는 게 그 이유다.

풀러는 소크라테스를 깎아내리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소피스트들을 소크라테스와 비슷하게 대접해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가 이처럼 이채로운 논리를 펴는 것은 지식인의 기본 자질이 모든 독단론을 거부하는 소피스트들의 자세에 있다는 점을 전파하기 위해서다.

graphic: bookcover

풀러가 쓴 ‘지식인(원제 The Intellectual)’은 소피스트의 복권에서도 보듯이 색다른 지식인론임에 틀림없다. 지식인의 특성과 소양, 책임에 관해 창발적인 마음의 양식으로 상을 차렸다. 그 흔한 기존 지식인론에 대한 사상사적 검토나 비판 같은 것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다. 최근의 지식인론에 대해서도 일절 언급이 없음은 물론이다. 저자가 조금 특이한 사상가이긴 하지만 선행연구 참조를 금과옥조로 삼는 학자에 속한다는 걸 감안하면 이례적이다. 영국 워윅대학 교수인 풀러는 ‘사회인식론’의 개척자다.

지식인론을 쓰면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모델로 삼은 것부터 놀랍다. 그것도 마키아벨리 같은 사람을 위한 것이며, 마키아벨리 같은 사람들에 관한 책이라고 들머리에서 아낌없는 헌사를 바친다. 마키아벨리는 모두가 알고 있지만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것을 공공연하게 말한 사람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대단히 성공한 지식인’이라고 칭송한다. 그렇지만 마키아벨리에 관한 언급은 그걸로 끝이다. 책을 마무리하는 순간까지 마키아벨리는 본 무대로 나오지 않는다. 어떤 점에서 지식인이 마키아벨리 같은 사람들인지 설명하려 들지도 않는 게 의아하다.

명색이 지식인론이라면 지식인의 책무에 대한 규범적 처방전쯤은 내려줄 법하나 그런 것조차 없다. 다만 진정한 지식인이 되는 법을 다섯 가지로 간추린다. 첫째, 판단 능력을 잃지 않고 다양한 관점으로 보는 법을 배워라. 둘째, 무슨 생각이든, 어떤 매체를 통해서든 기꺼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려고 노력하라. 셋째, 어떤 관점에 대해서든 그것이 완전히 그릇된 것이라거나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마라. 넷째, 언제나 자신의 의견을, 다른 사람의 의견을 강화하기보다 그것을 균형있게 보충해 주는 것으로 생각하라. 다섯째, 공공 사안과 관련된 논쟁에서는 진리를 위해 끈기 있게 싸워야 하지만 일단 자신의 주장이 오류로 판명나면 정중하게 인정하라.



지은이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더 이상 존재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예단하는 ‘보편적 지식인’의 부활을 꿈꾼다. 반전(反戰)에서부터 사생활 윤리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논급하던 장 폴 사르트르 같은 지식인은 현대사회의 공론장에서 찾아보기 힘든 게 사실이다. 풀러는 그같은 패배주의를 통박한다. 일부 지식인들은 대가들의 사상을 ‘정신의 원스톱 쇼핑몰’로 이용하면서 지적 생존을 연명하고 있고, 일부는 변화된 시대에 적응해 ‘지식 관리자’로 진화하고 있다고 혐오의 화살을 날린다. 그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외치는 계몽주의의 빛바랜 깃발 같은 것도 은근히 보고 싶어한다.

저자는 ‘지적 자율성’이라는 덕목을 무척이나 아낀다. 지식인이 생각하는 지식은 기본적으로 야생으로, 제멋대로 자라도록 되어 있어서다. 지식인은 ‘오직 진리’가 아닌 ‘총체적인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언제나 논적들과 백병전을 벌일 각오가 있어야 한다고 독려한다. ‘지식인의 무기고에 비판보다 나은 것은 없다’며 ‘침묵이야말로 가장 숭고한 지적 책임을 방기하는 일’이라고 일갈하기도 한다. 더불어 지식인은 저항의식을 통해 진열대에 놓인 아무 상품이나 사들이기를 거부하는 소비자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다그친다.



지은이는 지식인과 학자를 애써 구별하면서 흥미롭게 비유한다. “대학은 포도원인 셈이고, 학자들은 와인 생산자, 지식인들은 와인 감식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와인 생산자의 존재 이유가 팔리는 와인을 생산하는 데 있다면 감식가의 존재 이유는 어떤 음식에는 어떤 와인을 마시는 게 좋을지를 알려주는 데 있습니다.” 책의 멋진 마무리 말도 지식인과 학자의 차이점을 파고든다. “학자들은 과거를 다른 미래로 바꾸기에는 너무 늦게 도착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지식인들은 영원히 희망을 놓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결코 도전적 자세를 잃지 않는다.”

그는 지식인의 상반된 역할도 제시한다. 하나는 특정한 관념의 배양을 금지하는 검열관 역할이며, 다른 하나는 자극적인 관념 형식을 거부할 수 있게 하는 악마의 대변인 역할이다. 지식인이 풀어야 할 가장 힘든 과제는 계급과 성, 인종의 구분을 초월해 융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대 간의 장벽을 뛰어넘는 일이라고 갈파하기도 한다.

이 책은 번역자도 실토했듯이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다. 문장이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구성 역시 다소 산만하다는 느낌을 준다. 200쪽이 약간 넘을 정도로 얇은 편인데 내용물을 많이 담으려다 보니 압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 책은 2005년 영국의 자유주의적 좌파 성향의 잡지 ‘뉴 스테이츠먼’이 ‘올해의 책’으로 선정할 만큼 값진 평가를 받는다.(김학순 선임기자)

07. 11. 16.

Science Vs Religion?: Intelligent Design and the Problem of Evolution

P.S. 풀러 교수의 전작인 <쿤/포퍼 논쟁>에 관해서는 '토머스 쿤은 미국의 하이데거인가'(http://blog.aladin.co.kr/mramor/1043190)란 페이퍼를 참조. 올해만 3권의 책을 낸 저자의 최신작은 <과학 vs. 종교?: 지적 설계와 진화의 문제>(2007)이다. 국내에서도 '팔릴 만한' 주제인지라 어쩌면 조만간 소개될지도 모르겠다. <지식인>에 대한 반응이 좋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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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17 1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1-17 22:49   좋아요 0 | URL
뜻밖에도 적절한 듯싶습니다.^^
 

이 주에 새로 나온 책 몇 권에 대한 '낚시질'을 하다가 첫 페이퍼부터 날려먹었다(임시저장도 되기 전에). 바쁜 일들도 많은지라 그냥 '후퇴'하기로 한다. 대신에 미친 척하고 사들고 온 아리스토렐레스의 <형이상학> 두 권에 대한 '신고식'은 해둔다. 왜 두 권이냐면, 최근에 나온 완역본 <형이상학>(이제이북스, 2007) 외에 '당신이 없는 사이에' 나왔던 발췌본 <형이상학>(문예출판사, 2004)을 한꺼번에 사들었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와 로스(Ross)의 영역본을 찾으니 눈에 띄지 않는다(박스에 들어가 있나?). 모스크바에서 사들고 왔던 러시아어본도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러시아어 아리스토텔레스로 나는 <형이상학>과 <윤리학>, <시학>을 갖고 있다. 아래 이미지가 러시아어 주석본 <형이상학>이다.

Аристотель Метафизика. Переводы. Комментарии. Толкования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책들의 경우 모두 온라인에서도 읽어볼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영역(http://ebooks.adelaide.edu.au/a/aristotle/metaphysics/)과 러시아어역(http://www.lib.ru/POEEAST/ARISTOTEL/metaphiz.txt)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즐겨찾기에 추가해놓으니 대략 책을 읽을 만한 준비는 다 된 듯싶다. 그러고 드는 생각. 영어나 러시아어 독자라면 누구라도 쉽게, 그리고 공짜로 읽을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우리는 왜 거금을 주고 구입해야지만 읽을 수 있는가? 적어도 이런 고전 류는 국가가 번역판권을 인수해서(인문한국사업 같은 데 들어가는 비용의 일부를 이런 데 돌릴 수도 있지 않을까?) '서비스'할 수는 없는 것일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완역본 <형이상학>의 역자는 아직 학위를 마치지 않은 소장 고전연구자로 이미 <범주론-명제론>(이제이북스, 2005)을 우리말로 옮긴 바 있고, 현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번역중이라고 한다. 작품의 의의나 번역의 품을 고려할 때 거의 '올해의 번역상'의 유력한 후보가 아닌가 싶다. 그런 생각으로 펼쳐든 '해설'에서 기본 용어들의 다소 파격적인 번역어들과 만난다. 'pathos(파토스)'를 '겪이'라고 옮기는 식인데, 고전연구자들끼리 '합의'가 된 번역어인지 모르겠지만 생소하다는 인상은 지우기 어렵다. '형상과 질료'를 '꼴과 밑감'으로 옮기는 것도 그렇다.

반복적으로, 그리고 오래 사용하다 보면 새 번역어들이 입에 익을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유보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그건 '있음론' 대신에 '존재론'이란 말을 우리가 계속 사용하는 한 '존재'를 '있음'이라고 옮기는 것이 큰 의미를 갖는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있음'이나 '있는 것'이 '존재'나 '존재하는 것'보다 더 일상적이며 이해가 쉬운 용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우리의 일상에서 '있는 것'이란 말을 쓸 일이 있는가?).

고전의 일상어 번역에 대해서는 김남두 교수(역자는 그 제자로서 이 번역본을 스승에게 헌정하고 있다)의 견해가 잠시 소개된 적이 있는데(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243750.html), 그는 "일상어가 학술어 대접을 받지 못하다 보니 일본어 조어가 일상어를 대신해 학술어가 되었"고 지적하고 이러한 상황을 시정하기 위해서 "일상어와 학술어의 간극을 메워나가야 한다고 했으나 표기 원칙을 일률적으로 정하는 데는 찬성하지 않는다" 했다. 당분간 우리는 '형상과 질료'를 '꼴과 밑감'과 같이 쓰는 학문 '이중어' 시대를 살아가야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읽은 <형이상학>의 첫문장이 "모든 인간은 본래 앎을 욕구한다."이다. 두 번역본에서 첫문단만을 대조해보겠다. 거기에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자들이 한결같이 덕을 보고 있"다는 로스의 영역도 같이 옮겨놓는다(물론 그 덕은 주로 주해와 관련된 것이겠지만).

"모든 인간은 본래 앎을 욕구한다. 이 점은 인간이 감각을 즐긴다는 데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정말 쓸모를 떠나, 감각을 그 자체로 즐기는데, 다른 어떤 감각들보다도 특히 '두 눈을 통한 감각'(시각)을 즐긴다. 무엇을 실천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어떤 것도 하려 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말하건대 다른 모든 감각보다도 보는 것을 더 좋아한다. 왜냐하면 감각들 중 시각을 통해 우리는 가장 많이 '느끼어 알며'(지각하며) (시각을 통해 사물들의) 여러 가지 차이성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이제이북스판, 29쪽)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알기를 원한다. 여러 감각에서 얻는 즐거움이 그 증거인데, 사람들은 필요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서 감각을 즐기고 다른 감관보다 특히 눈을 통한 감각을 즐기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행동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아무 행동 의도가 없을 때에도 - 사람들 말대로 - 만사를 제쳐두고 보기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감각 가운데 그것은 우리가 지식을 얻는 데 가장 큰 구실을 하고 수많은 차이들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문예출판사판, 50쪽)

ALL men by nature desire to know. An indication of this is the delight we take in our senses; for even apart from their usefulness they are loved for themselves; and above all others the sense of sight. For not only with a view to action, but even when we are not going to do anything, we prefer seeing (one might say) to everything else. The reason is that this, most of all the senses, makes us know and brings to light many differences between things.

다소 특이한 점은 "원문에 좀더 충실한 쪽으로 방향을 잡"은 완역본에서 보이는 일상어와 개념어 번역의 혼용이다. "모든 인간은 본래 앎을 욕구한다"나 "무엇을 실천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같은 구절은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알기를 원한다"나 "우리는 행동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같은 구절보다 문어적이다. 대신에 "우리는 정말 쓸모를 떠나", "시각을 통해 우리는 가장 많이 '느끼어 알며'"라는 식으로 풀어주는 것은 "[시각은] 우리가 지식을 얻는 데 가장 큰 구실을 하고"보다 구어적인 쪽인 듯하지만 역시나 좀 낯설다. 이러한 의도적인 선택 때문에 보다 수월하게 읽히는 쪽은 발췌역쪽이다. 물론 발췌역본에서도 마지막 문장은 부자연스럽게 번역되었지만('그것은' 같은 대명사 때문에).

이 <형이상학>에 대한 두 종류의 우리말 번역을 맛보기로 읽어보면서 드는 생각은 두 번역서 모두 학술적 가치를 지닌 업적으로서 의의를 갖지만 ('일상어 번역'이란 말이 표방하는) 보다 대중적인 번역으로서는 난점이 있어 보인다는 것. 연구자나 고급독자가 아닌 이상 기본적으로 아무런 각주 없이도 술술 읽어나갈 수 있을 때 '살아있는 번역'으로서 의의를 가질 테지만(가령 조안 스파르의 <플라톤 향연>(문학동네, 2006) 같은) 이번에 나온 완역본도 그렇고 국역본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독자는 '전공자'나 '연구자'들이다(온라인의 영역본 <형이상학>에는 아무런 각주도 붙어 있지 않으며 영어 또한 평이하다). 그 점은 책머리에 실린 '해제'의 마지막 문단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옛 그리스어를 아는 독자들은 물론 본 역서와 더불어 원문을 읽어야 할 것이다. 원문을 대체할 만큼 좋은 번역은 없기 때문이다. 번역문은 옛 그리스어로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를 언어적인 특성과 더불어 그대로 전달해주지 못한다. 하지만 옛 그리스어 독해 능력이 없는 독자들도 그리스어-한글 찾아보기에 나와 있는 각 낱말의 어원 설명과 함께 해당 영어 번역어를 잘 활용하면 원어가 갖는 의미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25쪽)

역자가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는 "엣 그리스어를 아는 독자들"에겐 사실 이 번역서가 절실하게 필요한 건 아니다. "원문을 대체할 만큼의 좋은 번역"은 없을 뿐더러 그리스어 독해력을 갖고 있는 경우엔 대개 영역이나 독역본을 읽을 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터여서 그걸 참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어느 경우이건 국역본보다 더 이해가 용이하다). 문제는 그렇게 읽은 '앎'을 일반 독자나 학생들에게 전달해야 할 경우이다(전공자들이야 이심전심으로, 혹은 그리스어 원문으로 소통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게 딜레마다. 아무리 전달하고 싶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를 언어적인 특성과 더불어 그대로 전달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때 전공자/번역자가 원문을 읽고 갖게 된 '앎'은 어떤 앎인가? '번역 이전의 앎'이다. 그리스어 원문 자체에서 얻는 어떤 '상'이기에(그것은 '동어반복'이거나 '이미지'이다). 그것은 한 가지 앎이지만 궁극의 앎은 아니다(전달 불가능한 앎, 곧 가르칠 수 없는 앎이니까). 번역의 불가능성이란 번역 자체의 기본적인 조건이므로 이 또한 새삼스러운 것이 못된다(가령 김소월의 아무시나 다른 언어로 옮긴다고 생각해보라).

'그리스어 독해 능력'이 없기에 어원 설명과 영어 번역어를 세심하게 고려해가며 읽어야 원어의 의미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다는 조언은 번역 자체의 의의를 침식한다. 원문으로 읽을 때 보다 나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지만 번역본만으로도 <형이상학>의 내용과 가치를 식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정도가 역자의 변이 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에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충실한 번역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과 독자들에게 더 충실한 번역이 한번 더 출간되어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인간이 본래 앎을 욕구한다면 말이다...

07. 11. 16.

P.S. <형이상학>의 인용문 번역들을 참고하여 나대로 약간 윤색해본다. 말하자면 나대로의 '앎'이다: "모든 인간은 본성상 앎을 원한다. 우리가 감각에서 얻는 즐거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우리는 무슨 필요에서가 아니라 감각을 그 자체로 즐긴다. 무엇보다도 시각의 경우가 그렇다. 무얼 하려고 해서뿐만 아니라 딱히 무얼 하려고 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보는 걸 좋아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여느 감각들보다 시각을 통해서 우리가 많은 것을 알 수 있고 사물들간의 차이 또한 식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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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11-16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athos를 겪이라고 번역했다고요? 헐... 겪이라는 말은 일상어가 전혀 아닌 것 같은데... 무슨 뜻인지...ㅡㅡ;;

로쟈 2007-11-16 14:47   좋아요 0 | URL
그리스의 '일상어'였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춘 탓이지 않나 싶어요...
 

올해 제40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로 소설가 편혜영씨가 선정되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수상소식이라 덩달아 반갑다. 작가와 사소한 안면이라도 터둔 것이 반가움의 크기를 조금 더 키워주는지도 모르겠다(딱 한번 만나본 인연이지만, 자랑하자면 나는 작가가 보내준 사인본을 갖고 있다). 몇 차례 관련 페이퍼를 올려두었기에 따로 군말은 적지 않고 관련 인터뷰기사와 선정이유서를 옮겨둔다.

한국일보(07. 11. 16) 제40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 '편혜영'

#엽기적 소설을 썼구나 했는데 그게 아니야. 계산적이고 치밀하고 정확해. 자기 몸 하나가 있고 그 반(半)만 갖고 소설을 쓰는 것 같아. 그 반으로 자기를 넘어서려는 거야.(김윤식 본심위원)

12일 오후 서울 인사동 한 음식점에 모인 한국일보문학상 본심위원(김윤식 임철우 황종연)들은 계간 <문학동네> 가을호에서 소설가 김애란씨가 편혜영씨에 대해 쓴 글을 화제에 올렸다. 글엔 이런 전언이 있었다. 편씨가 스무살 때 모친상을 치른 직후 밥을 지으려 쌀통을 열었는데 기다랗고 하얀 애벌레가 꿈틀대고 있었단다. 겨우 쌀을 씻어 아버지께 상을 차려 드렸지만 자기는 며칠간 집 밥을 먹지 못했다고.

황종연 위원이 말을 이었다. “첫 소설집 <아오이가든> 때 편혜영 소설은 잔혹동화 같은 느낌이었다. <사육장 쪽으로>에선 사무원의 세계가 등장한다. 실제 작가 자신이 애써 진입한 세계이자 공인된 세계다. 그런 세계를 금 가게 하고, 연신 독자를 허방짚게 만든다. 사무원인 동시에 소시민인 자로서의 양가감정이 독하다. 이 사람, 작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잔혹의 미학이 영롱한 편혜영의 ‘하드고어 원더 랜드’(평론가 이광호)가 구별짓기의 제스처가 아닌, 진정성 있는 한국문학의 신천지임을 확인한 이상 본심위원들에게 수상작 결정을 늦출 이유는 남아있지 않았다.

#조심스럽고 나지막히, 알아보았다는 듯이, 그러나 들킨 것은 아니니 안심하라는 듯이, 자기도 함부로는 질색이라는 듯이,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주었더랬다.(소설가 이신조)

13일 오후 수상자 인터뷰를 위해 편씨를 만났다. 그가 6년째 근무 중인 서울 광화문의 직장 맞은편 커피숍에서였다. 단정한 검은색 정장 차림에 ‘파버카스텔’ 브랜드의 샤프펜슬을 가늘고 긴 손가락에 쥐고 마주앉은 편씨와의 대화는 편안하면서도 낭비가 없었다. 그는 듣고 이해하는 일에 능숙했고, 간결하고 요령있게 답할 줄 알았다. 그의 소설에서 감지한, 오감을 집요하게 자극하는 예민함과 밀도 있는 건조체 문장을 고집하는 단단함에 비춰 자연인 편혜영을 예단한 일은 (앞의) 반은 틀리고, (뒤의) 반은 얼추 맞았다. 스스로는 “약간의 무대 공포가 있고, 좌중 속에서 있는 듯 없는 듯 하는 게 편하다”고 말했다.

편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어떤 형태로든 계속 노동을 해왔다”고 말했다. 2년간 회사원으로 일하다가 ‘소설이든 뭐든 쓰고 싶다’는 욕구를 좇아 뒤늦게 서울예대, 한양대 대학원에 진학한 후에도 꾸준히 부업을 했다. 석사학위를 받은 해 현재의 직장에 입사, 이젠 팀원 여럿을 거느린 팀장이다. 4남매의 막내임에도 ‘막내티’가 전혀 나지 않는다. “부모님이 일하시느라 늘 바빴다. 어리광을 피우는 걸 잘 못한다. 부탁했다간 거절 당할 것 같다는 심리가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턴 출가한 언니들을 대신해 집안 살림을 도맡았다.

편씨는 문학을 일상으로 여기는 듯 보였다. 쓰는 일을 밥 먹고, 출퇴근하고, 청소하고, 잠자는 것과 공평하게 대하는 느낌이랄까. 그는 “주로 집에서 쓰지만 도서관, 카페 등 장소 안 가리고 어디서나 잘 쓴다”고 했고, “계간지 청탁을 받아 3개월에 단편 1편씩 쓰는 일은 직장 생활을 하지만 아주 벅차진 않다”고도 했다. 여기엔 문학에 자신의 전부를 투입해야 한다는 강박적 자세가 묻어나지 않았다. 대신 생활에 단련된 자의 여유와 기품이 있었고, 그래서 신뢰감이 들었다. 어떤 난관에도 일상은 계속되듯, 편혜영 소설도 앞으로 오랫동안 성실한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호흡하리란 믿음.

#한국일보문학상 하면 젊은 작가가 내지르는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맞장구쳐주는 상이란 느낌이 들어요. 바로 그 상을 젊은 시절에 받게 되다니, 너무 기뻐요.(편혜영)

등단 7년 만에 받는 첫 상이다. 수상작에 실린 개별 단편들은 작년부터 유수의 문학상에 유력 후보로 자주 거론돼 왔다. 한국일보문학상엔 2005년부터 이미 이름을 올려왔다. 그해엔 단편 ‘시체들’, 작년엔 단편 ‘사육장 쪽으로’가 본심 후보작으로 선정된 바 있다. 편씨는 소위 ‘2000년대 작가’로 분류되고, 스스로도 그 점을 불편해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포함한 동세대 작가들의 문학적 경향을 ‘개성’이라고 말했다. “선배 작가들에겐 전쟁, 이념, 부정해야 할 아버지와 같은 명확한 시대적 명령이 있었다. 요즘 젊은 작가에겐 그런 게 없다. 오직 세계를 보는 개성적인 눈으로 존재 증명을 해야 한다. 창작자로선 흥미로운 환경이다.”

편씨는 현재 장편을 구상하고 있다. 내년에 낼 수 있도록 준비 중이라고 조심스레 말했다. 등단 이후 줄곧 단편을 써왔던 그에겐 만만찮은 도전이다. 그는 “장편은 단편과 호흡이 다르다. 날마다 쓰지 않으면 쓸 수 없을 것 같다”며 긴장의 일단을 내비쳤다. 그 말을 들으면서 미안하게도, 전혀 걱정스럽지 않았다. 이러구러 생활에 충실하다보면 내년이 가기 전 서점 한복판에 놓인 편혜영의 멋진 첫 장편을 보게 되리란 생각만 들었다. 일상의 기시감은 강렬하고 그녀는 재능있고 성실하다.(이훈성기자)

■ 왜 편혜영인가(선정이유)

올해 한국일보문학상에는 예년과 달리 장편이나 단편 작품이 아니라 한 권의 장편소설을 포함한 여섯 권의 소설이 후보작으로 뽑혔다. 장편과 단편을 대등하게 간주하는 것은 무리이니 단편의 경우에는 한 편이 아니라 단편집을 후보작으로 내는 것이 좋겠다는 예심위원들의 합의에 따른 결과라는 해명이 있었다.

이렇게 단편집을 심사 대상으로 삼게 되면 저자의 전반적인 창작 기량의 수월성 또는 '문학 세계'가 특정 작품의 우수성 못지않게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된다. 따라서 본심의 부담은 상당히 커진 셈이지만 예심위원들의 안목 덕분에 우리는 후보작으로서 손색없는 소설들을 대상으로 검토를 시작할 수 있었다.

김훈의 <남한산성>, 윤성희의 <감기>, 이기호의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정이현의 <오늘의 거짓말>, 천명관의 <유쾌한 하녀 마리사>, 편혜영의 <사육장 쪽으로> 이상 여섯 권의 후보작은 각자 개성이 뚜렷하고 그 나름의 특장을 가지고 있어서 그 우열을 가늠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다만 우리는 한국일보문학상이 경력, 연고, 평판 등 이런저런 이유에서 응분의 평가를 받지 못한 작가들에게 주의를 기울여왔으며 그것은 앞으로도 계승할 가치가 있는 전통이라는 점에 유념하기로 했다. 또한 단편집의 경우 수록된 작품들의 수준이 전체적으로 균일하고 '문학적인 것'을 둘러싼 의식의 고투가 치열하다고 판단되는 것들에 주목하기로 했다.

본심은 우수하다고 생각되는 작품에 대해 각자 소견을 밝히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각자 의견을 내놓고 나니 어느 소설로 하자는 말은 굳이 꺼낼 필요도 없었다. 편혜영 씨의 단편집 <사육장 쪽으로>가 논란 없이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편혜영 씨의 단편들은 경제적으로 제어된 서술, 정교한 디테일을 통한 암시, 통일된 인상의 창출 등과 같은 단편소설의 고전적 규범을 정확하게 습득한 바탕 위에 씌어진 것이다.

작년 한국일보문학상의 유력한 후보작이었던 표제작은 물론 그 밖의 단편 모두 현대의 삶에 대한 은유를 이루는 여러 가지 상황을 박진감 있게 제시하고 있다. 그 상황의 핵심은 겉으로는 정연한 듯한 인간 세계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는, 어느 순간 인간 현실을 현실이 아니게 만드는 불확실성의 출현에 있다.

편혜영 씨는 한 작품에서 잡초와 들쥐가 침입하지 못하는 단단한 집을 원하던 부부를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습지에 빠져죽게 만들었듯이 일상생활의 조건을 이루는 현실의 범주들이 어떤 원초적인 미혹에 먹혀버리는 광경을 기괴한 방식으로 포착한다. 그리고 모든 의미와 상징의 질서를 헛것으로 만드는 집합적 무의식의 심층을 냉혹하게 파고든다. 인간의 내부, 그 암흑의 핵심을 향해 이토록 깊이 시추를 내린 작가는 우리 문단에 흔치 않다. 한국일보문학상이 편혜영 씨의 외로운 탐구에 격려가 되길 바란다.(본심위원 김윤식 임철우 황종연)

07. 11. 15.

P.S. 작년 겨울인가 문단의 한 송년회 자리에서 편혜영, 김애란 두 작가와 잠시 합석을 한 적이 있다(김애란씨는 이미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한 터이므로 안 그래도 절친한 두 작가는 이제 한국일보문학상 '가족'이 되었다). 마침 하반기에 두 작가가 쓴 작품들에 강한 인상을 받았던 터라 나대로의 상찬을 늘어놓았던 듯하다. 올해 두 사람은 나란히 작품집을 냈고 또 내게도 나란한 책을 보내주었다. 덕분에 <사육장쪽으로>(문학동네, 2007)와 <침이 고인다>(문학과지성사 2007)를 나는 두 권씩 갖고 있다(딸아이에게 가보로 물려주어야겠다). 따로 인사를 전하지 않았었는데, 이 자리를 빌어 두 작가의 후의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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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7-11-15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편혜영의 작품은 이효석 문학상 수상집에서 읽어본 '분실물'이 전부인데, 참 촘촘하면서도 깊숙히 파고드는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인상적인 작품이었답니다. 사육장쪽으로,에도 관심이 가네요- 근데 편혜영작가, 예쁜데요? ㅎㅎ

로쟈 2007-11-16 08:58   좋아요 0 | URL
실물이 더 낫습니다.^^

송연 2007-11-19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마전 분실물을 읽고는, 다시한번 책에서 그녀의 이름을 확인케 되더군요.
문체는 단순하지만, 그러한 필치가 내용을 이끌어가는데 더 이점이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또한 작가마다 여러 글쓰기의 방식들이 있겠지만 편혜영씨는 상황에 따른 내면의 정확하고 세심한 묘사를 통해 독자를 흡입할줄 아는 스킬을 지닌 작가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뜻 카프카의 느낌도 들었었구요.
그런데 로쟈님, 궁금한것이 한가지가 있어요,
많은 이들이 김애란을 칭송하더군요, 하지만 그의 대표작 두권을 읽고난 후에 들은 저의 생각은, 작가로서의 상상력이 뛰어나다기보다는, 그녀의 사적 경험들을 글 속에 많이 투입시켰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네요, 물론 그러지 말란 법도 없고 개인적 경험이 작품을 쓰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역시 사실이지만, 그녀같은 경우는 너무 티가 나는 것 같았네요... <침이 고인다>는 특히 더욱요.
그리고 <달려라 아비> 같은 경우는 신문 사설들을 꼼꼼히 읽은 작가지망생이 자신의 문장력을 어법에 맞게 잘 구성하려고 분투한 듯한 느낌을 주었구요, 제가 '나이'에 대한 선입견같은것은 없지만,(게다가 그정도의 나이면 먹을만큼 먹은 나이이구요) 그녀의 작품들을 읽으면 왠지 설익은 단감을 먹고 있는듯한 착각이 듭니다. 저만 잘못 생각하고 있는걸까요?;;

로쟈 2007-11-19 12:27   좋아요 0 | URL
'잘못 생각'하실 리는 없지요. 저마다의 취향과 판단의 기준이 있는 것이니까요. 김애란 작가의 경우 많은 독자들에게 어필한다고 보시면 될 거 같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건 '가난'에 대한 그녀의 감각입니다...
 

분위기 전환을 위해서 시 한편을 올려놓는다. 이 또한 십수년 전쯤에 쓴 것 같다. '車에 실려가는 車'는 김영승 시인의 시집 제목이기도 하다.

극한

1  
극한이란 어떤 양이 일정한 법칙 밑에서 점차 값이 변하여 달하려고 하는 일정한 양을 말한다. 

2
삶의 극한. 으아, 삶의 맨끝! 끝자리가 틀리면 말짱 도루묵이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 정말 이런 편견들은 끝장내야 한다. 

3
'극’은 車에 실려가는 車를 닮았다. 말하자면 車의 끝장을 보여주는 셈이다. 그 車를 끌어내려 보자. 그그그그 ‘그’(덜컹!) 

4
이제 그걸 맨앞에 갖다 놓으면 ‘그-ㄱ’이 되겠지. 아무래도 이건 발음이 곤란하다. 이때는 대개 ‘ㅇ’을 붙여 읽는 것이 요령이다. 트림하는 기분으로 ‘그-윽’(좋군!) 

5
고물차 한 대 때문에 더 나빠질 교통체증도 이미 아니므로 우리는 ‘극’한 상황을 ‘그윽’한 상황으로 바꾸겠다. 

6
그윽한이란 어떤 양(♂)이 일정한 법칙 밑에서 점차 값이 변하여 일정한 음(♀)에 달하려고 할 때의 은근한 느낌을 말한다.(이 부분은 자유로운 상상에 맡긴다.)

07. 11. 14.

P.S. 흠, 주말엔 <색, 계>를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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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da 2007-11-15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 물리학적인 시라 잘 이해는 안 가지만.. 그윽한 트림은 참 좋군요.
저렇게 감질나게 코 끝이 맞닿은 자세에서는 아무래도 덜 그윽하겠지만요.

사족이지만, 오늘의 로쟈님은 어제의 로쟈님과 달라 보입니다.^^

로쟈 2007-11-15 00:34   좋아요 0 | URL
그래서 애써 분위기 전환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닉네임을 바꿔야 하나 싶기도 하고...

마늘빵 2007-11-15 09:12   좋아요 0 | URL
글 보면 금방 티 납니다. ㅋㅋ 그냥 쭉 가세요. :)

로쟈 2007-11-15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학수사대까지 동원한다시니까 쭉 가는 수밖에 없겠네요. 대신 분가할 궁리는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