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설겆이하고 지난여름 교토에서 사온 전병 남은 걸 커피와 함께 먹어치우고, 이제 배를 깔고 엎드려서 책을 펼친다. 이시영 시집 <하동>(창비)을 뒤적이다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생각함‘에서 눈길이 멎는다. ‘김남주를 생각함‘으로 읽어도 되는 시다. 아래가 전문이다.

임종이 임박했다는 새벽 전화를 받고 고려병원에 달려갔을 때의 일이다. 황달이 퍼져 샛노란 눈빛의 김남주가 주변을 돌아보며 외쳤다. ˝개 같은 세상에 태어나 개처럼 살다가 개처럼 죽는다. 부탁한다. 남은 너희들은 절대로 이렇게 살지 마라!˝ 그의 숨이 끊어지고 난 뒤 병실 복도에 나와 나는 나에게 다짐했다. 빗방울 하나에도 절대 살해되어서는 안되겠다고!

마지막 문장은 김남주가 옮긴 브레히트의 시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의 마지막 행에서 차용했다고 시인은 덧붙였다.

잠시 브레히트와 김남주와 개 같은 세상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개처럼 살지 말아야 할 사명에 대해서도. 어젯밤 라스베이거스 총기난사 사건의 억울한 희생자들에게도 세상은 얼마나 개 같았을 것인가. 우리는 빗방울 하나에도 절대로 살해되어서는 안될 사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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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 막간에, 다시 서점에 들렀던 얘기. 신철규의 시집을 사들었다고 했는데 신작 시집들 가운데 잠시 망설이긴 했다. 김이듬의 <표류하는 흑발>(민음사)과 이병률의 <바다는 잘 있습니다>(문학과지성사)가 모두 선택지였기 때문이다. 무작위로 한두 편씩 읽고서 최종 선택은 원래 의도대로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문학동네)로 낙착. 첫번째 시 ‘소행성‘부터 마음의 과녁을 벗어나지 않았다.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네 꿈속의 유일한 등장인물은 나.
우리는 마주보며 서로의 지나간 죄에 밑줄을 긋는다.

마지막 연이다. ‘소행성‘은 물론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이다. 이 시를 처음에 배치한 것 자체가 시에 대한 시인의 정의로 가름되는데 그것은 시란 곧 소행성의 감각이고 언어라는 것. 그에 따르면 시인들은 너무 작은 별에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적도까지 몇 발자국이면 걸어갈 수 있다.
금방 입었던 털외투를 다시 벗어 손에 걸고 적도를 지날 때
우리의 살갗은 급격히 뜨거워지고 또 금세 얼어붙는다.
우리는 녹아가는 얼음 위에서 서로를 부둥켜안는다.

신철규의 시를 만들어내고 또 지탱하는 건 이러한 소행성적, 어린왕자적 상상력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서정적 자아가 세계보다 우월할 때 성립한다는 시 에 대한 일반적 정의에도 잘 부합한다. 시집에 실린 모든 시가 ‘소행성‘의 어법은 보여주는 건 아니지만 나는 시인의 특장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거기에 있었으면 싶다.

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밖에 없다.(‘눈물의 중력‘)

멀리 있는 것들이 궁금할 때가 있다.(‘플랫폼‘)

처음 자전을 시작한 행성처럼 우리는 먹먹했다.(‘슬픔의 자전‘)

잡히는 대로 골라본 소행성의 언어들이다.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절벽 끝에 서 있는 사람을 잠시 되돌아보게 하는 것,/ 다만 반걸음이라도 뒤로 물러서게 하는 것,/ 그것이 시일 것이라고 오래 생각했다˝고 적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좀 식상했다. ‘절벽 끝‘이라는 상투적인 비유를 들고 있어서 내심 놀랐다. 우리도 대개 그렇지만 시인도 자신이 무얼 쓰는지 잘 모를 때가 있다. 내게 신철규는 이런 유머를 구사할 때 비로소 시인이다. 소행성 유머다.

바다가 있었으면 좋겠다,
너와 나 사이에
너에게 한없이 헤엄쳐갈 수 있는 바다가
간간이 파도가 높아서 포기해버리고 싶은 바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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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서점에 들렀다가(집에서 양방향 도보로15분거리에 두 곳의 중형서점이 있다) 신철규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문학동네)와 함께 유종호 선생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를 사들고 왔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알라딘에 품절로 뜨는 책이니 나름대로 득템(알라딘에도 중고본은 뜬다). 초판은 1989년 가을에 나왔고 내가 그 즈음에 읽었으니 28년 전 책이다. 오늘 구입한 건 2판 30쇄로 2011년 여름에 찍은 것이다. 오랫동안 문학 입문서 역할을 해온 스테디셀러인데 품절이 일시적인 것이기를 바란다.

단지 품절도서라서 재구입한 건 아니고 28년만에 읽으면 어떤 인상을 받을지 궁금해서 골랐다. 이를 테면 독서의 키재기 같은 것. 키를 재면서 벽에다 눈금을 그어놓고 비교하는 것처럼 같은 책을 오랜만에 다시 읽으면 그동안 생각이 얼마나 자랐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흠, 성장기도 한참 전에 지난 나이에 키를 잰다고 하니까 멋쩍지만 정신의 성장에는 따로 시한이 있는 게 아니잖은가.

<문학이란 무엇인가>란 제목의 책으로 내가 제일 먼저 읽은 건 사르트르의 책으로 기억한다(기억과 사실은 언제나 다를 수 있다). 당시엔 문예출판사판. 그리고 김현/김주연 편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문학과지성사). 이 책도 나중에 개정판이 나왔다. 대학 첫 학기에 문학개론을 들으면서 그밖에도 몇권 더 읽었을 테지만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책에 한정하자면, 내게는 ‘3종세트‘에 해당한다.

이제 연어가 모천 회귀하듯이 세월을 거슬러 다시 이 책들을 손에 든다. 나대로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낳기 위해서다. 연어들이 돌아오는 나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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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늦깎이 등단 작가(1965년작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기준으로 하면 마흔넷에 등단)이면서 대표적인 다작의 대중소설 작가(매월 1000매의 원고를 썼다), 그리고 대하장편 <지리산>의 작가, 정도가 작가 이병주(1921-1992)에 대해서 내가 입력하고 있던 바다. 하지만 지난 10여 년간 이병주 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재평가 작업이 진행되어 온 사실을 알고 있었고 몇년 전부터 작품과 연구서를 구입해왔다.

그렇더라도 본격적인 독서는 미뤄두고 있었는데 이번 학기에는 한국현대문학 강의를 진행한는 차에 그의 <관부연락선>(한길사)을 끼워넣었다. 작품 발표연대상으로는 김승옥의 <무진기행> 다음이지만 연휴도 고려해서 두 권짜리 <관부연락선>을 최인훈의 <광장> 다음에 배치했는데, 작품의 시간적 배경도 <무진기행>보다 앞선 시기라서 스스로 온당하다고 생각한다.

이병주에 관한 자료들을 읽다가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인데 하동 출생인 그의 문학을 기려 이병주문학관이 지난 2008년 하동군에 건립되었다. 지난번에 가본 박경리문학관에서 먼 거리가 아닐 텐데(같은 관내이니) 놓쳤다는 생각이 든다(시간상 어렵긴 했다). 내년봄쯤 박경리문학기행을 진행하면 곁들여서 이병주문학관 방문도 일정에 포함해야겠다. 그 전에 <토지>와 <지리산>을 완독하는 건 숙제.

이병주 문학에 대한 연구와 재조명은 부쩍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어서 올해도 두어 권의 책이 출간되었다. 생전에 받지 못했던 비평적 환대를 몰아서 받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나부터도 재발견이다). 일찌감치 ‘한국의 발자크‘를 자임했던 작가의 문학적 성취가 제대로 평가받고 음미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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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먼 나이트의 <단편소설 쓰기의 모든 것>(다른)을 좀 뒤늦게 손에 들었는데, 실상 이런 종류의 책이 무슨 도움이 될까 싶은 의구심에 책을 다시 덮으려다가 읽은 말미의 한 대목. 저자는 ‘뭘 읽어야 할까‘를 묻고 답한다. 물론 작가지망생들이 뭘 읽어야 할까에 대한 조언이다.

˝전부 다. 한마디로 전부 다 읽어야 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윌리엄 깁슨,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를 읽는다. 케첩병 라벨에 있는 글씨도 읽는다. 그런데 전부 읽되 읽고 싶을 때만 읽는다.˝

매우 당연하면서도 전적으로 동감할 만한 충고다. 내용은 좀더 이어지는데 독서법에 대한 현명한 충고를 담고 있다. 전부 읽되 절대로 꾸역꾸역 읽지는 말고 흥미가 동했을 때 읽으라는 것. 그래야 머리가 팽팽 돌아가고 뭐라도 쓸 준비가 된다.

읽는 거라면 나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데 윌리엄 깁슨은 독서 이력에서 빠져 있다. 저자가 SF작가라서 깁슨을 치켜세운 면도 있겠지만 ‘전부 다‘ 읽는다는 차원에 목록에 올려놓는다. 아, 억지로 읽을 필요는 없다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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