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일정이 아직 남아 있기는 하지만 한주간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난 뒤의 피로와 방심 속에서 ‘이주의 발견‘을 고른다. 레이첼 코벳의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뮤진트리).

제목에서 릴케를 떠올렸다면 시를 좀 읽은 축에 속한다(릴케의 시 ‘표범‘에 나오는 구절이다). 책은 릴케와 로댕의 삶을 같이 다른 일종의 듀오그라피이고, ‘릴케의 로댕, 그 절대성과 상실에 관하여‘가 부제다.

˝이 책은 육십대의 합리적 프랑스인 로댕과 이십대의 낭만파 독일인 릴케. 두 사람의 삶이 얼마나 긴밀하게 얽혀 있었고, 한 사람의 예술적 진전이 어떻게 상대방의 것을 따라갔는지, 너무나 대조적인 두 성향이 어떻게 상호보완적으로 이어졌는지를 기록한 다층적이고 서정적인 탐구서이다.˝

릴케의 로댕론을 기본 자료로 해서 따라가볼 만하다. 10월이 다 지나갔으니 어렵겠지만 11월에는 겨울이 오기 전에, 아주 오랜만에 릴케도 좀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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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올라오는 길에 시와 소설을 같이 쓰는 임솔아의 첫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문학과지성사)을 읽었다. 보통 시집은 최고의 시 한편만 고른다는 기분으로 읽는데, 그러면 밑지지 않으면서 빨리 읽게 되는 이점이 있다. 이 시집에서는 ‘모래‘가 그 한 편이다.

제목대로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이 나오는 시도 들어 있기는 하지만(그들은 ‘예보‘라는 시에 나온다), 내 마음을 끈 것은 ˝오늘은 내가 수두룩했다˝로 시작해서 ˝오늘은 내가 무수했다˝로 마무리되는 시이다.

오늘은 내가 무수했다.
나를 모래처럼 수북하게 쌓아두고 끝까지 세어보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말은 얼마나 오래 혼자였던 것일까.

시의 마지막 연인데 말장난에다 정서를 얹는 스킬이 이 시인의 장기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그런 장기가 제대로 발휘된 시는 많지 않다. ‘모래‘는 표본이 아니라 예외에 가까운 시이다. 처음 세 연을 읽어 본다.

오늘은 내가 수두룩했다.
스팸 메일을 끝까지 읽었다.

난간 아래 악착같이 매달려 있는
물방울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떨어지라고 응원해주었다.

내가 키우는 담쟁이에 몇 개의 입이 있는지
처음으로 세어보았다. 담쟁이를 따라 숫자가 뒤엉켰고 나는
속고 있는 것만 같았다.

기본적으로는 언어유희적 착상에 의해 이끌어지는 시이지만 어떤 정서를 건드린다(주로 동사들이 그런 환기력을 갖는다). 시의 각 연은 모래알처럼 별다른 연관 없이, 끈끈함 없이 나열돼 있는데, 보통은 흠이 되지만 이 시는 제목이 ‘모래‘이기에 그 또한 효과적인 전략으로 간주할 수 있다. 5연에 가서, ˝깁스에 적어주는 낙서들처럼/ 아픔은 문장에게 인기가 좋았다˝는 또 얼마나 재치 있는 진술인가.

그런가 하면 너무 나이브해서 당혹스런 구절도 만나게 된다. ‘아름다움‘이란 시의 한 연이다.

이곳을 떠나본 자들은
지구가 아름다운 별이라 말했다지만
이곳에서만 살아본 나는
지옥이 여기라는 걸 증명하고 싶다.

시집 전체에서도, 그리고 ‘아름다움‘이란 시에서도 맥락을 찾기 어려운 돌발적인 진술이다. ‘포즈‘로서도 점수를 주기 어렵다.

기린이 보고 싶어서
기린을 보러 간다

기린은 보지 못하고
기린을 만든다

(...)

기린에 기린이 없어서
지구에 지구가 없어서
사람에 사람이 없어서
좋다

(...)

세계가 세계로부터 헛걸음을 한다
나는 나를 모형들과 함께 세워둔다 (‘모형‘)

전문을 다 적지는 않았지만 다 적더라도 별로 나아지지 않는 시다. 이렇게 ‘헛걸음‘ 하도록 만드는 ‘시‘까지도 시집에 포함하게 되면 시인의 역량뿐 아니라 저의까지도 의심하게 된다(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시집에는 그 흔한 해설도 붙어 있지 않은데 혹 그런 이유에서인가란 생각도 들었다. 가능성을 보여주는 시로서 ‘모래‘와 괴괴한 시들의 차이를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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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전반기의 다재다능했던 작가로 시, 소설, 희곡 모든 장르에 걸쳐 작품을 남긴 알프레드 드 뮈세의 대표 소설 <세기아의 고백>이 새 번역본으로 나왔다. 작년에 나온 것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판이고 이번에 나온 건 한국문화사의 학술명저번역총서판이다. 같은 작품의 번역본이건만 책값은 (양장본을 기준으로 해도) 두 배 이상 차이가 나서 과연 번역도 그만한 차이에 값하는지 궁금하다.

찾아보니 뮈세의 작품은 <세기아의 고백> 외에도 시선집과 희곡집이 더 나와 있다. 희곡 가운데서는 <마리안의 변덕>(연극과인간)이 눈에 띄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20세기 프랑스 희곡선‘ 시리즈에 들어가 있다. 역자는 <세기아의 고백>(한국문화사)을 옮긴 김도훈 교수로 뮈세 전공자다.

언젠가 적었는데 뮈세에 대한 관심은 레르몬토프의 <우리시대의 영웅>에 기인한다. 레르몬토프가 영향을 받은 작품 가운데 하나여서다. 기회가 닿으면 두 소설을 비교해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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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부산 인디고서점에 구입한 책들 가운데 하나는 황인숙 시인의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문학과지성사)다. 지난해 늦가을에 나왔는데 챙기지 못한 듯하다. <리스본행 야간열차>(2007)는 긴가민가하지만 분명 <자명한 산책>(2003)까지는 읽은 기억이 나는데, 알라딘의 구매내역에는 빠져 있다. 시집이야 서점에서도 구입하고 했으니 그럴 수 있는데 다시 구입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잠시 보류.

여하튼 귀경길 기찻간에서 오랜만에 황인숙 시집을 통독했다(시집은 어떤 종류의 책보다 속독하는 편이다). 여전한 의성어와 여전한 감탄사(느낌표)를 다시 확인. 그러고 보면 가면(페르소나)을 쓰지 않는 드문 시인들 가운데 한 명으로 여겨진다. 시의 화자가 곧바로 황인숙이란 뜻이다(58년생이어서 시인도 이제 우리 나이로는 예순이다. 고종석의 ‘인숙 만필‘이 떠오르는군).

해설에서 조재룡 교수가 ‘명랑과 우수‘의 세계로 명명한 황인숙의 시세계는 요즘 시로서는 희귀할 정도도 꾸밈이 없다. ˝황인숙에게는 예술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는 사실, 시의 중요성이나 고유성도 신봉하는 것 같지 않다˝는 지적은 그래서 정확하다. 그럼에도 시가 되는 게 황인숙의 시다. 시가 되거나 말거나 신경쓰지 않는 듯한 마음이 빚어낸 시들 가운데 내가 고른 한 편은 ‘세입자‘다.

내 방 지붕 위에서 비둘기들
발 구르고, 우르르 몰려다닌다
가볍도 아니한 몸으로
왔다 갔다 우르르
기왓장 다 흐트러지겠네!
밤새 굳은 몸들을 푸는 모양
아침마다 저런다

이 무례한 세입자들아!
집은 또 얼마나 너저분하게 쓸꼬, 비도로기들!(아마 나만큼이나)
나처럼 관대하고 게으른 집주인이
어디 또 있을 것 같지도 않으니
쫓아낼 수도 없고

나 또한 세입자인데
내가 또 세를 내준 걸 알면
그들이 이리 집을 망가뜨리는 걸 알면
우리 전부 쫓겨나리

적으면서 한번 더 좋은 시라고 느낀다. 꾸밈이 없어 밋밋한 시도 많은데 비하면 이 시는 확실히 재미와 넉살을 갖추고 있다. 게다가 긴장감까지도! 한 권의 시집은 이런 한 편의 시로 어엿해진다. 못다 한 사랑이 있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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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에 대한 강의로 세계일주를 하는 게 지난 10여 년간 내가 해온 일인데, 어느새 두 바퀴째 도는 상황이 되었다(안 가본 대륙도 있긴 하지만). 이번 학기 러시아문학 강의에 이어서 겨울부터는 미국문학 강의를 진행할 예정. 미국에는 가본 적이 없지만(트럼프 재임중에는 더더욱 없을 것 같다), 미국문학은 재방문이다.

강의에서 주로 다루는 미국문학은 19세기부터 20세기 전반기까지인데 작가로는 워싱턴 어빙부터 존 스타인벡까지다. 19세기와 20세기 경계에 위치한 작가가 남성작가로는 헨리 제임스, 여성작가론 이디스 워튼이다. 워튼은 그간에 한번도 다룬 적이 없었다(헨리 제임스의 경우에도 <나사의 회전>만 읽었더랬다). 이번 가을에 <순수의 시대>를 일부러 일정에 포함시켰고 겨울에는 <이선 프롬>까지 읽어볼 예정.

독서도 일종의 ‘방문‘이라 사전에 일정을 잡고 여러 가지 준비도 해야 한다. 한 작가의 (작품)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기에 마치 여행을 준비하듯 (책)짐도 싸고 미지의 세계에 대해 기대도 품다 보면 설레임마저 느끼게 된다. 이번 방문지는 1870년대 뉴욕의 상류사회다.

1921년 퓰리처상 수상작인 <순수의 시대>(1920)는 워튼 여사가 58세 발표한 작품으로 후기작에 해당한다. 순서대로 하면 <기쁨의 집>(<환락의 집>)(1905), <이선 프롬>(1911), <그 지방의 관습>(1913) 등이 그보다 앞서 발표된 작품들. 한권만 고른다면 대표작으로 <순수의 시대>를 꼽을 수밖에 없고 번역본도 가장 많이 나와 있다.

<순수의 시대>를 읽으며 책의 부피감을 느끼다 보니 이제 이디스 워튼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인가란 생각에 감회마저 생긴다. 완독한 이후에는 워튼 여사와의 면담도 진행할 예정이다. 가상의 대화이지만 벌써 기대가 된다. 한 사람과 만나는 것은 하나의 세계 전체와 만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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