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김윤식 선생의 <문학사의 라이벌 의식3>(그리비)이 출간되었다. 셋째권이라는 얘기. 저자는 서문에서 이번 책에서는 ˝주로 잡지 사이의 라이벌 관계에 주안점을 두었다˝고 밝힌다. 일제강점기의 <문장>과 <인문평론>, 그리고 1960년대의 <세대>와 <사상계>, 라이벌 문예월간지로서 <현대문학>과 <문학사상> 등이 저자가 언급한 라이벌들이다.

하지만 잡지들만 다룬 건 아니고 백철과 황순원의 논쟁, 김종삼과 김춘수의 시세계, 조지훈과 이원조의 논쟁, 이호철과 최인훈의 문학세계 등이 비교와 검토의 주제로 다루어졌다. 그나마 내가 바로 따라가볼 수 있는 건 김종삼과 김춘수의 비교 정도이지만, 다른 라이벌 관계도 흥미를 끈다. 더불어, 앞서 나온 두 권을 좀 묵혀놓았는데 ‘3종 세트‘로 잘 보이는 곳에 모아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작업을 흉내내자면 세계문학사에서도 라이벌들을 지목해볼 수 있겠다. 가령 스콧 도널드슨의 듀오그라피까지 나온 피츠제럴드와 헤밍웨이도 바로 떠올릴 수 있는 사례다(두 작가의 대표작은 이번 겨울에 20세기 전반기 미국문학을 강의하면서 다시 다루려고 한다). 러시아문학에서도 조지 스타이너의 <톨스토이냐 도스토예프스키냐> 같은 책이 있었다(모두 절판되고는 소식이 없는 책들이다). 흠,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들에 대한 강의책을 마무리지으면(내년 9월 출간예정이다) 새로 기획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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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대로 진행된다면 내년 1월 마지막주에는 일본문학기행을 떠난다. 일정을 검토중인데, 아무래도 겨울인 점을 고려하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관련 기행이 큰 비중을 갖게 될 듯하다. 사실 <설국> 이외의 작품은 강의에서 다루지 않아서 깊이 읽어볼 기회가 없었는데 문학기행 준비과정에서 챙겨보려고 한다.

가와바타에 대해서는 비교적 많은 연구가 되어 있는 편이고 연구서도 여럿 나와있다(연휴에 추가로 두어 권 주문했다). 어림에는 나쓰메 소세키와 함께 가장 많이 연구된 작가가 아닌가 싶다. 그렇더라도 일반 독자가 연구서까지 읽을 건 아니고 전체적으로 참고할 만한 소개서나 평전이 더 요긴한데 막상 그런 종류의 책은 별로 없다. 번역된 작품만 읽고 또 읽는 수밖에.

다작의 작가로 알려져 있고 적잖은 작품이 번역되기도 했지만 절판된 작품이 많다. 남은 작품들 가운데서 대표작을 고를 수밖에 없는데, 순서대로 하면 <이즈의 무희><설국><천마리 학><산소리><호수> 등이다. 이 가운데 <이즈의 무희>와 <천마리 학><호수>. 세편은 한권으로 묶여 나왔기에 간편하다. <산소리 >(웅진지식하우스)는 절판돼 아쉬운데 <잠자는 미녀>(마르케스에게 영향을 준 작품이다)와 함께 재출간 되면 좋겠다(나는 두권 모두 갖고 있지만). 거기에 추가한다면 ‘무용소설‘의 결정판이라는 <무희>(문학과지성사) 정도까지.

돌이켜보니 <이즈의 무희>와 <설국> 등은 고등학생 때 처음 읽었다. 그때는 별 감흥이 없었는데(충분히 그럴 만했다. 일본의 게이샤문화가 낯설기도 했고), 다시 생각해보면 가와바타도 청춘의 작가라기보다는 중년의 작가, 중년을 위한 작가다(러시아 작가로는 안톤 체호프가 그렇듯이). ‘하고 싶은 일‘보다 ‘하지 못한 일‘을 세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는 나이가 중년이다.

연휴를 거의 다 흘러보내고 나니 얼핏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시간‘을 보낸 것 같기도 하다. <설국>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을창고에 화재가 나 사람들이 정신이 없는 경황에도 은하수의 아름다운 별빛에 빠져드는 사내처럼 말이다.

직업이 무용평론가도 아니면서 괜스레 남의 처지를 넘겨다보았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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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가 존 키건으로부터 ˝스페인 내전에 관해 더 덧붙일 것이 잆는 책˝이란 평을 들은 앤터니 비버의 대표작 <스페인 내전>(교양인)을 읽는다. 원제가 ‘스페인을 위한 전쟁‘이다.

문학강의에서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힌 작품을 다룰 때 든든한 배후가 되어주는 책이기도 하다. 이번에 손에 든 것도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를 강의하기 위해서다(요즘 표기로는 ‘카탈루냐‘). 오웰이 정치적인 작가로 재탄생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스페인 내전의 참전 경험이었던 걸 고려하면 스페인 내전에 대한 참조는 필수적이다. 더불어 최근의 카탈루냐 사태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하다.

머리말에서 내전의 성격에 대해 저자가 압축하고 있는 대목은 전체의 그림을 그리도록 해준다.

˝지금까지 스페인 내전은 자주 좌파와 우파의 충돌로 묘사돼 왔다. 그러나 그런 설명은 지나치게 단순하며 자주 오해를 불러일으키곤 한다. 좌우의 충돌 말고도 이 전쟁에는 두 개의 갈등 축이 더 나타나는데, 하나는 국가의 중앙집권과 지역적 독립 간의 갈등이고, 다른 하나는 권위주의와 개인의 자유 간의 갈등이다.

우파 국민 진영은 소수 예외를 제외하고는 결속력이 강한 세 가지 극단적 경향이 한데 결합했기 때문에 공화 진영에 비해 훨씬 통일성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우익이었고, 중앙집권적이었으며, 권위주의적이었다. 반면에 공화 정부는 공존이 불가능하고,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는 혼란의 도가니였다. 중앙집권주의자, 공산주의자로 대표되는 권위주의자들이 지역주의자, 자유주의자들과 어지럽게 한데 뒤섞여 있었다.˝

오웰이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휘말려 들어가게 되는 것이 바로 그 혼란이었다.

스페인 내전에 관한 국내서로는 이병주의 스페인 기행문, <스페인 내전의 비극>을 꼽을 수 있다. 스페인 내전에 관한 그의 생각은 또다른 내전으로서 한국전쟁에 대한 그의 관점과 비교해보게 된다. 곁들여 그의 정치관과 문학행위를 오웰의 그것과 비교해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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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준비차 스테판 말테르의 <조지 오웰, 시대의 작가로 산다는 것>(제3의공간)을 읽다가 잠시 모파상의 <삐에르와 장>(창비)을 읽는 틈에 시야에서 놓쳤다.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여하튼 20여 분간 집안에서 찾다가 못 찾고 쉬는 중이다. 야구중계와 같이 보느라 정신이 분산된 탓인지.

<시대의 작가로 사는 것>은 고세훈 교수의 평전 <조지 오웰>(한길사)과 같이 읽고 있는데 오웰의 어린시절과 젊은시절에 대한 정보를 보충할 수 있어서 유익하다. 주로 후기 대표작인 <동물농장>과 <1984>를 위주로 강의를 해온 탓에 그의 어린시절과 초기작에 대해서는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었다. 관련서를 읽지 않은 건 아니지만 머릿속에 강의자료로 입력해놓지는 않은 것.

평전을 보니 오웰 전집은 20권 규모이고 모두 1만 쪽에 달한다. 그에 관한 책들도 수십 권에다가 학술논문만 해도 수백 편에 이르니 20세기 작가로는 거물급이라고 해야겠다. 그런 걸 고려하면 강의에서 너무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게 중요하다. 독자로서 더 중요한 건 무얼 읽느냐가 아니라 읽지 않느냐다. 읽을 책은 정말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오웰만 하더라도 어디까지 읽어야 할까? 대부분 소개된 그의 소설과 에세이만 하더라도 10여 권에 이른다. 최근에는 소설 <엽란을 날려라>(지만지)도 초역돼 나왔다(책값은 화나게 한다). 문제는 오웰만 읽는 게 아니라는 점. 당장 내주만 하더라도 10명의 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강의에서 다뤄야 한다. 비단 그런 사정이 아니더라도 인생이 길지 않다. 하는 말대로 우리는 책을 읽으려고 태어나지 않았기에(우리의 몸이 독서에 최적화되어 있다면 노안이 생길 리 없다!).

고로 시대의 작가로 산다는 것도 고되지만 그런 작가들을 뒤따라 읽으며 시대의 독자로 산다는 것도 만만치 않다. 그나저나 책은 어디에다 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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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송은 안 되지만 연휴라고 해서 주문마저 안 되는 건 아니다. 필요한 책이나 관심도서는 그때그때 주문하는데 다음주에 배송될 책 가운데 고대하는 것은 뤼디거 자프란스키의 평전 <괴테, 예술작품 같은 삶>(휴북스)이다.

지난봄에 독문학 강의를 하면서 영역본은 이미 구해놓고 번역본도 나오면 좋겠다고 바라던 책인데 예상보다 빨리 나왔다. 독문학 전공자들의 공역이어서 가능했던 듯(역자가 10여 명이다).

부제처럼 붙은 ‘예술작품 같은 삶‘은 ‘예술작품으로서 삶‘이라고도 옮겨진다. 알렉산더 네하마스의 저명한 니체 연구서의 제목이 <니체: 문학으로서 삶>(연암서가)이기도 하다. 니체가 ‘예술작품(문학)으로서의 삶‘의 모델로 생각했던 인물이 괴테이기도 하다. 괴테 자신이 전인(whole man)의 모델이기도 하고.

옛날 초등학교 본관 건물에 교육목표로 붙어 있던 ‘전인교육‘의 모델이 괴테라는 걸 알게 된 건 훨씬 나중의 일이다. 동아시아에서라면 공자 이래로 ‘성인‘이나 ‘군자‘가 인간이 도달해야 할 이념형이었다면 괴테 시대 이후 서양에서는 ‘전인‘이 된다. 이 ‘전인‘은 독일 교양주의 세례를 받은 마르크스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그가 도래할 공산주의 사회의 새로운 인간을 상상할 때도 ‘전인‘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괴테 평전 읽기는 한 거인의 평전 읽기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근대인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성취가 무엇인가를 가늠해보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계급적인 의미를 부여하자면 그것은 교양 있는 시민계급의 이상형을 재평가하는 일이다.

‘예술작품 같은 삶‘, 혹은 ‘전인적 삶‘은 우리 시대(포스트휴먼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모델이 될 수 있는지, 여전히 우리는 괴테 패러다임 안에 있는지 이제 검토해볼 수 있겠다. <괴테, 예술같은 삶>을 읽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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