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듬의 시집을 몇권 갖고 있지만 특별히 떠오르는 시가 없으므로 내게 각별한 시인은 아니다. 다만 열렬 지지자들을 거느린 시인이라는 것 정도가 내가 가진 정보. 그럼에도 <표류하는 흑발>(민음사)이라는 시집 제목이 ‘김이듬스럽다‘고 느꼈다. 그로테스크한 은유가 지배하는 세계?

서문을 대신한 시인의 말은 한 줄이다. ˝바람이 불었고 나는 움직였다˝. 역시나 뭔가를 말하면서 동시에 숨기는 게, 직접 말하기보다 돌려서 말하고 비유적으로 말하고 비틀어서 말하는 게 김이듬의 전략이고 스타일로 보인다. 거꾸로 그의 시를 읽는 건 그가 숨기려고 하거나 돌려 말하고 있는 어떤 진실과 대면하는 것일까?

갈피를 잡히지 않기 위해서 표류하는 말들 위로 떠다니다가 종점처럼 도착하게 되는 곳이 시집의 마지막 시 ‘노량진‘이다. 앞선 시집들에 실린 시 제목들을 다 살펴본 건 아니지만 이런 구체적인 지명은 김이듬 시에서 이례적이지 않을까 싶다(아, 시집에는 ‘연희동‘도 있긴 하다). ‘노량진‘은 마지막 시이면서 이 시집의 고정점(누빔점/정박점)이라 부르고 싶다. 나대로 시집에서 한편만 고른다면 ‘노량진‘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시집 전체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도 ‘노량진‘의 한 연이다.

가끔 하늘을 보지만 하늘은 나를 보지 않는다
모양은 달라졌으나 구름에는 언제나 죽은 이들과 함께 흐르려는 취지가 있다

이 대목은 ˝시체 몇 구가 하늘에 떠 있다˝는 첫 연과 호응한다. 구름을 시체에 비유하고 있는데 그렇게 시체들이 떠 있는 하늘 아래서 살아가는 일이 아름답게 그려질 리 만무하다. 시는 노량진 학원가에서 만난 두 사람의 대화 장면을 배경으로 깔고 있는데(이 정도로 선명하게 제시되는 것도 김이듬 시에서는 이례적일 거라고 짐작한다), 아마 시에서 ‘나‘와 ‘너‘는 가족 관계로 추정된다.

너는 내게 화난 사람처럼 보인다고 하고
진짜야
화나지 않았다고 나는 대답한다
너는 쓰러질 것 같아 보이는데 움츠리며 괜찮다고 한다

오답 노트를 잃어버렸어

‘오답노트‘를 잃어버렸다는 말이 나오는 걸 보면 상황은 아주 구체적이다. ‘너‘는 노량진 학원가의 재수생이고 ‘나‘는 염려차 혹은 위문차 찾아온 가족이다. 이어지는 연에서의 진술을 참고하면 ‘‘너‘는 나이가 스물넷이나 되었지만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이라는 다짐으로 입시에 도전하려 한다. ‘나‘는 그런 ‘너‘가 안쓰러우면서도 화가 치민다.

우리의 빰엔 골목길 벽보 뗀 자리처럼 진득한 자국이 있다
이 얼굴이 굳어 인상이 되고 개성이 된다고 해도
나는 이것을 팔아 피와 고기를 만들었다

인상적인 비유인데 아무튼 ‘얼굴‘ 팔아가며 어렵사리 생계를 꾸렸고 가족을 부양했다. 그 다음 연에서 ˝가끔 하늘을 보지만 하늘은 나를 보지 않는다˝는 건, 하늘이 외면한다는 뜻이니 사는 것 같지 않게 살고 있다는 뜻이겠다.

네 방의 불이 꺼지기를 기다리면서
반지하에서 자라나는 기대와 좌절의 밀도를 나는 모른다
동정하지 않는다
어깨에 손을 얹는 일 없다
너는 잘 수 없어도 나는 돌아가 잠들 것이다

정황을 추정해보면 ‘너‘는 사수 혹은 오수생으로 반지하 자취방에서 밤늦도록 몸을 상해 가며 입시공부에 매달려 있고 ‘나‘는 그런 ‘너‘가 안쓰럽고 착잡하다. 이제 마지막 연이다.

외따로 떨어지는 사람을 안도하여
나는 답을 못 썼다
그것이 정련 과정인 줄 알고 나아갔으나
마모 한계선을 넘은 바퀴는 방향을 잃는다
지난 생이 내 마지막 실감이었다는 걸 나만 모르는 것 같다

답을 못 썼다는 건, 문자 메시지 같은 것에 답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읽힌다. ‘나‘는 상황에 대해서 자못 비관적인데 ‘나‘의 인내는 임계치에 도달해 있다. ˝지난 생˝이 ˝마지막 실감˝이었다는 얘기는 ‘이번 생‘의 절망감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읽힌다.

시집의 마지막 시이기에 상징성을 갖고 있으면서 내막을 좀 드러낸 시라 시상의 추이를 따라왔는데 나로선 늦깎이 재수생 가족이 노량진에서 고생하고 있는 상황이 ˝시체 몇 구가 하늘에 떠 있다˝는 인식과 과연 알맞게 조응하고 있느냐는 의심이 든다. 많이 봐주어도 과장법 아닌가(김이듬 시는 과장법의 시인가?).

˝가끔 하늘을 보지만 하늘은 나를 보지 않는다˝고 진술할 만한 내역을 시인은 충분히 보여준 것인가? 그것이 누적된 것이라면 모를까 ‘노량진‘에서는 찾기 어럽다. ‘노량진‘이 이 시집에서 가장 읽을 만하다고(납득할 만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전적으로 공감하지는 못하는 이유다. 표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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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시에 대한 강의도 간간이 하고는 했지만 하한선은 기형도였다. 기형도 이후, 혹은 2000년대 이후 시인들에 대해서는 그 전 세대 시인들만큼 관심을 갖지 않았고 그래서 덜 읽었다. 어느샌가 생소한 시인들이 늘었고 읽지 않은 시집도 차츰 쌓였는데, 어쩌다 넘겨본 시집들에 동의할 수 있는, 공감할 수 있는 시를 발견하는 일도 드물어서 나로선 더 데면데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소설을 중심으로 한국현대문학 강의도 본격적으로 진행하게 되면서 현대시에 대한 강의도 다시 기획하게 되었다. 아마도 내년에는 일정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일정을 염두에 두면서 최근에 나온 시집들도 챙겨보고 있다. 이번주에 훑어본 건 이병률의 <바다는 잘 있습니다>(문학과지성사)와 김이듬의 <표류하는 흑발>(민음사)이다.

여유가 있다면 두 시집에 대해서 내가 지지하는것과 지지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자세히 말해볼 테지만, 그건 나중의 일로 미루고 요지만을 적는다. 내가 지지하고 공감하는 시를 더 자주 만나기 위한 계산속으로.

내가 지지하지 않는 건 안이한 포즈의 시, 근거없이 난해한 시, 가짜 감정으로 허세 부리는 시들이다. 그렇게만 적으니 누구라도 그렇지 않겠느냐 하겠다. 부분만 떼어서 읽는 게 허용된다면, <바다는 잘 있습니다>에서 집히는 대로 적는다.

만나도 모르는 사람들
몰라도 만나는 사람들 (‘사람의 재료‘)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어서 버릴 수 없습니다 (‘청춘의 기습‘)

멍이 드는 관계가 있습니다
멍이 나가는 관계가 있습니다 (‘호수‘)

등등. 내게는 심오하지도 않고 재미도 없는 구절들이다. 그와 비교한다면 내가 보기에 시집에서 가장 뛰어난 성취는 ‘내가 쓴 것‘ 같은 시다.

눈을 뜨고 잠을 잘 수는 없어
창문을 열어 두고 잠을 잤더니
어느새 나무 이파리 한 장이 들어와 내 옆에서 잠을 잔다

그날 아침
카페에 앉아 내가 쓴 시들을 펴놓고 보다가
잠시 밖엘 나갔다 왔는데
닫지 않은 문 사이로 바람이 몹시 들이쳤나 보다

들어와서 내가 본 풍경은
카페에 모인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바람에 흩어진 종이들을 주워
내 테이블 위에다 한 장 두 장 올려다 놓고 있는 모습들이었다

우리들은 금세 붉어지는 눈을
그것도 두 개나 가지고 있다니
그럼에도 볼 수 없는 것들도 있다니

사실은 내가 쓰려고 쓰는 것이 시이기보다는
쓸 수 없어서 시일 때가 있다 (‘내가 쓴 것‘)

전문을 다 옮긴 건 완벽해서다. 다른 게 찬란한 게 아니라 이런 시들이 찬란하다. 한데 역설적인 건, 이 시가 묘사하는 풍경이다. 시인의 시보다 더 시답고 찬란한 건 시를 둘러싼 풍경, 구체적으론 바람에 날린 종이들을 카페 사람들이 주워서 테이블에 올려놓는 장면이다. 그걸 보고서 눈시울이 붉어진 시인 자신의 모습이다.

‘내가 쓴 것‘에서 힌트를 얻자면 <바다는 잘 있습니다>에는 ˝쓰려고 쓰는 것˝과 ˝쓸 수 없는 것˝이 섞여 있다. 이병률은 시를 쓰려고 할 때가 아니라 시를 쓸 수 없을 때 시인이 된다. 시인으로 포즈를 잡을 때가 아니라 스스로 벌레 같다고 느낄 때 시인이 된다(‘비를 피하려고‘). 곧 시의 포즈를 취할 때 그의 시는 시답잖고 시의 바깥에 있을 때 그의 시는 오히려 빛난다.

독자로서 나의 계산속은 ‘내가 쓴 것‘ 같은 시를 더 읽고 싶다는 것. 그런데 그건 시인에게만 부탁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한 편의 시가 되기 위해서는 한 잎의 이파리부터 생각 없는 바람과 카페에 모인 사람들까지 다 동원되어야 하겠기에.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시를 ‘마음속 혼잣말‘에 비유했는데 영문을 모르고 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시는 그 혼자만 쓴 게 아니어서 비로소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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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작가 예브게니 자먀틴(자먀친/자먀찐)의 <우리들>에 대한 오웰의 서평 제목이 ‘자유와 행복‘이다. 오웰 산문선으로 나온 <영국식 살인의 쇠퇴>(은행나무)에 들어 있는 걸로 처음 읽었는데, 이번에 강의차 펼쳐든 <동물농장>(민음사)에도 부록으로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와 함께 포함돼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곧 두 종의 ‘자유와 행복‘을 우리는 갖고 있는 셈이다.

두 번역을 비교하고 오웰 자신의 착오를 포함해 몇가지 교정사항을 적으려 하는데 막상 시작하려니 예전과 같지 않게 ‘전투력‘이 충전되지 않는다. 다른 일도 많은데 고작 교정일이냐는 생각도 들면서. 그래서 일의 규모를 축소하기로 했다(번역에 대한 지적은 생략하기로). 핵심을 먼저 말하자면 ‘자유와 행복‘은 <동물농장>보다는 <1984>를 이해하는 데 훨씬 더 중요하고 요긴한 글이라는 것. 이 서평은 1946년 초에 발표되는데 이는 <동물농장>을 발표한 다음이고 <1984>(1949)에 대한 구상을 진행할 즈음이다.

자먀틴의 <우리들>은 당시 러시아(소련)에서는 출간이 금지된 상태였고 가장 먼저 나온 판본으로 영어판이 미국에서 1924년에, 그리고 1927년에는 러시아어판이 체코에서 나온다(러시아에서는 1988년에 가서야 공식 출간된다). 러시아 문학사가 글렙 스트루베의 책에서 <우리들>의 존재를 알게 된 오웰은 백방으로 수소문하지만 영어판은 구하지 못하고 대신에 불어판을 손에 넣는다. 그러니까 이 서평의 대본은 불어판 <우리들>이고 오웰은 말미에 영어판이 다시 나오길 바란다고 적는다.

오웰은 <우리들>이 1923년에 쓰인 걸로 보는데 그건 영어판이 1924년에 나온 걸 근거로 한 추산에 불과하며 실제론 1920년에 완성되었다. 러시아혁명기에 3년은 상당한 차이를 내포하기에 집필 시점은 작품 해석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더불어 소설의 배경이 26세기라고 소개하는데 29세기를 잘못 본 것 같다(먼 미래라는 게 포인트이므로 26세기나 29세기나 의미 있는 차이는 아니지만).

오웰이 가장 먼저 지적하는 건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도정일 교수는 ‘용감한 신세계‘라고 옮겼다)가 <우리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두 소설의 분위기도 서로 유사하고 두 작품에 묘사된 사회도 대체로 동일한 성질의 것이다.˝ 일종의 고자질로도 읽히는데 조만간 오웰은 <멋진 신세계>보다 훨씬 더 흡사한 소설을 쓰게 될 것이다(비교적 최근에 알게 된 것이지만 헉슬리는 오웰이 다닌 이튼학교의 불어 교사로 재직했었다. 실제로 오웰이 헉슬리의 수업을 들었으니 둘은 사제지간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미 언급한 대로 <1984>를 읽은(읽으려는) 독자라면 자먀틴의 <우리들>과 그에 대한 오웰의 서평 ‘자유와 행복‘도 필히 참고할 필요가 있다. 깊이 읽기를 원한다면 그렇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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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픽션인가 싶었는데 소설이다. 개브리얼 제빈의 <섬에 있는 서점>(루페). 제목에서 내가 떠올린 건 섬에 있는 서점 탐방기. 그래도 실제로 섬에 있는 서점이 등장하고 소설은 그 주인장 이야기다. 원제가 ‘A.J. 피크리의 인생 이야기‘.

˝미국 독립서점 연합 베스트 1위, 미국 도서관 사서 추천 1위, 뉴욕타임스, 아마존 장기 베스트셀러. 섬에 있는 작은 서점을 배경으로 책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그린 소설. 잔잔한 이야기와 감동을 담은 작품임에도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서점 주인 이야기는 서점 이야기이기도 해서 서점연합 베스트1위라는 랭킹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게다가 도서관 사서들에게도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소설이라는건데, 거기에 초첨을 맞춘 듯 번역판 추천사는 ‘책 쫌 파는‘ 전국 서점의 대표와 매니저가 썼다.

서점 관계자는 아니지만 관련자는 되는 터라 자연스레 이 소설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찾아보니 제빈의 소설은 앞서 두권이 더 번역됐었는데 별로 재미를 보지 못하고 일찍이 절판된 상태다.<섬에 있는 서점>이 괜찮으면 구해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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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발견이자 이주의 발견은 알렉시 제니의 <프랑스식 전쟁술>(문학과지성사). 발견에서 주문까지 일분도 걸리지 않는 소설. 그냥 제목만으로도 그렇다. 어떤 작품일까 꿈꾸게 하기 때문에. 게다가 무려 공쿠르상 수상작.

˝프랑스가 현대사에서 수행했던 전쟁의 부당함을 묘사하고, 식민주의 전쟁에서 저지른 야만적 행위에 대한 신랄한 고발을 담은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던 1940년대부터 인도차이나 전쟁과 알제리 전쟁, 현재의 화자 ‘나‘가 바라보는 걸프전과 2005년 리옹 폭동까지 다루고 있어, 1940년대부터 오늘까지의 프랑스를 그려낸 ‘거대한 벽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800쪽이 넘는 번역본 분량도 마음에 든다. 영역본도 나와 있어서 같이 주문할 예정이다. 더불어 이번주에는 노서경의 <알제리 전쟁 1954-1962>(문학동네)도 출간돼 좋은 짝으로 읽을 수 있겠다. 그래, 내일 손에 들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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