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시리즈의 하나로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현대문학, 2017)가 두 권으로 묶여서 나왔다. 대표 단편 30편이 두 권으로 갈무리된 것인데, <위대한 개츠비> 등 5편의 장편소설로 유명하지만, 피츠제럴드는 160여 편의 단편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당대에는 장편보다 단편이 훨씬 더 수입이 좋았기에 돈벌이를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한데 헤밍웨이 단편과는 달리 피츠제럴드의 단편에 대한 문학사의 평가는 박한 편이어서 30편 가량만 읽어줄 만한 것으로 친다. 나머지는 재능의 낭비 사례. 피츠제럴드 단편 전집은 별 의미가 없다는 얘기다. 



이번에 나온 현대문학판을 비롯하여 국내에 소개된 피츠제럴드 단편선이 대개 30편 가량을 묶고 있다. 구체적인 목록은 대조해봐야겠지만 거의 대동소이할 것으로 보인다. 



현대문학판은 번역가를 겸하고 있는 소설가 하창수의 번역이고,민음사의 <피츠제럴드 단편선1,2>는 김욱동 교수의 번역이다. 



세계문학전집판의 또다른 선택지는 펭귄클래식인데, <아가씨와 철학자>와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두 권이 나와 있고, 20편 가량의 중단편을 수록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피츠제럴드 작품의 붐을 가져온 건 전적으로 영화화된 두 작품, <위대한 개츠비>와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덕분인 것 같다. 피츠제럴드 자신이, 이번에도 돈벌이를 위해서였지만, 영화계일에 관여하기도 했으니 자연스럽게도 보인다.    


겨울학기에 미국문학 강의를 진행하면서 (분량을 고려해) 첫 단편집 <아가씨와 철학자>를 다룰 예정인데, 겸사겸사 대표 단편들을 일독해보면 좋겠다. 번역된 작품집을 모두 갖고 있으니 시간만 내면 되는 일이다...


17.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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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저명한 일본 전문가 도널드 킨의 대표작 <메이지라는 시대>(서커스)가 재출간되었다. 당초 <메이지 천황>이란 제목으로 나왔던 책으로 영어판 원제는 <일본의 황제: 메이지와 그의 세계>다.

˝일본문학 연구가 도널드 킨의 <메이지라는 시대>. 일본 유신의 주도 세력들이 어떻게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추구해 나갔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무수한 시행착오와 오류들을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흥미롭게 이야기한다. 방대한 자료를 기초로 하고 일본의 문화, 예술에 정통한 서구인의 시각으로 비서구 세계에 속한 일본의 근대화 경험을 객관적이고도 균형 잡힌 필치로 생생히 그려냈다.˝

내년 1월 일본문학기행을 준비하면서 이러저러하게 읽을 책이 많은데, 엎친 데 덮친 격이 되긴 했지만 도널드 킨의 책도 빼놓을 수 없겠다. 절판된 책의 중고본을 구하러고도 했는데 마침 재간본이 나와 다행스럽다. 분량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적당히 추려서 읽어도 되겠다. 내친 김에 영어판도 주문했다.

올겨울에는 일본계 작가인 가즈오 이시구로와 무라카미 하루키 강의도 진행할 예정이어서 여러 가지로 일본문학과 가까이 지내게 될 듯싶다. 참고로 일본문학기행에서 주된 탐방 대상 작가는 나쓰메 소세키와 가와바타 야스나리, 그리고 다자이 오사무이다. 국내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20세기 전반기 작가들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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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공지다. 롯데문화센터의 요청에 따라 11월 18일(토) 오후(15시 40분-17시 10분)에 '하루키는 왜 읽히는가'를 주제로 강의를 진행한다(신청은 롯데문화센터 홈피를 통해서 하실 수 있다). 강의는 주로 올여름에 나온 최신작 <기시단장 죽이기>(문학동네)를 중심으로하루키 문학의 매력과 대중성의 기원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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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라국제도서관의 ‘조지 오웰 다시 읽기‘ 강좌의 마지막 일정으로 명동예술극장에서 연극 ‘1984‘를 관람하고 뒤풀이 강의까지 가졌다. 이번주에 개정판으로 다시 나온 박홍규 교수의 <조지 오웰>(푸른들녘)도 겸사겸사 다시 읽었다. 초판보다 많이 증보된 거 아닌가 싶다(30여 쪽 늘어났다).

오웰은 <1984>를 1946년 8월부터 집필하기 시작해서 이듬해 10월에 초고를 완성하는데, 초고의 제목은 ‘유럽 최후의 남자‘였다. 물론 주인고 윈스턴 스미스를 가리키는 제목이다. 제목이 바뀌는 건 1948년 7월에 제2고를 쓰면서부터인데 이 원고를 11월에 완성하고 무리하게 스스로 타이핑해서 12월에 출판사로 넘긴다. 제목이 ‘유럽 최후의 남자‘로 남았다면 우리의 독후감도 사뭇 달라졌겠다.

오웰이 <1984>를 집필한 곳은 스코틀랜드 서쪽 해안 끝자락에 있는 주라 섬이다. 그곳 반힐의 저택에서 초고와 2고를 모두 쓰기에 ‘오웰 문학기행‘을 간다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당장은 상상의 문학기행이다). 얼마전에 찾아본 저택 사진이 박홍규 교수에 책에도 실려 있기에 나도 옮겨 놓는다. ‘유럽 최후의 남자‘가 탄생한 곳이다(‘The Last Man in Europe‘는 ‘유럽 최후의 인간‘으로도 번역된다. 작품에서는 후자의 뉘앙스다).

˝<1984>는 영국과 미국에서 1948년 6월에 거의 동시에 간행되었다˝고 박홍규 교수는 적고 있는데 착오이다. 책은 1949년 6월에 출간되었다. 그해 가을에 건강이 악화된 오웰은 10월 13일 소냐 브라우넬(소냐 오웰이 된다)과 결혼한다. 두번째 결혼이었고 두 사람은 15살 차이였다. 소냐가 중요한 것은 <1984>의 여주인공 줄리아의 모델로 알려지기 때문이다.

오웰은 그로부터 석달 뒤인(박홍규 교수는 ˝두 달 뒤˝라고 잘못 적었다) 1950년 1월 21일 숨을 거둔다(박홍규 교수의 책에는 묘비명을 옮기며 ˝1950년 1월 25일 죽다˝로 날짜를 잘못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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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어제 읽은 시집. 한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서 예비식량처럼 한권 더 챙겨간 시집이 최지인의 첫 시집 <나는 벽에 붙어 잤다>(민음사)다(두 권의 첫 시집을 읽었군). 임솔아의 시집처럼 내가 읽을 수 있는 시와 읽을 수 없는 시로 금세 나뉘었다.

요즘 시집들을 읽으며 느끼는 것인데 보통은 앞부분에 실린 시들이 괜찮고 뒤로 갈수록 좀 부실해진다. 첫 시집의 경우에는 습작기 작품들이 들어가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대표시는 대개 표제시인 경우가 많다. 시인이나 편집자도 내세울 만한 시가 뭔지는 아는 것이다.

최지인의 경우도 그런데(이름만으론 여자인 줄 알았다) ‘나는 벽에 붙어 잤다‘란 제목은 ‘비정규‘란 제목에서 가져왔고 이 시집은 이 한 편으로 구제받은 느낌이다. 이 시를 시집에 실린 시들 가운데 나중에 쓴 것이라면 시인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고 먼저 쓴 것이라면 답보중이라는 뜻도 된다. 나머지 상당수의 시들은 ‘연습‘으로 읽힌다.

아버지와 둘이 살았다
잠잘 때 조금만 움직이면
아버지 살이 닿았다
나는 벽에 붙어 잤다

아버지가 출근하니 물으시면
늘 오늘도 늦을 거라고 말했다 나는
골목을 쏘다니는 내내
뒤를 돌아봤다

아버지는 가양동 현장에서 일하셨다
오함마로 벽을 부수는 일 따위를 하셨다
세상에는 벽이 많았고
아버지는 쉴 틈이 없었다

아버지께 당신의 귀가 시간을 여쭤본 이유는
날이 추워진 탓이었다 골목은
언젠가 막다른 길로 이어졌고
나는 아버지보다 늦어야 했으니까

아버지는 내가 얼마나 버는지 궁금해하셨다

배를 곯다 집에 들어가면
현관문을 보며 밥을 먹었다
어쩐 일이니 라고 물으시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외근이라고 말씀드리면 믿으실까
거짓말이 아니니까 나는 체하지 않도록
누런 밥알을 오래 씹었다

그리고 저녁이 될 때까지 계속 걸었다

‘비정규‘의 전문이다. 다 적을 만하니까 다 적은 것이다. 비정규 청년(사실은 비정규직도 아닌 청년)의 일상과 속내가 이보다 선명하게, 그리고 압축적으로 드러난 시도 없을 것이다. 최지인의 시를 떠받치는 건 이 시에서 묘사된 경험과 정서다. 이 핵심이 얼만큼 들어가 있느냐는 배합비율에 따라서 시의 농도(질)가 결정된다. ‘비정규‘가 대표시인 것은 가장 높은 순도를 자랑하기 때문이고 다른 시들이 이에 못 미치는 것은 물을 많이 탔기 때문이다(비정규가 아니라 시인 흉내를 낼 때 그의 시는 묽어진다).

가령 궁색한 신혼살림을 묘사한 ‘개와 돼지의 시간‘의 마지막 연은 이렇다.

좁은 화장실에서 우리
깨끗이 목욕하고
밥을 먹고
밥을 먹고
잤다
아무도 구할 수 없었지만

아무도 구하지 뭇한, 아니 시로서 자기 건사도 하지 못한 시들이 시집에는 널려 있다. 가장의 열패감을 노래한 ‘언더독‘에서도 안쓰러운 장면은 반복된다.

내심 내가 사라졌으면 했다
우리 서로 아프게 하고

테이블에 남은 술과 얼음
옆방에선
누군가 스스로 목을

그런
삶들
피붙이들

이 정도면 시의 소실점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정서는 있지만 시는 그것이 ‘표현‘되어야 한다. ‘비정규‘에서 ‘잘 표현된 불행‘(황현산)을 읽을 수 있었다면 나는 다른 시들에서는 그러지 못했다(예컨대 ‘가양동 현장‘과 ‘오함마‘가 다른 시들에는 빠져있다). 내 탓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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