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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빈은 작가와 화가들의 도시이지만 철학자의 도시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20세기 간판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빈 출신이고 그를 따르는 비엔나학파의 본거지도 물론 빈이다. <푸코, 비트겐슈타인>이란 제목의 신간을 보면서 떠올린 생각인데, 빈은 문학기행이나 예술기행뿐 아니라 철학기행의 경유지여도 좋겠다는 것.

언젠가 다시 빈을 찾게 된다면 비트겐슈타인의 자취도 찾아보고 싶다. 평전을 포함해 예습에 필요한 책들도 나와있으니 참고할 수 있겠다. 그런 여행이라면 나도 가이드를 따라다니며 설명을 듣는 처지가 좋겠다. 푸코에게 공정하자면 푸코 철학기행도 시도해볼 수 있을까? 스웨덴의 웁살라대학 견학을 포함한 여행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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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가보지 않았지만 망원동의 서점 ‘어쩌다책방‘에서는 매달 이달의 작가 추천책으로 전시회를 꾸민다. 9월의 작가로 초청돼 고전문학 20권에 대한 추천사를 썼고(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부터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까지) 이달말까지 전시가 진행되는 중이다. <너의 운명으로 달아나라>의 북커버도 사은품으로 증정한다고. 조만간 들러봐야겠다. 사진은 마음산책 블로그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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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 문득 생각이 나서 주문하고 저녁에 받은 책은 마광수의 유작 소설집 <추억마저 지우랴>(어문학사)다. 음란물 판정을 받아 출금된 대표작(?) <즐거운 사라>를 구할 수가 없으므로 대체할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하다가 <2013 즐거운 사라>(책읽는귀족)도 같이 주문했는데 이건 일종의 대표 장면 변주 앤솔로지다(이런 장르도 있나?). 저자의 말에 판금해제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 한다.

‘마광수 교수‘에 대한 기억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대학가(연대 강의실)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는 그의 강의가 한 잡지에 소개된 걸 초겨울 어느 서점에서 읽었다. 그의 에세이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가 나온 게 1989년으로 돼 있어서 1989년 겨울이 아닌가도 싶지만 내 기억은 1987년 겨울과 마광수를 겹쳐놓는다.

아무튼 그 이후에 마광수 문학론에 해당하는 책들을 두루 읽었고 단행본으로 나온 윤동주에 대한 박사학위논문도 읽었다. 문학론 가운데서는 얇지만 <상징시학> 같은 책이 유익하다고 생각했다. 내게 그의 시나 소설은 문학론이나 에세이보다 수준이 떨어져 보였다. 아마도 사법적 처벌이 아니었다면 그냥 유야무야 끝나지 않았을까 싶은데 사법적 탄압을 받으면서 오히려 마광수는 표현의 자유와 성해방을 외치는 투사의 이미지를 덮어쓰게 되었다. 작가로서 가장 큰 문제는 빈곤한 상상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법부의 상상력은 그에도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언젠가 희대의 해프닝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광수 교수의 부고 기사를 읽은 건 프라하 성 투어를 하던 날이었다. 고인에 대한 평가에 인색한 편이지만 마지막 유작 정도는 읽어보고 싶었다. 사람을 잘못 보듯이 작품도 잘못 읽을 수가 있으니까. 설사 크게 틀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추억은 추억 자체로 기억될 권리를 갖는다. 내게 마광수는 30년 전 잡지속에서 본 자신만만한 젊은 문학교수로 남아 있다. 시무룩하고 우울한, 전혀 즐겁지 않은 표정의 은퇴한 노교수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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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부터 한국문학 강의도 세계문학 강의와 병행하고 있는데, 근대문학의 주요 작가들을 한두 차례씩 다루었고 현대문학도 주요작이나 화제작 중심으로 훑어보고 있다. 다시 읽은 작품도 있고, 묵혀 두었던 걸 비로소 읽은 경우도 있다. 강의를 위해서 관련 논문과 연구서는 물론 여러 종의 문학사도 참고하는데, 장석주의 <20세기 한국문학의 탐험>(전5권, 시공사)도 그러한 참고도서의 하나였다(한권이 절판된 탓에 중고로 구한 기억이 있다). 이번에 새로 나온 <장석주가 새로 쓴 한국 근현대문학사>(학교도서관저널, 2017)은 그 압축 개정판이다.

 

 

 

단권인 까닭에 <나는 문학이다>(나무이야기, 2011)의 개정판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저자가 서문에서 <20세기 한국문학의 탐험>이 모태가 되었다고 밝혔다. 이번 책의 부제가 '이광수에서 한강까지 한국문학 100년의 탐험'인 것은 이 때문인 듯싶다. 저자의 또다른 문학사 관련서로는 <이상과 모던뽀이들>(현암사, 2011)도 있다.

 

 

 

 

분량이 700쪽에 이르지만 문학사 100년을, 그것도 모든 시, 소설, 희곡을 망라하여 주요 작가들 위주로 다루다 보니 말 그대로 '압축판'이다. 시대별 흐름에 대한 개요가 장별로 포함되어 있지만 분량상으로는 '작가사전'으로 활용하는 게 가장 알맞은 책이다. 다시, <나는 문학이다>가 떠오르는군.

 

 

 

'한국문학 100년의 탐험'이라고 했지만, 정확하게는 100년이 넘는 시기를 다룬다. 근대문학의 첫 장이 1894년부터 시작된 걸로 보았기 때문이다(작가는 이광수부터다). 그리고 마지막 장은 2000년까지인데, 그런 면에서는 1896년에서 2000년까지를 다룬 권영민의 <한국현대문학사>(민음사)와 겹쳐 읽을 수 있다. 2000년대 이후 작가로는 편혜영과 백가흠을 간략하게 언급했다.

 

 

 

나도 근현대 소설가들을 다루다 보니 이들 문학사 외에 몇 권의 소설사도 기본 공구서로 갖춰놓고 있다. 문학사에 대한 책을 쓰기는 어렵겠지만 주요 작가나 작품론 성격의 책을 내려고 기획중이다. 빠르면 아마 내년쯤에는 책이 나올 수 있다. 인생의 사계에 견주면 이제 10-15년은 수확의 계절이라 바짝 부지런을 떨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 보니 <장석주가 새로 쓴 한국 근현대문학사>도 저자에게는 그런 의미를 갖는 책이겠다.

 

덧붙여, 유발 하라리의 책을 연이어 읽은 탓인지 100년이란 시간이 그닥 길어 보이지 않는다. 그 100년 이전에는 근현대문학이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뜻이니까. 하기에 올해가 <무정>이 발표된 지 100년이다. <무정>에 관한 강의를 여러 곳에서 진행하다 보니 더 가깝게도 느껴진다. 하물며 진화사에 견주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사나 문화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엄청난 변화의 세기이기도 했다. 한국 근현대문학은 그 변화의 기록이자 증언으로서 의미가 있다...

 

17. 0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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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더위가 한창이라고 하지만, 그리고 늦더위라는 복병이 언제든 덮쳐올지 모르지만, 말복도 지나면서 더위도 한풀 꺾인 듯싶다. 실내온도도 28도를 유지하고 있고 27도로 내려가기도 한다(내가 느끼는 체감더위는 29도부터라는 걸 알겠다). 그 정도는 선풍기로도 버텨낼 수 있는 더위다. 좀 덜 덥게 느껴지는 건 강의 일정도 조금 줄어든 때문인지도 모른다. 분기별 강의들이 마무리되면서 심리적으로는 한결 여유가 생겼다. 지난 계절을 되돌아보고 다음 계절, 심지어 내년 강의 일정에 대해서까지 생각이 미친다는 게 여유의 증거다. 더불어 제목에 '인생'이 들어간 책들을 책상머리에 놓은 것도.

 

 

 

길게는 20년 동안, 짧게 잡아도 10년 넘게 러시아문학과 세계문학을 강의해왔는데, 그 가운데서도 지난 몇 년간이 나로선 전환기에 해당한다. 세계문학 전반에 대해 좀더 체계적인 계획하에 강의를 진행해왔기 때문이다. 19세기 영국문학을 필두로 하여 프랑스, 스페인, 독일문학을 차례로 일주했고, 그 사이에 일본문학과 중국문학, 그리고 한국 근대문학과 여성문학까지 다루었다(이 가운데 몇몇 강의가 책으로 묶였고 또 내년까지 몇 권 더 출간될 예정이다). 서양 근대문학 일주가 일차적인 목표였는데, 남은 여정 중의 하나가 미국문학이어서 내년 봄에는 19세기 미국문학을 읽을 예정이고(호손의 <주홍글자>와 멜빌의 <모비딕> 등은 이미 강의에서 여러 번 다루었다), 아마 20세기 미국 작가들도 더러 다룰 예정이다(피츠제럴드와 헤밍웨이, 포크너는 대표작들을 다룬 바 있다. 이들 외 대표 작가들을 읽으려고 한다). 가령 코맥 매카시와 필립 로스처럼 국내에 작품이 다수 번역돼 있는 작가들이 일차적인 고려 대상이다(많이 소개된 걸로는 폴 오스터도 못지않군).    

 

 

 

최근 '영화속의 문학'에서 매카시와 로스의 소설을 맛보기로 두편씩 읽었는데, 좀더 관심이 가는 쪽은 로스다(매카시는 영화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기에). 1950년대와 60년대를 다루고 있는 두 작품이 주로 로스의 고향을 배경으로 당시 시대상과 사회상을 실감나게 재현하고 있다는 점이 일단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추가하자면 두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아마도 로스의 모든 작품을 관통하고 있을 법한) 분노의 정서가 흥미를 끌었다. 제목을 갖다 쓰자면 내게 로스는 '울분의 작가'다. <울분>은 2008년작인데, 195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로스는 1933년생이다) 75살의 나이에 쓴다는 것도 놀라웠다(젊은 시절에 써둔 작품이 아니라면). 한국전쟁 시기가 배경이고 주인공이 결국 한국전쟁에서 전사하는 걸로 나온다는 점은 부가적인 흥미거리고.

 

 

 

로스의 작품으로는 <미국의 목가>와 함께 '미국 3부작'을 구성하는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와 <휴먼 스테인>을 내년에 적당한 시기에 강의에서 다룰 계획이고, 초기작과 후기작 가운데 몇 편을 추가하려고 한다. 미국의 현대문학을 다루려니 '미국 3부작'은 필수코스일 수밖에 없기도 하고.  

 

 

 

1950년대가 로스의 청춘시절이자 그의 문학의 밑자리라고 생각하니까 자연스레 '비트세대'가 떠올랐다. 더불어 비트세대의 대표 시인 앨런 긴즈버그도. 그래서 주문하고 어제 받은 책들이 앨런 긴즈버그의 시집들이다. <울부짖음과 그리고 또 다른 시들>(1984, 2017)이 뜻밖에도 눈에 띄어서인데(출판사가 '1984'다), 시집이어서 원서도 같이 구했다. 대표작 '울부짖음'(1956)은 창비에서 나온 미국 대표시선 <가지 않은 길>에도 들어 있는데, 시 번역이라 아무래도 많이 다를 수밖에 없어서 나중에 어떤 것을 표준을 삼을지는 생각해봐야겠다.

 

 

 

20세기 미국의 대표시인이라면 대표시선의 표제시이기도 한 '가지 않은 길'의 로버트 프로스트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거기에 또 다른 목소리로 긴즈버그를 넣어도 좋겠다. 시라기보다는 '울부짖음'을. 19세기 미국의 국민시인이라 할 월트 휘트먼의 '나의 노래'('나 자신의 노래')가 긴즈버그의 '울부짖음'으로 이행하는 과정도 미국문학의 관전 포인트라고 생각된다...

 

미국문학을 다룬 이후에는 이탈리아문학과 터키문학, 아프리카문학 등이 문학기행의 후보다. 10년쯤 전에 읽은 단테의 <신곡>을 다시 읽게 될 수도 있다. 인생의 반고비를 넘다 보니 이젠 다시 읽는 책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다시 읽어야 하는 책들을 다시 읽는 거라고 위안을 삼지만, 아주 신나는 일은 아니군...

 

17. 08. 12.

 

 

 

P.S. 필립 로스 얘기도 적은 김에, <미국의 목가>에 나오는 사소한 오역도 지적한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어서 눈에 띈 것인데, "이반 일리치는 궁정의 고위 관리로"(1권 55쪽)에서 '궁정'은 '고등법원(high court)'을 잘못 본 것이다. 몇 줄 내려가지 않아서 "이 재판장"이라는 표현도 나오듯이 톨스토이 소설의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고등법원의 판사다. 톨스토이의 소설이라고 하니까 역자가 자동적으로 '궁정'을 떠올린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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