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강의를 마치고 올라가는 길이다. 두 주 전보다 가을은 더 완연하여 곧 가을이길 그만두는 일만 남은 듯하다. 한창 떨어지는 낙엽들이(이건 중복표현이군) 다 지고 나면 찬 바람이 불 터이다.

시집을 몇권 가방에 넣어왔는데(솔직히 말하자. 가벼운 게 시집의 매력이라고) 내려가는 동안에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비몽사몽중에 읽었다. 그래도 시집이었기에 한권은 다 읽을 수 있었는데 이병률의 두번째 시집 <바람의 사생활>(창비)이다. 2006년에 1쇄가 나왔고 내가 읽은 건 올봄에 나온 20쇄다. 스테디셀러 시집.

사실은 전에 읽은 것 같은 기시감을 느꼈다. ‘겹‘ 같은 시가 그러한데 알라딘의 구매내역에 없어서 그냥 또 구입했다(전에 읽었다면 서점에서 구입했는지도. 아마 진득하게 읽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읽고 나서 맘에 드는 네댓 편의 시를 고르니, 해설을 쓴 신형철 평론가와는 공통되는 게 없고 뒤표지에 추천사를 김훈 작가와 오히려 겹치는 게 있었다. 김훈은 ‘별의 각질‘ ‘거인고래‘ ‘겹‘ ‘나비의 겨울‘ ‘외면‘ 같은 시들을 ˝아껴서 읽은 시˝로 꼽았는데 ‘겹‘과 ‘나비의 겨울‘ ‘외면‘은 나도 주저 없이 좋은 시로 치켜세울 수 있다. 덕분에 내가 어떤 시들에 반응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해설에서 신형철은 이병률을 ‘이별의 유전자‘를 가진 시인으로, 헤어짐을 짓는 시인으로 규정하는데, 시인의 사랑이야기나 작별이야기에 나로선 무심한 편이라 별로 끌리지 않았다. 가령 첫 시 ‘봉인된 지도‘에서

지구와 달의 거리가 가까워 달이 커 보였을 때
일년은 오백일이었고 하루는 열여섯 시간이었을 때
당신은 나를 데리러 왔다
신과의 약속을 발설할 것 같지 않던 당신은
지금 그 시절우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백스물 아흔 여든두 살 쭈글쭈글한 얼굴로 돌아가자 말했다
허나 내가 지켜야 할 약속은
검고 고요한 저 소실점을 향해 가는 일

이라고 적어 나가자 신형철은 ˝슬픔에도 스케일이 있다면 이것은 대규모다˝라고 호응한다. 이어서 자세한 시간계산까지 해가며 30억년을 살아온 시적 화자의 ‘지독한 마음‘을 읽어내는데, 설사 그게 말이 된다 하더라도 내게는 그냥 말의 수작으로 보인다. 심오한 수작도 수작은 수작이다.

대신 더 마음이 가는 시는 바로 뒤에 이어지는 ‘나비의 겨울‘ 같은 시다.

누군가 내 집에 다녀갔다
화초에 물이 흥건하고 밥 지우 냄새 생생하다
사흘 동안 동해 태백 갔다가
제천 들러 이틀 더 있다 왔는데
누군가 내 집에 다녀갔다

이런 어법을 구사할 때 이병률은 시인 모드로 진입하는 것 같다. 그닥 심오하지도 않고 대단한 트릭을 구사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어떤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시인이 즐겨쓰는 표현으로 감정을 민다(아, 감정을 밀고 당기고 하는 게 시인의 일인 게다!). 마지막 연이다.

누군가 내 집에 불을 놓았다
누군가 내 집에서 불을 끄고 아닌 척 그 자리에 다시 얼음을 놓았다
누군가 빈집에서 머리를 풀어 초를 켜고 문고리에 얼굴을 기댔다

그렇게 부재하는 누군가를 때론 누군지도 모르면서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떠나보내고 하는 일이 시인의 일이자 그의 시다. 그렇지만 내가 좋아하는 시는 막연한 누군가를 혹은 막연하게만 지칭하는 누군가를 호명하고 소환하는 시가 아니라 구체적인 누군가를 지목하고 상기하는 시다. ‘겹‘과 ‘외면‘이 그러하다.

나에겐 쉰이 넘우 형이 하나 있다
그가 사촌인지 육촌인지 혹은 그 이상인지 모른다

태백 어디쯤에서, 봉화 어디쯤에서 돌이갈 차비가 없다며
돈을 부치라고 하면 나에게 돌아오지도 않을 형에게
삼만원도 부치고 오만원도 부친다 (‘겹‘)

받을 돈이 있다는 친구를 따라 기차를 탔다 눈이 내려 철길은 지워지고 없었다

친구가 순댓국집으로 들어간 사이 나는 밖에서 눈을 맞았다 무슨 돈이기에 문산까지 받으러 와야 했냐고 묻는 것도 잊었다 (‘외면‘)

각 시의 서두다. 여기엔 심오함도 없고, 별다른 과장도 특별한 비유도 없다. 그런데 시가 있다(물론 시가 되는 건 인용하지 않은 부분까지 포함해서 이야기가 완성될 때이지만 이런 서두만으로도 충분히 시적이다. 시에 대한 예감을 갖기에 부족하지 않다).

‘외면‘의 상황은 받을 돈을 받으러 시골(문산) 순댓국집까지 친구와 동행해서 갔다가 몸이 불편한 국밥집 부부가 차려준 밥상으로 식사한 다음에 ˝받지 않겠다는 돈을 한사코 식탁 위에 올려놓고˝ 그 집을 나서며 눈발을 맞았다는 것이다. 이 상황을 간결하면서도 절묘하게 장면화하고 있는 게 ‘외면‘이란 시다.

이런 사례를 보건대 이병률은 속마음이나 감정을 끄집어낼 때가 아니라 사람이 부대끼는 상황을 요약하거나 묘사할 때 강점을 보인다. 아니 각자의 취향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말하자면 나는 그가 그런 시를 쓸 때 가장 잘 쓴다고 생각한다(˝친구가 순댓국집으로 들어간 사이˝를 시적 순간으로 포착하는 시를 나는 얼마나 사랑하는 것인지!).

신형철도 김훈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아무도 모른다‘ 같은 시도 나는 같은 맥락에서 지지한다. 현관문을 잠그는 버릇이 없어서 때로는 치매 노인의 방문을 받기도 한다고 적은 후에 ˝기계 공부를 많이 했다는 이˝에게 ‘하나의 값‘이라는 말을 듣고서 그에 대한 명상을 펼치는 게 시의 정황이다. 마지막 두 연.

세상 모든 의문에 하나의 값이 가능할까 몰라
그 하나의 값을 갖지 못하는 일은 더 쉬울지도 몰라

이를테면 내가 당신의 누구인지 모르는 것과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것,
알게 되면 그것을 잃는 일이므로 껴안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것

그렇게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당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알면 또 잃어버리게 될까봐 단지 껴안고 있을 뿐인 것, 그에 비하면 작별이라든가 헤어짐을 짓는 일 따위는 사소해보인다...

P.S. <바람의 사생활>은 이병률 시인의 두번째 시집이면서 출세작이다. 그보다 앞서 여행산문집 <끌림>(2005)이 나왔는데, 나는 <끌림>의 대중적 인기가 <바람의 사생활>에 대한 독자의 지지를 이끈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겠다. 그렇지만 <끌림>에는 아직 끌리지 않기에 나는 다음에는 첫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2003)로 눈길을 돌릴 것 같다. 내가 찾는 시는 앞에서 적은 것과 같은 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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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시 소하동에 기형도문학관이 건립돼 오늘 개관한다. 문학관이 지어진다는 소식은 언젠가 전해들은 바가 있는데 어느새 3층짜리 번듯한 건물로 완공되었다. 개관을 즈음하여 기념행사도 진행되는 모양인데 나는 나대로 나중에 찾아보고 그의 짧았던 삶과 시에 대해서 반추해보려 한다. 오래전에 기형도 시에 대한 강의도 진행한 적이 있기에 기억을 되살려 새 강의도 진행해볼 참이다.

˝당초 광명시는 시인이 실제 살았던 안양천 끄트머리에 문학관을 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땅 주인이 거부해 집 인근이자 시인이 많이 오갔던 소하동에 문학관을 짓게 됐다고 한다. 광명문화재단 관계자는 “유가족들도 ‘외진 안양천 주변보단 번화가에 들어섰으면 좋겠다’고 찬성했다”고 말했다.

문학관 완성까진 시민의 힘도 컸다. 광명지역 문화활동가들은 2003년부터 유가족을 찾아가는 등 기형도기념사업회 활동을 벌여왔다. 시 낭송회는 물론 시의 배경이 되는 장소를 걷는 ‘시길밟기’ ‘추모식’ 등 다양한 행사를 추진해 왔다. 광명시에 건의해 광명 중앙도서관 등에 ‘기형도 코너’도 만들고 광명 실내체육관 주변에 시비를 세우기도 했다. 김세경 기형도기념사업회 회장은 “2014년부터 추진했던 시인을 기리는 공간이 드디어 문을 연다니 감개무량하다”고 했다.˝(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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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위아래가 잘린 파본 형태의 황석영 중단편전집 중고본을 구입했다가 반품처리하지 않고 폐기했는데 두 권을 재구입해서 짝을 맞추었다. <몰개월의 새>는 아직 품절되지 않아서 새책을 구입했더니 출판사 표기가 차이가 난다는 게 옥에 티라고 할까(창작과비평사가 창비사로 바뀌었다). 그렇더라도 책 사이즈는 맞으니까 장서용으로 하자가 있는 건 아니다. 이제 <객지>부터 다시 읽어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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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일찍 먹은 날은 밤참을 먹게 된다. 밤참용 책이 따로 있지 않지만 오늘은 오은의 시집 <유에서 유>(문학과지성사)를 읽었다. 읽다 말았다. 단숨에 읽기에는 분량이 좀 되는 시집이어서다. 그래도 ‘읽다 만 책‘까지는 읽었다.

사다 만 책은 없다
빌리다 만 책이나 버리다 만 책은 없다
읽다 만 책만 있다

이런 게 오은 시다.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다 알고 읽은 터에 시비를 걸 수는 없다. 말장난도 상습이면 심지가 굳은 말장난이다. 다만 그의 시가 무얼 생산하는지는 의문이다. ‘유에서 유‘로 가는 여정은 제자리 걸음의 여정이어서다.

개가 한 마리 다가오고 있다
처음 보는 개
개도 나를 처음 보았을 것이다

내가 개를 스쳤다
개가 나를 훑었다 (‘계절감‘)

그리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또한 오은의 시다. 이 시집이 최소한 세번째 시집임에도 그러하다. ˝오은의 시는 현대의 도시락폭탄이다˝는 평도 재미있지만 올드하다. 도시락폭탄은 현대적이지 않다. ‘시인의 말‘도 저렴하다.

꿀맛이 왜 달콤한 줄 아니?
꾼 맛도 아니고 꾸는 맛도 아니어서 그래.
미래니까, 아직 오직 않았으니까.

이런 게 오은의 오원 짜리 유머다. 그대로 반복하지면 오은의 시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의 시는 미래에 속한다. 그는 오다 만 미래파다. 온 것 같잖은 미래파다. 그래서 뭔가 기대하면 읽을 수 없는 게 오은의 시다. 기대를 접으면 터진다.

터진 수도관은 분수도 모르고
분수를 내뿜었어
시원한 것은 순간이었어
그다음에 찾아오는 것은
시원시원한 고통이었어 (‘폭우‘)

권혁웅 시인은 해설에서 ˝오은을 사랑하십니까?˝라고 물었다. 오, 에, 그건 원 없이 읽은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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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일정이 없는 한 주말의 일과는 강의자료를 만드는 일로 채워진다. 매주 적지 않은 강의를 하다 보니 강의자료를 만드는 것도 만만찮은 일이다. 때로는 몇 시간씩 타이핑을 할 때도 있다.

아침에 떨어진 프린터 토너를 오후에 이마트에 들러 사온 이후엔 저녁을 먹은 시간을 제외하면 내내 강의자료를 만들고 프린트하는 일을 반복했다. 다시 뒷골이 당기는 느낌이 있어서(과열인가?) 머리를 식히며 시집을 펼쳤다. 보드카의 안주로 맥주를 마시는 것 비슷하게.

86년생 시인 송승언의 시집 <철과 오크>(2015)에서 아무 곳이나 펼쳤는데 ‘새와 드릴과 마리사‘가 그럴 듯하게 여겨졌다. 오규원과 박상순을 연상케 하는 시인이다(안 그래도 박상순의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문학과지성사)이 최근에 재간되었다. 반가운 일이다). 오규원을 떠올린 건 ‘골목‘ 때문일까?

골목은 차다 골목은 반짝인다 골목은 깊이를 잃은 채 골목은 갈라진다 골목은 둘로 나뉜다
셋으로도 나뉜다 넷으로도 나뉜다

죽은 새를 주워 저글링을 했다 죽은 새를 양손으로 주고받으며
둘로 갈라지는 골목을 걷는다 셋으로 갈라지는 골목을 넷으로 갈라지는 골목을

걷는다 의자가 있다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 의자 하나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 의자 둘...

이 시인에게서, 혹은 이 시집에서 ‘새‘는 어떤 의미로, 혹은 형상으로 반복되는지는 검토해볼 일이지만, 여하튼 죽은 새를 저글링하면서 여러 갈래로 나뉜 골목길을 걸었다는 게 3연까지의 진술이다. 이 진술을 실어나르는 언어의 리듬감이 좋다. 영혼과 성당, 음악 등의 단어가 나오는 다음 두 연을 건너뛰면 마지막 두 연은 이렇다.

죽은 새가 살아나고 반짝이는 날개를 꿈틀거리면 짓눌러 죽은 새로 만드는 일
냉담자들만이 음악을 하지 열심히 하지

지겨울 때까지 그 짓을 했다 더는 골목이 생각나지 않을 때까지 둘째 골목이 생각나지 않을 때까지 셋째 골목이 생각나지 않을 때까지

‘죽은 새로 저글링을 했다‘와 등치되는 건 ‘음악을 했다‘와 ‘그 짓을 했다‘다. 성당 주변을 빙빙 돌면서 저글링=음악=그 짓을 지겨울 때까지 반복했다는 게 시의 요지.

‘드릴‘과 ‘마리사‘는 시집 안에 있는지 바깥에 있는지 (전후를 살피지 않아) 모르겠으나 시적 화자는 ˝성당에 들지 않고 성당을 뜨지 않는˝ 냉담자로 스스로를 지칭한다. 열심히 음악을 하기에 리듬은 만들어 내지만 죽은 새는 죽은 새일 뿐(혹여 살아나도 죽은 새로 만들 뿐) 의미가 충전되지는 않는다. 무의미의 리듬만 남게 되는가? 일견 그렇게 보인다.

그렇게만 읽혀도 재미있는 시다. 그 재미는 물론 리듬이 만들어내는 재미다. 리듬이 죽으면 송승언의 시도 죽은 시가 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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