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옥의 <무진기행>(1964)은 올해의 강의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다. 주로 이광수의 <무정>(1917)과 대비해서 읽는 것이 강의의 포인트. <무진기행>은 김수용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안개>(1967)가 그것이다. 신성일과 윤정희 주연이고 각본은 김승옥이 직접 맡았다.

나는 이 시나리오가 궁금한데(물론 영화의 대사들을 다 받아적으면 되겠지만) 아쉽게도 시나리오 걸작선에 빠져 있다(검색해보니 <한국시나리오선집>(제4권, 집문당, 1990)에 수록됐었다. 현재는 절판). 영화 <안개>를 보다가 현재 볼 수 있는 게 76분짜리여서(네이버 정보론 그렇고 유튜브에는 80분짜리가 올려져 있다. 다른 정보로는 95분짜리다) 실제로도 그렇게 짧았던 건지, 아니면 삭제된 장면이 있는 건지 궁금해 하다가 페이퍼로도 몇자 적는다. 한편 <무진기행>은 TV문학관으로도 만들어졌다. 원작을 포함해 영화 버전과 드라마 버전에 차이가 있어서 흥미로운 비교거리가 된다.

<무진기행>과 <안개>가 중요한 것은 60년대 중후반 한국사회의 무의식을 들여다보게끔 해주기 때문이다(서로를 속물이라고 비난하면서 현실에 순응하는 속물들이 되어 간다). 그때 키워드는 ‘안개‘다. 60년대 대중가요 가사에 ‘안개‘가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지 조사해봐도 흥미로울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일단 정훈희의 ‘안개‘부터 배호의 ‘안개 낀 장춘단 공원‘까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결국 오후에 한 시간여 잠을 보충하고 나서야 정상 컨디션이 되었다. 강의자료들을 식탁에 늘어놓고 아직 저녁을 먹기 전이라 손에 잡히는 시집을 읽었다(손쉬운 게 시집이다). 사실은 이미 읽었던 시집이다. 이민하의 <세상의 모든 비밀>(2015). 첫 시집 <환상수족>으로이름을 알린 시인이다.

‘세상의 모든 비밀‘은 근사한 제목이지만 막상 시들이 제목을 받쳐주지 못했다는 기억을 다시 읽으며 확인했다. 시집을 빨리 읽는(빨리 읽어야 한다면) 요령이 있다면 처음 두어 편과 표제작을 읽어보는 것이다. 이 시집의 첫 시는 ‘원근법‘이다. 비오는 날의 풍경을 묘사한 시다. 혹은 그래 보이는.

검은 우산들이 노란 장화를 앞지르고 있었다
차도에는 강물이 흐르고
건너편에는 머리가 지워진 사람과 발목이 잘린 아이들이 떠내려 간다

아마도 ‘강물‘ 정도의 빗물이라면 장맛비인지도. 그렇지만 풍경묘사가 아주 새롭진 않다 우산에 가려 ˝머리가 지워진 사람들과 발목이 잘린 아이들이 떠내려간다˝는 것 정도니까.

오후에 떠난 사람과 저녁에 떠난 사람이 똑같이
이르지 못한 새벽처럼

한 점을 향해 가는
길고 긴 어둠의 외곽 너머

원근법의 소실점이 죽음의 은유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추상적인 진술로 일관하고 있어서 와닿지 않는다.

텅 빈 복도에 서서
눈먼 노인과 죽어가는 아이가 함께 내려다보는
마르지 않는 야경 속으로

몇 방울의 별이 떨어졌다

시의 엔딩이다. ˝마르지 않는 야경˝은 계속 비가 내리는 풍경이다. 그 야경의 소실점에는 죽음이 있다. 비와 죽음이 ˝몇 방울의 별˝이라는 이미지로 응축된다. 그렇지만 ‘눈먼 노인‘과 ‘죽어가는 아이‘ 같은 좀 상투적인 표현이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모두가 죽음을 향하고 있고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누군가 죽어간다는 것 정도가 시의 메시지라면 새로울 게 없고 표현도 놀랍거나 감동적이지 않다. 시집 전체가 이런 기조다.

표제시인 ‘세상의 모든 비밀‘도 기대에 못 미친다. 대단한 비밀을 기대하지 않았더라도 뭔가는 알려주어야 하지 않은가.

나는 옆집 아이의 태생의 비밀을 알고 있다
그 애 아빠의 정치적인 비밀을 알고 있다
왜 그들은 내게 입막음을 안 하나

하루아침에 미용실 여자가 미인이 된 까닭을,
편의점 남자가 시인이 된 까닭을, 그들이 손잡고 구청에 간 까닭을,
석달 후 남자 혼자 구청에 간 까닭을 나는 알고 있는데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건 이 첫 두 연이 아니다. 이런 비밀들의 목록은 한참 더 이어질 수 있었겠다. 한데 시인은 독자보다 먼저 진절머리를 낸다.

여자의 머리색이 남자의 정치색과 어울려
신발 속에 감춰진 짝짝이 양말처럼 아무도 모르게
호들갑을 피우는 오후

그나마 구체적이었던 비밀의 세목이 ˝여자의 머리색˝과 ˝남자의 정치색˝으로 일반화되면서 시의 재미도 꺾여버렸다. 이후에 만회도 되지 않는다. 가령,

지하철 남자의 의족이 지상의 물결 위로 떠오를 때
인어공주가 되는 이야기
아름다운 두 다리의 침묵에 대하여

같이 뭔가 절묘한 비유라도 되는 양 뽐내지만 식상하기 짝이 없는 진술들로 이어질 때 더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시집의 자세한 해설도 나를 설득하지 못했다). 시가, 시로서 왜 실패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로 읽어봄직하다...

PS. 페이퍼를 쓰는 중간에 저녁을 먹고 영화 <남아있는 나날>을 오랜만에 다시 보았다. 정말 두 주연 배우의 이미지 빼고는 기억에 남아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영화였다. 물론 다시 보니 원작뿐 아니라 영화도 빼어나다. 더불어 2차세계대전이 한 시대의 종말었는가를 다시금 알겠다. 그런 종말을 다룬다는 점에서 이시구로는 안톤 체호프도 떠올리게 한다. 차이라면 이시구로는 ‘종말 이후‘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처럼 늦잠을 자고서 식탁에 앉아 늦은 아침(에 해당하는 것)을 먹으며 논문을 읽다가 손 가까이에 있어서 이병률의 <눈사람 여관>(문학과지성사)을 뒤적였다. 일거리로 써야 할 페이퍼는 많지만, 또 읽은 김에 몆자 적는다. 눈길이 멎은 시에 대해. ‘나는 나만을 생각하고‘는 눈에 잘 띄지 않을 법하고 시상도 일견 단순하다. 그런데 생각하게 한다.

나는 나만을 생각하고
해가 진다
나는 나만을 생각하느라
다리를 건너다
다리에서 한없이 쉰다

우리가 우리만을 생각하는 것도 모자라
나는 나만을 생각하고
그 이유에 관여하는 것들이 우주의 속살로 썩는다

생각을 앉히고
생각 옆으로 가 앉지만
나는 지렁이

나는 나만을 생각하여서
나에게 던진 질문 따위로 흘러내리고
그러고도 지구를 지구의 손금대로 살게 할 수 없음을 방관하면서

‘나는 나만을 생각한다‘와 ‘해가 진다‘를 연결한 것이 시의 착상이다. 우리가 우리만을 생각하고 나는 나만을 생각하는 바람에 우주의 속살이 썩는다. 우주까지 갈 건 아니고 지구가 자기 손금대로 살지 못한다. 이 시에서 재밌는 대목은 나만을 생각하는 바람에 시답지 못한 시행들도 방관한 점이다. ˝그 이유에 관여하는 것들˝이라든가 ˝그러고도 지구를 지구의 손금대로 살게 할 수 없음을 방관하면서˝는 지극히 비시적인 표현들이다. 이런 구절을 포함하려면 명분과 작업이 필요하다. 이 시에는 그게 마련되어 있다. ˝나는 나만을 생각하고.˝

해가 진다
고개를 들 수 없는 땅을
끊어지지 않는 몸으로 가야 해서
나는 나만 생각하느라
참으로 그래서
해가 지는 것이다

이 시의 착상이 ‘해가 진다‘와 ‘나는 나만을 생각한다‘를 연결시킨 것이라고 했는데 그 둘 사이에 인과성이 있다. ˝나는 나만 생각하느라/ 참으로 그래서/ 해가 지는 것이다˝ 말 자체가 모순이긴 하다. 진정 나만 생각했다면 해가 지거나 말거나 방관했을 터이며 자책도 갖지 않을 터이다. 그런데 ‘지렁이‘로서 나는 그렇게 자책한다.

이 자책은 시적이지만 논리적이진 않다. 사실 지렁이는 지구 생태계의 순환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동물이다. ˝지구를 지구의 손금대로 살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존재인 것. 고작 ˝끊어지지 않는 몸˝으로 기어가려고 자기 생각만 하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이런 모순을 해결해야 하지만 자신을 지렁이에 빗댄 시적 화자는 자기 생각만 하느라고 여념이 없다.

그리하여 별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나는 한사코 나만 생각하는 것이고
아무것도 정하지 않은 채
나에게로만 가까워지려는 것이다

마지막 연이다. 별의 관계는 인간관계의 은유이자 대체이므로 사람들이 혹은 애인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나는 내 생각만 한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그래서도 더 멀어질 테고. 그게 ‘해가 진다‘는 표현의 함축이다(별도 진다). 그것만으로도 좋은 착상과 비유다. 문제는 애먼 지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실제로 내가 적으려는 건 <걱정에 대하여>(문예출판사)라는 책에 대해서이다. 지난달에 책이 나오자마자 원서까지 주문했고 오늘 받았다. 저자 프랜시스 오고먼은 영국의 대학에서 영문학 교수로 재직중이며 존 러스킨과 빅토리아시대 소설이 전문 분야다(19세기 영문학 전공자라면 친숙할 법한 이름이다).

‘걱정‘을 표제이자 주제로 다루고 있어서 일단 눈길을 끄는데 좀 풀어서 얘기하면 ‘문학과 문화로 본 걱정의 기원과 의미‘가 책에서 다루는 내용이다.

˝<걱정에 대하여>는 빅토리아시대(1831~1901)에 오늘날과 같은 걱정의 관념이 대두한 것부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걱정이 현대의 ‘시대적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된 과정을 다양한 문학 작품과 문화사를 통해 살펴보는 책이다. 너무나도 흔한 인간의 경험, 워낙 자주 일상 대화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 친근함 때문에 오히려 눈에 잘 보이지 않게 된 인간의 경험에 관한 내밀하고 개인적인 설명을 제공함으로써, 이 책은 현대 세계가 우리의 일상적인 불안을 형성하는 과정을 탐구한다. 이를 통해 걱정이 인간의 약점일수도 있지만 감성과 이성을 가진 복합적 존재인 인간의 자연스러운 귀결이기도 하다는 점을 깨닫게 하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성격의 책인데(문학사와 문화사를 경유한 주제 탐구라는 점에서) 경험칙상으로 이런 책의 독자는 많지 않은 것 같다. 어느 정도 책을 읽은 독자들이 흥미를 가질 법한 주제와 스타일을 갖고 있어서다. 그럼에도 꽤 유익하고 흥미로운 책이라는 점은 널리 알리고 싶다. 그래야 다른 책도 나올 수 있을 테니. 저자의 다른 책 가운데 신작 <망각>도 그렇게 욕심을 갖게 되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주 읽어볼 만한 강의자료들을 골라서 프린트하는 작업을 열심히 하다가 프린터 위에 놓여 있는 책들 가운데 하나를 빼내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고 피식 웃었다. ˝태생이 함부로여서 눈은 생각이 많다˝!

점심시간도 되고 했으니 일손을 놓고 시집을 펼쳤다. <눈사람 여관>에 수록된 ‘어떤 아름다움을 건너는 방법‘인데, 1연을 건너뛰면 이렇게 시작한다.

눈이 내릴 것 같다

그 무언가 힘으로도 미치지 못하면서
나를 이토록 춤추게 하는 무언가

내 몸 위에는 한 번도 꽃잎처럼 쌓이지 않는 눈,
바다에도 비벼지지 않는 청어 떼 같은 눈,
태생이 함부로여서 눈은 생각이 많다

잠시, 바다에도 비벼지는 게 뭐가 있을까란 의문과 함께 태생을 문제 삼는 건 명예훼손의 소지가 있다는 생각까지. 한 연 건너뛰고서 세 연을 적으면,

그러니까 세상 모든 그날들을 닮으면서 내리는 눈,
오늘 내린 눈을 두 눈으로 받아 녹이고서야
울먹울먹 피가 돌았다

단 한 번도 순결한 적 없이 마취된 척
한 세계를 가득 채운 냄새나 좇으며
허술한 사랑을 하려는 나여

눈이 저 형국으로 닥쳐오는 것은 내 마음이 아니란다

뭔가 절박한 마음을 표현하려는 듯싶지만 내게는 그냥 허술한 시로 읽힌다(이병률의 시는 어깨에 힘을 줄 수록 허술해지는 듯하다). ˝태생이 함부로여서 눈은 생각이 많다˝, 한 문장 건진 걸로 자리를 정리해야겠다.

눈 얘기는 어제 읽은 시집 <바람의 사생활>(창비)에도 나오는데 눈길이 좀 머물렀던 시라 같이 기억이 났다. ‘아무것도 그 무엇으로도‘가 제목이다.

눈은 내가 사람들에게 함부로 했던 시절 위로 내리는지 모른다

어느 겨울밤처럼 눈도 막막했는지 모른다

눈길이 머문 건 이 첫 두 연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다음부터의 진행은 공감하기 어려웠다. 이제 보니 ˝피를 돌게 하는 것은 오로지 흰 풍경뿐이어서 그토록 창가에 매달렸는지도 모른다˝는 구절은 앞엣시의 ˝오늘 내린 눈을 두 눈으로 받아 녹이고서야/ 울먹울먹 피가 돌았다˝와도 연결되는군. 시인은 눈은 보아야 피가 도는 모양이다(특이한 연결이긴 하다. 이미지 상으로 눈과 피는 보통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지나는 김에 적자면, ‘울먹울먹‘ 피가 돈다는 건 무슨 뜻인가. 피가 비로소 돌게 돼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감격한다? 그런 절박함과 ‘허술한 사랑‘은 또 어떻게 연결되는가? 허술한 시는 너무 많은 걸 짜맞추게끔 한다.

다시 ‘아무것도 그 무엇으로도‘로 돌아오면 마지막 연은 이렇다.

손가락을 끊어서 끊어서 으스러뜨려서 내가 알거나 본 모든 배후를 비비고 또 비벼서 아무것도 아니며 그 무엇이 되겠다는 듯 쌓이는 저 눈 풍경 고백 같다, 고백 같다

무슨 조폭 영화에나 나오는 이미지를 눈 풍경과 중첩시키고 있는데 공감도안되고, 납득도 안된다(시인은 비비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다). 이 시에서도 ˝어느 겨울밤처럼 눈도 막막했는지 모른다˝ 정도를 챙긴다. 생선도 먹기 위해선 버릴 건 버리면서 다듬어야 하듯 시도 그렇다. 그러다 먹을 게 남아나지 않을 때도 있지만...

PS. 눈을 소재로 한 시를 고른 건 첫눈이 올 때가 되어가기 때문이다. 보통 11월 중순에 기온이 떨어지면 오는 것 같으니까(12월인가?). 첫눈이 온다고 하여 있는 일정이 없어지거나 없는 일정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관성처럼 첫눈을 기다린다. 이병률의 첫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문학동네)도 오늘 주문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