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 때문에 그래픽 노블의 걸작이라는 '어둠의 도시들' 시리즈를 읽어보게 됐다. 책은 지난 5월에 출간됐는데, SF독자라면 이번 여름 필독 리스트에서 빼놓을 수 없겠다. 늦게나마 서평기사를 챙겨놓는다.

한겨레(10. 05. 29) 지구 저편 ‘어둠의 도시’에선 무슨 일이?

소녀 마리는 갑자기 기울어져버렸다. 사선으로 서 있고 걷는다. 그 탓에 어디서건 ‘왕따’다. 서커스단만 마리를 반긴다. 자신을 고쳐줄 유일한 과학자를 찾아가니 그는 마리가 다른 행성의 중력 영향을 받고 있다고 설명한다. 천체의 축 정반대편에 있어 관측이 불가능하다는 미지의 세계다. 마리는 그곳을 향하는 우주선에 올라탄다. 마리가 사는 세계는 지구와 닮았지만 지구는 아니다. 그 반대편 ‘어둠의 도시들’로 이루어진 대륙이다.

지구의 화가 오귀스텡은 평론가들의 혹평에 질렸다. 그는 도시를 떠나 오브라크 고원지대를 떠돌다 저택을 발견하고 그 벽에 홀린 듯이 둥그런 구(球)들을 그린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어느 구 하나에 균열을 만든다. 이후 그는 그 집 어두운 복도를 빨려 들어가듯 걷다 다른 세계로 넘어간다. 어디인지 어느 때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 마리와 오귀스텡은 만난다. 



이 기묘한 이야기가 1983년부터 이제까지 이어져온 에스에프 만화의 걸작 ‘어둠의 도시들’ 시리즈의 문을 연다. 브누아 페테르스가 글을 쓰고 프랑수아 스퀴텐이 그림을 그린 이 시리즈는 총 16권, 거기에 디브이디, 각종 관련 전시, 세미나 등으로 가지를 쳤다. 두 사람은 27년 동안 지구의 반대편 거울 세계, 검은 도시들의 대륙을 완성해가는 중이다.

문으로 들어왔으면 조심해야 한다. 다시 나가기 어렵다. 마리 이야기를 어떻게 읽고 싶나? 달라서 배척당하는 소수자의 삶, 어디서 많이 본 광경이다. 그렇게 가상의 세계를 통해 현실을 비트는 이야기일까? 우리가 아는 세계는 반쪽뿐이고 진실은 그 너머에 있다는 암시일까? 이 거울, 우리 모습을 비춘다 싶어 뚫어져라 쳐다보게 되는데 어느새 기괴한 상상의 세계를 투영해 시선을 묶어둬버린다. 잡았다 싶으면 그새 모습을 바꿔버리는 동물, 그래서 끝까지 좇게 만드는 새다.

이 거울의 매혹적인 수작은 <보이지 않는 국경선>에도 이어진다. 신참 지도제작사 롤랑의 이야기이다. 소드로브노볼다치 정부는 지도제작국을 활용해 ‘위대한 영토의 국경’을 확정하려 한다. 지도제작사들은 종교의 지도, 물류의 지도 등 모두 달라 국경은 확정할 수 없는 것이라 말해도 소용이 없다. 정부는 팽창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제작국에서 사람의 섬세한 결은 사라지고 기계가 지도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이런 혼란 통에 롤랑은 스코드라라는 여자를 만나게 되고 그 여자 등에서 옛 국경과 일치하는 지도를 발견한다. 공격적 민족주의의 대한 경고일까? 인간에게서 오직 지도만 봤던 지도제작자의 비극일까?

<우르비캉드의 광기> 속 우르비캉드는 계획도시이다. 이 도시의 파국은 로빅의 책상에서 비롯됐다. 희한한 육면체를 책상 위에 놓아뒀는데 그게 식물처럼 점점 거대하게 자라 갈라진 남과북, 사람들을 잇는다. 이 이야기는 육면체에 대한 한 보고서로 마무리된다. “비인간화된 도시에 대한 자연의 승리”, “무정부주의적인 전복의 움직임”…. 육면체에 대한 여러 해석을 설명한 뒤 보고서 작성자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간단하지만 무한한 결론으로 열려 있는 이 구조물은 신들이 어둠의 도시에 사는 인간들에게 보낸 신비한 물체다. 신들은 이를 통해 인간이 제아무리 오만해도 결국 세상 만물의 본질은 그 신비로움에 있으며,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점을 이야기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어둠의 도시들’ 시리즈 자체가 이 육면체와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무한한 결론으로 열려 있는 이야기, 세상의 비밀, 상상의 경계를 다 담을 때까지 끊임없이 확장해가는 이야기 말이다. 황홀한 그림체와, 건축 지식, 철학적 상징으로 뭉친 이 육면체 퍼즐은 너무 익숙해 못 보던 우리 자신의 세상을 낯설게 보여주거나, 또는 그 너머의 세계를 그리며 신비한 마력으로 독자를 빨아들인다. 세미콜론은 시리즈 가운데 모두 열두권을 출간할 예정이다.(김소민기자)

10. 07. 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2010)를 읽다가 관심을 갖게 된 저자는 어슐러 르 귄이다. 이미 SF 독자라면 페이퍼의 제목이 르 귄의 두 작품명이란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샌델이 인용하는 건 단편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인데(63쪽에 인용돼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바로 떠올려주기에 흥미가 생겼다. 정작 르 귄은 윌리엄 제임스의 책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그러니까 도스토예프스키와는 간접적인 영향관계다). SF소설로서라기보다는 유토피아 문학으로 대표작 <어둠의 왼손>과 <빼앗긴 자들>을 읽어볼까 싶다. 오래전 글이긴 한데, 정재승 교수의 소개글을 참고삼아 챙겨둔다.    

  

씨네21(02. 12. 07) 어슐러 K. 르 귄의 <어둠의 왼손>과 <빼앗긴 자들>

올 한해 두드러진 출판경향 중 하나는 그동안 문단과 독자로부터 냉대받아온 추리소설의 주요 작품들이 완역·출간되어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코난 도일의 걸작 <셜록 홈스 전집>과 모리스 르블랑의 <아르센 뤼팽 전집>이 큰 인기를 누리는가 하면, 추리문학의 숨은 고전이라 할 수 있는 <브라운 신부 전집>이나 고급 역사추리소설 <캐드펠 시리즈>가 완역되기도 했다.

이런 흐름에 발맞춰 추리소설과 함께 아웃사이더 장르 취급을 받아온 SF소설의 걸작들도 하나둘씩 다시 출간될 채비를 하고 있어 각별히 주목된다. 그 첫 번째 신호탄으로, 미국 SF문학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SF소설가 어슐러 K. 르 귄의 수작 <어둠의 왼손>(시공사 펴냄)과 <빼앗긴 자들>(황금가지 펴냄)이 세련된 편집본으로 재출간된 것은 자유추리문고 문고판으로 처음 르 귄을 접했던 SF마니아들에겐 감격스러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들 작품이 일반 SF소설을 뛰어넘어, 우리나라에선 아직 소개가 미흡한 ‘유토피아 문학’의 정수라는 점에서 일반 독자들에게도 꼭 권해드리고 싶은 책이다.

르 귄은 ‘헤인 시리즈’라 불리는 일련의 소설 속에서 우주 전체에 흩어져 살고 있는 헤인인들이 거주 행성의 환경에 맞춰 독특한 문명과 세계관을 형성하며 살고 있는 독특한 상황을 설정했다. 이때 광속을 뛰어넘는 통신수단 ‘엔서블’이 발명되면서 이들 문명은 서로 충돌과 연합이라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로캐넌의 세계>(1966)에서부터 최근작 <세계의 탄생일>(2002)에 이르기까지 11편의 헤인 시리즈 작품들 중에서도 <어둠의 왼손>과 <빼앗긴 자들>은 권위있는 SF문학상인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동시에 수상할 정도로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손꼽힌다. <어둠의 왼손>은 지구를 모태로 하는 에큐멘 연방에서 인류 연대를 위해 파견된 대사 ‘겐리 아이’가 여러 난관 끝에 에스트라벤의 도움으로 결국 게센과 동맹을 맺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는 소설에서 과학기술의 진보는 유토피아를 달성하기 위한 기본전제가 아니며, 좀더 중요한 것은 인간 정신의 성숙, 즉 인간과 인간이 서로 이해하고 신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빛은 어둠의 왼손. 따라서 빛과 어둠, 두려움과 용기, 추위와 따뜻함, 여성과 남성은 둘인 동시에 하나인 것이다’라는 대사는 르 귄 자신이 우리에게 전하려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게센인이 남녀 구분이 없는 양성인으로 나오며, 26일을 주기로 ‘케머’라는 발정기 때에만 두 성으로 발현되는 설정도 바로 이 때문이다. 



<빼앗긴 자들>에선 쌍둥이 행성 우라스와 아나레스가 배경이다. 두 행성의 교류를 위해 물리학자 쉐벡이 우라스에 파견되면서 시작되는 이 소설은 환경은 황폐하지만 정신적으로는 평등과 자유를 실현한 아나레스와 환경은 풍요롭지만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하고 있는 자본주의 국가 우라스가 어떻게 화합의 다리를 놓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집단주의와 자본주의가 만났을 때의 화학반응을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은 사회주의와 민주주의간의 첨예한 이념 대립의 지구촌 유일한 접점에 살고 있는 우리에겐 각별한 의미로 읽힌다.

르 귄은 책 서문에서 자신의 소설을 일종의 ‘사고 실험’으로 읽어달라고 요구한다. SF소설가는 현재의 과학기술을 통해 미래의 모습을 예측하는 예언가나 미래학자가 아니라, 독특한 허구적 설정을 통해 현재의 인류와 사회에 대해 기술하는 작가임을 강조한 것이다.

‘진정한 발견은 새로운 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라는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을 떠올려 본다면, 이 거대한 우주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새로운 눈으로 다시 발견하게 만드는 이 책은 우리 모두를 ‘진정한 발견자’로 만들어줄 것이다.(정재승/ 고려대 물리학과 연구교수) 

10. 07. 14.  

P.S. 참고로, '오멜라스로 떠나는 사람들'의 우리말 번역본은 르 귄의 작품집 <바람의 열두 방향>(시공사, 2004)와 SF작품선 <마니아를 위한 SF걸작선>(도솔, 2002) 두 종이 있다. 인터넷에서도 번역본을 읽을 수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0-07-15 0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5 07: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도서관에 반납해야 할 책들을 챙기다 보니 카자 실버만의 <월드 스펙테이터>(예경, 2010) 원서도 눈에 띈다. 지난 4월에 '이달의 읽을 만한 책'으로 올려놓으면서 서평도서 후보로 고려했다가 제쳐놓는 바람에 아직 읽지 못한 책이다. 부제는 '하이데거와 라캉의 시각철학'.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이긴 한데, 방학이 끝나기 전에 시간을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주 드문 소개기사 하나를 스크랩해놓는다.    

 

주간한국(10. 04. 13) 바라보기를 통한 세계의 인식 

책의 제목인 '월드 스펙테이터(World Spectators)'는 본래 저자인 카자 실버만의 말이 아니다. 이 말은, 한나 아렌트에서 나왔다. 아렌트는 공간적으로 제한받지 않고 외부세계로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시각의 주체, 그리고 사회에서 책임, 의무, 권리를 지닌 주체를 철학적으로 담아내기 위해 '월드 스펙테이터' 즉, '세계관찰자'란 말을 지어냈다.

저자인 카자 실버만은 이 말을 전복시켜 자신의 사유를 풀어낸다. 이 전복이 블록버스터 급이다. 그녀는 '외양'과 '존재'를 엄격하게 구분했던 서구 형이상학의 전통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녀는 말한다. "바라보아야 존재할 수 있다"고. 이 책의 핵심은 바라보기를 통한 세계의 인식이다. 참고로 그녀 실버만은 국내에서 정신분석학 틀을 이용해 사진과 영화를 분석하는 이론가로 알려져 있다. 저자의 이야기는 우리가 매일 만나는 대중문화, 사진과 영화를 새롭게 이해하는 하나의 툴이 될 수 있을 터다.

우선 저자는 소크라테스의 저 유명한 알레고리, '동굴의 우화'를 전복시킨다. 평생을 컴컴한 동굴에서 살아온 죄수가 어느 날 갑자기 환한 바깥세상을 경험하고 다시 동굴에 들어온다는 옛날 옛적 그리스 이야기를, 그리고 죄수는 이제 바깥 세계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그 고통이 크더라고 세계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 철학자의 사명이라는 전통적 해석을 저자는 '동굴 속 개별 죄수'에 집중함으로써 비틀어 버린다.

실버만은 동굴 속 죄수 각자는 주어진 세계에 던져진 존재로 모든 것이 제한적이고 부자유스럽지만, 적어도 자신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진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사물이 눈에 보일 때만 실제적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녀는 말한다. "결국 세계가 나타나 존재하게 될지, 아니면 비(非)존재의 어둠으로 흐려져 사라질지를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 자신 뿐"(15페이지)이라고.

보기, 즉 시지각은 말하기, 언어에 앞서는 것이다. 그녀의 다음 전복 대상은 성경이다. 흔히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언어측면이 강조되지만, 실버만은 동물과 새가 아담 앞에 먼저 보이고, 그런 다음에야 아담이 존재의 이름을 말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주체는 개별자이지만, 또한 그가 속한 세계와 분리되어 있는 단독자가 아니다. 본다는 것은 언제나 주체와 대상, 타자, 세계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실버만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타인에게 비춰질 때만, 존재한다. 나의 존재는 타자의 존재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결국 저자는 진공상태의 단독자보다 현실 세계를 사는 집합체 속 개별 주체를 강조한다. 개별적이면서도 사회 안에 집합적으로 살아가는 세계관찰자, 월드 스펙테이터는 동굴 안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더라도 언어 이전의 영역에서 언어가 나타낼 수 없는 존재의 근본 조건을 볼 수 있는 시각적 역량을 지닌다.

이 책의 부재는 하이데거와 라캉의 시각철학이다. 그러니까 그녀, 실버만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와 라캉의 철학을 사유의 바닥에 깔고 시작해야 한다는 것, 하이데거와 라캉은 다시 플라톤과 프로이트의 사유에 기대고 있는바, 책을 읽어내기 위해 정신분석, 철학, 시각문화, 미술사 그리고 문학과 영화학의 다리를 건너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여행을 마칠 때쯤 동굴에 대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책임 있는 죄수, 현상을 비틀어 볼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을 터다.(이윤주기자) 

10. 07. 12.   

P.S. 실버만의 책 가운데 관심을 끄는 타이틀은 몇 개 더 있다(원래는 <기호학의 주체>란 초기 저작으로 알게 된 이론가였다). 그나저나 말 그대로 '월드 스펙테이터'들이 주시하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 결승전이 몇 시간 남지 않았군... 


댓글(5)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0-07-12 04: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2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2 2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2 2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2 2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터넷 비평공간 '비평고원'

다음 카페 '비평고원'이 개설 10주년을 맞아 기념문집을 냈다. 출판사쪽 표현으론 씨북(Cbook)이다. "블로그북(Blook)의 경우 기본적으로 단일저자로 이루어진 출판물인 데 반해, Cbook(카페북, 커뮤니티북)은 엄청나게 많은 복수의 저자로 이루어진다"는 게 차이점이라고. 비평고원의 '원년 멤버'이자 '핵심 멤버'(카페에서는 '불멸회원'이라고 칭한다)로서 나도 그 '복수의 저자'로 참여하고 있으니 인연이 없지 않다. 출간을 기념하여 카페 정모도 이번 주말에는 예정돼 있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카페 공지를 참고해보시길. 제일 먼저 뜬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한겨레의 더 자세한 기사는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28677.html 참조).   

  

경향신문(10. 07. 01) 인문학 고수들의 ‘담론 대결’ 책으로 묶었다  

인문학커뮤니티 ‘비평고원’이 인터넷카페(http://cafe.daum.net/9876) 개설 10년을 맞아 <비평고원 10>(도서출판 b)을 냈다. 그간 카페에 오른 2만여개의 게시글을 추리고 엮은 문집이다. 문학·예술·철학에서 축적한 담론이 원고지 1072쪽의 방대한 분량에 오롯이 담겼다.  

비평고원은 2000년 4월28일 ‘쿤데라와 고진의 고원’이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수준 높은 비평 글이 입소문을 타면서 인문학 관심자들의 방문이 늘어났고, 비평 대상도 다양해졌다. 2004년 지금 이름으로 바꿨다. 6월 말 현재 회원 수는 1만394명, 개설 기간에 비하면 많지 않은 수인데도 대중지성의 근거지로 주목받았다. 회사원·대학(원)생·농부·자영업자 같은 학생·생활인들이 학력 같은 배경이 아니라 필명만 내걸고 비평을 올렸다. ‘주례사 비평’ ‘인사치레성 댓글’ 없이 날것의 글쓰기 대결을 벌였다. 몇몇 ‘고수’들은 번역서의 오류를 찾아 공개 비판했다. ‘번역 논쟁’은 비평고원의 내공을 제도권 지식 사회에 알린 사건이었다.

비평고원은 까다로운 운영 원칙을 고수한다. 학연·지연·유명세를 배제한다. “개인 친분 강화는 불필요한 인간 관계에 휘말리게 한다”며 오프라인 모임을 가능한 한 갖지 않고 있다. ‘책이라는 상품’을 소개하는 서평보다 ‘책이 다루는 문제’에 관한 비평 쓰기를 정체성으로 삼았다.

운영자 ‘소조’가 머리말에 쓴 말은 비평고원의 현재 의지, 미래 전망, 자부심을 잘 나타낸다. “고상하게 보이는 인문학계가 실은 학벌과 친분, 예의에 의해 작동되는 곳이라면, 가진 게 별로 없는 이들이 모인 비평고원은 너저분한 계급장, 훈장을 모두 떼고 오로지 사유의 진지함과 핵심에 육박하는 날카로움(집요함)만으로 유지되는 장소입니다. 한국 지성계가 환관들에 의해 유지되는 국가기구의 하나라면, 비평고원은 오로지 자신의 무공에 의지하여 ‘의(義)’를 행하는 강호 또는 무림입니다.”(김종목기자) 

10. 06. 30. 

P.S. 찾아보니 2000년 9월 16일에 내가 적은 카페 가입인사는 이렇다. 당시엔 카페명이 '쿤데라와 고진의 고원'이었고, 주인장의 닉네임이 '쿤데라'였다. 2000년이라, '로쟈'는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대학과 학원의 강사로 뛰던, 결혼 1년차 '백수'였더랬다. '알라디너'로서는 2개월차쯤?..

안녕하십니까? 운영자님의 강권에 못이겨 가입인사를 몇 자 적습니다. 저는 쿤데라의 팬이고 고진의 책도 절반은 읽어 보았으니까 이 카페의 회원이 될 만한 자격은 있는 듯하여 주저없이 가입했습니다. 그리고 제자 둘러본 카페들 중에서는 그 중 수준이 높은 듯하여(kundera님의 열성과 부지런함이 인상적입니다!) 반갑기도 하구요. 하지만 아직은 쿤데라'와 '고진'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갈피가 잡히지는 않습니다. 많은 지도편달 있으시길...  또 '고원'이라, 이건 들뢰즈의 용어를 가져온 듯한데, 하여간에 지적 열정이 넘치는 듯하여 보기에 좋습니다. 내용도 탄탄해 보이는데, 앞으로 더 발전해 나가겠죠? 저는 러시아문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현대철학에 관심이 많습니다. 데리다나 레비나스 같은 저자들을 좋아합니다. 관심에 비한다면 읽은 건 별로 없지만, 능력이 닿는 한도 내에서 저도 글을 올리기로 하지요. 아무튼 만나게 되서 거듭 반갑습니다. 그리고 감기들 조심하시길...

댓글(4) 먼댓글(2)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도스토예프스키를 싫어한 작가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6-30 21:01 
    <비평고원 10>(도서출판b, 2010)이 출간된 김에 카페 비평고원에서의 활동 초창기에 로쟈가 어떤 글을 올려놓았었나 궁금해서 찾아봤다. 주로 댓글들이 많았는데, 마침 '도스토예프스키를 싫어한 작가들'이란 테마로 주인장(쿤데라님)과 논쟁을 벌인 게 있어서 옮겨놓는다. 댓글답지 않게 길게 쓴 대목도 있다. '마침'이라고 적은 건 안 그래도 도스토예프스키 강의 자료를 만들려던 참이기 때문이다. <비평고원 10&g
  2. 정보의 바다에 쌓아올린 인문학 성채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7-06 09:36 
    '비평고원'과 <비평고원>(도서출판b, 2010) 관련기사를 하나 더 옮겨놓는다. 지난 주중에 나도 기자의 전화인터뷰에 응한 기사다. 개인적으론 자체 평가와 의의, 한계 등을 짚는 기사를 나도 쓰기로 해서 참고가 된다.     한국일보(10. 07. 06) 정보의 바다에 쌓아올린 인문학 성채  2000년 4월 한 인터넷 사이트에 '쿤데라와고진의 고원'이라는 이름의 인문학 카페가 개설
 
 
비로그인 2010-06-30 20:13   좋아요 0 | URL
"한국 지성계가 환관들에 의해 유지되는 국가기구의 하나"라는 기사의 표현이 인상적이네요.
여기서 환관이라 함은 스스로 재생산구조를 갖추지 못했다는 걸 꼬집는 거겠죠? 다른 쪽으로 상상하면 안 되겠죠?

그나저나 강호의 고수들이 한자리에 모이는군요.
음, 갑자기 주먹이 불끈 쥐어지네요^^

로쟈 2010-06-30 21:40   좋아요 0 | URL
'강호'란 수사는 수명이 꽤 길어요.^^

Kitty 2010-06-30 22:16   좋아요 0 | URL
여기 운영자님이 한국 문학 비평한 조영일씨 맞죠?
가끔 가서 글 읽어보고는 하는데 책으로 나왔군요. 담아갑니다 ^^

로쟈 2010-07-01 00:01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이젠 비밀도 아니죠.^^
 

바깥 날씨만 보면 그날이 그날처럼 여겨지는데, 그래도 새로운 건 '새로 나온 책'들이다. 어제는 에드워드 윌슨이 공저한 <프로메테우스의 불>(아카넷, 2010)이 눈에 띄더니(오래전에 원서를 구해놓은 책이다) 오늘은 하비 맨스필드의 <남자다움에 관하여>(이후, 2010)가 '손맛'을 느끼게 한다. 하버드대학에서 정치사상을 강의하는 저자는 특히 마키아벨리 전문가로 그의 <마키아벨리의 덕목>(말글빛냄, 2009)이 우리에게 소개된 바 있다. 찾아보니 몇년 전에 <남자다움>에 대한 워싱턴타임스의 서평이 국내 일간지에 실렸다. 서평부터 읽어본다(국내 일간지 서평은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007/h2010070221465284210.htm 참조).     

 

세계일보(06. 03. 23) [해외논단]남녀평등 사회에 대한 조언

프로이트는 결코 “남자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지”라고 물은 적이 없다. 그는 누구나 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성혁명이 일어나고 자유롭게 된 여성들이 직장과 가정에서 남자들과 경쟁하게 됨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던 과거의 개념들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게 됐다.

하버드대학의 하비 맨스필드 교수는 오늘날 남성들이 남성 성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는 성역할의 혼란은 현대의 여성주의 때문에 더욱 악화되고 있지만 여기에는 더 복잡한 것이 숨어 있다고 말한다. 그는 현대의 삶은 남성의 에너지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으며 활동력을 저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최근 저서 ‘남성다움(Manliness)’에서 “남성다움은 전쟁을 선호하고 모험을 즐기며 영웅을 숭배한다. 그러나 이성적인 통제는 평화를 추구하고 모험을 기피하며 영웅보다는 역할모델을 선호하도록 만든다”고 말하고 있다. 여성들과의 관계에서 남성들의 타고난 단호함은 약화된다. 양성평등이 엄격한 정의가 된 현대의 삶에서 고정된 성관념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맨스필드는 그러나 타고난 것으로 여겨지는 고정적 성관념을 어느 정도 용인하더라도, 남성과 여성이 함께 사는 가정에 아무 해도 미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맨스필드는 여자들의 행복을 위해 남자가 집 안에서 아이를 돌보는 것이나 가사를 여자들과 똑같이 반씩 나눠 하도록 강요하는 행태를 조금 줄일 것을 권유하고 있다. 이것이 남자다운 일인가. 맨스필드는 여자들이 이 같은 자신의 주장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는 그러나 여자들이 이 같은 주장을 전적으로 무시하지만도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버지니아대학의 사회학자 스티븐 노크와 브래드퍼드 윌콕스는 여자들이 결혼 생활에서 가장 큰 행복을 느끼는 것은 남편이 자신과 감정적으로 동조할 때라고 말했다. 이들은 미 전역에 걸쳐 5000쌍이 넘는 부부를 인터뷰한 결과 아직도 대부분의 여성은 감정적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한 남자가 보다 많은 수입을 가져오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는 여성주의자이든 여성주의자가 아니든 마찬가지다. 게다가 전통적인 방식으로 가정을 이루고 가사와 자녀 양육을 책임지면서 생계를 남편의 벌이에 의존하는 여성들은 자신들이 남편으로부터 더 많은 사랑과 이해를 받는다고 말했다고 이들은 밝혔다.

이는 사람들이 직장에서보다는 가정에서 덜 정치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또 여성운동의 올바른 방향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남자나 여자 모두 남녀 간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직장 생활을 하는 남녀 간의 소득 격차에 대한 태도는 바뀌었다. 20년 전 월스트리트저널이 미국 직장여성들이 겪는 ‘유리 천장’(여성의 승진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장벽) 문제를 처음 거론했을 때만 해도 문제의 초점은 여성들에게 불공평한 직장 내 태도였다. 지금도 ‘유리 천장’은 존재하지만, 요즘 여성들은 이를 편견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로 받아들이며 과거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성들은 가족이나 기타 자신이 소속된 사회와의 접촉을 제한할 위험이 있는 일은 남성이 맡아주기를 원하며, 그로 인해 남성들이 더 많은 봉급을 받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려 한다. 또 ‘유리 천장’을 느낄 필요가 없는 여성 창업도 크게 늘었다. 여성기업연구센터에 따르면 1997년부터 2004년 사이 전체 신규 기업 창업은 9% 증가하는 데 그친 반면 여성의 창업은 17%나 늘어났다.  

10. 06. 29.  

P.S. 같이 읽어봄직한 책은 <여자의 뇌, 여자의 발견>(리더스북, 2007)의 속편으로 나온 루안 브리젠딘의 <남자의 뇌, 남자의 발견>(리더스북, 2010)이다. 소개는 이렇게 돼 있다. 

베스트셀러 <여자의 뇌, 여자의 발견>에 이은 하버드대학교 신경정신과 루안 브리젠딘 박사의 후속작. 생생한 문장과 흥미진진한 일화를 통해 남자 뇌의 일생에 대한 복잡한 연구 결과를 매우 읽기 쉽고 재미있게 풀어냈다. 남자가 바람을 피우는 이유, 게이가 되는 비밀, 남자가 아빠가 되면 자상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 등에 대해서 궁금하다면 이에 대한 호기심을 해결해 줄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콩세알 2010-06-29 17:04   좋아요 0 | URL
'전쟁을 선호하고 모험을 즐기고 영웅을 숭배하는' 남성성을 왜 지켜야할까요? 좀 줄어들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로쟈 2010-06-29 17:08   좋아요 0 | URL
소위 보수적 남성관이죠. 축구에 대한 열광을 보면 남성성에 대한 숭배는 쉽게 줄어들 거 같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