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문화비평가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키워드>(민음사, 2010)는 두 주쯤 전에 나온 책인데, 이번주에 리뷰기사들이 올라오고 있다. 문화연구를 위한 요긴한, 필수적인 기본어휘 사전이다. 기본교양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줄 만한 책.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두 주 전에 구입해놓고 아직 펼쳐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 기사다.   

한겨레(10. 10. 02) 같은 말 쓰는데 왜 말이 안 통하는 걸까? 

영국의 문화비평가 레이먼드 윌리엄스(1921~1988·사진)는 현대적 의미의 ‘문화 연구’를 창시한 사람으로 불린다. 문화라는 다소 모호한 분야를 연구와 비평의 대상으로 삼아 평생 천착했다. 마르크스주의 영향을 짙게 받았고 젊은 시절 한때 공산당에도 가입했던 그는 케임브리지대학 재직 시절에 스튜어트 홀, 테리 이글턴 같은, 나중에 자신을 이어 문화 연구·문화 비평의 대표자가 될 제자들을 길러냈다. 이번에 처음 번역된 <키워드>(1976)는 <문화와 사회>(1958), <기나긴 혁명>(1961)과 함께 그의 대표작이다



웨일스 지방의 철도노동자 아들로 태어난 윌리엄스는 케임브리지대학에 진학한 뒤 2차대전 중에 징집됐다가 전쟁이 끝난 뒤 복학했다. 그가 군대에 있었던 기간은 4년 반이었는데, 이 공백을 거쳐 대학에 돌아온 뒤 적잖은 혼란을 겪었다. 일종의 문화충격이었는데, 전쟁 전의 케임브리지 분위기와 제대 후 대학 분위기가 아주 달랐던 것이다. 윌리엄스가 받은 것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왜 같은 말을 쓰는데 서로 다른 말을 쓰는 것 같이 느껴지는 걸까? 이 의문 속에서 윌리엄스가 포착한 것이 문화였다. 문화가 바뀌었던 것이다! 그는 그 문화 현상이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변화하는지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10여년의 연구 끝에 나온 결과물이 <문화와 사회>였다. 여기서 윌리엄스는 1780년부터 1950년까지 문화 변화의 역사적 지도를 그려냈다. 윌리엄스는 문화 연구를 좀더 진척시켜 3년 뒤 다시 <기나긴 혁명>을 펴냈는데, 여기서 ‘기나긴 혁명’이라는 모순어법으로 그가 지목한 것이 ‘문화혁명’이었다. 그가 보기에 근대 세계는 민주주의 혁명, 산업혁명 외에 제3의 혁명을 일으켰는데, 그것이 바로 문화혁명이다. 문화혁명은 수백년의 장구한 시기에 걸쳐 근본적 변화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기나긴 혁명의 과정 속에 살고 있으며, (…) 그것은 인간과 제도를 변혁시키는 진정한 혁명이다.”

<키워드>는 완결되기까지 30년이 걸린 저작이다. 윌리엄스는 <문화와 사회>를 완성한 뒤, ‘문화’라는 단어를 포함해 핵심 어휘들을 설명하는 어휘집을 부록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편집 과정에서 부록이 빠지고 말았다. 윌리엄스는 그 후 20년 동안 더 많은 용례를 수집하고 자료를 축적했다. 그리하여 어휘 130개를 추려 정리한 결과가 이 책이다. 이 책의 부제는 ‘문화와 사회의 어휘집’인데, “사회적·문화적 논의의 핵심 영역에서 사용되고 있는” 어휘들이 어디에서 기원해 어떤 변화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지 그 역사를 보여준다.

이 책에는 문학·미학·표상·무의식·자유주의 같은 비교적 논란이 적은 어휘도 있지만, 계급·민주주의·평등 같은, 사회적 갈등을 안고 있는 어휘도 있다. 윌리엄스가 특히 주목하는 것이 이렇게 해석의 진폭이 큰 단어들이다. 이런 단어들은 사전을 찾아본다고 해서 의미가 분명해지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이런 말들은 개인의 신념과 관련되는 경우가 많아서 그 말의 용법과 역사를 잘 이해하지 않으면 편견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경우는 대개 이런 어휘들을 구사할 때다. 불통의 원인이 되는 말들을 역사적으로 살핌으로써 소통의 장을 마련해보겠다는 뜻이 이 어휘집에 담긴 셈이다.

이렇게 사용하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그 의미가 확연히 달라지는 단어 중 하나가 ‘이데올로기’(ideology)다. 1796년 ‘정신의 철학’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신조어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 이 단어의 시작이다. 이데올로기라는 말을 널리 보급한 사람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나폴레옹은 민주주의 옹호자들을 “인민에게 주권 행사의 능력이 없는데도 그들을 주권자의 자리로 끌어올리려 현혹하는 무리”라고 비난하면서 이들의 주장을 ‘이데올로기’라고 불렀다. 이렇게 하여 ‘공론’(空論)이란 뜻의 이데올로기라는 말이 퍼졌는데, 그 경멸적인 의미를 받아 쓴 진보주의자들이 마르크스·엥겔스였다. 두 사람은 <독일 이데올로기>(1845~1847)에서 독일 급진파 사상들이 역사의 실제 과정으로부터 괴리됐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이데올로기라는 단어를 썼다. 현실을 거꾸로 이해하는 허위의식이라는 뜻이었다. 이 경우 이데올로기의 반대어는 ‘과학’이다.

마르크스는 다른 곳, 이를테면 <정치경제학 비판 서설>에서는 이데올로기를 단순히 물질적 과정에 대응하는 관념 체계라는 다소 중립적인 의미로 쓰기도 했는데, 이런 용법은 특히 뒷세대 레닌의 저작에서 두드러졌다. 레닌은 이데올로기를 계급적 토대와 조응하는 관념 체계로 이해해,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 경우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보다 더 올바르고 진보적이고 진실하다. 윌리엄스는 이데올로기라는 말이 이렇게 두 가지로 쓰이고 있지만, 대개의 경우엔 나폴레옹적 의미로 통용된다고 말한다. 자유주의 진영에서 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라는 말이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이런 의미의 이데올로기는 나폴레옹 시대와 마찬가지로 사람을 모욕하는 말이다.”(고명섭 기자) 

10. 10. 02.   

P.S.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책은 다수 번역돼 있다. 주저로 거명된 <문화와 사회>(이화여대출판부, 1988)까지 포함해서. 이미 절판된 지 오래인 것이 흠이다. 국내에 가장 먼저 소개된 건 <이념과 문학>(문학과지성사, 1982)인 듯싶은데, 원제는 <마르크스주의와 문학>이다. '마르크스주의'란 말을 서명에 쓸 수 없었던 시대상의 반영이다. 이 책은 다른 역자에 의해 <문학과 문학이론>(경문사, 2003)으로 번역됐다가 원래의 제목을 찾아 <마르크스주의와 문학>(지만지, 2009)으로 다시 나왔다. <키워드>도 나온 김에 엊그제 구입한 책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헌내 2010-10-02 17:44   좋아요 0 | URL
음..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저서는 어휘의 정의에 대한 분석인가요?
아니면 기호 - 언어학적 접근인가요?

로쟈 2010-10-03 08:45   좋아요 0 | URL
키워드들의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의미를 풀이한 사전이에요.
 
글로벌 리스크와 세계시민사회

몇 권의 신간과 함께 오늘 주문한 책은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글로벌 위험사회>(길, 2010)다. <위험사회>(새물결)의 문제의식을 더 확장한 걸로 보이는데, 소개기사를 보니 글로벌 리스크를 통제하기 위한 방책으로 벡은 세계시민주의에 주목한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이기도 해서 챙겨놓는다. 

한겨레(10. 09. 30) "글로벌화된 리스크 세계시민주의가 통제가능” 

인간 문명이 최고조로 발전을 이뤘다는 지금, 기후변화는 그 모든 것을 앗아갈 치명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 획기적인 에너지원으로 칭송받던 핵발전소는 체르노빌 사건에서 보듯 엄청난 재앙을 가져다줄 수 있는 위협 요소다. 식량난을 해결해줄 것이라고 만든 유전자 조작식품은 생태계에 치명적인 왜곡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 이처럼 현대사회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갖가지 위험에 둘러싸여 있다. ‘위험사회’라는 말로 우리가 사는 시대의 성격을 날카롭게 규정했던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사진)이 2007년에 쓴 <글로벌 위험사회>가 최근 번역돼 나왔다. 일찌기 위험사회가 지닌 성격으로 ‘글로벌 위험 공동체’를 제시해왔던 벡은, 이 책에서 본격적으로 세계적 차원의 위험사회론을 펼친다.   

<글로벌 위험사회>에서 벡은 ‘리스크’와 ‘재앙’을 구분해 설명한다. 이미 닥친 재앙과 달리, 리스크는 가능성으로서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미래의 사건이고 재앙의 예견이다. 여기서 나오는 핵심 개념이 바로 ‘연출’이다. 벡은 “글로벌 리스크는 글로벌 리스크의 현실 연출”이라고 말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위험은 연출을 통해서만 현실성을 얻을 수 있다. 예컨대 기후변화의 경우 아직 그 위험이 현실로 모두 나타나진 않았지만, 언론을 통해 사람들에게 그 위험성을 알려주는 등 미래에 일어날 재앙을 현실 속에 나타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연출을 통해 리스크는 세상을 바꾸는 정치적인 힘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리스크의 분배 자체도 중요하지만, 도대체 무엇을 리스크로 볼 것인가가 더 중요하게 된다. 누가 어떻게 리스크를 현실 속에 연출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지배관계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테러를 막겠다며 미국 정부가 일으킨 이라크 전쟁이 수많은 이라크의 민간인 사망자를 낳은 것은 그 단적인 사례다. 곧 “리스크 정의가 새로운 글로벌 불평등을 산출한다”는 것이다.

또 벡은 현대사회에서 세계화된 리스크는 더는 개별 국가에서 대응할 수 없다는 점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생태·경제·테러리즘 등으로 글로벌 리스크를 구분한 벡은, 글로벌 리스크를 통제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세계시민주의’에 주목한다. 글로벌 위험사회에서 위험에 가장 많이 노출된 소외 집단이 더욱 많은 발언권을 얻어 불평등을 벗어날 수 있으려면, 개별국가의 틀을 뛰어넘은 세계주의에 기대야 하기 때문이다.

벡이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은, 글로벌 리스크에 대한 ‘무지’를 동력으로 삼는 성찰의 힘이다. 그는 “현대사회는 실패해서가 아니라 성공해서 병을 앓는다”고 진단한다. 글로벌한 위험에 노출된 이들의 다양하고 실질적인 목소리와 자기 성찰과 비판에 귀를 열 때 글로벌 리스크는 새로운 미래를 여는 ‘계몽’의 가능성이 될 수 있다는 진보적 인식이다.(최원형 기자) 

10. 09.29.  

P.S. <글로벌 위험사회>는 물론 <위험사회>와 짝이 되는 책이지만, 개인적으론 지그문트 바우만의 책들과 나란히 놓고 싶다. <유동하는 공포>(산책자, 2009)와 <지구화, 야누스의 두 얼굴>(한길사, 2003)이 내가 염두에 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컨디션이 좋지 않아 요양원 환자 모드로 휴일 오후를 보내고 있다. 딱 생각나는 것이 헤르만 헤세의 <요양객>(을유문화사, 2009)이지만, 나는 책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다 눈길을 보낸 책이 한창훈의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문학동네, 2010). 알라딘에서 내달 저자와 함께 하는 바다낚시 행사가 있다는 소식이 무의식적으로 꼬드긴 모양이다. 

  

서가의 책을 빼내 펼치니 책 한가득 싱싱한 바다내음이 물씬 풍긴다. 바다낚시를 해본 적이 없고 보나마나 이런 컨디션으론 배멀미나 하기 십상이지만, 마음은 잠시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본다. '한 생계형 낚시꾼이 몸으로 기록한 바다의 별천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한번도 못 먹어봤다는 말은 한번도 못 가봤다는 말보다 더 불쌍하다!"는 문구가 뒷표지에 박혀 있는데, 흠 이럴 땐 한번 먹어나보고 죽어야겠다는 '의지'도 생긴다(내친 김에 그의 이야기와 소설로 <한창훈의 향연>과 <나는 여기가 좋다>도 손에 들고 싶어진다).  

한 일간지 리뷰를 인용해본다. 

깊은 바다의 푸른 서정을 물에 떨어뜨린 잉크처럼 활자로 풀어온 작가 한창훈. 그가 섬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고 다시 섬으로 돌아가 ‘생계형 낚시’로 잡아낸 물고기들과 해산물에 대한 실용적인 정보와 더불어 각 항목마다 소설 같은 에피소드를 곁들여 펴낸 이 책은 1814년 손암 정약전 선생이 흑산도에 유배되어 집필한 ‘자산어보’를 각 장마다 머리에 인용해놓았거니와, 손암 선생의 업적을 보충하면서 입맛과 체험담을 특별히 조미료로 첨가한 21세기판 ‘현산어보’라 할 만하다.

첫 키스 기념으로 남녀가 포장마차에서 한창훈을 불러내 같이 먹었다는 병어회. 세월이 흘러 그들의 인연이 엉클어졌을 때 그 친구와 다시 청했던 것도 그 병어회였다. 결혼해서 어찌어찌 살고 있는 와중에 부모의 반대로 헤어졌던 섬 남자를 다시 만나, 그 시절 약속처럼 그가 늘 되뇌던 놀래미 회를 산처럼 쌓아놓고 한 점도 먹지 못한 채 눈물 속에 뛰쳐나온 후 그 맛난 회가 아쉬워 입맛을 다시는 아주머니의 회한도 눈물겹고 우습다.

하지만 이 책에서 이런 에피소드들은 사소한 양념일 뿐 엄연한 주인공들은 물고기와 해초 자신들이다. 그것들을 요리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실제 사진들과 어쩔 수 없이 잡고 죽인 그것들에 대한 한창훈의 지극한 연민과 애정이다. 어쩌다 먹어야 되는 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냐고, 한창훈은 짐짓 탄식한다.(세계일보)

어쩌다 먹어야 되는 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냐란 탄식은 "그리고 저 때문에 죽어간 해양생물들, 미안합니다. 하필 저는 먹어야 하는 입을 가지고 태어났지 뭡니까."란 서문의 문장에서 가져온 듯싶다. 그 서문의 다른 대목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좋아하는 것과 잘 아는 것은 다르다고들 합니다. 제가 이 책을 쓴 이유입니다. 깊숙이 친해지게 되는 것, 어린아이처럼 깔깔대게 하는 것, 이윽고 뒤엉킨 매듭을 하나하나 매만지게 되는 것, 머물다보면 스스로 그러하게 되는 것, 말입니다. 산은 풀어진 것을 맺게 하지만 바다는 맺힌 것을 풀어내게 하거든요.

사람의 인연에 비유하자면, 풀어진 인연은 산에 가서 맺고, 마음에 맺힌 것은 바다에 가서 풀어야 하는 모양이다. 엊저녁에 술안주로 먹은 홍합탕의 맛이 되살아난다. 기운을 좀 차려봐야겠다... 

10. 09. 26.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글샘 2010-09-26 23:31   좋아요 0 | URL
세계일보 기자도 맛이 갔을 때 썼나봅니다. 자산어보랑 현산어보를 섞어쓰는 걸 보니... ㅎㅎ
언제 부산오실 일 있으면 한번 바다구경하면서 회라도 한 접시 대접할게요.
바다는 맺힌 걸 풀어주는 데라니까는, 맺힌 거 하나 갖고 오시면... ㅎㅎㅎ

로쟈 2010-09-27 18:42   좋아요 0 | URL
네, 감사. 1년에 한번 갈까 말까하지만요.^^;

2010-09-27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7 18: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쉽싸리 2010-09-27 13:29   좋아요 0 | URL
기자가 대개 자산어보라 칭하는 것을 21세기판 현산어보라 칭했으니 둘의 차이를 알고 쓰지 않았나 추측해봅니다.
왜 현산어보인지는 현산어보를 찾아서라는 책에서 저자가 자세히 다루고 있기는 합니다.

로쟈 2010-09-27 18:43   좋아요 0 | URL
네, 그게 통일이 안되더군요...
 

개인적으로 어제의 저자는 중국사학자 티모시 브룩이었다. 그의 방한 강연과 관련한 기사들을 읽고는 뒤늦게 구내서점에서 <능지처참>(너무북스, 2010)과 <쾌락의혼돈>(이산, 2005)을 구입해서다(<베르메르의 모자>와 <근대 중국의 친일합작>은 서가에 없었다). 조너선 스펜스의 뒤를 잇는 학자란 평판인데, 기대를 가져도 좋을 듯싶다.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세계적인 중국사학자 브룩 교수는 최근 완간한 <하버드 중국사>에 대해 “중국인의 관점에서 바라보려 했고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초점을 맞췄다”고 했다.  

경향신문(10. 09. 15) “중국사 공부, 창문으로 집안 들여다보는 일” 

서구 학계에서 조너선 스펜스를 잇는 중국사학자로 명망을 얻고 있는 티모시 브룩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 교수(59)가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미 하버드대에서 명대(明代) 경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쾌락의 혼돈> <베르메르의 모자> <능지처참> 등의 저서가 국내에 번역돼 한국 독자들과도 친숙하다.  

최근작 <능지처참>(박소연 옮김·너머북스)은 1905년 베이징의 한 광장에서 능지형에 처해진 살인범의 사진이 서구에 던진 충격을 시작으로 중국 고유의 형벌이 ‘잔혹하고 미개한 중국’의 이미지를 유포시키는 과정을 추적한 역작이다. 또 <쾌락의 혼돈>(이정 옮김·이산)은 사농공상의 신분제도와 소농경제를 기반으로 한 명에서 상업이 발달하면서 중국이 동서무역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역사를 그렸다. <베르메르의 모자>(박인균 옮김·추수밭)는 네덜란드 화가 베르메르의 그림을 도상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17세기 중국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브룩 교수의 역사책은 특정한 주제에 집중하고 세부가 풍성해 생생한 느낌을 주는 게 특징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역사학도가 되기 전 토론토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전통적인 사료 대신 지방지·공안·일기·연감 등 당대인들의 실제 삶을 알 수 있는 소소한 자료를 살펴본다. 전체를 통제하려 들거나 어떤 판단을 하기 전에 그 시대를 제대로 복원한다는 것이 역사학자로서 그의 입장이다.

“대학 시절 일본 불교에 대한 책을 읽고 동양에 흥미를 느꼈다. 당시 토론토대에는 일본문화 관련 수업이 없어서 대신 중국어를 공부하다가 중국사에 관심을 갖게 됐다. 모든 문화는 전제와 판단의 근거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문화 속으로 들어가는 건 상당히 힘든 일이다.”

그는 서구학자로서 중국사를 공부하는 걸 “바깥에서 창문으로 집안을 들여다보는 일”에 비유했다. "중국인들은 자기 문화를 바라볼 때 과거와의 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서구학자들은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선입견이 없다. 물론 한계가 있다. 우리가 바깥에서 창문을 통해 집안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내가 창문을 통해 한쪽 면밖에 볼 수 없다고 고충을 토로하자 내 중국인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안에서 보면 아예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고.” 

그는 역사연구에서 소위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하는 서구적 시선을 극복하고자 노력한다. 서구적 시선은 서구인뿐 아니라 동양인 자신에게도 내면화돼 있다. <능지처참>은 이런 노력이 엿보이는 저서다. 서구인은 능지형의 잔혹함을 비난하지만, 형벌의 이미지는 제국주의 시기인 20세기 전후 서구에서 의도적으로 생산, 소비된다. 이미지와 현실의 괴리는 1905년 중국의 능지형 사진이 조르주 바타이유의 <에로스의 눈물>에서 에로틱한 이미지로 쓰이는 데서 드러난다. 



브룩 교수는 역사를 일방적으로 단죄하는 것을 경계하는데 그런 입장은 <근대중국의 친일합작>(박영철 옮김·한울)에 피력돼 있다. 이 책에서 그는 “항일전쟁 기간 동안 대부분의 중국인은 실제 일본에 저항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아편전쟁의 역사를 보면 중국 내 판매상이 없었다면 아편이 대륙 전체로 퍼질 수 없다는 결론을 얻는다. 이는 우리의 친일파 단죄에서도 시사점을 갖는다.

“책을 쓸 때 독자들이 지루해하지 않을까 걱정한다”는 그는 요즘 1610년대에 살았던 명나라 젊은이의 일기를 토대로 당시 양쯔강 삼각주의 생활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상하이 서쪽 지하싱 지역에 살았던 이 젊은이는 신사층의 지식인이자 예술가, 예술품 수집가였다. 한편 명대의 상품 가격 변화를 통해 당대의 문화적 가치를 저울질하는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명대의 상업 발전이 자본주의로 발전할 수 있었는지, 즉 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이다. “발전한 상업경제가 자본주의 발전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우선 당시 아시아에서는 에너지 가격이 너무 높아서 공업화에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유럽의 경우 절대왕정과 상인들의 공조체제가 긴밀했으나 중국의 경우 그렇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브룩 교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케임브리지 중국사>에 맞서는 <하버드 중국사>(6권)의 총편집을 맡아 지난 6월 완간했다. 너머북스가 국내 번역 출간을 준비 중인 이 책에 대해 그는 “중국인의 관점에서 바라보려고 했고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관심을 두었다”고 소개했다. 브룩 교수는 오는 17일 성균관대에서 <능지처참>을 소재로, 서울대에서 <베르메르의 모자>를 소재로 대중강연을 갖는다.(한윤정 기자) 

10. 09. 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일자 경향신문의 '책과 삶' 꼭지를 옮겨놓는다. 신간들 가운데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2010)와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를 묶어서 다루고 있다.  

경향신문(10. 09. 18) 책을 왜 쓰느냐 묻거든 그곳에 길을 만들려 

한국인의 문해율은 2008년 기준 98.3%다. 문해율이란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의 비율을 뜻한다. 98.3%라면 한국의 성인 가운데 문자를 읽고 쓰는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문자를 읽고 쓸 능력이 있다는 것과 실생활에서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은 다른 얘기다. 튼튼한 두 다리를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등산을 할 수 있지만, 모두가 산에 오르지는 않는다. 그러고보면 읽기·쓰기와 등산은 닮은 데가 있다. 혼자 가든 떼를 지어 가든 산에 오르기 위해선 결국 자신의 다리를 움직여야 한다. 읽기와 쓰기 역시 개인적인 행동이다. 하지만 산이 있어야 산에 오를 수 있듯 읽기는 앞서 쓴 사람이 있기에 가능하고 쓰기는 앞으로 읽을 사람을 염두에 둔 행동이다. 여기, 쓰기와 읽기의 최고 고수들이 쓴 책이 마주보며 놓여있다. 한 사람은 두말할 나위 없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영국의 작가, 한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책은커녕 자신이 욕심내는 책조차 다 읽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리라는 사실을 아직도 섭섭해 하는 한국의 지독한 책벌레다. 살았던 시대와 장소는 다르지만 두 사람이 각각 쓴 책은 투수와 포수처럼 나란해 보인다. 



‘국민공통교육’을 받은 사람치고 작가 조지 오웰(1903~1950)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이력은 명문 이튼스쿨 졸업, 식민지 버마에서 경찰 생활, 파리와 런던에서 최하층민 생활, 스페인 내전 참전 등 ‘20세기 초중반 시대의 격변을 온몸으로 살았다’ 정도로 요약하기로 하자. 그는 소설 <동물농장>, <1984>로 유명한데 이건 그가 쓴 방대한 글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는 생전에 소설 6권, 르포 3권, 에세이집 2권 등 11권의 책을 냈거니와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서 수백편의 길고 짧은 칼럼과 서평, 에세이를 썼다. 이 책은 에세이 29편을 골라 번역한 것이다. 
 
표제작인 ‘나는 왜 쓰는가’는 나치의 파시즘과 스탈린식 공산주의, 그리고 자본주의 등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에 반대했던 오웰의 작가적 입장이 명확히 담겨 있다. 그는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오웰이 작가의 작업을 정치 선동가의 역할과 동일시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가 말하는 ‘정치적 글쓰기’란 어떤 거짓이나 폭로하고 싶은 것을 ‘미학적 경험’에 입각해 쓰는 것이다. 그는 “<동물농장>이 정치적 목적과 예술적 목적을 하나로 융합해보려고 한 최초의 책이었다”고 고백한다.

글쓰기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정치와 영어’라는 제목의 매우 신랄한 에세이를 볼 필요가 있다. 오웰은 당시 지식인들의 글들을 실례로 들어가며 죽어가는 비유, 지극히 불분명한 표현, 젠체하는 용어, 무의미한 단어들을 집어냈다. 마치 시범을 보이듯 이 책에서 예리한 통찰과 특유의 비유, 신랄한 독설의 진수를 보여준 오웰이 일관되게 강조한 것은 “의미가 단어를 택하도록 해야지, 그 반대가 되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전하고자 하는 뜻을 최대한 분명하게” 한 다음 “뜻을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표현”을 택해야 “진부하거나 뒤섞인 이미지, 이미 만들어진 어구, 불필요한 반복, 그리고 허튼소리와 막연함을 대체로 피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글쓰기 6원칙을 제시하는데 이것만 가지고 글쓰기 교재를 써도 될 정도로 포괄적인 동시에 실용적이다. 



이 책은 오웰의 르포집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번역하기도 한 번역가 이한중이 4권으로 엮인 오웰의 원문 에세이 저작집에서 명문(名文)으로 평가받는 것들, 오웰의 인생에서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술회된 것들을 뽑아 시간순으로 배치했다. 오웰은 자신의 전기를 쓰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는데 편역자의 말마따나 이 책은 오웰의 자서전으로 읽을 수도 있다.

오웰은 생애 자체가 워낙 다채로웠다. 그리고 철저히 체험에서 우러나온 에세이들을 썼다. 런던 부랑자들의 삶을 묘사한 ‘스파이크’, 버마 경찰 복무 경험을 그린 ‘코끼리를 쏘다’, 스페인 내전 참전 회고담인 ‘스페인내전을 돌이켜본다’, 생계를 위해 서평을 쓰면서 느낀 역겨움을 여과없이 드러낸 ‘어느 서평자의 고백’ 등 어느 것 하나 지루한 게 없다. ‘빨주노초파남보’가 무지개를 이루듯 29편의 글이 제각각 고유한 색깔을 뽐내며 글쓰기라는 그 무엇으로 향하는 튼튼한 다리를 만들어냈다.



‘인터넷 서평꾼’으로 유명한 ‘로쟈’가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 이어 두번째로 낸 서평집이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가 에세이 범주에 속하는 글들을 모은 것이라면, 이번 책은 본격적인 서평집에 해당한다. 지난 10년간 각종 매체에 썼던 서평, 그의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에 올렸던 글들을 30개의 꼭지로 정돈했다. 
 
로쟈의 서평을 보면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한 장면이 떠오르곤 한다. 주인공 톰 크루즈가 눈 앞에 떠오른 가상의 스크린에 매우 빠르게 명멸하는 화면들을 검색하면서 양손으로 그것들을 이리 저리 짜맞추는 유명한 장면 말이다. 로쟈가 블로그에 공개한 ‘공익적인’ 글들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평론가 신형철은 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로쟈는 문학·철학·역사학·사회학을 넘나들면서 배치하기·짝짓기·지도 그리기·교정하기 등등의 테크닉을 발휘하여 저 ‘(인간 행동을 이해하는) 다양한 시스템’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한다.”

그는 요즘 강조되는 ‘맥락적 책읽기’를 일찍부터 보여줬다. 그의 블로그는 책과 작가에 관한 ‘위키피디아’를 방불케 한다. 시인이자 소설가 장정일이 메인 게스트로 나온 어느 ‘북포럼’에 패널로 나가 발표한 글에서 로쟈는 장정일의 작품이 읽히던 시대, 장정일의 작품세계를 따라가면서 이성복·황지우·유하 등의 시인, 마광수, 밀란 쿤데라, 노무현, 이문열, 황석영, 강유원 등을 줄줄이 떠올린다. 작년에 나온 김규항의 <예수전> 위에 한완상의 <예수 없는 교회>를 겹쳐 읽으면서 ‘혁명’이라는 키워드를 뽑아낸 뒤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 한나 아렌트의 <혁명론>으로 나아가는 식이다. 

이런 일은 그가 ‘지독하다’는 표현으로는 담아내지 못할 정도로 읽어대기에 가능했다. 간간이 등장하는 번역자의 태만에 의한 오역이나 ‘꼴’을 갖추지 못한 책에 대한 꾸짖음은 준엄하다. 그러나 “우리는 똑똑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으면서 똑똑해진다”고 말하는 로쟈의 책에 대한 태도는 대체로 겸손하고 따뜻하다. 그는 말한다. “책을 읽기 위해서는 책을 쓰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만드는 사람이 있어야 하며, 내게 그 책을 읽을 역량이 갖춰져야 한다. 또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허락돼야 한다”고. 그래서 “고맙다”고. 이번엔 독자들이 로쟈에게 고마워해야 할 차례다.(김재중기자) 

10. 09. 17. 

P.S. 흠, '지독한 책벌레'라는 것이 '로쟈'에 대한 흔한 인상인 듯하다. "닥치는 대로 엄청난 양의 책을 읽어대는" 같은 이미지라면 사실 나와 그다지 닮지 않았다. 나보다 더 많이, 더 집요하게, 더 지독하게 읽는 독자가 왜 없겠는가. 다만 그 '책벌레'가 '공익' 근무요원처럼 매일같이 책에 관한 소개들을 정리하고, 자신이 쓴 리뷰와 잡담을 많은 이와 공유하기 위해 애쓰는 자를 가리키는 거라면 크게 어긋나진 않을 것 같다. 책의 서문에 적었듯이, 지난 3년간의 집중 '복무'를 뒤로 하고 이젠 '예비역'의 자세로 생활하려고 한다. 한데 '후임'은 대체 언제나 배정되는 것일까?.. 

P.S.2. 내친 김에 눈에 띄는 언론리뷰를 더 옮겨놓는다.   

한겨레(10. 09. 18) 인터넷 서평꾼 ‘로쟈’의 비평모음집

그는 책벌레다. 그것도 지독한. 아마도 우리 시대 가장 큰 위를 가진 책벌레일지도 모르겠다. 인터넷 서평이라는 새로운 영역 개척의 선두에 섰던 그의 이름은 이현우, 아니 서평꾼 로쟈다. 인터넷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는 깊이 있고도 성실한 서평들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나 홀대받던 인문학의 가치를 새롭게 일깨우면서, 실용서의 범람에 지쳐 있던 이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었다. 그 로쟈가 두번째 책을 냈다. <책을 읽을 자유>는 지난 10년간 로쟈의 책 리뷰를 골라 묶은 책이다. 주제별로 수백권의 책들이 들어서 있는 모양은 도서관과 비슷하다. 그러나 이 도서관은 로쟈만의 분류법으로 가꿔져 있으며, 또 언제나 그렇듯 꼼꼼하고 진지한 서평들이 함께한다. 때로는 일부 책들의 오류에 대해 꽤 신랄하게 짚어내고 있어, 독자로서는 거대한 책의 바다를 항해할 때 요긴한 항해도를 얻은 기분이 든다.

책 첫머리에서 지은이는 자신에게 가장 두려웠던 순간은 바로 책을 읽을 수 없을 때라 고백한다. 매일 갈아먹어야 할 양식에 물렸던 시간들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끔찍했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결국 그는 다시 책으로 돌아간다. 언제나 그랬듯 자신이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자유는 바로 ‘책을 읽을 자유’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책장을 넘기다 보면, 로쟈가 이 자유를 정말 만끽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600쪽에 이르는 이 책은 올가을 이 땅의 책벌레들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은혜로운 양식이다.(윤은숙 기자)   

한국일보(10. 09. 18) 인터넷 서평꾼 '로쟈'의 세상 꼬집기

'로쟈'라는 필명으로 잘 알려진 인터넷 서평꾼 이현우씨의 두번째 서평집. 블로그를 비롯해 신문, 잡지 등 매체에 지난 10년 간 기고했던 서평들을 한 곳에 모았다. 시인 고 기형도의 <기형도 전집>,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한나 아렌트의 <칸트 정치철학 강의> 등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탐독한 147권의 책에 대한 사유의 흔적을 30개의 키워드아래 모았다.

그의 글 곳곳에는 강한 현실비판 의식이 투영돼 있다. 서평을 그냥 글쓰기가 아니라 '비평행위'로 여기는 저자의 자의식을 엿볼 수 있다. '과두정은 부자의 이익을 위한 통치형태이며 민주정은 빈자의 이익을 위한 통치형태'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구절에 밑줄을 그으며 '강부자 고소영 내각'을 꼬집고, 일본 우익의 사상적 본질을 해명한 마쓰모토 겐이치의 <일본 우익사상의 기원과 종언>을 읽으며 반공주의밖에 내세울 것이 없는 한국 우익의 사상적 빈곤을 비판한다.(이왕구 기자)

중앙일보(10. 09. 18) 노련한 가이드와 함께 오르는 인문학 봉우리 

저자는 ‘로쟈’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인터넷 서평가다. ‘로쟈의 저공비행’이란 그의 블로그엔 매일 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드나든다. 그가 지난 10년간 쓴 147편의 서평을 모아 책을 냈다.저자는 서평을 총 30개의 주제로 분류했다. 예를 들어 ‘폭력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아래 『폭력의 철학』『폭력의 시대』『러시아 혁명』『성스러운 테러』등에 대한 서평을 엮는 식이다.

주제는 매우 광범위하다. 문학, 미술, 고전, 역사, 철학, 학술, 글쓰기, 번역 등을 망라하고 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서평을 비평한 것도 있다. 인문학자(한림대 연구교수)라는 배경 때문인지 인문학적 관심에서 고른 책들이 많다. 재테크 책이나 자기계발서를 편식하는 일반 독자들은 아마 제목도 못 들어본 책들이 태반일 것이다. 하지만 산에 갈 때 반드시 정상에 올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올레길을 걸으며 산을 완상하는 것도 좋다. 올레길을 가다 ‘저 봉우리를 한번 올라가 봐야지’라고 맘을 먹는 것처럼, 이 책을 읽고 ‘이건 한번 읽어봐야지’라는 느낌을 받으면 족하다.

그의 서평은 단순한 책소개를 벗어나 비평에 가깝다. 따뜻한 찬사를 늘어놓다가도 매몰찬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독자들에겐 독서를 자극하는 강력한 흥분제가 될 것이다.

“나는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에어컨이 고장 나 창문을 열어놓고 달리는 저녁 버스의 형광등 불빛 아래서 읽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책장을 넘기며 그의 글들을 읽을 때, 나는 이 세상에서 그만 사라져도 좋을 듯 했다.”

올 가을,‘로쟈’라는 유능한 가이드를 따라 ‘책을 읽을 자유’를 누리는 것도 좋을 듯 하다.(정철근 기자)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이에자이트 2010-09-18 16:39   좋아요 0 | URL
영어교사들이 로쟈님이 심혈을 기울인 오역 바로잡기를 정독했으면 좋겠습니다.

로쟈 2010-09-20 08:43   좋아요 0 | URL
ㅎㅎ 필요한 독자들에게나 참고가 되면 되는데요.^^;

사과나무 2010-09-19 13:58   좋아요 0 | URL
'한데 '후임'은 대체 언제나 배정되는 것일까?'

신검을 통과라도 해야 군대에 가죠.. 흑흑...


로쟈 2010-09-20 08:43   좋아요 0 | URL
요즘 신검이 그렇게 어렵나요? 여긴 '자원'이긴 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