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와 강의, 연재원고, 행사 등이 두 주간의 주요 일정이었는데, 그래도 페이퍼를 쓸 시간이 없었는데, 달력을 보니 내주부터는 원고와 강연의 쓰나미다. 지체되고 있는 일들을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따로 '서재지기'를 두어야 하지 않나란 생각마저 든다. 그런 와중에도 주말 북리뷰를 읽고 몇권을 메모지에 적어놓는다. 오늘 외출하는 김에 서점에 들르면 아마 손에 넣게 될 것이다. 그 중 하나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모두스 비벤디>(후마니타스, 2010). 어디서 들으니, 바우만 수용은 국가나 지역마다 좀 차이가 나는데, 아르헨티나에서는 열광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고. 바우만의 책을 꼬박꼬박 챙길 때면 나도 아르헨티나인이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풀란드와 아르헨티나라... 고명섭기자의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 이번 책은 분량이 짧아서 내주에 쓸 서평감으로도고려중이다.    

한겨레(10. 10. 16) 잉여인간이여, 사냥꾼에 맞서 싸워라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85·사진)은 ‘유동성’(액체성)이라는 개념의 소유권자다. 그는 이 유체역학적 용어를 자신의 서명이 들어간 개념으로 주조해 현대 사회 현상을 설명하는 데 적용했다. 우리 시대 세계의 질서와 제도가 고체성을 잃어버리고 끊임없이 유동한다는 것이 그의 근본 통찰이다. <모두스 비벤디-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는 그 ‘유동성’ 개념으로 우리 시대를 진단한 2006년 저작이다. 



바우만이 국내에 알려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의 주저 가운데 하나인 <지구화, 야누스의 두 얼굴>이 번역된 것이 2003년이었다. 2008년 이후에 그의 저작들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는데, 먼저 <쓰레기가 되는 삶들>이 나오고, 2009년 <유동하는 공포>와 <유동하는 근대>(한국어판 <액체 근대>)가 번역·출간됐다. 이제 막 우리 학문세계 안으로 진입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사정은 바우만의 본거지인 유럽에서도 그리 다르지 않다. 



1925년에 폴란드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바우만은 사회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1954년부터 바르샤바대학에서 가르쳤다. 그의 폴란드 생활은 1968년으로 끝이 났다. 이 무렵에 폴란드 공산정권이 벌인 반유대주의 캠페인으로 대학에서 쫓겨나고 국적을 박탈당했다. 조국의 버림을 받고 정치적 망명자가 된 바우만은 1971년 영국에 정착해 리즈대학 교수가 됐다. 바우만이 학자로서 명성을 얻는 계기가 된 것은 1989년, 예순네 살 때 펴낸 <모더니티와 홀로코스트>였다. 이 책에서 그는 홀로코스트라는 야만이 근대성(모더니티)의 산물임을 입증했다. 그 뒤 바우만은 ‘유동성’이라는 개념으로 현대세계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저술 작업에 노년의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2000년 <유동하는 근대>를 펴낸 뒤, 2003년부터 <유동하는 사랑> <유동하는 삶> <유동하는 공포> <유동하는 시대>를 잇달아 출간했다. 이번에 우리말로 나온 <모두스 비벤디>는 이 마지막 저작 <유동하는 시대>의 번역판이며, 제목은 이탈리아어판에서 따왔다.

바우만은 근대를 ‘견고한 근대’와 ‘유동하는 근대’로 나누고 견고성(고체성)에 유동성(액체성)을 대비시킨다. 유동성이 바우만의 독창적 개념인 것은 분명하지만, 원천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바우만은 <유동하는 근대>에서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언급한다. 마르크스는 1848년에 쓴 그 기념비적 팸플릿에서 부르주아 세계를 끝없는 유동성의 세계로 묘사한다. “부르주아 시대는 생산의 끊임없는 변혁, 모든 사회적 상황의 부단한 동요, 영원한 불안과 격동을 통해 다른 모든 시대와 구별된다. 견고하고 낡은 모든 관계들은 … 녹아버리고, 새롭게 형성된 것들도 모두 자리를 잡기도 전에 낡은 것이 되어 버린다.” 바우만은 마르크스 시대에 벌써 이렇게 간파된 근대 세계가 최근에 이르러 진정한 유동성의 시대로 전환됐다고 본다. 그가 보기에 이런 전환은 1970년대 10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그 시대는, 요즘 유행하는 용어로 말하자면, ‘신자유주의’가 지배적인 것이 된 시대다.

<모두스 비벤디>는 이 유동성의 시대가 만들어낸 악몽과도 같은 현실을 묘사하고 비판한다. 이 책의 요지는 라틴어 제목 ‘모두스 비벤디’(생활양식)보다는 부제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에서 더 빨리 포착할 수 있다. 유동성이 지배하는 우리 시대는 지구적 차원의 지배 엘리트들에게는 ‘유토피아’일지 모르지만 나머지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불안과 공포가 일상이 된 ‘지옥’의 시대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주자·난민이 돼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고 잉여인간으로 떠도는 시대다. 삶이 처치 곤란한 ‘쓰레기’가 된다. 바우만은 이런 시대의 특성을 ‘열린 사회’의 역설로 설명한다. 카를 포퍼가 전체주의적인 ‘닫힌 사회’에 맞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로 제시했던 ‘열린 사회’는 오늘날 “운명의 횡포에 무방비로 노출된 사회”로 귀착하고 말았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지구 전체를 휩쓸면서 빈곤과 불안과 범죄와 테러도 지구 전체로 퍼졌다. 그리하여 ‘열린 사회’는 두려움으로 오그라든, 공포에 휘둘리는 사회가 됐다.

바우만은 이 책에서 ‘사냥터지기’ ‘정원사’ ‘사냥꾼’이라는 비유를 들어 시대의 근본 특징을 묘사하기도 한다. 전근대 사회는 자연환경을 사냥터로, 인간 자신을 그 사냥터를 지키는 존재로 생각한 사회였다. ‘자연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인간의 사명인 시대였다. 반면에 근대는 ‘정원사’의 시대다. 세계는 일종의 정원이며, 사람들은 자신이 디자인한 모습으로 정원을 꾸민다. 바우만은 정원사의 시대를 ‘유토피아의 꿈’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던 시대라고 말한다. 그 시대가 끝나고 말았다. 지금은 사냥터야 어찌 되든 짐승만 많이 잡으면 된다는 사냥꾼의 시대다. 사람들은 사냥꾼이 되느냐, 사냥감이 되느냐 하는 가혹한 이분법의 처지에 놓였다. 사냥꾼에겐 유토피아지만 사냥감에겐 지옥이다. 바우만은 결론에서 지옥을 거부하고 저항하라고 말한다. “(이 지옥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온갖 종류의 압력에 맞서 용감하게 싸워야만 한다.”(고명섭기자) 

10.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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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6 1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7 16: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두 주 전쯤 교보에서 실물을 보고 흥미를 느끼긴 했지만 구입을 미뤄둔 책이 조너선 스턴의 <청취의 과거>(현실문화, 2010)란 책이다. '청각적 근대성의 기원들'이 그 부제. 그런 제목과 부제만으로는 어떤 책인지 가늠하기 어려운데, 마침 유용한 서평기사가 눈에 띄기에 스크랩해놓는다.  

 

교수신문(10. 10. 11) 근대적 감각 개념의 중심은 ‘청각’ … 자의적 번역 아쉽다  

청각과 듣기에 관련한 좋은 책이 없는 국내 현실에서 『청취의 과거: 청각적 근대성의 기원들』(현실문화, 원제 : Cultural Origins of Sound Reproduction)이 번역돼 나온 것은 국내 독자의 갈증을 해소할 길이 열렸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다. 몇 년 전에 과학사 연구자들에 잘 알려진 MIT의 디브너 연구소에서 열린 음향학 워크숍에서 12명의 학자를 초청한 적이 있었다. 필자도 동양에서 유일하게 초청받았는데 거기에서 저자인 조너선 스턴을 만났다. 이 책은 필자가 관심을 갖고 있는 19세기 음향학사와 관련해 정독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만남은 내게 특별했지만 저자와 많은 대화를 할 시간이 없어 아쉬웠다. 저자는 음향 기술의 문화사적 측면을 폭넓게 연구해온 중견 학자이다.

이 책은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미국에서 음향 재생 기술(전화기, 축음기, 라디오 등)이 어떠한 사회문화적 함의를 갖는지를 집중적으로 논의한다. 저자는 음향 재생 기술의 탄생과 사회적 수용의 과정에서 사회문화적 요소의 기여를 치밀하게 밝혀내고 청취 테크닉이 어떻게 구성되고 음향 기술의 변용에 영향을 미쳤는가를 천착한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저자는 시각이 지배하고 있는 근대적인 감각 개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1장에서 저자는 전화기의 발명자인 벨이 만들었고 거기에서 전화기 발명의 단초를 얻었다는 포노토그래프에 논의를 집중한다. 인간의 귀를 부착해 소리에 따라 고막이 진동하는 양상을 기록하게 만들었던 포노토그래프는 고막형 장치가 왜 이후 전화기와 축음기의 기초를 이루게 됐는지를 보여준다.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자동기계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의 귀를 흉내 낸 장치가 이후 음향 재생 기계를 주도하게 됐는지를 생리학과 음향학의 발전 맥락에서 추적하면서 저자는 이러한 새로운 기계가 출현해 사람의 듣는 방식이 바뀌게 됐다는 기술결정론적 해석을 비판하고 사회문화적 토대가 구축된 가운데 이러한 발명품이 도출됐음을 주장한다. 다만 그러한 사회문화적 및 학문적 토대가 우선적으로 갖춰진 유럽에서 왜 이런 음향 기술이 먼저 출현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이 아쉽다.

2장과 3장에서는 근대적인 청취 테크닉이 의학적, 기술적 맥락에서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논의한다. 18세기에 프랑스의 의사 라에네크가 청진기를 발명하고 사람 몸 안의 소리를 들어서 병을 진단하는 기술을 발전시킨 과정으로부터 지식을 형성하는 청각적 실행이 어떻게 구체화됐는지를 살핀다. 또한 당초에 電信은 띠에 점과 선을 인쇄하는 시각적인 방식을 채택한 반면에 그것을 대체하게 된 음향 전신은 수신기에서 발생하는 소리를 듣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시각을 대신하게 된 청각이 보다 근대적인 기술이었음을 주목한다. 저자는 이후 본격적인 음향 재생 기술이 음향의 청취를 어떻게 ‘혼자서 함께’ 듣는 방식으로 바꾸어나갔는지 추적한다. 이러한 서술에서 초기 음향 재생 기술의 역사를 잘 모르는 독자들은 논의를 따라가는 데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영어권 맥락에서는 이러한 기술사 서적이 많아 일부러 중복된 논의를 피한 것이겠지만 우리나라의 맥락에서는 역주를 달아서 보완했으면 좋았을 부분이다.

4장의 논의는 기술의 변형 가능성에 초점이 맞춰지는데 음향 기술이 미디어로 변모하는 제도적· 사회적 과정을 살핀다. 기술적 측면에서 보면 오늘날 휴대전화는 무선통신이라는 점에서 전화라기보다는 라디오에 더 가까운데 우리가 그것을 전화로 부르는 이유는 상호 연관된 제도, 기술, 인간, 실행의 전체 집합 속에서 “필연적 관계가 없는 서로 다른 것들이 결합해 새로운 실체를 구성”하는 ‘절합(articulation)’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라디오는 오늘날 방송 매체이나 1920년대 이전에는 일대일 무선통신용이었고, 전화기는 오늘날 일대일 접속망이나 20세기 초에는 전화 방송이 인기를 끌었었고, 레코딩은 당초에 업무용으로 상업화됐으나 오락용으로 변모했다. 기술이 어떤 용도로 쓰일지는 사회적 맥락이 결정해 온 것이다.

5장에서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레코딩의 음향적 충실도라는 개념이 단순히 기술적 우수성을 뜻하지 않고 사회적 맥락에서 형성된 특수한 개념임을 보여준다. 당시 광고를 통해 원본과 재생된 소리가 똑같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음질이 떨어지는 재생음에 만족하도록 청취라는 실행을 훈련했음을 보여준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광고에 대한 수사적 담론 해석을 도모하나 실제로 이 당시 음향 기기들이 광고와 달리 음질이 얼마나 떨어졌는가에 대한 실증적 자료를 제시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현재 남아 있는 당시의 녹음 자료들은 녹음 매체나 재생 설비가 노화됐기 때문에 당시 재생 음질을 정확히 알 수 없는데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한 고려가 빠져 있다.

6장은 죽은 사람의 음성을 보존하는 차원에서 레코딩이 그 가치를 크게 인정받은 것이 19세기 말에 널리 퍼져 있었던 죽음의 문화 때문이라고 본다. 저자는 강신술의 유행, 새로운 시체 방부 기술, 죽은 주인의 음성을 축음기로 듣는 개의 그림 등의 사례를 통해 축음기를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죽음 문화의 산물로 본다. 죽음의 문화라는 문화적 맥락을 기술의 발전에 연결시키는 점에서 저자의 혜안이 남다르게 느껴지지만 레코딩 기술의 소비자들이 실제로 죽음의 문화 때문에 소비자가 됐다는 직접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이 문제이다.

몇 가지 약점에도 불구하고 폭넓은 식견을 바탕으로 청취의 역사를 잘 서술해준 이 책을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다만 번역본에서 여러 문장이 의역을 넘어 오역되는 사례가 많아서 아쉬움이 있다. ‘hearing’과 ‘listening’을 각각 ‘청각’과 ‘청취’로 번역한 데에서 생기는 오독은 그나마 역자의 고심이 느껴지는 부분이나 가령, 11쪽에서 원문의 “Through techniques of listening, people harnessed, modified, and shaped their powers of auditory perception in the service of rationality.”를 “이렇게 재구성된 청각적 지각 능력은 청취의 테크닉을 통해 합리성의 수단으로 발돋움했다”로 번역하고 그 다음 문장인 “In the modern age, sound and hearing were reconceptualized, objected, imitated, transformed, reproduced, commodified, mass-produced, and industrialized.”는 누락시킨 것은 무성의하게 느껴진다. 이런 사례가 도처에 널리 있으니 역자가 ‘번안’한 조너선 스턴을 한국 독자들이 만나게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구자현 영산대·과학사) 

10. 10. 14.  

P.S. '청각적 근대성의 기원들'이라고 하니까 떠오로는 책은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축음기, 영화, 타자기>(1986)이다. 한 학술발표에서 내용이 흥미롭게 언급되는 걸 듣고 구해놓긴 했는데, 아직 읽을 짬은 못내고 있다. 최근작인 <시각 미디어>도 구해놓고 싶다.   

 

한편, 영화와 소리란 주제와 관련해서는 미셸 시옹의 책들이 독보적이다. 언젠가 구해놓고 읽어본다고 하면서 계속 연기되고 있는데, 정말로 언젠가는 이 주제에 대해서도 공부를 좀 해보고 싶다. 그래 봐야, 한 편의 글 정도를 쓰고 싶다는 바람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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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0-10-14 23:02   좋아요 0 | URL
'청각적 근대성'이란 제목을 보고는 '노동의 시작/끝을 알리는 종소리'나 '군대의 구호' 같은 것 떠올리고 들어왔었는데, 예상대로 다른 내용이네요.^^ 슬쩍 들렀습니다. 잘 지내시죠?^^

로쟈 2010-10-15 08:23   좋아요 0 | URL
네, 그럭저럭. 별로 즐거운 일은 없구요.^^;
 

지난주 출간도서 가운데 한권을 더 챙겨놓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매주 쏟아지는 책을 다 구입할 수도 없고, 주요 관심도서만 일독하는 것도 (전업 독서가가 아닌 다음에야)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벅찬 일이다. 리뷰라도 챙겨두는 것은 그런 사정을 고려한 방책이다. 개정판이 나온 클라이브 폰팅의 <녹색세계사>(그물코, 2010)는 장서용으로라도 구해놓아야겠다. '진보'와 '승리'에 대한 비판이란 점에서는 존 그레이의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이후, 2010)에 이어서 읽어도 좋겠다. 클라이브 폰팅의 20세기사 <진보와 야만>(돌베개, 2007)도 이 참에 챙겨놓고.    

한국일보(10. 10. 09) 인간의 승리는 곧 '환경의 패배'를 말한다 

남미 서부 해안에서 3,200km 떨어진 외딴 섬 이스터. 1722년 부활절에 네덜란드의 로프헤펜 제독이 이 섬을 찾았을 때, 3,000명가량의 주민들은 갈대집이나 동굴에서 원시인처럼 살며 날만 새면 싸움질을 하고 서로 잡아먹기까지 하는 끔찍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섬이 유명해진 것은 섬 전역에서 600여개나 발견된 최대 높이 10m의 거대한 석상 '모아이' 때문이다. 



야만의 섬에서 발견된 문명의 흔적을 놓고 온갖 해석이 난무했다. 영국의 역사학자 클라이브 폰팅은 수수께끼의 모아이 석상에 대해 "돌이킬 수 없이 환경을 파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섬뜩한 일례"라고 말한다. 씨족마다 고유의 종교와 세련된 의례를 갖고 번성했던 이스터 섬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석상을 만들고 이를 해안의 제사 장소까지 굴려 옮기기 위해 나무를 마구잡이로 베어내면서 결국 몰락을 맞았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이스터 섬 사람들보다 더 잘 살아왔을까"라는 물음으로 시작하는 <녹색세계사>는 인류 출현 이후 지금까지 200만년의 역사를 생태적 관점에서 기술한 걸작이다. 1991년 첫 발간 후 13개국어로 번역되며 환경 분야의 고전으로 자리잡았다. 이번 번역판은 3년 전 새로운 연구성과를 반영해 고쳐 쓴 원서 개정판(원제 'A New Green History')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책을 관통하는 화두는 "사람 또한 지구 생태계의 일부"라는 것이다. 사람이 생존을 위해, 더 나은 삶을 위해 벌이는 활동은 어떤 형태로든 지구 생태계에 변화를 줄 수밖에 없고, 이는 인간 사회의 변화를 초래하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온다. 저자는 이런 관점에서 현생 인류가 출현해 각 대륙으로 퍼져나가고, 농경을 계기로 정착사회가 생겨나고, 고대문명과 수많은 제국이 흥망성쇠한 과정 등을 인간사회와 자연의 '관계성'을 중심으로 세밀하게 그려나간다.

수렵 채취 시절에 대한 일반적 견해는 토머스 홉스의 말처럼 "구역질 나고 짐승같이 단명한" 생활이라는 것이지만, 최근 연구들에 따르면 인류사의 99%를 차지하는 이 시대 인간들은 환경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충분한 식량을 얻을 수 있었다. 수렵 채취에서 농경으로의 전환을 흔히 '진보'라고 생각하지만, 땅을 개간하고 씨를 뿌려 수확하려면 엄청난 노동이 필요한 반면 식량 부족이나 기근의 우려는 더 높아졌다.

저자는 인간의 눈에는 '진보'나 '승리'로 여겨진 변화들이 지구 환경에서 보면 '손실'과 '파괴'일 수 있음을 역설한다. 나아가 산업사회 등장 이후 지난 200년 동안 발생한 환경 문제는 "역사에 유례가 없고 해결책을 생각해내기에 어려울 정도로 복잡"해서, 과연 산업사회가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지를 판단하기에는 이르다는 비관론을 내놓는다.

그러나 저자는 비판을 위해 목청을 높이거나 화려한 수식으로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소 지루할 만큼 차분하게 사실들을 촘촘히 엮어간 글에서 품위가 느껴진다. 일반적인 요즘 책들에 비해 빽빽하게 글자를 인쇄하고도 500쪽이 넘어(재생종이를 써서 그리 무겁지는 않다) 가볍게 읽을거리는 아니지만, 읽을수록 빠져드는 매력도 그런 품격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환경 문제를 공부하면서 환경운동에도 참여해온 번역자들의 공들인 번역도 깔끔하다.(이희정기자) 

10. 10. 10.   

P.S. 생태학 관련서로는 미국의 좌파저널 <먼슬리 리뷰>의 편집장 존 벨라미 포스터의 <마르크스의 생태학>(인간사랑, 2010)도 최근에 나온 책이다. 여러 권 소개된 그의 책들 가운데, 몇 권은 묶어서 같이 읽어봐도 좋겠다. 어느 세월에 읽을 것인가는 또 별개의 문제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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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1 0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2 0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9 0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번주 관심도서 중 하나는 미국의 법학자 앨런 더쇼비츠의 <선제공격>(바이북스, 2010)이다. 이미 주문해놓은 책이기도 한데, 무엇보다도 미국 최고 수준의 법학자가 '선제공격'이란 걸 어떻게 정당화하는지가 관심거리. 의외로 언론리뷰에선 관심권 밖으로 밀려난 듯한데, 예외적인 기사가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     

동아일보(10. 10. 09) 잠재적 테러주의자 체포 법적으로 과연 정당한가 

최근 유럽의 도시들은 알카에다의 테러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프랑스에서 테러가 발생한다면 파리의 에펠탑, 노트르담 성당 등에 대한 공격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이런 위협에 직면한 프랑스 경찰은 최근 마르세유, 아비뇽, 보르도 등에서 알카에다와 연계된 것으로 의심되는 10여 명을 체포했다. 여기에서 법적으로 따져봐야 할 문제가 발생한다. 테러 예방 차원에서 이들을 체포, 구금하는 것이 정당한가라는 문제다. 저자는 이 같은 테러 대책을 ‘선제(preemptive) 공격’의 일종으로 본다. “테러 계획이 있었는지 그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 특정 용의자를 예방 차원에서 일정 기간 구금하는 것을 지지하겠는가”라고 그는 묻는다.

미국 하버드 로스쿨 역사상 최연소 교수 발탁 기록의 주인공인 저자는 세계사에 나타나는 ‘선제공격’의 예를 든다. 1967년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시작된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 간의 ‘6일 전쟁’이 그 하나다. 두 차례의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아랍 게릴라의 근거지가 된 시리아에 먼저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적군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판단에 따라 자국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공격했다는 게 이스라엘의 주장이었다.

9·11테러를 당한 미국이 2003년 이라크에 공격을 가한 것과, 알카에다를 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 역시 테러를 막기 위한 선제적 공격으로 볼 수 있다. 이 책은 1981년 이라크의 핵무기 원자로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을 또 다른 선제공격의 예로 들었다. 이 사례들에서도 쟁점은 이 같은 선제공격이 과연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가라는 점이다. 저자에 따르면 6일전쟁 때는 전 세계가 대부분 이스라엘이 취한 선제공격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라크 핵 원자로에 대한 공격에는 비난이 쏟아졌다.

여기서 보듯 선제공격의 정당성에 대한 판단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국제사회는 경우에 따라 예방적 차원의 선제공격을 비난한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재무장을 막지 못한 유럽 국가들에 대해선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며 책임을 물었다. 법률가인 저자가 이 같은 사실들에서 이끌어내는 핵심 주장은 “각 나라가 이런 예방적 또는 선제적인 행위를 지배할 만한 협의된 법률 체계를 갖추고 있지 않으며 논의를 전개시킬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위협이 닥치면 필요에 따라 대처할 게 아니라 합의된 법률적 근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테러의 위협이 일상화되고, 아동 성폭력 같은 강력 범죄가 더욱 기승을 부리는 오늘날 이 같은 저자의 문제 제기는 진지하게 논의할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선제공격의 정당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점, 그 결과 강대국 편에 기운 채 논리가 전개되는 점은 눈에 걸린다. 이 책을 번역 출간한 출판사도 이런 사실을 의식한 듯 국내 법학자의 ‘반론’을 부록으로 실었다. 반론에서 원혜욱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타인을 침해하는 행위는 엄격한 요건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으며 ‘예방’을 이유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 국가 간에 정당방위를 이유로 선제공격이 이뤄진다면 상대국의 수많은 시민은 생명을 잃거나 부상을 당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개인 간의 관계에서보다 국가 간의 관계에서는 정당화될 수 있는 공격을 더욱 엄격하게 해석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금동근 기자) 

10. 10. 09.  

P.S. 아마도 '로스쿨 관련서'로 묶어야 할 듯싶은데, 더쇼비츠의 책은 절판되긴 했지만 <최고의 변론>(이미지박스, 2006)이 출간된 바 있고, <미래의 법률가에게>(미래인, 2008)도 그의 책이다.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돌베개, 2010)에는 그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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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ai 2010-10-09 16:27   좋아요 0 | URL
기사 마지막 문단이 눈에 띄네요. 관계자-_-에게서 이 시리즈 전반에 나름의 색깔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색깔이 원색일지 무채색일지는 시리즈가 더 나와보면 밝혀지겠네요.

로쟈 2010-10-10 09:19   좋아요 0 | URL
네, 이 시리즈는 딱 1년에 한권씩만 책이 나오네요...

2010-10-09 2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0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0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0 0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0 09: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0 1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2 0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전 블랙모어의 <밈>(바다출판사, 2010)은 '10월의 읽을 만한 책'으로 꼽아놓기도 했는데, 리뷰기사를 미리 참조해보는 것도 좋겠다. 저자의 최근 관심사도 전해주고 있어서 요긴하다.   

한국일보(10. 10. 02) 인간의 자아는 없다, 밈 복제의 기계일 뿐…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1976)는 인간은 유전자에 의해 창조된 기계에 불과하다는 도발적인 주장으로 파란을 일으킨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문화의 진화를 이끈 새로운 복제자로 '밈(meme)'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밈은 '모방'을 뜻하는 그리스어 '미메메(mimeme)'를 생물학적 유전자 '진(gene)'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변형시킨 말이다. 밈은 모방을 통해 전달된다. 유전자와 마찬가지로 밈은 인간을 도구 삼아 문화를 창조하는 복제자다. 



영국 심리학자 수전 블랙모어의 <밈>은 도킨스의 가설을 더 멀리 끌고 나간다. "우리의 자아는 귀중한 영혼이 아니라 들의 집합일 뿐"이고, "인간과 다른 동물종들을 구별짓는 것은 지능이 아니라 우리의 모방 능력"이며, 인간은 '밈 머신'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마음과 자아는 밈들의 상호작용으로 탄생한 것이고, 따라서 본래 자유의지나 자아가 있다는 생각은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인류 역사에서 첫번째 복제자는 유전자다. 밈은 두 번째 복제자로, 250만년 전쯤 전 우리가 서로 모방하기 시작한 순간 탄생했다. 밈은 모방을 통해 끊임없이 복제되면서 세력을 키워간다. 인간이 큰 뇌를 갖게 된 것이나 언어의 발달도 밈이 조종한 결과다. 새 밈을 더 잘 퍼뜨리기 위해 이 유전자에게 자연선택의 압력을 가했고, 밈과 유전자가 이렇게 공진화한 결과 인간이 큰 뇌와 언어를 지닌 특이한 존재가 됐다는 것이다.

밈 이론에 따르면 문화는 인간이 발전시킨 것이 아니다. 오로지 밈이 자신을 위해서 인간을 도구 삼아 끊임없이 전파, 확산되면서 지금의 문화가 만들어졌을 뿐이다. 인간 문화의 창조적 업적은 모두 밈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현대의 성적 행위를 이끌어가는 것도 밈이라고 주장한다. 섹스는 밈을 마음껏 확산하고 통제하고 조작하게 해주는 기회라는 것이다. 인간의 이타적 행동도 밈으로 설명한다. 밈은 무심하고 이기적이지만, 이타적인 사람은 인기가 있어서 남들에게 많이 모방되기 때문에 결국 그의 밈이 다른 사람의 밈보다 더 멀리 퍼진다는 것이다.

이 책의 원서는 월드와이드웹 초창기인 1999년 나왔다. 따라서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를 통한 수평적 모방이 대유행하는 요즘 현실은 이 책에 나오지 않는다. 저자 블랙모어는 최근 웹과 네트워크가 지배하는 세상의 새로운 에 관심을 쏟고 있다. 유전자, 밈에 이은 이 제 3의 복제자를 그는 '기술적인 밈'이라는 뜻에서 '팀(temeㆍ technological meme)'이라고 부른다.

지난 8월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그는 인간이 '밈 머신'에서 '팀 머신'으로 바뀔 가능성을 언급했다. 인터넷을 인간이 설계했으니 인간이 주인인 것 같지만, 실은 기술적 알고리즘이 자기복제와 확산을 거듭하며 인간을 조종하는 것은 아닐까, 라고 묻고 있다. 그의 다음 책은 아마도 '팀 이론'에 관한 것이 아닐까 싶다.

자아는 망상일 뿐이고 자유의지라는 것은 없으며, 밈이 인간을 도구로 자기를 복제하고 확산할 뿐이라는 이런 주장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오래된 믿음들을 마구 뒤흔든다. 밈 이론은 아직까지 논쟁의 와중에 있는 가설이다. 저자는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오미환기자) 

10. 10.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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