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권력의 시대와 멍텅구리들

'삼성 문제'에 대한 책들이 연이어 출간되고 있다. 일반화해서 말하면, 기업이 권력화된 시대이고, 자본의 국가지배가 더 강화된 시대로 접어들어서이다. 자본과 국가권력의 '전략적 접속'의 결과 국가가 기업에 대한 제어능력, 혹은 제어의사를 상실했다면, 남은 것은 시민사회인가? 조정래의 <허수아비춤>(문학의문학, 2010)의 결론도 그렇고, 최근의 초점은 시민사회 역할론으로 모아지는 듯싶다. 학술적인/이론적인 언어로 이 문제를 짚은 책의 제목이 <민주주의 체체하 '자본의 국가지배'에 관한 연구>(한울, 2010)다.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자본은 민주주의의 형식을 전멸시킬 수 없고, 민주주의의 형식만으로는 자본을 해체할 수 없다”는 저자의 주장은 통상의 '민주주의 강화론'보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으로 생각된다.   

 

한겨레(10. 11. 05) 민주주의 체제에서 기업은 어떻게 권력을 키웠나

민주주의 체제가 이뤄진 뒤 우리나라 상황에 대한 주된 분석은 “절차적 민주화는 이뤘지만 사회경제적 민주화는 못 이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전망들은 쏟아져 나오지만, 정작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왜 못 이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또렷한 답을 찾기 어려웠다.

최근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의 이종보 박사(사회학)가 써낸 <민주주의 체제하 ‘자본의 국가 지배’에 관한 연구>는 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자본이 어떤 방식으로 권력 지배를 심화해왔는지 분석한 책이다. 삼성그룹으로 대표되는 자본세력이 민주주의를 형식화시키기 위해 어떤 구체적인 전략을 썼는지 세밀하게 밝혀, 앞선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제시한다.

출발점은 “왜 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기업권력이 더욱 강화되고 있느냐”는, ‘민주주의의 역설’에 대한 의문이다. 이를 풀기 위해 지은이는 ‘복합관계론적 계급지배론’을 우선 제시한다. 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벌어지는 세력 사이의 경쟁을 본질적으로 불균형적인 계급 적대라고 파악하면서도, 이를 단지 경제적인 관계로만 보지 않고 복합적이고 다양한 관계들을 함께 살핀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렇게 볼 때 민주주의 체제 아래에는 민주주의 체제를 ‘형식화’하려는 전략과 ‘실질화’하려는 전략의 각축이 존재한다고 설정했다. “민주주의 체제를 형식화해 최종적으로 사회와 국가를 식민화하려는 자본 분파 등 지배블록을 구성하는 다양한 분파들의 실천과, 그에 맞서 민주주의의 수준을 심화해 실질화하려는 시민사회 운동세력 사이의 각축”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각축장은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넘어오며 열린 공간들, 곧 국가기구·제도정치·시민사회 등이다.

그러나 이런 각축은 불균형적이다. 자본세력이 불평등한 현실 권력을 활용해 민주주의 체제에 전략적으로 접속하려 들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곧 “정부가 주도하는 정책 협상 테이블에 저항 세력들이 초대되는 것을 거부할 순 없지만, 협상 결과는 자본에 이익이 되는 정책이 산출되게 하는 것”이다. 연구대상인 삼성그룹의 전략을 살펴보면, 이런 전략적 접속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주요 각축장인 제도정치에서 삼성은 전체 정당체제를 아우르며 엄청난 규모의 정치자금을 폭넓게 제공했고 이는 선거경쟁에서 시민사회 운동세력의 전략을 압도했다. 행정·사법 관료에 대한 매수·포획 등의 방법으로 국가기구내에서도 기업권력의 거점을 만들었다. 



저항세력의 근거지인 시민사회도 예외가 없었다. 삼성은 자본의 주요 대립축인 노동조합을 애초부터 배척하고, 언론과 대학·지식인 등 가능한 많은 자원들을 동원해 시민사회로부터 ‘지지·동의’를 조직해내는 전략을 썼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 등의 친기업 담론의 유포나 대규모 사회공헌활동 등도 이런 전략의 일환이다. 



물론 자본세력이 일방적으로 자신의 전략을 관철하기만 하지는 못했다. 엑스(X)파일 공개,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 등을 계기로 시민사회 운동세력의 저항 역시 꾸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사회적 위기를 돌파하는 삼성의 전략은 되레 자본의 전략적 접속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보여줬다고 본다. 각종 문제 제기가 이어지는 가운데에서도 삼성은 삼성 전체의 문제가 아니라 개별 기업의 문제로 치환하는 등 ‘분산 파편화 전략’을 썼고, 불법 경영권 승계 문제 등에 대해서는 기업권력으로 기울어진 사법부를 활용한 ‘사법 적극주의’를 써서 저항 세력의 발목을 잡았다. 또 대국민 사과 등으로 시민사회의 부정적인 인식을 능동적으로 끌어안으려는 시도도 벌였다. 반면 시민사회 운동세력은 비대중적 수단인 사법부의 결정에만 기대는 등 한계를 드러냈다. 지은이는 이를 두고 “대자본 헤게모니와 공존하는 형식적 민주주의 체제”라고 평가한다.

그렇다면 민주주의 체제의 결말은 비극인가? 지은이는 “자본은 민주주의의 형식을 전멸시킬 수 없고, 민주주의의 형식만으로는 자본을 해체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계급 지배가 계속되지만, 그것은 분명 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실질화 전략은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저항 세력으로 하여금 사법 영역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사법관료의 자본 편향적 판결 앞에서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게 한 ‘정치’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지적한다. “민주주의의 실질화는 운동정치와 제도정치의 효과적인 결합으로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지은이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에 맞서는 ‘대중적 헤게모니 담론’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시민사회 운동세력들이 ‘정체성 구분하기’에서 벗어나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대안적 전략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주장이다.(최원형 기자) 

10. 11. 07.  

P.S. 현단계 '자본의 국가지배'가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유구한 '전력'을 갖고 있다. 히로세 다카시는 기업권력이야말로 제1권력이라는 사실을 진즉에 폭로한 바 있다. 하지만, <기업권력의 시대>(난장이, 2009)의 저자에 따르면 기업권력이 오늘날만큼 극대화된 적은 없었다. '전면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 거기에 상응하는 것이 한국사회의 자기계발 담론이다. 서동진의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돌베개, 2009)는 기업권력의 시대가 곧 자기계발의 시대이기도 하다는 걸 보여준다는 생각이다. 2004년부터 국립국어원의 신조어로 등록되었다는 '스펙'은 그런 점에서 언제부턴가 통용어가 된, 그리고 장래희망의 대명사가 된 'CEO'와 함께 기업권력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의 징후적 키워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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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10-11-08 00:16   좋아요 0 | URL
자본에 지배된 현대 소비사회 대중들을 안타까워하며 댓글을 남깁니다.



11월 11일은 위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탄생일이다. 우리 솔로 부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위대한 문학 정신을 기리며 빼빼로데이니 뭐니 하는 커플들의 저급한 소비문화적 테러를 이겨낼지어다! 솔로 천국 커플 지옥

비로그인 2010-11-08 19:55   좋아요 0 | URL
이번 기회에 빼빼로데이 대신 도스토예프스키 탄생일 제대로 알고 가네요.^^

 

어제 종로에 있는 서점에 들렀지만 헛걸음하게 만든 책은 버나드 맨더빌의 <꿀벌의 우화>(문예출판사, 2010)이. 장하준 교수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부키, 2010)와 함께 물류창고에는 들어와 있었지만 아직 매장에는 깔리지 않은 것. 매출에 좀 무심한 거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온라인에서 구매하려다 좀더 빨리 손에 들 수 있을 것 같아서 종종 오프라인 서점을 찾지만 대개는 이런 식이다. 물론 눈에 띄는 몇 권의 다른 책을 구입했으니 아주 헛걸음은 아니었지만. 일단 리뷰기사만 먼저 챙겨놓도록 한다. '개인의 악덕, 사회의 이익'은 책의 부제다. 

 

경향신문(10. 10. 30) “도덕 찾다간 경제 망해” 천민자본주의 씨앗

‘사치는 가난뱅이 백만에 일자리를 주었고 얄미운 오만은 또 다른 백만을 먹여 살렸다. 시샘과 헛바람은 산업의 역군이니 그들이 즐기는 멍청한 짓거리인 먹고 쓰고 입는 것에 부리는 변덕은 괴상하고 우스꽝스러운 악덕이지만 시장을 돌아가게 하는 바로 그 바퀴였다. … 이제 악덕은 교묘하게 재주 부려 시간과 일이 더해지면서 삶을 편리하게 만들어놓았다. 이것이 참된 기쁨이요 즐거움이요 넉넉함이어서 그 높이로 치자면 아주 못사는 놈조차도 예전에 잘살던 놈보다 더 잘살게 되었으니 여기에 더 보탤 것은 없을 것이다.’

네덜란드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했던 버나드 맨더빌(1670~1733)이 쓴 풍자시 ‘투덜대는 벌집: 또는, 정직해진 악당들’의 일부다. 맨더빌은 이 풍자시가 포함된 책 <꿀벌의 우화>를 1723년 출판했는데 ‘종교와 미덕을 깎아내리고 악덕을 부추긴다’며 큰 비난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맨더빌의 주장은 ‘악덕이 경제를 풍요하게 만든다’는 주장에서 한발 더 나아가 ‘도덕 찾다가는 경제가 다 망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단순한 것도 고상하게 말하는 게 특기인 경제학자들은 이것을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라고 부른다. 맨더빌이 이 가설의 최초 주창자라고 할 순 없겠으나 체계화된 글로 남긴 것은 사실이다. 맨더빌이 이 책을 쓴 지 300년쯤 지났지만 우리 일상에서 비슷한 주장을 쉽게 들을 수 있다. ‘눈먼 돈, 검은 돈이 좀 돌아야 밥장사, 술장사도 먹고 산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너무 천박한가? 그렇다면 ‘경쟁력이 충분한 수도권의 규제를 풀어서 전체 대한민국의 성장을 견인토록 해야 한다’는 논리는?

맨더빌이 살던 시절의 영국은 산업혁명이 일어나려면 100년쯤 기다려야 했지만 전 세계를 상대로 무역을 하면서 큰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절제와 겸양, 정직과 근면 등 도덕을 강조하는 근엄한 목소리가 여전히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맨더빌은 이런 것들을 위선이자 경제에도 도움이 안되는 것이라고 정면에서 비판한 것이었다. 우리는 아담 스미스가 인간의 이기심을 해방시킨 인물이라고 알고 있다. ‘우리가 매일 식사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양조장·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이기심 때문’이라는 스미스의 유명한 명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꿀벌의 우화>를 번역한 최윤재 고려대 교수에 따르면 스미스에게 돌아가는 찬사 혹은 비난은 대부분 맨더빌에게 돌아가야 한다. 최 교수는 “맨더빌은 돈 벌 욕심을 아예 버리라는 낡은 도덕을 비판한 사람이다. 그런 맨더빌을 따라 돈 벌 욕심을 받아들이되 돈 벌자고 남의 눈에 피눈물 흐르게 하는 짓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 스미스의 도덕감정이고, 그런 짓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 칸트의 도덕원칙이다”라고 말했다.

‘Mandeville’이라는 이름 때문에 도덕론자들로부터 ‘인간 악마’(Man-Devil)라고 불렸다는 맨더빌. 신자유주의 경제사상을 정립시킨 하이예크는 맨더빌에 대해 “아무도 읽어서도 안되고 물들어서도 안되는 인물로 찍혔지만, 결국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읽고 그에 물들어갔다”고 말했다. 번역자 말마따나 현대의 천박한 자본주의의 근원을 살피려는 사람은 맨더빌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 <꿀벌의 우화>는 고전이지만 처음 번역됐다.(김재중 기자) 

10.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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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10-31 10:23   좋아요 0 | URL
예약판매도 하는 대형서점들이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매장에 비치하지 않았다니,,, '개인의 악덕, 사회의 이익' 이라는 표현만큼, 묘하네요. 벌써 '불온서적'으로 찍힌 것 아닐까요? ^^

로쟈 2010-10-30 09:09   좋아요 0 | URL
네, 불황이라고 하면서도 좀 무신경해보였습니다...

롱맨 2010-10-30 09:56   좋아요 0 | URL
전 어제 광화문 교보매장에서 구입했습니다. 제가 방문한 그즘에 매장에 깔린 것 같더군요^.^

로쟈 2010-10-30 10:02   좋아요 0 | URL
반디와 영풍이 좀 게으른가 봅니다...
 

엊그제 배송받은 책의 하나는 자오신산의 <천재적 광기와 미친 천재성>(시그마북스, 2010)이다. 저자에 대해 아는 바 없고 중국 인문서에 대한 신뢰도 확고한 편이 아니어서 망설였지만, 지난주에 교재형 책 <천재 예술가들의 신경질환>(아름다운사람들, 2010)을 구입해놓은 터라 같은 주제의 책들을 모아놓으려는 계산에서 구입한 것이다. 찾아보니 샤를 가르두의 <약점이 힘이 될 때>(다른세상, 2010)까지 갖춰놓아야 구색이 맞을 듯싶다. 사실 <천재적 광기와 미친 천재성> 같은 책이 언론의 주목을 받을 줄은 몰랐는데, 의외로 올라온 기사가 있기에 스크랩해놓는다.

 

서울신문(10. 10. 23) 닮은 듯 다른 천재와 광인 미묘한 한끝 차이는 뭘까? 

천재적인 예술가들의 삶은 평탄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비극적인 자살로 끝이 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정신질환적 증세가 있을까. 천재성과 광기는 뇌의 해부학적이고 화학적인 근원에 있어서는 같은 출발점을 갖고 있다는 말로 이 책은 시작한다. 또한 천재성과 정신질환을 구별하는 구체적이고 본질적인 경계선에 대해 말하고 있다.

교수이자 작가인 중국 자오신산이 쓴 ‘천재적 광기와 미친 천재성’(이예원 옮김, 시그마북스 펴냄)이다. 책은 아인슈타인, 피타고라스, 앙페르, 애덤 스미스, 가와바타 야쓰나리, 백거이 같은 천재들과 히틀러 같은 광기 어린 독재자의 정신세계를 살펴보고 천재의 창조력과 정신질환 사이의 관계를 찾아보려 시도한다.

또한 과학, 예술, 철학의 창작은 정상적이라고 볼 수 없는 천재 혹은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들이 자신들의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내는 통로라고 언급하면서 만일 그들이 창작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그들은 미치거나 범죄를 저질렀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설명한다. 천재의 창조력과 정신질환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고 심리적·정신적 에너지라고도 할 수 있는 광기는 어떤 방향으로 분출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저자는 밝힌다. 세상을 창조하고 건설하거나, 세상을 파괴하거나 아니면 자기자신을 파괴하는 것이다.

독일 역사에 길이 남을 인물, 즉 비스마르크가 독일의 재상이 되지 않았더라면, 만일 그가 대단한 대업을 완수하지 않았다면 그는 정신분열증 환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히틀러도 마찬가지로 화가나 위대한 건축가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수많은 건물을 부수고 수천만명을 학살한 잔인한 인물, 인류 역사상 길이 남을 최고로 잔인한 범죄자가 되었던 것이란 예를 든다. 저자는 정신질환과 천재성 사이의 교차점을 독자들에게 알기 쉽게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는 중국 베이징대학을 졸업했으며 교수, 작가, 상하이 세계박람회 고문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과학과 예술, 철학 분야에서 관련 저서 56권을 펴낼 정도로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본문 중에 흥미를 끄는 한토막. “누가 물을 발견했지? 분명 물고기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물고기는 일생 동안 물속에 있으니까…”(김문 편집위원) 

10. 10. 24.  

P.S. 지난주에 나온 책으로 가장 확실한 눈요기감은 움베르토 에코의 <궁극의 리스트>(열린책들, 2010)일 텐데, 비닐카버가 씌어 있어서 서점을 찾았을 때 '실물'은 보지 못했다. '궁극의 리스트'로 당분간은 유보해놓는다. '머스트리드'에 해당하는 책은 스티글리츠의 <끝나지 않은 추락>(21세기북스, 2010)이지만 책을 다음주에나 배송받을 예정이어서 따로 리뷰를 챙겨놓진 않는다(기사가 많이 떠 있다). 유엔총회 전문가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스티글리츠가 주도한 <스티글리츠 보고서>(동녘, 2010)도 신간이지만 아직 알라딘엔 뜨지 않는다. 오늘 주문한 책들에 대해선 다음에 몇 자 적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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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0-10-25 14:38   좋아요 0 | URL
아 제가 좋아하는 책이 출간이 됐군요.천재와 광기의 그 심연의 사이를 알고 싶었는데 한 번 관심을 가지고 읽어 봐야 겠네요.~~ ㅋㅋㅋ
하기사 좋아하는 문학가들을 보면 뭔가 광기에 홀린 듯한 모습들이 보이는데 저런 책을 필독을 하고 싶네요.

로쟈 2010-10-26 08:24   좋아요 0 | URL
관심분야시군요.^^

루쉰P 2010-10-27 19:44   좋아요 0 | URL
완전 관심 분야죠. 그나저나 로쟈님은 대단하십니다. 일 하면서 알라딘 서재를 자주 들어가 보는데 하루에 한, 두편 씩 올라 오네요.^^ 저는 저번에 로쟈님과 박홍규 교수님의 강연에 참석했었습니다. 좋은 강의 너무 잘 들었습니다. 그 행사 참여하고 후기를 썼는데 알라딘에서 3만원 상품권을 줬습니다. 로쟈님 덕을 톡톡히 본 셈입니다. 강연하시고 나서는 인사를 꼭 드리고 싶었는데 사람들이 다 나가는 분위기라 용기내서 인사를 못 드렸었습니다. 죄송해요^^;;;
 

'카운터컬처 통사'라고 할 만한 책이 출간됐다. 켄 고프먼과 댄 조이가 쓴 <카운터컬처>(텍스트, 2010). 문화이론적 개념으로 접근하기 쉬운 '카운터컬처'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주는 게 아닌가 싶다(찾아보니 카운터컬처만을 다룬 책이 의외로 거의 없다). 그렇게 외연이 넓어지는 만큼 그 의미도 조금 옅어지는 게 아닌가란 생각도 들긴 하지만, 정확한 건 읽어봐야 알겠다.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국일보(10. 10. 23) 카운터컬처, 인류의 역사를 이끈 원동력

미국의 저명한 문화비평가 켄 고프먼과 댄 조이가 공동집필한 <카운터컬처>는 거칠게 요약하자면, 주류 문화를 거스르는 카운터컬처야말로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온 원동력이라고 설파한다. 카운터컬처란 말은 히피와 반전운동 등으로 점철된 1960년대 사회문화상을 분석한 시어도어 로작의 저서 <카운터컬처의 형성>(The making of a Counter Culture)에서 유래했다. <카운터컬처>는 "일정하게 시대정신을 구현하며, 주류 문화와 다른 문화를 만들어내는 창조적 과정"이란 로작의 카운터컬처에 대한 정의를 바탕 삼아, 이런 문화운동이 인류사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살핀다. 



이 책은 고대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와 유대인의 선조 아브라함에서 카운터컬처의 시원을 찾는다. 저자들은 프로메테우스가 인류를 위해 불을 훔쳐냈다는 단순한 사실보다는 당대 그리스들에게 가장 큰 죄악이었던 오만함의 상징이 근대 휴머니즘의 영웅으로 거듭나는 과정에 천착한다. 아브라함의 경우도 성서의 기록보다는 그가 "유대인의 아웃사이더로서의 영구적 역할"을 제시했다거나 자발적 공동체주의를 실현한 혁명가라는 개혁파 랍비들의 재해석에 주목한다. 신화가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상징체계라면, 고대 신화의 중심에 자리한 두 인물의 존재는 "카운터컬처적인 충동이 인간 본성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어 스스로 생각하고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가르친 소크라테스부터 암흑기로 불리는 중세를 관통하며 낭만적 사랑을 노래한 음유시인들, 17~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 20세기 초 파리의 보헤미안, 68혁명 세대의 거리의 광란, 그리고 오늘날의 해커에 이르기까지 카운터컬처의 장구한 역사를 풀어놓는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동양의 역사에도 눈을 돌려 도교와 선불교, 이슬람의 수피즘을 카운터컬처의 전형으로 소개한 점이다. 각양각색 카운터컬처의 연속성을 가능케 하는 줄기로 문화의 직ㆍ간접 접촉과 더불어 '공명'을 들면서, 지구 반대편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난 소크라테스학파와 초기 도교 사상의 놀라운 유사성, 도교를 접한 적 없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초월주의에서 드러나는 도교적 특성 등을 공명의 예로 든 대목도 눈길을 끈다.

저자들은 카운터컬처의 근본적 특징으로 개성, 권위주의에 대한 도전, 개인과 사회의 변화 수용 3가지를 든다. 특히 개성과 관련해 "개인이 자신의 진정한 존재를 완전하게 탐구하고 표현하는 것을 (어떤 형태로든) 막거나 방해하는 문화는 카운터컬처라고 볼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저자들이 역사에서 가려 뽑은 카운터컬처 사례들이 모두 이 기준을 충족하는지는 의문이다. 특히 세계화와 해커 관련 문화를 다룬 책의 마지막 장은 깊이있는 분석이 부족할 뿐 아니라, 현란한 수식어를 동원한 저자들의 재기 넘치는 문체가 맥을 짚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 스스로 카운터컬처적 속성이 강하다고 믿거나 역사를 종횡무진하는 지적 탐험을 즐기는 독자라면 권할 만하지만, 가볍게 읽고 쉽게 고개를 끄덕일 책은 아니다.(이희정기자) 

10.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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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듀이의 프래그머티즘과 철학의 재구성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키워드>(민음사, 2010)와 같이 소개해놓고 역시나 손에 들지 못하고 있는 책은 존 듀이의 <철학의 재구성>(아카넷, 2010)이다. 이제보니 책장 1단에 나란히 꽂혀 있다. 교수신문에 역자 이유선 교수의 존 듀이 소개기사가 실렸기에 옮겨놓는다. 어지간한 '미국식'은 다 수입하고 또 숭배하면서 "철학은 우리가 당면한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가 돼야 한다"는 듀이의 미국식 철학은 왜 방기하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교수신문(10. 10. 18) 존 듀이, 프래그머티즘을 미국 민주주의의 실천적 도구로 삼다  

“지나친 요구가 아니라면, 제 논문이 쓸모가 있는지에 대한 편집장님의 의견을 알고 싶습니다. 제 논문이 과연 이런 종류의 주제에 제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보여줄 만한 것인지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퍼스와 제임스 등이 ‘형이상학 클럽’이라는 독서 모임에서 시작한 새로운 철학적 사고방식으로서의 프래그머티즘은 듀이라는 뛰어난 사상가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도 명실상부한 미국철학으로 자리 잡지 못했을 것이다. 퍼스와 제임스가 본질주의적인 형이상학을 비판하면서 ‘프래그머티즘의 격률’을 의미론적 기준이나 인식론적인 문제를 해결할 도구로 활용했다면 듀이는 그것을 사회·문화·정치 영역의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 획기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했다. 듀이는 프래그머티즘을 미국의 민주주의를 위한 실천적 도구로 삼고자 했으며, 실제로 다양한 실천과 실험에 나서기도 했다.

듀이는 1894년 시카고대의 철학, 심리학, 교육학 과정을 합친 학부장으로 취임하면서 대학에 ‘실험학교’를 설립해서 자신의 교육철학을 실천했으며, 1904년에는 컬럼비아대 교수로 자리를 옮겨 활동하다가 1930년 71세의 나이로 교수직에서 은퇴했다. 듀이는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일본, 중국 등지를 돌며 강연을 하기도 했다.

또한 듀이는 미국의 ‘교원조합’과 ‘미국대학교수협의회’를 조직하기도 하고, 교육정책에 대한 자문을 위해 1928년 소련을 방문하고 사회주의에 대한 인상기를 쓰기도 했다. 특히 듀이는 스탈린 정권을 피해 망명한 트로츠키가 도피생활을 하다가 암살당한 후, 1937년 멕시코에서 열린 조사위원회의 의장을 맡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당시 듀이를 수행한 사람은 리처드 로티의 아버지였다. ‘네오프래그머티즘’이라는 이름으로 듀이의 철학을 복권시킨 리처드 로티는 듀이의 철학을 미국 민주주의 프로젝트의 완성을 위한 희망의 철학이라고 규정한다.  

 

듀이는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민주주의 사회라는 목표는 현재의 사회를 재단하는 고정된 기준이 아니라 우리의 실천을 조직하는 수단이라고 보았다. 우리의 실천에 따라서 우리의 미래는 바뀌게 될 것이며, 무엇이 과연 바람직한 사회인가에 대한 전망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이렇게 우리의 목표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의 실천과 유기적인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더 나은 사회의 모습을 끊임없이 상상해야 할 것이다. 미국을 상상을 통해서 만들어가는 한 편의 시로서 보고자 한 듀이의 관점에서는 상상력이 풍부한 창조적 지성이 살아 숨 쉴 공간이 우선적으로 확보돼야 한다.

듀이에게 있어서 자연과 인간, 수단과 목표, 경험과 도덕적 삶은 서로 동떨어져 있거나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규율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론적이며 유기적인 연관을 맺고 있다. 이런 그의 관점은 진리를 위한 진리를 부정하는 프래그머티즘의 관점, 인간적인 것을 초월하는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낭만주의적이며 세속주의적인 관점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고 정당화될 수 있다.

철학이 천상의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어서는 안 되며 인간의 삶을 개선시키고, 인간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가 돼야 한다는 것이 듀이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철학이 그런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창조적인 지성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어내야 하고, 개성을 갖춘 개인들의 비판적 사고를 길러낼 수 있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는 동경제국대학의 강연을 묶어 『철학의 재구성』이라는 책을 펴내면서 철학은 우리가 당면한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가 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런 요구는 지성인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이유선 서울대 기초교양교육원·철학)  

10. 10. 21.  

P.S. 듀이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 이번주 관심도서는 미국의 '생물철학자' 마이클 루스의 <진화의 탄생>(바다출판사, 2010)이다(진화론 관련서들이 계속 나오고 있는데, 아마도 작년에 기획된 책들인가 보다). 원제는 '다윈 혁명'. 루스의 책은 <다윈주의자가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가?>(청년정신, 2002) 등이 더 소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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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10-21 22:28   좋아요 0 | URL
프랑스 사태에 대하여: 저는 과격하고 파괴적인 것은 무서워서 못하는 사람인데요. '프랑스 혁명'이 생각날 정도입니다. 그 현상을 변증법(헤겔인가요?)의 기본법칙 중 '양질변화의 법칙'을 들어 설명하고 싶어요. 물(문제의 법안)이 끓게 만들려면 40도, 50도 가지고는 안되죠. 100도까지 가야 형질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미래를 보는 것 같은 '정년연장'에는 저도 반대하며, 저는 적절한 표현을 하지 못함이 답답합니다.

로쟈 2010-10-22 08:35   좋아요 0 | URL
프랑스는 시위도 자기들의 역사적, 문화적 전통이 있는 거니까 막바로 비교는 안되겠죠. 혁명이란 전통의 '힘'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드팀전 2010-10-22 09:35   좋아요 0 | URL
뭐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물이 100도에서 끓는 것은 1기압이라는 보편적이라고 알려진 그러면서도 특정한 조건하에서 입니다. 기압이 낮아지면 물의 비등점은 함께 낮아집니다. 80도 정도에서도 끓게 됩니다. 기압이 높아지면 100도가 되어도 안끓지요.

레닌이 러시아혁명에 앞서 부르주아 혁명이 없는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은 요원하다는 기계론적인 사적유물론에 단절을 선언하고 사건이라고 할만한 결단을 통해 돌파한 것은 이 개념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요...당시 러시아사회의 모순과 민중의 응축된 힘이라는 기압조건을 읽었기때문에..

지젝과 화학의 결합이겠군요.^^


비로그인 2010-10-22 12:03   좋아요 0 | URL
드팀전님! 지젝과 화학의 결합 좋습니다! 우리는 통섭하며 기압을 제대로 읽을 줄 아는 역사유물론적 누군가가 필요할 것 같군요! ^^

빵가게재습격 2010-10-22 21:24   좋아요 0 | URL
'어지간한 '미국식'은 다 수입하고 또 숭배하면서 "철학은 우리가 당면한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가 돼야 한다"는 듀이의 미국식 철학은 왜 방기하는지'에 추천 누르고 갑니다. 농담/진담/불만만 해서 말하자면 미국유학은 한국사회에서 상류층/하류층을 구별짓는 '필수코스'이어서가 아닐까요...

로쟈 2010-10-26 08:28   좋아요 0 | URL
그렇죠. 그냥 그렇게들만 얘기하면 좋겠어요. 둘러대지 말고...

루쉰P 2010-10-23 10:59   좋아요 0 | URL
미국의 4대 정신적 보배라고 한다면 듀이의 교육 철학, 에머슨의 문학, 마틴 루터 킹의 인권 투쟁, 재즈라고 읽은 기억이 나는데요. 듀이의 철학을 잘 알고 싶은데 저런 책이 나오니 참으로 좋네요.^^ 여전히 로쟈님은 책을 많이 읽으시네요~~

로쟈 2010-10-26 08:27   좋아요 0 | URL
책에 대한 정보를 많이 읽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