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자에서 환경운동가를 거쳐 '파리의 산책자'가 된 정수복 씨의 새 책이 나왔다. <프로방스에서의 완전한 휴식>(문학동네, 2011). 아침에 주문을 해놓고 보니, 이 책을 읽으려면 '완전한 휴식'이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문득 든다. 프로방스 예찬은 익히 들어본 것이라 새삼스럽지 않지만 '완전한 휴식'은 뭔가 끄는 게 있다. 완전한... 휴식이라...

한겨레(11. 03. 24) “느릿느릿 걸으면 햇빛이 날 치유하지요”

‘파리의 산책자’ 정수복(56·사진)씨가 이번엔 프로방스의 햇빛을 가득 담은 책을 내놓았다. <프로방스에서의 완전한 휴식>의 출간에 맞춰 현 거처인 파리를 잠시 비워두고 서울에 왔다. 23일 서울 홍대 앞의 한 식당에서 기자들과 만난 그는 자신을 ‘프랑스와 한국 사이에서 나룻배로 양안을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프로방스 예찬에 입이 말랐다. “최창조 선생이 마음이 편하면 명당이라고 했죠. 프로방스에 가면 제 마음이 그렇습니다. 프로방스에는 영혼을 고양시켜 주는 뭔가가 있습니다.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휴식 같은 것이죠. 반 고흐, 알퐁스 도데 같은 예술가들이 거기서 휴식을 취한 것은 다 이유가 있지요. 프로방스의 핵심은 바로 햇빛이지요.” 



사회학자에서 환경운동가로, 다시 걷는 사람 ‘산책자’로, ‘분류가 불가능한 지식인’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하는 그는 빠르게만 달려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자동차를 버리고 느릿느릿 발소리를 낮춘 채 ‘프로방스’의 작고 한적한 마을들을 걸어보라고 속삭인다. <프로방스에서의 완전한 휴식>에서 그가 남프랑스의 햇빛이 주는 휴식과 치유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생태운동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삶의 방식과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적게 쓰는 삶이 답입니다. 적게 소유하지만 훨씬 잘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1990년대에 사회학자로 대학에 강의를 나가고 환경운동에 몰입하다, 2002년 문득 그만두고 집을 내놓고 6년 유학생활의 장소 프랑스 파리로 건너갔다. 그는 이를 ‘정신적 망명’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를 쓴 홍세화 선생은 정치적 망명을 하신 분입니다. 어쩔 수 없이 조국을 떠나 살아야 했습니다. 저는 제 의지로 떠난 정신적 망명자입니다.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에 적응을 강요하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어요. 당시 귀농운동하던 이병철 선생께 여쭈었죠. ‘프랑스 남부로 가서 귀농해도 귀농이죠?’라고. 그랬더니 당황하시면서 ‘어, 귀농이지’ 하고 답하더라고요. 환경운동을 10년가량 하면서 한계를 느꼈죠.” 



그는 파리에서 9년 남짓 생활하면서 파리를 걷고 또 걸었다. 리옹, 브르타뉴, 프로방스 등등 프랑스 전역을 걷고 여행했다고 한다. 2009년 파리 산책기 <파리를 생각한다-도시 걷기의 인문학>을, 지난해엔 <파리의 장소들-기억과 풍경의 도시미학>을 펴냈다. 걷기는 사색이요 영감의 원천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책에서 오늘의 국내 사회학이 현실과 호흡하지 못하고 있으며, “학술지 논문평가 제도화로 학자가 논문제조기로 전락했다” 비판한다. 그 자신을 좌도 우도 아니고, 사르트르 팬이지만 때론 카뮈에 가깝게 다가가는 그런 지식인, 분류가 불가능한 독자적 지식인으로 규정한다. 그것은 다른 말로는 개인주의다. 그는 한국에서 건강한 의미의 개인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청년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쓰메 소세키가 이야기했듯이)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가. 답이 안 나오지만 그 질문을 끝까지 포기하면 안 됩니다. 그것이 진정한 개인주의입니다. 그러려면 문학, 예술, 교양을 책을 통해 폭넓게 체험해야겠지요.”(허미경 기자) 

11. 03. 25. 

 

P.S. <프로방스에서의 완전한 휴식>과 같이 주문한 책은 <전쟁은 없다>(인간사랑, 2011)이다. 정신분석 잡지 '엄브라(Umbra)'의 번역으로 <법은 아무것도 모른다>(인간사랑, 2008)에 이어서 나온 것이다. 2년 터울인가, 3년 터울인가. 그러고 보니 연간으로 나오던 <뉴레프트리뷰>도 3호가 나올 때가 됐다. 조금 늦어지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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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ror 2011-03-25 23:48   좋아요 0 | URL
학술지 논문평가 제도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 제도가 없었을 때 한국의 학자들이 아주 대단하고 독창적인 업적을 남긴 것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제도가 시행하기 이전의 한국학계의 생산력이란 논문 갯수로 평가하는 지금보다 더 훌륭했다고 결코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제도 시행 이전의 한국 학자들이란 다수가 1년에 논문 한 편도 안 쓰는 경우가 허다했었습니다. 지금은 그래도 누구나 갯수 채우기 위해서 몇개씩이라도 쓰려고 하죠. 강제적인 제도가 없었을 때 아무 것도 안하고 놀았으니, 이런 강제적 제도가 나오는 거 아니겠어요? 이런 제도를 불평하기 이전에 스스로 논문을 잘 쓸 생각부터 먼저 해야죠.
그런데 프랑스에서 지내는 한국 지식인의 눈에 프랑스의 원자력 발전소는 치유의 기능을 갖고 있나 봅니다.

로쟈 2011-03-27 18:16   좋아요 0 | URL
문제는 갯수로 평가하는 방식도 아니라는 거지요. 업적이 갯수에서 나오진 않으니까요. 그냥 연구업적이나 활동을 공개하는 식으로 충분하지 않을까라는 게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눈이 있는 사람은 다 아는 거지요. 그가 어떤 학자인지...

雨香 2011-03-26 03:00   좋아요 0 | URL
건강한 의미의 개인주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동감합니다. 특히 왜곡된 집단주의 문화가 여전히 남아있는 현실에서는요.
개인적으로 '파리를 생각한다'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2008년에 짧게 파리에 다녀왔었는데 파리 방문전에 출간되지 않은 점을 아쉬워 했습니다. '파리의 장소들'역시....

로쟈 2011-03-27 18:18   좋아요 0 | URL
저는 책만 모아놓고 아직 읽어보진 못했습니다. 파리에 갈일이 한번 생기면 좋겠는데요.^^;
 

이번주에 나온 역사분야의 책으론 미시사의 개척자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실과 흔적>(천지인, 2011)을 바로 구입했지만 데이비드 웨인스의 <이븐 바투타의 오디세이>(산처럼, 2011)도 관심도서로 꼽을 만하다. 이미 출간된 <이븐 바투타 여행기>(창비, 2001)의 분량이 부담스런 독자에게는 유용한 다이제스트판 가이드북일 듯싶어서다.

  

세계일보(11. 03. 19) 이슬람 세계의 진면목을 들여다보다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촉발돼 중동 각국에 불어닥친 민주화 열기는 전제 권력들을 하나둘 차례로 무너뜨리면서 사상 초유의 변화 바람을 몰고 있다. 특히 우리에게 중동은 머나먼 사막의 땅이 아니라 원유를 공급하는 생명줄과 다름없는 중요한 곳이지만 이슬람 세계에 대한 지식은 너무 부족하다. 이븐 바투타(1304∼1368)의 여행기는 지금의 중동 정치질서가 자리 잡기 시작한 중세 무렵의 모습을 비교적 상세히 전달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을 것 같다. 



영국 랭커스터대 이슬람학과 명예교수인 데이비드 웨인스 교수는 14세기 무렵의 중동과 아시아를 묘사한 아랍어 기록인 이븐바투타 여행기를 음식, 의복, 접대 문화, 성(性) 등 주제별로 다시 편집해 영어로 번역했다. 

1997년 미국 잡지 ‘라이프’가 에디슨, 콜럼버스, 루터, 갈릴레이, 다빈치 등 지난 1000년간의 위인 100명을 선정하면서, 여행가로는 이븐 바투타(44위)와 마르코 폴로(49위)를 포함시킨 사실에서도 이븐 바투타의 업적을 짐작할 수 있다. 유럽에서는 ‘동방견문록’의 저자 마르코 폴로보다는 이븐 바투타를 우위에 두고 있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는 지금도 진위 논란이 끊이지 않지만,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는 비교적 당대의 사실을 전해주는 역사 자료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그가 여행한 지역은 대부분 이슬람교의 세력이 굳건히 자리 잡았던 곳으로 현대인들에게 이슬람 세계의 진면목을 들여다볼 기회를 주고 있다.

책은 총 5장으로 구성됐으며 1장에서는 이븐 바투타와 마르코 폴로 등 중세 여행가들이 어떻게 여행기를 쓰게 됐는지 소개한다. 2장에선 본격적으로 이븐 바투타의 여정을 따라간다. 밤새 “발톱에서 피가 나올 지경”으로 걷고 배 침몰 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기도 한 이븐 바투타의 여행담이 담겨 있다. 3, 4장에서는 각국의 음식문화, 종교와 관련된 일화 등을 소개하고 5장에선 이븐 바투타가 여행 중에 만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의 생활 양식 등을 서술했다. 특히 10명이나 됐던 자신의 아내들과 각 지역 여성들을 비교한 부분에서는 호기심을 끌고 있다.

“몰디브 제도에서는 지참금이 적고 여성들이 사교를 즐기기 때문에 결혼을 하기가 쉽다. 선박이 도착하면 선원들이 여성들과 결혼하는데 바다로 나가야 할 때면 이혼한다. (중략) 나는 세상에서 이곳 여성처럼 사귀기가 쉬운 여성들은 본 적이 없다.”

“사람들의 인심도 넉넉했다. 만라위라는 이집트의 한 작은 마을에는 제당소가 무려 11곳이나 있었는데 가난한 사람들은 인정 넘치는 제당소 주인의 배려로 갓 구운 빵을 제당소 설탕 가마에 담가 먹을 수 있었다.”

그는 1325년 7월 2일 고향을 떠나 메카와 메디나의 성지순례를 한 뒤 인도,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중국 등 대륙을 넘나들며 1354년 다시 모로코에 도착하기까지 30년간 12만여㎞를 여행했다. 동시대 마르코 폴로의 여정보다 무려 3배가 넘는 거리였다. 저자인 웨인스 교수는 “통상 자신이 갔던 지역의 풍광과 모습을 묘사하는 게 대부분이지만 600여년 전의 여행가인 이븐 바투타는 이미 인문학적인 접근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동시대의 어느 여행가보다도 독창적”이라고 평가했다.(정승욱 선임기자) 

11. 0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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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출판면의 고참기자 고명섭의 서평집이 출간됐다. <즐거운 지식>(사계절, 2011). 서평집으론 <지식의 발견>(그린비, 2005), <담론의 발견>(한길사, 2006)에 이어지는 것으로 저자의 지속적이고도 일관된 책읽기와 관심사를 보여준다. 서평집으로도 앎과 사유의 두께를 만들어낸 경우다.   

  

한겨레(11. 03. 12) 책 읽는 기쁨에 빠져 보세요

‘책 탐닉’이란 말을 그 스스로는 싫어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지적 항해’라는 말을 더 선호하지 않을까. 770쪽 두툼한 분량에 4년 남짓 까다로운 안목으로 골라 읽은 인문 지식의 첨단이 담겼다. “게걸스럽게 지식을 물어뜯었음”을 자백하고 있거니와, 앎을 향한 그 항해의 나침반은, 세이렌의 유혹을 넘어 난바다를 건넜던 저 오디세우스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딸림제목도 ‘책의 바다를 항해하는 187편의 지식 오디세이’가 아닌가.

<즐거운 지식>은 <한겨레> 책 담당 기자로 있는 고명섭씨가 2006년부터 써온 신간 리뷰 기사를 묶은 책이다. 오디세우스에게 세이렌은 “앎의 유혹”이었으니, 그 유혹에 넘어가면 과거와 현재의 지식을 얻을지언정 “그 자신은 미래를 저당잡히고 끝내 삶을 잃어버릴” 수도 있음을 지은이는 인지하고 있다. <즐거운 지식>의 항해에 또다른 나침반은 니체다. 니체에게 앎은 “유혹과 위험과 공포 사이를 질주하는” 항해다. 지은이의 주 관심사는 서양 철학, 또는 지금 세계 읽기를 감행하는 정치사상이다. 책은 사상, 인문, 교양 ‘세 바다’로 짜였는데, ‘사상의 바다’로 가는 항구에는 지젝, 네그리, 가라타니 고진, 데리다, 바디우, 랑시에르, 샌델, 아렌트, 칸트, 니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포진해 있다. ‘인문의 바다’에는 괴테, 밀턴, 톨스토이, 베버의 삶과 함께 프로이트와 융의 분투가 넘실댄다. 지은이에게 니체와 오디세우스가 그랬듯이, 여기 실린 187편의 책 리뷰는 ‘지식의 즐거움’에 기꺼이 가닿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든든한 나침반 구실을 해줄 것 같다. 

11. 03. 13. 

P.S. 개인적으론 추천사를 쓰기 위해 책을 미리 읽어봤는데, 이미 지면에서 한번 읽은 글이 많았지만 모아놓으니 한결 '세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내가 적은 추천사는 이렇다.   

‘책에 관한 책’을 두 권 냈지만, 책의 바다를 항해하는 일은 내게도 언제나 설레면서도 두려운 일이다. 끝을 알 수 없는 수평선과 깊이를 알 수 없는 수심이 우리를 매혹하면서도 두려움을 안긴다. 어디까지 읽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어디쯤 읽고 있는 것일까란 물음에 한번이라도 붙들려본 독자라면 ‘일등 항해사’의 고마움을 알 수 있으리라. 그 바다의 유혹과 폭풍에 맞서 ‘두려움을 모르는 자’ 고명섭 기자는 오랫동안 내게 그런 ‘일등 항해사’였다. 서평을 일삼아 쓰면서도 그는 ‘앎의 기쁨’과 ‘배움의 즐거움’을 항상 누리고자 했고 전달하고자 했다. 덕분에 나도 기쁘고 즐거울 때가 많았다. 『즐거운 지식』은 그런 기쁨과 즐거움을 그러모은 선물 보따리이자 묵직한 도전장이다. 한번 읽어보라고 그가 우리 앞에 던져놓는 ‘프로블레마’다. 이 갑판 위의 씨름이 한 번 더 흥겹고 즐겁다. 문제를 사유하는 자의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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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香 2011-03-17 20:52   좋아요 0 | URL
고명섭기자의 글을 독서의 가이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항상 눈여겨 보고 있습니다. 지식의 발견은 연재당시 즐겨찾기에 별도의 카테고리를 만들어 놓고 매기사를 등록시켜 두었을 정도로 관심깊게 보았었습니다. 또 한권의 책으로 묶여 나왔으니 아주 좋으 가이드북이 되겠네요.

로쟈 2011-03-18 11:38   좋아요 0 | URL
네, 가이드북으로 요긴합니다...
 

지난 주말 북리뷰 가운데 뒤늦게 읽은 건 제이슨 델 간디오의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동녘, 2011)이다. 제목만으론 정체가 다 드러나지 않는데, 부제는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갖춰야 할 수사학'이다. 수사학을 표방한 책 가운데, 가장 급진적이지 않은가 싶은데 실제로 원제 자체가 '급진주의자들을 위한 수사학'이다. 하종강, 목수정, 안진걸, 노회찬 네 분이 추천 대열에 가담한 것만으로도 책의 성격을 짐작하게 해준다. 단순하게 말하면 이렇다. “언어를 바꾸면 생각하는 방식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 세계를 대하는 방식이 바뀌고, 그렇게 되면 사람들의 믿음, 가치, 태도, 행동이 바뀐다. 이렇게 모든 것이 바뀌면 사회의 방향이 바뀌게 된다.” 그러니, 오늘 당신의 언어를 수사학으로 새롭게 무장할 필요가 있다(음, 나도 문체를 좀 바꿔야 할지는 책을 읽어보고 판단해봐야겠다)...  

 

한겨레(11. 03. 05) 언어와 몸, 세상을 바꾸는 무기다 

부조리한 현실, 불공정한 사회…. 세상을 바꾸고 싶다. 마음은 불끈 더워지는데 실제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동지를 모아 혁명을 꿈꿔야 할까? 주먹 꼭 쥐고 거리로 뛰쳐나가야 할까? 과연 이 시대 혁명이란 가능한가? 곧 주저앉고 만다. 바로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실질적 방안이란 없다! 패배주의의 악순환에 빠져들 뿐이다. 사회뿐 아니라 가정에서 직장에서 여기저기 속한 크고 작은 그룹 안에서, 변혁의 소망은 쉽게 무너져내린다. 



그러나 바로 여기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외치는 소리가 있다. 정말로? 미국 템플대에서 공공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며 실천가로도 활약중인 제이슨 델 간디오는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에서 장담한다. 변혁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그의 과격한(?) 주장은 2008년 책에 담겨 세상에 나왔지만, 놀랍게도 지금 여기 지구 한쪽에선 혁명의 불길이 드높이 치솟고 있지 않은가.

그는 혁명의 가능성을 ‘수사학’에서 찾는다. 21세기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급진주의자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총도 칼도 돌도 화염병도 아닌 ‘수사’라고 힘줘 주장한다. 세상이 바뀐다는 것은 곧 더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바뀐다는 뜻이며, 이를 위해서는 설득의 방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전달하려는 고귀한 ‘내용’에 치중하느라 전달의 ‘방법’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아프리카·중동에서 부는 혁명의 태풍 뒤에는 소셜 미디어가 자리잡고 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은 전세계에 튀지니에서 일어나는 운동의 불길을 알렸고 세계 시민들의 소통과 연대가 혁명의 불을 당겼다. 선동가의 힘찬 연설과 거대 담론으로 혁명이 이뤄지던 시대는 지나고, 블로그의 포스팅 하나, 트위터의 트위트 한 줄이 논의를 촉발시키고 사람들을 거리로 불러냈다. 활동가들은 담론과 연설에 매달릴 게 아니라, 소통의 효과적 방식 곧 수사를 연구하고 전략을 세우는 데 힘써야 하는 시대가 됐다. 수사학은 “설득하고 추론하고 분석하고 나아가 현실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지은이가 강조하는 까닭이다.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의 유별나면서도 매력적인 지점은, 단순히 수사의 중요성을 외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간디오는 수사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더불어 구체적인 수사 전략까지 제시한다. 한마디로 활동가들을 위한 수사 지침서이자 실용서인 셈이다. 책의 부제가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갖춰야 할 수사학’이며 원제가 ‘급진주의자들을 위한 수사학’인 것도 그래서다. 



지은이가 수사 전략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신이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인데다 2000년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 항의운동 장면에서 혁명의 가능성을 엿본 뒤 본격적인 활동가의 길을 걸으며 현장에서 수사학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그는 68혁명 이후 등장한 신급진주의(소통·수사를 수단으로 변혁을 꾀한다는 생각) 이론을 확장해 실천하는 한편, 집회나 모임에서 소통의 방식을 분석한 결과물로 이 책을 써냈다.

그가 강조하는 혁명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수사는 글쓰기와 말하기다.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두 가지 수단. 활동가의 글쓰기와 말하기의 전략은 치밀해야 한다. 메시지는 무엇인지, 목표가 무엇인지, 독자나 청중은 어떤 이들인지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대비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게 지은이의 주장이다. 제안은 매우 구체적이다. 가령 글쓰기와 말하기는 완전히 다르게 준비해야 하는데, 글은 첫문장에 신경을 써야 하고 말은 숫자나 전문용어를 배제한 채 몸짓을 잘 활용해야 한다는 것.

각론으로 들어가면 언어 선택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한다. 이를 테면 ‘짭새’와 ‘견찰’, ‘미등록 노동자’와 ‘불법 이주민’ 중 어떤 단어 선택이 더욱 효과적인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아울러 권력을 위해 조작된 언어의 본래 의미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 역시 활동가의 몫이다. “언어를 바꾸면 생각하는 방식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 세계를 대하는 방식이 바뀌고, 그렇게 되면 사람들의 믿음, 가치, 태도, 행동이 바뀐다. 이렇게 모든 것이 바뀌면 사회의 방향이 바뀌게 된다.”

말의 언어를 넘어 몸의 언어도 지은이는 강조한다. 수사와 마찬가지로 몸의 맵시 역시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다. 여기서 수많은 활동가들은 고개를 갸웃거릴 것 같다. 혁명가는 외모를 가꾸고 몸에 치장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선입견이 강하다. 그러나 말하기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선 소통이 이뤄지는 공간의 분위기와 연설가의 외적 효과에 조화를 이뤄내야 한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상당히 큰 영향을 받는다. 말하는 사람의 겉모습이 낳는 수사적 효과가 대단히 크다는 것이다. 예컨대 지속 가능, 윤리적 소비 등을 연상시켜야 할 채식주의자가 뚱뚱하고 기름진 얼굴로 나타난다면 그의 올곧은 주장의 효과도 반감될 공산이 크다. 하다 못해 메시지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플래시몹 같은 거리 퍼포먼스를 연출하는 것도 효과적인 수사라고 간디오는 강조한다.(김진철 기자) 

11. 03. 09.   

P.S. 수사학이 본래 연설을 위한 기술이었으므로 '명연설'들을 참조해보는 것도 유익하겠다. '세계를 뒤흔든' 연설들이라면 더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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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3-10 15:10   좋아요 0 | URL
주역에 나오는 '글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말은 뜻을 다하지 못한다'(書不盡言 言不盡意) 는 표현을 긍정으로 바꿔 읽으면 뜻을(생각을) 먼저 세우고자 하면 말을(메를로 퐁티의 개념을 빌리면 세계와 지각을 매개하는 몸의 의미로도 해석 가능하군요) 바꾸고, 글을 바꿔야 한다라고 할 수도 있겠군요. 실천적 영역뿐만 아니라 이론적인 영역에서도 의미있는 방법론이라 생각됩니다. 말이 뜻을 전도하는 원래적 의미를 차치하더라도요....^^;

로쟈 2011-03-11 09:26   좋아요 0 | URL
전통적으로 수사학과 논리학은 적대적이었는데, 논리학(주장)이 승리를 위해서라도 수사학을 무기로 삼아야 한다는 걸로 정리할 수 있을 듯해요. 승리할 수 없다면 '공론'이 될 테니까 맞는 말이기도 하지요...
 

모스크바에서 주문하고 돌아와서 펼쳐본 책의 하나는 역사학자 토니 주트의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플래닛, 2011)이다. 전후 유럽사를 다룬 <포스트워>(플래닛, 2008)의 저자라는 것만으로 아무런 정보 없이(물론 제목과 부제는 보고) 주문한 책이었다. 작년 8월에 세상을 떠난 저자의 마지막 책이라는 것도 인상적이다(그는 구술로 이 책을 썼다).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국일보(11. 02. 19) "복지의 숭고한 기원 새겨라" 죽은 역사학자의 마지막 당부 

"우리는 경제 '성장'이 충분히 이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사회적 병폐를 줄이는 일들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번영과 특권은 파이의 크기가 커지면 자연스럽게 확산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슬프게도, 역사는 그렇지 않다고 증언한다."

영국 출신 역사학자 토니 주트(1948~2010)는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에서 이렇게 단언하면서 오늘날 세계가 당면한 가장 핵심적 과제는 불평등의 완화임을 역설한다. 이 책은 전후 유럽에 관한 최고의 역사서로 평가받는 <포스트워 1945-2005>의 저자인 주트가 루게릭병으로 온몸이 마비되어가는 고통 속에서 쓴 마지막 저서다. 



주트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면서 역사가답게 이를 극복할 대안으로 20세기 역사를 되돌아볼 것을 권한다. 특히 복지국가가 어떻게 탄생했고 어떤 과정을 거쳐 다시 불안의 시대로 들어섰는지를 되새기게 함으로써 신자유주의에 함몰돼 있는 서구 사회에 각성을 촉구한다.

서구에서 복지국가가 등장한 것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 후 그 참담한 시절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에서 탄생했다. 시장은 규제되었고, 복지는 자선이 아니라 시민의 당연한 권리로 인식됐다. 서구의 복지국가는 2차대전 이후 수십 년간 전례 없는 번영과 평등의 확산을 누렸다.

복지국가가 퇴색되기 시작한 것은 2차대전 이후에 태어나 복지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1960년대 세대들이 정의나 기회균등보다는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면서 싹텄다는 지적이 예리하다. 신좌파의 이러한 태도는 사회 구성원들이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는 의식의 퇴조를 가져왔고 이는 우파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트는 이런 태도들이 보수주의의 귀환을 불러왔다고 본다. "사회 따위는 없다. 오직 개인과 가족만이 있을 뿐이다"고 한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말이 이 같은 사조를 대변한다.

주트는 돈벌이에 대한 강박, 민영화와 민간 부문에 대한 숭배, 점증하는 빈부 격차 등 서구 사회에서 자연스러운 것들로 보이는 물질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특성은 인간 조건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 80년대부터 시작됐다고 지적한다. 또 이러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퍼트린 것은 시카고학파를 중심으로 한 영미권 경제학자들로 알려져 있지만 이들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친 것은 나치의 지배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오스트리아 출신 학자들이라고 추적해 들어간다. 그러면서 서구사회가 세계 대전의 잿더미 위에서 건설한 복지국가라는 위대한 유산을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지난 30년간 우리는 물질적 사리사욕의 추구를 미덕으로 살아 왔다. 우리는 법원의 판결이나 의회 법안이 좋은 것인지, 공정한 것인지, 정당한 것인지, 올바른 것인지 묻는 법이 없다. 과거에 우리는 이러한 정치적 질문들을 던지곤 했다."

주트의 지적은 외환위기 이후 밀어닥친 신자유주의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한 한국 사회에도 경종을 울린다. 주트는 사회의 공동선을 위한 공동 행동의 가치와 가능성을 믿는 사회민주주의의 입장에 서서 자본주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남경욱기자)  

11. 02. 21.  

P.S. 사회적 공동선에 대한 관심이라는 측면에서 주트의 책은 '공공철학'이란 말을 떠올리게 하는데, 야마와키 나오시의 <공공철학이란 무엇인가>(이학사, 2011)를 보면, 일본에서는 이 단어가 2000년대 초반부터 급속도로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공공철학 강좌도 생기고 네트워크도 만들어지는 식이다. 하지만 내가 '공공철학'이란 말을 접한 건, 적어도 기억엔 마이클 샌델의 <왜 도덕인가?>(한국경제신문, 2010)가 처음이다. 이 책의 원제가 'Public Philsophy'였고, 직역하면 '공공철학'이 될 터이다. 공공철학에 대한 관심은 또한 '공화주의'나 '공화국'과 분리될 수 없는데(샌델은 물론 '절차적 공화국(procedual republic)'에 대해선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번역본에서 '절차적 민주주의'라고 옮겨진 단어다), 박명림/김상봉 교수의 <다음 국가를 말하다>(웅진지식하우스, 2011)가 연이어 떠오른다. 나란히 읽어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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