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 대중과 소통하는 지식인'에 관한 기사를 스크랩하고 나니 자연스레 떠오르는 건 위키리크스와 어산지이다. 러시아에 잠시 다녀오는 동안 '위키리크스'에 관한 두 권의 책이 화제가 된 듯싶은데, “정보공개는 투명성을 높이며 이 투명성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든다”는 이들의 신념에 동의를 표하며(비슷하게 흉내내자면 나의 모토는 "지식의 공유가 더 나은 사회를 만든다"이다),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진즉에 노벨평화상 후보로도 올라가 있다는 위키리크스의 활동과 그 여파가 앞으로도 많은 변화를 가져오지 않을까 추측된다. '비밀이 많은 정부'를 갖고 있는 우리라고 해서 예외는 아닐 것이다.    

  

경향신문(11. 02. 19) ‘비밀 없는 세상’ 열려는 위키리크스의 비밀

타임지는 독자들이 뽑은 2010년의 인물로 폭로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의 대표 줄리언 어산지를 선정했다. 위키리크스는 지난해 4월 미군 아파치헬기가 이라크 민간인을 폭격하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으로 세계를 분노시켰다. 7월에는 아프가니스탄전 관련 문건 7만6000건, 10월에는 이라크전 관련 문건 39만건을 공개해 명분 없는 전쟁의 실체를 폭로했다. 이어 11월에는 미 국무부 외교문건 25만1000건으로 외교가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위키리크스가 무너뜨린 건 미국의 도덕성만이 아니다. 권력층 비리에 성난 튀니지 민중들은 23년 만에 민주화 혁명을 일으켰고, 이 열기가 이집트로 옮겨붙어 무바라크의 30년 독재를 끝냈다.

위키리크스가 설립된 건 2006년 12월이지만 명성과 영향력은 지난해 절정에 이르렀다. 다음 행보가 주목되는 이유다. 한편 어산지는 스웨덴 여성 2명을 성폭행한 혐의로 스웨덴 법원의 구속영장이 집행돼 런던에서 체포된 뒤 일주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위키리크스가 한 일은 범죄인가, 정의인가. 어산지는 어떤 인물인가. 



<위키리크스>란 제목의 책 두 권이 나란히 나왔다. <위키리크스-권력에 속지 않을 권리>(박규호 옮김, 1만5000원)는 2007년부터 위키리크스와 협력 관계였던 독일 ‘가디언’지의 두 기자가 이 조직과 어산지를 객관적으로 기록한 책이다. 위키리크스가 한 일은 무엇이고 어떻게 운영되는지, 폭로와 관련된 법적·윤리적 쟁점이 무엇인지, 권력과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다각도로 분석했다. 또 다른 책 <위키리크스-마침내 드러나는 위험한 진실>(배명자 옮김, 1만3800원)은 위키리크스의 2인자였다 어산지와 결별한 독일 출신 IT전문가의 내부 고발이다.

<권력에 속지 않을 권리>에서 저자들은 어산지의 개인사와 위키리크스의 탄생을 상세히 소개한다. 1971년 호주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어산지는 히피와 해커의 혼합물이다. 그의 어머니 크리스틴은 히피문화에 경도돼 17세에 가출했으며 혼자 어산지를 키웠다. 그후 사이비 종교집단의 일원인 남자와 살다가 헤어진 뒤 계속 추적을 받았다. 어산지의 유랑 기질은 여기서 비롯한다.

어산지는 10대 초반인 1980년대 중반 코모도어64란 이름의 홈컴퓨터를 통해 모뎀으로 네트워크에 연결하는 실력을 갖췄고, 곧 해커의 세계에 발을 들인다. 추정 IQ 140~180, 멘닥스란 이름으로 유명했던 그는 통신사 노텔 네트워크에 들어갔다 컴퓨터 범죄로 기소된다. 그후 멜버른대학 수학과에 들어갔으나 사막에서 잘 달리는 장갑차 기술을 개발하는 데 염증을 느껴 학교를 그만둔다.

위키리크스의 아이디어는 1996년 존 영이란 뉴요커가 운영하던 크립톰이란 사이트에서 얻었다. 당시 영은 자신이 입수한 비밀문서를 웹사이트에 공개했다. 10년 뒤인 2006년 어산지는 영에게 자신의 프로젝트를 설명하면서 도메인 등록을 부탁한다. 이어 진보적 정치관을 가진 대니얼 매튜스를 비롯한 5명의 핵심 멤버가 모인다.

위키리크스는 전 세계 개인들이 연결된 네트워크로, 활동은 메일 교환과 채팅을 통해 이루어진다. 내부고발자의 신변안전을 위해 제보자가 웹사이트의 보내기 단추를 클릭하면 발송된 자료는 암호화되어 50개국의 수많은 서버를 거친다. 메인 서버는 스웨덴에 있으나 웹사이트 입구에서 매복하는 정보기관의 적을 교란하기 위해 스스로 가짜를 만들어내는 장치도 돼있다.

위키리크스 이전에도 내부고발자는 존재했다. 워터게이트 스캔들의 주인공인 ‘딥 스로트’(마크 펠트 FBI 국장)가 그렇고, 1970년대 초반 베트남전 극비문서를 복사해 신문사에 돌렸던 대니얼 엘즈버그도 있다. 고문직을 부탁받은 엘즈버그는 이를 수락하지 않았으나 어산지의 아이디어에 갈채를 보냈다. 어산지는 2007년 1월 NGO모임인 세계사회포럼에서 자신의 계획을 알렸으나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해 말 케냐 전직 대통령의 비리 문건으로 대선에 영향을 미쳤다. 이어 2008년에는 스위스은행그룹 율리우스 베어의 고객데이터를 폭로했다.

위키리크스의 명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람은 미군병사 브래들리 매닝이다. 심약한 컴퓨터광이자 동성애자로 이라크에서 정보분석 업무를 하던 그는 간단한 조작만으로 미 국방부와 국무부의 엄청난 정보를 빼돌렸다. 그는 제보자 절대보호라는 위키리크스의 존재가치를 스스로 깨뜨림으로써 감방행이라는 비극을 초래했다. ‘딥 스로트’가 27년 만에 스스로를 공개했듯이 영원히 비밀을 지키는 건 힘든 법이다. 그는 아주 빠르게 이 사실을 채팅에서 익명의 상대에게 고백했다가 미 당국에 체포됐다.

어산지와 위키리크스의 활동은 아주 획기적인 것이다. 거대 국가권력을 겨냥한다는 점에서 정치운동이지만, 본질적으로 언론운동이기도 하다. 저자들은 “위키리크스는 3년 만에 워싱턴포스트가 30년간 한 것보다 더 많은 특종을 했다”고 말한다. 이는 언론 엘리트의 능력을 뛰어넘는, 인터넷시대의 다중지능이란 개념으로 설명할 만한 일이다. 위키리크스의 목표가 미국인 것만도 아니다. 오히려 중국·러시아·중앙아시아의 억압적인 정권들이 목표였다. 이들의 원칙은 “정보공개는 투명성을 높이며 이 투명성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든다”는 것이다.

위키리크스의 활동은 복잡한 쟁점을 낳는다. 비판자들은 “비밀 유지는 현대국가의 성립 기반”이며 “국가권력이 무너진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어산지 1인권력”이라고 지적한다. 최대 피해국인 미국은 어산지에게 방첩죄 적용을 검토했으나 그렇게 되면 정부기밀을 보도한 모든 언론사를 기소해야 한다. 가장 큰 아이러니는 정보의 생산과 유통 자체에 있다. 미국을 경악에 몰아넣은 정보의 작성자는 바로 미국 자신이다. 정부의 기밀 정보를 다루는 자격을 가진 사람이 250만명을 넘어섰고 유출 가능성은 넘쳐난다.

저자들은 위키리크스의 부작용보다 기여에 더 큰 무게를 둔다. 국가기밀의 폭로가 정부에 피해를 주고 그 손실을 만회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으나 중장기적 시각에서 그것은 정치를 새롭게 조정하고 정화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어산지는 컴퓨터 언더그라운드 문화가 낳은 괴짜 천재다. 자유분방한 그는 10대 후반에 동거했으나 아내와 아이가 곁을 떠난다. 지난해 스웨덴에서 며칠 사이에 두 여성과 성관계를 맺었고 콘돔 사용을 거부함으로써 성폭행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됐다. 이 사건이 터지자 핵심 멤버들은 그에게 2선으로 물러날 것을 요구했지만 어산지는 자신이 “이 조직의 심장이고 영혼이며 창립자고 대변인이고 최초의 프로그래머이고 기획자이고 자금조달자”라며 거부한다.

그런 어산지를 이해했고 비판했던 사람은 위키리크스 독일대변인이자 프로그래머였던 다니엘 돔샤이트-베르크다. 그는 어산지의 독단적인 조직운영, 불투명한 자금관리에 항의해 지난해 10월 결별했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나는 위험한 진실>에서 자신이 아는 위키리크스와 어산지를 비판적으로 서술했다. 그러나 위키리크스가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것은 분명하다. 그는 ‘오픈리크스’라는 새 네트워크를 준비하고 있다. 이 밖에 ‘리크스’ 혁명은 전 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다. 중국 인권운동가들은 거번먼트리크스를 구축 중이며 발칸리크스, 인도리크스, 브뤼셀리크스등 지역·내용적으로 특화된 리크스들이 출범했다.(한윤정 기자) 

11. 02. 20.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02-21 08: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21 0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21 1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떤 책이건 저자와 제목, 그리고 부제만 보면 대략 '견적'을 낼 수 있다고 나름대로 자부하지만 때론 종잡을 수 없는 책들과 마주치기도 한다. 지난주에 구입한 레베카 코스타의 <지금, 경계선에서>(쌤앤파커스, 2011)가 그런 경우다. '토머스 프리드먼, 제레드 다이아몬드, 말콤 글래드웰의 전통'을 잇는 저자라고 소개되지만, 제레드 다이아몬드와 말콤 글래드웰이 대체 어떤 계보로 연결되는 건지 알지 못하는 나로선 그들의 '전통'이 막연하다. 게다가 레베카 코스타란 이름이 떠올려주는 것 역시 전무하다. '지금, 경계선에서'란 제목은 또 어떤가. '오래된 믿음에 대한 낯선 통찰'이란 부제도 불친절하긴 마찬가지다. 내가 유일하게 기댄 건 에드워드 윌슨의 추천사였다. "레베카 코스타는 이 책에서 우리 인류가 처한 위태로운 상황에 관해 전적으로 공감 가는 견해를 제시한다."는 게 추천사의 첫 문장이다. 아무튼 그래서 어떤 책인가 궁금하던 차였는데, 주말 북리뷰들에서 제법 크게 다뤄졌다. 

    

경향신문(11. 01. 29) ‘슈퍼밈’을 넘어… ‘통찰’의 세계로

고도로 문명이 발전했던 마야제국(BC 2600~AD 900)이 왜 붕괴했을까. 학자들은 가뭄, 식량 부족, 바이러스 확산, 인구 증가, 전쟁 등을 원인으로 꼽아왔다. 그런데 저자는 “모든 것이 맞지만, 그것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고 말한다. 선행하는 어떤 원인이 있었기에 마야인들은 기후변화나 바이러스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멸망을 자초할 정도의 전쟁을 벌였다는 것이다.

근본 원인은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에서 찾을 수 있다. 문명이 발전하면서 사회의 복잡성이 커지는 데 비해 인간의 뇌는 그것을 감당할 만큼 빠르게 진화하지 못해 간극이 생긴다. 저자는 이를 ‘인식한계점’이라고 부른다. 역사를 살펴보면 문명 붕괴의 직접적 원인이 되는 사건들이 발생하기 이전부터 진보를 둔화시키는 어떤 장애에 봉착한다. 장애는 두 단계로 나타난다. 먼저 정체에 빠지고, 이어 믿음이 지식을 대체한다. 다시 마야의 가뭄을 살펴보면 마야인은 강우량이 적은 해에 재배할 작물의 종류를 정하고 공공용수 사용량을 규제하는 등 물 보존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나 강우량이 계속 감소하는데도 보존 외에 근본적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이어 두번째 단계로 진입하면서 어린아이를 죽여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해결책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이런 붕괴 과정은 과연 고대문명에만 해당되는 것일까. 현대사회도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현재 지구는 천연자원 고갈, 기후변화, 빈부격차, 환경파괴 등 여러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런데도 이것이 장기적으로 진행되는 나머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데다 설사 해결방법을 발견하고도 효율적으로 대응하지 못한다. 즉 인식한계점에 이른 것이다.

저자는 현대문명의 전진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밈(meme)이란 개념으로 정리한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정의한 밈은 사람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진 정보, 생각, 느낌, 행동, 상식, 전통, 학설, 편견 등을 뜻한다. ‘가위를 들고 뛰지 말라’, ‘식사한 지 1시간이 지난 뒤 수영하라’ 등이 밈의 사례다. 밈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지기도 하고, 동시대에 유행성 바이러스처럼 퍼지기도 한다.

문명 정체의 조짐이 나타나는 우리 시대의 ‘슈퍼밈’은 불합리한 반대, 책임의 개인화, 거짓 상관관계, 사일로(분리용기)식 사고, 극단의 경제학 등 다섯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불합리한 반대는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다. 이라크전을 반대하는 미국 시위대에게 어떤 철수계획을 선호하는지 물어보면 십중팔구는 “그런 건 모른다”는 반응을 보인다. 탄소배출 문제에 대해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휘발유값을 올리거나 소형차를 사도록 강제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도 여기에 속한다. 저자는 “무조건 싫다고만 하는 태도는 무엇인가에 조정당할 가능성을 높인다”고 말한다.

책임의 개인화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에서 모두 나타난다. 알카에다 요원의 여객기 폭파 시도, 자동차 산업의 붕괴, 복잡한 파생상품으로 인한 금융위기 등은 시스템의 문제임에도 불구, 그것을 고치기보다 여론에 편승해 몇몇 책임자를 처벌하는 것으로 끝난다. 비만, 우울, 중독 등의 문제를 개인의 무절제나 의지박약으로 돌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거짓 상관관계란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를 동등하게 여기는 것이다. 정확한 원인과 결과를 밝히는 대신 추측, 의견, 학설 등을 진실로 받아들인다. 지구 온난화가 심해지는 시기에 권총 소지자가 늘면 지구 온난화가 권총 소지를 불러온다는 식이다. 포도주와 심장병, 백신과 자폐증, 서브프라임 모기지와 세계적 불황, 교사 봉급과 공교육 등 일견 상관있어 보이는 문제도 뚜렷한 인과관계를 찾기 어렵다.

사일로식 사고의 사례는 미 우주항공국(나사)이 개발한 태양에너지 집광판이다. 접시안테나 같은 간단한 장치로 얼마든지 전기를 공급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 이는 10년이 넘도록 에너지부에서 퇴짜를 맞았다. 나사의 업무는 우주개발이라는 이유에서다. 에너지부는 이미 청정기술 벤처자본가들과 함께 태양열 발전보다 못한 대체에너지 개발에 많은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극단의 경제학은 모든 일에 ‘경제’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다. 저자는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재정적자를 보전하기 위해 마리화나 유통을 합법화하고 이에 과세하는 방안을 검토했던 일화를 든다. 이 아이디어는 결국 폐기됐는데, 그 이유는 주민의 건강이나 사회적 폐해가 아니라 합법화하면 마리화나 가격이 폭락해 증세 효과가 없다는 것이었다.

슈퍼밈은 복잡한 사회에서 나타나는 전형적 현상이다. 정확한 판단을 위해 너무 많은 지식이 필요하고, 시스템이 복잡해 고치는 게 어려우니까 개인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거짓 원인을 믿는 것은 혼란 상태에서 안정을 찾으려는 동물적 반응이다. 돈이란 잣대 역시 그것이 확실하다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저자는 이런 ‘믿음’을 무조건 폄훼하지는 않는다. 보행자 신호가 켜지면 차가 멈춘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교통체계가 유지되듯이 믿음이 지식과 질서를 낳는다. 문제는 균형인데, 시계추가 지식보다 믿음으로 너무 기울어졌다.  

 

<지금, 경계에서>의 원제는 <파수꾼의 딸랑이(Watchman’s Rattle)>이다. 한밤중에 깨어있는 파수꾼이 다가오는 위험을 감지하고 사람들에게 알리는 딸랑이 소리처럼 현대문명의 위기를 경고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저자는 문명 붕괴의 징후를 제시하는 것과 함께, 희망과 대안을 보여준다. 가장 위로가 되는 것은 마야인과 달리 우리가 문제를 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부터 패턴을 발견했다. 또 붕괴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기 때문에 다양한 해결책을 시도해볼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에게는 통찰력이 있다는 점이다.

통찰은 ‘유레카’(알았다)라는 외침,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는 힘이다. 소방관 왜그 닷지가 자신에게 달려드는 불을 피하기 위해 자기 주변에 작은불을 놓아 위험을 피한 것, 미국 FBI가 전설적인 사기범 프랭크 애버그네일을 감옥에서 썩히는 대신 사기범을 잡는 요원으로 활용한 것 등이다. 특히 모범적 사례는 무하마드 유누스의 그라민 은행이다. 빈민대출이라는 새로운 방식에 대한 반대, 개인화된 가난의 책임, 가난한 사람은 대출을 안 갚는다는 거짓 상관관계, 금융기관과 지역사회라는 사일로, 사람보다 수익을 우선하는 금융관행 등 다섯 가지 슈퍼밈을 보기좋게 뛰어넘었다.

이 책은 다양한 실례를 인용하면서 현대문명의 위기를 설득력 있게 경고한다. 통찰력을 높이기 위해 두뇌훈련, 운동, 휴식, 식사와 수면을 권유하는 대목에서는 자기계발서의 한 대목을 추려놓은 듯한 느낌도 준다. 저자는 캘리포니아대를 졸업한 뒤 실리콘밸리를 거쳐 애플컴퓨터, 휴렛패커드, 스리엠, GE 등과 함께 일했으며 인간진화, 글로벌시장, 신기술 등 최신 조류를 연구하는 사회생물학자다. 리처드 도킨스와 에드먼드 윌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2010년작.(한윤정기자) 

11. 01. 29.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hilocinema 2011-01-30 16:01   좋아요 0 | URL
근 6년을 드나들면서도 'thanks to'라는 것을 몰랐답니다.
오늘 처음 'thanks to'를 해봅니다.
로쟈님을 통해 소개 받아 산 책도 많았었는데,
그동안 적립되지 못한 마일리지가 많이 아쉽네요.
오늘부터라도 열심히 'thanks to'해 보려고 합니다.

로쟈 2011-02-01 14:44   좋아요 0 | URL
사실은 저도 이용해본 적이 없는 기능입니다.^^;

雨香 2011-02-01 16:37   좋아요 0 | URL
다양한 실례를 적용했다는 점에서 토머스 프리드먼, 제러드 다이아몬드, 말콤 글래드웰을 엮은 듯 한데 세 저자가 어떻게 엮일 수 있는지는 저도 의문입니다.

로쟈 2011-02-01 17:24   좋아요 0 | URL
말콤 글래드웰도 '문명'론을 얘기하는지 안 읽어봐서 잘 모르겠어요...
 

새로 나온 책들을 식별하는 일이 이 서재의 주된 역할 중 하나인데, 가끔은 손이 놀 때가 있다. 관심도서에 대한 리뷰가 아직 뜨지 않거나 뜨더라도 책이 알라딘에 입고가 되지 않은 경우다. 지난주에 나온 책 가운데는 스튜어트 켈리의 <잃어버린 책을 찾아서>(민음사, 2011)가 그런 경우인데, 이상하게도 알라딘에서는 '잃어버린 책'이다. '우리가 읽고 싶어도 결코 만날 수 없는 위대한 책들의 역사'란 부제를 좀 비틀면 '우리가 읽고 싶어도 알라딘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책'이다. 적어도 오늘 월요일 아침까지는. 하여 이 책 얘기는 나중에 적기로 하고, 지난 주말 리뷰 가운데 오규 소라이의 <논어징>(소명출판, 2011)에 관한 것을 옮겨놓는다. 요즘 대기업에서 불고 있다는 <논어> 바람과 관련한 칼럼과 함께. 시부사와 에이치의 <논어와 주판>(페이퍼로드, 2009)이란 책의 존재를 알게 해준 칼럼이기도 하다.      

한겨레(11. 01. 22) 정약용도 감탄한 일본 ‘소라이학’의 진수

에도 막부 시대 일본 유학의 혁신자 오규 소라이(1666~1728·그림)의 주저 <논어징>이 한국어로 처음 완역됐다. 동양철학을 전공한 임옥균·임태홍·함현찬 박사가 함께 옮기고 이기동 성균관대 교수가 감수했다. <논어징>이 완역됨으로써 그동안 주로 2차 문헌을 통해 소개되던 ‘소라이학’의 진수를 한국어로 직접 느껴 볼 수 있게 됐다. 



오규 소라이는 흔히 앞세대 이토 진사이(1627~1705), 뒷세대 모토오리 노리나가(1730~1801)와 함께 에도시대를 대표하는 사상가로 꼽힌다. 진사이는 <논어>와 <맹자>를 연구하여 주자학을 비판하는 ‘고의학’을 창시했고 노리나가는 <고사기>라는 일본 역사책을 연구해 ‘국학’을 집대성했다. 소라이는 진사이의 주자학 비판을 더욱 철저하게 밀어붙여 송대 유학과는 아주 다른 독창적인 반주자학 사상을 세운 사람이다.

소라이의 사상을 국내에 알린 저작으로는 일본 정치사상가 마루야마 마사오의 노작 <일본 정치사상사 연구>가 먼저 거론된다. 일본 정치사상 연구에 획을 그은 이 저작에서 마루야마는 소라이를 근대성의 사상적 개척자이자 정치의 발견자로 주목했다. 그는 동서양을 동시에 관조하는 눈으로 송나라 유학의 완성자인 주자를 동시대 서구 기독교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선상에 놓고, 주자학을 비판한 소라이를 근대 정치사상의 선구자가 된 마키아벨리에 견주었다. 마키아벨리가 도덕과 정치를 분리해 근대 정치학의 토대를 닦았듯이 소라이도 주자학의 도덕관념에서 벗어나 정치 자체를 발견함으로써 근대성의 싹을 틔웠다는 것이 마루야마가 포착한 소라이학의 핵심이었다.

소라이의 삶 자체도 마키아벨리의 삶과 유사한 면이 있다. 소라이는 도쿠가와 막부 5대 쇼군의 시의였던 오규 가게아키의 둘째아들로 에도(도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쇼군의 문책을 받아 유배를 당하자, 아버지를 따라간 소라이는 유배지에서 주자학을 독학했다. 27살 때 아버지가 사면을 받자 소라이도 에도로 복귀해 유학자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5대 쇼군의 총신이었던 야나기사와 요시야스에게 발탁돼 17년 동안 그의 정치 고문 노릇을 했다. 1709년 5대 쇼군이 사망하자 야나기사와는 실각했고, 소라이도 관직에서 물러났다. 마키아벨리가 피렌체 공화정에서 14년 동안 관직생활을 하다 쫓겨난 뒤 <군주론>을 저술했듯이, 소라이도 관직에서 물러난 뒤 저술 작업을 본격화했으며 대표작 <논어징>은 죽는 순간까지 가필을 거듭했다.

소라이는 관직에 있던 시절 주자학적 도덕보다는 막부의 정치적 상황을 먼저 고려하는 관점을 취했는데, 그런 사실을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1702년에 에도를 발칵 뒤집어 놓은 ‘46인 사무라이’ 사건이다. 주군을 잃은 낭인 46명이 주군의 원수인 기라 요시나카의 저택을 습격해 원수의 목을 벤 뒤 막부의 처분을 기다렸던 것이다. 이 사건은 주군에 대한 가신의 충성이라는 봉건적 주종관계와 막부 통일정권의 정치적 지배가 충돌하는 파장이 큰 사건이었다. 정치 고문으로서 소라이는 이 사태를 충성이라는 사적인 도덕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며 천하의 법도를 세운다는 정치적 관점을 앞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건은 소라이의 조언대로 사무라이들의 할복 자살이라는 방식으로 종결됐다.

이 에피소드에서 엿보이는 정치 우위의 사상을 <논어징>에서 확인할 수 있다. ‘논어징’(論語徵)이란 공자의 말씀을 모은 <논어>에 대한 해석들을 ‘밝히고 검증한다’(徵)는 뜻이다. 소라이는 선진시대에 성립된 육경에 입각해 <논어>를 해설하면서, 주자의 논어 해설이 불교와 도교에 사로잡혀 있다며 <논어집주>를 반박하고, 이토 진사이의 <논어고의>가 주자학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했다고 혹독하게 비판한다. 이런 비판작업을 통해 고대 육경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소라이의 사상은 순자의 학설에 기울어지는 모습을 보인다고 옮긴이들은 말한다. 고대의 육경, 곧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악기> <춘추>가 대부분 순자의 문하에서 경전으로 성립됐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맹자의 성선설이 아니라 순자의 성악설이 소라이 사상의 바탕을 이룬다.

더 중요한 것은 <논어>를 해석하는 데서 드러나는 정치적·현실적 태도다. 이를테면 공자가 말하는 ‘인’(仁)을 ‘사랑의 이치이며 마음의 덕’이라고 풀이하는 주자와 달리 소라이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으로 독해한다. 또 ‘학이’ 편의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는다’(人不知不溫)라는 주자의 해석을 거부하고 ‘윗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억울해하지 않는다’라고 풀이한다. 구체적인 정치적 해석인 셈이다. 소라이학은 뒷날 그의 제자 다자이 순다이가 쓴 <논어고훈외전>을 통해 조선의 다산 정약용에게도 전해진다. 다산은 처음에는 소라이학을 괴이쩍게 생각했으나 후에는 “찬란한 문채”를 높이 평가하고 자신의 <논어고금주>에서 깊이 살펴 많은 부분을 취했다. 나아가 “이제 그들(일본 유학자들)의 글과 학문이 우리나라를 훨씬 초월했으니, 참으로 부끄러울 뿐이다”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소라이학의 경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평가다.(고명섭기자)  

경향신문(11. 01. 12) [서재에서]대기업에서 ‘논어’ 열풍이 부는 진짜 이유

지난해 초반 이후 최근까지 대기업에서 <논어> 열풍이 불고 있는 건 여간 흥미로운 일이 아니다.
몇 년 사이에 기업에서도 인문학 바람이 거센데다 동양 최고의 고전 가운데 하나인 <논어>를 기업 임원들이 새삼 즐겨 읽는다고 이상할 건 없지만 유례 없는 현상이어서 눈길이 갈 수 밖에 없다.
몇몇 대기업의 경우 전 사원이 <논어>를 읽고 토론했으며, 더욱 주목할 만한 일은 국내 최고 글로벌기업인 삼성 그룹의 수뇌부와 핵심간부들이 이 책으로 ‘열공’ 중이라는 사실이다. 



특히 2년 6개월 만에 복원된 삼성그룹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 직원들이 <논어>를 읽는 것은 ‘기본으로 돌아가자’(back to the basics)는 취지라고 한다. 하긴 조르주 클레망소 전 프랑스 총리 같은 지도자도 정국이 난마처럼 헝클어져 해법을 찾기 어려울 때면 홀로 골방에 틀어박혀 ‘그리스 고전’을 읽으며 ‘기본으로 돌아간다’고 했으니, 세대교체와 새로운 출발을 다짐한 삼성이 그럴 법도 하다. 삼성의 경우 창업주인 이병철 초대회장이 최고의 경영 바이블로 삼았던 책이 <논어>여서 이해는 간다. 이병철 회장은 이에 관해 <호암자전>(중앙M&B)에 자세하게 밝혀 놓았다.

“가장 감명 받은 책 혹은 좌우에 두는 책을 들라면 서슴지 않고 <논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나라는 인간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은 바로 <논어>이다. 나의 생각이나 생활이 <논어>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만족한다. <논어>에는 내적 규범이 담겨 있다. 간결한 말 속에 사상과 체험이 응축되어 있어, 인간이 사회인으로서 살아가는 데 불가결한 마음가짐을 알려 준다.”

한국기업 간부들이 수많은 고전 중에서 왜 갑자기 <논어>를 유행처럼 많이 찾는 걸까.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말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곰곰이 생각하다보니 문득 떠오르는 게 하나가 있긴 하다.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숭앙받는 시부사와 에이치(1840~1931)의 책 <논어와 주판>(페이퍼로드)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무려 84년 전인 1927년 추세도 출판사가 시부사와의 강연내용을 편집해 첫 출간한 이후 일본에서 ‘비즈니스의 바이블’로 전해내려 온다. 

 

시부사와는 <논어>를 해석하면서 경제나 상업과 관련된 대목은 정통적인 관점과는 각도를 달리한다. 이를테면 송나라 주자학파의 영향을 받은 에도 시대 유학자들이 “부자는 인의도덕이 없기 때문에 어진 사람이 되고 싶으면 반드시 부귀의 염을 버려라”고 해석했던 부분을 시부사와는 “도리가 뒷받침되지 않은 부귀를 얻는 것보다 오히려 빈천한 편이 낫지만, 만약 올바른 도리를 다하고 얻은 부귀라면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받아들인다. 시부사와는 ‘부귀와 도덕은 결코 모순관계가 아니어서 함께 추구할 수 있다’며 당시 부정적인 상인에 대한 인식의 틀을 바꿔놓았던 것이다. 옮긴이 노만수의 해제가 설명했듯이 ‘논어(도덕)와 주판(경제)’의 통일 즉 ‘도덕경제합일’이야말로 ‘진정한 논어’라는 게 시부사와의 생각이다. 



2006년 화제를 몰고 온 중국 CCTV 프로그램 <대국굴기>가 “한 손에는 논어, 한 손에는 주판을 든 시부사와의 유상(儒商)이야말로 일본을 굴기시킨 비결이고 중국 굴기의 출구는 <논어와 주판>에 있다”라고 극찬하는 바람에 인기가 더욱 높아졌다. 게다가 세계 경영학의 비조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가 “기업의 목적이 부의 창출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기여라는 것을 시부사와 에이치에게 배웠다’고 고백해 전 세계적으로 한층 더 유명해졌다. 



시부사와의 <논어> 해석과 실천이 더 큰 빛을 발하는 부분은 드러커가 상찬한 ‘사회적 기여’다. 시부사와는 올바르게 번, 어마어마한 돈을 교육·의료·빈민구제 등의 공익·사회복지 사업으로 환원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자가 되었다.  

이병철 회장이 <논어>를 늘 곁에 두었던 것도 시부사와의 영향 때문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이 회장이 고인이 된 터라 확인할 길은 없지만 맨주먹으로 최고의 삼성을 일궈내면서 일본을 철저히 벤치마킹한 점을 미뤄보면 더욱 그렇다. 실제로 시부사와는 제국호텔, 도쿄증권거래소, 기린맥주 등 500여 개의 기업 창립에 관여해 ‘일본 근대자본주의의 최고 영도자’ ‘일본 기업의 아버지’란 별칭을 얻을 정도였다.

한국 재계에 <논어>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한 것은 2009년 11월 시부사와의 <논어와 주판>이 처음 번역돼 출간된 것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시기적으로 맞물리기 때문이다. 그에 앞서 <논어>만 수백 번 읽고 <논어경영학>(청림출판)이란 책까지 펴낸 민경조 코오롱건설 부회장 같은 마니아도 적지 않으나 그때까지 기업에서 열풍이 되기엔 역부족이었다.

일본에서 장기 베스트셀러인 <논어와 주판>의 한국어 번역판이 1년여 전에 처음 나온 것도 의아한 면이 없지 않다. 불과 보름 차이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출판된 두 번역본(페이퍼로드의 <논어와 주판>과 사과나무의 <한손에는 논어를 한손에는 주판을>)이 지난해 여름 삼성경제연구소가 선정한 ‘CEO가 휴가 때 읽을 책 14선’에 포함되면서 관심도가 부쩍 높아졌다.

특히 <한 손에는 논어를 한 손에는 주판을>의 경우 삼성경제연구소 추천도서에 선정된 뒤 그 전에 비해 몇 배의 판매량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경제연구소 추천도서는 ‘출판계의 마법사’로 일컬어질 만큼 위력이 지대하다. 출판사 경영자들은 삼성경제연구소가 특정 책의 판매량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문화권력 역할을 한다고 부러움 반 불만 반을 섞어 평가한다. 과거 MBC-TV 프로그램 ‘느낌표’의 위력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문화관광부나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등 권위를 지닌 다른 기관의 추천도서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게 한결같은 얘기다.

이 연구소의 추천만 받으면 곧바로 책 표지의 홍보 띠지에 그 사실이 등장하는 게 이를 방증한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추천한 책 중에는 좋은 책도 있지만 대기업의 논리를 반영한 책들도 적지 않아 책 읽기의 다양성 측면에서 볼 때 우려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고 보면 기업인들의 <논어> 열풍은 이래저래 삼성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는 셈이다. 기업들의 이례적인 풍조이긴 해도 4대 성인의 한 분인 공자의 ‘말씀’을 기록해 놓은 책 <논어>를 깊이 읽고 참뜻을 새겨서 나쁠 거야 없겠다. 시부사와가 강조한 ‘도덕적 기업’보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에 방점을 찍으려는 자기합리화의 방편이 아니길 기대할 따름이다. 때마침 ‘사회적 기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시절에 너무나 당연한 ‘공자 같은 말씀’인가? (김학순 대기자) 

11. 01. 24.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hilocinema 2011-01-27 20:08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요즘 직장 동료들과 '논어' 세미나를 하고 있는 중인데,
오규 소라이의 '논어징' 완역판 출간 소식은 반갑군요!
고주, 신주, 정약용주, 소라이주등을 고루 살펴보며 느낀 점은 소라이의 '반주자적 독창적 해석'이 가장 쉬이 이해되었다는 것입니다. 개념에 매몰되거나, 너무 고답적이거나, 초월적인 해석을 지양하고 현실적이며 살아꿈틀거리는 인간 내면의 '역동'을 고려한 것으로 보이는 소라이의 해석이 아마 제 마음의 어떤 부분과 만나는 지점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여하튼 논어 해석에 있어 제게 인식의 지평을 넓혀준 소라이의 '논어징' 완역을 반기면서, 이 곳에 소개의 기사를 실어주신 '로쟈'님께도 감사의 말씀 드려요.
 

<무엇이 정의인가>(마티, 2011)에 대한 비교적 자세한 리뷰기사가 올라왔기에 옮겨놓는다. 알라딘에선 비교적 반응이 좋은 편인데, 그래도 <정의란 무엇인가>에는 견줄 바가 아니다. 여전히 베스트셀러 수위권을 달리며 조만간 80만부를 돌파할 거라는 예상이니까. 그 정도면 거의 국민 '교과서' 수준이지 싶다...  

  

서울신문(11. 01. 19) 한국사회 ‘정의란… ’ 샌델 교수에게 말하다

지난해 출판계 최대 화두는 마이클 샌델 미국 하버드대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의 돌풍이었다. 1쇄 1000부만 나가도 많이 나간다는 인문출판 현실에서 70만부 넘게 팔렸으니 경악할 법도 하다. 여기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다. 한편으로는 정의에 대한 타는 목마름이 있었다는 얘기여서 반갑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의에 대한 국내의 수많은 고민들은 외면당하기 일쑤인데 물 건너 유명대학 교수의 논의에 열광하는 기현상에 대한 냉소도 나온다. 



‘무엇이 정의인가-한국사회, 정의란 무엇인가에 답하다’(마티 펴냄)는 ‘정의란’가 불러일으킨 이런 돌풍에 대한 한국인들의 대답이다. 문화평론가인 이택광 경희대 교수와 장정일 소설가를 비롯해 정의론과 법철학 분야를 공부해온 이양수, 김도균, 최원 등 젊은 법철학자와 정치학자, 필명 ‘로쟈’로 유명한 서평블로거 이현우 등 10명의 필자가 참가했다.

먼저 이택광 교수의 결론은 “누구도 이 정의 없는 현실에 대한 책임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지금 여기서 ‘정의란’이라는 책을 읽는다.”는 것이다. ‘정의란’을 읽는 것은 부(不)정의한 세상에 홀로 탈색된 채 서 있고자 하는 욕망이 낳은 일종의 알리바이, 즉 부재증명이라는 것이다.

단적으로 “막걸리보안법 시대도 아닌데 이명박 정권이나 삼성그룹에 대해 정의롭지 못하다고 말하려면, 상당한 오해와 불편을 감수해야만 한다.”는 얘기다.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은 알지만 앞장서서 외칠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 책으로 대리만족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 어린 시선이다.

장정일은 더 신랄하다. 그는 “창의적 논문과 정리성 논문이 있다면 샌델의 책은 정리성 논문에 가깝다.”고 정의한 뒤 “도덕에 대한 고민을 잠재적·정치적 가능성에 연결짓지 못하고 너무 일찍 법을 불러낸다.”고 비판한다. 샌델은 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그 근거로 공동체 도덕에 기반을 둔 법을 내세운다. 이런 까닭에 한국의 맥락에서 샌델은 법 질서 확립이라는 명분으로 남용될 위험이 있다. “법치를 통한 정의사회-공정사회도 좋다-구현은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가 아니던가.”라고 장정일은 반문한다.

비판론자 못지않게 중립적 태도를 취하는 이들의 주장에도 귀 기울일 만하다. 이들은 대체로 샌델이 ‘정의란’를 통해 결론적으로 도출해 내는 공동체주의와 그 이후 샌델의 주장을 미국식 애국주의와 접합한 공동체주의 운동으로 세심하게 구분하는 쪽에 서 있다.

자유주의에 대한 샌델의 공격을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대립으로 파악하기보다 자유주의의 부족한 점을 공동체주의가 보완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한 예다. 또 이들은 샌델이 끊임없이 제시하는 사고실험을 그 자체로 비윤리적인 것으로 거부하기보다 철학적인 판단을 압축해서 보여 주는 도구로서 받아들인다.

서평블로거 이현우는 이런 입장에서 ‘정의란’의 돌풍이 불러올 긍정적인 측면에 주목하자고 제안한다. ‘삼성 비자금’ 사건에 대한 재판 결과를 언급하면서 “지금 필요한 것은 샌델 열풍이 아니라 깨어 있는 시민의 반부패 혁명”이라는 김용철(‘삼성을 생각한다’의 저자) 변호사의 주장에 대해 이현우는 되묻는다. “시민들의 의식을 어떻게 깨울 수 있을까.”

이현우는 “내기를 건다면 나는 아직도 우리에겐 더 많은 도덕적 사고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쪽에 걸고 싶다. 70만 독자로도 깨어 있는 시민이 부족하다면 필요한 것은 700만의 독자이고 시민”이라고 단언한다. 이제 막 도덕적 사고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결과를 조금 더 두고 보자는 얘기다.

김도균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아예 다른 차원을 지적한다. 정치학자 샌델이 정치적 공공선에 대해 언급하는 데 치중하다 보니 사회경제적 차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정치적인 부분에서는 자유주의 철학을 비판하면서도 사회경제적인 분야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는 것은 자유주의 원리를 적극 수용하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추측해 본다.”면서 “교육, 의료, 주거, 보육, 노후, 기초소득 보장 같은 복지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론은 이권우 출판평론가의 언급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책 읽기의 사회학을 검증하는 현장에 서 있다. 책 읽는 한국 사회가 과연 현실을 바꿀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정의란’ 열풍이 또 한번 휩쓸고 지나간 ‘선진’ 미국의 유행에 그치고 말지 아닐지는 우리 자신에게 달렸다는 의미다.(조태성기자) 

11. 01. 19.   

P.S. 파이앤셜뉴스의 '화제의 책' 코너도 옮겨놓는다. <무엇이 정의인가>의 내용을 잘 간추려주고 있다.

파이낸셜뉴스(11. 01. 20)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 신드롬을 어떻게 볼 것인가

세간의 화제가 된다는 것은, 곧 기자 회견을 앞두고 있다는 뜻이다. 쏟아지는 질문공세, 눈부신 플래시 세례. 세계 정상급 연기로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건 김연아도, 1996년 은퇴를 앞두고 있던 서태지도, 아들의 병역비리가 드러난 정치인도 다 알고 있었다. 자신이 밟아야 할 다음 순서가 바로 ‘기자회견’이라는 점 말이다. 그들 앞에는 너무도 많은 질문이 놓여 있었다.

70만 독자들의 선택. 무한도전 멤버 중 MBC 서점을 가장 방문하지 않는다는 하하도 귀동냥으로 알고 있는 ‘정의란 무엇인가’. 일명 ‘저스티스’로 회자되고 있는 이 책 역시 우리 사회의 화제가 되었다. 슈퍼스타K 최종무대가 방송된 바 있는 한 대학의 무대는 이 책의 저자, 마이클 샌델을 만나기 위한 이들로 북적거리기도 했다. 무려 4000여 석의 강연장을 연예인이 아니라 바로 ‘철학자’가 채웠다는 사실은 이 책이 단순히 ‘베스트 셀러’ 이상의 의미로 한국사회에 상륙했음을 직감하게 한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만한 베스트 셀러를 부러 거창하게 소개하는 것은, 이 책도 드디어 다음 순서를 밟을 때가 됐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바로 기자회견. 그 동안 우리는 책 한 권을 앞에 두고 얼마나 많은 수다를 떨었던가. 이 책이 잘 팔리는 이유에서부터, ‘그래서 정의가 도대체 뭐라는 거야?’라는 푸념까지. 우리의 그 모든 궁금증을 반영한 첫 번째 공식질문이 바로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의미심장하게도, 마이클 샌델의 질문을 그대로 뒤집은 책 ‘무엇이 정의인가?’이다.

이 같은 제목은 ‘정의란 무엇인가’의 열풍에 편승하고자 하는 ‘안일하고도 소박한 상업적 바람’의 연장선에 이 책이 놓여 있다고 오해할 여지도 준다. 동시에 베스트 셀러를 마냥 삐딱하게 보려는 것은 아닌지 염려할 만한 소지도 낳는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얘기하건데 그런 오해와 염려에 대해선 안심해도 좋다. 이 책은 11명의 공저자들이 다양한 방향에서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을 분석하고 이를 소비하는 한국사회를 독해한다. 샌델에 대해 우호적인 논자들도 있고 비판적인 논자들도 있다.

소설가 장정일은 “정작 읽게 된 이 책의 수준이 고작 맥도날드 매장에서 고등학생들이 햄버거를 먹으며 할 수 있는 잡담에 불과하다”고 다소 감정적으로 말하면서도 샌델의 정의가 일종의 ‘신학’으로 변질될 수 있는 지점을 선명하게 짚어낸다. 꽤 알려진 인터넷 서평꾼 ‘로쟈’는 샌델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정의’ 열풍이 한국사회를 ‘살아있는 정의의 사회’로 만들어 갈 시민들의 도덕적 사고 훈련에 도움이 된다고 옹호한다. 한편 현재 샌델의 책을 번역하고 있는 철학자 이양수는 ‘정의론’을 둘러싼 다양한 입장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샌델이 무엇을 비판하고 있고 어떤 비판을 받고 있는지를 잘 정리해 준다. ‘샌델이란 무엇인가’라는 소제목을 붙여도 좋을만한 글이다. 그리고 정치철학자 최원은 샌델이 중요한 참고점으로 삼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을 소개하며 샌델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공박한다.

이들 모두가 탄탄한 논리로 뒷받침되고 압축적으로 배경 지식들을 소개함으로써 우리는 정의에 대한 더욱 진지한 고민에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샌델에 대한 찬성과 반대를 넘어서 ‘정의에 대한 더 깊은 고민’이 이 책의 기획 의도이기도 하다. 샌델에 대한 치밀한 분석 끝에 나온 “무엇이 정의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마냥 “샌델”이라고 답할 수는 없게 된다. 이 책은 이렇게 샌델이 촉발시킨 ‘정의’라는 화두를 더 의미 있게 증폭한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은 다음엔 꼭 이 책을 읽어야 합니다”라고 공식 선언해도, 분명 흠이 되지 않을 것이다.(김성광 예스24 도서1팀 MD)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11-01-19 12:08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을 뒤늦게 사 볼 생각이긴 한데
이런 류의 책이 몇 권은 더 나오지 않을까 해요.
단지 미이클샌델이 이 분야에서 포문을 연 것일뿐
그것이 과연 이 사회를 얼마나 바꿔놓을 수 있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로쟈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이승만 때부터 한 번도 정의로운 사회에서 살아보지 못한
한국인들 아닙니까?ㅋ

돈케빈 2011-01-19 19:16   좋아요 0 | URL
비트겐슈타인 열풍이나 샹탈 무페 열풍은 기대해 볼 수 없을까요?
'하바드' 세 글자의 힘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자꾸때리다 2011-01-19 20:57   좋아요 0 | URL
그런 열풍은 프랑스에서나...ㅡㅡ;;

philocinema 2011-01-19 21:37   좋아요 0 | URL
한국에서도...
 

이번주 문학신간 중 관심도서는 돈 드릴로의 <마오 Ⅱ>(창비, 2011)이다(처음엔 <마오 1>이 어딨는지 찾았다!). 중국 관련서를 몇 권 읽어야 할지도 모르는 터여서 내겐 적절한 타이밍에 출간된 책이기도 하다. 드릴로의 책은 <화이트 노이즈>(창비, 2005)만 구해놓고 아직 손대지 못하던 참인데, 시작은 <마오 Ⅱ>부터 해야겠다...

 

한국일보(11. 01. 08) 테러와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 문학의 위상은…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미국 소설가 돈 드릴로(74)는 동년배 작가인 토머스 핀천과 더불어 미국 포스트모던소설의 양대 축으로 꼽힌다. 소비자본주의, 미디어와 이미지, 문학과 예술의 위상, 테러 등 현대 미국 사회를 다각도로 탐구해 온 지성파 작가인 그가 1991년 발표한 장편소설 <마오 Ⅱ>는 이듬해 펜/포크너 상을 받으며 그의 문학적 명성을 굳힌 작품이다.

89년의 미국 뉴욕과 영국 런던, 레바논 베이루트를 오가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해 이란의 종교ㆍ정치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를 폄훼했다며 영국 작가 살만 루시디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뒤 사망했고, 레바논에서는 아랍과 이스라엘의 갈등에서 비롯된 내전이 절정을 맞아 테러가 난무했다. 이런 격동기를 배경으로 철저히 은둔의 삶을 살던 유명 소설가 빌 그레이가 베이루트에 인질로 억류된 스위스 시인을 구출하려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는 과정이 소설의 얼개를 이룬다.

이 소설은 그러나 서사 구조가 상당히 복잡하고, 그 의미 또한 상징적, 은유적이다. 주인공 빌을 비롯, 그에게 초상사진 촬영을 의뢰받는 사진작가 브리타, 치밀한 전략으로 빌의 상품성을 극대화하는 비서 스콧, 런던에서 베이루트 테러 단체의 메신저 역할을 하는 죠지 등은 저마다 현대 문명사회의 문제적 지점들을 대변한다.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작가 드릴로는 특히 세계적 규모의 테러와 폭력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문학의 무기력과 왜소함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데 공을 들인다. 빌의 비극적 죽음은 곧 문학의 죽음으로 읽힌다. 뉴욕의 작업실에 틀어박혀 20년 넘게 세 번째 소설의 문구를 다듬는 자폐적 삶을 살던 빌은 브리타와의 만남에서 자극을 받고 내처 런던으로 건너가 납치된 시인의 구명에 나선다. 그러나 그를 덮친 것은 기자회견장에서의 폭탄 테러와 불의의 교통사고. 중상을 입은 그는 시인 대신 인질이 되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레바논행 배를 탔다가 그곳에서 죽고, 종내 신분을 증명할 소지품마저 도난당한다.

그러나 스콧은 빌의 실종을 되레 그의 상품가치를 높일 호기로 여긴다. 상업주의에 포섭돼 독자적 가치를 잃어버린 문학에 대한 드릴로의 강도 높은 냉소로 읽힌다. 나아가 그는 호메이니의 장례 인파, 양키스타디움의 통일교 합동결혼식, 마오쩌둥(毛澤東)의 5,000만 홍위병 등을 강렬한 스냅사진처럼 작품 곳곳에 삽입, 테러리즘 시대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종교적ㆍ정치적 집단주의를 인상적으로 폭로한다. "미래는 군중들의 것이다"(30쪽)라는 문장이 묵시록의 한 대목처럼 읽힌다.

그럼에도 이 소설에서 방점을 찍을 대목은 무력할지언정 문학의 가치를 온몸으로 증명하려는 빌의 고투일 듯싶다. "내가 왜 소설의 가치를 믿는지 아시오? 그건 소설이 민주적 함성이기 때문이지. … 이름없는 막노동꾼이나 꿈도 하나 키우지 못한 무법자라도 앉아서 자기 목소리를 찾을 수가 있고 운이 좋으면 소설을 쓸 수도 있는 거지."(243쪽) (이훈성기자) 

11. 01. 08.  

P.S. 기사의 서두에 토머스 핀천이란 이름이 나오는데, 국내에는 작품보다 연구서가 더 많이 나와 있는 듯싶은 그의 대표작 <중력의 무지개>가 조만간 출간될 예정인 것으로 안다. 묵직한 분량으로 나올, 올해 가장 기대가 되는 타이틀 가운데 하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고세운닥나무 2011-01-08 15:18   좋아요 0 | URL
아주 오래 전에 민음사에서 번역된 <브이를 찾아서>까지 세면 핀천의 소설이 2권 번역돼 있죠. 일본에선 핀천의 전집도 간행중이라고 하던데요.
<중력의 무지개> 기대되네요.

로쟈 2011-01-08 15:41   좋아요 0 | URL
네, <브이>도 세계문학전집으로 곧 다시 나온다는 얘기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