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에 대한 이정우-홍윤기 논쟁에 답한다"란 부제로 노마디즘은 한 '발원지'라 할 이진경씨가 한겨레 신문에 기고한 글을 옮겨온다. 이게 어쩌다 상반기 인문학 '최대 논쟁'의 모양새를 갖춰가는 듯하다(거꾸로 우리 인문학이 얼마나 '조용한 동네'인가를 반증한다!). 어쩌다 구경꾼의 자리에 서게 되어 이 '네버엔딩' 티격태격을 중계하게 됐는데, 어지간하면 좀 말리고 싶어진다! 이 글이 '종료 휘슬'의 역할을 해주길 바랄 따름이다.

 

 

 

 

한겨레 21(06. 06. 23) 노마디즘은 침략주의인가

 -나는 철학자의 책을, 그것도 원문으로 몇 번이고 읽어야 철학이나 철학자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대로 오역이 있어도 엔간하면 번역서를 읽는 게 좋다는 입장이다. 철학이란 철학적 문헌을 다루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사유하고 사유를 삶으로 만드는 것임을 보여준다고 믿기 때문이다(*그래서 '엔간한' 번역서들만 양산되는 것인가?). 그래서 훌륭한 이론과 개념에 대해 말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혹은 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지식이나 사유를 삶에서 분리된 것으로, 고상하고 그저 지적인 것으로 분리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이나 사상을 무력화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 최근 유목주의 문제를 둘러싸고 철학자 이정우(왼쪽)씨와 홍윤기씨의 논쟁이 전개됐다. 발단은 천규석씨의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라는 책이다.(사진/ 좌-한겨레 서정민 기자, 우- 한겨레 김태형 기자)

‘들뢰즈’를 전공한 분이 원전 타령?

-그렇기에 나는 농사꾼도, 노동자도 철학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자본주의의 극단화된 분업이 가로막아서 그렇지,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것처럼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마르크스/엥겔스가 말하는 '공산주의 유토피아'가 바로 그것 아닌가? 뒤집어 얘기하면, 그것처럼 어려운 것도 없다!). 그런데 농사꾼이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굳이 대비해서 말하자면, 농사꾼이 철학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삶을 사유하고 그 사유를 통해 새로운 삶을 구성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즉, 농사꾼임에도 철학을 할 수 있다는 기대 밖의 가능성보다는 농사꾼이기에 자신의 삶을 걸고 그것으로 얻어낸 사유의 강도가 중요하다고 믿는다. 거꾸로 자신의 철학에 따라 농사를 짓게 된 철학자 역시 존경한다.

-내가 알기엔 들뢰즈도 그렇다. 그는 스피노자를 전혀 읽지 않았지만 스피노자의 사유대로 사는 사람이 있다면 스피노자주의자라고 하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반면 스피노자의 개념들을 잘 알지만 그저 알 뿐이라면 ‘스피노자주의자’라는 말에 값하기 어렵다. 그래서 프랑스어로 원전을 읽지 않았다면 들뢰즈 철학에 대해 말해선 안 된다는 말을, 푸코나 들뢰즈 철학을 ‘전공’하신 분이 말하는 것이 무척 당혹스럽다.

-들뢰즈도 푸코도 어떤 자격이나 조건을 들어 발언할 주체의 자리를 제한하려는 이런 태도를 쉽게 받아들일 것 같지 같다. 그것은 담론의 권력이 작동하는 가장 통상적인 방법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발언의 취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들뢰즈의 사상이 서양철학사의 정점에서 나온 철학이라는 말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는 철학사라는 이름으로 행사되는 지적 권력에 대해, ‘주류’(majority)를 형성하며 그 척도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배제하거나 억압하는 권력에 비판적이었고, 따라서 그의 사상은 차라리 철학사와 대결하고 거기서 벗어나려는 철학이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농사꾼이든 철학자든 다른 사상이나 철학자에 대해 언급할 때는, 정확하게 이해하고 말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모든 이론을, 더구나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이론을 성실히 엄밀하게 읽고 이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확신하기 어렵다면 극단적인 비난이나 비판의 말은 아껴야 하지 않을까?(*알다시피, 이 '정확성'에 대해서 이진경씨와 '대학원생' 간에 논쟁(?)이 붙기도 했었다. 응답이 없는 논쟁이었기에 '논쟁 없는 논쟁'이라고 해야 맞겠지만.) 

 

 

 

 

-예를 들어 들뢰즈가 억압으로부터 욕망의 해방을 주장했다는 말, 욕망의 해방이란 대중문화 수용자가 유행이나 이미지 등을 즐기는 찰나적 해방이라는 말, 인간의 욕망의 근원을 성적인 것으로 보았다는 말은, 들뢰즈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들뢰즈는 욕망의 근원을 성적인 것으로 보았다는 이유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비판한다. 욕망은 처음부터 사회적으로 투여된다는 것, 따라서 성적인 것으로 환원해선 안 된다는 것이 <안티 오이디푸스>라는 책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다(*'대학원생'의 새로운 <안티 오이디푸스> 번역은 언제 나오는지?).

-그리고 욕망이 해방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혁명은 의무가 아니라 욕망이었기에 있을 수 있었다”)을 주장한 것은 분명하지만, 욕망과 억압, 욕망과 권력을 대비시키는 단순한 구도는 거꾸로 그가 비판하고자 했던 것이다. 가령 정치학의 근본 문제란 “어째서 대중은 마치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도 되는 양 자신에 대한 억압을 욕망하는가?”라고 말할 때, 그는 욕망이 억압을 원하는 사태(파시즘의 경우가 대표적이다)가 바로 문제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권력과 욕망이 다른 것이 아님을 지적한다. “권력이 바로 욕망인 것이다.” 욕망은 어떤 배치를 형성하는지에 따라, 혹은 어떤 배치에 들어가는지에 따라 혁명을 향하기도 하고 권력을 향하기도 한다. 따라서 문제는 욕망의 배치를 이해하고 변환시키는 것이다.

‘전쟁기계’ 개념은 무엇인가

-유목주의와 전쟁기계에 대한 비판도 이와 비슷하다. 먼저, 들뢰즈가 말하는 ‘전쟁’은 가치와 가치의 충돌이고, 어떤 지배적인 가치와 대결하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좋은 전쟁에서는 화약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썼고, 들뢰즈는 카프카의 책이나 클레의 그림을 ‘전쟁기계’라고 했다. 전쟁기계란 기존의 지배적 가치에서 벗어나는 탈주선을 그리는 집합적 배치의 이름이다. 그래서 그것은 새로운 가치의 창안을 통해서 기존의 가치, 이미 지배적 장치와 결합된 가치에서 탈주하지만, 많은 경우 그것과 충돌하게 된다. 대개는 국가 장치나 지배적 가치가 탈주선을 가로막으며 시작되는 충돌이다. 여기서 ‘전쟁’이 발생한다. 따라서 전쟁기계는 전쟁을 목적으로 하지 않지만, 전쟁을 회피하지도 않는다.


△ 노마디즘은 몽골이란 또 하나의 기원으로 회귀하려는 복고주의가 아니다. 몽골의 유목민들. (사진/ REUTERS NEWSIS/ ANDREW WONG)

-유목민의 전쟁도 이러하다. 유목민은 전쟁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유목하며 자유로이 이동할 뿐이다. 그러나 땅을 ‘소유’하는 정착민들은 울타리를 쳐서 그들의 유목 행로를 차단하고 저지한다. 전쟁이 시작되는 것은 바로 거기다. 유목민의 번호적 조직은 이동과 유목에 적합하지만, 전쟁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정착민이 자신이 소유한 것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만들 때조차 그들의 전쟁기계가 조직의 모델이 된다. 이처럼 국가가 장악한 전쟁기계로 인해 유목적 전쟁기계는 전쟁을 목적으로 하는 기계로 오해되고 혼동된다(*그러므로 사단은 유목민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착민에게 있다?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라고 간주하는?).

-자유로운 행로를 차단하는 울타리가 잊혀진 채, 유목이 남의 땅을 침범하고 침략하는 것으로 비난되듯이. 그러나 소유나 울타리가 없다면 침범이나 침략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자유로운 이동이 만들어낸 길들이 침략의 길로 간주되는 것은 그것을 차단하려는 소유의 벽, 울타리와 성벽(만리장성!) 때문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따라서 “들뢰즈가 유목민이 정착민 다음에 출현했다고 했다”는 말은 부적절한 말이다.)

-노마디즘은 몽골이란 또 다른 기원으로 회귀하려는 복고주의가 아니다. 따라서 몇몇 민족주의자들이 그것을 확장된 민족주의로 바꾸어버리는 것에는 단호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 그래서 들뢰즈는 유목민을 차라리 “움직이지 않은 자”로서 정의했다. 즉, 외형상의 유목이나 움직임이 아니라, 앉아서도 끊임없이 지배적 가치와 대결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안하는 ‘태도’를 유목주의라고 정의한다. 유목민을 이주민과 구별한 것도 그 때문이다.

-따라서 이동한다는 이유만으로 신자유주의와 유목주의를 동일시하는 것 역시 부적절하다. 신자유주의, 혹은 세계를 이동하는 자본이란 어디를 가도 오직 돈밖에 모르는, 하나의 목적에 고착된 정착민이고, 잘 봐줘야 자신이 착취하던 것이 다 소진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해 다시 착취하기 시작하는 이주민일 뿐이다. 삼성이 ‘디지털 노마드’를 자사의 광고 카피로 삼았다고 해서 노마디즘을 부르주아적이라고 하는 것은, 자본가가 게바라를 상품화했다고 해서 그를 부르주아적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생태주의자의 적대감 이해 못해

-마지막으로 덧붙이면, 생산성으로 유목과 농경을 비교하는 것은, 정확하게 공업에 의해 농업을 축출했던 논리를, 개발주의의 논리를 반복하는 게 아닐까? 유목민이 불모의 땅에서 산다는 조건을 고려하지도 않은 채 비교된다는 것은 접어둔다고 해도, 자본과 개발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에서 자기가 사는 땅을 그로부터 지키려는 농민이나 갯벌이나 산을 개발에서 지키려는 생태주의자는 지배적 가치와 대결하는 전쟁기계가 된다(배치가 달라지면 생태주의나 농업의 의미가 달라진다). 그렇다면 생태주의자가 유목주의에서 위협과 적대감을 느낄 이유가 없는 게 아닐까?

06. 06. 25.

P.S. 끝으로 내가 갖게 되는 의문: "외형상의 유목이나 움직임이 아니라, 앉아서도 끊임없이 지배적 가치와 대결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안하는 ‘태도’를 유목주의라고 정의"할 경우,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반복'하는 몽골의 유목민들은 '이주민'으로 재정의되어야 하는 것인가?("유목민인 줄 알지만, 착각이야. 너희는 이주민들일 뿐이야!") 그들은 노마디즘이란 '영토'에서도 아무런 거처 없이 '자유로이' 이동해가야만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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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06-26 12:16   좋아요 0 | URL
오타 지적 ^^; 맨 처음 로쟈님의 '서문'에 '마리고' 싶습니다.

로쟈 2006-06-26 12:2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꼼꼼하게 읽어주셔서.^^

yoonta 2006-06-26 13:08   좋아요 0 | URL
몽골의 유목민들은 말그대로 "외형상의 유목"이겠죠. 들뢰즈의 노마디즘(유목주의)는 이와는 다른 "지배적 가치와 대결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안하는 <태도>"겠구요. 몽골 유목민이라고 할때의 유목민은 어디까지나 외형상(들뢰즈의 유목주의로 봤을때는) 그런 것이기 때문에 굳이 "이주민"으로 바꿔부를 필요는 없을듯합니다..^^

그건 그렇고 로쟈님 코멘트에서도 볼수있듯 이진경씨는 비생산적인 이정우,천규석/홍윤기씨 논쟁보다는 "대학원생"의 물음에 대답해주면 더 재밌을것 같은데 말이 없네요. 김재인씨가 어떤 걸 지적했는지는 잘 기억은 안나는데 대답이 없는 것은 자신이 오류가 있음을 암묵적으로 승인한다는 건가요? 아니면 걍 무시하는건가요?

로쟈 2006-06-26 13:19   좋아요 0 | URL
'외형상의 유목'이라고 하시니까 잠시 웃음이 났습니다. 요즘 드라마에서 '굴러온 돌' 얘기가 자주 나오던데, 상식적으로 말하자면, '노마디즘'이야말로 '굴러온 돌' 아닌가요? "그래, 이주민이라고 안 바꿔도 돼. 그냥 유목민이라고 해줄께. 한데, 너네는 그냥 외형상상의 유목민일 뿐이야. 명심하라구!" 같은 건가요?^^

<노마디즘>과 <천 개의 고원> 사이에서 무엇이 오고갔고, 무엇이 더 오고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저도 당장은 지적할 수 없는데, 그런 '거래'야 당사자들이 알아서들 하겠지요. 서로 손해볼 게 없다거나, 아니면 대꾸해봐야 손해라는 판단을 했는지도...

yoonta 2006-06-26 13:48   좋아요 0 | URL
철학이란게 원래 그런거잖아요. 일상적인 시선(지배적 시선)으로부터 조금 다르게 보기.. 굴러온 돌(들뢰즈의 노마디즘)이 박힌 돌(실제의 유목민들)에 대해서 딴지를 걸수 있다는 것..그러고 보니 그것도 벌써 노마디즘의 '실천'이군요..^^

로쟈 2006-06-26 14:15   좋아요 0 | URL
저는 유물론자여서(이진경씨의 정의는 좀 다르지만) 사유란 삶의 손바닥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다르게 보기' 같은 '애교'가 거창한 '실천'이 되는 지점은 삶의 무게를 떠안을 때입니다. 제가 지지하는 건 '멋있는 노마디즘'이 아니라 유목민들은 거친 손등입니다...

yoonta 2006-06-26 14:27   좋아요 0 | URL
근데 웃긴건 정작 그 실제의 유목민들이 자신을 "유목민"이라고 정의하는가?하는 건 또 아닌것 같아요. "거친 손등"을 가진 실제의 유목민들은 자신을 굳이 유목민이냐 아니냐라는 논쟁을 할필요도 없는거죠. 그냥 그들은 그들의 삶을 살아갈 뿐이니. 그렇다면 유목민이라는 꼬리표자체가 외부적인 시선 혹은 관념적 사유의 결과물이라고 본다면 그런 사유의 카테고리안에서의 들뢰즈의 시선은 또 새로운 의미가 있단거겠죠..^^

니브리티 2006-06-27 14:16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유물론에 따르면 저는 '관념론자'임에 틀림 없군요..^^'' 저는 사유와 삶은 별개이거나 불일치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오히려 저는 유물론의 다른 방식으로 정신이 직접 물질/삶이 되는 방식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체셔고양이처럼, 그 몸이 사라진 뒤에도 강력하게 남는 웃음이라는 정서(!)--정말 지젝은 탁월하다니까요--말이에요.

로쟈 2006-06-27 17:20   좋아요 0 | URL
"사유와 삶은 별개이거나 불일치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 게 관념론 맞습니다. 자기에게 맞는 잠옷을 입으면 되는 것이죠...
 

해마다 이맘때면 한국전쟁 관련서들이 출간된다. 올해는 아니어서 관련서들을 검색해보다가 눈에 띄는 사진집에 대한 소개 기사를 옮겨온다. 간략한 기사는 '민중의 소리'(06. 06. 22) 서재진 기자의 것이다.

  

-6.25 한국전쟁 발발 56주년을 앞두고 한국전쟁 당시의 상처들을 담은 사진집 2권이 사진전문 눈빛 출판사에서 20일 발간됐다. 소설가 박도씨가 2004년 2월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의 사진자료실에서 찾아낸 한국전쟁 사진 230여점을 선별, <지울 수 없는 이미지 2>를 펴낸 것.

-이와 함께 지난 2004년 발간했던 <지울 수 없는 이미지1>에 담았던 사진과 그 후 찾아낸 사진 중 100장을 골라 전쟁을 직접 체험한 김원일 문순태 전상국 이호철 등 소설가 4명의 증언 에세이를 함께 실은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을 동시에 발간했다.

-소설가 박도씨는 두번째 사진집에서 "우리의 부모님들은 그 혹독한 전쟁기를 어 떻게 이겨내셨을까"에 중점을 두고 사진을 골랐다고 밝혔다. <지울 수 없는 이미지>는 그래서 전란 속에서 신음하는 민초들의 참혹한 모습이 담겨있다. 사진집의 1부에는 전쟁 중의 남대문, 서울역, 국회의사당 등 당시 보기 드물었던 컬러 사진 40점이 수록돼 있고, 2부에는 전쟁으로 울부짖는 피란민과 고아, 전쟁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생한 모습이 전쟁 포로 및 군의 활동상과 함께 실려있다.

△이미 숨진 엄마의 시신을 붙잡고 하염없이 울고 있는 어린 남매의 모습

△집단학살 현장에서 수습된 시신 중에서 가족을 확인한 유족들이 울부짖고 있는모습.(1950년.10월 함흥)

 

△미군의 네이팜탄 공격으로 부상당한 여인들이 응급구호소에 모여 있는 모습.(1951년.2월 수원)

△미 공군 전투기가 원산 시가지를 폭격하는 모습.(1951년)

△월미도에서 체포된 뒤 옷이 벗겨진 상태에서 검색을 당하고 있는 북한군 모습.(1950년 9월)

06. 06. 24.

 

 

 

 

P.S. 한국전쟁 관련 주요 저작들을 꼽아본다. 소련의 문서고가 공개되면서 한국전쟁에 관한 새로운 진실들이 더 밝혀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가장 최근에 나온 정병준의 <한국전쟁>(돌베개, 2006)은 그러한 성과를 반영하고 있다고. 이에 대한 동아일보의 소개기사.

 

 

 

 

"<한국전쟁>은 전쟁 발발 과정을 옛 소련과 미국의 문서 등을 바탕으로 세밀하게 분석한 책이다. 저자는 특히 6·25전쟁 직전 국군 17연대가 황해도 해주로 먼저 침공하자 북한이 반격해 6·25전쟁이 일어났다는 ‘남침 유도설’의 허구를 명백히 입증한다. ‘해주 공격설’은 개전 직후 북한군에게 형편없이 밀리던 국군이 선전용으로 퍼뜨린 것에 불과하며 당시 국군이 이미 궤멸상태여서 침공 능력도 없었다는 점을 실증적으로 설명했다."

남침유도설의 허구는 재작년 모스크바 체류시 러시아 TV에서 방영한 한국전쟁 관련 다큐프로그램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소련 정부도 공식적으로는 '북침'을 주장하면서 TV로는 조작된 필름을 내보냈었다("사실은 정반대였다"라면서 필름을 다시 거꾸로 돌리며 나레이터가 해설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아래는 한국전쟁 관련 러시아 사이트에서 찾은 김일성(1912-1994)의 사진(1950년 11월에 찍은 모습이다. 그의 나이 38세때니까 내 나이로군!). 소련군 장교 출신이었던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찾아서 스탈린의 지지를 확인받고 1950년 6월 '통일전쟁'을 감행했다(그의 항일투쟁 경력은 소련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러시아 방송은 보도했다. 러시아 역사에서는 빈번했던 일이지만, 김일성은 전설적인 항일투쟁 영웅 '김일성 장군'의 참칭자였다).

그리고 아래는 미군이 북한군의 회유를 목적으로 뿌린 삐라(삐라에도 진실은 있다! 말해지지 않은 진실, 수령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 필요가 있다!). 한국전쟁을 이른바 '대리전'으로 규정하는 전통적 시각이 이미 담지돼 있다(이와는 반대로 '내전'으로 규정하는 것이 브루스 커밍스의 수정주의 시각이다). 그것이 사실판단의 문제인지, 해석의 문제인지 가늠이 되지 않지만, 아무려나 전쟁을 기획하고 주도했던 당사자들의 역사적 책임이 감면되는 것은 아니다. 한홍구 교수의 김일성에 대한 평가를 들어본다. 한겨레21(04. 07. 08)의 역사이야기 칼럼 중 '20세기형 민족주의자, 김일성'의 일부이다.

-김일성은 우리 민족이 가장 암울한 상태에 놓여 있던 1937년 보천보전투를 통해 혜성같이 나타났지만, 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남쪽에서는 민족의 태양에서 괴뢰집단의 괴수로 전락했다(*1937년이면 김일성의 나이 25살 때의 일이다). 괴뢰,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꼭두각시란 뜻이다. 제 민족을 가리키는 말 중에서 가장 고약한 괴뢰란 말을 남과 북은 서로에게 마구 써먹었다. 지금도 수구언론은 ‘국방백서’가 ‘북괴’를 ‘주적’으로 명시하지 않은 것을 트집잡고 있다.

-김일성을 소련이 내세운 꼭두각시로 모는 것은 해방 직후에 남쪽에서 정권을 잡은 친일파들로서는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그런데, 김일성에게 조언을 했던 소련 선전 담당자의 회고가 그렇다). 그런데 김일성 정권이 1950년대 중반부터 주체를 앞세우고, 자주노선을 추구했음에도 ‘괴뢰’란 말은 사라지지 않았다. 더구나 이 ‘꼭두각시’는 소련의 해체로 자신을 조종할 배후가 없어졌는데도, 여전히 혼자서 춤을 추는 ‘괴뢰’치고는 참으로 희한한 괴뢰였다.

-김일성은 참으로 많은 것을 성취한 지도자이기도 하지만, 항일무장 투쟁 시절부터 꿈꿔온 자신의- 아니, 모든 조선 사람의- 소중한 꿈을 이루지 못했다. 항일무장 투쟁 시절 이래 김일성의 꿈은 조선민족 누구나가 쌀밥에 고깃국을 먹는 것이었다. 쌀밥에 고깃국은 김일성에게는 사회주의 건설의 완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살아생전에 그 꿈을 이루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의 심장이 고동을 멈춘 직후부터 그를 어버이로 섬기던 이북 주민들이 굶어죽기 시작했다.

-남과 북이 갈라져 있는 한, 김일성에 대한 평가가 일치될 수 없다. 아니, 남쪽 사회 내부에서도 김일성을 놓고 평가가 일치할 수 없다. 그가 항일무장 투쟁의 영웅으로만 머물러 있었다 해도 평가가 엇갈릴 수밖에 없는데, 그는 분단과 전쟁을 거쳐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첨예한 남북 대결의 주역이었다. 이북의 역사가들은 항일영웅 김일성의 업적을 너무나 과대포장했기에, 이북 밖의 학자들은 김일성이 한국 근현대사에서 갖는 의미를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이북 학자들에 비하면 그를 깎아내린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또 그 주된 원인을 설사 미국 탓으로 돌린다 하더라도 김일성은 이북의 경제난과 인권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김일성에 대한 평가가 남쪽 사회 내에서 갈릴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한 가지만은 분명히 해야 한다. 친일파와 그 후예들이 김일성의 항일 투쟁을 깎아내리는 일만큼은 용인돼서는 안 된다.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단 하룻밤이라도 한데서 새어본 적이 없는 자들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 이외의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단 한번도 발품을 팔아본 적이 없는 자들이, 영하 40도가 되는 추위 속의 밀림 속에서 밤을 지샌 투사들을 모욕하게 할 수는 없다. 항일투사 김일성에 대한 폄하는 곧 1930년대 후반 이래의 우리의 항일 민족해방 운동에 대한 폄하가 된다(*친일파에 대한 혐오가 김일성의 우상화를 정당화하는가? 김일성을 폄하하면 갈데없는 친일파인가?).

-김일성을 한국전쟁의 ‘전범’으로 규탄하는 일은 친일파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탈출구였다. 그들에게 모든 역사는 1950년 6월25일에 시작하는 것이었다(*한국전쟁의 기원은 한국현대사의 기원이다!). 그 이전에 우리가 왜 분단됐는지, 분단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일제의 압제하에서 누가 일제의 앞잡이였고, 누가 항일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과정을 거쳐 전쟁이 찾아왔는지도 전혀 상관이 없었다. 군대를 동원한 자가 모두 뒤집어쓰는 그런 게임이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수많은 사상자들, 특히 민간인 학살의 피해자들이 누구 손에 죽었는가도 상관이 없었다.

-김일성은 이런 과정을 거치며 민족의 태양에서 소련의 괴뢰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가져온 전범으로 추락해갔다. 분단된 조국에서 그가 계속 민족의 태양일 수는 없었지만, 우리는 그가 북쪽에 있는 형제들의 수령이었음은 인정해야 한다. 형제들의 수령,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평양은, 아니 전 이북이 흐느꼈다. 물론 박정희가 죽었을 때도 착한 백성들은 연도에 나가 슬피 울었다.

-그러나 그 강도가 똑같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이건 넌센스 같은 질문 아닌가?) 다 독재자들의 세뇌 탓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거대한 가족국가의 가부장이었던 김일성이 가족국가의 구성원 개개인과 맺은 의사 진한 관계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이북을 이해할 수 없다(*이에 대한 이해에 필요한 것은 정치경제학이 아니라 정치종교학일 것이다)...

-(*한교수의 결론) <세기와 더불어>라는 제목이 상징하듯 김일성은 20세기의 인간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부국강병에 기초한 근대화를 추구한 20세기형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누구보다 철저한 실용주의자였다(*의외의 평가이다. 민족주의나 공산주의가 실용주의인가? 더구나 실용주의자로서라면 그는 실패한 것 아닌가?). 덩샤오핑은 쥐를 잘 잡는다면 검은 고양이면 어떻고 흰 고양이면 어떻냐는 흑묘백묘론을 설파하여 유명해졌지만, 많은 사람들은 김일성이 그보다 25년 전에 밥만 잘 먹을 수 있으면 되었지 왼손으로 먹건 오른 손으로 먹건 무슨 상관이냐는 말을 하였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는다.

-작은 나라 이북에서 그의 말은 법이 되고 그의 경험은 철학이 되고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그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위와 권력을 누렸고, 유례가 없는 권력승계를 이루었다. 나도 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벌어진 부자간의 권력승계가 탐탁지는 않다. 그러나 이를 비난만 하다 보면, 정치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공유할 수 없다는 상식을 깨고 20년가량 북을 다스린 사실을 잊게 된다.(*적절한 지적이다. 북한의 권력세습은 상식 밖이다 혹자는 미국 부시 정부도 일종의 '세습 정권'이라고 평하지만)...

 

 

 

 

-김일성, 그는 레닌이 되기에는 너무 오래 집권했고, 호치민이 되기에는 일가친척이 너무 많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역사를 가벼이 보아서는 안 된다. 나중에 비록 왜곡됐을지언정, 그가 세운 나라에는 분명 동학농민군의 꿈과, 의병과 독립군의 꿈과, 항일 빨치산의 꿈이 담겨 있었다. 어린 누이가 빚에 팔려 첩살이 가는 것을 보고 발을 동동 구르던 사람들이 당 간부가 되고, 장군이 되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된 그런 나라였다. 소수의 빨치산만이 아니라 사회의 전체 구성원이 건국 반세기 이후에 한국전쟁 때보다 더 힘들었다는 고난의 행군을 겪어야 했던 나라의 지도자 김일성. 10년이란 세월은 아직 형제들의 수령을 평가하기에는 이른 것일까?(*아마도 100년은 더 기다려야 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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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oxov 2006-06-24 18:19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로쟈님.....^^

로쟈 2006-06-25 00:41   좋아요 0 | URL
몇 개의 사진을 추가했습니다...

yoonta 2006-06-25 00:53   좋아요 0 | URL
로쟈님 페이퍼를 즐겨 보는 사람으로서 느끼는건데..최근들어 이미지올리는 센스가 많이 향상되신 것 같다는..^^

IshaGreen 2006-06-25 00:5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눈팅만 하다가 처음 글 남기네요. 퍼갈께요^^ (되죠?^^;)

로쟈 2006-06-25 10:09   좋아요 0 | URL
'이미지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에 주의하고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인데, '센스'의 문제이기에 앞서 '품'의 문제입니다.^^

로드무비 2006-06-25 10:14   좋아요 0 | URL
많은 품, 약간의 센스도 필요하죠.
감사히 퍼갑니다.

로쟈 2006-06-25 17:52   좋아요 0 | URL
별 말씀을(^^;)...

쿠자누스 2007-03-31 11:15   좋아요 0 | URL
러시아가 역사를 왜곡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묘향산 국제친선관람관, 남한관 문 열어
시사저널 [683호] 2002년 11월 26일


"일어 안내원에게 남쪽에서 온 선물만 따로 진열한 곳은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반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왜 없겠습네까. 있습네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전에는 독립된 전시 공간이 없다가 10일 전쯤 전시실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의 선물이 다 있는데 유독 김영삼 대통령의 것만 없었다. 안내원에게 물으니 “그이는 수령님 돌아가셨을 때 조문도 못하게 했는데 선물은 무슨 선물…”이라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동아일보>가 김일성 주석의 보천보전투 소식을 알린 기사를 동판으로 떠서 선물한 것...눈에 띄었다....

안내원의 마지막 말이 ... ‘이 분들이 겉으로는 표현하지 못했지만 수령님을 깊이 흠모해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라는 것이다

로쟈 2007-03-31 18:54   좋아요 0 | URL
김일성의 항일투쟁 전력을 '왜곡'하는 게 아니라 그 김일성이 김성주와 동일인이 아니라는 얘깁니다(그러니까 김성주가 자신을 김일성으로 참칭하면서 부분적인 항일투쟁 경력을 '영웅적인' 것으로 턱없이 과장한 것이죠). 러시아에서 굳이 김일성의 전력을 왜곡/폄하할 이유는 전혀 없지요. '김일성 신화'를 복창할 이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퇴근길 지하철에서 읽은 문화일보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기사는 "中 한손엔 '마르크스' 한손엔 '공자' "였다. 중국의 현재를 말해주는 상징적인 두 인물이 마르크스와 공자라는 건 흥미로우면서도 의미심장하다(홍상수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한 출판사 사장은 원고료를 독촉하러 간 소설가에서 '마르크스와 장자'에 관한 썰을 한참 풀어대는데, 그게 우스개가 아니라 '현실'인 것! 비록 '장자'가 '공자'로 대체됐지만). 두 사람이 현재의 중국 이해의 키워드인 것. 이 키워드들과 관련한 허민 베이징 특파원의 두 기사를 옮겨놓는다.

 

 

 

  


문화일보(06. 06. 23) 중국의 '두 얼굴' 통치 이데올로기

-한쪽에서는 마르크스연구원이 문을 열고, 다른 한쪽에서는 공자(孔子)학원이 세워진다. 한 손엔 마르크스의 어록, 다른 한 손엔 공자의 말씀이 쥐어져 있다. 최근 마르크스주의와 유교이념을 양대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고 있는 중국의 두 얼굴이다. 마르크스 살리기가 도농차별과 빈부격차 해소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처방이라면, 공자 부활은 화해 분위기 정착과 평화 이념 전파를 위한 문화적 통치도구다.

◆ 되살아난 공자 = 중국에서의 공자 부활은 국내용과 국제용, 두 방향으로 진행된다. 먼저 국내적으로는 정부와 학계가 앞장서 공자붐을 일으키고 있다. 공자어록이 출간되고 주요대학에 유교연구원 또는 유학원이란 이름의 공자사상연구소가 세워지고 있다. 정부는 공자 탄생일인 9월 28일 공자의 고향 산둥(山東)성 취 푸(曲阜)에서 정부 고위관리와 외교사절 등이 대거 참석하는 기념행사를 벌일 계획이다.

-나라 밖에서는 공자학원 설립 운동이 활발하다. 아프리카를 순방 중인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의 방문국인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르완다에도 공자학원이 세워졌다. 앞서 지난해 말엔 케냐 나 이로비대학에 아프리카 첫 공자학원이 개설됐다. 이들 3개국 이 외에도 아프리카 각국의 5개기관이 공자학원 개설을 신청해 놓고있어서, 아프리카에서의 공자학원은 곧 8개로 늘어날 예정이다. 해외의 공자학원은 중국문화 전파의 첨병이다. 공자학원은 2004 년 12월 서울에 1호가 들어선 이후 지금까지 세계 각국에 모두 75개가 설립됐다. 중국 정부는 올 연말까지 이를 100개로 확대한 다는 계획이다.



◆돌아온 마르크스 =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의 권력 장악 이후 눈에 띄는 국가적 차원의 중요 프로젝트를 들라면 그중 하나 가 ‘마르크스주의 공정’이다. 지난해 12월 16일 리창춘(李長春) 정치국 상무위원(이데올로기 담당)이 한 공식석상에서 “당은 마르크스주의 연구에 무제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후 ‘마르크스주의 연구 공정’이 정식 출범됐다.



-이후 중국 사회과학원 부설 마르크스레닌주의연구소가 연구원으 로 승격됐고, 최근 국가급 및 성시(省市)급 연구원들이 속속 들 어서고 있다. 중국공산당은 앞으로 10년동안 이 공정을 진행시키면서 3000여명의 학자들을 참여시켜 마르크스주의 철학과 정치학, 경제학 등 제반 분야 연구 성과를 방대한 저작으로 담아낼 예 정이다(*마르크스주의가 한국에서는 '혁명철학'일는지 몰라도 중국에서는 '관변철학' 혹은 '통치이데올로기'이다. 그나저나 3000여명의 학자라... 쪽수가 많긴 많은 나라군!) .

-언론도 적극 나서고 있다. 중국의 최대매체인 신화통신과 런민르바오(人民日報)는 최근 각각 ‘홍색의 기억(紅色記憶)’이란 고 정란을 두고 사회주의혁명정신을 고취시키고 있다(*'인민일보'란 말 대신에 굳이 '런민르바오'라고 써주어야 할까?). 중공 중앙당 교의 한 정치학 교수는 “중국식 사회주의체제의 이해와 구축을 위해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원리를 중국의 실정에 맞도록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런민(人民)대학의 한 사회학 교수는 “국내적으로는 충성심을 고취하고 국가권위를 확립시키며 민족적 응집력을 높이고, 국제적 으로는 평화와 조화이념을 강조하는 데 공자말씀보다 좋은 게 없다”고 강조했다.

 

 

 

 


문화일보(06. 06. 09) 공자가 살아야 중국이 산다?

-“한국에서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면서요.” 중국공산당 중앙당교(中央黨校) 모 교수의 느닷없는 질문에 기자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의 질문이 몇년전 한국의 베스트셀러를 거론한 것이란 사실을 안 것은 오래지 않았다. “과거 한동안 중국에서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조화사회를 건설하려면 공자가 다시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교수는 왜 죽은 공자를 다시 살려내야 하는지 메모지에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설명했다. “지금 전환기의 중국은 마르크스-레닌주의나 마오이즘만으로는 되지 않는 새로운 통치 이데올로기를 요구하고 있다. 화해와 평화이념을 갖고 있으면서도 흔들리는 체제를 안정시키며 통치의 권위를 보장해주는 국가경영의 화두가 필요하다. 바로 유교사상이다.”

 

 

 
 

 

-그의 말을 듣고 나니 일련의 생각들이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 주석이 왜 어느날 갑자기 “조화가 소중하다”며 ‘공자 왈(曰)’ 했는지, 왜 갑자기 국가를 영광되게 하는 8가지와 욕되게 하는 8가지라는 ‘바룽바치(八榮八恥)’를 설파했는지 알 것 같다. 왜 지도부가 기회만 있으면 ‘허셰(和諧)론’을 강조하고 중국 외교부가 거액을 들여 해외에 중국문화 원이란 이름으로 ‘공자 학원’을 세우고 있는지도 이해가 된다. 모두가 다 유교이념의 전파다.

-그러고 보니 민간이나 학계쪽에서도 이미 공자의 부활을 위한 크고 작은 시도들이 있었다. 지난해 말 중국 네티즌들 사이에서 스승의날을 현행 9월 11일이 아니라 공자 탄생일인 9월 28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런민(人民)대는 그해 9월 학기부터 ‘국학원(일명 공자연구원)’을 설립했고 사회 과학원은 ‘유교연구중심’을 만들었다. 어릴 때부터 ‘공자 왈 맹자 왈’ 하도록 교육해야 한다는 ‘독경(讀經)운동’이 번진 것도 이때였다.

-중앙당교의 교수는 말했다. “지금은 조반(반란을 꾀함)이 아니 라 조화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1966년 문화대혁명 시대 홍위병들은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는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의 강화를 받들어 ‘조반유리(造反有理)’를 부르짖었다. 기존 질서는 붉은깃발 아래 압사했고 모든 혁명적 선동과 가치의 전복이 정당화됐다. 공자가 봉건적 누습(陋習)의 근원이라는 이 논법은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조반의 시대는 곧 공자 수난의 시대였다.

-그후 40년, 시대가 확 바뀌었다. ‘무한 욕망’과 ‘사적 소유’라는 양대 복음을 추동력으로 진행된 시장경제적 발전은 되돌릴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 됐다. 하지만 그 부산물로 빈부격차, 부정부패, 체제불안, 사회저항이 생겼다. 이 같은 모순과 갈등구조를 치유하기 위한 통치 이념이 절실히 요구되면서 체제안정, 권력순응, 질서유지, 권위숭상이 귀하게 여겨지게 됐다. 민족적 응집력을 높이면서도 평화와 조화이념을 강조하기 위해 위정자들은 결국 공자의 부활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쯤 되면 죽었던 공자가 중국에서 다시 살아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중국 정부는 공자 탄생 2557주년을 맞아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9월28일 공자의 고향 산둥(山東)성 취푸(曲阜)에서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벌일 계획이다. 지난해의 경우 중앙방송(CCTV)을 통해 기념행사가 생방송된 뒤 국민들의 애국심이 한껏 고취됐다는 보고가 있다. 앞으론 중국의 새 지도부 출범 때마다 공자의 묘에 가서 제례를 지내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교이념이 언제까지 중국사회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기능할지는 미지수다. 공자의 부활 자체가 사회경제적, 시대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무덤에서 깨어난 공자는 자신의 부활을 달가워할까.

06. 0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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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관련 기사를 몇 개 옮겨온 김에 교수신문(06. 06. 21)에 게재된 김진석 교수의 문화비평도 옮겨온다. 타이틀이 '축구열풍이 그저 파시즘이라고?'이다. 내가 잘 쓰는 표현으로 그의 주장은 '상식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주 그 상식을 잊거나 헐거워한다. 필자의 시론집 제목을 반복하자면, 우리는 폭력과도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워야 한다. 그런 상식이 좀더 강화되었으면 싶다.  

-다시 뜨거운 월드컵바람. 2002년과 달리 거리응원이 광장을 독점 계약한 기업과 미디어의 주도와 후원 아래 놓이고, 방송들은 과잉편성을 하고 있다. 그러나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열풍만이 아니다. 4년 전에도 그랬지만 벌써 그 열풍을 다시 ‘파시즘’의 이름으로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냉풍들도 윙윙거린다. 이 냉풍은 저 열풍과 맞물리면서, 이것이 뜨거워지면 더 차가워진다. 뜨거운 축구상업주의 바람이 드는 것도 짜증스럽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축구에 들뜨고 환호하는 풍경 자체를 파시즘의 광기로 낙인찍어야 하는가. 열풍의 지나침을 경계하면서도, 그것을 금방 파시즘의 광기라고 말하지 않는 태도도 가능하다고 나는 믿는다. 뜨거운 바람 속에 서있으며 그 바람을 맞을 각오만 있다면.

 

 

 


-뜨거운 바람들이 폭력적 경향을 띠기 쉬운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경향성 때문에 축구에 달아오르는 몸과 마음들에 파시즘의 낙인을 찍을 필요는 없다. 이렇게 예민하게 태도를 구분해야 하는 이유는 한국 사회가 알게 모르게 다수의 폭력적인 바람들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며, 금방 거기에서 벗어날 가능성도 무망하기 때문이다. 월드컵열풍처럼 다소 폭력적인 현상들이 일어나더라도 그것들이 일어나는 구조적 정황을 고려하거나 인정한다면, 그것을 금방 파시즘적 광풍으로 몰고 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거대담론의 차원에서 월드컵 혹은 축구 바람이 민족주의나 상업주의를 부추기는 것도 사실이다. 국민이 아니라 자본이 응원한다고 비판할 수도 있고, 사람들이 국가적으로 환호하고 열광하는 모습에 병리학적 요인이 도사리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극단적인 행위들을 빌미로, 그것들과 닿아있는 모든 적극성과 능동성에 파시즘 딱지를 붙일 필요는 없다. 이 경우 ‘파시즘’이란 표현이야말로 과도하게 남용되는 것이며, 심지어 그 말의 그런 과도한 사용행태도 자칫하면 ‘거꾸로 파시즘적’일 수 있다(*이 파시즘 남용/남발에 나도 불편하다).

-‘파시즘’이란 말은 오늘날 수사학적 표현으로 널리 쓰인다. 이 경우 그 말은 사회와 정치의 폭력적 불모성에 대한 인간의 불안을 표현하는 역할을 널리 수행한다. 반면 그 말은 과도하게 사용되고 남용될 때도 있다. 우선, 어떤 집단적 행위들이 폭력적으로 보이더라도, 다만 그 이유로 그것들을 모조리 파시즘의 광기라고 부르기는 힘들다. 정치적 차원에서 폭력의 원인과 결과, 배경과 맥락을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폭력적으로 보이는 행위들이 있더라도 그것을 먼저 유발한 더 폭력적인 원인이나 주체가 있다면, 우선 그것에 비판의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모든 폭력적 현상을 똑같이 파시즘이라고 부르는 일은 공허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우리 사회가 주변의 강한 권력과 폭력의 자장 때문에 시달려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내부의 폭력적인 증상들을 다룰 때도 세심한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파시즘 개념으로 사람들의 행위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나름대로 함정에 빠지기 쉽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은 전혀 폭력에 손을 담그지 않고 있고 우매한 사람들만 스포츠에 사로잡혀 있다고 상정하는데, 이런 지적 계몽성은 편협하거나 공허하다.

-월드컵이 괴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따지고 보면 대학도 지식폭력을 생산·소비하는 괴물 아닌가. 월드컵이 상업주의에 물들어있는 것을 마치 시민들이 모르는 것처럼 훈계하는 비평들도 많다. 환호하거나 감동하는 민중이 그저 바보일까. 함정임을 알면서도 거기에 몸을 싣는 복잡한 행위가 존재한다. 그들은 칸막이된 지적 비평으로 밥을 먹는 사람이 아니라, 직접 폭력적 사회구조 안에 빡빡하게 끼인 채 그것을 살짝 타고 넘어야 하는 실존들이다.

-물론 국가와 자본의 이름으로 경기에 열광하는 집단행위에 광적인 도취가 불안하게 어른거리곤 한다. 그러나 거기서 꼭 국가와 자본의 큰바위얼굴만을 보아야 하나. 그것이야말로 그 얼굴들을 근엄하게 만드는 일일 수 있다. 오늘 이 불안한 시대에도, 아니 어쩌면 불안할수록 사람들은 감동하고 몰입하고 때로는 싸우는 경기장을 원하는 듯하다. 국가와 자본, 특히 큰 것이 너무 불안하다고? 그럴수록 그것들의 이름을 빌려 그것들 사이에서 기쁘게 싸우고 대적하는 살풀이 마당이 있을 법하지 않은가.

06. 06. 22.

P.S. 참고로, 이 칼럼에 붙은 댓글 하나는 이렇다: "수십만명이 밤에 잠도 안자고 거리에 나가 붉은 유니폼을 입고 같은 제스처를 하고 태극기를 들고 애국가를 부르며 '대한민국~'을 외치는 것... 이는 병적인 애국주의이다. 이 정도로 광분하는 나라는 없었고 없고 없을 것이다. 한국인임이 수치스럽게 느껴질 정도이다." 댓글의 제목은 '파시즘이 아니라 미친 또라이들'이다. 문제는 파시즘이 아닌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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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 2006-06-23 03:58   좋아요 0 | URL
-_-;;; 댓글에 공감.. 읽기 꽤 불편하네요.. 월드컵 열풍을 파시즘의 광기로 몰아세우는 것도 볼쌍사납지만 월드컵을 불쾌해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들을 높은 테라스에 앉아 혀를 끌끌차는 지식인들의 잘난척으로 획일화시켜서 보는 진석이님의 시선도 거북하네요. 진석이아저씨 또한 자신을 얍쌉하게 괄호치는건(난 엘리트의식에 빠지지 않은, 하지만 상업주의에 대책없이 빨려들어가는 대중도 아닌 양식있는 지식인이다.) 마찬가지인듯.

로쟈 2006-06-23 07:52   좋아요 0 | URL
축구 열광을 불쾌해/불편해하는 것과 그것을 '파시즘'으로 몰아붙이는 건 다른 문제라고 봅니다. '폭력과도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우기'라는 포지션 자체가 '얍쌉한' 건 아니고 그걸 유지하기가 힘든 게 아닐까요? 어부님도 광화문에 나간 이들을 '미친 또라이들'로 보십니까?..

어부 2006-06-24 00:36   좋아요 0 | URL
댓글에 공감한다는건 저역시 그들을 미친 또라이로 본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근본주의 어쩌구 하는 진단과는 무관할 뿐이다. 그저 난 그들이 불쾌한 것이다. 라는 어조거든요.

어부 2006-06-24 00:40   좋아요 0 | URL
자신이 하는 사회현상에 대한 비판적 발언은 근본주의로부터 자유롭다는 의식. 하지만 다른 비판적 발언들에 대해선 근본주의 어쩌구 판결 내릴 수 있는, 그런 자리가 자신의 자리라고 생각한는 것. 훨씬 근본주의적으로 보입니다.
월드컵 열풍을 파시즘으로 몰아붙이는 이들과 그들을 또 근본주의로 몰아붙이는 진석이님이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없겠다는 거죠.(근본주의는 남발해도 되는 말이지만 파시즘이란 용어는 고이고이 아껴서 순도측정 한 다음에 사용해야 되는 말이라고 누가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_-)
비판적 입장에 대해.. 자신도 결국 똑같은 애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떼쓰고 있는듯이 보이거든요.
꼴보기 싫은 것은 자신의 시선만이 상황을 꿰뚫어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교수아저씨의 태도에요.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포지션에 대한 성찰이 우선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입니다.. 괜한 심통..^^

2006-06-24 1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6-24 12:18   좋아요 0 | URL
어부님/ "댓글에 공감한다는건 저역시 그들을 미친 또라이로 본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근본주의 어쩌구 하는 진단과는 무관할 뿐이다. 그저 난 그들이 불쾌한 것이다."라고 하신 건 '댓글'에 대한 취사선택 아닐까요? 월드컵 열광에 불편/불쾌해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축구 열광을 파시즘으로 지목하거나 열광적인 응원자들을 '미친 또라이들'로 부르지는 않습니다. 저는 두 가지가 차이가 있다고 보며, 김진석 교수의 견해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꼴보기 싫은 것은 자신의 시선만이 상황을 꿰뚫어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교수아저씨의 태도"라고 하셨는데, 월드컵 열광을 파시즘으로 규정짓는 태도를 그가 반복하고 있다는 것인가요(그렇다면, 꼴보기 싫은 대상에는 '근본주의자들'도 포함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괜한 심통'이라고 하시면 할말은 없지만...

어부 2006-06-25 01:38   좋아요 0 | URL
전 댓글에 '동의'가 아닌 '공감'한다고 했는데요..-_-;;;

진석아저씨가 그들에게 근본주의자라는 모자를 씌우는 순간 그의 비난이 스스로를 향하게 된다는 것. 비난하려는 대상의 면을 가지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게 월드컵 열풍에 대해 불평하는 발언들과 그들을 몰아세우는 진석아저씨의 발언을 똑같이 보고 있다는 뜻은 아닌데요..
진석아저씨의 시각과는 다르게 월드컵에 대한 비판적 발언은 소수의 발언일 뿐이며 여간 귀를 귀울이지 않고는 잘 들리지 않는 타자의 목소리라고 보여지는데.. 로쟈님 말씀대로 그들을 파시즘으로 보는 이들도 또 다르게 비난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다 다른 목소리들이고 귀 귀울여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열광을 파시즘적으로 보려는 이들의 목소리도 마찬가지라고 보구요. 그렇게 주장하게 된 맥락을 따져보고 비판하려면 월드컵 열풍을 파시즘으로 보는것이 어떤 부분에서 부적절한지를 지적하면 그만입니다. 근본주의 어쩌구 하는 틀을 함부로 씌울만큼 진석아저씨가 그들의 주장을 빠짐없이 들어보았는지 의문이구요.
파시즘이란 고전적 모델에 대한 어떤 원형이 존재하는지 지식과 생각이 짧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오리지날리티를 가려내는 일이 과연 생산적 사유인지 모르겠군요. 지금의 우리들은 특정 체제를 파시즘으로 볼 수 있는가가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파시즘적 경향성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질문해 보는 것이 훨씬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이전에 잠깐 훓어보았던 권명아 선생의 '역사적 파시즘'에 이끌렸던것 같습니다.) 월드컵 현상에서 파시즘적 경향을 읽어내려는 시도들을 무작정 근본주의로 깎아내리는 것은 문제있어 보입니다(그렇다고 제가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파시즘에 대한 낡은 시각틀을 진석이 아저씨가 가지고 있는것이 아닐까 하는 근거없는 의심만 생기네요

파시즘이란 용어는 고유하고 엄밀한 틀이 있어야 한다고 보진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다양한 '파시즘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단일한 형태로 환원되지 않는 경향들에 세포를 열어두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아..논점이 좀 멀리 간듯..-_-;;;;
마지막 사족은 제게 괜한 심통이라 하신다면 제쪽에서 할말이 없다는 뜻입니다..


지엽적인 부분에 대한 지적또한 제 서툰 발언을 가다듬게 하는데 정말 많은 도움이 되어서 감사하지만 거칠게나마 제가 말하고자 한 전체논점에 대한 생각도 말씀해주시면 더더욱 감사하겠습니다. ^^

로쟈 2006-06-26 13:12   좋아요 0 | URL
너무 덩치가 큰 문제들이 걸려 있는 듯한데, 간단하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부님은 파시즘에 대한 낡은 시각틀에 대해서 의문시하며, "파시즘이란 용어는 고유하고 엄밀한 틀이 있어야 한다고 보진 않습니다"라고 하셨는데, 어떤 용어 사용이 취미나 취향의 문제와 연관될 경우에 의미의 전용은 문제될 게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공론장 같은) 대화적 소통 상황에서라면 가급적 정확하고 구체적인 의미로 사용되어야겠죠.

'파시즘'이란 말이 사용된 고유한 역사적 문맥이 있고, 일차적인 의미는 거기에서 비롯될 것입니다. 그런데, 파시즘이란 말이 포괄하는 여러 의미역 가운데, 한두 가지에만 초점을 맞춰서 '파시즘'이라고 '일반화'할 수도 있겠구요. 그러는 가운데, 의미의 전이, 수축/확장이 발생하는 것일 텐데, 제가 보기에 몇 년전부터 '남용'되는 듯한 '파시즘'은 본래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전이/전용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인바 거기서 정확하게 어떤 '역사적 반복'을 지적해내는 게 아니라면 과잉일반화(오버)라고 생각합니다(대개 그러한 일반화는 대에충 게으름의 산물입니다. 당대적 현실에 대한 '적확한' 분석/설명에의 요구로부터 빠져나가는).

시각에 따라 "역사적으로 다양한 '파시즘들'이 존재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정도의 문제까지 집어넣으면 '50% 파시즘' '70% 파시즘' 등의 다양한 유형학까지 세울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그것이 생산적일지는 의문입니다.

수잔 손택이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비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의미의 전이 혹은 어떤 단어의 은유적 사용은 시적인 특권일 수도 있지만 때론 위험한 만용이거나 폭력이 되기도 합니다. 축구에 대한 열광을 '파시즘적'이라고 간주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에이즈를 '현대판 흑사병'이라고 부르는 태도만큼이나 부정확하다고 봅니다. "나는 에이즈를 혐오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에이즈는 우리 시대의 흑사병이야!"라고 말하는 건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에 대한 지적조차도 어떤 우월적인 포지션을 전제로 한 오만한 태도이며 똑같이 '파시즘적'이라고 한다면 할말이 없습니다. 말씀대로 '다양한 파시즘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걸 막을 도리는 없어 보이니까요...

 

'서강대학원신문'(97호, 06. 05. 30)에 로버트 버턴의 <우울증의 해부>(태학사, 2004)를 '해부'하고 있는 글이 게재되었기에 (다소 길지만) 옮겨온다. 필자는 '학내기획팀'으로 돼 있다(편집장의 작품으로 알고 있지만). <우울증의 해부>는 언젠가 '문학적 태도로서의 우울증'에 관한 자료들을 찾다가 알게 된 책인데, 방대한 분량 때문에 선뜻 건드리지 못했던 책이다(책은 2001년판의 경우 1382쪽이다. 국역본은 당연히 부분역이다). 한데, 재작년 '부재중'에 출간되어 잠시 나를 놀라게 했던 책이다. 이후에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이 '대학원생들의 우울'을 다루고 있는 기획기사는 '우울증'에 대한 욕구를 다시 부추긴다. 인용문에서의 강조와 군말은 나의 것이다.

 

 

 

 

"내 글은 마치 거대한 강이 흐르듯이 때로는 급격하고 빠르게 때로는 느리고 여유 있게, 어느 곳에서는 똑바로 어느 곳에서는 구불구불, 때로는 깊게 때로는 여울지어, 때로는 흙탕물로 때로는 수정같이 맑은 물로, 때로는 넓게 때로는 좁게 흘러갈 것이다. 그리고 그때그때 다루게 될 주제에 따라서 그리고 내 기분에 따라서 때로는 심각하게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풍자적으로, 때로는 코믹하게, 때로는 정교하게, 때로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쓸 것이다. 그래서 혹시라도 당신이 내 이 글을 읽게 된다면 아마도 지극히 평범한 한 나그네가 될 것이다.

 

나그네가 된 이상 당신은 화창한 날도 만날 것이고 궂은 날도 만날 것이다. 때로는 확 트인 광활한 들판을, 때로는 꽉 막힌 좁은 산길을 걷게 될 것이다. 어느 곳에서는 비옥한 옥토를, 어느 곳에서는 척박한 황무지도 만날 것이다. 이 가운데는 그대들이 좋아할 곳도 있겠고 싫어할 곳도 있겠지만 나는 그대들을 이끌고 울창한 숲을 통과하기도 할 것이며, 덤불  숲도, 언덕도, 계곡도, 평야도 지날 것이다. 험준한 산도, 위험이 도사린 골짜기도, 이슬에 젖은 풀밭과 경작지도 지나갈 것이다."(로버트 버턴, <우울증의 해부>, 37-38쪽)

 



1.

-로버트 버턴(1577-1640)의 책에 대해, 위 인용만큼 정확한 설명도 없을 것이다. 이 불세출의 인물은 셰익스피어와 동시대인으로 그보다 13년 늦게 태어나 24년이나 오래 살았다. 평생을 대학에서 보냈으며(교수가 아닌 학비와 기타 비용을 면제받은 ‘스칼라’라는 장학생으로), 그가 쓴 책은 <우울증(멜랑콜리)의 해부>라는 책 한 권이다. 그는 어디론가 여행을 한 적도 없으며, 결혼도 안 했으며, 어떤 세속적 성공을 얻지도 못했다. 한마디로 도서관에서 책만 읽다 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버턴 같은 삶을 원하는 사람이 혹 있을지 모른다. 평생 책만 읽다 죽고 싶다고. 그러나 적어도 버턴이 포기한 것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못할 것이다. 특히 세속적 성공에 대해서는.

 

-오늘날 대학에 남아 공부하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갖는다. 더구나 인문학이라면, 사회정책적인 배려도 최하수준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마저도 아직 수업을 들어야 하는 학생 개개인에까지는 해택이 미치지 않고 있다. 적어도 박사 수료(졸업) 정도는 되어야 공금(공동 프로젝트)을 나누어먹기라도 할 수 있다. 그마저도 얼마 되지 않지만. 정말이지 오늘날 공부하는 사람들은 최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정말 파업을 하든지 데모를 하든지 해야 하는 사람들은 노동자들이 아니라, 공부하는 사람들(구체적으로는 대학원생들)이다. 왜냐면 그들은 심각하게 생존 자체를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다(*시간강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되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무얼 하러 대학원을 갔냐? 개인의 의지에 사회적 문제로 떠맡기는 이런 물음은 기만적이다. IMF 이후 대학원생이 배로 늘었다. 이 배경에는 당시 어려운 취업환경이 있기도 했지만, 그것을 눈가림하기 위해 배로 대학원 정원을 늘리도록 한 교육 정책도 있다. 역으로 말해 대학원생 수는 개인의 의지가 결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제도가 결정하는 문제인 것이다. 즉 당시 정부는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대학원생을 늘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많은 룸펜 대학원생들이 등장했다. 오늘날 이들은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을 읽고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쩌면 그때야말로 태평천하였다.” 어느 시대든지 룸펜들은 비굴하다. (왜냐면 그들은 자기들끼리만 상처를 주고받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채만식 시대의 룸펜들은 고상했으며, 엄살적인 성격이 강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이들은 노숙자도, 정신병자도 아니고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자립하지 못하고 있는 성인들(실업자들, 참고로 대학원생들은 스스로를 실업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이다(*물론 이건 푸념이다. 억울하고 분한 사람이 한둘이겠는가). 이들 룸펜들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에서도, 유럽에서도, 미국에서도 상당한 계층을 형성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푸코의 책에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정신병자나 죄수를 배제함으로서 사회통합을 유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룸펜들을 생산함으로 사회를 유지시키고 있다. ‘룸펜-되지 않기’는 사회적 강령이 된다. 요행이 룸펜에서 벗어난 이들도 다시 그곳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사회를 혼신을 다해 붙잡는다.

 

 

-오늘날 한국 소설에 실망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나이 먹은 늙은이들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룸펜들과 동세대인 소설가들조차 룸펜 이야기는 쓰지 않는다(*봉준호의 <플란다스의 개> 같은 영화는 예외이겠다). 그들은 역사나 지적추리라는 로망스에 기대거나, 섬세한 감각이라는 감상적 논리로 몸을 맡기거나, 엽기적이거나 기괴한(그러므로 자칫 문학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인 것으로 멋대로 해석되는) 퍼포먼스를 연기한다. 인간은 과거의 고통은 쉽게 인정하지만, 현재의 고통을 인정하는 데는 인색하다. 따라서 (개인적이 아닌 사회적) 고통은 상상력이 필요하다.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문학의 종언>(문학동네, 2004, 겨울)이라는 강연문에서 근대소설은 죽었다고 선언했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오늘날의 문학은 더 이상 시대적 고통에 대한 감각을 잃었다. 이 감각을 잃고 나면 로망스만 남는다. 역사적 소재에 집착하고, 추리적 기교를 사용하고, 감각적인 문체로 감상적 효과를 만들어내고, 엽기적인 줄거리로 놀라게 하는 이야기들만 남게 된다. 그럼, ‘고통에 대한 감각’에 강도를 부여하는 게 임무인 비평가는 어떻게 되는가? ‘고통에 대한 감각’을 들어있는 작품이 부재한다면, 비평가가 소멸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좀체 비평가들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조용히 변신했기 때문이다. 고진이 말하는 ‘내면이 없는’ 비평가란 바로 그들이다. 

 

-우리시대 소설가의 상상력이 도달할 수 있는 곳은 ‘혁명’이 아니라 ‘전쟁’이다. 오늘날 ‘혁명’은 사회에 의해 점진적으로 수행되고 있으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룸펜을 더욱 생산할 뿐이다. 혁명이 불가능한 시대에 상상력이 도달하게 되는 것은 전쟁뿐이다(*동의하지는 않지만 흥미로운 생각이다. '전쟁'의 차폐막으로서의 혁명? 과거 레닌은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전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었지만). 파괴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세워질 수 없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룸펜이라는 이 기괴한 실업자들은 일시에 일자리를 갖게 될 것이다. 이 엄청난 변화의 가능성에 눈을 감는 좌파는 사실상 좌파가 아니다. 솔직히 오늘날 좌파와 우파를 나누는 유일한 기준점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사상이나 논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상상력에 달려있다. 속칭 좌파들의 반전운동은 그들의 상상력의 빈곤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2.

-버턴은 우울증자의 대표적인 부류로 그 자신 역시 포함되는 공부하는 자들을 들었다. 이들이 우울증에 빠지는 이유를 크게 두 가지만 든다면, 첫째 혼자서 있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둘째는 가난 때문이다(*버턴은 우리의 동시대인이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부연하자면, 오늘날과는 달리 19세기까지만 해도 대학은 출세의 통로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대학이 출세를 위한 기관이 된 것은 만인을 위한 ‘공공교육’이라는 이념이 성립된 20세기 이후다. 따라서 버턴 시대에 대학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가난을 각오한다는 걸 의미했다. 결혼 같은 것은 애초부터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 세상에서 학자의 노동보다 더 힘든 노동은 없다. 남이 못해낸 훌륭한 업적을 남기기 위하여 불철주야 머리를 짜내고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책과 씨름하다 보면 건강, 재산, 멀쩡한 정신, 그리고 귀중한 목숨 등,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되기도 한다. (...) 그동안 자그마치 20년간 대학에서 썩었지마는, 이제 그 바라던 직장을 얻기란 대학에 처음 발을 들여놓을 때나 조금도 다름없이 멀고 아득하기만 하다. 지금부터 과연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한단 말인가?

 

가장 가능성이 높고 동시에 얻기 쉬운 자리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 자리이거나, 대학의 강사 자리일 텐데, 그 일을 하고 받을 수 있는 돈은 고작해야 매 사냥꾼의 수입만도 못한 연봉 10파운드, 거기에 하루 세 끼 식사와 약간의 시간외 수당, 그리고 부잣집 아이들의 부모를 기쁘게 하였을 경우 혹시라도 떨어질지도 모르는 몇 푼의 부수입뿐이다."(138-139쪽)

 



 

 

 

 

   

-우리는 여기서 버턴이 셰익스피어와 동시대인이었음은 물론 크리스토퍼 말로(1564-1593)와도 동시대인이었다는 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다 아는 것처럼 말로는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파우스트적 원형’을 창조한 인물이다. 사실 그 이전까지의 마술사나 트릭스터적 이미지가 강한 ‘민중본 파우스트’는 말로의 붓을 거치면서 학자적 인물로 바뀐다.

 

-이에 대해 이언 와트는 흥미로운 설명을 하고 있다. 말로의 파우스트 탄생은 당대의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특히 과도한 대학생 수의 증가(1560-1590년 사이 약 30년 동안 입학생 수가 3배로 늘었다고 한다)와 이들을 위한 일자리 부족을 들고 있다. 당연 이들은 사회적 불순분자들이 되었고, 홉스는 이런 상황을 “반역의 핵심은 대학이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말로의 파우스트는 사회에 대한 불만에서 탄생한 개인주의적 인물이다. 그의 계약과 환상, 그리고 영혼 파멸도 이와 떼어내서 생각할 수는 없다.

 

-일찍이 T.S 엘리어트는 괴테가 햄릿을 ‘청년화’했다고 비난했는데, 어떻게 보면 그것은 비난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왜냐면 설사 어떤 판본에 햄릿이 40대로 설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나이와 상관없이 그는 여전히 청년이기 때문이다. 청년(또는 청춘)이라는 개념은 나이에 의해 구분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사회에 대한 괴리감(불만감)의 유무에 의해 정의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것이 단순한 불만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만들 능력이 자기들에게 있다는 자신감에서 나온 불만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들에게 이런 자신감을 부여한 것은 대학교육이다. 그러나 영혼을 담보로 악마와 계약하여 사회를 바꾸겠다는 것은 사실상 절망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많은 우울증 환자들과 말로의 파우스트, 그리고 버턴의 저작은 결코 따로따로 논의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버턴의 저작을 셰익스피어와 말로가 활약한 영국의 르네상스 시기에 대한 연구서로 읽을 수 있으며, 그것은 새로운 국가의 창조라는 유토피아론으로 정리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모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숫자로 치자면 영(zero)이나 다름없지요.”(84쪽)라는 인식이다.

 

 

 

 

 

 

 

 

  

-우리는 이와 똑같은 고백을 플로베르의 <감정교육>과 슈니츨러의 <여명의 도박>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의 공통점은 그것이 어떤 절망감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버턴은 다른 이들과는 달리 이것을 절망 자체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익살로 비틀어버린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데모크리토스가 살았던 시대보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전보다 웃기는 일이 더 많다.”(51쪽)

 

-버턴의 작품은 나에게 라블레 소설을 연상시킨다(*최근에 라블레의 <팡타그뤼엘>이 연속해서 번역/출간되고 있다). 통찰력 있는 주장과 허무맹랑한 논지전개 사이에서 끝없이 조롱하고 치켜세우면서 끝없이 강물처럼 흘러가는 그의 입담을 따라가다 보면 정말 독자는 나그네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이 책을 쓴 이유를 다시 한번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의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이 책을 쓴다고 명확히 이야기하고 있다. 그럼 그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을 치료하긴 했던 것일까? 만약 치료했다면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사실 그는 말로처럼 극단적으로 절망하여 악마와의 계약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그는 학자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우울증을 인간의 본질로 확장시켰다.

 

-“모든 인간은 우울증환자다.” 이것은 인간은 누구나 병자라는 것이다. 유럽 르네상스에 대해 생각할 때 이것을 놓치면 반쪽자리 이해에 그치고 만다. 엄밀히 르네상스란 인간의 창조적 능력에 대한 발견과 찬미가 아니라, 인간의 병적 기질에 대한 발견을 의미한다. 버턴에 오게 되면 ‘사랑’도 ‘신앙’도 병일 수밖에 없다. (유럽의 마냥사냥이 맹위를 떨친 게 바로 르네상스 시기였다는 점을 잊지 말자. 또 사실 마녀기질이란 우울증과 관계가 있다: 112-113쪽 참조)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버턴이 바로 이와 같은 병 속에서 어떤 희망을 발견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는 병이 없다면 ‘면역체계’도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한다. 즉 만약에 인간에게 병이 없었다면 건강이라는 것 자체도 알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를 신앙적인 입장에서 말하자면, 고통과 고난을 당한 자만이 신을 알게 되며, 만약 그가 고통을 겪지 않는다면 그는 악행을 반복하다가 영원한 파멸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이를 좀더 사회적인 맥락에서 이야기하자면, 오로지 우울증을 겪은 사람만이 유토피아를 꿈꾸게 된다는 말이다.

 

 

 

 

 

 

 

 

-1964년 장 로베르 시몬은 “버턴의 유토피아가 유토피아문학사 연구가들에 의해 왜 무시되었던 것일까?” 하는 물음을 던졌다. 피에르 메스나르는 이 책임을 방대한 저서 속 일부분에 해당되는 부분을 무시한 독자에게서 찾고 있으며, J 막스 패트릭은 유토피아상을 상상력이 넘치는 소설적 취향 속에 집어넣은 저자 자신의 실책에서 찾고 있다. 이제까지 우리의 논의를 비추어 본다면, 누구의 말이 더 타당한지는 쉽게 짐작가능하다. 실제 버턴의 유토피아론을 읽다보면 놀라운 점은 그의 유토피아론이 어떤 의미에서는 전혀 유토피아론이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그는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의 공상성을 비판하며, 실현가능한 국가를 그리고 있다.

 

-그는 인간의 본성에게 큰 기대를 갖지 않는다. “인간은 본시 생각이 모자라는 존재이기 때문에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결과는 같소. 오히려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킬 것이오.”(47쪽) 그리고 법과 정치의 중요성과 그 기능을 정확히 통찰하고 있다. “다 알면서도 눈감아 주는 것이 정치다.”(82쪽) 또 필요악으로서의 전쟁도 긍정한다. “이 세상에 전쟁하면 무조건 나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런 사람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이다. 세상물정에 어두운 사람이다. (...) 저 세상에서나 살 사람이다.”(57쪽) 다분히 과장되고 혼란스러운 버턴의 저작 속에서 적어도 유토피아론 만큼은 냉정하게 서술되어 있는 셈이다.

 

-그 중에서 나의 관심을 끄는 것 중 하나가 공직이 학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그 다음은 군인인데, 왜냐면 군인의 임무가 한 시대에 국한된다면, 학자의 임무는 영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플라톤의 철인 통치론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와 같은 견해 자체는 버턴 자신의 시대에서 나온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버턴은 학자들의 삶에 대해 말하면서 그것을 ‘슬픈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리고 학문 탐구는 속세의 이익에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돈이 있는 자들이 나라를 다스린다고 한탄한다.


"대학에서 문학이나 수학, 또는 철학 같은 순수 학문을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손해이고, 다른 사람들의 존경도 받지 못하고 후원자도 얻기 힘들고 어리석은 일인가를 일찌감치 알아차린 약삭빠른 학생들 가운데는 예술이나 역사, 철학이나 언어학과 같은 순수학문들을 그저 식탁에서 식사하는 자리에 알맞은 유쾌한 장난감이나 이야기를 재미있게 꾸미는 장식품 정도로 옆으로 밀어놓고, 그 대신 법률, 의학, 그리고 신학과 같은 현실적이고도 수지맞는 학문을 공부하여 먼저 충분히 돈을 벌고 나중에 자기가 원하는 공부를 하겠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럴 필요는 없다. 돈이 있는 사람은 자기 돈을 계산할 줄 안다면 족하지 따로 수학을 공부할 필요는 없다. 자기가 소유한 토지의 크기를 아는 사람은 이미 지리 공부는 다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의 성공과 실패를 알고 그들의 잘못된 행동을 보고 자신의 행동을 바로 할 줄 아는 사람은 이미 뛰어난 신학자다.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망원경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다른 위대한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업적과 성과에서 나오는 광휘를 자기에게 비출 줄 아는 사람이다. 좋은 일자리를 마련할 도구를 혼자서도 마련할 줄 하는 사람이 바로 훌륭한 기술자다."(143쪽)

 

 

 

 

-버턴이 말하는 ‘우울증(멜랑콜리)’는 오늘날 정신의학에서 말하는 ‘우울증’과는 차이가 있다. 그가 말하는 ‘우울증’은 매우 넓은 의미로(때로는 인간본성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문맥에 따라 여러 레벨로 사용된다. 따라서 그 세부적 문맥과 더불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학자의 우울증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에서 버턴은 몇 가지 흥미로운 지적을 하고 있다. 첫째 ‘혼자-있기’가 인간을 ‘괴물’로 만든다는 말과, 둘째 우울증이 ‘늙음(구체적으로는 중풍)’과 관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일찍이 루소는 물 속에 빠진 아이를 본능적으로 구하려는 마음(측은지심)이 없는 사람을 가리켜 ‘괴물’이라고 말했다. 흔히 프랑켄슈타인으로 대표되는 ‘괴물’의 계보(오늘날 우리소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를 말할 때 이것을 빼놓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모두 어불성설이다. 또 많이 지적되는 것이지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처녀작이 <노년>이었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어떤 미래에 대한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공부하는 이들, 그들은 사실상 애늙은이이자 괴물들로 어떤 절망적 상태를 의미한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나는 오늘날의 소설들이 다루어야 괴물들은 말 그대로 기괴하고 섬뜩한 장난감 같은 괴물들이 아니라(내면 없는 비평가들은 이것들을 그럴싸하게 포장하지만), 바로 오늘날의 룸펜들이다.

 

-유토피아는 우울증(멜랑콜리)의 증상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 유행어가 된 수많은 ‘멜랑콜리’ 중 유토피아가 부재하는 멜랑콜리는 모두 가짜이다. 멜랑콜리는 필연적으로 유토피아라는 면역체계를 만들어낸다. 만약 오늘날이 멜랑콜리의 시대라면 오늘날이야말로 유토피아가 요구되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혁명이 아니라 전쟁이다(*모두가 룸펜이 아닌 이상 '름펨의 시대'라거나 '멜랑콜리의 시대'란 말에는 다소간에 과장이 포함돼 있다.하지만, 이 글이 대학원신문에 게재되었다는 걸 고려해야 한다.) 

 

 

-멜랑콜리가 요구하는 상상력이란 바로 이런 것이며, 그것은 오로지 룸펜들에게서만 가능하다(*룸펜의 사회학적 인종은 '니그로'이다). 다시 말해, 이미 죽어버린 문학은 로망스 작가나 내면 없는 비평가가 아니라, 오직 전쟁을 꿈꾸는 룸펜들에 의해서만 되살아날 수 있다. 모든 것은 0(zero)에서 나온다. 만국의 룸펜들이여! 상상을 멈추지 말라.

 

06. 06. 1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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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6-16 19:18   좋아요 0 | URL
원문과 로쟈님의 논평이 좀 헛갈리네요.다른 페이퍼에서의 "강조와 군말"과는 또 달라서요. 마지막 문단에서 보이는 글꼴로 쓰인 것들이 로쟈님의 것이죠? 로쟈님이 강조나 코멘트에 색깔을 넣는 것은 꺼려진다고 하신 거 같은데 일관되게(괄호에 넣거나 하는식으로)쓰였으면 합니다.

로쟈 2006-06-16 20:58   좋아요 0 | URL
아직 '강조와 군말'을 달지 못했는데요.^^ 다른 일들이 있어서 시간이 좀 걸릴 듯합니다...

twoshot 2006-06-16 21:05   좋아요 0 | URL
허걱...이런... "인용문에서의 강조와 군말은 나의 것이다"이 부분이 있어서 열씸히 찾았건만...그럼 '강조와 군말' 기다리겠습니다. 날도 더운데 얼굴만 팔고 가네요.-.-

사샤 2007-05-01 02:12   좋아요 0 | URL
룸펜 후배 울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