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날짜 교수신문에 게재됐던 글이다. '평전에서의 비평정신'에 대한 곽차섭 교수의 글로서 제목은 '너와 나 사이의 인간적 공감'. <마키아벨리 평전>을 옮긴 경험에서 나온 통찰을 담고 있어서 음미해볼 만하다(문학비평쪽으로 자리를 옮기면 제네바학파의 '공감의 비평'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평전 장르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요즘 출간되는 '두툼한' 평전들을 다 챙겨볼 수 없다는 게 유감스럽다. '휴식' 같은 책들일 텐데...

 

교수신문(06. 07. 04) 평전에서의 비평정신에 대한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아직 내가 쓴 평전 저작을 가지고 있지도 못한데 이런 원고 청탁은 부담이 된다. 아마 몇 년 전 리돌피 작(作) 마키아벨리 전기를 <마키아벨리 평전>이란 제목으로 옮겼던 일이 이런 식으로 되돌아오는가 보다. 우선은 내가 왜 리돌피의 책에다 하필 ‘평전’이란 이름을 붙이게 되었는지, 그것부터 해명해야 될 것 같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알라딘이나 예스24와 같은 대표적인 인터넷 서점에서 ‘평전’이란 단어로 검색해보니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평전들이 간행되고 있었다. 그 중 몇 종류는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한국의 평전 베스트셀러 상위권은 체 게바라, 전태일, 등소평, 마르크스, 여운형 등 주로 정치적 인물이 차지하고 있다. 이 나라에서 정치가 갖는 헤게모니가 어느 정도인지를 말해주는 것이리라 (거꾸로 이는 사상적·문화적 측면에서 전기를 쓰기가 훨씬 더 어렵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그런데 ‘평전(評傳)’이란 말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마도 그것은 근대 일본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비평적 전기’란 뜻일 게다. 알다시피 전기에 해당하는 ‘전(傳)’은 동아시아권에서도 오랜 연원을 가지는 글쓰기의 한 형식이었다. 사마천의 <사기>의 ‘열전’이 효시다. 문학에서도 이 형식을 빌렸다. '전우치 전' 같은 작품이 그것이다. 요컨대 동아시아 역사와 문학에서 ‘전(傳)’이란 어떤 특정 주제, 특히 인물에 대한 독특한 글쓰기 형식을 의미했던 것이다. 이것은 서양도 다를 바 없다. 고대 수에토니우스의 '12황제 전'이나 중세 초 이를 모방한 아인하르트의 '샤를마뉴 전'이 그렇고, 중세 내내 넘쳐났던 수많은 ‘성인전’들도 일종의 속류 전기들이다.

 

 

 

 

-오랜 연원을 가진 ‘전’란 말을 두고 굳이 ‘평전’이란 이름을 붙인 데는 역시 객관성, 비판성, 대상과 글쓴이 간의 비평적 거리 같은 것을 중시한 근대정신이 작용했을 것이다. 비평적 거리라는 점에서 그래도 전기가 자서전보다는 나을 게 아닌가 생각하기 쉽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자서전을 두고 검증할 수 없는 자의성의 소산이라고만 보는 것은 얕은 발상이다. 자서전에는 실증적 측면과 자기 성찰적 측면이 함께 담겨 있는데, 전자는 검증 대상이 되지만 후자는 해석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카사노바나 첼리니의 자서전은 그 자체가 일종의 문학 작품이며,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말 그대로 자기 회심의 과정이 그리스적 합리주의를 매개로 역사와 종교적 비전 속에 버무려져 있다.

-평전에서 글쓴이는 그 대상이 되는 인물의 삶과 어느 정도로 거리를 두어야 할까? 이는 답하기가 쉽지 않은 문제이며 사람마다 다른 답이 나올 개연성이 높다. 나의 생각은 이렇다. 어쩌면 모든 역사 글쓰기가 그렇기는 하겠지만, 평전만큼 사실과 해석 간의 균형의식이 절실히 요구되는 분야도 없다는 것이다. 연구 대상이 다름 아닌 인물이다 보니 글쓰는 이는 어느 덧 그/그녀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특히 저자는 대상 인물에 호의를 가지는 경우가 많으므로 더욱 거리두기가 어렵게 된다. 자칫하면 ‘성인전’을 쓰게 될 위험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그 거리가 너무 멀면 대상 인물과의 공감도가 떨어져 생생한 삶의 궤적이 잘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그 거리가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하는지 이론화 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보자. 리돌피의 <마키아벨리 평전>은 비평가들로부터 마키아벨리에 관한 최고의 전기라는 평을 받아 왔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무엇보다도 사실적 측면에서 가장 정확하고 풍부하다는 것이다. 리돌피는 마키아벨리의 아버지 베르나르도가 남긴 '비망록'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중요 기록들을 이용하는 행운을 누렸고, 또 이를 대단히 조심스럽게 다루었기 때문에, 마키아벨리의 행적과 저작을 둘러싼 각종 논쟁들을 잘 헤쳐 나갈 수 있었다. 그의 전기 이후 새롭게 발견된 주요 문서는 거의 없다.

-둘째 이유는 그의 문학적 필치에 있다. 그는 마키아벨리의 복잡다단한 삶을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면서도 부드럽고 유연한 문체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서 그는 마키아벨 리가 ‘시인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평하였다. 정치라는 냉혹한 현실을 ‘과학적으로’ 관찰하면서도 동시에 언제나 그것을 예술가와 시인의 즉흥성과 이상 속에 녹여내는 묘한 성품의 소유자가 바로 마키아벨리라는 것이다. 이는 평전의 문학성이 곧 대상 인물의 해석과 긴밀히 얽혀 있다는 증좌이다. ‘검증 가능했던’ 사실은 어느 사이에 ‘공감적’ 해석 속에 융합되어 버린 것이다.

-대상에 대한 이러한 공감적 융합은 리돌피가 마키아벨리에 대해 품었던 애정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리돌피의 저작에서 문제가 될 소지가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만의 독특성을 부여해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나는 그의 평전이 사랑받는 보이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비평가들 중에서는 마키아벨리에 대한 리돌피의 애정이 전기 작가로서는 좀 과도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쓰고자 하는 인물이 ‘표본실의 청개구리’가 아닌 다음에야 그에 대한 인간적 애정 없이, 어떻게 그의 삶과 사상과 고뇌를 이해하고 공감하고 나아가서는 그것을 글로 재현할 수 있겠는가?

 

 

 

 

-누군가가 나에게 평전에서 대상 인물과 어느 정도로 거리를 두어야 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에게 인간적 애정, 적어도 인간적 공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평전을 쓰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대답하겠다. 이러한 애정과 공감이 사실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전제는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다. 평전은 사실들 간의 인과관계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요체는 너와 나 사이의 인간적 공감이다. 따라서 나는 사실과 해석 간의 균형의식도 산술적 중간이 아니라 공감적 융합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공감의 비평과 관련하여 떠오르는 이는 김현이다. '수정의 메아리'라고 그는 불렀던가?). 

06. 07. 05.

 

 

 

 

P.S.  평전은 올해도 수없이 출간되었다. 가장 최근에 나온 평전으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마리안느 레스쿠레의 <레비나스 평전>(살림, 2006). 올해가 레비나스 탄생 100주년을 맞는 해여서 뜻깊다(적당히 제쳐놓은 관심에 다시 불을 당기는군!). 그리고 마키아벨리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하는 또다른 평전으로 마이클 화이트의 <평전 마키아벨리>(이룸, 2006)도 올해 나온 책이다. 두 권의 루쉰(노신) 평전과 <민촌 이기영 평전>(심지, 2006)까지 더해도 평전의 트렌드는 다 따라잡을 수 없다. 참고로, 현재 가장 많이 팔린 평전은 여전히 <체 게바라 평전>(실천문학사, 200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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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라의 운명과 개인의 운명
    from 창조를 위한 검은 잉크의 망치 2011-03-03 12:16 
    리영희 평전을 읽는 것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읽는 것에 다름 아니다. 책을 읽다보면 한 나라의 운명이 개인의 운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리영희 선생에게는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군부체제를 거쳐 소위 문민정부라는 김영삼, 노태우,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부까지가 그가 거친 체제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아홉 번 연행당하고, 다섯 번 구치소에 가고, 세 번 재판을 받아 총 1012일의
 
 
기인 2006-07-05 09:43   좋아요 0 | URL
평전.. 완전히 문학 연구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제가 쓰고 싶은 글의 종류도 평전입니다. 작가론을 쓰다보면, 논문이라는 틀을 벗어나고 싶어서 안달(?)이 납니다. ^^;
김윤식 선생님의 '이광수와 그의 시대' 같은 평전을 쓰고 싶어요 ㅜㅠ

로쟈 2006-07-05 09:56   좋아요 0 | URL
경쟁상대가 <이광수와 그의 시대> 정도라면 앞으로도 굉장히 바쁘실 거 같습니다. 발로 뛰셔야 할 테니까.^^

2006-07-05 1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인 2006-07-05 10:37   좋아요 0 | URL
아 뭐; <주요한과 그의 시대>는 사실 이광수와 매우 많이 겹쳐서 ^^; (이광수의 충실한 후배였지요. 주요한이 좀 더 과격한 면은 있었지만.) ㅎㅎ 선학들이 많이 자료를 축적해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래도 여기저기 걸어다니기는 (뛰는게 싫어서;; ) 하고 있습니다. :)

로쟈 2006-07-05 10:46   좋아요 0 | URL
**님/ 쓰신 책도 흥미롭고 발견하신 책도 재미있을 거 같습니다(저야 여성인물들도 좋아하죠.^^). 그 포스트모던 소설은 번역하시나요?(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기인님/ <주요한과 그의 시대>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의 시대'라고 하기엔 좀 '약한' 듯도 하네요.^^ 전공자께선 섭섭해 할 일이지만...
 

아침신문들을 읽다가 교수신문에서 독일의 저명한 작가 페터 한트케의 하이네상 수상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논란을 다룬 기사를 옮겨온다. 필자는 정광진 통신원이며 기사의 타이틀은 "親세르비아 작가는 비난받아야만 하나"이고 부제가 "獨, 페터 한트케의 하이네상 수상을 둘러싼 소동"이다. 그걸 '페터 한트케를 둘러싼 소동'으로 줄였다. 제목과 부제에서 '소동'의 내용을 얼추 짐작해볼 수 있다. 노벨상에 가장 근접한 독일 작가로 인정되지만 한트케는 자국의 하이네상 수상자로는 '부적격'하다고 간주되는 모양이다.

-최근 독일에서 오스트리아 출신 작가 페터 한트케의 하이네상 수상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논쟁은 한트케가 수상을 거절함으로써 일단락됐다. 이 논쟁의 논점은 작가의 정치적 입장과 작품에 대한 평가를 분리할 수 있는가, 그리고 독립된 심사위원회가 결정한 것을 시당국이 거부할 수 있는가다. 하이네상은 하인리히 하이네의 고향인 뒤셀도르프시가 1972년부터 뛰어난 업적을 남긴 문화계 인사들에게 수여해온 것인데, 지난 5월 20일 한트케로 수상자가 발표되면서 문단과 언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한트케는 90년대 중반부터 유고연방 해체 와중에서 일어난 발칸반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親세르비아적 내용을 담은 글을 계속 발표해왔고, 지난 3월엔 헤이그에서 전재판을 받던 중 숨을 거둔 前 유고 대통령 밀로셰비치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연설까지 했는데 그런 작가에게 하이네상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이다.

 

 

 

 

기존 수상자들 상 반납하겠다고 나서
-작가 귄터 쿠네르트는 어떻게 독일의 역사를 경험하고서도 “독재자의 광대”를 칭송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한트케에게 상이 수여된다면 자신이 1985년 수상했던 하이네상을 반납하겠다고 나섰다. 파문이 커지자 하이네상과 뒤셀도르프시의 이미지 훼손을 우려한 시의회가 수상에 대한 승인을 거부하고 올해는 하이네상 수상자를 내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그러자 이에 항의해 심사의원이었던 뢰플러와 르페브르가 심사위원회 탈퇴의사를 밝혔다.

-그들은 “비어만, 옌첸스베르거, 쿠네르트 등 역대 하이네상 수상자들은 정관에 씌어진 대로, ‘사회적·정치적 진보’와 ‘민족간 이해’에 기여해서가 아니라 작품성을 인정받아 수상했다”고 반박했다(*옌첸스베르거는 아동용 도서들로 국내에 더 잘 알려져 있다. 볼프 비어만의 책들은 다 어디로 갔나?). 또 “그는 가장 뛰어난 작가이고, 세상을 의도적으로 달리 보려는 그의 삶의 방식, 창작 방식을 이해해야 한다“고 심사위원회의 결정을 옹호했다.

-독일작가협회도 “독립적인 심사위원회 결정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런 혼란 중에 한트케는 결국  6월 2일 뒤셀도르프 시장에게 편지를 보내 “더 이상 정치인들이 나와 내 작품을 모욕하게 놔둘 수 없다”며 수상포기 의사를 밝히면서 한 매듭이 지어졌다.

-이번 일은 지난 3월엔 프랑스 국립극장 ‘코메디 프랑세즈’가 밀로셰비치 장례식 참석을 이유로 2007년에 예정됐던 그의 작품상연을 취소한다고 밝힌 것과 더불어 작가로서 한트케의 명성에 큰 오점으로 남게 됐다. 한트케는 왜 비난을 무릅쓰면서 고집스럽게 세르비아와 밀로셰비치의 변론자 역할을 떠맡고 있는 걸까. 

 

 

 

 

-한트케는 1942년 옛 유고연방(현재 슬로베니아쪽) 접경지인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캐른텐에서 태어났는데, 모계는 슬로베니아 출신이고 한트케 자신도 어린 시절엔 슬로베니아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했다. 슬로베니아는 몇몇 작품의 배경이 되기도 하지만, 한트케에게 더 중요한 건 슬로베니아의 일부였던 유고슬라비아다.

-여러 민족과 종교가 한 국가 깃발 아래 뭉친 유고연방에서 한트케는 자신이 찬미하는 독일작가 슈티프터가 바로 한 세기 전에 꿈꿨던 ‘全세계성’(Allerweltlichkeit)의 구현을 발견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염명인). 유고연방의 해체에 대한 아쉬움은 “내게 있어서 유럽은 유고와 함께 사멸했다”는 발언에서도 드러난다. 이런 신념이 유고연방의 주축이자 동구권의 해체 후에도 연방을 유지하려던 세르비아계를 우호적으로 보게 만든 것이다.

-그런데 한트케는 서유럽 언론들이 유고슬라비아의 유산을 둘러싼 싸움에서 독립하려는 국가들의 이기주의보다는, 무력을 통해서라도 통합을 유지하려는 세르비아만을 악마적으로 일방적으로 묘사하며 비판했다고 본다. 이것이 그의 도발적 행동의 직접적 원인이다. 한트케는 저널리스트적 획일성과 흑백논리를 배격하고, 언론과는 다른 언어와 표현방식을 선택하려고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에게는 다름 아닌 세르비아와 밀로셰비치가 패배자이자 약자이며, 그래서 “세르비아를 위한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서구언론에 대한 도전은 사실 “창작을 하나의 도전”으로 보는 그의 세계관에서 보면 일관성이 있다. 그는 모든 존재현상들에 대해 이제까지의 모든 선입견으로부터 벗어나 존재의 직접성을 표현하는 것을 창작의 의도로 밝히고 있다. 문학의 정치화는 자명하게 규정된 것,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만들어진 것, 조작된 것, 지배체제의 드라마투르기로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며 이런 인식을 가능케 하는 것이 문학의 과제라고 봤다. “선입견에 대한 도전”, 이것이 그의 도발적 저술작업, 영화제작참여 또는 심지어 정치적 활동 모두를 가장 적절히 설명해주는 말이라 할 수 있다.

-한트케는 “역사를 새로 쓰려고 한다고 나를 비난하는데, 언론인들은 역사를 써도 되느냐”고 반박한다. 한트케의 튀는 행보는 역사적 진실을 찾기 위한 싸움이 아니다. 그것의 원인은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향수와 일방적인 서구언론에 대한 반발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그는 12월에 하이네상을 수상하게 되면 시인의 언어와 저널리즘 언어의 차이에 대해서 연설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하이네상을 둘러싼 논쟁에서 한트케의 친 세르비아적 입장 자체를 옹호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대신 보토 스트라우쓰는 브레히트, 칼 슈미트, 하이데거 등을 언급하며 위대한 작가는 실수할 수 있다며 한트케를 옹호했고, 심사위원이었던 뢰플러는 한트케가 독재자 편을 든 게 아니라 사건의 여러 측면을 고려하자고 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시의회의 수상취소에는 대부분의 작가들이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귄터 그라스는 최근 차이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한트케의 세르비아, 밀로셰비치에 대한 견해에는 털끝만큼도 동의하지 않지만 문학적 기준을 가지고 심사한 것을 두고 정치적인 이유에서 번복하는 것에는 반대한다고 밝혔다.

-사실 심사위원 12명 중에 시의회 정치인 5명도 포함돼 있었음에도 시의회가 수상취소를 결정한 것은 언론보도 등을 통해 파문이 커지자 서둘러 차단하려는 정치적 목적에서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이번 소동은 한트케가 스스로를 ‘바보’라고 부르면서도 그가 부딪혀 싸우려는 언론의 영향력을 보여 준 사건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한트케의 대표작이 드라마 <관객모독>이라는 점을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06. 07.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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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에서 '학문비평' 기사 중 '엘리아데의 신화연구, 어떻게 볼 것인가'를 옮겨온다(필자는 최장순 기자이다). 종교학 강의를 들을 때 '멀치아 엘리아데(1907-1986)'란 이름으로 처음 각인된 이 걸출한 종교학자는 각인 효과 때문인지 여전히 나에겐 친숙하고 중요한 학자로 남아있다. 그가 유럽의 변방인 루마니아 출신의 지성인/작가라는 점도 친근감을 갖게 한다. 어쨌든 종교학에서 이 '시카고 마피아'의 거두에 대한 이런저런 시각들을 아래 인용기사에서 참조해볼 수 있다.

교수신문(06. 07. 02) 엘리아데, 어떻게 볼 것인가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는 이미 하나의 ‘현상(現象)’이다. 엘리아데는 이미 종교학 연구자라면 한번쯤 읽고 넘어가야할 고전이 돼버렸으며, 조셉 캠벨, 칼 융과 함께 종교학의 3대 스타로 군림하면서, 대중들에게 하나의 문화적 트렌드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엘리아데를 찾는 이유는 뭘까.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일단 대중들의 신화에 대한 관심이 기반이 된 것”이라며 “엘리아데는 종교현상에 대한 보편이론을 구축함에 있어 풍부한 경험적 사례를 제시해 재미를 더한다”고 분석했다. 이론이 이론으로만 그치지 않고 생생한 사례를 통해 증명되고 있어 독자들이 찾게 된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인기가 일방적 찬사로만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난 해 박규태 한양대 교수(일본언어·문화)는 <세계종교사상사 3>를 번역하고 나서, “반역사주의, 환원주의, 독단적이고 주관적인 신학, 은폐된 오리엔탈리즘, 비학문적 픽션, 애매모호한 직관주의, 실증성과 정밀성을 결여한 제너럴리스트, 또 하나의 종교로서의 엘리아데 종교학 등, 엘리아데 비판에 흔히 따라다니는 수식어”를 소개한 바 있다. 비판의 차원은 너무나 다양해서 어느 것부터 검토해야할지 난감한 상황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이러한 비판적 수식어들이 하나의 논점, 즉 “엘리아데 종교학과 해석학은 非역사적”이라는 비판을 중심으로 정렬된다는 것(*그건 '현상학' 자체의 문제점 아닐까? 종교현상학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을 듯하다).

 

 

 

 

-엘리아데는 항상 태고적 ‘그 때(illum tempus)’를 염두에 두고 있으며, 여기서 인간이 본받고 따라야 할 하나의 ‘原型(archetype)’을 발굴함으로써 원형으로부터 일탈해 삶의 의미를 상실한 근대인과 그 문명을 비판했다. 엘리아데의 눈에는, 근대인의 이러한 ‘일탈’은 곧 죄악으로의 붕괴(Verfall)였던 것. 이러한 ‘몰락’이 못마땅했던 그는 근대인을 종교의례와 신화를 통한 세계의 聖化에 동참시켜 ‘새로운 휴머니즘’을 구현하고자 했다. 문제는 여기서 비롯된다.

-이창익 한국종교문화연구소(이하 한종연) 연구원은 “‘모든 사물을 聖化시키려는 경향성’이 ‘성현의 변증법’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고 “사물을 성화시킨다는 것은 사물을 ‘원형’으로 환원하여 결국 사물로부터 ‘역사’를 제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전한다(‘엘리아데와 차이의 해석학’). 엘리아데 비판이 시작되는 지점은 바로 그가 ‘역사’를 넘어서려는 바로 그 순간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엘리아데 종교학의 비역사성을 정치적으로 해석한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한국학)의 비판이 눈길을 끈다(‘엘리아데가 선택한 ‘부드러운 파시즘’’). 박 교수는 엘리아데의 극단적 관념주의가 “계급 개념 자체를 부정”했다고 지적한다. 이어 그는 “공산주의뿐 아니라 모든 진보적 사상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한몸처럼 움직이는 ‘유기적 사회’인 엘리아데의 이상을 위협하는 존재”였으며, 결국 엘리아데는 이러한 위협을 퇴치하기 위해 “독재자 살라자르(Salazar) 치하의 당대 포르투갈이나,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 같은 종교적 색채가 강한 ‘부드러운 파시즘’을 택했다”는 것.

-하지만, 지난 24일 열린 ‘한일 종교학 공동세미나’에서 츠루오카 요시오(鶴罔賀雄) 도쿄대 교수(종교학)는 “엘리아데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러한 지적은 ‘정치지상주의’적 단정에 불과”하며 “종교를 정치적 수준으로 ‘환원’해버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엘리아데 종교학의 성격을 보다 종교학적으로, 냉정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창익 연구원은 “엘리아데는 당시 지나치게 실증주의적, 역사주의적 시각에 대한 반발로서, 자기 나름의 현상학적·해석학적 대안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며 “엘리아데의 학문적 가면 너머에 도사린 정치적 미소는 과연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한편, 엘리아데에 대한 신화학적 비판도 제기됐다. 정재서 이화여대 교수(중문학)는 “엘리아데는 끊임없이 동일한 패턴으로 신화를 분석해 신화 자체가 갖는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소홀히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 정 교수는 “에누마 엘리쉬 신화에서는 당시 사회 권력관계의 변천 및 신구세력의 갈등을 읽어낼 수도 있는데, 엘리아데는 초월의 측면만을 보여주고 있어 현대문명의 고질적 병폐를 신화로써 치유할 수 있다는 ‘신화 만능주의’를 야기시킨다”고 비판했다.

-또한 김현자 서울대 종교문제연구소 연구원(중국신화)은 “뒤메질이나 레비스트로스의 경우 신화가 담겨있는 문화적 컨텍스트를 철저히 파악한 후, 역사와 문화 전체 속에서 신화를 해석하는 반면, 엘리아데는 그렇지 않다”며 엘리아데의 신화분석이 지니는 지나친 일반화를 지적했다. 우리나라의 ‘곰’과 다른 나라의 ‘곰’이 지니는 문화적 가치는 상이한데, 엘리아데의 형태론에서는 동일하게 의미화된다는 지적이다. 또한, “엘리아데의 경우 이미 연구된 신화들을 통해 일반적 보편성을 추출하기 때문에 문헌학적 엄밀성이 결여된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 대한 반비판도 적지 않다. 엘리아데 종교학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 대해 김윤성 한신대 교수(종교문화학)는 “엘리아데의 주요개념이나 방법들에 대한 오독으로부터 일방적인 비판이 이뤄지기도 했다”고 전했으며, 박규태 교수는 “비역사성과 관련한 여러 비판들의 일면성은 보다 심화된 엘리아데 연구를 통해 드러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아직 학계에서도 엘리아데 연구가 부족하다는 것일까.

 

 

 

 

-엘리아데와 찰스 롱에게서 사사한 아라키 미치오(荒木美智雄)는 1980년대 엘리아데 연구의 단편적 경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을 가한다(‘새로운 휴머니즘을 요청하며’): “일본에서는 엘리아데의 학설의 여러 단편, 예를 들면 '성과 속' '샤머니즘' ‘원형(archetype)’ 등의 개념이 그의 종교학 전체의 문맥으로부터 단절되어 논의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 결과 (중략) 엘리아데 학문의 근본문제가 전체적으로 고찰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스무 해를 넘긴 아라키 미치오의 이러한 지적은 현재 우리나라 종교학계에도 유효하다.

-신광철 한신대 교수(종교학)에 따르면, 엘리아데의 저서 중 24권이 번역됐다. 엘리아데의 저서는 모두 38권. 저서의 63%가 번역된 상황이다. 하지만, 번역의 엄밀성에 대한 비평이 거의 부재한 상태인데다가, 엘리아데와 관련해서는 연구논문(33편), 석사논문(13편), 단행본(2권) 등 그 실적이 부진하다. 게다가 학문의 실증성과 과학성이 강조됨에 따라, 엘리아데는 학계에서 한걸음 물러나 있다.

-조철수 서강대 강사(종교학)는 “엘리아데의 이야기는 아무리 읽어봐도 맞는 일반적인 이야기”라며 “이를 후대 연구자들이 더 이상 재생산해서는 안된다”고 전한다. ‘엘리아데’는 교양서 정도로 읽어야 한다는 것. 게다가 조철수 강사는 “엘리아데 종교학의 한국적 적용이 얼마나 타당한지 모르겠다”며 “그건 시작부터 틀린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시작부터 틀린 것’에 왜 연구자들이 매달리고 있는 것일까. 엘리아데는 ‘종교형태론’의 서문에서 “코끼리를 현미경을 통해서만 연구하는 자연과학자가 과연 그 동물을 충분히 알았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푸앵카레의 말을 인용하면서 “종교현상은 그 자체의 고유한 차원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엘리아데를 비판하기에 앞서, 그를 “그 자체의 고유한 차원에서 파악”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06. 07.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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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구내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하고서 반갑고 놀라웠던 책은 데이비드 로웬덜의 <과거는 낯선 나라다>(개마고원, 2006)이다. 기분상으론 '횡재'한 느낌이었지만, 거저 책을 얻은 것도 아니고 다음을 기약하면서 얌전하게 두고온 책이니 야단스레 떠들 일은 아니겠다. 그럼에도 반가운 마음이 다 가시지 않는 것은 재작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어본이 나온 걸 눈여겨보았고, 연말에는 즐겨읽던 일간지의 '엑스 리브리스'에서 역사부문 '올해의 책'으로 꼽기도 했었기 때문에(<치즈와 구더기>의 저자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책과 함께) '눈도장'을 확실하게 찍어둔 까닭이다. 아래가 러시아어본이다.

Cover. Прошлое - чужая страна. Пер. с англ. Лоуэнталь Д.

 

 

 

 

 

 

 

해서 저자나 책의 지명도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하면서도 내겐 읽어볼 만한 '대단한 책'으로 각인됐고, 귀국한 이후에 원서를 구해볼 생각을 했었다. 그게 어쩐 일로 흐지부지 됐는지는 모르겠지만(아마도 책의 두께와 만만찮은 가격이 걸림돌이었을까? 하드카바의 러시아어본도 상당한 고가의 책이다). 그러던 차였으니까 아무런 예고없이 출간된 국역본이 조금 과장하자면 잃었던 혈육을 되찾은 것 같은 '감동'을 전해준 것도 무리는 아니겠다. 어정쩡하게 시중에 깔린 탓에 지난주 리뷰들에는 다 빠졌지만, 아마도 이번 주말 북리뷰란들에는 큼지막한 서평들이 실린 것이다.  

하지만, 책에 관해서라면 그다지 여유로운 성격이 못되는 나는 이곳저곳에서 책에 관한 정보들을 수집하려고 했고, 아직 알라딘에 충분한 책소개가 제시되어 있지 않으므로 다른 곳에 있는 책소개라도 여기에 옮겨놓는다(출판사측 리뷰인 듯한데, 알라딘에는 왜 빠져 있는지 모르겠다). 나로선 코젤렉의 <지나간 미래>(문학동네, 1998)와 함께 올여름의 끝무렵에 읽어볼 책으로 꼽아두고 있는 책이다(좀 여유가 있다면, 홉스봄의 <만들어진 전통>을 대출해서 읽어보아도 좋겠다).

 

 

 

 

-과거는 왜 낯선 나라인가? 19세기까지만 해도 서구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거를 현재와 유사하다는 가정 아래 규정하고 판단했다. 즉 인간의 본성은 항상 불변하는 것으로 가정되었고, 중요한 사건들도 항상 유사한 동기나 열정에 의해 촉발되는 것으로 가정되었다. 하지만 저자는 사실 과거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낯선’ 영역이라고 주장한다. 과거의 삶은 지금의 삶과는 아주 다른 존재방식과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가 낯선 나라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과거에 대한 인식이 확대됨에 따라 사실상 과거가 계속해서 변화하기 때문이다. 즉 각 시대의 요구에 따라 과거가 변화하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과거는 사실상 있는 그대로의 과거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과거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낯선 나라이기 때문에 인지될 수도 판단될 수도 없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불변하고 고정된 과거가 아니라 우리와 상호작용하며, 과거와 현재가 융합하는 유산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자가 ‘과거는 실재하지만 실제로는 있는 그대로 알려질 수 없으며’ ‘현재에 의해 끊임없이 재해석된다’고 말한 관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더 나아가 그는 재해석된 과거가 과거의 진실을 전복시키기보다는 과거의 의미를 이해하고 과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과거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재로 부활한다. 이 책의 1부에서 논의되었듯이 과거는 우선 선택적으로 이용된다. 과거는 현재를 비옥하게 하는 유산으로서 혜택을 주기도 하지만 현재를 억압하거나 과거의 악행이라는 족쇄를 현재에 채우기도 한다. 따라서 현재의 우리는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과거는 과장하고 확대하기도 하며 우리에게 위협을 가하고 해를 주는 과거는 축소하거나 삭제하기도 한다.

-이렇듯 과거 인식과 이용의 기본 태도에서부터 우리는 과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과거의 개조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2부에서 논의된 것처럼 기억에만 의존하던 시대와 달리 역사가 씌어진 이후부터는 과거가 훨씬 믿을 만하고 확실해진 것처럼 보였지만, 역사 역시 해석자의 주관과 실제 일어난 일 사이의 간극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여기에는 현재의 필요라는 요구의 개입뿐만 아니라 과거의 사건 이후 연달아 일어난 이후의 새로운 사건을 모두 인지하고 있는 현재 서술자의 지적 혜택이라는 문제도 개입되어 있다. 또한 기억과 역사는 모두 과거로부터 살아남은 물질적 흔적들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는데, 유물 역시 그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과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과거를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끊임없이 개조하고 변형시키는 것일까? 이는 기본적으로 3부에서 논의된 것처럼 과거가 현재에 가져다주는 분명한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과거가 ‘합의된다’고 느껴진다고 말한다. 과거는 아주 일차원적으로는 개인의 향수를 달래주고 안정감을 제공하기 위해, 더 나아가서는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이나 우월성을 담보하기 위해, 그 목적에 맞게 합의되고 개조되는 것이다. 게다가 훼손된 과거를 원형 그대로 복원하고 보존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주장할 때조차도 사실상 현재의 방법론으로 과거를 조작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렇듯 재해석된 과거는 조금의 진실도 담고 있지 않은 것으로 폄하되어야 하는 것일까. 저자의 결론부터 언급하자면 ‘아니다’이다. 저자는 역사가 다시 기록되듯이 과거가 현재의 지식과 가치가 변함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피한 일이라고 결론짓는다. 왜냐하면 그에게 과거는 불변하는 전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속되는 기억, 역사, 유물의 누적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누적물이라는 개념은 그것들이 시간을 관통해오면서 사람들에 의해 변화되고 개조된 부분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저자는 과거가 그것을 만들어낸 자들뿐 아니라 이를 물려받은 사람들의 증거이며, 과거의 정신뿐 아니라 현재의 전망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과거는 낯선 나라다. 현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낯선 나라이기도 하며, 또한 현재에 의해 끊임없이 재해석되어 부활하기 때문에 낯선 나라이기도 하다. 과거가 변화한다는 사실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역으로 그러한 과거는 또한 우리를 구속하는 과거의 신화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도 있다.

-이는 단지 과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주장처럼 현재와 미래의 전망을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이렇듯 끊임없이 변화하며 현재로 부활하는 과거는 과거에 대한 일방적인 의존을 떨쳐내는 데 이바지하며 자유롭게 선택된 미래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결론 부분을 저자는 이렇게 끝맺는다. “우리가 물려받은 것도 결국 변형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만 비로소 과거를 풍성하게 사용할 수 있다. 선조들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존중할 만한 가치가 있지만, 단순히 보존되기만 하는 세습된 유산은 견딜 수 없는 부담이 된다. 과거는 길들여짐으로써―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을 용인하고 기뻐함으로써―가장 잘 이용된다.”

06. 06. 28.

P.S. 주말 북리뷰들을 훑어봤는데, 국민일보와 한국일보 등만이 <과거는 낯선 나라다>에 대한 서평을 싣고 있다. 이 중 한국일보 안준현 기자의 리뷰를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6. 07. 01) 과거는 낯선 나라다 '변화하는 과거 자유로운 미래'

-이승만, 박정희 시대는 우리에게 어떤 과거인가. 공산 독재를 막은 ‘자유민주’ 국가의 수립기이자 숙명 같은 가난을 떨쳐낸 경제 건설의 눈물 나는 여정이었을까. 아니면 친일파와 손잡고 분단을 이끈 원통한 세월이자 장기 집권을 위해 인권과 노동을 짓밟은 암흑 같은 독재의 시기였을까.

-미래는 불확실한 것이지만 과거는 이미 실재했던 확실한 대상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미래는 다양한 예측의 영역인 반면, 과거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고정불변의 객관적 실체를 가진 확실한 기록으로서, 단 하나의 올바른 해석이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이승만 박정희 시대를 평가하는 우리 사회의 날선 대립도 이런‘고정불변의 과거, 올바른 진리’라는 사고의 맥락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과거는 곧잘 이용 대상이 된다. 사람들은 과거에서 현재를 비옥하게 하는 유산을 발견하기도 했지만 현재를 억압하는 족쇄를 얻기도 했으며, 이익이 되는 과거는 과장 확대하고, 해를 주는 과거는 축소 삭제해 왔다.

-하지만 과거 역시 미래처럼 변화의 가능성이 늘 열려 있는‘낯선 나라’라는 게 저명한 지리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방대한 인문학 지식과 깊은 성찰로‘그리워하고, 돌아보고, 변형시키는’, 인류와 과거의 관계 맺기를 탐구한다. “과거는 아주 다른 존재 방식과 사고와 믿음의 세계이며, 우리가 걸어온 길이되 현재와 단절된 세계이다.”

-특히 향수(노스탤지어)가 일종의 소비산업이 되고, 박물관, 역사테마공원, 유적 등이 관광지가 된 현대에서 과거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저자는 ‘과거 바라기, 과거 알기, 과거 변화시키기’의 세 주제로 과거에 접근한다. ‘과거 바라기’는 소설과 영화, 17~18세기 영국 프랑스, 빅토리아시대 영국, 남북전쟁 전후 미국 등의 구체적 예를 들어가며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심리를 파고든다. “과거는 어떻게 우리를 풍요롭게 혹은 빈곤하게 하는가.

-우리는 왜 과거를 포용하기도 하고 멀리하기도 하는가.”‘과거 알기’는 과거에 대한 지식과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기억, 역사, 유물’이라는 세 경로를 통해 고찰한다. ‘과거 변화시키기’는 과거를 인지하는 행위 그 자체가 과거를 변화시킨다는 묘한 역설을 얘기한다. 현대 미국 영국에서의 과거 유산 복원이나 개조 움직임 등을 통해 인간이 과거를 어떻게, 왜 변화시키며, 그런 변화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핀다.

-저자의 결론은 과거는 계속 변화한다는 것이다. 과거는 각 시대의 요구에 따라 변한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과거는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도, 미래에 볼 과거도 아니다. 과거는 어떤 시기 특정한 사건을 넘어서는 연속적인 기억과 역사와 유물의 누적물이며, 이 점에서 우리를 ‘구속하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대한 선택 가능한 전망을 제공하는 ‘자유롭게 하는’과거가 된다. “과거라는 누적물은 그것들이 시간을 관통해 오면서 사람들에 의해 변화 개조된 부분까지 포함한다. 과거는 그것을 만든 자들뿐 아니라 물려받은 사람들이 있다는 증거이며, 과거의 정신 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전망의 증거다.”

-1985년 출간된 이 책은 국내 책에도 여러 번 인용되는 등 명저로 통했지만 방대한 분량과 쉽지 않은 내용 탓인지 지금까지 번역에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경희대 인문학연구원 전임연구원인 역자들은 후기에서 “다양한 자료와 지식에 매혹되어 논점을 잃는 경우도 허다할 것”이라며, “끝도 없이 고유명사를 제시하며 새로운 지식을 강요하는”이 책을 다 읽는 것은 ‘인내심’을 요구하는 ‘긴 여정’이 될 것이라고 했다(*아무도 나서지 않는 번역으로의 긴 여정에서 돌아온 역자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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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과거라는 이름의 외국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5-17 08:17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선생의 비평에세이집이 출간됐다. <과거라는 이름의 외국>(현대문학, 2011). 제목이 좀 낯익은데, 역사학자 데이비드 로웬덜의 <과거는 낯선 나라다>(개마고원, 2006)를 떠올려주기 때문이다. 둘다'The Past is a Foreign Country'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기사를 보니 L. P.하틀리의 소설 <중개인>에 나오는문장이라고(로웬덜의 책은 장서용으로 구입만 해놓고 읽진 않았다). 이

오늘자 이메일로 배달된 '창비주간논평'에서 문학평론가 김영찬의 '괴물의 정치학이 문학에 들려주는 이야기'를 옮겨온다. 페이퍼의 제목은 '괴물의 정치학'으로 줄였다. 처음 타이틀만 보고서는 봉준호 감독의 신작 <괴물>을 떠올렸지만, 그건 아니었다. 하긴 아직 개봉하지도 않은 영화에 대한 이야기일 리는 만무하다. 아무튼 2000년대 중반 한국문학과 문화의 한 트렌드를 읽는 데 도움을 주는 유익한 논평이다.

 

 

 

 

-박찬욱의 영화 <올드보이>에서 우리의 오대수는 말한다. "나는 이미 괴물이 되었다." 비단 오대수뿐인가. 이것은 최근 파괴적인 욕망과 충동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리거나 파국으로 치달아가는 한국영화 주인공들의 공통된 자기선언이다. 그러고 보면 일찍이 "괴물은 되지 말자"고 반복해 다짐하던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 주인공의 호소는 이들에겐 전혀 먹혀들지 않았던 듯하다. 과연 그렇다. 최근 한국영화의 일각에는 괴물들이(혹은 괴물이 되어가는 자들이) 성업 중이다.



-가령 <올드보이>를 포함한 박찬욱의 복수 3부작은 모두 복수의 괴물이 출연하는 비극이고, 김지운의 <장화, 홍련>과 <달콤한 인생>은 저도 몰래 우연히 맞닥뜨린 불가항력적인 절망의 고통에 죄의식과 분노를 토해내며 괴물이 되어가는 자들의 이야기다.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과 장준환의 <지구를 지켜라>의 인물들 또한 치유되지 않은 80년대의 상처를 짊어지고 편집증적 괴물이 되어간다. 그러니 이쯤에서 물어보자. 대체 이 난데없는 괴물들의 출현은 어찌된 일인가?

-일단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모두 상업적 대중영화의 상상력과 문법을 빌려 작가의식을 실현했다는 데 있다. 최근 한국영화 속의 괴물은 그렇게 작가주의가 호러와 범죄물 같은 대중적 장르영화의 과잉의 상상력을 끌어들여 빚어낸 형상이다. 더욱이 그 괴물의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것이 스크린 가득 흘러넘치는 피와 폭력, 화면구도를 과격하게 일그러뜨리는 불안과 공포, 격렬한 심리적 갈등과 분노의 분출이라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 당연하다. 통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일면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그런 측면에서 상업적 코드에 붙들려 있는 것이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여기에서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그 속에 은밀히 잠재한 정치적 환기력이다.

-정치적이라니. 뜬금없는 얘기 같지만 그렇지 않다. 따져보면 분노와 죄의식이 뒤범벅된 운명론적 비극의 드라마와 그것을 장식하는 과도하고 현란한 스타일을 통해 이들 영화가 은연중 헤집으며 건드리는 것은 최근 한국사회 현실의 모순 속에서 배태된 대중적 (무)의식과 공통감각의 성감대다. 저 괴물의 이야기를 통해 나름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한국영화의 새로운 형태의 정치-윤리학 또한 저 자신의 방식으로 그에 대처하는 가운데서 나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는 이른바 비판적 작가주의 영화의 정치성이 이제 <박하사탕>이 대표하는 이창동식 리얼리즘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 영화의 정치적 함의는 역설적이게도 너무도 비현실적이고 그래서 당연히 탈정치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극단적이고 파국적인 상황(예컨대 근친상간이나 우주인의 침공)에서 분출하는 폭력과 뒤틀린 정념 속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너무도 극단적이기에 현실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그 사건의 파국을 몸소 떠안고 파멸로 치달아가는 괴물들의 일그러진 정념과 무력한 몸부림을, 이들 영화는 극단으로 밀어붙인다.



-중요한 것은 저 사건들의 치명적인 파장과 갈등은 불가항력적이고, 해결할 수도 없으며, 화해는 더더구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러니 당연히 감정은 격해지고, 파국은 숙명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것이 이와 반대로 역사와 현실의 계기들을 이야기에 끌어들이면서도 그 속의 위기와 갈등을 결국은 낭만적인 화해를 통해 봉합해버리는 <웰컴 투 동막골>이나 <태풍>류의 영화언어와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 것인지도 여기서 함께 기억해두자. 여하튼 그럼으로써 이들 영화가 은유적으로 드러내놓는 것은, 지금 한국사회의 근원에 숨어 가로놓여 있지만 지배질서와 지배언어 속에서는 결코 포섭할 수 없고 해결할 수도 없는 적대적인 갈등과 결여, 절망적인 심리적 위기와 교착이다.

-이 근저에 있는 것이 포스트-IMF시대의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심리적 불안과 위기라는 점은 필히 덧붙일 필요가 있겠다. 그것은 이를테면 희망과 가능성이 질식된 시대의 심리적 풍경이다. 한국사회의 일상과 씨스템을 재구조화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지배와 그로 인한 양극화의 고착과 심화는 가령 독재나 IMF위기의 시기에 그러했듯 그렇게 눈에 보이는 장애를 극복하면 무언가 나아지리라는 역설적인 희망을 갖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린 듯하다. 독재는 사라졌고 경제위기는 극복했음에도 무언가 나아지기는커녕 삶의 조건은 한없이 악화되어가고 나날의 삶을 옥죄는 자본의 지배와 모순은 더욱 심화되어간다는 실감이 지금의 공통감각이다. 하물며 그것이 대중들이 막연히 민주주의세력 혹은 '진보'라고 생각했던 집단에 의해 가속화되고 있음에랴. 미래는 여기서 결코 더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숙명론과 체념적인 인식은 그런 가운데 나오는 것이다.



-한국 작가주의 영화의 비판적 정치의식이 그렇게 극단적인 과잉의 상상력을 통해 표출되는 것은 정확히 이런 현실에 조응한다. 불가항력적이고 해결할 수도 없는 절망적 상황에 휩쓸려 괴물이 되어가는 인물이 맞닥뜨리는 치명적인 위기와 곤경은, 해결될 가망이 보이기는커녕 근원에서 악화되어가는 한국사회의 실패와 결여, 적대의 지점을 헤집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비극적인 우연과 불확실함이 지배하는 폐쇄된 세계, 그 속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악순환, 스스로 괴물이 되어 파멸로 치달아가는 인물들의 절망적인 심리, 치명적인 죄의식과 원한 등은 그런 실패와 적대 속의 주체의 불안과 위기를 응축하고 전시하는 영화적 증상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조금 다르긴 해도 최근 한국문학에서 부각되는 탈현실적인 허구 속에 스며 있는 신경증적 불안과 폐소공포, 절망적인 파국과 죽음의 이미지, 극단적인 환상의 문법 등을 그와 방불한 맥락에서 읽고픈 유혹을 느낀다. 물론 여기에는 똑같은 시각에서 볼 수만은 없는 장르와 세대의 차이, 정치의식의 편차 등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게다가 현재 한국문학에는 현실에 대한 민감한 감각에 뒷받침된 문학의 정치적·윤리적 책임의식과는 무관하게 자아에 고착된 자폐적인 실험에 안주하는 소설이 일부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 그렇다면 예컨대 편혜영의 죽음과 악취의 미학이나 박민규의 장편 <핑퐁>이 보여주는 놀랍도록 음울한 종말의 환상은 어떤가?

-이 물음에는 짐작하다시피 얼마간의 긍정과 부정이 섞여 있다. 하지만 친절한 대답과 해명은 이 짧은 글에서는 불가능하니 일단은 뒤로 미루고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 우리가 이들 한국영화에서 적극적으로 읽어야 하는 것은 이런 물음이다. 결코 일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어나는 저 끔찍한 상황을, 결국은 나 자신일지도 모를 저 괴물-타자들을 대체 어찌할 것인가?

 

 

 



-이런 물음이 일깨우는 것은 다름아닌 이를 제대로 사유하고 감당할 수 있는 정치와 윤리의 언어가 우리에겐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는 사실 그 자체다. 물론 앞서 본 한국영화의 정치-윤리학은 아직은 모호하고 또 일면 타협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 영화가 그런 불안과 위기를 봉합하거나 섣불리 화해시키지 않는 한, 그것은 바로 그 속에서 새로운 정치와 윤리의 지점을 새로운 언어로 숙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다.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한국문학에서도 그것은 아직 잠재적인 가능성일 뿐이다. 하지만 기왕에 탈현실의 허구를 끝까지 밀고 나가기로 작정한 문학이라면, 그 점은 한국문학이 한켠에서 열어가야 할 또다른 방식의 새로운 정치와 윤리의 언어를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함께 기억하고 탐구해야 할 지점이다.

06. 0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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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6-06-28 08:49   좋아요 0 | URL
울며 겨자먹기이든 자발절 동의이든 우리 사회가 탈출구가 없는 강박의 벽에 휩싸여 있다는 생각에 공감이 갑니다.불안과 위기의식,분노 등이 영화에서 어떤 형태로 외연화되고 있는 지 생각해 볼 내용인 듯 합니다.영화적 상상력이 실생활에서 그대로 구현되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 속 인물들이 보여주는 강박과 불안이 이미 우리 안에도 자리잡고 있음을.....

로쟈 2006-06-28 15:19   좋아요 0 | URL
개별 텍스트를 들여다볼 때는 잘 드러나지 않는 점들이 좀 거리를 두고 모아놓으면 보일 때가 있는 듯합니다. 비평은 그렇게 좀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지요...

비자림 2006-07-01 21:59   좋아요 0 | URL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더 희망적인 영화, 더 긍정적인 영화를 기다려 본답니다. 우리 사회의 최근 세태, 한국인의 심리 기저를 반영한 것이 영화로 탄생되었겠지만 영화가 다시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도 큰 것 같아요. 특히 조폭이 많이 등장하고 더 화끈한 장면을 연출하다 보니 더 잔혹한 장면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아 어떨 땐 이걸 보는 십대들의 정서가 걱정된답니다.

기사와 다른 생뚱한 이야기 늘어놓아 죄송합니다. ^^

로쟈 2006-07-01 22:13   좋아요 0 | URL
기사를 보니 <가족의 탄생>이 영화담당 기자들에게 상반기 최고작으로 꼽혔더군요. 말씀하신, '더 희망적인 영화, 더 긍정적인' 영화에 속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십대들의 정서'를 걱정하시는 모습에서 비자림님의 연배가 얼추 짐작되는데요.^^

비자림 2006-07-01 22:39   좋아요 0 | URL
앗, 저는 왜 이렇게 잘 들키는 지 모르겠어요.
제 나이는 스물아홉인데 로쟈님은 서재이미지로만 봐서는 알 수가 없군요. 끌끌
(정서연령 스물아홉, 정신연령 열아홉, 지식 연령 아홉, 호호호 이 지적이고 진지한 로쟈님 서재에서 까불어서 죄송합니다.)

로쟈 2006-07-01 23:41   좋아요 0 | URL
'호호호'라고 웃으시니까 확실히 여성이시고, '스물아홉'이라고 하시니까 최소 열살 이상 더 얹으면 되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