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974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마이클 샌델의 화제작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와이즈베리, 2012)을 서평거리로 골랐다. 지난주 대구에 내려갔다 올라오는 KTX 안에서 읽은 책이기도 하다.

 

 

 

주간경향(12. 05. 08) 시장지상주의를 극복하는 방법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 덕분에 국내에선 가장 유명한 철학자 반열에 든 마이클 샌델의 신작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출간됐다. 문제의식은 간명하다.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 즉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시대적 흐름에 반하여 샌델은 ‘과연 그래도 좋은가?’란 성찰적 물음을 제기한다. 물론 이 물음은 ‘돈이 전부가 아니야’라는 우리의 심정적 판단에 잘 부합한다. 샌델의 강점은 구체적 사례와 이성적 논변을 통해서 우리가 이 문제를 어떻게 사유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는 데 있다.


샌델은 먼저 시장과 시장 중심적 사고방식이 사회생활 전체를 잠식하게 된 것이 지난 30년간 발생한 가장 치명적인 변화라고 지적한다. 이른바 ‘시장지상주의 시대’다. 샌델은 2008년 금융위기의 근본 원인도 자본주의적 탐욕이 아니라 시장의 무차별적인 팽창에 있다고 본다. 영리를 추구하는 학교와 병원과 교도소가 늘어나고 전쟁을 민간군사기업에 위탁하는 현상이 그러한 팽창의 사례다. 물론 아직 우리에게 도래하지 않은 현실도 있다. 가령 이마나 신체 일부를 임대하여 상업용 광고를 게재한다든가, 아프거나 나이 든 사람들이 생명보험 증권을 사서 피험자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보험료를 불입하고 그들이 사망하게 되면 보험금을 수령하는 돈벌이 따위가 그렇다.


하지만 ‘자본주의 최전선’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그다지 먼 미래로만 보이지 않는다. 단적으로 말하면, 건강과 교육, 공공안전, 국가보안, 사법체계와 환경보호, 스포츠와 여가활동, 그리고 임신과 출산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사회적 재화에 시장논리가 개입하고 있는 미국의 현실은 곧 우리의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한 현실을 가리키는 이름이 ‘시장사회’다. 시장이 생산활동을 조직하는 도구에 머무는 ‘시장경제’와 달리 시장사회에서 시장은 아예 생활방식 자체다. 과연 모든 것을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시장 유토피아’가 우리의 지향점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시장의 역할과 영향력은 분명 재고되어야 한다. 모든 것의 시장가치화, 무엇이 문제인가? 


샌델은 주로 두 가지 문제점을 비판의 근거로 든다. 하나는 불평등의 문제다. 모든 것을 돈으로 거래할 수 있는 사회가 되면 당연하게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구분이 더욱 확연해질 것이다. 단지 비행기 좌석뿐만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돈이 차등적인 대우를 가능하게 해준다면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나 모두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이란 인식은 약화될 수밖에 없고 ‘공공선’ 또한 구두선에 그칠 수밖에 없다. 또다른 문제점은 부패다. “삶 속에 나타나는 좋은 것에 가격을 매기는 행위는 그것을 오염시킬 수 있다”고 샌델은 지적한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시장이 교환되는 재화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학생들에게 돈을 주면서 책을 읽게 하는 경우 독서는 내적인 만족의 원천이 아니라 노동이 될 수 있으며, 기부금 입학을 허용할 경우 대학 재정은 확충될지 모르지만 대학입학의 가치는 훼손될 수 있다.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길 수 없다면, 시장에 속한 영역은 무엇이고, 시장에 속하지 않은 영역은 무엇인지 분별하는 일이 과제로 남는다. 이러한 판단을 위해서는 재화의 의미와 목적, 가치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볼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그것은 무엇이 좋은 삶인지 대한 숙고를 우리를 이끈다. 그렇다면 시장적 가치와 비시장적 가치에 대한 판단과 구분은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이며 정치적인 문제다. 따라서 각자의 도덕적·정치적 입장을 적극적으로 개진하고 공개적으로 숙고·토론하는 것이 시장지상주의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방책이다. 시장지상주의 시대는 그러한 숙고와 토론이 공공담론의 장에서 약화됐던 시대와 일치한다는 샌델의 지적은 음미해볼만하다. 우리가 판단하지 않으면 시장이 결정한다. 

 

12. 04. 30.

 

 

P.S. 관심저자의 책인지라 영어본도 같이 구해서 읽었는데, 내가 읽은 것과 다르게 번역된 대목들이 있어서 지적해놓는다. 서론에서 시장의 도덕적 한계에 대한 토론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이유로 샌델은 정치권의 무능력과 함께 공적 담론의 위기를 지적하는데, 후자에 대해서 이렇게 적는다.

정치적 논쟁이라는 이름으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아귀다툼을 벌이고, 라디오 토크쇼에서 당파에 치우쳐 신랄한 비판을 주고받거나, 의회 바닥에서 이념적인 밥그릇 싸움을 벌이는 행위가 주를 이루는 시대에는, 이렇듯 논쟁의 여지가 있는 도덕적 질문을 놓고 논리에 근거한 공적 토론을 벌이는 것이 임신과 출산, 아동, 교육, 건강, 환경, 시민권, 그밖의 재화의 가치를 평가하는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나는 이러한 토론이 가능할 뿐 아니라 공적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으리라 믿는다.(32쪽)

일단 우리말로 어색하다. "공적 토론을 벌이는 것이 (...)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나는 이러한 토론이 가능할 뿐 아니라 공적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으리라 믿는다"고 주장하는 셈이니까. 원문은 "it's hard to imagine a reasoned public debate about such controversial moral questions as the right way to value procreation, children, education, health, the environment, citizenship, and other goods."이다.

 

역자는 "to imagine a reasoned public debate about such controversial moral questions"이 가치를 평가하는(to value 이하) 올바른 방법(the right way)이 아니라는 뜻으로 풀었는데, 나로선 as 이하가 questions를 받는 걸로 읽힌다. 다시 옮기면, (이렇게 여차여저차한 시대에는) "임신과 출산, 아동, 교육, 건강, 환경, 시민권, 그밖의 재화의 가치를 평가하는 올바른 방법이 무엇인지와 같은 논쟁적인 도덕적 질문에 대한 합리적인 공적 논쟁을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논쟁이 불가능한 건 아니며 반드시 필요하다는 게 샌델의 주장이다.

 

시장의 도덕적 한계에 대한 공적인 논의/논쟁의 필요성은 책 전체를 통해서 샌델이 강조하는 바인데, 역시나 같은 서론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시장의 도덕적 한계에 대한 논의는 우리가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시장이 공익에 기여할 수 있는 영역은 어디인지, 시장논리가 속할 수 없는 영역은 어디인지 판댠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또한 좋은 삶에 관해 대립되는 개념들을 공공의 장에 받아들임으로써 정치에 활력을 줄 것이다.(33쪽)

'좋은 삶에 관해 대립되는 개념들'은 'competing notions of the good life'를 옮긴 것이다. '대립되는'이 오해를 유발하기 쉬운데, '경합하는' '경쟁하는'이란 의미로 옮기는 게 좋겠다. '무엇이 좋은 삶인가를 두고 서로 경합하는 개념들'이란 뜻이다. 마지막 5장에서도 "Such deliberations touch, unavoidably, on competing conceptions of the good life"라고 같은 표현이 나오는데, 이 또한 "그러다 보면 불가피하게 좋은 삶에 상충되는 개념에 관해 깊이 생각하기 마련이다."라고 부정확하게 옮겼다. "competing conceptions of the good life"이란 문구의 개념을 잘못 잡은 때문으로 보인다. 다시 옮기면, "그러한 숙고는 필연적으로 무엇이 좋은 삶인지 경합하는 개념들을 건드리게 된다." 곧 무엇이 좋은 삶인가란 문제를 다루게 된다는 것. '좋은 삶'에 대한 숙고와 토론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와 마찬가지로 샌델에게서 핵심적인 가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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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972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류동민 교수의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위즈덤하우스, 2012)를 읽고 쓴 것이다. 지난번에 폴라니의 살림/살이 경제학에 관한 책을 다루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골라본 책이다.

 

 

 

주간경향(12. 04. 24) ‘인문학자’ 마르크스가 말하는 ‘소외’

 

지금 우리가 마르크스를 읽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류동민의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를 손에 든 독자라면 던져봄직한 물음이다. 흥미롭게도 이것은 저자의 물음이자 화두이기도 하다. 어떤 ‘지금’인가? 젊은 청춘들이 “결국 극소수밖에 살아남지 못할 것이 뻔한, 끝없는 스펙 쌓기 경쟁 속에 내몰리고 있는” 지금이다. 저자가 보기에 이런 현실에서 청춘은 원래 그러한 것이라는 위로나 유머의 정치학으로 맞서보라는 충고는 공허하다. 20대 독자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아프니까 청춘이다>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이겠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아프니까 마르크스다.”

 

류동민 교수는 마르크스 경제학, 구체적으론 노동가치론 연구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소위 마르크스 전문가다. ‘새로운 세대를 위한 마르크스 경제학 강의’를 의도한 <프로메테우스의 경제학>(창비·2009)에서 자신의 연구자적 관심은 마르크스 경제학도 “자본주의 경제의 움직임을 엄밀한 수학적 논리에 기초하여 설명할 수 있음을 보이려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마르크스 경제학이 사변적이고 거칠기만 할 뿐이라는 통념을 반박하는 데 주안점을 둔 것이다. <자본론>에 나타난 경제이론을 현대경제학의 수학적 분석방법을 이용해 체계적으로 연구한 일본 경제학자 모리시마 미치오의 <맑스의 경제학>(나남·2010)을 번역해 소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주류경제학에 상응하는 마르크스 경제학의 ‘과학성’을 강조하는 방향이다.

 

‘사랑과 희망의 인문학 강의’를 표방한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는 그 과학성과는 다른 방향에서 마르크스에게 접근한다. ‘사회과학자’ 마르크스가 아니라 ‘인문학자’ 마르크스다. 거기에는 “사회과학적 소양과 인문학적 전망을 결합하고자 했던 보기 드문 사상가”가 마르크스라는 평가가 전제돼 있다. 이때 인문학적 관심과 전망은 무엇보다도 ‘소외된 개인’의 발견에서 시작된다. 저자는 어느 낯선 파티장에서 마땅한 대화 상대를 찾지 못해 어색한 포즈로 기웃거리는 상황을 떠올려보라고 말한다. 그런 ‘낯설어지는 느낌’을 가리키는 말이 소외다.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부제도 ‘인생 앞에 홀로 선 젊은 그대에게’인 걸 고려하면 이 소외감은 이 시대 청춘들의 일반적인 정서다.

 

그런데 이 소외를 기본적 문제로 인식한 ‘소외의 철학자’가 바로 마르크스다. 마르크스에게서 인간은 고립된 실존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왕인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받들고 복종하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즉 왕과 신하라는 사회적 관계가 없다면 왕은 왕이 아니게 된다. 그런 사회적 관계에서 분리된 실체가 존재하지 않기에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 정의될 수 있으며, 본질상 ‘유적 존재’다. 즉 인간은 고립되어서 살 수 없으며 “우리 개개인은 전체, 즉 인간 전체와 관계를 맺음으로써만 자신과 관계한다.”

 

이렇듯 소외가 실존적 감정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유발되는 감정이라면 소외의 극복 또한 사회적 관계의 변혁을 통해서 가능하다. 물론 소외에 대한 태도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부르주아도 프롤레타리아처럼 소외되지만, 부르주아는 프롤레타리아와는 달리 소외를 즐기며 그 속에서 자신의 힘을 발견한다”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말했다. 저자는 이 말을 보충해서 부르주아가 소외되면서도 소외를 즐길 수 있는 이유는 자본을 갖고 있기 때문일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돈을 통한 소외의 향유는 소외의 극복이 아니라 회피일 따름이다. 진정한 소외의 극복은 어떻게 가능한가. 사적 소유의 욕망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체가 이루어질 때이다. 그러한 공동체에 대한 사유가 코뮤니스트적 사유다.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대목은 ‘열 명의 저자와 한 편의 영화에 관한 노트’란 부록이다. 저자는 “아직 마르크스를 읽어본 적이 없는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알랭 드 보통처럼 쓰고 싶었다고 고백하는데, 정작 자신의 체험은 많이 녹아 있지 않아서 아쉽다. ‘화려한 파티장’에서 칵테일 잔을 들고 서성거려본 독자들이 얼마나 될까.

 

12. 04. 18.

 

 

 

P.S. 마르크스를 읽는다면 평전부터 시작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마침 절판됐던 이사야 벌린의 <칼 마르크스>(미다스북스, 2012)가 재출간됐다(벌린이 20대에 쓴 책이다). 평전으로는 프랜시스 윈의 <마르크스 평전>(푸른숲, 2001)과 다시 경합을 벌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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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지난달 <햄릿>에 이어서 이달에 읽은 건 <돈키호테>다. 고전이 으레 그렇지만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작품이다.

 

 

 

한겨레(12. 04. 14) 눈에 콩깍지 씐 돈키호테, 우리 안에 산다

 

방랑기사 돈키호테의 대단한 모험담을 그린 <돈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의 명성은 세계문학사에서 셰익스피어와 어깨를 나란히 하지만 정작 그의 생애에 대해선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아버지가 당시엔 이발사보다 나을 게 별로 없던 외과의사인데다가 청각장애인이어서 집안은 평생 가난을 면치 못했고 세르반테스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을 걸로 추정된다.

청년시절 세르반테스는 스페인의 연합함대가 오스만 제국을 물리친 레판토 해전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고 ‘바른손의 명예를 앙양하기 위해’ 왼손의 자유를 잃었다. 불운은 그걸로 그치지 않아 귀국길에 오르다 터키 해적에게 납치돼 5년간 북아프리카에서 포로생활을 한다.

노예와 같은 생활 속에서도 이 불굴의 상이용사는 여러 차례 탈출을 꾀하고 반란을 주동하여 해적들까지도 경탄하게 만들었다. 결국 어렵게 몸값을 지급하고 마드리드로 돌아오지만 조국은 그를 대우해주지 않았다. 허다한 ‘군인 출신 실업자’ 가운데 한 명일 뿐이었고, 세르반테스는 창작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작가의 길도 순탄치는 않아서 그는 예순이 다 돼서야 <돈키호테>로 이름을 얻는다.

돈키호테는 누구인가? 우리에겐 물불 안 가리고 돌진하는 ‘괴짜’를 가리키는 별명이 됐지만 그는 일단 독서광이다. 행동가형 인물에겐 어울리지 않은 전력처럼 보이지만 여하튼 그는 사색가형의 대명사 햄릿보다도 더 많은 책을 읽었을지 모른다.

그는 경작지를 다 팔아치워가며 자신의 서가를 기사소설들로 채우고 밤낮으로 읽었다. 그 결과 마침내는 정신이상이 되고 말았다! 자신이 직접 “나라를 위해 봉사하고 자신의 명예를 세우기 위해” 방랑기사의 길에 나서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가 사라진 전설의 기사들을 모델로 하여 다시 복원하고자 한 기사도란 무엇인가. “처녀들의 순결을 지키고, 과부들을 보호하고, 불쌍한 사람들이나 고아들을 구제하는 일”이다. 그는 ‘네 것, 내 것’이란 구별이 없이 모두가 행복했던 ‘황금시대’를 다시 꿈꾼다. 그는 시대착오적인 미치광이인가?

방랑기사로 나선 돈키호테는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하여 돌진하고 시골 이발사의 세숫대야를 전설적인 맘브리노의 투구로 오인한다. ‘불쌍한 몰골의 기사’ 주인의 착각이 너무 심한 듯하여 하인 산초조차도 핀잔을 던지자 돈키호테는 이렇게 나무란다. “자네에게 세숫대야로 보이는 그것이 나에게는 맘브리노 투구로 보이는 것이고, 또 딴 사람에게는 다른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

물론 돈키호테는 맘브리노 투구를 마법사가 술법을 부려 다른 사람에게는 세숫대야로 보이게 만들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시각차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돈키호테의 광기는 특이하다.

그는 자신이 늙은 시골귀족이라는 걸 알지만 동시에 ‘라만차의 돈키호테’라고도 생각한다. 부스럼투성이에다 말라비틀어진 말도 ‘로시난테’가 되고, 이웃마을의 농사꾼 처녀는 그가 사랑하는 귀부인 ‘둘시네아’가 된다. 어느 쪽이 진실인가. 눈에 콩깍지가 씐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객관적 진실’이 얼마나 텅 빈 것이고 말라비틀어진 것인지 알 것이다.

진실은 풍차와 거인 사이에, 맘브리노 투구와 세숫대야 사이에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돈키호테의 광기는 유난스럽지 않다. 세르반테스의 파란만장 편력을 닮은 돈키호테의 모험담은 숭고한 이상을 위해 돌진하는 모든 이들의 모험담이기도 하다.

12. 04. 13.

 

 

 

P.S. 세르반테스에 관한 전기가 국내에 소개돼 있지 않은 건 유감스러운데, 하는 수없이 최근에 영어본이라도 구입했다. 도널드 맥크로리의 <평범하지 않은 인간: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생애와 시대>다. 작품 읽기는 나보코프의 <돈키호테 강의>를 참고하고 있는데, 이 또한 번역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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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교보문고의 소식지 '사람과 책'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약간 수정됐다). '정치를 읽다'란 특집 테마의 한 꼭지를 청탁 받고 쓴 것이다. 정치에 관한 책, 혹은 정치교양서에 대한 가이드로 고전 5권과 신간 5권을 골라 소개해달라는 것이 내가 받은 주문이었다.

 

 

 

사람과 책(12년 4월호) '장롱 주권'을 꺼내주는 정치교양서

 

왜 우리가 정치에 관심을 갖고 또 정치 관련 서적을 읽어야 하는가? <닥치고 정치>(푸른숲)의 저자라면 간명하게 대답할 듯싶다. 우리 생활의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서라고. 그 스트레스의 근원이 정치라고 지목되기 때문이다. 정치 무관심은 그 스트레스에 대한 방치이자 투항이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알아서 대우해주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무시당한다. 주권자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행사하지 않으면 ‘장롱 주권’이 된다. 맘에 안 드는 정치에 대해 ‘닥쳐라! 정치’라고 말하기 위해서라도 ‘닥치고 정치’는 필수적이다. 게다가 총선과 대선을 치르는 해라면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닥치고 정치’라고 해서 우리가 맨몸으로 달려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름 생각이 필요하다. 이 ‘정치 생각’의 불쏘시개가 돼주는 책이 정치 교양서들이다. 어떤 책들이 있는가. 먼저 ‘정치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책들이 있다. 정치철학서라고 분류되는 책들이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플라톤의 <국가>(서광사)에 가 닿는다. 당연한 얘기지만 정치철학 이전에, ‘정치란 무엇인가’란 물음 이전에 정치, 곧 정치적 행위가 존재했다. 플라톤 시대에 그 정치는 민주정이란 이름을 갖고 있었는데, 플라톤은 그것을 ‘어중이떠중이들의 정치’ 정도로 간주했다. 자신의 스승 소크라테스에게 독배를 안긴 정치가 아테네 민주정이었으니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불만은 이해할 만하다. 중요한 것은 정치철학의 ‘기원’이 바로 정치에 대한 불만에 토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철학’이라고 붙여 쓰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정치냐 철학이냐’에 가깝다. 플라톤은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닌 전문가들의 정치, 궁극적으로는 철인(哲人)의 통치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다. ‘올바름’이 무엇인지 아는 자가 바로 철인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국가>에서부터 내려오는 서양 정치사상의 고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도서출판 숲)을 거쳐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까치)에 이른다. 고전 정치철학이 정치를 ‘올바름’의 문제와 항상 결부시켜서 사고했다면 마키아벨리는 정치적 행위가 종교적 규범이나 윤리적 가치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현실주의’에서 근대 정치사상은 시작된다. 우리가 ‘정치’하면 ‘올바름’보다 ‘권력’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 건 그만큼 오늘날의 정치현실이 마키아벨리즘과 가깝기 때문일까.

 

 

 

그렇듯 ‘현재적인’ <군주론>에다 사회계약론적 통치관과 국가관을 대표하는 로크의 <통치론>(까치)과 홉스의 <리바이어던>(나남)까지 더 얹으면 얼추 서양 정치사상의 고전 목록은 채워진다. ‘너무도 유명하지만 아무도 안 읽는 책’이란 고전에 대한 정의에 잘 부합하는 책들이다. 아무도 안 읽는 책을 혼자만 읽으려고 하면 멋쩍을 테니 가이드를 동반하는 것도 좋겠다. 강유원의 <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라티오)와 애덤 스위프트의 <정치의 생각>(개마고원) 등이 그런 역할에 충실한 책들이다.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돌베개)도 국가를 보는 다양한 관점이란 시각에서 정치사상을 일람하는 데 요긴한 도움을 준다.

 

 


통상 플라톤의 <국가>에서부터 정치철학에 대한 독서를 시작하는 게 상례이지만 <인간의 조건>(한길사)의 저자 아렌트를 경유하지 않는다면 그 의미가 반감될지도 모른다. 아렌트는 정치란 무엇인가란 물음에 대해 플라톤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는 <정치의 약속>(푸른숲)에서 이렇게 말한다. “정치는 인간의 복수성에 기초한다. 신은 단수의 인간(man)을 창조하였지만, 복수의 인간(men)은 인간적이며 지상에서 만들어진 산물이고, 인간 본성의 산물이다.”

 

그가 보기에 정치란 ‘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들의 문제’이다. 하지만 철학이나 신학은 모두 단수의 인간만을 다루기 때문에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해 제대로 숙고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렌트의 문제의식이다. 정치철학 역시 마찬가지다. 아렌트는 플라톤을 포함한 위대한 사상가들이 정치에서만큼은 깊이 있는 통찰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꼬집는다. 정치가 닻을 내리고 있는 깊이까지 내려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정치적 사유, 정치에 대한 생각을 가다듬기 위해서 너무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큰 잘못은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닥친 문제들에 집중하며, 지금 쏟아지는 책들에 주목하는 것도 방책이라면 방책이니까. 당장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두 권의 <점령하라>, 곧 월스트리트 시위를 다룬 슬라보예 지젝 외, <점령하라>(알에이치코리아)와 '시위자'의 <점령하라>(북돋음)는 자본과 1%를 위한 정부와 체제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항의의 육성을 담고 있다. 그 목소리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우리가 남이가?’는 이럴 때 쓰는 말이다.

 

폴 피어슨과 제이콥 해커의 <부자들은 왜 우리를 힘들게 하는가?>(21세기북스)는 ‘승자독식의 정치학’이 부제다. 저자들은 지난 30년간 미국식 민주정치가 어떻게 가진 자들의 이익만을 대변해왔는지 폭로한다. 거대 금융자본과 정치인들의 밀월관계는 감세와 규제완화를 통해 최상위 0.01%의 부유층만을 대변해왔다는 것이 그들의 지적이다. 사르코지 대통령이 결국 ‘부자계급을 위한 충직한 하수인’에 불과하다고 폭로한 팽송 부부의 <부자들의 대통령>(프리뷰) 또한 비슷한 성격의 책이다.

 

 


정치 선진국을 자임하는 미국이나 프랑스의 실상이 그러하다면 우리라고 고개만 숙이고 있을 필요는 없겠다. 모자란 건 모자란 것이고, 중요한 것은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나가는 것일 테니까. 물론 그러기 위해선 현실에 대한 직시가 필요하다. 위키리크스가 발가벗긴 대한민국의 ‘알몸’을 폭로한 김용진의 <그들은 아는, 우리만 모르는>(개마고원)과 대한민국 대통령과 재벌들의 비리들을 들춰낸 안치용의 <시크릿 오브 코리아>(타커스)는 무엇이 ‘현실’인지 알려준다. ‘나꼼수’ 주진우 기자의 ‘정통시사활극’ <주기자>(푸른숲)까지 이러한 폭로들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고 현실의 좌표를 재조정하게 해줄 것이다. 이 좌표 자체를 변경할 수 있을까. ‘비정규직 주권자’처럼 선거철에만 잠시 주권자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정규직 주권자’로서 우리가 상시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책임을 다해나갈 때 변화는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책이 그러한 걸음에 힘을 불어넣어줄 수 있다면 무얼 더 바라겠는가.

 

12. 0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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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일정 때문에 어제 오후 홍대앞 PC방에서 쓴 글이다. 아침에는 주진우의 <주기자>(푸른숲, 2012)를 읽다가 가방엔 <가장 뛰어난 중년의 뇌>(해나무, 2011)를 넣어 갔었는데, 칼럼은 '책 읽는 뇌' 이야기에서 멈췄다. '중년의 뇌'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기회를 마련해볼 참이다.

 

 

 

경향신문(12. 04. 06) [문화와 세상]독서력을 갖춘 사회

 

책을 몇권 내면서 가끔 강연회에서 독자들을 만난다. ‘책에 대한 책’으로 분류되는 책들이다 보니 화제는 주로 독서다. 무슨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가 청중의 주된 관심사다. 그런 물음에 답하다 보니 애용하게 된 레퍼토리 중 하나는 ‘책 읽는 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서목록을 만드는 것보다 먼저 할 일이 독서력을 갖추는 것이란 점은 자명하다.

 

무엇이 책 읽는 뇌인가. 기본전제는 인간은 책을 읽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문자의 발명이 불과 5000년 전의 일이고 책이란 물건이 등장한 건 그보다 나중이니 독서능력이란 게 우리 뇌에 특별한 능력으로 자리 잡을 순 없었다. 그럼에도 문자를 해독하고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건 우리 뇌의 다른 기능들이 부수적인 역량을 발휘한 결과다. 그런 기능 간 협조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난독증인데, 책 읽는 뇌가 우리의 본질적 능력이 아니라 ‘부업’의 결과라면 난독증이 큰 흠은 아니다. 진정 놀라운 것은 오히려 문자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다. 부모라면 자녀들이 한글을 깨칠 때 느꼈던 경이감을 기억할 것이다. 물론 우리 자신도 그런 경이감을 부모에게 안겼을 것이니 알고 보면 다들 ‘천재’였다. 비록 일반화되긴 했지만 문자를 읽어낸다는 것, 소위 ‘문해력’은 자연스러운 능력이 아니라 천재적인 능력이다.

문제는 문해력이 곧 ‘독서력’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책을 읽는 능력은 글자를 읽거나 글을 읽는 능력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능력이다. 그리고 이 독서력은 자연스레 체득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로 얻어진다. 대단한 노력은 아니다. 일주일에 한두 권씩 2년 정도의 단기간에 꾸준히 읽으면 된다. 그렇게 ‘10000페이지 독서’나 ‘150권 독서’를 통해서 독서력이 길러진다. 어지간한 책을 읽고 소화할 수 있는 힘이 독서력이다. 만약 어지간한 책을 읽어내는 게 힘겹다면 독서력이 아직 부족한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책 읽는 ‘근육’이 아직 형성되지 않은 것이다.

글을 읽는 단계에서 책을 읽는 단계로 넘어가려면 좀 더 단련된 뇌 근육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렇게 단련된 뇌 근육은 독서의 지평뿐 아니라 세계의 질감 또한 변화시킨다. 이 변화는 개인적 차원에 한정되지 않는다. 문맹을 벗어난 사회가 문해력을 갖춘 사회라면 진정한 문명사회는 독서력을 갖춘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

일제시기 한국인의 70%가 문맹이었다고 한다. 오늘날 문맹률에 있어서만큼 세계 최저 수준이니 우리의 초급 문해력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다시 강조하자면 문해력과 독서력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문해력은 초등교육의 과제일 수는 있을지언정 고등교육의 목표일 수는 없다. 독서력은 초등학교 교과서가 아니라 대학교재를 읽을 수 있는 진전된 문해력이다. 세계 최저수준의 문맹률에도 불구하고 한국 대학생들의 문해력이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문제는 독서량이고 독서력이다. 한 달에 한권 정도를 읽는 평균 독서량을 갖고서 우리 사회가 ‘독서력을 갖춘 사회’라고 말할 수는 없다.

흔히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고 한다. 그 수준을 말해주는 척도 가운데 하나가 바로 독서력이다. 민간인 불법사찰이나 일삼는, 그러면서도 무엇이 부끄러운 일인지 모르는 수준 낮은 정부를 우리가 갖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미흡한 독서력과 무관하지 않다면 독서는 정치적 차원에서도 진지한 숙고의 대상이 될 만하다. 국민 다수가 정치와 역사와 철학에 대한 기본교양을 갖추고 말들의 홍수 속에서 무엇이 거짓말이고 꼼수인지 판별해낼 수 있다면 그런 국민을 상대해야 하는 정부의 수준도 한층 높아질 것이다. 아무리 거짓말이라 해도 최소한 좀 더 성의 있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까.

 

12. 04.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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