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토요판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두 종의 번역판으로 다시 읽고 오늘 아침에 쓴 글이다. 지면이 약간 개편되면서 다음회부터는 '번역' 문제를 좀더 다루게 될 예정이다.

 

 

 

한겨레(12. 06. 16) 오만이 부른 파멸…그때야 깨달은 ‘행복의 조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은 제목대로 주인공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운명을 다룬 작품이다. 하지만 그의 딸 안티고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 <안티고네>는 안티고네만의 비극을 다루진 않는다. 오히려 초점은 외삼촌이자 테바이의 왕인 크레온에게 맞춰진다.

 

이야기의 발단은 이렇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두눈을 찌르고 방랑길을 떠난 뒤, 그의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뤼네이케스는 왕권을 놓고 서로 적이 돼 싸우다 둘 다 죽고 만다. 그에 따라 왕이 된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의 장례는 치르게 하되 적의 군대를 이끌고 테바이를 공격한 폴뤼네이케스의 장사는 허용하지 않는다. 원수는 죽어서도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하지만 안티고네는 그의 금지에 맞서 오빠의 장례를 치르고자 한다. ‘국법’을 어기게 될지라도 그것이 가족의 도리이자 인륜이라고 생각해서다. 그걸 막을 권리가 크레온에겐 없다고 안티고네는 믿는다.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이러한 대립은 흔히 ‘가족의 법’ 대 ‘국가의 법’의 대립이라는 구도로 이해돼 왔다. 사적인 윤리와 공적인 법의 충돌로 보는 것이다. 명령을 어기고 오빠를 장사지내려다 잡혀온 안티고네는 크레온의 포고보다 ‘신들의 법’이 더 강력하다고 주장하고, 크레온은 그런 안티고네를 오만하다고 비난하며 지하 동굴에 산 채로 가둔다.

 

헤겔식으로 말하면 얼핏 ‘동등한 권리를 지닌 두 원리’가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작품에서 크레온의 법에 끝까지 동의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국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법은 필요하지만 모든 법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심지어 크레온 자신조차도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에게서 그의 처사가 신들의 분노를 살 거라는 충고를 듣고는 마음이 흔들린다. 죽은 자를 짐승의 밥이 되게 함으로써 또 죽이는 건 결코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니며 저승의 신들에 대해서도 불경한 폭력이라는 게 테이레시아스의 충고다. 자기의 고집을 꺾는 건 끔찍한 일이지만 자칫 자신의 오만이 파멸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크레온은 마음을 고쳐먹는다. “아아, 괴롭구나. 하지만 내 행동에 대한 결심에서 물러서노라. 무리해서 필연과 싸워서는 안 되는 법이니.”

 

하지만 크레온의 회심이 그를 파멸에서 구하지 못한다는 데 <안티고네>의 비극이 있다. “국가는 지배자의 소유”이기에 도시 백성들의 뜻에도 따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이 권력자는 결국 자신의 오만에 대한 무서운 대가를 치른다. 동굴 무덤에 갇힌 안티고네가 목을 매 자살하자 약혼자인 아들 하이몬이 분을 못 이겨 자살하고, 연이어 아들의 자살에 충격을 받은 아내 에우뤼디케마저 자살하고 만다. 순식간에 아내와 아들을 모두 잃게 된 크레온은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탄식한다. 코로스의 말대로 그는 너무도 늦게야 올바름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하지만 필멸의 인간에겐 뒤늦은 깨달음도 재앙을 피하는 데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그의 운명은 보여준다.

 

‘안티고네의 비극’이라기보다는 ‘크레온의 비극’이라고 불러야 온당한 이 작품의 교훈은 무엇인가. 말미에서 코로스는 이렇게 요약한다. “현명함은 행복의 으뜸가는 바탕이로다. 그리고 신들에 관해서는 아무것에도 불경스럽지 말 것이로다.”

 

12. 0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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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꼭지를 옮겨놓는다. 필순에 변동이 있어서 오랜만에 쓰게 됐다. 아침신문에서 단연 톱기사로 다뤄진, 검찰의 불법사찰 재조사 결과발표에 대한 생각을 꼬투리 삼아 점심때 적은 칼럼이다. 검찰개혁의 필요성을 한번 더 절감하게 해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경향신문(12. 06. 15) 죽을 각오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에 대한 검찰의 재수사 결과가 발표됐다. 국민적 여론에 떠밀려 ‘사즉생(死則生)’의 각오로 수사에 임하겠다는 결의를 밝힌 지 3개월여 만에 나온 결과다. 하지만 사찰의 진짜 몸통과 주체가 누구인지는 명확히 밝히지 못했다. 기대는 배반했지만 예상은 벗어나지 않았다. 기대는 희망사항을 반영하지만 예상은 과거의 전력을 고려한다. 대한민국 검찰은 일반 국민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능하거나 권력에 대한 충성심이 훨씬 강하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닐까.

실망스럽지만 그렇다고 놀랄 건 없는 관련기사들을 읽다가 검찰은 대체 ‘사즉생’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보통은 ‘모든 것을 걸고’ 혹은 ‘죽기를 각오하고’ 임한다는 뜻 아닌가. 검찰 수사에 일말의 기대를 가졌다면 ‘사즉생’이란 말의 효과에 넘어간 측면이 없지 않을 것이다. 정작 검찰은 ‘사즉생’이라고 말해놓고 ‘사즉생(詐則生)’이란 뜻으로 새겼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죽을 각오란 어떤 것인가. 두 대목이 떠오른다. 하나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너무도 유명한 대사, 곧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독백은 이렇게 이어진다. “성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마음속으로 견디는 것이 더 고귀한 일이냐, 아니면 고해의 바다에 맞서 끝까지 대적하여 끝장을 내는 것이 더 고귀한 일이냐.” 대응관계로 보건대, 햄릿에게 산다는 것은 “성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마음속으로 견디는 것”이다. 반대로 죽는다는 것은 “고해의 바다에 맞서 끝장을 내는 것”이다.

 

햄릿에 견주어 보자면, 검찰에겐 어떤 선택지가 있었을까. 일단 죽기를 각오한다면 권력의 핵심에 맞서 끝장을 보는 일이 가능했겠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불법사찰 관련자를 모두 철저히 조사해서, 특히 청와대와 관련된 모든 의혹을 해명하고 법에 따라 죄과를 묻는 것이 ‘끝장’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한 시도가 ‘살아 있는 권력’이라는 장벽에 부딪혀 좌초된다 할지라도 검찰은 ‘국민의 검찰’로 거듭날 수 있을 테니 그야말로 ‘사즉생’이다.

하지만 검찰의 선택은 청와대 개입 의혹을 지우는 데만 죽기 살기로 매달려 결국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결과만을 내놓았다. 결과적으로 “성난 여론의 돌팔매와 화살을 꿋꿋이 견뎌내는 것”을 택한 셈이다. 그것이 사는 길이라고 판단한 것이겠으나 그 연명은 검찰의 존재 자체를 회의하게끔 만들었으니 ‘생즉사(生則死)’와 다를 바 없다.

죽을 각오란 어떤 것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또 다른 대목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에 나온다. 한 사형수에 관한 에피소드인데, 그는 어느 날 아침 다른 죄수들과 함께 사형대로 끌려가 총살된다는 선고문을 듣는다. 죄수들이 세 개의 기둥이 처형대로 놓인 사형장에 도착하고 첫 세 명의 죄수에게 사형복이 입혀진다. 세 번째 줄에 선 그에게는 이제 생의 시간이 5분 정도밖에 안 남았다. 하지만 그는 이 5분 동안 ‘많은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그동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동료들과의 작별에 2분,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데 2분,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데 남은 시간을 할애하기로 한다. 불과 수분 후에 들이닥칠 죽음과 사후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던 그는 만약 자신이 다시 살게 된다면 “매 순간을 1세기로 연장시켜 아무것도 잃지 않고, 1분 1초라도 정확히 계산해 헛되이 낭비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한다. 그런 상념 끝에 그는 한시라도 빨리 총살되면 좋겠다는 바람까지 갖는다. 하지만 그 바람과는 달리 바로 다음 순간 전혀 예기치 않았던 사면령 덕분에 그는 목숨을 건지게 된다.

정치범으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사면됐던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의 체험이 반영된 이 이야기는 임박한 죽음을 염두에 둘 때 삶의 시간이 얼마나 확장되고 그 가치가 얼마나 고양될 수 있는지 말해준다. 석 달의 시간을 허비한 검찰이 곱씹어볼 만한 이야기이다.

 

12. 0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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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책&(407호)의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당초 '세대' 문제를 다루려고 했지만 고른 책들의 초점이 '나이'여서 주제는 '중년 이후의 삶'으로 귀결됐다. 평소라면 읽지 않았을 책들을 둘러본 기회였다...

 

 

 

책&(12년 6월호) 중년 이후의 삶

 

‘인생의 사계’라는 말이 있다. 우리 인생의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대략 소년기,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의 네 시기를 일컫는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자연의 사계는 봄, 가을이 점점 짧아지는 쪽으로 가는 듯싶지만, 인생의 사계는 가을과 겨울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청춘이 짧은 건 그대로이지만, ‘고령화 사회’란 말이 가리키듯이 노년은 유례없이 길어지고 있다. 물론 의학의 발달과 생활여건의 향상으로 평균수명이 늘어난 건 좋은 일이지만, 아직까지 우리는 청춘만 연장하는 기술은 갖고 있지 않다. 그렇게 늘어난 인생의 가을과 겨울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떤 과제를 던져주는가.

 

우에다 오사무의 <남자 나이 45세>(더난출판, 2012)는 45세를 문제적인 나이로 지목한다. 육체연령이 젊어졌기 때문에 45세면 과거의 36세 정도이지만 커리어상으로는 옛날의 55세에 해당하는 나이다. 육체적으로는 아직 한창이지만 요즘의 풍조로는 은퇴를 요구받는 일도 흔하다. 40-50대 정년을 뜻하는 ‘사오정’의 현실은 일본도 마찬가지다. 이 ‘험난한 현실’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45세가 되어서 갑자기 닥친 현실에 어쩔 줄 몰라 허둥대지 않도록” 미리 고민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게 저자의 조언이다. 물론 준비할 사항은 많다. 하지만 ‘신용과 건강은 최대의 자산이다’ 같은 흔한 충고를 제외하면 ‘45세부터 다시 시작하는 평생공부법’ 같은 제안이 눈길을 끈다.

 

경영컨설턴트답게 저자는 인문고전을 읽으라는 말을 입에 담지는 않는다. 대신에 먹고 살 수 있는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 같은 실속 있는 공부를 권한다. 저자는 46세에 법학전문대학원에 다시 입학하여 변호사 자격을 딴 자신의 경험담을 소개하면서 공부에서도 목표를 명확히 하고 최단경로를 찾으라고 충고한다. 독서의 경우에도 다양한 독서 대신에 그가 권장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구축하기 위한 독서다. 목적의식을 갖고서 책을 선택하되 한권을 읽고 나면 첫 번째 책과 다른 관점에서 쓰인 책을 읽어서 비판적 사고력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어떤 책을 읽었다는 사실보다는 얼마만큼 나의 것으로 소화했느냐가 관건이다. 45세 중년을 위한 사회적 환경이 그렇게 호의적이진 않더라도 빈틈없는 준비를 통해서 80-90세까지 만족하는 인생을 보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마르고트 캐스만의 <젊은 사회에서 늙는다는 것>(작은책방, 2012)은 중년 여성을 위한 조언을 담은 책이다. ‘여성용’이 따로 필요한 것은 같은 중년이라고 해도 남성과 여성이 부닥치게 되는 문제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저자가 주목하는 건 ‘여자 나이 50세’인데, 남자들이 50세 이후에도 아버지가 될 수 있는 반면에 일반적으로 여자가 50대에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하는 건 아주 드문 일이다. 대신에 50대 여성은 대부분 결혼한 자녀의 아이를 돌보거나 나이 든 부모를 간병하는 일을 떠맡으면서 자신의 노년도 준비해야 한다. 노년을 준비하는 데 중요한 것은 혼자 사는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혼이나 남편과의 사별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중년 여성은 혼자 사는 처지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홀로 사는 삶이 고독한 삶을 뜻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선택지는 두 가지다. 혼자 있지 않으면서도 고독한 것과 고독을 느끼지 않으면서 혼자 있는 것. 당연히 바람직한 것은 혼자 있더라도 고독하지 않은 삶이다. 홀로일 때 우리는 자기 자신과 더 깊이 대면하며 더 안정되고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체험담이다. 물론 오래된 우정을 잘 가꾸어나가는 것은 중년의 삶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충고도 저자는 잊지 않는다. 덧붙여 여성신학자이자 목사로서 저자는 인생 중반에 오히려 ‘담대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남은 인생길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풀 죽어 의기소침하게 사는 것은 인생의 마지막 길을 잘못 걸어가는 것이다.”
 
루이스 월퍼트의 <당신 참 좋아보이네요!>(알키, 2011)는 80대의 노(老)생물학자가 쓴 노년의 인생론이다. 벨기에의 한 연구팀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일반적인 예상과 다르게 인생의 행복도가 가장 놓은 나이가 80대였다. 부모와 자식에 대한 책임감과 부담감이 가장 심한 40대가 최저점을 찍은 것과는 다르게 80대의 만족도가 높은 것은 모든 책임에서 벗어나 말 그대로 여생을 살기에 그렇다는 분석이다. 물론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노년이라면 사정은 좀 다를 수밖에 없다. 생물학적 노화는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스트레스를 피하고 꾸준한 운동과 건강식단을 통해서 치매, 특히 알츠하이머병을 예방하는 것이 ‘웰에이징(well-aging)’에서 중요하다고 저자는 충고한다.

 

늙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태도도 건강을 오래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대로 “노년의 비극은 늙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젊음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늙음에 대한 거부로서 안티에이징(anti-aging)은 노년의 행복을 가로막는 최대의 적이다. 지금 자신의 나이에 맞게 잘 살고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럴 때 들을 수 있는 말이 “참 좋아 보이세요!”이다.

 

12. 06. 13.

 

 

P.S. 인생의 사계를 모두 다룬 교과서적인 책은 심리학자 대니얼 레빈슨의 <남자가 겪는 인생의 사계절>(이대출판부, 2003)과 <여자가 겪는 인생의 사계절, 2004)이다. 책은 원고를 쓴 이후에야 생각이 나서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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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980호)의 북리뷰를 옮겨놓는다(분량상 기사에서 빠진 한 문장을 채워놓고 비문 하나를 바로잡았다). 담비사 모요의 <죽은 원조>(알마, 2012)가 지난주에 고른 책이었다. 지난번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자음과모음, 2012) 리뷰까지 이번 서평집 <그래도 책읽기는 계속된다>(현암사, 2012)에 들어갔으니까 이 리뷰부터는 다음 서평집에 포함되겠다(2년후쯤?). 담비사 모요는 하버드대학의 경제사학자 니얼 퍼거슨의 제자로 <미국이 파산하는 날>(중앙북스, 2011)을 통해 먼저 소개된 바 있다. 퍼거슨은 책의 추천사를 쓰고 있기도 하다.

 

 

 

주간경향(02. 06. 19) 아프리카의 빈곤을 부추긴 원조정책

 

1985년 7월 13일 전세계 15억명의 시청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라이드 에이드(Live Aid)’ 콘서트가 개최됐다. 아일랜드 가수 밥 겔도프가 아프리카 난민을 돕기 위해 기획한 자선공연이었다. 돌이켜보니 나도 그 시청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여느 고등학생들과 마찬가지로 팝음악을 즐겨듣던 10대였는지라 쟁쟁한 팝스타들이 출연했던 콘서트 놓칠 수 없었다. 게다가 자선공연이라는 명분도 훌륭하지 않은가. 하지만 선의가 언제나 좋은 결과로만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아프리카 잠비아 출신의 경제학자 담비사 모요의 <죽은 원조>(알마)는 그 ‘라이브 에이드’의 이면에 대해서, 원조의 어두운 진실에 대해서 폭로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책이다. 책의 원제는 ‘데드 에이드(Dead Aid)’. 물론 ‘라이브 에이드’를 염두에 둔 것으로, 역설적이지만 저자는 ‘살아있는 원조’의 대안으로 ‘죽은 원조’를 제시한다. 원조를 점진적으로 줄여나감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원조를 없애는 것이 ‘죽은 원조’ 전략이다. 왜 원조에서 벗어나야 하는가? 원조에 중독된 아프리카의 현실이 마약 중독자의 처지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원조에서 벗어나는 일이 당장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을 테지만 원조 의존적인 아프리카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오늘날 아프리카의 1인당 국민소득은 1970년대보다 낮아져 있고, 하루 1달러 이하의 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전체 7억 인구 가운데 절반 이상이다. 특히 사하라사막 이남 지역은 전세계에서 빈민 인구의 비율이 가장 높다. 평균수명은 세계 최저이며 문맹률은 가장 높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아프리카대륙의 50% 가량이 비민주적 체제하에 놓여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아프리카의 자연적 조건 탓인가? 아니면, 아프리카인들이 특별히 무능하고 그 지도자들이 선천적으로 더 타락하기 쉬운 때문인가? 저자는 의외의 답을 제시한다. 모두가 원조 때문이다.


부유한 국가들이 아프리카 대륙의 각 정부에 차관이나 증여의 형태로 대규모의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 원조다. 그런데 어째서 이 원조가 아프리카의 발전을 가로막은 장애물이 되었나? 발단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유럽 경제의 재건을 위해 원조금을 제공한 마셜플랜이었다. 마셜플랜의 성공이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도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했고, 아프리카가 최적의 후보지였다. 냉전체제하에서 지정학적 영향력을 고수하려는 패권국가들의 대결의식도 원조 경쟁을 부추겼다. 하지만 이런 원조가 아무런 효과도 없는 것이었다면? 르완다의 폴 카가메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1970년대 이후 3000억 달러 이상의 원조금이 아프리카대륙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경제성장과 인력 개발에서 이 돈이 어떻게 쓰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저자는 특히 원조가 권력자들의 부패를 가장 많이 ‘원조’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또 해외 원조의 유입은 국민들에 대한 정부의 재정 의존도를 낮추기 때문에 중산층과 시민사회를 약화시킨다. 그리고 원조 재화를 획득하기 위한 분쟁을 촉발함으로써 사회불안을 야기하고 심지어는 내전의 잠재적 원인을 제공한다. 그러니 모든 원조가 실패작은 아니었지만, 저자가 보기에 아프리카에 대한 원조는 분명 실패작이다. 애초에 전혀 다른 조건과 환경에 놓인 아프리카대륙 국가들에게 마셜플랜과 같은 모델을 일률적으로 적용하려고 한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서방식 민주주의가 아프리카 경제의 구제책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착각에 불과하다. 민주주의가 경제성장의 필수적인 조건이 아니며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간과한 때문이다. 중국과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의 성공사례 외에도 피노체트의 칠레와 후지모리의 페루는 민주주의 없이 경제성장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었다. 곧 경제성장은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지만 거꾸로 민주주의는 경제성장의 필요조건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아프리카는 원조로부터의 출구 전략이 절실하다. 라이브 에이드의 전자기타 소리보다 더 강하게 귓전을 때리는 “원조에 반대한다!”는 절규를 들으며 아프리카의 현실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12. 06. 12.

 

P.S. 마감에 쫓겨 급하게 쓰는 와중에 번역도 한 대목을 확인하느라 원고가 더 지체됐었다. 서두에서 저자가 오늘날 아프리카 현황에 대해 정리해주는 곳이다.  

"하루에 1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350만 명이 넘는 사하라사막 이남 지역은 전 세계에서 빈민 비율이 가장 높은 곳으로, 전 세계 빈민의 약 50퍼센트가 이곳에 몰려 있다."(30쪽)

뭔가 문제인가? '350만 명'이란 숫자다. 너무 적은 숫자여서 아마존에서 원문을 확인해보니 'over half of the 700 million'을  그렇게 잘못 옮긴 거였다. 7억의 절반 이상이니까 '350만 명'이 아니라 '3억 5천만 명' 이상이어야 한다.

 

 

 

한편, 책을 읽은 뒤에 그 여파로 주문한 책은 중국의 아프리카 공략을 다룬 <차이나프리카>(에코리브르, 2009)와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후마니타스, 2008), <지속가능한 민주주의>(한울, 2001), <민주주의와 시장>(한울, 2010) 등 아담 쉐보르스키의 민주주의에 관한 책들이다(<민주주의와 법의 지배>는 구입했던 듯싶은데 소재를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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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오월의봄, 2012)와 함께 이번주에 나오는 서평집 <그래도 책읽기는 계속된다>(현암사, 2012)의 표지를 올려놓는다.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에 이어지는 두번째 서평집이고 제목은 그런 의미를 담았다. 이번주 목요일 저녁쯤이나 나는 책을 받아보게 될 듯싶다...

 

 

12. 0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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