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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의 소식지 <사람과 책>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문장도 하나 교정해서). '내 삶을 바꾸는 고전읽기'가 기획특집인데 그 중 고전읽기 붐에 대해 짚어달라는 청탁을 받고 쓴 것이다. 어떤 방향으로 써야 할지 생각해보다가 이지성의 <리딩으로 리드하라>(문학동네, 2010)를 실마리로 삼았다. 최근 황광우와 공저로 낸 <고전혁명>(생각정원, 2012)과 황광우의 <철학하라>(생각정원, 2012)도 '고전읽기 붐'과 연관된 책으로 볼 수 있겠다.

 

 

 

사람과 책(12년 2월호) 고전읽기 붐, 그 현상과 본질

 

얼마 전 ‘고전읽기의 즐거움’이란 글을 청탁받고 쓴 적이 있다. 청소년들을 위한 이러저런 조언을 담은 책이었는데, ‘고전읽기의 즐거움’은 인문학을 소개하는 파트의 한 꼭지였다. ‘고전을 읽어보시오’ 같은 고리타분한 충고는 늘어놓기 멋쩍어서 ‘고전읽기의 즐거움’이란 말부터 의심하라며 서두를 열었다. 그게 의당 즐거운 것이라면 ‘고전읽기는 즐겁다’고 따로 설득할 필요도 없을 거라는 게 이유였다.

 

 

 

사실이 그렇다. 고전읽기를 즐기는 성향을 타고난 자도 없진 않겠지만 다수일 리 있겠는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즐기기보다는 개그콘서트에 포복절도하는 게 더 흔한 일이다. 분명 고전은 고상한 책이긴 하지만, 동시에 고리타분한 책이다. 그게 통념이다. 읽었다고 과시하기엔 좋지만, 또 남들 다 읽었다고 할 때 혼자 안 읽었으면 좀 창피한 느낌이 들게도 하지만, 막상 읽으려고 하면 머리에 쥐가 나는 책! 한데, 그런 고전읽기 붐이 일고 있다고 한다. 어찌된 일인가?


고전의 가치와 의의에 대해서 충분히 숙지하는 것과 실제로 읽는 건 별개의 문제다. 건강을 위해선 꾸준히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게 상식이지만 실제로 실천하는 건 별개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듯 인식과 실천 사이에는 유구한 간극이 있다. 그 사이는 저절로 메워지지 않는다. 어떤 강제력이 필요하다. 누군가 옆에서 꼬드기지 않는다면 책을 손에 들기 어렵다. 누군가 등 떠밀지 않고서는 러닝머신에 올라서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짚이는 책이 있다. 이지성의 <리딩으로 리드하라>(문학동네, 2010).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쌤앤파커스, 2010)와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푸른숲, 2011)가 대세였던 지난해, 그만큼 주목받지는 않았지만 입소문을 타고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다.


굳이 부추김이 없어도 자발적으로 책을 찾아 읽는 편이라 읽어볼 필요를 못 느끼다가 고전읽기 붐의 ‘원인’이 궁금해서 펼쳐보았다. 사실 ‘세상을 지배하는 0.1퍼센트의 인문고전 독서법’이 부제라고 하면 나름 솔깃하지 않은가. 저자가 말하는 고전은 인문고전인데, 우리가 ‘고전’이라고 일컫는 책의 태반이 문학, 철학, 역사 분야의 고전이므로 ‘고전=인문고전’이란 등식도 억지는 아니다.

 

저자는 단도직입적으로 책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 ‘고전(古典)’과 ‘비고전(非古典)’, 즉 ‘고전’과 ‘고전이 아닌 책’이다. 그리고 무엇이 고전인가에 대한 정의도 간명하다. “천재들의 저작”이다. 말 뜻대로 하자면 고전이란 오래된 책, 오랫동안 살아남은 책을 가리키는데, 천재들의 저작이 아니고서야 “짧게는 100-200년 이상, 길게는 1,000-2,000년 이상”을 살아남을 수 있었겠느냐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고전이 천재들의 저작이므로 고전을 읽는 일은 천재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이다.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천재들의 ‘개인지도’를 받는 일이다. ‘천재’라는 말이 막연하다면 ‘노벨상 수상자’라고 해도 좋겠다. 저자의 제안은 이런 것이다. “생각해보자. 만일 앞으로 10년 동안 노벨상 수상자들에게 매일 두 시간 이상 개인지도를 받는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불문가지다. 독자인 우리도 그들 수준에 근접하게 된다. 하물며 노벨상 수상자라고 해봐야 불멸의 인문고전을 남긴 진정한 천재들에 비하면 ‘머리가 조금 좋은 사람들’에 불과하다면, 이 천재들의 개인지도에 비견할 만한 일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좋다, 천재들의 책이라는 고전을 읽고 우리도 천재를 닮도록 하자. 천재적인 사고를 해보도록 하자. 그 자체로 신나는 일일 것도 같다. 한데, 저자는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가 보기에 고전읽기는 단순히 ‘즐거움’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아니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다. 저자의 체험적 고백에 따르면, 그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책이 인문고전이다. “재미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잘난 서양철학 고전들 같은 경우는 “너무 어려워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판독 불가능일 때가 대부분”이다. 그래도 읽어야 하는가? 그렇다. 우리의 두뇌를 조금이라도 변화시켜주는 책은 인문고전밖에 없고, 그렇게 뇌가 변화할 때만 우리는 생존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절박한 이유다. 아예 생존을 위해서 억지로 인문고전을 읽는다는 고백까지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이쯤 되면 ‘고전읽기의 즐거움’이 아니라 ‘고전읽기의 절박함’이다. 


그렇다고 치기어린 절박함은 아니다. 다소 거칠더라도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 먼저, 정치적인 근거. “인류 역사를 보면 항상 두 개의 계급이 존재했다. 지배하는 계급과 지배받는 계급.” 이 두 계급의 차이는 무엇인가? 저자는 그것이 인문독서의 유무라고 말한다. 가령 조선의 지배계급인 선비들에겐 인문고전 독서, 곧 글공부가 주업이었다. 하지만 그 인문고전 독서가 피지배계급에겐 금지됐다. 책은 아무나 읽는 것이 아니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책을 읽지 않는 마당쇠가 책을 읽는 선비를 지배한 적이 단 하루라도 있었던가.”


행여 똑같이 책을 읽는다고 해도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은 읽는 책의 종류가 달라야 했다. 근대국가로 발전해나가는 데 직업군인과 공장노동자가 필요하기에 학교교육을 도입한 프로이센(독일)에선 군대에서의 명령과 공장에서의 작업지시를 수행할 수 있는 만큼의 지식을 가르쳤다. 국민이 너무 똑똑해지는 건 불필요했고 또 바라지도 않았기에 인문고전 교육은 빼놓았다. 단지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만 이루어졌다.

 

이러한 독일식 교육 교육제도를 그대로 수입하여 우리에게 이식한 것이 일제의 식민지 교육이었다. 기본적으로 식민지 교육은 지배계급이 아닌 피지배계급을 위한 교육, 직업군인과 공장노동자를 생산하기 위한 교육이다. 저자는 우리의 학교교육과정에서 인문고전 읽기가 배제된 것이 그러한 식민지 교육의 부정적 유산이 아닌가라고 의심한다. 그래서 촉구한다. 깨달아야 하다고. “이제는 진실을 깨달아야 한다. 당신이 학교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배우고 두뇌와 삶에 어떤 변화도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물론 인문고전을 안 읽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경제적인 근거.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전 세계 부의 90퍼센트 이상은 세계 인구의 약 0.1퍼센트가 소유했다.” 예전에 그 0.1퍼센트는 왕과 귀족이었지만 지금은 월스트리트의 투자자와 세계적인 기업가 들이다. 이 부자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한 시대를 풍미한 투자가들의 삶을 조사해본 결과 저자가 얻은 결론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이들이 독서광이면서 최고 수준의 인문고전 독서가라는 점이다. 가령 자신만의 투자 철학을 갖기 위해선 뇌 속에 ‘철학하는 세포’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세포는 오직 철학고전 독서를 통해서만 얻어진다. 가까이에서 사례를 찾자면 이병철의 ‘인재경영’과 정주영의 ‘의지경영’도 그 출처는 인문고전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그래서 빈민을 위한 인문학과정을 설립한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이매진, 2006)의 핵심을 이렇게 끄집어낸다. “여러분은 이제껏 속아왔어요. 부자들은 인문학을 배웁니다.”


<리딩으로 리드하라>에서 ‘고전읽기의 즐거움’ 차원을 넘어서는 뭔가가 작동하고 있다면 그것은 ‘고전읽기의 절박함’이다. 이런 절박함이 혹 고전읽기 붐에도 일조하고 있는 건 아닐지. 저자는 젊은이들이 “지금부터라도 인문고전 읽기에 목숨을 걸기를 원한다.” 너무 과장된 소망인가. 하지만 동의하는 바도 없지 않다. 먼저 인문고전 독서는 우리의 두뇌를 변화시킨다는 점. 우리가 똑똑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으면서 똑똑해진다는 건 나의 지론이기도 하다. 물론 아무 책이나 읽는 것이 아니라 좋은 책을 읽는다는 조건이 붙긴 하지만. 고전이란 애당초 전범이 될 만한 좋은 책을 뜻하기에 고전읽기가 우리의 두뇌활동을 자극하고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지혜를 열어준다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인문고전 읽기가 ‘자본주의 시스템의 승자가 되는 법’이라고까지 저자는 강조하지만, 그보다 동감하는 건 “인문고전 독서교육의 진정한 목표는 자주적이고, 행복하고, 능동적인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보다 나은 교육목표를 상정할 수 있을까. 인문고전 독서를 통해 ‘행복한 천재’도 되고, 개인과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혹은 나라의 운명을 바꿔놓을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건 각자가 자주적이고 행복하고 능동적인 인간이 된 다음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즐거움만도, 절박함만도 아니다. 우리에겐 ‘고전읽기의 절박한 즐거움’이 필요하다. 고전읽기 붐이 그런 즐거움과 함께하면 좋겠다.

 

12. 0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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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저 형태로 올해 처음 낸 책은 <대한민국 청소년에게2>(바이북스, 2012)이다. 16명의 저자가 참여해 '개념 청소년'들에 대한 조언을 담았다. 내가 제안받은 건 '고전 읽기의 즐거움'이란 글이었고, 제목도 그렇게 나갔다. <책을 읽을 자유>의 일부 내용을 보완해서 청소년용으로 만든 글이다. 서두만 옮겨놓는다.

 

 

 

모든 일에는 배후가 있다는 음모론적 세계관에 동의한다면 ‘고전 읽기의 즐거움’도 순수하게만 받아들일 수 없다. 최소한 그게 그토록 즐거운 것이라면, 그래서 ‘순수한 즐거움’이라면 널리 광고할 일도 없으며 이런 자리에서 내가 길게 떠들어댈 이유도 없을 것이다. 제군들은 일단 그걸 의심해야 한다. 이미 경험적으로 체득한 바도 있겠지만 어른들의 말은 다 의심해야 한다. 속칭 ‘꼰대’들의 말이라는 것. 물론 이 ‘의심하라!’는 주문조차도 어른들의 말일 수 있다. 하지만 그나마 유일하게 건질 수 있는 ‘꼰대적’ 격언이다. 모든 의심을 가능하게 하는 의심의 토대가 ‘의심하라’라는 명령이니까. 그거 하나는 믿어도 된다.


그럼 의심이 왜 중요한가. 그렇게 의심할 때 제군들은 자기 자신이 되기 때문이다. “도대체 세상에 믿을 건더기가 없어!”라고 푸념할 때, 제군은 자신의 존재감을 온전히 드러내게 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이렇게 의심하고 푸념하는 ‘나’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그게 사실은 가장 놀라운 일이고 경이로운 일이며 기적적인 일이다. 데카르트라는 철학자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한 걸 기억하는가? 그때 ‘생각한다’라고 두루뭉술하게 표현된 게 실상은 그의 의심이고 회의였다. 우리는 뭔가에 대해서 의심할 때 비로소 ‘주체’로서 존재한다. 말이 어려운가? ‘나답게’ 존재한다고 이해하면 된다. 우리가 남의 눈치를 보거나 신세 지지 않고, ‘나답게’ 당당하게 존재하는 건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 내게 들리는 모든 말들을 의심할 때이다. 그런 걸 ‘괄호 안에 넣기’라고도 말한다. 곧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보류해놓는 것이다. 그렇게 미덥잖다는 표정으로 세상의 모든 일을 보류해놓는 주체, 그게 ‘나’이다. 왜? 나니까. 다른 이유는 없다. ‘너’가 아니기 때문에. ‘그’가 아니기 때문에. 바로 ‘나’이기 때문에.


‘고전 읽기의 즐거움’도 마찬가지다. ‘고전’이란 건 ‘팩트’로 어느 정도 지정할 수 있다. ‘읽기’도 마찬가지다. 물론 ‘읽기’와 ‘읽는 척하기’를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같은 까다로운 질문도 가능하지만, 여기선 편하게 생각하기로 하자. 문제는 ‘즐거움’이다. 즐거움 혹은 쾌락이란 건 상당히 주관적이니까. 누군가의 즐거움이 모든 사람의 즐거움이 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사람은 다 제각각이고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즐거움이 다 상대적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사람들이 생각하고 살아가는 꼴을 보면 또 비슷비슷한 부분도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이란 서로 비슷비슷하면서도 제각각인 것인가? 얼추 그렇게 말해볼 수 있겠다. 즐거움 또한 그렇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우리가 저마다 타고난 성향에 따라 제각각의 즐거움을 누리지만, 또 어떤 즐거움은 끼리끼리 공유하기도 한다. 맘이 맞고 죽이 맞는 관계는 그래서 만들어진다. 고전 읽기의 즐거움에 대해서 몇 마디 말해볼 수 있다면 이런 근거에서다.(...)

 

12. 0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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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프레시안 북리뷰 코너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서평이라기보다는 독서의 제안 같은 것으로 모리스 고들리에의 <증여의 수수께끼>(문학동네, 2011)를 다루고 있다. 이렇게저렇게 미뤄지다 보니 뒷북성 리뷰가 됐다. 아니 그럼에도 너무 이른 서평이 됐다! 모스의 <증여론>(한길사, 2002)와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그린비, 2009)와 같이 다루려다 보니 견적이 너무 늘어났기 때문이다. 여러 사정상 맛보기에 해당하는 내용만 적었다...

 

 

 

프레시안(12. 02. 10) 자본주의 무너뜨릴 궁극의 무기? '선물'!

 

몇 번 마감을 연기한 서평을 쓴다. 마치 공부가 미진한 학생이 시험지를 받아든 기분이다. 문제는 '좋아하는 과목'이라는 점. 벌써 두 달쯤 전에 모리스 고들리에의 <증여의 수수께끼>(오창현 옮김, 문학동네 펴냄) 서평을 제안 받고 나는 기꺼이 응했다. 다른 선택지도 있었지만 마침 읽어보려던 책이었기 때문에 고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한데 처음 몇십 쪽을 읽다가 만만찮은 책이란 걸 감지하고 부랴부랴 영역본까지 주문했다. 저자가 '증여의 수수께끼'와 정면승부를 벌이려는 각오였기에 옆에서 '구경하는' 처지에서도 나름 각오는 필요해보였다.

 

돌이켜보니 그런 긴장감을 느끼게 한 책으론 질베르 뒤랑의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문학동네 펴냄)도 있었다. 사르트르의 상상력 론과 정면 대결을 펼치려는 것으로 보인 서두에서부터 대충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란 걸 감지했다. 이 역시 영역본을 구해놓고 정좌하며 읽을 채비를 했지만 정작 독서는 다른 일들에 파묻혀 아직도 미결 과제로 남아 있다. 700쪽이 넘는 분량도 좋은 핑계거리가 돼주었고. 하지만 <증여의 수수께끼>는 비록 350쪽에 이를지라도 그 절반도 안 되는 분량이다. '선택 과목'이라고 골라놓고 미적대다가 '낙제'를 받는다면 어찌 체면을 구기는 일이 아니겠는가. 요령껏 답안지를 작성하는 수밖에.

 

일단 '증여'란 말과 함께 떠올리게 되는 <증여론>(한길사 펴냄)의 저자 마르셀 모스와의 관계부터 언급해야겠다. 뒤랑이 사르트르와 대결한다면 고들리에의 상대는 마르셀 모스다. 저자 소개에서부터 고들리에는 "마르셀 모스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를 잇는 프랑스 인류학계의 거장"이라고 돼 있다. 모스를 태두로 하는 프랑스 인류학의 적통이란 얘기다. 실제로 전체 4부로 이루어진 책에서 절반 이상의 분량이 1부 '모스의 유산'에 할애된 것만 보아도 모스가 가진 비중을 알 수 있다. 고들리에가 서문에서 적은 고백대로라면 모스의 <증여론>은 그의 인생 진로를 바꿔놓은 책이기도 하다.

 

"나는 1957년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모스 연구 입문>과 함께 모스의 <증여론>을 처음 읽었다. 그때까지 나는 여전히 철학도였으며 인류학으로 전공을 바꾸지 않은 상태였다. (…) 1957년에 쓴 나의 노트에는 이 두 글을 읽고서 열정에 사로잡혔던 기록이 담겨 있다." (18~19쪽)

 

결국 고들리에는 <증여론>을 읽은 뒤에 인류학자가 되었고, 멜라네시아로 현지조사를 떠난다. 그리고 거기서 이 패기만만한 인류학자는 자신의 스승들을 재평가하게 될 단서들을 얻는다. "나는 그곳에서 증여의 비서구적 형태를 보았고, 이로부터 증여의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이와 관련된 문제에 대한 모스와 레비스트로스의 유산을 재평가하게 되었다." (21쪽) 
 
즉, 고들리에는 모스와 레비스트로의 주장 가운데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렸는가를 판별하고자 한다. <증여의 수수께끼>가 탄생하게 된 배경인데, 그런 사정을 고려하면 저자가 이 책을 쓰면서 염두에 둔 독자는 일반 독자가 아니다. 죽은 모스와 레비스트로스 그리고 동료 인류학자들이 그의 대화와 논쟁 상대자이다. 증여란 주제로 놓고 자신이 모스와 레비스트로스의 유산을 어떻게 갱신하고 또 넘어서고 있는지를 입증하고자 하는 책이니까 말이다. 인류학자 고들리에의 출사표이자 자기 존재 선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증여론>을 둘러싼 이론적 모험을 한갓 인류학 동네 이야기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학자들의 논쟁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어서이다. 사실 이 대목에서 고들리에의 책보다 더 유익한 참조가 되는 것은 영국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가치 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그린비 펴냄)이다. <증여의 수수께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스의 <증여론>과 함께 꼭 같이 읽을 필요가 있는 책이다.

 

우리에겐 먼저 소개됐지만 <가치 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2001년)은 <증여의 수수께끼>(1996년)보다 나중에 나온 책이다. 당연히 그레이버는 고들리에를 참고하면서 몇 가지 점에서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번역본의 찾아보기에는 고들리에가 한번 언급되는 걸로 나와 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자주 등장한다.

 

가장 중요한 대목은 <증여론>과 사회주의 이론과의 관계를 다룬 부분이다. 이 점은 그레이버가 특별히 강조하는 바인데, "오늘날 모스가 한평생 대단히 헌신적인 사회주의자였음을 의식하는 인류학자들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338쪽)는 게 그의 문제의식이다. 특히나 영미에서 그렇다고 하는데, 고들리에는 <증여의 수수께끼>에서 이렇게 적었다.

 

"모스는 양도 불가능한 재화라는 관념을 분석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눈에 혼란스러워 보였던 논쟁, 집단적 소유권과 개인적 소유권을 둘러싸고 19세기 말부터 펼쳐졌고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이 다시 불붙여 놓은 논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모스가 평생 철저한 반 볼셰비키주의자로 살았다는 점을 잊지 말자."(77쪽)

 

하지만 모스가 <증여론>을 쓰고 있던 1923년과 1924년 전후는 그가 가장 활발하게 정치적 활동을 펼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협동조합과 노동조합 운동의 지지자로서 밑으로부터의 변혁을 추구했기에 폭력을 통한 사회주의 성취 기획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그레이버에 따르면 "그는 소비에트 체제가 작동하지 않을 수 없었던 어려운 전시 상황을 인정하는 한편, 그들이 휘두른 폭력이나 민주적 제도, 또 무엇보다 법치에 대한 그들의 경멸을 강하게 비판했다."(339쪽)

 

즉,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는 열정적으로 지지했지만 볼셰비키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 모스의 입장이다. 때문에 그레이버는 모스에 대한 고들리에의 평가가 좀 부정확하다고 본다. 그가 각주에서 지적하고 있는 내용이지만 모스와 고들리에를 이해할 때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돼 옮겨 보면 이렇다.

 

"모리스 고들리에는 모스를 '철저한 반 볼셰비키주의자'이자 사회민주주의자로 평가한다. 그러나 이는 고들리에가 1997년에 재출간된 모스의 정치적 저술들을 참조하지 못했기 때문에 내려진 평가라고 생각된다. 1997년 재출간된 모스의 정치적 저술들에서 우리는 그가 러시아 혁명에 대해 대단히 양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사실상 그의 정치적 비전이 많은 점에서 그의 멘토였던 조레스보다 프루동 같은 아나키스트에 더 가까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339쪽)

 

물론 우리에게 소개된 모스의 저작은 <증여론>밖에 없기 때문에, 모스의 작업이 갖는 정치적 의의를 제대로 음미하기엔 한계가 있다. 심지어는 마르크스주의 인류학자로 분류되는 고들리에조차도 모스의 정치적 견해에 대해서 오해한 부분이 있다는 지적이니까 '모스의 유산'을 재평가하는 일이 쉽지 않은 과제라는 걸 알 수 있다(고들리에는 모스를 사회주의자 내지 사회민주주의자로 보는 반면에 아나키스트 인류학자를 자임하는 그레이버는 모스에게서 아나키스트의 모습을 더 많이 본다).

 

그래도 무엇이 '모스의 유산'(고들리에의 표현)인지, 왜 '다시 모스에게로'(그레이버의 표현)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위해 간단히 줄거리만 챙겨놓자면, 모스는 화폐를 매개로 한 자본주의 교환 경제와는 다른 체계의 원리를 찾아내고자 했다. 고들리에를 재인용하자면 모스의 기본적인 생각은 이랬다.

 

"아주 최근에 인간을 경제적 동물로 만들어낸 것은 바로 우리 서구 사회이다. (…) 인간은 매우 오랫동안 이와는 다른 무엇이었다. 인간은 매우 오랫동안 계산기 같은 복잡한 기계가 아니었다." (102쪽)

 

'경제적 동물'로서의 인간, 곧 호모이코노미쿠스란 '계산기 같은 기계'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훨씬 오랜 기간 동안 인간은 부를 분배하는 다른 원리를 갖고 있었다. 그것이 '증여'를 매개로 한 '총체적 호혜 관계'다. 이 호혜적 관계에서 의무는 무제한적인 성격을 갖는다. 시장에서 물건을 사면서 그에 대해 값을 치르면 거래가 종료되는, 그래서 얼굴을 두 번 볼 필요가 없는 관계와는 다르다.

 

그레이버가 드는 사례를 참고하면, 가령 새 카누가 필요한 멜라네시아의 남성은 여동생의 남편과 그의 가족들에게 부탁한다. 상대에게 아내를 제공한 것이니까 상대편은 사실상 그에게 모든 것을 빚지고 있으므로 특정한 상환 의무에 따라 보답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 제공해야 할 무제한적 의무를 갖는다. 모스에 따르면 이것이 '공산주의'다. "누군가 바로 그것에 대해 답례를 하거나 값을 치르지 않고도 자신이 필요한 것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회"다. 이것은 국가가 모든 것을 소유하는 방식의 공산주의와는 다른 '개인주의적 공산주의'다. 그 다른 사회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라는 점에서 모스의 <증여론>과 고들리에의 <증여의 수수께끼> 그리고 그레이버의 <가치 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은 서로 만난다.

 

우리가 새로운 가치 이론과 새로운 사회 구성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면 증여라는 문제는 인류학자들만의 관심사가 될 수 없다. 그러니 다소 학술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하더라도 마르크스를 읽을 정도의 관심과 성의가 있다면 모스와 그의 후계자들의 작업에도 주의를 돌려보면 좋겠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금 고들리에의 <증여의 수수께끼>로 돌아간다. 이제 비로소 본론에 들어가야 할 테지만, 시험시간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린다. 그래도 성의는 보였으니 '낙제'는 면할 수 있지 않을까. 네? '재시'라고요?

 

12. 02. 11.

 

 

 

P.S. 마르셀 모스의 책도 그렇고, 그에 관한 책도 그렇고 아주 드물게 소개돼 있는데(물론 모리스 고들리에의 책도 <증여의 수수께끼>만 나와 있다), 브뤼노 카르센티의 <마르셀 모스,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동문선, 2009)가 프랑스에서 나온 입문서격의 책이다. 간단한 서평을 쓴 적이 있지만 변광배 교수의 <나눔은 어떻게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프로네시스, 2011)도 모스의 <증여론>에 대해서 한 장을 할애하고 있다(<기부론>이라고 옮겼다). 일본의 신화학자 나카자와 신이치의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동아시아, 2004)도 증여의 문제를 독창적으로 정리한 책이다. "사랑과 경제를 하나로 융합하는 새로운 증여의 철학"을 제시한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이번주에 나온 <2012 베스텐트 한국판>(사월의책, 2012)이다. <베스텐트>는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공식저널이라고 하는데, 올해부터 매년 한국어판이 나오는 듯하다(책을 받아보니 연 2회 출간이다). 한국판 특집도 따로 있지만 이번판 쟁점주제가 선물(증여)론이다. 간단한 소개를 옮기자면,

"이번 <베스텐트 2012>는 마르셀 모스, 레비스트로스, 데리다 등 수많은 사상가들이 주목했던 ‘선물’이라는 주제를 쟁점으로 잡았다. 부자들의 기부 열풍, 자원봉사와 재능 기부 등에서 나타나는 사람들의 이타적 행동, 인터넷에서 정보를 자발적으로 공유하는 수많은 네티즌들. 왜 이처럼 사람들은 아무런 경제적 이익을 기대하지 않고서 자신이 가진 것을 타인에게 ‘선물’하는 것일까? 선물이 사람들을 연결하고 결속하며 상호 존중과 상호 인정의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마르셀 에나프의 독창적 주장과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악셀 호네트의 비판적 고찰 사이에서 뜨거운 논쟁이 펼쳐진다."

그 논쟁이 궁금해서 책은 바로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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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책&(403호)에 실은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주제는 '식량전쟁'으로 골랐다. 새삼 알게 된 거지만, 영어 단어 'food'는 '식량' '식품' '음식'으로 모두 번역될 수 있다. 먹거리에 대해서만큼은 우리가 더 예민하다고 하면 과장일까. 지면에 나간 글은 오탈자가 걸러지지 않아 교정해서 옮겨놓는다. 

 

 

 

책&(12년 2월호) 식량전쟁

 

“세계의 식량위기는 21세기의 정치 문제이자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도전이다.” 독일의 저널리스트 빌프리트 봄머트가 <식량은 왜! 사라지는가>(알마, 2011)에서 내리는 결론이다. 하지만 이 결론은 식량문제를 다룬 대부분의 책에서 서론으로 옮겨놓아도 무방하다. 사람은 모두 먹어야 생존할 수 있기에 누구도 식량과 식품 문제에서 예외일 수 없다. 그런데 그 식량문제가 위기에 처해 있다. 인구, 기아, 기후, 그리고 바이오연료 등이 복잡하게 얽힌 세계 식량문제는 어떻게 생겨났으며 해결책은 무엇인가.

 

 


‘배부른 제국과 굶주리는 세계’로 양분된 오늘의 현실을 들여다보는 리즈 파텔의 <식량전쟁>(영림카디널, 2008)을 출발점으로 삼아보자. 세계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작물 수확량은 늘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인구 열 명 가운데 한명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지금의 문제적 현실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과체중 인구(10억 명)가 기아에 허덕이는 인구(8억 명)를 앞질렀지만 절대 빈곤층은 줄지 않고 있다. 비만과 기아는 동일한 문제의 양면일까. “모든 나라마다 비만과 기아, 가난과 부의 편중이라는 대조적인 문제를 안고 있으며 이는 날이 갈수록 점점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모순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 식품산업의 구조이다. 커피를 예로 들자면 커피 재배업자와 소비자는 넘쳐나지만 연결고리에 해당하는 가공업자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즉 모래시계 구조이다. 다수의 생산자가 도시 소비자에게 직접 공급하지 않고 소수의 식품 가공업체에 팔아넘기기에 작물의 산지 가격이 떨어지더라도 이익을 보는 건 소비자가 아니라 ‘중개상’이다. 가령 멕시코의 주식은 옥수수 가루로 만드는 토르티아라는 빵인데, 옥수수 가력이 하락한다고 해서 토르티아 가격도 덩달아 떨어지진 않는다. 가격 폭락으로 옥수수 농가는 망해가도 토르티아 값은 오히려 더 올라가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토르티아시장의 가공업체가 김사(GIMSA)와 민사(MINSA)라는 다국적 기업 두 곳밖에 없기 때문이다. 멕시코정부는 이들 독점업체에 보조금까지 지급하면서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 그런 상황에서 맺어진 북미자유무역협정은 멕시코의 농업경제를 파탄직전까지 몰고 가 오히려 미국 측에서 자유무역의 부정적 여파를 우려할 정도였다. 멕시코의 경우는 세계 식량시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여주는 표준적인 사례라 할 만하다.


물론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식량전쟁>에는 지난 2003년 세계무역기구 장관급 회담이 개최된 칸쿤에서 “세계무역기구가 농민을 죽인다!”라고 외치며 자살한 농민운동가 이경해 씨의 사례도 나온다. 한농련(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회장이었던 이 씨는 유망한 한우 사육농이었지만 한국정부가 호주와 쇠고기 수출 협정을 체결하면서 직격탄을 맞았다. 값싼 호주산 쇠고기 수입에 대비해 정부가 권장한 것은 대출을 받아서라도 소 사육마리 수를 늘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쇠고기 값 하락은 지속됐다. 정부의 조언을 따랐던 그는 결국 대출금을 갚지 못해 파산하는 신세가 됐고 절망 끝에 죽음으로 항의를 표시했던 것이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전 세계 농민 수만 명이 “우리는 모두 이경해다!”를 외쳤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농민들의 현실은 과연 달라졌을까. 

 

 


미국 저널리스트 폴 로버츠의 <식량의 종말>(민음사, 2010)은 위기와 좌절이 농민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전 세계적 식량 공급망과 현대 식품 시스템을 통해서 도시 소비자들은 곡물, 고기, 과일, 채소 등을 어느 때보나 더 많이, 그리고 더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직도 한쪽에서는 ‘식품 불안정 상태’에 놓여 있고, 기아를 모면한 나머지 인류는 현대식 식단이 낳은 부정적인 결과로서 비만과 심장병과 당뇨와 싸우고 있다. 게다가 대형 가축 사육시설과 집약적 농업은 점차 자연 시스템의 생산능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이처럼 상황은 더 나빠져 가고 있는데, 21세기 중반이면 거의 100억에 달할 인구를 과연 먹여 살릴 수 있을까? ‘새로운 수확’을 기대할 수 있을까?


다시 <식량은 왜! 사라지는가>로 돌아오면 저자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물론 대책은 강구하고 있다. 2008년에 불어 닥친 식량위기 이후 국제연합의 반기문 사무총장은 식량문제를 중요한 현안으로 간주해 식량농업기구와 세계은행, 국제농업개발기금과 세계식량계획, 세계무역기구 등에 분산돼 있는 전문 인력을 한데 모아 ‘세계식량안보위기대책 하이레벨 태스크포스’까지 꾸렸다. 하지만 전망이 밝지 않다. 한 국가 내에서도 이해관계가 조정되지 않는 문제를 국제연합이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건 무망한 일이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가장 단순하게 말하면, 기아에 시달리는 8억 6200만 명의 식량과 생존권 확보에 필요한 비용이 300억 달러라고 한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무기 구입에 2000억 달러를 지출하고 1000억 달러어치 식량을 버릴지언정 국제사회가 300억 달러를 마련하는 일은 어렵다. 안타깝게도 “시간은 우리에게 불리하게 흐르고 있다.”

 

12. 02. 10.

 

 

P.S. 식량문제 관련서를 몇권 더 들자면 교과서적인 책으로 패트릭 웨스트호프의 <식량의 경제학>(지식의날개, 2011), <식량전쟁>과 비슷한 문제의식을 담은 월든 벨로의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더숲, 2010), 그리고 최근에 나온 톰 스탠디지의 <식량의 세계사>(웅진지식하우스, 2012) 등을 꼽을 수 있다. '식량전쟁'은 우리가 여전히 가장 기본적인 문제와 대면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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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962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백낙청 선생의 <2013년체제 만들기>(창비, 2013)을 읽고 요지를 간추린 것이다. 2013년체제의 핵심이 분단체제 극복이란 점에서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창비, 1994)와 <흔들리는 분단체제>(창비, 1998),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창비, 2009)를 잇는 책이면서 현 정세에 대한 긴급한 제언이기도 하다(표지의 이미지로는 '기원'에 가깝다).

 

 

 

주간경향(12. 02. 14) 시민 참여와 남북연합 건설 ‘포용정책 2.0’

 

총선과 대선 일정을 앞두고 있는 올해는 모두의 예상대로 한국 사회에 중요한 전환점이 될 전망이다. MB정권 4년을 보낸 국민의 선택이 과연 무엇일지 기대와 바람이 클 수밖에 없다. 문학평론가이자 시민사회 원로로서 백낙청 선생은 <2013년체제 만들기>에서 그 기대의 최대치를 ‘2013년체제’란 말에 담았다. 낡은 체제를 청산하고 한반도에서 새로운 체제가 시작되어야 한다는 바람의 표현이다. 지난 1987년 6월항쟁의 결과로 성취한 한국 사회의 전환을 ‘87년체제’라고 부른 것에 견주면 ‘2012년체제’란 말이 더 타당할 듯싶은데, 어째서 ‘2013년체제’인가? 거기엔 한국 현대사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이 반영돼 있다.

 

저자의 지론에 따르면 한국 사회는 ‘분단체제론’을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다. 남과 북의 기득권세력은 현재의 분단상황을 이용해 이득을 챙기고 대다수 남쪽의 국민과 북쪽의 인민은 그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사회구조가 ‘분단체제’다. 분단체제론의 지향점은 당연히 분단체제의 극복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87년체제의 성취는 미흡하다. 군사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진전시켰지만 남한사회에 한정된 변화였다. 물론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고 2000년에는 6·15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면서 남북관계가 부분적으로 개선됐다. 하지만 87년체제는 한반도의 온전한 평화체제 구축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분단체제, 곧 ‘53년체제’를 근본적으로 허물지는 못한 것이다. 그렇듯 53년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후천성 분단인식 결핍증후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민주화나 민주주의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고, 이명박 정부의 역주행 또한 말기 국면에 도달한 87년체제의 문제점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결과라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따라서 과제는 53년체제의 혁파이고 분단체제의 획기적인 개선이다.

 

분단체제 극복이 새로운 체제 성립의 관건이기에 2012년 총선과 대선 결과가 곧바로 새로운 체제의 수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총선에서의 승리와 대선에서의 정권교체가 남한사회 민주세력의 당면한 과제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2013년체제 설계에 다양한 항목들이 포함될 수 있지만 핵심은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이다. 저자가 2013년체제의 최우선적 과제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일이라고 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대북정책에서의 변화다. 백낙청은 6·15 공동선언을 ‘포용정책 1.0’이라고 할 때, 이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포용정책 2.0’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2.0버전의 핵심은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시민 참여의 획기적인 강화와 남북연합 건설이다. 남북연합의 경우 이미 2000년에 남북 정상이 중간과정의 국가연합 형태를 거쳐서 통일로 간다는 점에 합의했다. 현실적으론 EU보다 낮은 단계의 느슨한 연합제를 구상할 수밖에 없지만 일단 연합제가 이루어지면 통일은 역전 불가능한 과정으로 접어들 수 있으리라는 것이 저자의 기대다. 그리고 그러한 점진적 통일과정에 들어서게 되면 일반시민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민간기업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시민사회가 남북화해와 교류에 직접 나서서 남북의 평화적이고 시민참여적인 재통합에 걸맞은 준비를 해나갈 수 있게 되며, 이를 위해서 시민참여형 통일과정을 수용하는 국정운영체제가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제안이다.

 

2013년체제론의 개요가 그러하다면, 왜 ‘2012년체제’는 성립하기 어려운지 알 수 있다. 당장 이명박 정부 임기 안에는 남북관계의 획기적 개선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천안함사건 이후 2010년 5월 24일 이명박 대통령은 남북교류를 전면중단한다고 선포했고, 이 조치는 아직 철회되지 않았다. 북이 정말로 천안함을 공격했다면 5·24조치는 나름대로 정당성을 갖는다. 하지만 충분한 근거 없이, 혹은 근거를 조작해가면서 그런 조치를 취했다면 국민적 심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저자는 천안함사건의 진실규명이 2013년체제의 핵심에 자리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2013년체제 만들기’는 ‘우리 시대의 진실’을 규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12. 02. 09.

 

 

 

P.S. 어제 컴퓨터를 교체한 이후 처음 올리는 페이퍼이다. 모니터를 두 대를 놓고 쓰게 돼 뭔가 편리하긴 한데, 그래도 적응해야 할 구석이 많다! <2013년체제 만들기>와 함께 읽은 건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의 <2013년 이후>(백산서당, 2012)이다. 앞부분을 읽었는데, 386세대의 자기비판과 '성찰적 열정' 혹은 '열정적 성찰'(분명 '차분한 성찰'은 아니다)의 최대치를 보여주지 않나 싶다. 미적지근한 관망적 성찰이나 두루뭉술한 이론에 염증을 느끼는 독자라면 일독해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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