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주에 출간되는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오월의봄, 2012)의 표지를 올려놓는다. 세계문학에 대해 그간에 쓴 글들을 '세계명작 다시 읽기'와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 두 부로 나눠서 묶은 책이다. 주로 세계문학 고전에 대한 강의를 오래 해오고 있는 터여서 책은 앞으로도 여럿 더 내게 될 듯싶다.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는 일종의 출사표인 셈이다...

 

 

12. 06. 08.

 

P.S. 내주엔 서평집 <그래도 책읽기는 계속된다>(현암사, 2012)도 같이 출간된다. 시기가 서로 맞물려 아예 출간 일정을 같게 잡았다. 서평집 표지도 조만간 올려놓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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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오전에 방한중인 마이클 샌델 교수와 인터뷰를 가졌다. 한겨레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고, 비교적 많은 분량이 지면에 실리게 됐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와이즈베리, 2012) 출간이 이번 방한과 인터뷰의 계기가 됐지만 개인적으론 '공공철학자로서 샌델'이란 모습이 드러나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인터뷰에 임했다. 동행했던 최원형 기자의 정리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12. 06. 04) 마이클 샌델 “내 철학은 민주적 시민정신…”

 

‘인터넷 서평꾼’ 이현우, 마이클 샌델을 만나다

2010년 국내 출간된 마이클 샌델(59) 미국 하버드대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정치철학서로는 드물게 100만부 넘게 팔리는 등 ‘공정사회’ 담론과 맞물려 열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샌델로부터 ‘정의가 무엇인가’라는 즉각적인 대답을 얻어내려 하거나, 샌델을 보수적인 ‘공동체주의자’로 규정하는 등 그의 입장을 곡해하거나 비판하는 흐름도 적지 않았다. 지난 1일 서울 한 호텔에서 최근 새 책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들고 방한한 샌델을 ‘인터넷 서평꾼’인 이현우 한림대 연구교수가 만났다. 이번 만남은 샌델의 정체성이 더 좋은 사회를 위한 공적 토론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공공철학자’임을 새삼 확인시켜줬다. 샌델은 이날 저녁 서울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강연에도 나와 ‘팝가수 레이디 가가 공연에 암표는 허용될 수 있는가’ ‘가수 비나 축구선수 박주영이 군 복무를 면제받아야 하는가’ 등 일상생활 속의 도덕적 딜레마들을 특유의 화법으로 제시하며 1만4000여명의 청중들과 토론하기도 했다.

 

 

 

이현우(이하 이) 당신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를 놓고 한국 사회에서 뜨거운 반향이 일었다. 한국 사회에서 이 책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또 책이 한국 사회에서 수용되는 과정에 대해 우려하는 부분은 혹시 없는가? 한국 지식인층에서는 당신의 책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가 꽤 나오기도 했다. 특히 당신의 철학적 입장을 ‘공동체주의’로 생각하고 자민족중심주의나 공동체주의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을 적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마이클 샌델(이하 샌델) 오래전부터 있었던 오해다.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국내에선 <정의의 한계>로 소개됐다) 2판 서문을 통해 똑같이 공동체주의라고 불리더라도 내가 동의하지 않는 공동체주의에 대해 비판한 바 있다.

 

최근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가 국내에 소개돼 여태까지 한국에서 빚어진 오해는 조금 불식되리라 본다. 이 책에서 당신의 입장을 공동체주의와 구분짓기 위해 ‘공화주의’라는 말을 쓰기도 했는데, 당신을 ‘공화주의자’로 이해해도 좋은가?

 

샌델 그렇게 부를 수 있다. 공화주의는 시민 생활과 민주주의적 시민정신의 미덕 등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자유주의·공동체주의와 다른, 그 사이에 있는 제3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공공철학’을 강조하는 입장을 드러낸 <왜 도덕인가?>(책의 원제는 ‘공공철학’)를 쓰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익숙지 않은 개념인데, 공공철학이 무엇인지, 그 필요성이나 의의는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샌델 공공철학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포함해 나의 전체 저술에서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주제다. 철학적인 생각들을 오늘날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삶과 연결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주된 취지다. 사생활에서나 시민적 삶에서나 철학적 문제를 포함한 중요한 문제들, 곧 정의가 무엇이고 공동선이란 무엇인지, 시민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시장에서 돈의 역할은 무엇인지 등과 같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나의 모든 책을 관통하는 관심은 (삶에서) 우리가 대면하는 중요한 철학적 문제들을 활성화하고 논쟁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대학의 학자들만이 아니라 민주시민으로서 우리 모두가 관여해야 한다는 것이 공공철학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공공철학에 대한 열정은 어떤 계기로 생겼나? 철학을 처음 공부할 때부터 있었던 것인가?

 

샌델 고등학교 시절부터 토론을 좋아했다. 언제나 정치와 정치적 논의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철학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고, 대학에 와서도 철학보다는 정치, 역사, 경제 등의 영역에 관심을 가졌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부터 철학에 매혹됐고, 학위를 딴 뒤에도 정치적인 토론과 철학을 연결시키는 데 관심을 갖고 지금까지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이번 책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당신은 시장경제를 도구로서 갖고 있던 사회가 시장이 삶의 모든 영역을 잠식하게 하는 ‘시장사회’가 되어버렸다고 비판하면서 ‘불평등’과 ‘부패’의 문제를 다뤘다. 두 가지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 또 최근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벌어진 ‘점거하라’(오큐파이) 시위 운동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문제 제기로 풀이된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샌델 돈과 시장이 건강, 교육, 가족 생활, 시민 생활 등과 같은 영역에까지 확대되는 것에 대해 ‘불평등’과 ‘부패’ 두 가지 관점에 근거한 우려가 있다. 예컨대 돈을 써서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면, 돈으로 자녀를 대학에 보낼 수 없는 부모들에게는 불공정한 것이다. 그런데 이는 또한 대학 진학의 원래 의미와 목적을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부패’의 문제이기도 하다. 대학은 학문적 우수성을 추구함으로써 명예를 얻고자 하는곳이지, 경제적 수익을 추구하는 곳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공정성에 근거한 반대와, 부패에 근거한 반대를 구분해야 하는 사례를 보여준다. 우리는 고등교육에 있어 공정성뿐만 아니라 재화의 존엄성까지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점거하라’ 시위 운동은 불평등에 관한 문제제기다. 대중들은 ‘긴급구제’가 필요하다고 느끼면서도, 그들의 세금으로 월가와 은행을 구제하는 것에 대해 불공평하다고 느꼈다. 월가와 은행들은 경기가 좋을 때 엄청난 이익을 챙기고 경제 위기를 자초했는데, 그들이 일으킨 손실은 국민 세금으로 메우게 됐기 때문이다. 경제 위기가 일어난 뒤로 이런 불공평은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고, 이 문제는 아직 풀리지 못한 상태다.

 

새 책에서 경제학자들이 옹호하는 ‘인센티브’에 비판을 가했다. 주류 경제학자들의 반응은 어떤가?

 

샌델 주류 경제학자들은 경제적 효율성을 근거로 들며 내 비판에 반대한다. 그들은 시장은 중립적이어서 재화의 성격을 변화시키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경제적 효율성만이 유일한 가치는 아니며, 비시장적인 가치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텔레비전이나 자동차 같은 물질적 재화는 누군가 나에게 팔든, 선물로 주든 그 가치가 변하지 않고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 선생님과 학생, 민주적 시민들 사이의 관계, 교육이나 건강 등의 영역에는 비시장적인 가치가 있고, 여기에 시장 메커니즘을 적용하면 시장적 가치가 비시장적 가치를 밀어내게 된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

 

당신은 책 속에서 “미국의 경우 시장경제를 가진 사회에서 시장사회로 이행하는 데 30년이 걸렸고, 그건 공적토론이 약화됐던 시기와 일치한다”고 봤다. 그렇다면 그것을 다시 회복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까? 또 다시 30년 이상이 걸릴까?

 

샌델 좋은 질문이지만 답은 모르겠다. 이와 관련해 이스라엘의 어린이집 사례가 있다. 아이를 찾으러 늦게 오는 부모들을 일찍 오게 하려는 생각으로 벌금을 매겼더니, 벌금을 ‘요금’이라 생각하고 오히려 늦게 온 부모들이 더 늘어났다는 것이다. 시장적인 가치가 비시장적인 가치를 몰아낸 대표적인 경우다. 더 중요한 건, 이런 일을 겪은 뒤 벌금 제도를 폐지했지만 그 뒤로 더 많은 부모가 더 늦게 오게 됐다는 점이다. 의무감, 책임감 같은 비시장적 가치가 인센티브에 근거한 시장 메커니즘에 의해 해체·잠식·변질되면, 다시 복원시키기가 어렵다. 물론 대중은 지난 30년 동안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런 변화를 반영한 정치적인 논의도 최근 시작한 듯하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는 오직 시간만이 알 수 있다.

 

당신은 ‘시장 대 도덕’의 프레임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현재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시장을 도덕화하려는 시도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도덕적인 시장과 자본주의, 박애적 자본주의 등 ‘착한 자본주의’에 대한 논의다. 당신은 ‘시장은 도덕적일 수 없다’는 전제를 갖고 있어 이와는 입장이 다를 거라고 생각하는데….

 

샌델 그런 표현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며, 그런 견해에도 동의한다. ‘도덕적 시장’이란 말을 무슨 뜻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를 텐데, 그것이 교육, 건강, 시민·가족 생활 등의 영역에 시장이 영향을 미칠 수 없도록 제한되어야 한다는 의미라면 나의 견해와 일치한다.

 

나는 ‘도덕적 시장’이라는 것이 하나의 형용모순으로서, 애초에 가능하지 않다고 보는 입장이다.

 

샌델 나는 시장이 어디에 속하고 어디에 속하지 않은지에 대한 공적 토론이 필요하다고 본다. 또 시장이 어떤 때에 ‘공공선’(public good)에 도움이 되며, 또 어떤 때에는 비시장적인 가치를 해치는지 따져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동차, 토스터, 텔레비전과 같은 물질적 재화에 대한 수요가 있을 때에 시장은 효과적인 도구다. 그러나 건강, 교육, 인간관계, 시민·가족 생활 등의 영역에서 시장적 가치와 돈은 비시장적인 가치를 해친다. 따라서 인간 활동의 어떤 영역이 시장에 의해 바람직하게 지배되고, 어떤 영역이 시장 대신 다른 가치에 의해 지배되어야 하는 것인가 등에 대한 토론이 필요하다.

 

주류 경제학에서 말하는 인센티브에 대해선 어떻게 보는가? 인센티브가 사람을 도덕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보는가?

 

샌델 인센티브 자체로는 그렇지 않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인센티브가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일들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아이들이 책을 읽을 때마다 보상으로 돈을 주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처음에는 돈을 받기 위해 책을 읽지만, 점점 재미를 붙이면 나중엔 돈을 받지 않아도 독서를 좋아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다. 그러나 책을 읽는 것에 대한 보상으로 돈을 줄 때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겠지만, 또한 돈을 벌기 위해 책을 읽는 잘못된 습관만을 주게 될 수도 있다. 이게 내가 걱정하는 바다.

 

당신이 말하는 공적인 토론은 강의실 바깥에서도 유효한가? 미국이나 한국이나 현실 속 공론장은 왜곡되어 있기 마련이다. 미국의 경우 최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동성결혼을 지지했다가 보수파들로부터 정치적 공격을 받게 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여기에 덧붙여, 한국에서는 최근 진보정당이 내부 경선 과정의 부정·부실 의혹 때문에 많은 도덕적 비난을 사고 있다. 현실 정치에서 도덕적 가치를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을 듣고 싶다.

 

샌델 공적인 토론은 강의실 바깥에서도 물론 유효하다. 당신의 말대로 현실 정치에서는 왜곡도 생겨난다. 민주주의를 둘러싼 행위들은 지저분해질 수밖에 없다. 그걸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공적 담론을 활성화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생각을 진지하게 견지하고 동의를 구하기 위해 설득의 책임을 떠안아야 한다. 설사 그것이 왜곡될 소지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더라도 말이다.

 

한국의 상황은 잘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 민주주의 정치에서는 그 (민주적) 시스템을 남용할 위험을 안고 있다. 돈의 위력이 정치와 정치운동에서 점점 더 커져가는 것은 그런 남용의 한 사례다. 이는 미국 사회도 늘 갖고 있는 문제다. 돈의 위력이 커질수록 부패가 생기기 마련이고, 이는 민주주의적 평등의 이상과 시민들의 평등한 목소리를 왜곡시킨다.

 

공적 토론을 위한 역량을 쌓기 위해선 ‘독서’가 중요하지 않을까 한다. 마침 올해는 한국 정부가 정한 ‘독서의 해’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인의 평균 독서량은 한 달에 한 권 정도로 굉장히 낮은 수준이다. 원활한 공적 토론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독서가 필요하다고 보는가?

 

샌델 물론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것이다. 독서는 시민으로 하여금 역사와 경제, 현재 세계적인 이슈, 다른 사회 등에 대해 알게 해준다. 그런데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무엇을 읽었는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정한 민주주의 시민으로서 교육, 역사, 경제, 철학 등을 아는 것이다. (독서는) 양보다 질이다.(정리 최원형 기자)

 

12. 06.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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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978호)의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자음과모음, 2012)을 골랐는데, 생소한 이름이지만 올 상반기의 '발견'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저자다. 데뷔작 <야전과 영원 - 푸코, 라캉, 르장드르>(2008)도 소개되기를 기대한다. '르장드르'란 생소한 이름은 그의 책에서 처음 접했는데, 한국과 일본의 차이가 바로 그런 데 있지 않나 싶다. 푸코나 라캉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름이지만, 프랑스의 법제사가이자 정신분석가 르장드르는 우리에게 소개돼 있지 않다. 사사키 아타루의 글은 <사상으로서의 3.11>(그린비, 2012)에도 포함돼 있다.

 

 

 

주간경향(12. 06. 05) 문학은 혁명의 힘이다

 

여기 한권의 책이 있다.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자음과모음, 2012). 저자는 낯설고 제목은 오리무중이다(파울 첼란의 시구절이라 한다). 하지만 무심하게 책장을 펼치는 순간 자르기는커녕 책을 집어든 손이 무척이나 대견하게 여겨지는 책, 오랜만에 ‘손맛’을 느끼게 해주는 책이다. 대체 어떤 책인가. 그나마 단서가 되는 건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란 부제다. 하지만 넘겨보면 문화사가 로버트 단턴의 <책과 혁명> 같은 책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과 혁명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책읽기 자체의 혁명성을 다룬다. 저자의 주장은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이며 “읽는 것, 다시 읽는 것, 쓰는 것, 다시 쓰는 건, 이것이야말로 세계를 변혁하는 힘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그는 닷새 밤 동안 반복적으로 주장한다. 얼핏 대수롭지 않은 주장이다. 하지만 ‘책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를 ‘책을 읽어버렸다는 것’으로 다시 새기면 사정이 좀 달라진다. “맙소사, 책을 읽어버리고야 말았다!”는 느낌 말이다.


저자에 따르면 책은 본래 읽을 수가 없다. 읽으면 미쳐버리기 때문이다. 알면 미쳐버릴지도 모르는 정도가 아니면 일류의 책이라고 부를 수 없다. 따라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두려운 것이다. 그것은 광기와 함께 열광과 열락을 내포하며 독서의 즐거움은 신조차도 선망하는 어떤 것이다. 최후 심판의 날에 책을 옆구리에 끼고 온 우리를 보고서 신은 사도 베드로에게 얼굴을 돌려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라고 저자는 상상한다. “이 사람들은 보답이 필요 없어. 그들에게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사람들은 책 읽는 걸 좋아하니까.” 곧 책 읽기의 즐거움을 누리는 자들에겐 불멸의 영광도 필요치 않다!


책을 읽고 쓴다는 게 어째서 그토록 대단한가. 그 자체가 혁명이고 혁명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가령 마르틴 루터가 일으킨 대혁명은 한마디로 성서를 읽는 운동이었다. 그가 한 일은 성서를 읽고 번역하고 수없이 많은 책을 쓰는 것이었다. 루터는 이상할 정도로, 궁극에는 이상해질 정도로 철저하게 성서를 읽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세계가 그 근거이자 준거여야 할 텍스트를 따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책을 읽는 내가 미쳤거나 세상이 미쳤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닌가. 농민의 아들에 불과했던 루터지만 성서를 읽어버리는 바람에 교황의 방해자가 되었다. 자신이 읽은 라틴어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함으로써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책을 읽은 이상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고 루터는 말했다. 대천사에게서 ‘읽어라’는 계시를 받았던 무함마드도 마찬가지였다. 몇 번이나 거부했지만 그는 신에게 선택돼 읽으라는 절대명령을 받는다. 문맹이었던 무함마드가 결국 읽을 수 없는 것을 읽고 잉태한 것이 <코란>이고 그로써 이슬람 세계를 만들어낸다. 무함마드의 ‘혁명’이다. 저자가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힘이고,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난다고 거듭 주장하는 근거다.


이러한 혁명의 ‘본체’로 저자가 높이 평가하는 것은 12세기의 ‘중세 해석자 혁명’이다. 11세기말 피사의 도서관 구석에서 유스티아누스의 법전이 발견되고, 600년 가까이 망각에 묻혀 있던 이 로마법을 바탕으로 교회법을 대대적으로 다시 고쳐 쓰는 작업이 진행된다. 그렇게 해서 집성된 것이 12세 중반 교회법학자 그라티우스의 교령집이다. 이 새로운 법을 기본으로 유럽 전체를 통일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로서 ‘교회’가 성립하고 바로 이 교회가 근대국가의 원형이 된다는 설명이다. 근대국가만이 아니다. ‘준거를 명시하다’는 실증주의 역사학  또한 법학의 영향으로 발생한 것이다. 더 나아가 12세기 혁명으로 탄생한 법학이 유럽의 첫 ‘과학’이며 모든 과학의 원천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한 변화를 낳은 혁명의 실상은 사실 수수하다. 단지 중세의 수많은 신학자, 법학자들이 홀로 책장을 넘기며 법문을 고쳐 써나간 것이니까. 사사키 아타루는 그러한 혁명이 우리에게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가 보기에 철학이 끝났다거나 문학이 끝났다는 주장은 낭설이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으며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체온을 약간 상승하게 해주는 책이다.

 

12. 05. 29.

 

  

 

P.S. 아무래도 책의 압권은 '12세기 혁명'을 다룬 부분인데, 내막을 좀더 알고 싶어서 몇권의 책을 더 주문했다. 호르스트 푸어만의 <중세로의 초대>(이마고, 2003)와 자크 르 고프의 <중세의 지식인들>(동문선, 1999), 로버트 스완슨의 <12세기 르네상스>(심산, 2009) 등이다. 관련서들이 더 소개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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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976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조금 읽기 편한 책으로 고른 게 피터 매캘리스터의 <남성 퇴화 보고서>(21세기북스, 2012)인데, 생각보단 '하드'했다. 당신이 역사상 가장 못난 남성이라고 반전도 없이 몰아붙이는 책이니!..

 

 

 

주간경향(12. 05. 22) 역사상 가장 못난 현대 남성

 

“지금 이 책을 읽는 남자나 이 책을 선물로 받을 남자는 역사상 가장 ‘못난 남자’다.” 호주의 고인류학자 피터 매캘리스터가 쓴 <남성 퇴화 보고서>의 도발적인 서두다. 사실은 책 전체가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니 서두이면서 동시에 책의 결론이기도 하다. 고인류학자로서 남자를 포함한 인간 연구에 몰두해온 그가 처음부터 ‘악의적인’ 의도로 남성을 해부대에 올려놓은 건 아니었다. 고백대로라면 저자는 이전 남성과 비교해 ‘호모 매스큘리누스 모더누스’(현대의 근육질 인간)의 미덕에 대해 쓰고자 했다. 하지만 지금껏 지구를 걸어 다닌 호모 사피엔스 수컷들과의 비교과정에서 그런 미덕을 찾는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발견한다. 그의 ‘남성인류학’이 승리가 아닌 패배의 기록으로 채워진 이유다.


저자는 힘, 허세, 싸움, 운동능력, 말재주, 미모, 육아, 성적 능력, 8가지 비교 범주를 통해서 현대 남성이 과거의 조상들에 비해 얼마나 나약하며 모자란가를 조목조목 입증해나간다. 현대 남성에 대한 이토록 ‘상세하고도 굴욕적인 자료들’을 낳은 선행연구들도 놀랍고 이를 빠짐없이 참고한 저자의 집념도 혀를 내두르게 한다.

 

몇 가지만 살펴보자면, 먼저 ‘힘’에서 현대 남성은 과연 얼마만큼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까. 근육질 몸매에 대한 과도한 집착마저 보이는 현대인이지만, 고대인과의 비교 결과는 실망스럽다. 저자는 2004년 세계팔씨름연맹 챔피언으로 이두근의 둘레가 55cm나 되는 알렉세이 보에보다를 대표로 내세웠지만, 키가 153cm인 네안데르탈인 여성과의 팔씨름에서도 진다는 결과를 얻는다. 네안데르탈인 남성은 상체 근육이 여성보다 50%나 더 많다고 하니 애초에 비교 자체가 무리다. 더 굴욕적인 건 침팬지조차도 근육의 힘이 인간보다 네 배나 더 강하다는 점. 따라서 호모 사피엔스가 ‘퇴화한 유인원’의 일종이라는 주장이 무리가 아니다. 동물행동학자 데즈먼드 모리스가 일찍이 인간을 ‘털없는 원숭이’라고 명명했지만 더 정확하게는 ‘털없고 약한 원숭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자신의 용감함을 과시하려는 ‘허세’는 또 어떤가. 가령 미국 해병대에서는 교관들이 훈장 뒷면의 뾰족한 바늘로 병사들의 가슴을 찌르는 ‘블러드 피닝’(Blood Pinning)의 전통이 있고, 미국 도시 갱단의 입회식에서는 신입회원이 무차별 구타를 당하는 동안 바닥에 떨어진 동전 여섯 개를 주워야 하는 ‘공짜로 동전 줍기’ 행사를 치르기도 한다. 하지만 역시나 호모 사피엔스 남자 조상들이 겪은 고통에 비하면 애교스럽다. 선사시대 캘리포니아의 한 부족 소년들은 성인식 때 독침개미들이 우글거리는 구덩이에서 뒹군 다음 쐐기풀로 채찍질을 당해야 했다. 브라질 카야포족 남성은 맨손으로 말법집을 습격한 뒤 말벌에게 쏘이는 ‘말벌 싸움’을 평생 열 번 정도 치러야 했다. 고문과 사냥의 시련, 그리고 두개골 절개수술 같은 주제로 옮겨오면 더더욱 할 말이 없어지는 게 현대 남성이다. 고대 부족사회에서는 자신을 드러내는 방도가 무모한 고통과 위험을 감수하는 것밖에 없었다고 위안을 삼는 수밖에. 


아무래도 힘에서는 밀린다면 반대로 자상함 같은 덕목에선 승산이 좀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 또한 역부족이다. 요즘은 어린자녀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새로운 아빠’ 모델도 등장했다지만, 좋은 아빠 상은 아프리카의 아카 피그미족 남성의 몫이다. 그들은 하루 평균 12시간을 자녀와 함께 보낸다. 그리고 집에 있는 시간의 약 4분의 1 동안은 아이를 품에 안고 지내며 아예 아내와 더불어 아이를 데리고 잔다. 심지어는 아기에게 젖도 물린다. 현대 남성을 ‘부족한 아빠’로 몰아붙이기에 충분하다. 저자는 현대인이 자랑할 만한 성적 능력과 성적 자유, 금욕까지 더 비교해보지만 모두 완패다. 그래서 결국은 제목대로 ‘남성 퇴화 보고서’가 되었다. 호모 에렉투스 조상 이래로 퇴화를 거듭해온 여정, 하지만 이 ‘남자의 진실’이 저자의 소회대로 한탄스럽기만 한 건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이 ‘못난 남자’라는 걸 아는 유일한 남자일지도 모르니까.

 

12. 0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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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책&(406호)에서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가정의 달이어서 주제도 '아이와 가족'으로 잡혔다.

 

 

 

책&(12년 05월호) 아이와 가족

 

메이데이로 시작하지만 한국에서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가정은 안녕한가?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고 갈파한 이는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다. 건강하고 화목한 가정을 행복한 가정의 모습으로 쉽게 떠올릴 수 있지만 불행한 가정은 이유가 천차만별이어서 일반화하기 어렵다는 뜻이겠다. 이달에는 그 ‘가정’을 다룬 책들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나홀로 가구’, 곧 1인 가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지만, 부모가 한두 명의 자녀를 둔 핵가족이 한국사회에서 가장 흔한 가정 형태다. 따라서 가정의 행복은 많은 경우 부모와 자녀 문제로 귀결된다. 가정의 안녕을 묻기 위해선 먼저 자녀의 안녕을 물어야 하는 이유다. 우리의 자녀들은 안녕한가? 궁금하다면, 조재연 신부의 <청소년 사전>(마음의숲)부터 손에 들어볼 수 있다. ‘고길동 신부’란 이름으로 오랫동안 청소년들을 상담해온 저자가 그들의 고민과 생각을 사전 형식으로 엮은 책이다.

 

왜 ‘사전’이 필요한가? 서로가 이해하고 소통하기 위해선 말이 통해야 하는데, 각기 다른 뜻의 말을 쓴다면 소통이 가능할 리 없다. 가령 ‘부모’는 국어사전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돼 있지만 청소년들이 쓰는 의미로는 ‘자식만 욕할 수 있는, 밉고 이해 안 되는 답답한 양반들을 이르는 말’이다. 대다수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또한 표현이 좀 서툴지만 생각보다는 속 깊은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또 자주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학교폭력과 자살 문제는 어떨까. ‘학교 내에서 일어나는 일상’이 청소년이 보는 ‘학교폭력’이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일 때 선택하는 최후의 수단’이 ‘자살’이다. 학업과 진학, 보모의 이혼, 아이들의 따돌림 등 여러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능력을 갖지 못해서 그들은 자살을 유일한 해결책으로 간주한다. 당연히 필요한 것은 부모와 학교, 그리고 사회의 따뜻한 관심이다. 잘 알면서도 실천이 어려운 것인가.


문제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게 해주는 책으론 아동심리학자와 심리상담사, 전직 교사가 함께 쓴 <어른들은 잘 모르는 아이들의 숨겨진 삶>(양철북)이 있다. ‘집에서는 안 그러는데...’ 하면서 아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하는 부모라면 필독할 만하다. 일단 관점이 다르다. ‘아이’가 아니라 ‘아이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다. 즉 문제는 아이들 개개인이 아니라 아이들의 ‘사회생활’이라는 관점이다. “아이들의 사회생활은 집단과 개인, 패거리와 서열, 친구가 친구를 떠받쳐주는 진심 어린 우정의 복잡한 상호작용”이다.


아이들의 사회생활이라고 특별한가? 특별하다. 한국에서라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일주일에 최소한 30시간 이상 12년을 학교에서 보내게 되니 양적으로도 엄청난 시간이다. 이 특별한 사회생활에 잘 적응할 수 없는 아이들에겐 얼마나 길고 힘들게 느껴질지 가늠해보아야 한다. 미국의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지난 1999년에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을 소수 ‘미친’ 아이들이 저지른 우발적인 사고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들은 이 ‘사회적 잔인성’(학교폭력)에 맞서기 위한 프로그램은, 폭력이 옳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폭력을 막기 위해 나서서 무언가를 할 생각은 하지 않는 ‘방관자들’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도덕적인 학교란 도덕적인 학교가 무엇인지에 관한 논의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학교입니다”란 주장도 경청할 만하다. 

 

 


아이들의 사회생활과 학교폭력의 원인에 대해 주목했다면 그 실상에 대해서도 눈길을 돌려볼 필요가 있겠다. 캐나다 토론토 지역 청소년 아홉 명이 직접 겪은 폭력의 경험을 들려주는 <폭력은 침묵 속에 전염된다>(아일랜드)는 데이비드 월시의 <10대들의 사생활>(시공사)을 보완해줄 만한 사례집이다. 마약 복용 등의 경험은 한국 청소년들과 거리가 있지만, 캐나다 아이들의 이야기는 솔직하고 아주 생생하다. 책의 엮은이는 학교폭력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라고 말한다. “폭력은 침묵 속에 전염된다. 그리고 모두가 저항할 때 멈춘다.”


가정의 행복을 묻기 전에 자녀의 안녕을 먼저 물어야 한다고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자녀 때문에 불행한 가정도 있고, 자녀가 없어서 행복한 가정도 있겠다. 그렇다면 더 근원적인 질문은 ‘왜 굳이 아이를 가져야 하는가’일지도 모른다. <노키드>(이미지박스)의 저자 코린느 마이어 같으면 ‘아이를 낳지 말아야 하는 40가지 이유’가 있다고까지 주장하는 데 말이다. 그녀는 아이들을 위해서 20년 넘게 뼈 빠지게 일하면서 자신의 여가와 친구, 사회적 성공을 희생할 필요가 있는지 묻는다. 반대로 크리스틴 오버롤은 <우리는 왜 아이를 갖는가?>(부글북스)에서 아이를 갖는 일이 키에르케고르식의 두려움과 떨림을 동반하는 ‘신념의 비약’이긴 하지만, 생물학적 부모가 되는 것은 유전적 관계만이 아니라 심리적, 육체적, 지적, 도덕적으로 새로운 관계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기 존재를 새롭게 창조하는 기회이며 도전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행복과는 다른 기준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12. 05.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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