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시사인(257호)의 '여름의 책꽂이'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책꽂이'는 분기별 서평 코너로 일년에 한 차례 정도 이 코너에 쓰는 듯싶다. 몇 권의 후보 가운데 내가 고른 책은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부키, 2012)이다. 무더위가 겹쳐서 생각보다 힘들게 읽은 책이다. 하긴 저임금 노동의 힘겨운 실상을 다룬 책이기도 하다. <노동의 배신>은 <빈곤의 경제>(청림출판, 2002)라고 출간된 적이 있는데 원저의 2001년 초판을 옮긴 것이다. <노동의 배신>은 그 10년 뒤에 나온 2011년판을 옮긴 것으로 저자의 후기가 덧붙어 있다... 

 

 

 

시사IN(12. 08. 18) 열심히 일해도 지킬 수 없는 삶

 

국내에서는 ‘행복전도사’들을 통렬하게 비판한 <긍정의 배신>을 통해 처음 주목받은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부키, 2012)은 2001년에 출간된 저자의 대표작이다. ‘워킹 푸어 생존기’란 문구가 책의 ‘장르’를 잘 말해준다. 생물학 박사학위를 갖고 있는 저널리스트이자 사회운동가가 50대 후반의 나이에 저임금 노동의 실상을 직접 겪고 쓴 일종의 ‘체험 삶의 현장’이다. 시간당 6-7달러의 임금을 받고서 생활이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이 프로젝트의 출발점이었고 “진짜 가난한 사람들이 매일 그러듯이 수입과 지출을 맞출 수 있는지 시험해 보는 것”이 목표였다. 이를 위해 1998-2000년에 3개 도시에서 식당 웨이트리스, 호텔 객실 청소부, 요양원 보조원, 할인마트 매장 직원 등 6가지 일을 경험한다.


사실 직접 겪어보지 않아도 결론은 이미 나와 있었다. 1998년 전국노숙자연합에서는 시간당 8달러 89센트는 받아야 미국에서 평균적으로 침실이 하나 딸린 아파트에 살 수 있다고 발표했고, 한 공공정책 연구센터에서는 복지혜택을 받던 사람이 최저 생활비를 보장해주는 ‘생활임금’을 받는 일자리를 구할 확률이 97분의 1에 불과하다고 했다. 종합하면 당연히 최저임금 수준의 노동자가 수지를 맞춘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과학자적 호기심으로 전체 노동인구의 30퍼센트에 달하는 저임금 노동자들이 혹 남모르는 생존 비법이라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이 ‘무모한’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긴다


저자의 생존기 혹은 생존 투쟁기를 읽어나가면서 독자도 자연스레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일단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이는 직업이라도 ‘아무 기술도 필요 없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각 직장은 나름대로 사회를 구성하며 고유의 분위기와 위계질서, 관습, 기준 등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 고된 일이었다. 수년 동안 역기와 에어로빅으로 단련한 건강한 체질임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직장에서 돌아와 집안일까지 맡아야 했다면 포기하고 말았을 거라고 말한다.

 


문제는 생활이었다. 흔히 가난한 사람들을 돈에 쪼들리게 만드는 어떠한 사치나 낭비도 하지 않았지만 어렵게 번 임금으로는 기본적인 숙식을 해결하기에도 벅찼다. 임금은 너무 낮고 집세는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저자처럼 딸린 가족이 없는 홀몸에 건강하고 차까지 가진 형편에서도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로는 먹고살기 힘들었다. 즉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액수에 훨씬 못 미치는 돈을 받고 일하는 것이 노동의 현실이다. 풀타임으로 일하더라도 가족을 빈곤으로부터 지킬 수 없다면 ‘열심히 일하는 것’의 의미가 무색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것은 미국만의 현실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한국의 워킹 푸어를 다룬 책도 없지는 않다. 현직 기자들이 발로 쓴 <4천원 인생>(한겨레출판, 2010)도 한국판 <노동의 배신>이라 부름직한 책이다. 하지만 차이는 책이 아니라 독자에 있다. 2011년판에 부친 후기에서 에런라이크는 저임금 노동자들이 자신의 책을 많이 읽었다는 사실이 제일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책이 화제가 되면서 미국 연방정부가 최저임금을 인상하기도 했다니 책의 영향력을 짐작케 한다. 워킹 푸어에게도 가장 필요한 건 독서다.

 

12. 0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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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일어나 올림픽축구 한일전을 보고 다시 자는 바람에 늦은 아침을 먹었다. 책상에 다시 잔뜩 쌓여 있는 책들처럼 원고 일정이 빼곡한 주말이지만 포스팅도 밀려 있어서 하나라도 올려놓는다. 교보문고에서 발행하는 '사람과 책'에 이달부터 '로쟈, 고전과 만나다'를 연재하는데, 그 첫 회분이다. 두 달 전에 강의한 일도 있어서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다뤘다. 서두는 연재의 프롤로그이기도 하다. 글의 제목과 소제목은 편집부에서 붙인 것이다.

 

 

사람과 책(12년 8월호) 사랑에 대한 '혁명적인 책'

 

고전이 ‘다시 읽기’의 대상이라면 고전과의 만남은 언제나 ‘두 번째 만남’이다. 고전이 다시 읽을 만한 책, 다시 읽어야 제대로 음미할 수 있는 책을 가리킨다면, 고전과의 만남 또한 두 번째 조우를 통해서 제값의 의미를 갖는다. 설령 무심코 지나쳤던 첫 번째 만남에서 서로 아무것도 주고받지 못했을지라도 첫 번째 만남은 두 번째 만남의 조건이자 절차로서 충분하다. “그래, 예전에 한번 읽었더랬지”라는 감상적 기억과 함께 다시금 책을 손에 들기, ‘로쟈, 고전과 만나다’는 그런 기분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고전과의 두 번째 만남에 대한 제안이기도 하다. 

 

 


기억을 더듬어 맨 먼저 다시 읽어보기로 한 저자는 에리히 프롬(1900-1980)이다. 현대사상가들 가운데 드물게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였으며 국내에서도 한때 가장 높은 인지도를 자랑했던 사회심리학자. 그런 만큼 그의 저작 대부분이 소개됐고, <자유로부터의 도피>나 <소유냐 존재냐>, <사랑의 기술> 같은 대표작은 오랫동안 스테디셀러로 읽혔다. 학부시절 대학가 서점에서 그의 책들은 흔하게 접할 수 있었고, 내가 처음 읽어본 것도 삼중당문고판 <사랑의 기술>이었다. 하지만 그런 인지도와 대중성이 프롬에겐 함정이기도 했다. 너무 많이, 너무 쉽게 읽히는 사상가란 인식 때문에 ‘통속 사상가’로 폄하됐던 것이다.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나도 그의 책을 대부분 갖고 있으면서도 정작 진지하게 읽어보진 않았다. 일종의 ‘내리막 사상가’라고 할 수 있을까. 참고로 <103인의 현대사상>(민음사, 1996)에도, 우리시대 지성인 218인을 다룬 최성일의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11)에도 ‘에리히 프롬’은 빠져 있다.

 

 


그런 흐름은 여전한 듯 보이지만, 반전의 계기가 없지는 않았다. 세기가 바뀌면서 적어도 개인적으론 그런 분위기를 재고하게끔 만든 책이 몇 권 출간됐다. 하이데거 전공자인 박찬국 교수의 <에리히 프롬과의 대화>(철학과현실사, 2001)와 르네상스적 지식인 박홍규 교수의 <우리는 사랑하는가 - 에리히 프롬의 생애와 사상>(필맥, 2004)가 국내서로는 대표적이고, 프롬이 제자이자 마지막 조수였던 라이너 풍크의 <에리히 프롬과 현대성>(영림카디널, 2003), <내가 에리히 프롬에게 배운 것들>(갤리온, 2008) 등도 내가 수집한 책들이다. 이들은 한 목소리도 우리가 에리히 프롬을 여전히 읽을 필요가 있고, 그에게서 아직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랑에 대한 상식을 부순 책
그럼 프롬 읽기의 현재적 의의란 무엇인가. 가령 우리말로 20종 이상의 번역서가 나와 있는 <사랑의 기술>(문예출판사, 2006)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 제목으로는 오비디우스의 <사랑의 기술>과 같은 부류의 책으로 묶이기 쉬우나 알다시피 ‘연애의 기술’이나 ‘유혹의 기술’과는 전혀 거리가 먼 책이다. 박홍규 교수는 단도직입적으로 <사랑의 기술>이 ‘혁명적인 책’이라고 말한다. 사랑에 대한 상식을 철저히 파괴했기 때문이다. 어떤 상식인가? 사랑이란 ‘즐거운 감정’이라고 보는 상식, 그렇게 믿는 상식이다. 그런 관점에서라면, 사랑은 기술이기에 지식과 노력이 요구된다는 주장만큼 낯선 것도 드물 것이다. 실상 대부분의 현대인이 사랑이 중요하다고 믿지만 정작 배워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프롬에 따르면 이러한 태도는 세 가지 전제에서 비롯한다. 첫째, 사랑을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받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둘째, 사랑이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셋째, 사랑을 ‘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하고 ‘있는’ 지속적 상태를 혼동하는 것. 사람들은 보통 서로에 대해 ‘미쳐버리는’ 것을 열정적인 사랑의 증거로 간주하지만, 그것은 고작해야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입증할 뿐이라고 프롬은 꼬집는다.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고 다만 그 사랑의 대상을 발견하는 일이 어려울 뿐이라고 생각하거나 본질적으로 오래 지속될 수 없는 열정적 감정만을 사랑과 동일시하는 태도는 사랑의 실패로 향하는 지름길로 이끈다. 때문에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거나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사랑 또한 기술'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인간실존 문제와 관련한 사랑의 의의
여느 기술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기술 습득 과정도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이론의 습득과 실천의 습득이 그것이다. <사랑의 기술>은 물론 주로 이론적 검토에 바쳐진다(‘실습’까지 감당하려면 ‘워크북’이라도 붙어 있어야 했을 것이다!). 사랑에 대한 프롬의 이론은 인간 실존론에서 시작한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곧 사랑은 동물에게는 없고 오직 인간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다. 동물의 경우 사랑과 비슷한 것으로서 애착이 있지만 그것은 본능적 기구의 일부일 뿐이다. 반면에 인간은 비록 자연의 일부이긴 하지만 자연으로부터 벗어난 존재다. 일단 ‘낙원’에서 쫓겨난 이상, 곧 자연과의 본래적 합일에서 벗어난 이상 인간은 새로운 조화를 찾아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지만 이성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우리 자신의 고독과 분리다. 이 분리에 대한 인식은 격렬한 불안의 원천이다.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이러한 분리 상태를 극복해서 고독이라는 감옥을 떠나려는 욕구”라고 프롬은 말한다. 이 분리 상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프롬은 모든 시대, 모든 문화에서 바로 이 동일한 문제, 곧 “어떻게 자신의 개체적 생명을 초월해서 합일을 찾아내는가” 하는 문제와 직면하여 대답을 찾고자 했다고 본다. 그 대답의 기록이 곧 인간의 역사이기도 한데, 그것은 몇 가지로 간추려질 수 있다. 


가장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건 ‘도취’다. 자연과의 일체감을 회복하기 위한 방책으로 ‘진탕 마시고 떠드는 상태’에 빠질 때 우리는 잠시라도 외부 세계와의 분리감을 잊게 된다.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 성적 오르가슴 추구 등이 이러한 도취 추구의 방식이고 결과다. 하지만 도취는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절망적 노력임에도 불구하고 일시적으로만 가능하기에 결과적으로는 분리감을 더욱 증대시킨다.


도취와는 다른 방식이 집단과의 ‘일치’에 바탕을 둔 합일이다. 자신을 집단과 동일시함으로써 “내가 남들과 같고, 나 자신을 유별나게 하는 사상이나 감정을 갖고 있지 않으며, 나의 관습이나 옷이나 생각을 집단의 유형에 일치시킨다면” 나는 분리감으로부터 구제된다. 이러한 일치화 경향은 인간을 표준화하며 이는 개성의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 게다가 일치에 의한 합일은 도취만큼 강렬하거나 난폭하지 않기에 분리로 인한 불안을 진정시키기에는 불충분하다. 예술가나 직공의 ‘창조적 활동’ 역시 합일을 이루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 경우의 합일은 일반적인 모델이 되기 어렵고 인간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라는 문제점이 있다.


도취적 융합으로 이루어지는 합일, 일치에 의한 합일, 생산적 작업을 통한 합일이 모두 인간 실존의 문제에 대한 부분적인 대답에 불과하다면 가장 완전한 대답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다른 사람과의 융합의 달성으로서 ‘사랑’이다. 사랑은 “가장 기본적인 열정이고 인류를, 집단을, 가족을, 사회를 결합시키는 힘”이다. 그리하여 인간 실존의 문제와 관련하여 사랑의 의의를 프롬은 이렇게 규정한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의 능동적인 성격
프롬에게서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사랑의 능동적인 성격은 그것이 보호와 책임, 존경, 지식 등을 기본적인 요소로 포함한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사랑은 보호하고 배려한다. 사랑이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응답할 준비가 갖춰져 있다는 뜻이고, 존경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의 개성을 존중하며 그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그리고 보호와 책임, 존경은 지식에 의해 인도돼야 한다는 것이 프롬의 생각이다.


사랑의 대한 프롬의 이론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사랑의 유형학인데, 그는 가장 기본적인 사랑이 ‘형제애’라고 말한다. 성서에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고 말할 때의 사랑, 곧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이 형제애이다. 형제애 다음에 놓이는 것이 ‘모성애’이며, 사랑이란 말이 가장 일반적으로 떠올려주는 ‘성애’는 세 번째 유형이다. 그리고 ‘자기애’와 ‘신에 대한 사랑’이 사랑의 나머지 유형들이다. 프롬은 “성애는 배타적이지만 다른 사람을 통해, 전 인류를, 모든 살아 있는 자를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을 통해 우리는 인류를 사랑하게 된다는 뜻이다. <사랑의 기술> 대신에 아예 '형제애의 기술'이란 제목이 붙었더라면 책에 대한 많은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12. 0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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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지난달에 공포문학 강의에서 다룬 작품이기도 한데,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의 한 대목에 관해 적었다. 인용은 문학동네판에서 가져왔다.

 

 

 

한겨레(12. 08. 11) 히스클리프,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야지!

 

폭염에는 제목만으로도 끌리는 책이 있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이 그렇다. 고유명사로서 제목이 가리키는 것이 ‘언덕’이 아니라 ‘집’이기 때문에 음역하여 <워더링 하이츠>로 옮긴 번역본도 있지만, 죽음도 넘어선 비극적 사랑 이야기는 자연스레 ‘폭풍’을 연상시킨다. 작품에서 ‘폭풍’(워더링)은 “비바람이 몰아칠 때 이런 높은 곳이 감당해야 하는 대기의 격동”을 가리킨다. 거기에 빗대 말하자면 <폭풍의 언덕> 독자가 감당해야 하는 것은 캐서린과 히스클리프, 두 주인공의 ‘감정의 격동’이다.

 

비평가 해럴드 블룸은 <폭풍의 언덕>이 “모든 수준의 독자들을 만족시켜주는” 고전이라고 평했지만, 우리 독서 수준이 나이를 먹으면서 변화한다는 걸 고려하면 “모든 시기의 독자들을 만족시켜주는” 작품이라고 일컬어도 무방하겠다. 기억은 희미해졌지만 중학교 때 읽은 가장 강렬한 작품 중 하나였던 <폭풍의 언덕>은 이제 40대에 다시 읽으니 가장 섬뜩한 작품이라고도 여겨진다.

 

발단은 ‘폭풍의 언덕’의 주인 언쇼가 리버풀에 갔다가 고아 소년을 하나 데리고 오면서 시작된다. 그는 ‘히스클리프’라고 이름 붙인 이 아이를 두 자녀 힌들리와 캐서린보다 더 편애한다. 아들 힌들리는 히스클리프에 대한 원한을 쌓아가지만, 딸 캐서린은 그를 끔찍이도 좋아한다. 그를 못살게 굴기도 했지만, 캐서린에게 가장 큰 벌은 히스클리프와 자신을 떼어놓는 것이었다. 상황은 아버지 언쇼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반전된다. 집안 주인이 된 힌들리가 히스클리프를 하인으로 내친 것이다. 그럼에도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는 굴하지 않고 한 몸처럼 붙어 다닌다. ‘티티새 지나는 농원’의 린턴 가에 캐서린이 발을 들여놓게 되기 전까지는.

 

이웃 린턴 가의 사람들을 몰래 엿보다가 불도그에게 물려 그 집에서 몇 주간 치료를 받은 캐서린은 ‘아주 기품 있는 숙녀’가 돼 언쇼 가로 돌아온다. 그러고는 다시 만난 히스클리프에게 너무 더럽다며 타박을 준다. 그러자 히스클리프는 “더러운 건 내 맘이야. 나는 더러운 게 좋아”라고 대꾸한다. 하나였던 둘이 조신함(문명)과 야만(더러움)으로 분리되는 순간이다. 캐서린은 에드거 린턴의 청혼을 받고 승낙하면서 그 이유를 하녀 넬리에게 설명한다. “지금 같아서는 히스클리프와 결혼하면 나도 천해지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히스클리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애가 알아서는 안 돼. 넬리, 내가 그 애를 사랑하는 건 잘생겼기 때문이 아니야. 그 애가 나보다 더 나 자신이기 때문이야.”

 

 

결정적인 이 고백을 히스클리프도 엿듣는다. 하지만 그는 자신과 결혼하면 천해질 거라는 얘기까지만 듣고서 폭풍우가 치는 밤 언쇼 가를 떠난다. 캐서린의 나머지 절반의 진실, 곧 그녀가 히스클리프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하는 진실이 결국 그에겐 비밀로 남는다. 그는 ‘생김새는 거무튀튀한 집시’이지만 ‘옷차림과 행동거지는 신사’가 돼 폭풍의 언덕으로 다시 돌아와 모진 복수를 시작한다. 히스클리프의 복수는 오해의 산물일까? 그가 캐서린의 말을 끝까지 들었더라도 집을 떠났을까? <폭풍의 언덕>의 섬뜩한 교훈 하나는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12. 0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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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책&(409호)에서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주제는 '삼국지'이다. 적잖은 관련서들 가운데 몇 권을 언급했는데, 생각해보니 이중톈의 <삼국지 강의>(김영사) 등은 빼놓았다. 김구용 선생 번역의 <삼국지연의>(솔출판사)를 읽게 되면 참고하고 싶다. 관련서 가운데 <삼국지 해제>(김영사, 2003)는 절판됐다...

 

 

 

책&(12년 8월호) 삼국지의 재발견

 

고전이라면 언제라도 다시 읽어볼 만한 책, 곧 ‘다시 읽기’의 대상으로 간주되지만 예외도 없지 않다. ‘다시 읽어야 하나’를 고심하게 만드는 경우다. <나관중 삼국지> 혹은 그냥 <삼국지>라 불리는 <삼국지연의>가 대표적이지 않을까. <삼국지>에 관한 두 가지 통설만 하더라도 순진한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한쪽에서는 “<삼국지>를 읽지 않은 사람하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다른 쪽에서는 “삼국지를 세 번 이상 읽은 사람하고는 만나지도 말라!”고 말한다. 일독은 하되, 삼독은 곤란한 책? 무엇이 문제인가? <삼국지>와는 별도로 ‘<삼국지>에 관한 책’에도 눈길이 안 갈 수 없다. 과연 <삼국지>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전체적인 맥락을 알려주는 책으론 중국의 역사학자 여사면의 <삼국지를 읽다>(유유, 2012)가 요긴하다. 우리에겐 생소하지만 저자는 전목, 진인각, 진원과 함께 중국 근대 4대 역사학자로 꼽힌다 한다. 그가 쓴 유일한 대중교양서가 1940년대에 나온 <삼국지를 읽다>인데, 이 역사학의 대가가 <삼국지>에 주목한 것은 당시로서도 중국의 출판물 가운데 가장 널리 팔리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학교에서 가르쳐보니 역사에 대한 대중의 지식은 터무니없는 경우가 많았지만 유독 삼국시대에 관해서만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삼국지> 덕분이다. 다만 정사(正史)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더라도 소설인 만큼 <삼국지>에는 교정되어야 할 대목이 적잖게 들어 있다. 저자가 기존의 잘못된 관점을 바로잡는 ‘고쳐 읽기’를 시도한 이유다.

 


가령 <삼국지>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적벽대전의 진실은 무엇일까? 저자는 적벽대전 당시 조조, 유비, 손권의 형세를 자세히 짚은 다음에 적벽에서 대적한 양측의 군사력을 비교한다. 북방에서 온 조조군이 대략 20여만 명이었고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이 5만 정도 돼 대략 5대 1의 비율이었다. 하지만 남방의 연합군이 지리에 대한 숙지와 수전(水戰) 숙련도에서 앞섰고, 황개의 화공책이 가세해 조조군을 대파할 수 있었다. 비록 연합군의 승리로 돌아가긴 했지만 손권이 조조에 대항하기로 결심한 이유가 저자는 미심쩍다고 본다. 손권이 조조에게 항복했다면 당시 상황으로는 각별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고 천하도 좀 더 일찍 통일되어 분열의 재앙을 피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 역사학자의 논평이다. 


적벽대전의 자세한 진상은 김운회 교수의 <삼국지 바로 읽기>(삼인, 2004)를 통해서도 읽을 수 있다. 이 전투에 할애된 분량이 <삼국지>의 거의 10분의 1에 육박하지만 내용의 90퍼센트 이상이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하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예컨대 화공을 제안하고 이를 성공시킨 적벽대전의 실제 영웅은 주유의 부장 황개이지만 <삼국지>에서는 모든 것이 제갈량의 공으로 돌려진다. 또 적벽대전에 동원된 조조군의 수가 많아야 15만 이하였던 것으로 추정하며, 정사들의 기록으로 보건대 이 전투가 갖는 의의도 너무 과장됐다고 지적한다. 물론 삼국시대의 개막을 알린 신호탄이었던 만큼 적벽대전이 <삼국지>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필연적이다. 외교관으로서 손권을 설득한 것 정도가 제갈량의 실제 역할이었더라도 그가 모든 것을 지휘한 것처럼 꾸며서 제갈량을 빼놓은 적벽대전은 상상할 수 없게끔 만든 것도 <삼국지>의 위력이다.

 

 


<삼국지>의 위력은 동시에 <삼국지>의 위험성을 말해준다. 류짜이푸의 <쌍전>(글항아리, 2012)은 이 위험성을 본격적으로 문제 삼는다. <수호전>과 <삼국지>를 중국문학사의 문제적인 두 경전으로 비판하는 저자는 <삼국지>를 한마디로 ‘중국 권모술수의 집대성’이라고 평한다. 중국의 민간에는 어려서는 <수호전>을 읽지 말고, 나이 들어서는 <삼국지>를 읽지 말라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문학적으로는 걸작이라고 평해줄 수 있지만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는 배울 게 없는 작품, 아니 오히려 유해한 것만 배우게 되는 작품이 <삼국지>라는 뜻이겠다.

 

이미 1917년에 중국사상가 이종오는 <후흑학>에서 중국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후흑’이란 두 글자로 읽어냈는데, ‘후(厚)’란 얼굴 가죽이 유비처럼 두꺼운 자를 말하며 ‘흑(黑)’이란 조조처럼 속마음이 시커먼 자를 가리킨다. <삼국지>의 두 인물 가운데, 누가 진정한 영웅인가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곤 하지만 후흑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낯이 두꺼운 자’와 ‘속이 시커먼 자’를 두고 누가 더 나은가를 논쟁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류짜이푸는 유비를 유가적 술수의 달인으로 조조를 법가적 술수의 대가로 평가한다.


이 ‘후흑’의 대가들이 어떤 본보기가 될 수 있을까. <삼국지> 군웅들의 리더십을 다룬 신동준의 <삼국지, 군웅과 치도를 논하다>(지식산업사, 2011)는 조조를 응변(應辯)의 인물로, 유비를 가인(假仁)의 인물로 평한다. ‘난세의 간웅’으로도 불리지만 조조는 임기응변으로 난세를 넘어선 탁월한 군사전문가이자 인문주의자였다. 반면에 유비는 능력은 출중하지 못했지만 사람을 볼 줄 알았다. 겉으로는 관인(寬仁)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는 냉정한 판단력으로 뛰어난 인물을 만나면 기꺼이 자신을 낮춰 인재를 거둬들였다. 다만 조조와 같은 시대를 산 것이 그에겐 악운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12. 08. 10.

 

 

P.S. 참고로 삼국지 강의는 이중톈의 책 두 권과 함께 리둥팡의 <삼국지 교양강의>(돌베개, 2010)가 소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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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워킹 푸어에 관한 책들을 읽다가 자연스레 신빈곤층 문제를 화제로 삼게 됐다. 한동안 사라졌던 용어가 올해부터 다시 등장한 것도 새삼 눈길을 끌었다.

 

 

 

경향신문(12. 08. 10) 신빈곤층과 위기국가

 

이명박 정부 초기에 사회면에 자주 등장하다가 자취를 감춘 용어가 있다. ‘신빈곤층’이란 말이다. 2009년 2월까지만 하더라도 이 대통령 자신이 신빈곤층 문제의 대책 마련을 자주 주문했다. 안양의 보건복지종합상담센터를 찾아서 “신빈곤층의 사각지대를 찾아내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고 “신빈곤층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원과 일자리 창출”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해 3월에 들어서면서 ‘신빈곤층’이란 말은 공문서에서 ‘위기가정’으로 대체됐다. 신빈곤층이라는 말이 자칫 현 정권이 만들어낸 새로운 빈곤층을 가리키는 말로 오해될 수 있다는 염려에 따른 조처였다. 사소해보일 수 있는 사안이지만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 얼마나 꼼꼼하게 이미지를 관리하고자 애썼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은 한 인터뷰에서 신빈곤층이 행정상의 용어는 아니며 보건복지부에서는 비슷한 개념으로 ‘위기가구’란 말을 쓴다고 했다. 실직이나 소득상실 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가구를 일컫는 말이다. 그걸 갖다가 청와대에서는 약간 변용하여 ‘위기가정’이라고 했다. 정부로선 ‘가정’ 문제가 ‘빈곤’보다도 더 중차대한 관심사라는 것인데, 문제는 그렇게 ‘신빈곤층’이 ‘위기가정’으로 치환됨으로써 문제의 성격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사회적 차원의 문제가 개인과 가정의 문제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새롭게 부자가 된 계층을 ‘신흥 부유층’이라고 일컫는 것처럼 ‘신빈곤층’은 새로이 빈곤층으로 전락한 계층을 가리킨다. 한국사회에서 중요한 계기는 알다시피 1990년대 말의 금융위기와 IMF체제였다. 경제위기와 함께 중산층이 무너지고 다수가 빈곤층으로 급전직하했다. 그로 인해 기초생활보호 대상자가 아니지만 빈곤층과 다를 바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 이들을 신빈곤층이라고 부른 것이니 이 용어에 대한 현 정부의 과민반응은 얼른 납득이 되진 않는다. 차이가 없지는 않다. 재등장한 ‘신빈곤층’은 좀 더 구체적으로 정의돼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월 현대경제연구원에서 예상한 2012년의 경제동향에는 신빈곤층의 확장 전망과 함께 ‘하우스 푸어’와 ‘워킹 푸어’, ‘리타이어 푸어’를 3대 신빈곤층으로 지칭했다. ‘하우스 푸어’란 ‘집을 보유한 가난한 사람’을 뜻한다. 저금리 때 과도한 대출로 집을 마련했지만 금리인상과 주택가격 하락으로 ‘빈곤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다. ‘리타이어 푸어’란 아직 널리 쓰이는 말은 아니지만 퇴직 후에 안정적인 생계수단을 마련하지 못해 빈곤층으로 떨어진 경우다. 문제적인 건 비정규직과 저임금 직종의 확산으로 늘어난 ‘워킹 푸어’다.

 



오늘날 취업은 더 이상 빈곤탈출을 의미하지 않는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에 보면, 미국인의 94%는 풀타임으로 일하는 사람이라면 가족을 빈곤으로부터 지킬 수 있을 만큼의 임금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임금에 혹사당하는 워킹 푸어 계층은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주거비, 탁아비용, 의료보험료, 식비, 교통비, 각종 세금 같은 필수 항목에 지출할 경비도 벌지 못한다. 놀랍게도 미국 가정의 29%가 그렇다. 우리는 사정이 좀 나은가?

과거 미국에서는 부잣집 아이들도 여름방학에는 인구의 ‘나머지 반’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기 위해 인명 구조원이나 웨이트리스, 청소부 체험을 해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은 모두 진로를 위한 서머스쿨이나 전문직 인턴과정을 이수한다고. 우리에게도 친숙한 풍경이다. 빈곤층은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빈곤에 대해 말하는 것은 마치 사회적 금기처럼 돼 버렸다. 열심히 일해도 사람답게 살기 힘든 사회는 ‘위기가정’이 아니라 ‘위기사회’이고 ‘위기국가’다. 신빈곤층 문제는 우리가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지 되묻는다.

12. 08.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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