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970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홍기빈의 <살림/살이 경제학을 위하여>(지식의날개, 2012)가 서평거리다. '위하여'른 뗀 본격적인 <살림/살이 경제학>을 고대해 본다.

 

 

 

주간경향(12. 04. 10) 돈벌이 아닌 삶을 위한 경제학

 

“이 책은 지금까지 약 300년간 존재해 온 경제학을 근본적으로 대체할 새로운 경제학을 찾고자 하는, 나의 보잘 것 없지만 오래된 고민의 한 결과물이다.” <살림/살이 경제학을 위하여>의 서두이면서 저자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의 문제의식을 집약하고 있는 문장이다. 그렇다고 책이 ‘오래된 고민’의 첫 보고서는 아니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책세상, 2001)을 통해서 그는 ‘경제학의 근본적 재구성’에 대한 필요성을 주장하고 기존의 경제학이 ‘가지 않은 길’의 그림을 제시했었다. <살림/살이 경제학을 위하여>는 저자의 고민이 그간에 얼마나 더 깊어졌는가를 보여주는 중간 보고서라고 할 수 있을까.


소위 주류경제학이라고 불리면서 ‘약 300년간 존재해온 경제학’을 저자는 ‘돈벌이 경제학’이라고 부른다. ‘경제학’이란 말을 독점하고는 있지만 결코 유일무이한 경제학이 아니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를 갖고 있을 따름이다. 돈벌이 경제학에서 보는 경제란 무엇인가. “인간이 살아가면서 부닥치게 되는 여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알뜰하게 선택하는 행위”를 뜻한다. 너무도 친숙한 정의인가. 반면에 저자가 정의하는' 살림/살이 경제'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느끼게 되는 정신적·물질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유형·무형의 수단을 조달하는 행위”를 말한다. 어떤 차이인가. 어쩌면 별로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우리에게 돈벌이와 살림/살이가 서로 중첩돼 있어서다. 그것이 바로 저자가 문제적이라고 보는 대목이다. 이러한 중첩은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화’가 전면화되면서 빚어진 특수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사정은 달라진다. 그리스어 어원을 따지자면 영어 단어 ‘이코노미(economy)’는 가정을 뜻하는 ‘오이코스’와 질서나 법률을 뜻하는 ‘노모스’가 합쳐진 말이다. 말하자면 ‘집안 살림’이 경제인 것이니 오늘날의 학문분류에 따르면 ‘가정관리학’이 바로 경제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정의 살림/살이를 위한 경제행위로서 ‘오이코노미아’와 재물을 획득하기 위한 기술인 ‘크레마티스티케’를 명확하게 구별했다. 이 둘은 목적과 수단의 관계다. 곧 재물 획득 기술은 살림/살이라는 목적의 수단일 뿐이며 그것이 역전돼서는 안 된다. 이것이 유럽은 물론 이슬람에서 16세기까지 지배했던 관점이다


살림/살이라는 목적과 재물 획득이라는 수단의 관계가 역전되는 것은 대략 16세기부터이다. ‘좋은 삶’ 대신에 화폐와 연관된 ‘돈벌이’가 부의 표준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저자는 “서양 문명 및 인류의 경제 사상사에서 진정으로 중대한 단절이 벌어졌다고 한다면 이는 고대 및 중세 경제 사상의 살림/살이 경제학 패러다임과 고전파 경제학 이후에 생겨난 돈벌이 경제학 패러다임 사이에서의 단절”이라고 주장한다. 애덤 스미스 이래의 현대 경제학은 돈벌이 경제학의 체제를 무한히 확장하여 오직 돈벌이와 관련된 현상만을 ‘경제적인 것’으로 보이게끔 만들었다. 돈벌이 경제학이 가져온 폐색(閉塞)이자 맹목이다.

 

 


하지만 돈벌이 경제학이 살림/살이 경제학을 완전히 제거한 것은 아니다. 저자는 돈벌이 경제학의 지배를 거스르는 살림/살이 경제학의 면면한 흐름 또한 짚어낸다. 초기 사회주의자들에서 베블런, 폴라니 등으로 이어지는 계보다. 저자는 베블런의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나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같은 저작을 직접 번역·소개함으로써 이러한 흐름을 가시화한 바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살림/살이 경제학을 위하여>는 우리가 또 한 번의 ‘거대한 전환’, 이번에는 돈벌이 경제학에서 살림/살이 경제학으로의 전환을 필요로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무엇이 살림/살이 경제학인가? 핵심은 ‘인간 존재의 전면적 발전’이다. 잠재적 능력을 개발하지 못한다면 부란 고작 좀 비싸게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뜻할 따름이다. 인생의 목적은 돈벌이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이웃의 삶을 더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란 주장에 반대할 수 있을까. 우리는 돈벌이에만 내몰리기엔 좀 ‘비싼’ 존재다.


12. 04.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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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7일(화)부터 5주간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로쟈의 인문학 여행: 정치철학 편' 강의를 진행한다(http://www.hanter21.co.kr/jsp/huser2/educulture/educulture_view.jsp?category=academyGate8&tolclass=0002&searchword=&subj=F91170&gryear=2012&subjseq=0001&p_selmenu=01). 지난해 말에 했던 강의를 다시 개설한 것이며 커리에는 일부 변동이 있다. 한겨레에서는 대략 분기에 한번씩 강의를 하게 되는 듯하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길. 아래 커리의 책들은 '참고도서'이다.   

 

 

 

1. 4월 17일_ 정치의 몰락 이후의 정치
-강양구, 박성민, <정치의 몰락>(민음사, 2012)
-백낙청, <2013년체제 만들기>(창비, 2012)

 

 

 

2. 4월 24일_ 닥치고 정치와 99% 정치

-김어준, <닥치고 정치>(푸른숲, 2011)
-이택광, <99% 정치>(마티, 2012)

 

 

 

3. 5월 1일_ 어떤 민주주의인가
-최태욱 외,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폴리테이아, 2011)
-소준섭, <직접 민주주의를 허하라>(서해문집, 2011)

 

 

 

4. 5월 8일_ 국가란 무엇인가

-플라톤, <국가>(서광사,1997)
-미셀 팽송 외, <부자들의 대통령>(프리뷰, 2012)

 

 

 

5. 5월 15일_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2010)
-마이클 샌델, <정의의 한계>(멜론, 2012)

 

12. 0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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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968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한병철의 <피로사회>(문학과지성사, 2012)를 간추리고 간단한 독후감을 보탰다. '피로사회'란 말의 의미가 선입견과는 다르기에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우리가 '성과사회'에서 자발적인 자기착취를 통해 느끼는 피로감은 '피로사회'가 아닌 '피로한 사회'의 피로감이다('피로한 사회'는 저자의 용어가 아니다). 혹은 '피곤사회'라고 할까?..

 

 

 

주간경향(12. 03. 27)스스로를 착취하는 ‘성과사회’

 

‘독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문화비평가 중 한 사람’의 저작이 소개됐다. 뜻밖에도 재독 한국인 철학자 한병철의 <피로사회>다. 작년에 먼저 나온 <권력이란 무엇인가>(문학과지성사)를 통해서 처음 소개된 저자는 한국에서 금속공학을 공부하고 독일로 건너가 철학으로 박사학위와 교수 자격을 취득한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독일에서 2010년에 출간된 <피로사회>는 그의 대표작으로 주요 언론의 호평을 받으며 베스트셀러가 됐고 ‘피로사회’란 말은 독일에서 아예 상용어가 됐다. 무엇이 그러한 반향을 불러온 것인가.

 

Müdigkeitsgesellschaft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독일의 독자들이 “성과사회의 주체가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으며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라는 이 책의 테제에 주목하고 공감한 것으로 본다. 과거 규율사회가 타자 착취 사회였다면 신자유주적 자본주의는 자기 착취 사회다. 이 새로운 21세기 사회를 그는 ‘성과사회’라고 부른다. 규율사회와 산업사회에 대한 분석과 철학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발적 착취가 이루어지는 성과사회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 저자의 문제의식이다.

 

규율사회의 지배적 공간이 병원과 정신병자 수용소, 감옥, 병영, 공장 등이었다면 성과사회는 피트니스 클럽, 오피스빌딩, 은행, 공항, 쇼핑몰, 유전자 실험실 등의 공간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지배적 공간의 변화는 사회 구성원들 또한 변모시킨다. 이들은 더 이상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로서 각자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다. 곧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자기경영’이 성과사회의 패러다임이다. 규율사회가 부정성의 사회로서 여전히 ‘~해서는 안 된다’라는 금지를 통해 사회를 규제하고자 한다면 성과사회는 긍정성을 동력으로 한다.

 

‘나는 해야만 한다’는 당위가 아니라 ‘나는 할 수 있다’는 능력이 성과사회를 이끄는 긍정의 도식이다. 물론 핵심은 이러한 성과주체가 복종적 주체보다 더 빠르고 더 생산적이라는 점이다. 성과주체는 분명 외적인 지배와 착취로부터 자유롭다. 그는 자신의 주인이면서 주권자이다. 하지만 그는 이 자유를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서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내맡긴다. 그리하여 성과 제고를 위한 과다한 노동은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게 된다. 자기 자신이 착취자이면서 동시에 피착취자인 처지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자유에서 새로운 강제가 발생한다는 게 자유의 역설이고 변증법이다.  

 

물론 성과사회에 대한 진단과 성과주체의 발견이 전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다. 국내에서는 이미 서동진의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돌베개)를 통해서 ‘자기계발하는 주체’가 신자유주의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탄생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읽을 수 있었다. ‘자유의 의지’가 곧 자기를 구속하는 ‘자기계발의 의지’로 전화된다는 게 저자의 문제의식이었다. 그때 자유의 의지가 갖는 부정적 역설은 성과주체가 맞닥뜨리게 되는 자기 착취의 역설과 다르지 않다.

 

<피로사회>가 ‘문화비평’으로서 갖는 강점은 사회적 진단을 병리학적 시각을 통해서 조명한다는 데 있다. 저자는 지난 20세기를 안과 밖, 친구와 적, 나와 남 사이의 경계 구분을 문제 삼았던 ‘면역학적 시대’로 규정한다. 면역학적 행동의 본질은 공격과 방어이며 이 패러다임은 철저하게 냉전의 어휘와 군사적인 장치를 통해 기술될 수 있었다. 반면에 오늘날 이질성과 타자성은 점점 지워지고 있다. 오히려 21세기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건 우울증과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과 같은 신경성질환들이다. 가령 우울증은 오늘날 성과주체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낄 때 발생한다.

 

물론 그러한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곧 자발적 착취의 병리적 결과로서의 우울증은 긍정성 과잉사회에 고유한 질병이다. 우리는 이 ‘우울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저자는 탈진의 피로와는 대조되는 무위의 피로, ‘근본적 피로’를 대안으로 암시한다. 그것은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막간의 시간’을 가능케 하는 피로다. 성과사회 이후에 도래할 ‘오순절-사회’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피로사회’다.

 

12. 0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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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한겨레 토요판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몇 곳의 조사를 교정했다). 최근에 <햄릿>을 다시 읽을 기회가 있어서 <햄릿>(동인, 2007)에 대해 적었다. 제1사절판(1603) 번역본이다.

 

 

한겨레(12. 03. 16) 햄릿 엄마의 근친상간 그것이 문제로다

 

세계문학의 대명사가 셰익스피어라면, <햄릿>은 셰익스피어 문학의 대명사다. <햄릿>만큼 널리 알려지고 그만큼 많이 읽히는 작품도 드물다. 놀라운 건 그만큼 난해한 작품도 드물다는 점이다. 이 난해함은 주로 부왕의 죽음에 대한 햄릿의 복수가 어째서 지연되는지 모호하기 때문에 빚어진다. 그래서 ‘복수극’보다는 ‘복수 지연극’으로 분류하는 게 더 적합하다. 이렇게 복수가 지연되기에 종결이 늦춰지고 극의 분량도 당연히 길어진다. <햄릿>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가운데 가장 분량이 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아무리 걸작이라고 해도 너무 긴 거 아닌가란 의문이 제기될 정도다. 전막을 그대로 공연하면 4시간이 넘어가는데, 이것은 셰익스피어 시대 연극의 통상적인 상연시간의 두배에 가깝다. 자연스레 갖게 되는 질문. 정말 그대로 공연됐을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햄릿> 판본사가 그걸 말해준다.

 

 


<햄릿>은 통상 1604년에 출간된 제2사절판과 사후에 나온 제1이절판을 절충하여 편집한다. 문제는 가장 먼저 1603년에 나온 제1사절판이다. 이것은 셰익스피어가 썼을 자필원고를 짧게 줄여 재구성했거나 출연 배우 몇 명이 기억을 되살려 만든 공연본이라는 게 학자들의 생각이다. 놀랍게도 이 판본의 분량은 다른 판본들의 절반밖에 되지 않으며 공연시간도 2시간 남짓이면 충분하다. 그래서 ‘순회공연용’이었을 것으로도 추정되지만, 많은 오자와 함께 중요한 독백들이 생략돼 오랫동안 ‘저질 사절판’으로 평가절하돼 왔다. 다수의 <햄릿> 번역본들이 출간돼 있지만 이 제1사절판의 번역은 한 종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이 ‘짧은 <햄릿>’의 미덕이 배우들에게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간추린 <햄릿>’이기도 하다면 <햄릿>의 핵심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판본들과는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5막의 구성 대신에 17장으로 구성된 이 판본의 두드러진 차이점은 더 젊어진 햄릿의 나이와 함께 어머니 거트리드(다른 판본에서는 ‘거트루드’)의 태도다. 아버지가 죽자 곧바로 숙부와 재혼한 어머니의 침소에 찾아간 햄릿은 어머니의 행실을 비난하면서 동시에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아들 햄릿의 계획이 무엇이든 돕겠다고 맹세하는 거트리드의 모습은 다른 판본들에서 찾아볼 수 없는 면이다.

 



물론 모든 판본들에서 일관되게 유지되는 것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부왕 햄릿과 숙부 클로디어스에 대한 비교다. 첫번째 독백에서부터 햄릿은 두 사람을 비교한다. “내 아버지의 동생? 전혀 닮지도 않았어, 나와 헤라클레스가 다른 것보다도 훨씬 더.” 즉 숙부가 아버지와 닮았다면 나는 헤라클레스겠다, 라는 식이다. 어머니의 침소 장면에서도 햄릿은 다시금 두 사람을 들먹인다. 군신 마르스와도 같았던 부왕의 모습과 “살인자, 강간범에 딱 어울릴 상판대기”의 숙부가 비교대상이라도 되느냐는 게 햄릿의 불만이다. 그래서 다그친다. “거지발싸개 같은 왕 때문에 진짜 군주의 풍모를 지닌 분을 저버려요?”

 



곧 햄릿에게 난해하기 짝이 없는 수수께끼는 어머니의 욕망이다. 어머니는 무슨 생각으로 ‘남자 중의 남자’ 대신에 고작 ‘사형집행인’ 같은 얼굴의 남자와 근친상간의 쾌락에 빠진 것일까. 이 물음이 풀리지 않는다면 <햄릿> 또한 막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12. 0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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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오늘 낮까지도 감기 때문에 썩 좋은 컨디션이 아니어서 오후 늦게 고육지책으로 보낸 원고이다. 읽고 있는 책 중의 하나인 슬라보예 지젝 인터뷰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궁리, 2012)에서 칼럼의 꼬투리를 잡았다.

 

 

 

경향신문(12. 03. 15) [문화와 세상]독서가 기본과 상식인 사회로

 

2012년은 정부가 정한 ‘독서의 해’이다. 책을 읽고 평하거나 책에 대해 강의하는 일이 주업이기에 나로선 환영해야 마땅하지만 ‘독서의 해’란 말을 들었을 때의 기분은 묘했다. ‘선의’야 명확하다. 오죽하면 정부가 나서서 책을 읽자는 캠페인까지 벌이겠는가. 그럴 만큼 한국인은 책을 안 읽기로 유명하다. 지난 2010년의 한 조사에 따르면 세계 30개국 가운데 꼴찌였다. 한국인의 독서량은 한 달 평균 1권 정도인데, 그것도 학생들의 독서량이 성인 독서량을 보충해주어서 그렇다. 성인만 기준으로 하자면 한 달에 책 한권도 읽지 않는 게 우리의 독서문화다.

지난주에 나온 책 가운데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인터뷰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읽다 보니 한 사회의 윤리적 수준을 언급한 대목이 나온다. 그것을 측정하는 척도 문제다. 지젝은 성문화될 필요도 없는 원칙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사회인가 아닌가를 척도로 들었다. 예컨대 중국의 식당에는 “바닥에 침을 뱉지 마시오. 음식을 버리지 마시오” 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유럽의 식당에는 그런 게 없다.

 

어떤 차이인가? 그런 정도의 기본 에티켓은 따로 강조할 필요가 없는 사회가 한쪽에 있다면, 다른 쪽에는 비록 상식일지라도 끊임없이 주의를 환기시켜야 하는 사회가 있다. 당연히 지켜지는 상식이라면 강요받을 필요가 없으며 굳이 덕목으로 치켜세울 이유도 없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 한 사회의 ‘윤리적 표준’이다.

 

모든 사회는 각자의 윤리적 표준을 갖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수준이다. 지젝은 ‘정상적인 사회’의 수준을 이렇게 말한다. 만약에 누군가가 “강간을 하고 싶어”라고 말했을 때 그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사회가 아니라 “정신 나갔어?”라며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는 사회라고. 예의를 차려서 대응할 가치가 없는 일에 대해서는 대꾸하지 않는 것이 수준을 깎아내리지 않는 행동이고 품위를 지키는 처신이다. 물론 식당 바닥에 침을 뱉지 않는다고 해서, 강간범과는 상종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곧바로 높은 수준의 윤리적 표준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정치의 윤리적 표준은 무엇일까. 총선을 앞둔 각 정당의 후보자 공천작업이 마무리단계에 접어들고 있는 가운데, 새누리당의 공천취소 사례가 눈길을 끈다. 강남갑과 강남을에 내정됐던 박상일, 이영조 후보의 공천이 두 사람의 역사관이 구설에 오르면서 전격적으로 취소됐기 때문이다. 이영조 후보는 2010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 시절 발표한 영어논문에서 제주 4·3사건과 5·18민주화운동을 ‘폭동’과 ‘반란’이라고 표현한 게 문제가 됐고, 박상일 후보는 자신의 책에서 항일독립군을 ‘소규모 테러단체’라고 기술한 게 문제가 됐다.

잠시나마 놀라운 것은 이런 공천취소 사유가 현 이명박 정부에서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사안이라는 점이다. 그만큼 현 정부에 들어서 우리 사회의 윤리적 표준은 추락할 대로 추락한 상태다. 여론과 민심에는 귀를 틀어막고 ‘고소영’ 인사와 회전문 인사로 시종일관했던 ‘가카’의 스타일과 매번 위법과 탈법 시비로 얼룩졌던 지난 4년간의 인사청문회 장면을 돌이켜보면 격세지감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독서의 해’를 선정하는 사회보다 더 나은 사회는 독서가 기본과 상식인 사회, 그래서 굳이 “제발 책을 좀 읽으시오”라고 광고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다. 마찬가지로 논쟁거리도 되지 않을 일이 논쟁이 되는 사회보다는 그런 일이 아예 뉴스거리도 되지 않는 사회가 더 낫다. 우리 사회의 표준을 좀 더 높여보는 것은 어떨까.

12. 03. 15.

 

 

P.S. 아직 완독한 건 아니지만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에서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북한에 관한 대목이다. 북한 영화에 대한 지식과 북한 관련서에 대한 지젝의 독서가 놀라운데, 그는 <불가사리>(1985)와 <한 녀학생의 일기>(2006) 같은 영화 외에도 김정일의 영화론 <영화의 기술에 대하여>(2001)까지 참조한다(북한에 대해서 정작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무슨 책인가 싶어 찾아봤더니 알라딘에선 뜨지 않는다. 이 책에 대한 지젝의 평은 이렇다.

저는 김정일이 쓴 <영화의 기술에 대하여>란 책을 갖고 있기도 한데요. 이는 정치적인 구호들을 상투적인 일상어들과 혼용하여 아주 훌륭하게 기술한 책입니다. 그의 아버지 김일성이 얼마나 큰 영감을 주었는지, 혹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 등과 같은 정치적인 맥락에서 글을 쓰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지극히 상식적으로 실질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지요. 영화를 제작하기 전, 시간 낭비를 방지하기 위해 배우들을 잘 훈련시켜야 한다는 등의 정보도 함께 있어요. 아주 재미있습니다. 저는 정치적인 구호들을 통상적인 말들과 섞어놓은 책을 좋아하거든요.(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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