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책&(404호)에 실은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3월에는 독서법에 관한 책들을 몇권 골랐다. 올해가 '독서의 해'라고 하는 만큼 맘잡고 책을 손에 드는 인구가 더 많아지길 기대한다. 관련서들의 이미지도 같이 골라놓는다.

 

 

 

책&(12년 3월호) 독서법

 

3월이고 새 학기다. 새로 진학하거나 한 학년 올라간 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학교를 오래 전에 졸업한 이들에게도 3월은 공부에 대한 의욕을 부추기고 독서를 자극하는 달이다.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조병화)는 시구도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분의 말씀’은 ‘항상 봄처럼 부지런히 책을 읽어라’로 새겨도 좋겠다. 꽃눈이 틔는 소리 들리고 봄을 맞는 마음은 저절로 분주하다. 하지만 분주함만으로 뭔가 이루기는 어렵다. 분주함에 덧붙여 마음의 갈피를 잘 잡는 일이 중요하다. ‘닥치고 독서’도 한 방법이긴 하지만 독서에도 ‘길’은 있다. 물론 먼저 걸어간 이들이 낸 길이다. 그들은 무슨 책을 어떻게 읽었을까?  


김영수의 <현자들의 평생공부법>(역사의아침, 2011)을 머리에 둘 만하다. <사기> 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저자가 “독서가 나와 사회의 격과 질을 결정한다”는 생각으로 중국 현자들의 공부법을 소개한다. 그가 꼽은 ‘현자들’의 첫머리에는 물론 공자가 자리한다. “배우고 수시로 복습하라(學而時習)”는 것이 공자 공부론의 요체다. 여기서 ‘복습하라’는 말을 저자는 공부의 목적과 연관 짓는다. 독서만을 위한 독서가 아니라 현실에 응용할 수 있는 공부여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시경> 300편을 다 외워도 정치를 맡기면 처리하지 못하고, 사방 여러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이 외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는 게 ‘공자님 말씀’이었다. 더불어 공자는 공부와 생각의 균형을 강조했다.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어록은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지 않은지.

 

 

 

저자는 공자와 맹자에서 루신(노신)과 마오쩌둥(모택동)에 이르는 중국사의 걸출한 현자 10인의 공부법을 소개하면서 동시에 일화들도 곁들이는데, 그중 책과 공부를 좋아하는 바람에 독서인들이 치른 대가가 흥미롭다. 서한 시대 광형은 가난한 농가출신이었지만 책을 너무도 좋아했다. 그래서 책이 많은 부잣집을 찾아가 품값 없이 일을 해주는 조건으로 그 집의 책을 읽었다. 그는 당대에 비교할 자가 없을 만한 큰 학자가 됐다. 또 남조 시대 유협은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대학자인데 학문에 매진하기 위해 결혼도 마다하고 아예 절간에 가서 스님들과 살았다. 그의 <문심조룡>은 그렇게 하여 나온 저작이다. 또 후위의 가사백이란 인물은 학비를 제 때 내지 못해 스승 음봉에게 온갖 모욕을 당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중에 관리가 된 그는 스승에게 비단 100필을 보냈다고. 진(晉)나라의 왕환은 아내의 닦달에도 불구하고 굶어죽을지언정 책을 내다팔 수는 없다며 고집스레 공부하여 결국 높은 벼슬까지 지냈다. 독서인들이 치른 대가는 이제나저제나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밥은 하루 안 먹어도 괜찮고 잠은 하루 안 자도 되지만 책은 단 하루도 안 읽으면 안 된다”는 어록은 누구의 것일까. 바로 ‘독서광’ 마오쩌둥이다. 마오의 독서법은 두 가지로 압축되는데, 세 번 반복해 읽고 네 번 익히라는 ‘삼복사온(三復四溫)’과 ‘붓을 움직이지 않는 독서는 독서가 아니다’를 요체로 하는 ‘사다(四多)’가 그것이다. ‘사다’란 많이 읽기(多讀), 많이 쓰기(多寫), 많이 생각하기(多想), 많이 묻기(多聞)를 말한다. 공부와 독서에 혁명만큼 열정적이었던 마오의 독서법에 관해서 중국에서는 전문서도 여럿 출간됐다고 하는데, 그중 측근참모들이 쓴 <마오의 독서생활>(글항아리, 2011)이 국내에도 번역됐다. <현자들의 평생공부법> 가운데 ‘모택동편’의 깊이 읽기라고 할까.

 

 

 

마오가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작을 탐독한 건 당연해보이지만 루쉰에 대한 열독은 눈길을 근다. 그는 <아Q정전>을 높이 평가했고 특히 루쉰의 잡문을 애독했다. 루쉰은 무려 600여 편의 잡문을 썼고 16권의 잡문집을 출간했는데, 마오는 이를 매우 공들여 읽고 자신의 사색으로 발전시켰다. “루쉰은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이며 철저한 유물론자이다”라는 게 루쉰에 대한 그의 평가였다. ‘공부하는 사람이 세상을 움직인다’는 말을 마오만큼 잘 입증해주는 인물도 드물 것이다.

 

 


공부와 독서의 멘토를 물론 중국에서만, 그리고 과거에서만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홍상진의 <그들은 어떻게 읽었을까>(북포스, 2012)는 한비야에서 안철수, 구본형까지 ‘우리시대 10인 멘토’가 어떤 책을 읽고 어떻게 자신의 삶을 바꿔나갔는지 살펴본 책이다. 저자는 그들의 독서편력과 습관을 소개하면서 한비야의 글쓰기 비결이 일기 쓰기와 메모 습관에 있다는 점, 문화사학자 신정일이 만난 최고의 책이 도스토옙스키 전집이라는 점, 그리고 안철수가 정독주의자라는 점 등을 알려준다. 물론 모두의 공통점은 그들의 성공인생의 바탕에 독서의 힘이 놓여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시대의 독서가 23인과의 인터뷰를 묶은 장동석의  <살아있는 도서관>(현암사, 2012)도 ‘그들은 어떻게 읽었을까’를 엿보게 하는 유익한 자료다. 물리학자 장회익 교수의 조언은 이렇다. “좋은 책도 있고 나쁜 책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현재 나에게 맞는 책이냐 아니냐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12. 03.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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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966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에린 올린 라이트의 <리얼 유토피아>(들녘, 2012)가 서평감이다. 전작인 <계급론>(한울, 2005)과 마찬가지로 학술적인 성격이 강한 책이긴 하지만, 문제의식과 제안은 '진지하게' 공유할 만하다. 

 

 

 

주간경향(12. 03. 13) '현실적으로 가능한 유토피아'를 꿈꾼다

 

미국의 사회학자 에릭 올린 라이트의 <리얼 유토피아>는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유토피스틱스>(창비)를 떠올리게 한다. ‘유토피아’란 말 때문인데 ‘유토피스틱스’는 유토피아를 모색하는 학문 활동을 가리키는 월러스틴의 신조어였다. 지난 세기말에 나온 이 책에서 월러스틴은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더 이상 정상적인 작동을 지속할 수 없는 시점에 와 있으며, 이에 따라 다른 사회체제, 진정으로 민주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가라앉아 있던 유토피아적 상상력을 다시금 가동해야 한다는 제안이기도 했다. 

 
아니 굳이 월러스틴의 제안이라고 한정할 필요는 없겠다. 소련의 몰락 이후 전향하지 않은 좌파에게는 자본주의의 대안에 대한 새로운 전망이 필요했다. 그리고 1970년대부터 줄곧 마르크스주의적 계급 분석을 진행해온 라이트는 이미 1990년대초부터 ‘리얼 유토피아 프로젝트’를 지휘하며 사회변혁의 이론을 모색해왔다. 역사적 사회주의는 실패하고 자본주의 또한 더 이상 지속가능한 체제가 아니라면 ‘현실적으로 가능한 유토피아’는 어떻게 그려질 수 있을까. 라이트가 지향하는 사회, 그가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자 하는 사회는 한마디로 ‘급진 민주평등주의적 대안사회’다. 기본 발상은 사회주의에서 ‘사회적’이란 말을 진지하게 취급해보자는 것이었다. 거기서 ‘진지하게’란 말은 ‘실제 현실에 맞게’란 뜻을 함축한다.


라이트가 구상하는 해방이론으로서 급진 민주평등주의는 사회정의와 정치정의라는 두 가지 조건의 충족을 지향한다.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데 필요한 물질적·사회적 수단에 대해 대체로 평등한 접근권을 가져야 한다는 게 사회정의의 조건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 유의미하게 참여하는 데 필요한 수단에 대해 대체로 평등한 접근권을 가져야 한다는 게 정치정의의 조건이다. 핵심은 ‘평등한 접근권’에 있다. 그것은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령 똑같은 승리의 확률을 갖는 공정한 추첨은 평등한 기회는 보장하겠지만 평등한 접근권이란 기준에는 미달한다. 우리의 대학입시제도 같은 걸 떠올려보면 되겠다. 똑같은 시험을 치른다는 점에선 공정하지만 입시성적만으로 서열화된 대학에 입학하고 학벌사회에서 평생 차별적 대우를 받는다면 정의로운 사회라고 말할 수 없다. 번영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조건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평생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급진 평등주의적 사회정의관이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동일한 물질적 생활수준을 누리고 같이 번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그런 접근이 차단돼서는 안 된다는 것뿐이다.

 

 


정치정의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은 정치 참여수단에 대해 평등한 법률적 접근권을 가져야 하고, 더 나아가 그들의 운명을 집단적으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민주주의의 권력이 강화되어야 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이런 확장적 이해가 급진 민주주의의 요체다. 이 두 가지, 곧 급진 평등주의적 사회정의관과 급진 민주적 정치권력관을 합친 말이 ‘민주평등주의’다. 자본주의가 비판의 도마에 오르는 것은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계급관계와 경제조정 메커니즘이 이 급진적 민주평등주의 사회 실현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이트는 국가와 경제, 시민사회라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세 영역에서 사회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리얼 유토피아’의 밑그림이다. 중요한 것은 이 밑그림이 책상머리에서만 그려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브라질 남동부의 도시 포르토 알레그레 시의 시민참여형 예산 입안제도는 직접 민주주의의 진일보한 사례이며, 위키피디아는 인터넷의 반자본주의적 잠재력을 극대화한 예이다. 사회권력이 자본주의 경제권력을 통제하는 ‘사회적 자본주의’의 다양한 사례도 ‘현실 유토피아’의 유효한 수단이다. 거기에 더 보태져야 하는 것은 물론 우리의 의지이고 결단이다.

 

12. 03.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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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964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강양구, 박성민의 <정치의 몰락>(민음사, 2012)이 글감이다. 곧 다가올 선거철을 맞아 베테랑 정치 컨설턴트가 보는 '정치판'이 어떤 것인지 귀동냥을 해봐도 좋겠다. 개인적으론 백낙청 교수의 <2013년체제 만들기>(창비, 2012) 연장선상에서 읽은 책인데, 박성민의 '75퍼센트 민주주의'는 분류하자면 '2012년체제 만들기'에 해당한다.

 

 

 

주간경향(12. 02. 22) ‘75% 민주주의’로의 변화

 

프레시안의 강양구 기자가 묻고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이 답한 <정치의 몰락>은 비슷한 형식의 책 두 권을 먼저 생각나게 한다. 오연호가 묻고 조국이 답한 <진보집권플랜>(오마이북)과 지승호가 묻고 엮은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푸른숲)가 그것이다. 앞에 나온 두 권이 뚜렷하게 진보집권과 진보정치운동을 지향한다면 <정치의 몰락>은 좀 더 객관적으로 2012년 한국정치를 진단하고 전망한다. 한국정치,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정치의 몰락’이라는 제목과 ‘누가 정치를 죽였는가?’라고 묻는 서문은 사실 책의 핵심을 잘 짚어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두 저자가 나눈 대화의 얼개는 오히려 ‘보수시대의 종언과 새로운 권력의 탄생’이란 부제에서 더 잘 드러난다. 즉 ‘종언과 탄생’이 ‘한국의 대표 정치 컨설턴트’가 지금의 한국정치를 보는 프레임이다. 하지만 그 종언과 탄생 사이에는 약간의 간극이 있다. 한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시대가 바로 도래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조금 희망적으로 보자면 지금은 새로운 시대의 ‘전야’이다. 지난해 10월 26일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박원순 후보가 당선된 것은 어쩌면 한국정치사의 ‘변곡점’으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지난 60여년간 유지되어온 보수 우위의 시대가 끝나고 보수와 진보가 전략적으로 대치하는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는 신호탄”일 수 있다. 물론 부정적으로 보자면 ‘진정한 어둠’을 아직 남겨놓은 ‘시대의 마지막 밤’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갈래 길의 선택권이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이 ‘우리’는 세대적 의의를 갖는 우리다.

 

박성민은 한국 현대사의 60년을 20년 단위의 시대적 흐름으로 분할하여 간추린다. 먼저 1950~1960년대는 ‘생존에 대한 회의’가 지배한 시대였다.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고 이산가족이 됐다. 살아남는 것만이 삶의 목표가 된 ‘실존의 시대’였기에 모두가 의지할 곳을 찾았고, 한국 교회는 유례없이 성장했다.

 

1970~1980년대는 ‘국가권력에 대한 회의’가 지배한 시대였다. 독재권력에 대한 항거가 결국엔 1987년 6월항쟁을 끌어낸 ‘민주의 시대’였다. 냉전의 종식과 함께 시작된 1990~2000년대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연대였고, ‘진보에 대한 회의’가 시대정신를 잠식한 ‘자유의 시대’였다. 이 시기에 한국사회의 주도권은 ‘안보 보수’에서 ‘시장 보수’로 넘어갔고, 그 정점이 2007년 CEO 출신 이명박의 대통령 당선이다. 그러나 2008년 전 세계를 강타한 금융위기는 ‘시장에 대한 회의’를 촉발했다. ‘정의’가 사회적 화두로 등장했고, 정부까지 나서서 ‘공정사회’를 국정지표로 내세우게 됐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공화의 시대’라는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 도달했다. 혼자만의 자유와 부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연대와 공동체의 안녕에도 관심을 갖게 된 시대다. 우리는 이 새로운 시대정신에 걸맞은 정치적 주체로 재탄생할 수 있을까.

 

새로운 주체의 탄생과 나란히 가야 하는 것은 정치제도의 변화다. 정치의 본질이란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고, 또 “촛불보다는 투표가 힘이 세고, 투표보다는 제도가 힘이 세다”고 믿는 저자는 갈등을 조정하는 가장 유력한 방식이 대화와 타협이라고 본다. 그런데 51%만을 확보하면 모든 것을 장악하는 다수결 방식은 한국사회에서 동의와 승복을 얻어내기 어렵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75% 민주주의’이다.

 

한국사회는 적어도 75%가 동의하는 일에는 승복하는 문화를 갖고 있기에 정치제도 또한 그런 방향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제안이다. 결선투표제를 도입하여 과반수의 지지를 받는 대통령이 탄생하게끔 하고 선거제를 현행 소선거구제에서 중대선구제로 바꾸는 것이 75% 민주주의의 실현방안이다. 또한 국회의원의 임기도 아예 2년으로 줄여서 선거를 더 자주 치르는 것이 한국정치를 더욱 역동적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베테랑 정치 컨설턴트가 새로운 권력의 탄생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가역적(非可逆的) 시스템으로서 새로운 제도의 창출이다.

 

12. 0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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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이번에 다룬 건 <시경>이다. 번역서와 관련서를 관심을 갖고 모으고 있는데 분량이 분량인지라 천천히 읽을 작정이다. 관련서 가운데는 정약용의 <역주 시경강의>(사암, 2008)도 있다. 5권짜리인데, 두껍고 비싼 책이다. 결정적으론 2권만 품절된 상태다(그래서 보류중이다). 수집가에겐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책이니 아쉽다... 

 

 

 

한겨레(12. 02. 18) 시경이 고답적이란 건 편견이었네

 

올해의 독서목표 중 하나는 <시경>을 읽는 것이다. 중문학은 아닐지언정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고 적잖은 시집을 읽었지만 <시경>은 한번도 읽어볼 생각을 못했다. 돌이켜 보면 좀 기이한 노릇인데, 아마도 ‘경’(經)이란 말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삼경’으로 묶이는 <서경>과 <역경> 또한 손에 들지 않았던 걸 보아도 그렇다. ‘사서삼경’이란 말이 풍기는 고답적 엄숙주의나 권위주의를 대학 새내기 시절엔 좋아하지 않았다.

<시경>이 그렇게 뻣뻣한 책이 아니라 ‘노래모음집’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좀 뒤늦게 알았다. <시경>에 대한 인상이 조금 누그러졌지만 그래도 ‘중국시라면 <당시>만 하겠는가’란 생각으로 버텼다. 신영복의 <강의>에서도 ‘동양고전의 입문’이라 할 만큼 중요한 것이 <시경>이라고 소개됐지만 ‘고전이라면 <논어>에 비하겠는가’라고 이유를 댔다. 그러던 차에 뜻밖에도 <시경>에 대한 관심이 샘솟은 것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읽으면서다. 서양 최고(最古)의 서사시를 읽은 참에 세계 최고(最古)의 시도 읽어봐야겠다는 의욕을 갖게 돼서다. 중국 주나라 초기인 기원전 12세기 말부터 춘추시대 중엽인 기원 6세기까지 약 600년간의 노래를 300여편 모은 책이니 생각하면 경이로운 ‘문화유산’이다. 우리에겐 가장 오래된 서정시로 전하는 유리왕의 ‘황조가’가 기원전 17년에 지어진 것과 비교해보아도 그렇다.

그렇다고 오래된 시라는 의의만 갖는 건 아니다. 가령 <시경>의 첫 시 ‘관저’(關雎)에 나오는 ‘요조숙녀’란 말은 아직도 친숙하지 않은가. ‘관저’는 시의 첫 구절 ‘관관저구’(關關雎鳩)의 준말로 ‘저구’는 ‘징경이’ 혹은 ‘물수리’를 가리키고, ‘관관’은 그 암수가 서로를 부르는 소리, 곧 의성어이다. 실제로 물수리의 울음소리가 어떤지 모르기에 번역본마다 ‘구욱구욱’ ‘끼룩기룩’ ‘까옥가옥’ 등으로 옮겼다. 그렇게 서로 ‘짝을 찾는 물수리’에 자신의 처지를 견준 것이 이 시의 기본 발상법이다. 5연으로 이루어진 이 시에서 요조숙녀란 말은 네 번이나 등장하며, “요조숙녀(窈窕淑女) 군자호구(君子好逑)”가 첫 용례다. 여러 번역본에서 이 구절은 “아리따운 고운 아가씨는 군자의 좋은 배필일세”(김학주), “그윽하고 아리따운 요조숙녀는 일편단심 기다리는 이 몸의 배필”(이기동) “아리따운 아가씨는 사나이의 좋은 배필”(기세춘·신영복), “하늘하늘 그윽한 저 새악시 멋진 사내의 좋은 배필”(김용옥) 등으로 옮겨졌다. ‘군자’란 말이 쓰이긴 했지만 공자 이전에는 그냥 ‘사내’를 뜻했다고 한다. 군자를 주나라 문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식의 전통적인 해석은 후대 유학자들이 왜곡한 것이라는 게 학자들의 평가다. 원래는 그냥 배필을 찾는 사내의 애틋한 마음을 노래한 시였다는 것이다.

시의 갈래로 보자면 ‘관저’는 <시경>의 많은 시와 마찬가지로 서정시이자 연애시이다. 하지만 미혼의 남자가 여자를 연모하는 모습을 그린 시로는 이채로운데, 이런 사랑의 표현이 뒷시대에는 계승되지 않았다고 한다.

미혼남녀의 사랑을 읊은 시는 줄어든 반면에 부부의 정을 노래한 시는 계속 이어졌는데, 이 역시 유학이 관학으로 자리잡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 장징의 <사랑의 중국문명사>에 따르면, ‘연애’라는 단어 자체가 송나라 때 처음 등장한다. 하지만 이때도 연애는 남녀간의 사랑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관심과 배려를 뜻하는 말이었다. 현대 중국어에서 남녀간의 사랑을 뜻하는 ‘롄아이’(戀愛)는 일본에서 역수입된 단어라고 하니 ‘요조숙녀’에 대한 그리움은 가장 오래된 그리움이면서 현대적인 그리움이기도 하다.

 

12. 02. 17.

 

 

 

P.S. 김용옥의 '관저' 번역과 풀이는 <논어한글역주2>(통나무, 2008)에 나온다. 장징의 책은 <사랑의 중국문명사>(이학사, 2004) 외 <근대 중국과 연애의 발견>(소나무, 2007)이 더 번역돼 있다.

 

 

그밖에 고형렬 시인이 쓴 <아주 오래된 시와 사랑 이야기>(보림, 2005)는 청소년을 위한 시경 풀이이고, 유병례의 <톡톡 시경 본색>(문, 2011)은 대학생을 위한 책인 듯싶은데 평이한 수준이다. 한흥섭의 <공자, 불륜을 노래하다>(사문난적, 2011)도 '물수리' 편부터 시작해 <시경>에서 49편을 골라 풀이하고 있다. 제목은 자극적이지만 이 책 역시 내용은 평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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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낮에 몇가지 아이템을 두고 고심하다가 영화 <공룡시대> 이야기를 단서로 삼아서 자유주의적 문화주의에 대해 적었다. 아이가 내일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러간다는 말에 엊그제 한겨레문화센터의 지젝 강의에서 언급한 내용이 떠올라서다. 지젝의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자음과모음, 2011)에 <공룡시대>의 이데올로기적 내용에 대한 비판이 들어 있다.  

 

 

 

경향신문(12. 02. 17) [문화와 세상]수상한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

 

종업식을 하고 봄방학에 들어간 초등학생 딸아이의 첫 일정이 3D 애니메이션 <점박이: 한반도의 공룡>을 보러가는 거라고 한다. 토종 애니메이션으로 흥행에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이 영화는 교육성과 오락성을 동시에 만족시킨 작품이라니 무얼 더 바라겠는가.

 



물론 어떤 교육성인지 따지고 들면 문제는 조금 복잡해질 수도 있다. 이젠 옛날 영화라고 해야겠지만 스필버그 감독이 기획한 <공룡시대>(1988) 같은 경우가 그렇다. 어미를 잃은 새끼 공룡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가는 여정을 담은 애니메이션이다. 한데 이 영화를 두고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패권주의적인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 이데올로기’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좀 거창한가? 패권주의적이란 말은 알다시피 지배적이란 뜻이니 제쳐놓으면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란 무엇인가? 우리 모두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자는 주의다. 그게 뭐가 나쁘다는 말일까?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가 반대하는 것은 힘과 덩치로 세상을 지배하려는 태도다. <공룡시대>에서는 덩치 크고 못된 공룡들이 부르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들어 있다. “덩치가 크면 모두 밀어버릴 수 있지. 덩치가 크면 세상 살기가 편해.” 덩치가 크고 힘이 세기 때문에 규칙을 어겨도 되고, 작고 무력한 동물들을 맘대로 짓밟을 수도 있다는 게 큰 공룡들의 생각이다. 미국 사회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우선 떠올리게 되는 건 유사 공룡사회로서 한국사회다. 갖은 권력 남용과 부정 의혹 등에도 불구하고 법망을 피해가는 권력자들과 자잘한 사업에까지 영역을 확장해가면서 덩치만 불려가는 재벌기업들의 행보는 우리가 아직 ‘선사시대의 땅’에 살고 있는 건 아닌가란 생각마저 들게 한다. <공룡시대>의 원제는 바로 ‘선사시대의 땅’(The land before time)이다.

 

 

물론 <공룡시대>의 메시지는 패권주의를 옹호하는 게 아니다. 큰 공룡들에게 시달리는 작은 공룡들은 큰 공룡들의 노래에 이렇게 답한다. “세상을 이루려면 모든 종류가 다 필요해. 키 작은 놈, 키 큰 놈, 덩치 큰 놈, 덩치 작은 놈.” 한마디로 관용적 포용주의다. 우리가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해서, 그리고 좀 더 재미있는 삶을 위해서는 똑똑한 놈도 필요하고 멍청한 놈도 필요하고 하여간 모든 종류가 다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가 소위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다. 서로 다르지만 그런 차이 속에서도 협력이 가능하다는 믿음이다.

문제는 이런 믿음이 사회적 적대관계를 배제하거나 은폐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다. 이 이데올로기는 ‘수직적 적대’를 ‘수평적 차이’로 대체한다. 수직적 적대란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이 있는 현실을 가리킨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있고 이 관계가 고착적일 때, 그것을 수직적 적대관계라고 부른다.

<공룡시대>에서 선량한 공룡들은 그런 적대를 수평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차이 정도로 순화시킨다. 하지만 과연 잡아먹는 공룡과 잡아먹히는 공룡 간의 차이가 점이 있는 공룡과 없는 공룡 간의 차이 정도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일까. 고문 경찰과 고문 피해자가 다양성을 예찬하며 서로 사이좋게 합창할 수 있는 것일까. 그래도 되는 것일까.

우리 ‘선량한’ 공룡들의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는 그런 점에서 미심쩍다. 패권주의에 맞서는 듯싶지만, 사회적 불평등을 다양성이란 이름으로 포용하고 계속 보존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 포용적 태도에 앞서야 하는 것은 ‘못된 종류들’에 대한 불관용이다. 상생의 전제조건은 “좋은 게 좋은 거지”가 아니라 과오와 기만에 대한 냉정한 심판과 척결이다. ‘한반도의 공룡시대’가 어떤 결말을 맺을지 궁금하다.

12. 0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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