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어제와 그제 연거푸 지방 고등학교 강연이 있었는데('책을 읽을 자유'가 주제였다), 여전히 독서량이나 독서에 대한 관심이 저조한 듯싶어서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번 더 적었다.

 

 

 

경향신문(12. 07. 13) 넌 왜 공부 안 하고 책을 보니?

 

지방 고등학교에 두 차례 특강을 다녀왔다. 짧은 여정이었지만 덕분에 처음 가본 지역의 풍광도 즐기고 신선한 공기도 맛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강연은 어려웠다. 입시에 시달리는 고등학생들을 상대로 독서의 중요성과 즐거움에 대해, ‘책을 읽을 자유’에 대해 강의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곤혹스러운 일인지. 지난 봄에도 한 번 체험했지만 사정은 많이 나아지지 않았다. 먼젓번보다는 적은 수의 학생들이 참석했기에 집중도는 좋아졌지만 여전히 절반 이상의 학생들에겐 재미없는 ‘정신교육’ 정도로 여겨지는 듯했다. 하긴 ‘책을 읽어라’는 지당한 권고만큼 따분한 소리도 없을 테니까.

한 반에서 서너 명씩의 신청자만 참여한 학교에서도 학생들의 독서량을 물으니 대다수가 한 달에 한두 권 정도라고 답했다. 다섯 권 이상이라고 답한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학생들만 탓할 수도 없다. 잘 알려진 대로 우리의 독서량은 한 달에 한 권꼴로 OECD 가입국가 가운데 최저 수준이기 때문이다. ‘공부가 우선이고 독서는 나중’이라는 게 한국사회의 암묵적인 합의다. 한국의 문화코드라고 말해도 억지는 아니다.

한국인이라면 “너는 왜 공부 안 하고 책을 보니?”라는 말을, 이 이상한 말을 다 이해한다. 공부와 독서가 상호배제적이라는 전제를 공유하지 않는다면 전달이 불가능한 말이다. ‘독서가 곧 공부’인 문화에서라면 이 말은 “너는 왜 공부 안 하고 공부하니?”라는 뜻으로 번역될 것이니 얼마나 부조리한가. 이러한 부조리가 문제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공부와 독서가 분리된 문화를 둘이 일치하는 문화로 바꾸는 것이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람직한 방향이라는 사회적 합의를 이룰 수 있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책을 읽고 소화할 수 있는 능력, 즉 독서력이 곧 ‘대학수학능력’이라는 인식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기본 독서력을 갖춘 학생에게라면 대학의 문호는 활짝 열려 있어야 마땅하다. 대학에서의 공부는 문제풀이가 아니라 독서이기 때문이다. 올해 대학에 입학해 첫 학기를 보낸 한 여학생의 사례를 참고해볼 만하다. 고등학교 때부터 독서와 토론을 즐기고 논술에도 자신감을 갖고 있던 학생이었지만 내신 성적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요즘처럼 너무 쉽게 출제되는 학교시험에서는 한두 문제만 틀려도 내신이 추락하기 마련인데, 더군다나 이 학생은 암기과목에는 소질이 없었다. 그런 공부는 재미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공부는 달랐다. 강의별로 여러 권의 책을 읽고 조사하고 리포트를 쓰고 발표하고 토론하는 일이 아주 즐거웠다고 했다. 당연히 첫 학기 성적도 학과에서 두 번째로 좋았다. 요컨대 대학에서의 공부는 곧 독서였다.

흔히 한국사회에서 고등학교 교육은 대학교육을 위한 전 단계 정도로만 간주된다. 그런 인식에 반대하여 입시교육 비판도 나오고 고교 교육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나로선 그 정상화가 입시교육과 대립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작 우리 교육의 문제점은 제대로 된 입시교육을 하지 않는다는 데 있는 것 아닌가. 대학에서의 공부를 위한 수학능력을 갖추는 데 소홀하다면 그것이 과연 제대로 된 입시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많은 학생들이 독서를 멀리하는 대신에 공부에 매진하여 대학에 입학은 한다. 하지만 독서력이 부족해서 대학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허덕인다. 게다가 비싼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알바’까지 하게 되니 독서는 대학에 와서도 먼 나라 이야기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평균독서량이 올라가기를 기대하는 건 무망한 일이다. 이제라도 독서가 곧 공부인 교육을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에겐 다른 공기가 필요하다.


12. 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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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984호)의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마이클 샌델의 <민주주의의 불만>(동녘, 2012)를 다루려다가 막판에 도나 디켄슨의 <인체 쇼핑>(소담출판사, 2012)으로 방향을 틀었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더 흥미로운 책이었다. 비록 급하게 쓰느라 리뷰에서는 흥미로운 부분을 많이 놓쳤지만. 아무튼 덕분에 애니 체니의 <시체를 부위별로 팝니다>(알마, 2007)도 구입했다. 시장사회와 인체 쇼핑의 문제는 나중에 따로 다뤄볼 만한 주제다.

 

 

 

주간경향(12. 07. 17) 인체를 사고 파는 시장사회

 

‘인체 쇼핑’이란 제목에서 미래의 불길한 전망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오산이다. 영국의 의료윤리학자 도나 디켄슨이 고발하는 ‘살과 피로 돌아가는 경제’는 미래가 아닌 현재, 우리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현실의 이야기다. 고발이 전부는 아니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그러한 현실이 불가피하지 않으며 불가피한 것이 돼서도 안 된다는 데 맞춰져 있다. “인체 쇼핑은 저항할 수 있고, 세계 여러 곳에서 이미 저항 중이며, 앞으로 더 많은 곳에서 계속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 주장이다.

 

저자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전해지는 것은 인체 쇼핑의 진행 속도와 규모가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빨라지고 또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이클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시장사회화’의 많은 염려스런 사례를 접한 독자에게도 ‘인체 쇼핑 시장’의 현실은 놀라움을 안겨준다.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출생 이전부터 사망 후 시신 처리에 이르기까지 생의 전 시기에 걸쳐 인체조직이 일반 소비재처럼 팔리는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다는데!

 

점점 영리추구의 대상이 돼가고 있는 인체조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난자다. 불임여성의 체외수정을 위한 난자를 구하려는 광고가 미국의 대학신문에는 정기적으로 실린다는데, 건강한 젊은 여성의 난자 가격은 평균 4만5000 달러, 최고 5만 달러까지다. 미국에서 2002년 한 해 동안 난자 기증자에게 지불된 돈이 3,700만 달러가 넘는다고 하고, 불임클리닉이 벌어들인 수입도 10억 달러를 초과한 것으로 추정된다. 금 대신 인체조직과 유전물질을 채굴하는 제2의 골드러시가 일어나고 있다고 저자가 꼬집을 정도다. 게다가 ‘비싼 난자’만 거래되는 것도 아니다. 체외수정이 아닌 체세포 핵이식 연구에서는 가난한 여성이나 유색인종 여성의 ‘값싼 난자’가 쓰인다. 난자에 대한 이런 수요를 부추기는 것은 줄기세포를 연구하는 과학자들 사이에 “큰돈이 걸린 국제적 경쟁”이다.

 

난자만큼이나 큰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건 시신이다. 저자도 참고하고 있는 애니 체니의 <시체를 부위별로 팝니다>에는 아예 가격표까지 나와 있다. 가령 머리는 550-900달러, 몸통은 1,200-3,000달러, 해부용 시체 한 구는 4,000-5,000달러인 식이다. 시신의 공급자는 시체 안치소와 의과대학, 인체조직은행, 장례식장, 그리고 화장터 등인데, 시체 부위를 판매한 혐의로 기소된 한 장례지도사는 시체 매매 규제 가능성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규제하려면 아주 힘들 겁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선 어림없죠. 수입이 꽤 쏠쏠한 돈벌이거든요.” 난자를 얻기 위한 인신매매, 중국의 사형수 장기 매매도 물론 이 ‘쏠쏠한 돈벌이’ 때문에 빚어지고 있는 현실의 일부다. 

 

 

 
이러한 현실에 저항할 수 있는 방도가 있는가? 흥미롭게도 저자가 저항의 모범적인 사례로 드는 건 황우석 교수 사태 때 한국의 여성운동가들이 보여준 활동이다. 황 교수에 대한 열광적인 숭배 분위기 속에서 한국여성민우회와 여러 시민단체가 구성한 생명공학감시연대는 그가 실험에 쓰인 난자를 어디서 구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리고 난자를 제공한 여성들과 관련한 불미스런 사실들도 폭로했다. 결국 실험에 쓰인 난자가 200개가 채 안 된다는 황 교수의 발표와 달리 실제로는 119명의 여성에게서 2,200여 개가 넘는 난자를 채취해 사용한 사실이 밝혀졌다.

 

그와 함께 저자는 유전자 특허 취득 현상을 과거 농지로 사용되던 공유지의 사유화(인클로저) 현상과 비교해서 볼 것을 제안한다. 더불어 우리의 인체가 점점 여성화되는 현상, 곧 대상화되는 현상에 주목할 것을 주문한다. 그것은 우리 몸에 대한 생각을 다시 가다듬게 만든다. “우리의 몸이 사물에 속한다면, 이때의 사물은 다른 사물들보다 좀더 엄격하고 심오한 뜻을 담고 있다.” 메를로퐁티의 말이다.

12. 0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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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간 지젝의 강연에 참석하느라 진을 빼고(역시나 그에게 많이 배웠다) 좀 멍한 상태에서 오전시간을 보내다 7월 일정을 확인해봤다. 아트앤스터디에서 매주 수요일 저녁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강의를 진행한다는 건 지난번에 공지했고, 또다른 강의로 '로쟈와 함께하는 한여름의 공포문학'(가제)의 주제의 강의를 양천도서관에서 진행한다(강의는 오후 2-4시). 주제를 제안 받고서 네 편의 작품을 골랐다. 공포감이 전달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선 다시 읽어보고픈 작품이어서 흥미로운 시간이 될 것 같다. 관심을 가지실 분들을 위해 일정을 소개한다. 작품의 발표연도를 같이 병기했다.

 

1. 7월 24일(화)_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1818)

 

 

2. 7월 27일(금)_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1847)

 

 

3. 7월 31일(화)_ 브램 스토커, <드라큘라>(1897)

 

 

4. 8월 3일(금)_ 헨리 제임스, <나사의 회전>(1898)

 

 

12. 0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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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 강연장에 가기 전에 이번주 주간경향(982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분량상 지면에서 빠진 한 문장도 채워넣었다). 지난주 관심도서 가운데 스펜서 웰스의 <판도라의 씨앗>(을유문화사, 2012)에 대해 적었다(지면에는 '스티븐 웰스'라고 저자명이 잘못 나갔다). '농업 문명의 불편한 진실'이 부제로 신석기 혁명에 대한 관심을 부추기는 책이었다. 저자의 책으론 <최초의 인간>(사이언스북스, 2007), <인류의 조상을 찾아서>(말글빛냄, 2007)가 더 번역돼 있다. <최초의 인간>은 <판도라의 씨앗>에 원제에 따라 <인류의 여정>이라고 표기돼 있다.  

 

 

 

주간경향(12. 07. 03) 농업혁명이 가져다준 희망과 불행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올림포스의 신들이 저마다 해로운 것을 하나씩 넣은 상자를 판도라에게 주면서 절대로 열어보지 말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한 판도라는 결국 뚜껑을 열어보게 되고 전염병을 포함해 온갖 해로운 것들이 상자 밖으로 뛰쳐나온다. 상자 안에는 단 한 가지 좋은 것이 남는데, 바로 희망이다. 요컨대 온갖 불행과 고통으로 점철돼 있지만 동시에 희망을 놓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인류학자 스티븐 웰스의 <판도라의 씨앗>(을유문화사)은 물론 제목에서 판도라의 상자를 패러디하고 있다. 다만 문제는 ‘상자’가 아니라 ‘씨앗’이었다. 그것도 비유적 의미의 씨앗이 아니라 그냥 씨앗. 인류의 역사 어느 시점에서 들판에 씨앗을 파종한 최초의 인간이 있었다. 아마도 여자였을 것으로 추정되기에 ‘판도라’란 이름으로 불러도 좋겠다. 그렇게 들판에 뿌린 씨앗에서 열매, 곧 곡물을 수확하게 되자 인류사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농업이 시작됐고, ‘신석기혁명’으로도 일컬어지는 이 전환은 전시대의 수렵채집사회로 되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만든 비가역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저자는 아예 지난 5만 년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가장 큰 혁명이라고까지 평가한다.

 

호모사피엔스가 아프리카에서 처음 출현한 것은 약 20만 년 전이다. 하지만 약 8만년 전까지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종이었다. 그러나 인구가 격감하여 7만년 전쯤에는 2천 명에 불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말 그대로 멸종 위기에 직면했던 인류는 6만년 쯤 전에 변곡점을 거치며 세계 인구는 다시 증가하고 4만5천 년까지 모든 대륙으로 퍼져나간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기록적인 변화는 1만 년 전에 일어나며 오늘날 70억에 이르기까지 세계 인구는 비약적으로 증가한다. 그 발단이 바로 농업의 시작이었다.

 

구석기시대의 수렵채집인들이 자신의 식량을 찾는 방식에 의존했다면 농경인들은 그 식량을 스스로 창조했다. 그래서 혁명이다. 하지만 이 혁명적 변화는 판도라의 상자와 마찬가지로 긍정적인 의미만을 갖지 않는다. 지표상으로도 그렇다. 구석기 시대 수렵채집인 남성의 평균수명이 35.4세, 여성은 30.0세였는데 반해서 식석기 말 남녀의 평균수명은 남자가 33.1세, 여자가 29.2세로 오히려 줄어들었다. 구석기 시대 남성의 키가 거의 177cm였던데 반해서 식석기 말 남성의 평균 신장은 161cm이다. 사람들은 더 일찍 죽었을 뿐 아니라 더 많이 병들어 죽었다. 농업으로 인해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농경 생활은 사람들을 병약하게 만들었다는 걸 보여준다.

 

그럼에도 농업 문명으로의 이행은 진화적 압력이었다. 준유목 상태의 식량수집 생활은 환경에 너무 예속돼 있어서 자식을 많이 낳을 수가 없었고 또 인구가 늘어나면 두 집단으로 나뉘어야 했다. 반면에 농업은 안정적인 식량을 확보하게 함으로써 기후 스트레스에 대처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하여 ‘판도라의 씨앗’은 처음에 전혀 예기치 않은 식량증가와 인구증가를 가능케 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 많은 부작용과 재앙 또한 불러들였다. 단적으로 말하면 현대 인류를 괴롭히는 거의 모든 주요 질병들이 주로 구석기시대에 만들어진 우리의 생물학적 본성과 신석기시대 이후에 우리가 만들어온 문명 사이의 불일치에 근거하고 있다. 높은 인구밀도와 엄청난 규모의 가축, 높은 이동성이 말라리아와 독감, 에이즈, 당뇨병이 창궐하는 조건이다. 심지어 각종 정신질환조차도 인구과잉과 지리적 제한으로 인한 스트레스에 기인하는데, 이 또한 농업으로의 이행이 가져온 결과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농업 이전 시대로 돌아갈 수 있는 건 아니다. 생산과 소출, 개발과 진보라는 ‘농업의 뮈토스’ 대신에 욕심을 줄이라는 ‘수렵채집인의 뮈토스’를 도덕적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는 게 저자의 제안이다. 왜냐하면 지구 자원을 맹렬하게 착취해온 농업의 뮈토스는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희망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탐욕을 버려라!

12. 06. 27.

 

 

P.S. '신석기혁명'이란 말을 만들어낸 저명한 고고학자 고든 차일드의 책을 겸하여 읽어볼 수 있겠다. <인류사의 사건들>(한길사, 2011)과 <고든 차일드의 사회고고학>(사회평론, 2009)이 번역돼 있다. 최근에 나온 책으론 브라이언 페이건의 <크로마뇽>(더숲, 2012)이 같이 읽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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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회의(322호)에 실은 서평을 약간 교정해서 옮겨놓는다. 지난해 7월 2일 세상을 떠난 출판평론가 최성일의 1주기 특집 가운데 <한 권의 책>(연암서가, 2011)에 대한 서평을 제안받고 쓴 것이다. 서평이라고는 하지만 추모특집의 일부인 만큼 '인물평'도 겸할 수밖에 없었는데, 저자와는 면식이 없는 터라 책을 통해 알게 된 저자의 면모만을 스케치해 보탰다.  

 

 

기획회의(12. 06. 20) 한 권의 책이 된 사람

 

두 권의 서평집을 낸 처지이지만 서평집에 대한 서평을 쓰는 건 드문 경험이다. 그럼에도 고(故) 최성일의 <한 권의 책>(연암서가, 2011)에 대한 청탁에는 흔쾌히 응했다. 일종의 ‘의무감’이 작용했다고 할까. 나이 차이는 별로 나지 않지만, 최성일은 표정훈, 이권우와 함께 내게는 ‘선임’이다. 직접적인 안면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얼 인수인계 받은 것도 아니니 ‘직계’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 ‘출판평론가’ 혹은 ‘도서평론가’로서 그들의 활동은 자못 눈부셨다. 책을 좋아하는 만큼 책에 관한 모든 담론을 즐겨 읽었고, 자연스레 ‘3인방’의 이름도 내겐 친숙했다.

 

그러다 2000년대 중반쯤인가 지형이 조금 바뀌었다. 온라인서점의 블로그화와 함께 온라인 또한 서평활동의 주된 무대가 됐다. 사실은 인터넷 카페란 것이 생길 때부터 활동해온 터이지만 블로그 시대는 ‘인터넷 서평꾼’이란 직함을 내게 가져다주었다. 서평꾼이건 서평가이건 하는 일은 선임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가끔 생각해볼 때마다 전설의 ‘말년 병장’들을 떠올렸고, 나대로의 후임이 생기기를 기대했다. 이것이 서평꾼으로서 내가 갖고 있는 모종의 세대의식이다. 

 

 

 

그가 읽은 책들

시간은 많은 것을 바꾸어놓는다. 표정훈은 전역하여 ‘전직 출판평론가’가 됐고, ‘장기복무’를 자원한 두 사람 가운데 최성일이 지난여름 우리 곁을 떠났다(단연코 너무 이른 죽음이었다). 그가 남긴 서평들을 모은 유고집의 제목이 <한 권의 책>인 것은 적확하면서도 시적이다. 출판평론가로서 그가 온전히 책과 함께 살았고 그의 생애 자체가 한권의 책으로 응축됐다는 인상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모든 열정을 오직 책에다 바친 ‘순정남’은 아니었다. 야구광인 ‘야빠’이기도 했던 그는 소설가이면서 소문난 축구팬 닉 혼비의 <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를 평하는 자리에서 넌지시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닉 혼비처럼 책이 재미있어서 읽는다. 그러나 책이 야구보다 재미있다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책은 고작해야 야구만큼 재미있다.”

 

나는 물론 야구보다도 책이 더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쪽이지만 그렇다고 그의 의외의 고백에 ‘배신감’을 느끼는 건 아니다. 오히려 유쾌하다. 책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는 게 나의 지론이니까. 최성일 버전으로 말하자면, 야구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알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책이 야구만큼 재미있다면 거꾸로 야구도 책만큼 재미있을 테니까. 과연 그는 어떤 책들을 야구만큼 재미있게 읽고 어떤 소감을 남겼을까.

 

서평집의 용도는 보통 두 가지다. 같은 책에 대한 리뷰를 내가 읽은 소감과 비교해보거나 내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한 정보를 요긴하게 챙기는 것. <한 권의 책>의 용도는 내게 단연 후자 쪽이다(장정일의 '독서일기'가 내겐 그렇다). 그가 고른 책의 3분의 1 가량은 나도 갖고 있지만 견주어볼 만한 서평을 쓴 건 한 권도 없다. 플라톤의 <국가>에 대해서 짧은 칼럼을 하나 쓴 정도다. 그러니 독서과정은 구입할 책, 읽을 책, 안 읽어도 되는 책으로 분류하는 자동분류기를 작동시키는 것과 비슷하다.
 
책에 관해서라면 나도 남들만큼은 읽고 남들보다 많은 정보를 안다고 자부하는 쪽이지만, 최성일은 훨씬 더 넓은 안목과 오지랖을 자랑한다. 가령 <친일문학론>의 저자 임종국 선생의 <밤의 일제 침략사>(한빛문화사, 2004)란 책의 존재를 나는 그의 리뷰 덕분에 알게 됐다. 물론 내가 러시아에 체류하고 있던 2004년에 나온 책이란 사실이 결정적이긴 하지만, 최성일은 20년 만에 다시 나온 이 책을 그 이전부터 백방으로 찾았던 전력이 있다. 책도 보려고 하는 자의 눈에 띄는 법이다. 그는 “일제는 대포와 기생을 거느리고 조선에 왔다”는 핵심 어구와 함께 책이 전하는 내용과 미덕을 두루 살핀다. 일본의 화류문화를 조선에 이식한 이토 히로부미가 “게이샤 한 명에게 쌀 1천 가마에 해당하는 돈을 쏟아 부으면서도 경의선 부설에 동원된 조선인 인부에게는 하루 밥값도 안 되는 돈을 임금이라고 지급”한 사실은 허울 좋은 ‘식민지 근대화’의 이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책에서 마음을 읽어내다

수천이 넘는 장서 가운데 한권을 고르라면 주저 없이 손에 들겠다고 말하는 채광석 시인의 옥중서간집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형성사, 1981)도 눈이 밝을 뿐 아니라 섬세한 마음결까지 지닌 출판평론가 덕분에 알게 됐다. 오래전에 절판돼 인터넷 서점에서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책이다(저자도 따로 서지를 적어놓지 않았다). ‘이 한 권의 책’이라고 꼽는 이유는 단출하다. “한 젊은이의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 배인 연애편지”라는 게 이유다. 그런 맥락에서 최성일은 노천희의 <내 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삶이보이는창, 2007)란 책에도 주목한다. “강제징집당한 학생운동 출신 졸병과 중학교에 갓 부임한 신졸 여교사의 사연”을 담은 책이다. 제대를 넉 달 앞두고 의문스런 죽임을 당한 남자와 그를 평생 가슴에 품은 여자의 사연을 최성일은 ‘우리 시대의 아사달과 아사녀’의 이야기라고 부른다. 비무장지대 전방초소에서 근무했던 자신의 군대 경험도 한몫 거들었겠지만 그가 책에서 지식과 정보만이 아니라 ‘마음’도 읽어낸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남편의 유고집’에 그의 아내가 감동적인 서문을 대신 붙일 수 있었던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아사달과 아사녀는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니까. 아내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귀가할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한다. “옥아, 나 왔어. 야, 집이 최고다. 집이 제일 좋다니까!” 그러니 그가 순정남이 아니었다는 앞에서의 말은 교정돼야겠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책과 야구에 양다리를 걸쳤을지 모르지만, 그는 사랑에서만큼은 ‘순정남’이었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며 내가 챙긴 책의 목록은 더 이어지지만 대표적으로 두 권만 들어보았다. 사실 한 권의 책이 그렇게 두 권의 책으로만 가지를 치더라도 우리가 읽어야 할 책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다. 서평집의 대표적 ‘민폐’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서평을 읽는 것으로 읽은 셈 치게 되는 책도 적지 않으니 그 정도는 기꺼이 감수할 만하다. 끝으로 오탈자는 물론 책에 관한 서지정보의 오류를 지적하는 데 기탄이 없었던 그의 교정정신을 기리며 한마디 보태자면 에리히 프롬의 <건전한 사회> 서지에서 ‘김형익 옮김’(329쪽, 377쪽)은 ‘김병익 옮김’으로 교정돼야 한다. 물론 그가 직접 교정을 봤다면 걸러졌을 오류일 것이다.

 

12. 06. 24.

 

 

 

P.S. 지면에는 채광석의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의 서지가 청년사판(1986)으로 나갔는데, 다시 확인해보니 형성사판(1981)이 초판이어서 바로잡았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고인의 1주기를 맞아 7월 4일 저녁에 북스리브로 홍대점에서 추모 북콘서트가 열린다. 개인적으론 강의 때문에 참석이 어렵지만, 저자를 기억하는 분들이라면 잊지 말고 참여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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