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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시스터 ㅣ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5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5년 2월
평점 :
빅슬립, 하이 윈도, 안녕 내 사랑, 호수의 여인에 이어 헐리우드로의 외도후 6년만에 낸 '리틀 시스터'는 많은 팬들의 비난과 비평가들의 악평을 받았다.'말로는 더 이상 말로가 아니다'
말로는 뭐랄까. 더 이상 밟혀도 밟혀도 일어나는 잡초와 같은 이미지가 아니다.
꿋꿋이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하드보일드판 기사의 모습은 이제 그에게서 찾기 힘들다. 반면 징징거리는 모습의 말로우는 곳곳에 널려있다. 정의의 사자는 아니였지만, 그 나름의 칼을 세우고 있었던 그는 그 칼을 칼집에 넣어 벽장 속에 꼭꼭 숨겨 놓기라도 한걸까. 지금까지 그가 사립탐정이란 되지도 않은 직업으로 사회와 조직, 권력 대 힘없는 개인의 싸움에 KO승을 거두지는 못했을지라도 커다란 강줄기같이 유유한 관행들을 흔들고, 그들을 못살게 굴었다면, '리틀 시스터'에서 말로는 방관자, 혹은 자살자이다. 정신병자. 씨니컬한 유머를 잃은 말로의 모습은 처량하고, 궁상맞다.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확인하지 않으면, 자신이 이 세상에서 증발해버릴것만 같은 두려움반 기대반.
얼굴 하나가 어둠 속을 뚫고 내 쪽을 향해 헤엄쳐왔다. 나는 방향을 바꾸어 그 얼굴 쪽을 향했다. 그렇지만 너무 늦은 오후였다. 해가 지고 있었다. 급속도로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얼굴은 없었다. 벽도, 책상도 없었다. 그런 다음 바닥도 없어졌다. 아무것도 없었다. 나조차도 그곳에 없었다.
이 책은 말로의 이전책들에 비하여 등장인물들의 개성도 가장 뚜렷하고, 플롯도 가장 복잡하고 정교하게 잘 짜여있다. 주인공인 말로를 포함해서 결코 매력적이지 않은 등장인물들과 그들을 바라보는 말로의 비관적인, 절망적인 시선은 그 솔직함에 기분이 나빠지지만, 그 모든 세상의 '힘' 앞에서도 팔딱거리던 말로가 죽은 생선마냥 거의 움직임없이 기분나쁜 침묵과 관행과 불만과 분노를 어렵사리 헤쳐나가는 모습에서 나 역시 불만과 분노를 느꼈지만, 다시 읽을때, 그리고 또 다시 읽을때 말로는 내 안 더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제목' 리틀 시스터'의 중의적인 의미는 책을 읽는 내내 변한다. 기묘한 제목짓기이다.
'캔자스 맨해튼에서 온 촌스러운 아가씨가 휙 들어와서는 고작 닳아빠진 이십 달러에 자기 오빠를 찾아달라며 나를 들볶았지. 오빠란 사람은 얘기로 들어서는 얼간이 같았지만, 동생은 찾고 싶어했고, 그래서 이 대단한 돈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나는 베이시티로 내려간거야.'
이전 작품들에서 말로는 베이시티의 경찰들에게 괴롭힘을 당할만큼 당한다.
이 작품은 내용상으로도 '호수의 여인'을 읽고 읽어야 좋고, '기나긴 이별'을 읽기 전에 읽어야 좋다.
그녀의 오빠를 찾는 와중에 '시체들 속에 무릎까지 빠진 남자, 말로' ( 하이 윈도中)답게 '어쩌다 운 좋게 자네들(경찰)을 위해 시체를 계속 찾아주는 남자' 역할을 한다. 그러니깐 말로가 가는 곳마다 살해현장이라는 낯익은 이야기는 변하지 않았다.
헐리우드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우리는 챈들러가 몇가지 성공적인 시나리오를 썼다는 것을 안다. 그의 작품들 대부분이 영화화 되었다는 것도 알고, 챈들러의 공동작업을 못하는 깐깐한 성격으로 인한 트러블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헐리우드에서 돌아온 그는 세상 모든 것에 염세적이 되어버리지만, 특히나 헐리우드에 대한 유감과 혐오를 감추지 못한다.
메이비스 웰드는 조연으로 크게 튀지 않는 연기를 하고 있었다. 연기는 괜찮았지만, 그보다 열 배는 잘할 수 있는 여자였다. 그렇지만 그 여자가 연기를 열 배 더 잘한다고 하면, 주연을 띄워주기 위해서 그녀의 출연 장면 중 반이 잘려나갔을 것이다. 이제까지 본 중에 가장 근사한 줄타기로군. 아마도, 지금부터 그녀가 걸어갈 길은 단단한 밧줄도 아니겠지. 이제는 거의 피아노줄 정도밖에 안 될 텐데. 높이도 아주 높겠지. 그리고 그 밑에는 보호 그물 따위도 없을 것이다. (140pg)
"그건 바보 같은 일이 되겠지. 나는 어둠 속에서 그녀와 앉아 손을 붙잡고 있을 수는 있었지만, 그게 얼마나 오래 지속될 것 같아? 얼마 지나면 그녀는 화려하고 값비싼 의상들과 알맹이 없는 얘기, 비현실감, 소리 죽인 섹스의 안개 속으로 떠내려가겠지. 그녀는 더이상 실존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거야. 그저 사운드트랙의 목소리나 화면상의 얼굴이 되겠지. 난 그 이상의 것을 원해." (430pg)
그런 유감과 혐오에도 불구하고, 독자로서, 헐리우드에 속한 인간군상들에 대해 동정이나 경멸보다는 그들의 삶을 '인정'하는 기분이 들게 한다는건 그만큼 챈들러의 캐릭터들이 살아있다는 이야기이리라.
헐리우드가 소재인만큼 낭만적인 몇줄의 문장도 끼워져 있고, 드라마틱한 인물들도 등장한다.
말로는 전작들에 비해 초라해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이제 정말 말로를 좋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