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토끼 키우기
클로이 달튼 지음, 이진 옮김 / 바람북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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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독서 버킷 리스트 중 하나는 논픽션 북클럽을 하는 것이다. 내년이 될지, 내후년이 될지 모르겠지만, 이 아름다운 책이 논픽션 북클럽의 첫 책이 될 것이다. 


작년 논픽션 분야에서 상도 많이 탔고, 좋은 책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야생의 산토끼(Hare) 를 키운다는 것이 H is for Hawk (메이블 이야기)랑 비슷한 이야기이지 않을까 싶어 미루고 있었다. 좀 힘든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 고양이를 키우는 나는 고양이 책을 실용서 외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동물 좋아하지만, 많이 가리는 편이고, 소설을 읽어도, 동물 나오면, 구글에 ㅇㅇ 죽나요? 검색해보는데, ㅇㅇ ㅈ까지만 검색해도 자동완성 되는거보면 나같은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산토끼 이야기가 특별했던 것은 산토끼가 결국 죽어도 책을 끝까지 잘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는 것이다. (검색해보긴 했다. 안 죽음) 


어떤 책들은 앞에 한 두장만 읽어도 이거다 싶은 책이 있는데, 이 책 또한 그렇다. 프롤로그만 읽어도, 야생의 아기 산토끼를 향해 달려가는 개 짖는 소리만 들어도 아기 산토끼가 되어 두근두근 두근두근 


정치 고문이자 외교전문가로 일중독자였던 저자는 세계가 멈췄던 코로나 시기 시골에 지어두었던 자신의 집에 머물게 된다. 그곳에서 길에 노출되어 있는 갓 태어난 산토끼를 마주하게 되고, 순간 그대로 놔둬야할지, 데려가서 봐줘야할지, 안 보이는 수풀 속으로 넣어줘야 할지 고민하다 사람 냄새 묻히면 안 될 것 같아 그대로 두고 온다. 시간이 지나 다시 돌아온 곳에 새끼 산토끼가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최대한 냄새를 덜 묻히기 위해 천으로 덮어 집으로 데리고 가서 근처에서 농장을 하는 언니에게 SOS 를 보낸다. 


동물 친화적인 언니와 달리 도시인인 그녀는 가뜩이나 산토끼를 집에서 키우기 어렵다는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새끼 산토끼를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게 된다. 분유를 타 먹이면서 야생으로 돌아갈 수 있게 접촉을 최소화하며 산토끼와 함께 살게 된다. 그렇게, 야생을 집에 들인 그녀의 공간은 점점 더 야생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산토끼의 개체수가 많이 줄어든 것은 인간 때문이다. 인간의 효율을 위한 기계식 농업으로 인해 살던 터가 없어지고, 숨을 곳과 쉴 곳이 없어지며, 트렉터에 갈리고, 찢긴다. 산토끼는 흔한 동물이었다가 지금은 보기 힘든 동물이 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산토끼에 대해서 공부하게 되는데,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고, 얻을 수 있는 대부분의 지식은 산토끼를 잡는 수렵인들로 부터 왔고, 몇 세기 전에 산토끼를 키웠다는 시인의 시에서 겨우 무엇을 먹는지 알 수 있었다. 


저자와 함께 독자 또한 산토끼에 대해 새롭게 알아가게 되고, 왜 부정적인 이미지로 책에 묘사되는지 (토끼와 거북이의 교활한 이미지라던가)에 대해서도 이유를 찾는다. 앞으로 책에서 Hare 보면, 무슨 이야기이든 클로이의 산토끼에 대해 떠올릴 것 같다. 


반려동물로 진화하지 않은 야생의 산토끼, 그거 아시나요? 산토끼가 치타보다 빠르다는 것? 그렇게 빠르고, 잘 도망치고, 잘 경계하고, 예민한 산토끼는 그런 특성으로 인해 취미 사냥감으로 잡혀서 죽고 있다. 사냥이 취미다? 욕하고, 저주하고. 


코로나 시기에 결코 멈추지 않고, 가속하기만 할 것 같은 세상이 멈추었고, 그 멈춘 세상에서 사람들은 각각 무언가를 배웠다. 저자는 새끼 산토끼로 인해 그 시간에 더 많은 성찰을 하게 되고,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된다. 


"가끔 책상에서 빠져나와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곤 했는데, 녀석의 차분하고 평온한 모습이 놀라웠다. 산토끼가 지닌 평온함과 안정감을 오랜 세월 나의 삶을 지배했던 미친 속도감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삶은 늘 긴장의 연속이었고 온갖 예측할 수 없는 일들과 스트레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자의와 타의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놀랍게도 자연으로 확장하게 된다. 야생 산토끼와 함께 비와 바람 또한 집으로 들이게 된다. 인간이 없앤 생울타리를 주변 농지 주인들의 협조하에 이전으로 돌리고, 나무를 심고, 풀을 심는다. 이렇게 땅을 사서 보존하고, 터를 내주는 것, 아무것도 없는 땅을 숲으로 만든 그 인도인만큼 대단히 큰 뭔가는 아니지만, 그렇게 자신이 가진 집과 땅을 이전으로 돌려 생태계를 만들어주는 것 또한 대단하다. 


부정적이기만 했던 야생의 동물을 죽이고, 씨를 말려버리는 인간의 무심함과 잔인함과 끝없는 욕망에 대한 회의는 지난 번 '호랑이는 숲에 살지 않는다' 에서 보전생물학에 대해 알게 되면서, 약간의 희망으로 돌아섰다. 비관적인 태도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고, 희망과 행동만이 현실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만든다. 덜 나빠지게 만든다. 나빠지는 속도를 줄인다. 그 연장에서 이 책을 읽게 되어서 다행이다. 약간의 희망에 약간의 희망이 더해졌다. 


이 외에도, 야생의 산토끼를 야생으로 두기 위한 동시에, 그의 집을 은신처로 삼은 산토끼를 존중하며, 외출하는 산토끼를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는 그 마음이 뭔지 너무 잘 안다. 돌보는 길고양이들도 많이 생각났고, 곰 생츄어리의 곰들도 생각났고, 많은 길 동물들과 숲 동물들, 그들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도 생각났다. 


"동물에 대한 애정이 전혀 다른 감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인간과의 관계에서처럼 온갖 후회와 복잡미묘함, 타협으로 얼룩지지 않은 감정이었다. (...) 말로 소통할 수 없다보니, 우리는 동물들의 필요를 이해하고 채워주기 위해 우리 자신을 확장하고 그 대가로 그들과 함께 하는 기쁨과 재미를 누린다. 그들의 삶이 우리의 삶보다 훨씬 짧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우리는 언젠가 다가올 피치 못할 고통에 대비해야 한다. 어린 산토끼가 죽으면 내가 엄청난 고통과 슬픔을 느끼게 되리란 것을 알았고 생각만 해도 몸이 움츠러들었다." 


저자의 글이 너무나 아름답고, 묘사 글쓰기의 정석 같고, 서술이 대단해서, 읽으면서 감탄하고, 질투나고, 아이들과 같이 읽으면서 글쓰기 훈련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바로 들 정도였다. 


"처음 보았을 땐 털이 젖은 흙 빛깔 비슷한 짙은 갈색 같았다. 그러나 한 가닥씩 찬찬히 살펴보니 한 올의 털에 짙은 갈색과 엷은 갈색이 번갈아 나타났다. 처음엔 잘 이해가 안 갔지만, 얼마 후 그것이 '아구티 색상 agouti colouring'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구티 색상은 한 개의 털에 여러 색의 띠가 나타나는 현상을 일컫는 말로, 산토끼를 비롯한 수많은 야생동물들에게 필수적인 위장 기능이며 수천 년에 걸친 자연 선택의 결과였다. (...) 눈가의 엷은 색 털은 마치 눈화장을 한것처럼 둥글게 검은 테가 둘러져 있었다. 목털은 세상에서 가장 보드라운, 식어버린 재의 회색이었고 그 어느 부위보다도 털이 짧고 가늘었다. 코와 입 주변은 상아색이었고 조그만 입은 항상 놀란 것처럼 조그만 'O' 모양으로, 그을음 같은 털이 테를 둘렀다. 콧구멍도 어두운 회색 털이 테를 둘렀다. 등에 난 털은 얼룩덜룩하고 수북했다. 귀는 아래쪽이 좁고 위로 갈수록 점점 넓어지다가 다시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지고 뾰족해졌다. 귀 끝부분은 얼마나 새카만지 마치 먹물에 담근 것 같았다. 앞발도 페인트를 밟고 지나간 것처럼 끝부분이 희었다." 


산토끼의 꼬리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동그란 솜털 방울 모양이 아니었다. 길쭉한 막대처럼 생겨서 양쪽으로 살랑거릴 수 있었다. 꼬리 윗부분은 거친 회색 털로 덮여 있었지만, 아래쪽은 눈부시게 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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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 위픽
임선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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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이야기를 좋아할 것 같지만, 좋아하지 않는다. 가여운 길고양이 이야기는 현실에서 너무 많이 봐서 소설에서 또 보고 싶지 않고, 인간이 지어낸 고양이가 떠난 후 뒷 이야기 같은건 달갑지 않다. 덮을 정도는 아니어서 끝까지 읽긴 했다. 


만화를 그리던 나는 미루고 미루던 마감일에 납치를 당하고 곤란하다. 알고보니, 고양이에게 죽기 전의 대기실 같은 곳으로 납치당했다. 고양이는 존재감 없는 나에게 감명 받아, 조금이라도 안전하게 고양이들이 길에서 살 수 있도록 존재감을 없애는 법을 배우고 싶어한다. 짠둥이.. 친구 고양이들, 제가 낳은 아기 고양이들이 존재감을 없앨 수 있으면, 조금이라도 더 안전해지지 않을까 싶어서. 


제목의 0000은 화자가 연재하는 만화의 제목이다. 통장 잔고, 인간관계, 행동반경, 메신저 알림 모두 0,0,0,0 인 화자의 일상을 다룬 만화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데는 성공하지만, 0000의 삶에 업데이트는 없다. 연재 두 달만에 소재 고갈로 제목 따라 조회수 0, 별점 0, 댓글 0, 추천 0, 또 다른 무관심의 0000을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저랑 비슷해서 잘 봤어요. 라는 독자를 만나기도 하고, 존재감 없애는 법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시도해보기도 한다. 결국 성공하고, 다시 돌아가기로 한다. 납치 당했을 때의 이야기를 소재로 가지고. 


요즘 시류에 맞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요즘 시류라고 해봤자, 다양한 삶이 있겠지만. 이전에 비해 좀 더 와닿는, 좀 더 많은 독자를 지닌 이야기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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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ris and Timble: The Beginning: (A Heartwarming Early Chapter Book about Friendship, Courage, and Helping Others - For Kids Ages 5-8 in Grades K-3) (Hardcover)
Dicamillo Kate / Candlewick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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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ke the good and noble choices!!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읽어보니 너무 좋아서, 아이들에게도 많이 읽어주려 한다. 

선하고, 고결한 선택을 하도록 하자고 생각하며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면 좋겠다. 선하고, 고결한 선택을 하는 어른이 되어야 겠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분량 보니 너무 쉬운 책이 아닐까 싶어서 구매를 미루다가 도서관에 있어서 빌려왔는데, 케이트 디카밀로, 이야기의 신 

이렇게 따신 이야기를 시리즈로 가져오다니. 


그림도 따뜻하니, 잘 어울린다. 


버려진 창고 안의 자신만의 둥지(nest, 쥐구멍) 에서 자신만의 소중한 것들을 모아두고 살던 오리스, 오리스의 소중한 것들과 그 소중한 것들이 창고 틈새로 들어오는 햇살에 빛나는 장면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렇게 반짝이는 것들을 보던 오리스, 바깥에서 도움 요청의 소리가 들려온다. 어린 올빼미 팀블이 쥐덫에 걸려 있다. 


올빼미는 쥐를 잡아 먹는다. 오리스는 그냥 들어오지만, 평소 자신의 보물인 청어캔에 써 있는 말을 보게 된다. 

"Make the good and noble choices!!!" 덜덜 떨면서 나가서 오리스를 구해주게 되는데.. 


너 사자와 쥐 이야기 알아? 

사자가 뭐야? 


아, 이 어린 올빼미 같으니라고. 


표지의 오리스와 팀블은 친구가 되고, 오리스는 팀블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며, 온 힘을 다해 쥐덫에서 팀블을 구해준다. 


근데, 사자와 쥐 이야기에서 사자가 쥐 잡아먹지 않나? 아니래. 



케이트 디카밀로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힘은 정말 대단하다. 반짝반짝하고, 따뜻하다. 그림책(이지만 어느 정도 글밥 있는)이라 별로인가 싶었는데, 그림과의 시너지도 대단하네. 


시리즈 2까지 도서관에서 빌려왔고, 시리즈 계속계속 나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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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6-05-23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 했더니.. 에드워드 툴레인 작가군요!!! 저도 봐야겠어요~
 
Lightfall: The Girl & the Galdurian: A Graphic Novel (Paperback)
Tim Probert / Harperalley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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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폴, 워낙 인기작이고, 3권인가 4권까지 나와 있다. 


미들 그레이드 그래픽노블 모험물은 약간 애써 어린이의 마음으로 본 면이 없지 않은데, 이 책은 진짜 재미있게 봤다. 

앞에 서너장 넘기자마자, 그림도 (그림이 예쁘고 멋진 그래픽 노블은 많음) 글도, 이야기도, 캐릭터도, 종이도, 글자 폰트까지도 다 맘에 들었다. 


베아트리스, 베아는 돼지마법사 할아버지가 어릴때 숲에서 주어와 키운 아이로, 걱정이 많은 아이이다. 리얼리스틱 픽션이라면, 불안 장애. 한 번씩 걱정들에 압도당해 얼어버리게 되는데, 그림으로 묘사가 이야기와 아주 잘 어울리게 되어 있다. 그런 그녀가 나무에서 떨어질 때 구해준 캐드는 세계에 유일한 갈듀리언으로 어느 날 눈 떠보니 폐허가 된 마을과 사라진 마음 사람들을 찾아 여행중이다. 고문서 번역을 위해 돼지마법사를 찾던 그를 베아가 집으로 안내하는데, 할아버지가 편지만 남기고 사라졌고, 할아버지를 찾아 둘이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 표지의 고양이는 베아와 함께 살던 님으로 씬 스틸러라고 할 수 있겠다. 


캐드의 성격은 베아의 해독제, 늘 불안하거나 더 불안한 베아의 반대에 있다. 이런 캐릭터를 소설이고 그래픽 노블이고 잘 못 보는데, (일단 지금 생각나는 캐릭터가 하나도 없음) 과하게 떠벌떠벌하지 않으면서도 초긍정적인 마음으로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모험을 이어나간다. 선한 캐릭터이고, 화 낼 때는 화 내는 캐릭터. 


배경들도 너무 멋있고, 모험 중간에 만나는 크리쳐들, 인물들도 다 정말로 있을 것 같이 실감 난다. 도둑 쥐같은 얄미운 캐릭터도 뭔가 있지 않을까 궁금해지게 만드는 환상적인 그래픽 노블이다. Book4 까지 나온다음에야 드디어 보게 되서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한 권씩 한 권씩 읽고, 또 읽을 그래픽 노블이 생겼다.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책이 뭐냐고 물어보면, 다 좋아.라고 대답했는데, 이 책 제일 좋아한다고 내밀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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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두사의 웃음 -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최초의 선언 앳(at) 시리즈 10
엘렌 식수 지음, 이혜인 옮김 / 마티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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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성적 글쓰기에 관해 그것이 무엇을 할지에 관해 말할 

것이다. 여성은 자기 자신을 써야/써져야 한다. 즉 여성은 

여성을 써야 하고, 여성들을 글쓰기로 오게 해야 하는데, 

그녀들은 자신의 몸에서 난폭하게 멀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와 

동일한 이유로, 동일한 법에 의해, 동일하게 치명적인 목적으로

글쓰기에서 멀어졌다. 여성은 자기 자신을 출산하고 역사를 

시작하듯이 자발적으로 텍스트에 착수해야 한다. (12-13)


엘렌 식수를 읽고 나면 늘 구멍이 많다. 이전에도 그랬는데, 그래도 이번에는 이전보다 낫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구멍이 있는대로 기록 남긴다. 독특한 판형이 원서에서 온 것인지는 모르겠다. 뒤에 보니, 프랑스어로도 절판되고 잊혀졌다가 영어권에서 인기 끌고, 다시 프랑스어로, 그리고, 이제 이렇게 한국어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언어를 건너면서 잘려나간 말들에 대한 아쉬움을 표하는 부분이 나온다. 지금 내 프랑스어 레벨로 원서로 읽는다고 더 잘 읽을리 없기도 하다. 내 친구 푸코, 내 친구 데리다 그러는데, 나는 푸코도 데리다도 읽은 적 없어서 벽을 느끼고. 


저자가 이야기하는 '여성적 글쓰기'는 나라는 독자를 만나서 더 조각날 수 밖에 없겠지만, 조각이라도 의미를 찾아본다. 70년대의 '여성적 글쓰기'보다 지금 더 나아진 부분도 분명 있고, 변하지 않는 부분들도 여전히 있어서. 그런 감각으로 읽었다. 

그러다보니, 글은 급진적이지만, 내용은 크게 급진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일견 보수적인 부분들도 느껴졌다. 


이론적 에세이와 시적 산문 사이의 글이라고 하는데, 내지 편집 디자인이 독특하다. 습관대로 왼쪽 페이지만 읽다가 다시 올라가서 왼쪽과 오른쪽을 오가며 읽다가 급기야는 글 뭉치를 읽어내게 하는 경험에서 얻게 되는 것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더 이상 과거가 미래를 결정하게 둬서는 안 된다. 

과거의 효력이 여전히 있음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다만 

그것을 반복함으로써 그 효력을 공고히 하는 것, 거기에 운명에 

준하는 종신성을 부여하는 것, 생물학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을 

혼동하는 것을 거부한다. 앞지르기가 시급하다. 


그대는 왜 글을 쓰지 않는가? 글을 쓰라! 글쓰기는 그대를 위한 

것이고, 그대는 그대를 위한 것이며, 그대의 몸은 그대의 

것이니, 그것을 취하라. 나는 그대가 왜 글을 쓰지 않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왜 스물일곱 이전에 글을 쓰지 않았는지 안다.)

그건 글쓰기가 그대에게는 너무 높고, 너무 위대한 것이기에, 

'위인들', 다시 말해 '남성 위인들'에게만 할애된 것이기 때문이다. (18-19)



지난 몇 천년간의 과거의 효력을 부정할 수는 없다. 반복하지 않기 위해 애쓰고, 벗어나기 위해 애쓰더라도 벗어나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모든 생물이 멸종을 향해 달려가듯, 그와 같은 효력도, 막상 벗어나려고 하면,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이 다 맞춰지면, 쉽게 떨어져나갈지도 모른다. 정말로 과거는 과거에 두고, 미래를 보고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과거는 아주 찐득하고, 놓지 않으려는 기득권자들과 거기에 실려 가려는 소수자와 약자들로 힘이 아주 쎄고, 끈질기지만. 아주 작은 가능성이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일지라도 '글쓰기'라는 무기를 들어서. 여자의 몸으로 여자의 글쓰기를 하는 것. 



좁은 인형의 방에서 그녀들은 빙빙 맴돌며 방황했고, 바보가 

되는 치명적인 교육을 받았다. 실제로 감금하고, 지연하며, 

아파르트헤이트 짓에 심히 오랫동안 성공할 수 있긴 하지만, 

그건 단지 한동안일 뿐이다. 그녀들이 말하기 시작하자마자, 

이름을 말하는 그 순간부터, 그네들의 대륙은 검다고, 너는 

아프리카이니까, 너는 검다고 가르칠 수 있다. 네 대륙은 거매. 

검은 것은 위험하단다. 검은 것 안에서 너는 아무것도 볼 수 없고, 

겁을 먹잖아. 넘어질지 모르니 움직이지 마. 특히 숲에는 가면 

안 돼. 그리고 그 검은 것에 대한 공포, 우리는 그것을 내면화했다. (24-25)


에세이나 시적 산문이라기 보다는 선언문 같고, 선언문 같다고 이미 얘기하기도 했지. 



지금은 옛 여자에게서 새로운 여자를 해방할 때이니, 그러려면 

새로운 여자를 알고, 그녀가 곤경에서 빠져나와 지체 없이 

옛 여자를 초월함을 사랑해야 하고, 조화롭게 파동을 모으고

쪼개면서 단숨에 시위를 떠나는 화살처럼, 그녀 자신 이상이 

되기 위해 새로운 여자가 될 것을 마중 나가야 한다. (26-29)


내 안의 옛 여자, 과거를 사는 옛 여자를 해방시키는 방법은 새로운 여자를 아는 것, 새로운 여자를 사랑하고, 새로운 여자를 마중 나가는 것. 


또한 글쓰기는 여성에 의한 말의 장악을 기입하는 행위로, 

언제나 여성 억압 위에 형성된 역사 속에 여성의 요란스러운

입장을 기입하는 행위이다. 반로고스적 무기가

단련되게끔 글을 쓰기. 모든 상징 체계 속에서, 모든 정치적 

소송에서 마침내 그녀의 뜻대로, 그녀 자신의 권리를 위해

이해관계자이자 전수자가 되기 위해서. 


지금은 문어와 구어 안에 여성이 일격을 가할 때이다. (38-39)


몸을 던지는 것. 글쓰기와 말하기로 몸을 던지는 것. 



집회에서 한 여성이 말하는 것을 (만약 그녀가 허망하게

호흡을 잃지 않았다면) 들어 보라. 그녀는 '말하는'게 아니라, 

허공에 자신의 떨리는 몸을 내던지고, 스스로를 놓아 버리고, 

비상하고, 목소리 속에 자기를 송두리째 실어 보내고, 자기 

몸으로 생생하게 그녀의 담화 '논리'를 지탱한다. 그녀의 육신이

진실을 말한다. 그녀는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녀는 실제로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육체적으로 구현하고, 자기 몸으로 그것을 

의미화한다. 어떤 면에서 그녀는 자기가 한 말을 기입하는데, 

왜냐하면 충동의 통제할 수 없는 부분과 말에 대한 열정을 

거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의 담화는 '이론적'이거나 정치적일

때조차 단순하거나 단선적이지 않고 일반화된 '객관성'을 띠지 

않는다. 그녀는 역사 속에 자기 이야기를 끌고 간다. (4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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