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회에 당첨되었건만, 자리가 부족하다는 황당한 이야기와 함께 예매권을 받았다. 그런데 이 영화가 개봉하고 극장에 오래 버티지 못했다는 슬픈 전설이...;;;;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영화를 보게 되었다. 기대 이상으로 재밌었고, 감동적이었고, 쓰라렸다.

영화는 두 경찰이 교통사고 현장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흑인 형사 그레이엄(돈 치들)은 말한다.

“LA에서는 아무도 서로를 건드리지 않아. 모두 금속과 유리 안에 갇혀 있지. 서로에 대한 느낌이 그리워서, 서로를 느끼기 위해서 그렇게 서로 충돌하게 되는 거야.”

이 대사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되고 만다.  등장 인물들은 백인과 흑인, 히스패닉, 멕시코계, 아랍, 아시아인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모두 하나 이상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인종들을 차별하고 스스로도 차별을 받는다.

L.A의 거리에서 지방검사인 백인 릭과 그의 아내는 사회적 차별의 대상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흑인 청년들을 보고는 두려워 한다.  인종적 편견을 받은 흑인 두청년은 부부의 차를 강탈하는 폭력을 휘두르고, 차별에 몸서리치면서도 그들은 아시안계의 사람이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 타이인인지 미얀마인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백인 경찰 라이언(맷 딜런)은 순찰을 돌다가 릭 부부가 강탈당한 차종과 같다는 이유로 흑인 부부 캐머런(테렌스 하워드)과 부인 크리스틴(탠디 뉴튼)을 검문한다. 라이언은 크리스틴을 검문하면서 성적 모욕감을 주지만, 캐머런은 무력하게 저항하지 못한다. 오만한 백인 경찰 앞에서 비굴해질 수밖에 없는 흑인의 처지가 신랄하게 묘사된다. 

라이언은 요로증을 앓고 있는 아버지의 일로 상담을 하지만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고 상담 책임자인 흑인 여성에게 욕을 뱉었다. 다음날 흑인 상담자는 자신의 직책을 이용하여 라이언에게 보복을 하고 영화의 마지막에서는 자신의 차를 박은 아시아인과 싸울때 그들을 아시아인이라고 몰아붙이고 험한 말을 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란인 파라드(샤운 토웁)는 총기를 사러 갔다가 오사마 빈 라덴이라 불리며 인종차별을 받는다.  총기상인은 그를 아랍인이라 욕하며 총을 안팔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딸이 겨우 무마시켜서 총을 사오지만 덤으로 얹어주는 총알에는 비밀이 있다. 

멕시칸 열쇠수리공 대니얼은 릭의 집의 열쇠를 고치지만 릭의 부인은 그가 껄렁한 옷을 입고 문신을 했다고 해서 당장에 열쇠를 팔아넘길 사기꾼 취급을 한다.  앞서 인종차별을 받은 파라드는 자신의 집 열쇠를 고치러 온 대니얼이 열쇠는 갈았짐나 문을 갈아야 한다고 하나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에게 폭언을 퍼붓는다.  결국 돈도 받지 못한 대니얼은 집으로 돌아가지만 그 뒤 파라드는 자신의 수퍼마켓이 털리고, 그 책임을 대니얼에게 묻는다.  총을 들고 그 집을 찾아가지만, 앞서 딸이 받아온 총알은 공포탄이었고, 그가 쏜 총에 대니얼의 딸이 맞았지만 모두 무사하다.

라이언의 파트너인 신참 경찰 핸슨(라이언 필립)은, 라이언의 인종차별에 욕지기를 느끼며 파트너를 바꾸지만 그 자신이야말로 인종적 편견에 사로잡혀 흑인 청년을 살해하고 만다.

맨처음 시작할 때 형사 그레이엄이 마주친 사고 현장, 그곳에서 피살자로 발견된 사람은 바로 핸슨에게 죽은 자신의 동생이었다.

릭의 차를 훔쳤던 흑인 청년중 하나는 앞을 보지 않고 운전을 하다가 아시아인을 치고 만다.  중국인이 치였다며 병원 앞에 버리고 도망을 갔는데, 그는 한국인 조진구였고, 그가 했던 일은 타이와 미얀마 사람을 인신매매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모두가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되기도 하며, 차별을 받고 또 차별을 쏟아낸다.  그들은 저마다 충돌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모두가 외롭고 부족한 사람들이다.

릭의 부인은 계단에서 굴러서 다리를 삐지만 십년지기 친구는 맛사지 받느라 병문안도 와주지 않는다.  자신이 무시했던 스패니쉬 가정부만이 진정한 친구임을 깨닫고, 라이언의 검문으로 사이가 벌어진 흑인 부부는, 다음날 라이언의 헌신적 구조로 아내가 목숨을 구하고, 남편 역시 아내와 화해하게 된다.

파라드는 대니얼을 죽이겠다고 덤비다가 그 딸을 쏘았으나 공포탄 덕으로 아이는 살았고, 그는 아이가 천사라며 마음의 안식을 받는다.

거미줄처럼 얽히고 섥힌 그들의 충돌은 누군가에게는 구원을, 또 누군가에게는 기적을, 그리고 누군가는 다시 나락으로 빠지게 만든다.

맨처음 그레이엄이 말했던 대사가 다시 떠오를 수밖에 없다.  그들은 서로를 느끼기 위해서 부딪치는 거라고....

온기와 온기가 만나서, 사람 사는 모습을 갖출 때, 그들 자신도 사람의 얼굴과 마음을 가질 수 있다.

한국인 조진구의 인신매매 현장과 사고로 죽을 뻔한 다음에 살아난 뒤 제일 먼저 한일이 인신매매 대금으로 받은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려고 한 내용 등이 씁쓸했지만 그것이 특별히 한국인을 겨냥하려고 한 내용은 아니며, 다만 주제를 찌르기 위한 하나의 도구였을 뿐이다.(물론 기분은 나빴다.ㅡㅡ;;;)

아카데미가 왜 브로크백 마운틴이 아닌 이 작품의 손을 들어주었는지 공감이 갔다.  (그리고 솔직히 이쪽이 더 재밌다...;;;;)  위기의 주부들이 현 부시 정부 체제의 미국을 묘사하는 것과 같은 현재 미국의 모습을 영화 속에서 그대로 드러내준 것 같은 느낌이다.

그들 모두는 끊임없이 충돌하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더 나은 길을, 혹은 더 못한 길을 걷기도 한다.  그러나, 인생사가... 혹은 현실이 영화처럼 로맨틱하지만은 않다.  영화는 재미를 위해서 보다 감상적이고 편한 길을 택했을 뿐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아직 치유되지 않은 것이다.

911테러의 보복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던 미국, 그것은 아무리 설명해도 변명밖에 될 수 없다.  이라크에 파병된 우리의 병사들도 마찬가지이다.  악을 악으로 갚으면서는 서로의 화해를 꺼낼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충돌'일 뿐이다.  숱한 충돌 속에서 작은 기적 하나 바라기는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다.  중요한 것은 행동이다.

그런 생각을 해본다.  우주를 개척하고 최첨단 무기를 개발하고, 과학에 쏟는 모든 에너지.  그것들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주변 이웃들의 굶주림과 질병에 먼저 투자하고 도움을 베풀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들 사회 안의 불평등과 차별과 편견의 해소를 위해서 더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 이는 미국 뿐 아니라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모두가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꿔나가야 할 몫이다.  누구도 예외는 없다.  모두가 함께, 충돌을 기적으로, 사랑으로 바꿔야 한다.

***

 

감상문을, 며칠 지나서, 그것도 하루에 두번 나누어서 썼더니 횡설수설...;;;; 그래도 뭐, 사는 이야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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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과 유진 푸른도서관 9
이금이 지음 / 푸른책들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유진이는 중학교 학년에 올라가서 자신과 같은 반에 또 다른 유진이가 있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성도 똑같은 이유진이다.  자세히 보니 같은 유치원을 다녔던 동창생이다.  그런데 작은 유진이는 나 큰 유준이를 알아보지 못한다.  더군다나 그런 유치원에 다닌 적도 없다고 한다.  분명 같은 아이인데... 작은 유진이는 왜 기억을 잃어버렸을까...

이금이 소설 유진과 유진은 성장 소설이다. 한참 사춘기를 겪을 중학생 소녀가 주인공이다.  두 유진이는 서로 다른 환경에서 다른 성격과 특징을 갖고 있지만, 둘은 동시에 같은 기억을 가진, 그래서 같은 이름이 운명같기도 한 아이들이다.

유치원 시절, 유치원 원장에 의해서 성추행을 당했던 아이들중에 두 주인공 유진이들은 다른 방법으로 상처를 꿰매느라 애썼다.  큰유진이의 부모님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며 아이를 안아주고, 네 탓이 아님을 강조하며 아이의 드러난 상처를 자연상태로 치유하고자 했다.  반면 작은 유진이의 부모님은 어찌할 바를 몰라하다가 아이에게 기억을 잊어버릴 것을 강요했다.  할머니는 깨진 그릇 취급을 하였고 어머니는 너무 쌀쌀맞았다.  성장과정에서 작은 유진이는 자신의 엄마나 아빠가 새엄마 내지 새아빠일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는 동생들과 다른 그 차별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작은 유진이는 봉합되었던 기억을 큰유진이를 만나면서 조금씩 상기하게 된다.  그 파장은 놀라웠다.  내 탓이 아닌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죄인 취급하는 가족을, 강요된 기억상실에 아이는 설 곳을 잃어버린다.   전교1등을 하며 악착같이 모범생의 모습으로 자신을 지탱해오던 작은 유진이는 이 일을 계기로 반항을 하기 시작한다.  담배를 피우고, 학원을 가지 않고 춤을 배우러 다니고 지금껏 못했던 일탈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들이 들통나면서 균열은 더욱 커진다.  부모님은 왜 그랬냐고 묻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망가지기 전에 미국에 보내겠다는 엄포와 무서운 매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한편, 큰유진이는 유치원 동창생인 건우와 예쁘장하게 연애를 하고 있었는데, 건우 어머니로부터 유진이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고는 그만 헤어지자고 한다.  어머니께서 '그런 애'와 사귀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건우의 어머니는 사회운동가로서 사건 당시 피해자의 어머니들을 위해 발벗고 도와주었던 사람이었다.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우리 사회의 청소년들에 대한 전문적 조언을 아끼지 않던 그녀의 이중성과 건우의 모습에 유진이는 큰상처를 받는다.

집에 갇혀버린 작은 유진이는 큰 유진이에게 도움을 청하고 큰유진이는 단짝 친구 소라와 함께 작은 유진이를 구출(?)한다.  갈 곳 없는 아이들은 바다를 보기 위해 정동진행 기차를 타고 나름 무모하면서 기대되는 일탈을 해버린다.

그러나 정동진에 도착했을 때는 학원비로 챙겨두었던 돈을 도둑맞은 뒤였고, 결국 아이들은 부모님께 연락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을 팽개치고 달려오신 큰유진이의 부모님은 혼을 내기는커녕 오히려 아이를 보듬어 안고 무사함에 감사하기만 했다.  슈퍼마켓 운영으로 늘 바빴던 소라의 어머니는 딸을 때리며 혼내키기도 했지만 그 끝에 묻어나는 울음과 따뜻한 포옹은 소라의 마음도 울려버린다.  그러나 멀찍이 떨어져서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 작은 유진이의 어머니는 여전히 차갑기만 하다.  돌아오는 길, 어머니는 차를 돌려 어느 호텔에서 묵자고 하였다.  내내 억눌렀던 울분을 작은 유진이는 터트리고 만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어머니의 미숙한 모성애와 서툴렀던 사랑을 확인한다.

세상에 어느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 사랑하는 방법은 저마다 모습이 달랐다.  제대로 표현되지 못한 애정은 오해와 불만을 만들고, 작은 유진이의 경우처럼 긴 상처를 남겨 서로를 상처내기 일쑤다. 

이 책은 열다섯 소녀들의 감수성과 그들의 고민, 그들의 행동들을 딱 그 모습 그대로 묘사해내고 있다.  건우와의 문자 데이트를 소라를 통해서 해야 했던 큰유진이는 핸드폰을 사달라고 노래를 불렀지만 어머니에 의해 무시되었고, 아버지께서 핸드폰을 사러 같이 가자는 말에 자신을 위한 선물이라 여겨 콧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신의 핸드폰을 장만하신 거였고, 자신이 넘겨짚은 거지만 상처받은 유진이는 동생과의 싸움에서 기어이 감정이 폭발하고 만다.  이 과정에서 부모님이 보여주신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어릴 적 읽었던 소설 "홍당무"에서 무섭기만 했던 홍당무의 어머니와 비슷했달까.  결국 부모 마음이란 그렇지... 라는 안도감과 유진이의 반응들이 너무 귀엽고 생생해 어릴 적 내 모습도 같이 떠올릴 수 있었다.

단짝 친구 소라의 캐릭터도 인상적이다.  슈퍼마켓을 운영하시는 부모님은 자식들이 공부를 잘해 앞가림을 하면 모를까, 아니라면 가게에서 배달을 시키겠다고 하셨다.  언니인 보라는 죽어라 공부를 하지만, 소설가가 꿈인 소라는 차라리 배달을 하는 것이 자신의 인생 겸험을 늘려줄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  어른들의 기준으로 공부는 못하고 딴 궁리만 하는 소라가 우등생은 아닐지언정, 아이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고 나름 확고한 인생관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유진이와의 우정은 또 얼마나 깍듯하던가.

건우와 건우 어머니의 캐릭터도 생각의 여지가 있다.  멋진척 쿨한척은 다했지만 사실은 마마보이였던 건우와, 사회적 명예와 위신은 지켜도,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는 친절은 아니었던 그녀의 가식은 유진이를 향한 반응에서 이미 드러났다.

작은 유진이를 가졌을 때 너무도 가난했던 부모님은, 자신들에게 닥친 사건이 가난 때문이라고 탄식했다.  부부모님이 반대하는 결혼을 했던 그들은, 부모님께 순종하여 집으로 들어가며 자신들이 감당해야 했던 책임과 상처를 외면해버렸다.  그것은 결국 그들과 딸 작은 유진이에게 더 큰 상처로 돌아오고 말았다.

성장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이 책이 시사해주는 바는 작지 않다.  비단 청소년들의 읽기 책으로 국한할 수도 없다.  거기에는 이 책이 담고 있는 소재의 위험성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성범죄는 유독 건드리기 어렵고 민감한 부분이다.  전통적 유교 질서에 얽매여 있는 이 사회는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더 발뻗고 자지 못하게 만들고 가족이나 이웃들도 어떤 의미로든 가해자의 입장이 되곤 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의 건우와 건우 어머니, 그리고 작은 유진이의 부모님과 조부모를 떠올리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근래 들어 더더욱 성폭력 사건이 많았는데, 이는 단지 피해자들이 마음을 독하게 먹는 것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대책이 필요하다.  사람들의 의식이 먼저 바껴야 함은 물론이다.  더군다나 성폭력은 재범죄율이 높은 만큼 거기에 대한 시급한 대책이 요구된다.  이 책이 그러한 여러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서도 경종을 울릴 수 있기를 바란다.

참 아프고 참 강동적이었던 글을 만나서 기뻤다.  도서관에서 책을 골라 본 것인데, 아무래도 구입해서 소장해야겠다.  두루두루 선물도 하면 좋겠다.  오늘 수업에 학생들에게 얘기해주면 열다섯 소년소녀들은 즐거이 들을까? 음... 솔직히 모르겠다ㅡ.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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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 시절, 텔레비전에 나온 한 배우를 보고 한순간 반해버렸다.  중고생에게 흔히 있는 현상이었지만 내게는 흔치 않았던 별스런 일. 드라마의 제목은 "칠협오의"였고, 그의 배역은 천하제일검 "전조"였다.

그러나 나의 달콤한 짝사랑은 뜻밖의 난관에 부딪쳤으니, 보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방송이 끝나버렸다.  난 맨 마지막 방송(8부작)의 첫회, 그것도 달랑 20분만 본 것이다.(ㅡㅡ;;;)

그러나 뜻밖의 구세주가 있었으니 바로 내 짝꿍.  당시 문.이과를 통틀어 전교 1등이 화려한 명함을 내밀던 그녀석이 이 배우를 너무 좋아하여 몇몇 작품을 녹화해 둔 것이다.(그 친구는 텔레비전도 음악도 듣지 않는 순수? 공부파였는데 예외적인 사건이었다.)

그래서, 나의 짝사랑은 다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런데, 너무 좋다고 자기 암시를 많이 걸었던 탓인지, 마음 속이 자꾸 허전하고 점점 더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스스로 그의 이야기를 쓰기로 마음 먹었다.  지금이야 "팬픽"이라는 이름으로 일반화된 글쓰기이지만, 그때는 그런 것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도 없었고, 나 역시 일종의 연애편지 감정이었을 뿐이다.

첫 시작이 중요하다며, 95년. 12월 25일부터 자정부터 시작된 글쓰기는, 이듬해 6월 22일, 정확하게 180일 뒤에 완결이 되었다. (흠, 내가 고3이었다는 사실은 별로 중요치 않았다..;;;;)

그리고, 금세 잊혀졌다.  정말 잊고 산 것은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는 그 배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기억에만, 가슴에만 묻힌 채 시간이 흘렀다. 언제까지? 2000년까지.

내가 처음으로 컴퓨터를 접한 해였다.  인터넷이라는 것의 편리성을 막 깨닫던 어느날, 우연히 그 배우의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초은준"이라고.

그랬더니, 어머나 세상에. 그토록 많은 자료가, 그토록 많은 팬페이지들이 나타날 줄이야.  심지어 미국팬 중국팬 등등등 나올 정도였으니 나의 놀라움은 끝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첫번째 줄 사이트에 들어갔다. 나중에 알았는데, 국내에서 초은준 팬페이지로는 처음 등장한 홈페이지였고, 꽤 유명한 곳이었다.  그곳 방명록에 제 홈에도 놀러오세요~라고 수줍은(...;;;) 요청을 했었다.  그런데 정말 많은 사람들이 내 홈페이지를 찾아주는 것이다.

당시 나는 네이버에서 만들어주는 3분 만에 뚝딱 홈페이지를 갖고 있었는데, 두달 동안 나 혼자서 빈집을 지키고 있던 터였다.  왜 사람들이 오지 않느냐고 투덜대면서..ㅡ.ㅡ;;;;

그래서, 컴퓨터 쓰는 재미가 늘어났다.  홈페이지를 예쁘게 가꾸고 싶어서 태그라는 것도 배워보고 이것저것 많이 시도도 해보았다. 

컨텐츠가 없었던 때였기에 고딩 시절 썼던 소설을 워드로 옮겨서 게시판에 올렸는데, 내 홈을 찾아준 이들이 재밌다고 해주는 것이다.  역시나 순박했던 시절, 독자들의 아우성이 얼마나 기쁘던지...

다시금 내 글을 읽어보니 그 유치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면서, 이 졸작을 그대로 옮길 수가 없어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교정이라는 것이 손을 대면 댈수록 일이 커지는 법. 이야기가 커지고 등장인물이 늘어나고 이야기도 바뀌는 것이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헤어날 수 없는 늪이었다ㅠ.ㅠ)

사람들의 반응이 기쁘고, 거기에 부합하고 싶고, 더 멋진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은 나를 굉장히 압박하곤 했었다.

그래서 그 글은 너무도 오래 연재되면서 끝을 보지 못했다.  고백하자면, 지난 2005년 10월 초에 연재를 하고 장기간 휴면 상태.

신상에 여러저러한 일들이 생겨 글쓰고 있을 여유가 전혀 없었던 탓도 있지만, 너무 커져버린 이야기에 내 스스로 책임을 지지 못했던 까닭.

그래도 여전히 기다려주는 이들이 있다. 가끔 언제 다시 쓰냐고 묻지만 재촉하지 않고 마냥 기다려주는 소중한 독자들이 아직도 있다.  나 자신도 무사히 끝내고 싶은 마음 굴뚝이지만, 현재로서는 언제 다시 이어질 지 자신이 없다.  그렇지만 A41500장 분량의 장편을 먼저 포기할 마음은 없다.  시간이 걸려도, 반드시 끝내고 말 것이다.

이쯤되니, 내가 처음 좋아했던 배우보다, 어느새 작품 속의 "전조"를 나는 더 사랑하게 되었다.  너무 완벽한 주인공상을 원했고, 때문에 무리한 에피소드의 전개로 주인공 고생도 많이 시켰지만, 이제는 마치 내 가족이나 된 것처럼 가깝고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렸다.

처음 십대의 그 마음으로 지금껏 그 배우를 좋아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로 인해 나는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소중한 글쓰기를 통해서 다양한 기쁨도 맛볼 수 있었다.  멋진 추억을 만들어준 그에게 무척 감사하게 여긴다

이제는 꽃미남 소리를 하기에는 그도 나이를 먹었고, 나도 나이를 먹었지만, 그는 여전히 내게 멋진 배우로 남아 있다.



최근 그가 한국에 오겠다는 발언을 했다.  만우절 농담으로 판명되었지만, 언제고 올 마음이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언제나 고아원을 방문하며 이웃 돕기에 앞장섰던 그는, 우리 한국 팬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자선 행사에 열심인 줄로 안다...;;;;;

지인들과, 당장 자선 단체부터 가입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발 동동 구르며, 괜히 한번 웃어보았다.  순수한 열정에서 시작된 자선돕기가 아니어도, 그를 통해서 좋은 일 한가지를 더 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 아닌가.  아마 이후로도, 그를 통한 우리의 만남과 추억들은 계속해서 쌓일 것이다.  행복한 기대를 미리부터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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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2 - 한국만화대표선
박흥용 글 그림 / 바다출판사 / 2002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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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 생일 선물로 받은 책이다. 물론 내가 고르긴 했지만^^;;;

박흥용씨를 처음 만난 것은 2002년이다. "내파란 세이버"가 오늘의 만화상이던가..;;;;를 받았는데, 몹시 궁금해하다가 우연히 발견하여 읽었었다.  그때도 느꼈지만 작가는 '사회의식'을 철저하게 반영한 작품을 쓰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주인공 견주가 양반가의 서자로 태어나는 설정부터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다.  당시 사회에서 양반가의 서자는 일반 농민보다도 암울한 위치였었다.  먹고 사는 걱정이야 덜하겠지만 사회적 성공이 막혀있는 답답한 현실을 젊은 혈기가 이여내기에는 참 버거웠을 것이다. 주인공 견주도 마찬가지다. 남들이 견자(개새*)라고 불려대는 이름을 들으며 욱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른 적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정신적으로 성장해가면서 스스로 자신을 견자라 부르며 낮추는 모습은 그랬기에 더욱 인상적이다.

한 세상 한만 남기고 꺾일 수도 있었던 그의 삶은 스승 황정학을 만나면서 180도 달라진다.  양반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태생적 장애로 장님이 되어버린 그는, 견주의 설움보다 더 가혹한 대접과 대우를 받으며 유년기를 보내야 했다.  그를 가두었던 독을 깨고 나오면서 그는 다른 인생을 살기 시작한다.  천하를 주유하며 침술쟁이로 생계를 잇지만 그는 당대의 유명한 검객이기도 했다.  그는 한과 설움을 긍정적으로 승화시키는 법을 깨우쳤다.  그리고 그가 전수해준 그 가르침은 견주에게 있어서 훌륭한 검객이 된 것보다 더 소중한 배움이 되었을 것이다.

작품에는 실존인물인 이몽학도 나온다.  역시 당대의 사회적 한계와 설움에 악이 받쳐있던 그의 모습은 오늘을 사는 젊은 혈기의 청년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비춘다.

작가가 여성을 묘사하는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고정관념에 의하면 조선 시대의 여성은 수동적이고 남자의 부속물 정도로만 인식되는데, 모두 아니라고는 말 못하지만 적어도 임진왜란 이전의 여성의 지위는 열녀문 속의 여자들보다는 좀 더 인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작품 속에서 대쪽이라 자처한 기생과 양반집 귀한 딸이었던 여인(아, 이름이 생각 안 나는..;;;;)은 견주를 좇아가기 위해 험한 길도 마다하지 않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단순히 남자에 미쳤다고 생각지 말자^^;;;) 그래서 마지막 엔딩의 여운은 꽤 오래 간다.  열린 결말이랄까. 이후에 이어질 그들의 삶과 사랑을 상상하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이었다. (그래도 나는 혹시 완결이 아닌가 하고 책을 자세히 살펴보기도 했다...;;;;)

스승 황정학의 가르침으로 검술을 연습하는 모습과, 그것을 실제에 응용하여 나날이 성장해가는 주인공의 검술 단련 모습도 꽤 인상적이었는데, 그 속에 인생이, 철학이 담겨 있었던 까닭이다.

분류하기에 따라서 이 책은 만화보다 역사 쪽에 다가가기도 하는데, 내 마음은 오히려 철학 쪽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설마, 아직도 만화는 아이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여자들 취향의 이쁜 그림체는 아니지만 아주 부담스러운 그림도 아니고, 자연 풍광의 넉넉한 모습과 인물들이 사실적 묘사는 그림 보는 재미도 제법 더해준다.

그리고, 제목을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이라고 하지 않고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라고 의도적인 파격을 보인 이유를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있을 듯.

사족이지만, 영어판도 나와 있다. 수출작품이라는 것. 외국인의 눈으로 이 작품을 보면 영화 "와호장룡"을 보았을 때의 경탄이 나오지 않을까.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오버일까? 다모도 만들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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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국사기 (전3권)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02년 3월
평점 :
절판


이덕일씨 자신이 어느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그는 역사서의 대중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쓴 책들을 살펴보면 전문서적의 내용을 다루지만 모두 쉽게 서술했다.  마치 소설가가 이야기를 펼쳐내는 것처럼 그의 말/글 솜씨는 옛 이야기 들려주듯 자연스럽고 흥미 진진하며 다음 내용이 궁금해지는 마력까지 보여주었다.  기존의 역사서가 이러이러했다. 저러저러했다. 라고 표현했던 내용들을 그는 보다 극적으로 전개했다고 보면 아마 비유가 될 것이다.

그래서 그가 또 비판을 많이 받기도 한다.  한마디로 주류가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를 소설화시켰다는 말을 듣는다. 로마인 이야기의 시오노 나나미가 받는 그런 비판이랄까.

내 생각은 다르다.  쉽게 풀어 쓴 것과 멋대로 지어 쓴 것은 구분해야 한다.  그는 다작을 하고 있지만, 결코 학문 연구를 게을리해본 적이 없다고 당당히 고백했다.  그가 쓴 책들과 그가 참고한 사료들의 면면을 살펴보아도 결코 거짓이 아니라고 본다.

내게 있어 이덕일씨의 역사서들은 역사를 드라마틱하게 전개시켜주는 좋은 교과서인 셈이다.

이책 오국사기의 오국은 그동안 우리가 받아온 역사 교육의 편협함을 단적으로 지적해 준다.

고구려 백제 신라, 이 세 나라가 삼국시대라고 불릴 만한 시기는 그들의 전체 역사를 통틀어서 백년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그리고 익숙하게 삼국을 말한다.  북쪽에 있었던 부여도, 남쪽에 있었던 가야도 말하지 않는다.  교과서에서도 그들은 찬밥 신세다.  그런 나라가 있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 까마득히 잊어버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물론, 이 작품에서의 오국은 중국과 왜/일본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저자의 윗 생각은 변함 없지만, 책의 전개 과정에서 중요하게 다뤄진(또 시기적으로 이 책에서는 부여와 가야가 망한 시점이다.) 오국은 중국과 우리나라 일본까지의 범위이다.  당시의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유기적으로 연결시켰다고 보면 된다.

고구려 영영왕때나 연개소문의 일화등은 작가적 상상력이 들어갔음을 부인하지 않겠다.  그러나 무작정 애국심으로 그들을 미화한 것은 아니다.  설득력 있는 상상력이랄까. 

이 책은 고구려의 추운 날씨를 사실적으로 묘사했는데, 돌이켜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반도 북쪽 땅을 중국 땅이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역사적으로 그 지역은 북방 민족이 차지해 왔었지, 중국의 영역이었던 적은 드물었다.  그런데 무의식적으로 위쪽은 중국 땅..이라는 공식이 자리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선입관을 깨부술 수 있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그들이 잃어버린 고구려의 땅으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나 역시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은 금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나 백제가 아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인가라는 사실이다.

이덕일씨는 김춘추가 고구려 보장왕을 만났을 때 토끼와 거북이 일화를 이용하여 위기를 벗어나는 장면을 맛깔스럽게 묘사했다.  당시 국제외교에 익숙하지 않았던 김춘추의 촌스러움은 동시에, 이미 거짓말히 횡행하는 고구려 외교 모습의 썩은 단면도 보여주는 것이다.  아쉽고 또 아쉽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신라의 복잡한 성관계(?) 혹은 주도권 싸움을 잘 풀어준 것도 고마운 일이다.  화랑세기에 기초한 관련된 책들을 찾아 보았지만, 이덕일씨만큼 명확하게 그들의 독특한(유교적 윤리의식에 길들어진 우리 눈으로 보았을 때의) 성문화와 정치 주도 세력을 설명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다시 강조하지만 역사 대중서이기에 쉽게 썼지만 결코 가볍기만 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다.

세권에 달하는 내용이지만 읽은 데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만큼 재미 있고 흡인력 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익숙한 수/당과 삼국의 이야기보다 왜의 이야기부분이 잘 흡수가 되지 않았는데, 익숙치 않은 이름들이 큰 걸림돌이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아울러 우리와 일본의 역사 관계에서 "가야" "왜" "임나 일본부" 등등에 관한 일들은 아직도 사료가 부족하고 더 많은 연구가 되어야 할 영역인데, 이러한 것들이 보다 활발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연구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부족한 사료를 어떻게 메꾸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기존의 학설을 부정하는 것이 괘씸죄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고대사는 광활한 만큼 아득하다.  그 넓은 대륙도, 호방한 기상도 지금의 우리에게는 참으로 먼 이야기로 보인다.  그러나 멀고 아득하다고 아예 제낄 수는 없지 않은가.  더 잊기 전에 재빨리 멀어져가는 끈을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럴 때에 흩어져 있던 우리의 고대사 조각이 하나 둘 퍼즐 조각을 맞추면서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을까

욕심같지만, 이덕일씨처럼 역사를 대중적으로 소개하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 위해 애쓰는 학자가 더 많이 나왔으면 한다.  그리고 그들이 연구를 맘껏 할 수 있는 풍토와 여건이 마련되기를... 그리고 그 고마움도 잊지 않는 우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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