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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확장 과정 전형적 정복형태”
지리학자 관점 문헌연구 반 답사 반
논리 갖춘 파격적 추론 끌어내
“왕도로 시대조명 이미 20년 계획표”
한겨레  임종업 기자 김태형기자
» <고대도시 경주의 탄생>
책·인터뷰 / ‘고대도시 경주의 탄생’ 쓴 이기봉 규장각 연구원

“신라는 통일국가가 아니라 정복국가였어요.”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이기봉(41) 책임연구원의 말은 충격적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고 배웠고 그 나라를 ‘통일신라’라고 부르는데 그게 아니라는 거다. 그는 후삼국에서 고려로 이행하는 과정은 통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신라는 아니라고 못 박았다.

“정복국가에서 나타는 가장 큰 특징은 다른 민족에 대한 차별이에요. 무굴제국이나 청나라가 대표적인데, 신라도 똑 같아요. 자신의 세력권으로 편입된 지역과 지역민을 철저하게 차별했습니다.”

그가 근거로 드는 것은 경위제-외위제, 골품제, 화랑도 제도.

왕경인한테만 주어지던 벼슬인 경위는 17개 관등, 지방 유력자한테 주어지던 외위는 10개 관등으로 되어있다. 경위는 모든 관등이 주어진 반면 외위의 가장 높은 악간은 제7관등인 일길찬에 상당했다. 문헌상으로는 그보다 하나 아래인 술간(사찬에 해당)만 나타나는데 중앙정부가 임명하는 촌주나 지방관의 보조자 역할에 그쳤다. 진골-6두품-5두품-4두품으로 된 골품제 역시 왕경인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화랑도는 왕경인만을 대상으로 삼았고 그 가운데 진골이 핵심이었다. 정복의 주체였던 왕경인의 후손인 이들은 정복한 땅을 순례하면서 통치자의 자세를 배우고 영토의 특징을 익혔다.

“신라의 영역 확장과정을 보면 정복임이 확연해요. 동심원적인 전염확산 형태를 보이거든요.” 신라의 1차 팽창기(42~147)는 태백산맥 동쪽에 집중돼 있는 반면 2차 팽창기(185~297)는 태백산맥을 넘어 동북방향으로 뻗어나간다. 당시는 소국이 분립해 있었기 때문에 만일 신라가 그들과 연합을 추구했다면 전염확산 아닌 다른 형태의 확산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박사논문을 완전히 뜯어고쳐서 낸 <고대도시 신라의 탄생>(푸른역사)에는 이러한 파격적인 추론들로 가득하다. 추론이라고 해서 단순논리가 아니라 문헌을 새롭게 해석하고 현장을 답사하여 얻어낸 것들이다. 그가 이러한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역사학의 변방에서 접근했기 때문. 지리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모두 취득했다. 그에게 지리학은 목표가 아니라 관점이었다. 답사가 몸에 배었다는 그는 논문을 쓰면서 한달에 걸쳐 경상도를 샅샅이 훑었다고 전했다. 그렇지만 답사가 능사는 아니었다. 문헌연구가 탄탄할 때 답사가 의미있다는 것. 굳이 말하자면 문헌반 답사반. 그는 새로운 문헌해석은 5%에 있다고 말했다.

출발점은 삼국사기 권34 지리조에 나오는 구절, ‘今按 新羅始祖赫居世 前漢五鳳元年 甲子 開國 王都長3千75步 廣3千18步 35里 6部’다. 그 중 왕경의 크기를 말하는 ‘王都長3千75步 廣3千18步 35里 6部’를 달리 읽었다.

‘왕도는 길이가 3075보, 너비가 3018보인데 (그 안에) 35리와 6부가 있다’라는 기존 해석을 버렸다. ‘(그 나라의 범위에는 첫째) 왕도가 있었다. (왕도의 규모는) 길이가 3075보이고, 너비가 3018보이며, (그 안에는) 35리가 있었다. (둘째) 6부가 있었다.’ 그가 5% 새롭게 읽은 문장이다.

여기에서 왕경의 형성과 성격변화로 나아가고, 6부는 6촌의 위치비정으로 확산됐다. 그의 기민함은 영일냉수리비와 울진봉평비에 등장하는 인물의 부별 분포를 전혀 새롭게 보는데서도 드러난다. 수적으로 양부와 사량부가 압도적으로 많은데, 대부분 연구자들은 두 부가 나머지 네 부보다 사회·정치적으로 우위에 있었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그는 6세기 초에 도시가 형성돼 있었고 지배층이 살았던 도시가 양부와 사량부에 걸쳐 있었기 때문으로 보았다.

“3~4년 단위로 연구계획이 60살까지 짜여있어요.” 경주를 시작으로 후삼국, 고려, 조선의 수도를 통해 시대별 국가의 흥망을 꿰고 이를 중국과 일본까지 확장한다는 계획이다. 학문 간의 벽을 깨버린 그는 이제 막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 훨훨 날아오를 채비를 하고 있다. 눈빛이 무척 맑다.

글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사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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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3-10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란이 크겠다. 연구가 더 가열차게 진행되기를...

짱꿀라 2007-03-10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기사 봤습니다. 논란보다는 더욱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되어집니다. 답사도 더 필요하고요. 우리나라의 문제점은 답사 없이 거의 문헌중심으로 책을 출간하는데 있지 않나 싶습니다.

마노아 2007-03-10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행히 저자분은 답사가 몸에 배었다고 하네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듯 합니다. 저자분도 조급해하진 않는 것 같아요. 다행히. ^^

비로그인 2007-03-11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여튼 이런 책이 좋습니다(--!!)

마노아 2007-03-11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책일지 궁금해요. ^^
 

공중전화, 수명 다하고‥
[MBC TV 2007-03-08 21:30]    
[뉴스데스크]

● 앵커: 길거리에 있던 공중전화와 우체통이 하나둘씩 철거되고 있습니다.

벌써 많이 없어졌습니다.

이 디지털시대에 이제 추억 속으로 사라지는 대표적인 두 가지, 강연섭 기자가 보도합니다.

● 기자: 10년 전 한 대학가의 공중전화.

10분도 좋고 20분도 마다않고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건 익숙한 풍경이었습니다.

하지만 10년 뒤인 오늘 서울종로 한 복판.

공중전화를 얼마나 이용하는지 30분 동안 지켜봤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지만 공중전화를 이용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기중기에 들어올려 쓸쓸한 퇴역을 맞는 한 공중전화.

일주일 수익은 고작 2만원.

결국 버텨내지 못하고 17년의 수명을 뒤로 하고 사라졌습니다.

공중전화는 불과 8년 만에 반 이상이 줄었고 올 한 해도 1만 500대가 사라질 운명에 처했습니다.

● 인터뷰: 예전에는 저희들이 그것을 수리하기 위해서 줄 선 사람들의 양보를 얻어가면서 수리를 하고 그랬거든요.

요즘은 일주일 가봤자 거의 통화량도 없고 해서 좀 씁쓸하죠.

● 기자: 신세가 처량하기는 우체통도 마찬가지.

집배원이 우체통을 열었더니 편지봉투 사이에 먹다버린 우유와 종이컵이 들어있습니다.

다른 데서도 비닐봉지와 빈깡통이 나왔습니다.

이렇게 걷어오는 쓰레기는 우체국마다 하루 평균 2, 3kg, 편리함을 추구하는 세태 속에 우체통도 6년 만에 40% 이상 줄었습니다.

느리고 불편했지만 소중한 정성이 담겨 있는 것들이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 이제는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MBC뉴스 강연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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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3-08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 안에 공중전화가 있다. 오늘 모처럼 가까이 가서 보고 왔는데, 누구의 손길을 탄지 오래인 것 마냥 먼지가 앉아 있었다. 모든 학생들이 다 핸드폰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공중전화를 쓰지 않는다. 나도 한통 써보고 싶었는데 전화카드가 없어서 그냥 구경만 하고 돌아왔다...;;;;

뽀송이 2007-03-08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요즘은 정말 공중전화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해적오리 2007-03-08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지하철 역에서 완전히 방치된 공중전화를 봤어요. 얼마나 을씨년스럽던지...

마노아 2007-03-09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중전화도 보기 힘들고, 사용하는 걸 보는 것도 힘든 것 같아요. 고장도 많구요..;;; 사라져가는 것들에 안타까움이 묻어나요.
 

고종 황제 가족사진 '조작' 됐다
[오마이뉴스 2007-03-08 18:56]    
[오마이뉴스 이순우 기자] 몇 해 전에 이른바 '고종황제 가족사진'이란 것이 세상에 홀연히 그 존재를 드러냈다. 그러나 각 신문지상에 이 사진이 소개되자마자 이것의 진위여부에 대한 논란이 일부에서 제기되었다. 말하자면 합성사진이라는 것이다.

인물의 배치간격이 일정하지 않고, 통칭 '영친왕'(의민황태자, 일제 때는 이른바 '이왕세자'로 격하되었다가 1926년 이후 '이왕'을 승계)이 옹색하게도 고종과 순종의 사이에 끼어있는 듯이 배치되어 있는 것이 영 어색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독 영친왕의 시선만 사진기 쪽을 바라보지 않고 있다는 것도 가짜를 의심케 하는 빌미가 되었다.

역사적 사실관계에 비춰보더라도, 이 사진은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문도 제기되었다. 이 사진의 최초제공자는 "1915년경 영왕의 일시귀국을 기념해 창덕궁 인정전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는 설명을 덧붙였다고 전한다. 하지만 영친왕은 1918년 1월에야 조선에 돌아오게 되므로 이러한 설명은 전혀 잘못된 것이다.

몇 가지 논점에 따라, 이 사진의 진위여부가 의심된다는 내용은 그 당시 <동아일보> 2004년 5월 6일자에 "[줌인] 고종황제 가족사진 이것이 궁금하다"는 기사로 비교적 소상하게 요약 정리된 바 있었다. 하지만 이 기사에서 이런저런 논점에 대한 의혹만 지적하였지, 감히 '조작'사진이라고까지 단정 짓지는 못했던 것은 아쉬운(?) 대목이었다.

▲ 2004년 4월말경에 느닷없이 세상에 등장하게 된 문제의 '황실관련 사진'이다. 하지만 이 당시는 사진상태가 조악하고 배경이 어둡게 처리되어 있어 정확한 사진판독이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사진 속 인물은 왼쪽부터 의친왕 이강, 순종, 영친왕, 고종, 순종비, 의친왕비, 의친왕 장자 이건이고, 앉아있는 아기가 덕혜옹주이다.)
ⓒ2007 이순우
그런데 세상일이란 게 때로는 참 묘한 것이, 이 사진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여러 의혹이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용케도 살아남았다. 아니, 오히려 사진의 존재가 널리 공인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지난해 경복궁 안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에 가보았더니 첫 번째 진열실로 들어가는 초입에다 이 사진을 확대한 것으로 벽면전체를 장식해놓은 광경이 눈에 띄었다. 이번에 2월 27일부터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흥선대원군과 운현궁 사람들> 전시회에 둘러보았더니, 이곳에도 그 문제의 사진이 버젓이 걸려있었다.

일간신문을 통해 합성의혹이 제기되고 또한 조금만 역사자료를 고증해보더라도 사실관계에 전혀 맞지 않은 저런 사진을 어떻게 국공립 박물관에 버젓이 걸어놓을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을 퍼뜩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조작의 이유, 오려붙인 흔적 역력

단언컨대, 이 사진은 명백한 '조작사진'이다. 이러한 판단의 근거는 크게 세 가지 논점으로 정리할 수 있다.

▲ 이번에 서울역사박물관의 '흥선대원군과 운현궁 사람들' 전시회장에 출품된 사진자료이다. 고종과 순종 사이의 어깨너머로 영친왕의 다른 사진을 오려붙인 흔적은 육안으로도 쉽사리 확인할 수 있다. 이 사진은 서울역사박물관의 상설전시관에도 진열되어 있다.
ⓒ2007 서울역사박물관
첫째, 이 사진은 아주 원시적인 방법으로 '조작'되었다. 이 사진이 합성이네 마네 하지만, 그건 어느 정도의 기술적인 합성능력이 게재되어 진위여부를 가려내기가 어려울 때나 사용되는 말이고, 이 사진의 경우는 전혀 그러한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번에 서울역사박물관에 진열 전시되어 있는 문제의 사진을 들여다보면, 원래의 사진에다 영친왕의 다른 사진을 따로 오려붙인 흔적이 역력하다. 이건 사진학 전공자들을 동원할 것까지도 없고, 두 눈이 멀쩡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확연히 가려낼 수 있을 정도였다.

2004년도에 각 신문지상을 통해 소개된 사진은 인화상태가 조악하고 배경부분도 너무 어두운 것이어서 별개의 사진을 오려붙인 흔적을 판별하기가 어려웠지만, 이번에 "흥선대원군과 운현궁사람들"에 출품된 해당 사진은 인화상태가 매우 선명하여 가까이서 쳐다보면, 다른 사진을 오려붙인 것이란 점이 그대로 드러난다.

어떠한 목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인위적으로 오려붙인 게 명백하다. 이로써 멀쩡했던 원래 사진까지 그 가치를 현저하게 훼손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누가 이런 짓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역사자료의 조작행위에 대한 책임추궁은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덕혜옹주 나이를 거꾸로 먹어?

이 사진이 조작된 것이라는 두 번째 논점은 '역사적 사실' 그 자체이다.

먼저, 위의 사진은 언제 어디에서 촬영된 지가 분명하지 않다. 처음 사진이 세상에 소개될 때에 "1915년경 영왕의 일시귀국을 기념해 창덕궁 인정전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는 설명 정도가 주어졌을 뿐이다. 물론 잘못된 설명이다. 사진제공자라고 해서 그런 부분까지 정확히 알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잘못 추정하였다고 그 부분까지 책임을 추궁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몇 가지 기초적인 사실관계들을 검증해보면, 이 사진은 "역사적으로"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 금세 드러난다.

이 부분을 하나씩 설명하면, 이러하다.

사진 속에 고종황제(1852-1919)의 모습이 보이므로, 이건 1919년 이전에 촬영된 게 확실하다. 그리고 영친왕의 모습이 보인다는 것은 그가 국내에 되돌아왔을 때에 촬영된 기념사진이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아울러 고종이 일본으로 건너간 적은 결코 없었으므로, 이건 결단코 국내에서 촬영된 것이다.

그렇다면 고종황제가 세상을 뜰 때까지 영친왕은 몇 번이나, 그리고 언제 조선으로 되돌아왔던 것인가?

대한제국 시절 황태자였던 영친왕은 일본유학이라는 명분으로 이토통감과 더불어 일본으로 건너갔으니, 이때가 1907년 12월 5일이다. 그 이후 그는 부왕인 고종황제와 딱 세 차례 상면할 기회를 가졌다. 아래는 이른바 이왕세자의 귀선(歸鮮, 그 당시는 조선에 돌아오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다)에 관한 연혁이다. (다만, 날짜는 서울체류일자를 기준으로 정리하였다.)

제1차 귀선, 1911.7.23~8.5, 생모인 순헌귀비 엄씨의 장례(1911.7.20일 엄비 훙서, 8.2일 장의 거행)
제2차 귀선, 1918.1.13~1.26,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 및 육군소위 임관 후 귀국
제3차 귀선, 1918.8.28~9.2, 고종 환후 위문차 귀국(이후 1919.1.22일 고종 훙거로 1919.1.24일에 급거 귀국)

이렇게 보면, 영친왕이 등장하는 이 사진은 1918년 1월 이전에 촬영된 것일 수는 결코 없다. 더구나 같은 사진 속에는 덕혜옹주의 모습까지 보인다. 덕혜옹주의 출생일자는 1912년 5월 25일이다. 여동생 덕혜옹주와 오빠인 영친왕의 첫 대면은 당연히 1918년 1월에야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이 사진이 엉터리라는 명백한 증거자료가 있다. 바로 아래에 나오는 별개의 사진자료(<매일신보> 1918년 1월 22일자 수록)가 그것이다. 이 자료 역시 황실관련사진으로서는 제법 많이 알려진 것으로, 이번 서울역사박물관의 전시회에도 출품되어 위의 조작사진과 나란히 걸려있다.

▲ <매일신보> 1918년 1월 22일자에 수록된 이른바 '이왕가(李王家)' 일족의 사진자료이다. 이 사진은 촬영일자가 분명하고,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첫 대면 사진이라는 점에서 사진조작여부를 가려내는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2007 이순우
이건 영친왕(당시 이왕세자)이 귀국하면서 고종황제(당시 이태왕), 순종황제(당시 이왕), 순종황후(당시 이왕비), 덕혜옹주와 더불어 1918년 1월 20일에 덕수궁 석조전에서 일본요리를 시식한 후에 기념 촬영한 사진이다.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첫 대면이나 다를 바 없었던 이날의 촬영장면에 보면, 덕혜옹주는 여섯 살 미만의 나이였으나 덩치만큼은 앉은키로 어른들의 어깻죽지 정도까지 성장했던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른바 '고종황제 가족사진'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거기에 보이는 덕혜옹주는 거의 유모차나 다를 바 없는 의자에, 돌잔치나 겨우 지났을 법한 정도의 유아로 보인다. 따라서 공식 확인된 첫 대면 때의 모습보다 덕혜옹주의 덩치가 오히려 더 줄어져 있다는 것은 나이를 거꾸로 먹었거나 인위적인 조작이 있지 않고서야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사진이라는 점은 이로써도 저절로 드러나는 셈이다.

영친왕 사진 다른 데서 가져왔을 가능성 높아

정리하자면 이렇다. 이른바 '고종황제 가족사진'의 원본은 영친왕과는 전혀 무관하게 1918년보다 적어도 두어해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시점에서 촬영된 별개의 기념사진이었으나, 여기에다 어떤 사람의 인위적인 '조작'으로 영친왕의 사진을 오려붙인 조악한 '가짜사진'이 탄생한 것이다.

누가,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단지 고종황제, 순종황제, 영친왕, 의친왕, 덕혜옹주까지 구황실의 구성원이 한 자리에 모여서 찍은 사진자료라면 그만큼 더 사료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 때문에 벌인 일이 아닌가 짐작해 볼 따름이다.

이 사진자료가 '조작품'이라는 세 번째 판단근거는 사진조작에 이용된 영친왕의 사진이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고종황제 가족사진이 조작된 것이 확실한 마당에 원본사진에 오려붙여진 '영친왕' 사진의 출처까지 명확하게 드러난다면, 더 이상 논란을 벌인다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을 줄로 믿는 바이다.

그럼 사진조작에 이용된 영친왕의 사진출처는 확인될 수 있는 것인가?

▲ <매일신보> 1916년 8월 3일자에 수록된 이왕세자와 이본궁방자여왕의 혼인계획에 관한 보도에는 바로 이 사진자료가 소개되었다. 고종황제 가족사진의 '조작'에 동원된 사진과 동일한 원판을 사용했음을 엿볼 수 있다.
ⓒ2007 이순우

▲ <매일신보> 1916년 8월 4일자에 수록된 이왕세자와 이본궁방자여왕의 사진자료이다. 앞의 것과 동일한 원판을 사용한 것인데, 시선처리가 정면이 아닌 것은 여기서도 확인된다.
ⓒ2007 이순우
이 점에 있어서 사진원본까지는 추적할 수 없으나, 영친왕의 모습과 동일한 사진이 <매일신보>를 통해 1918년 1월 이전에 벌써 몇 차례 소개된 적이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매일신보> 1916년 8월 3일자와 8월 4일자에는 이른바 이왕세자(영친왕)와 일본 이본궁방자여왕의 혼인발표에 관한 기사가 잇달아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영친왕의 사진자료가 낯익다. 그러니까 사진조작에는 바로 이 사진의 원본이 사용됐을 가능성이 높다.

이로써 이른바 '고종황제 가족사진'은 더 이상 거론하는 것이 입이 아플 정도로 '조작사진'인 것은 명백하다. 그럼 이것으로 끝인가?

앞에서 이미 지적했지만, 이 사진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전면 확대사진으로, 그리고 이번에 진행 중인 서울역사박물관 <흥선대원군과 운현궁사람들> 전시회의 출품 자료로, 나아가 서울역사박물관의 상설전시관 진열유물로 두루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진이 처음 세상에 소개될 때에 '합성사진'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또한 이 내용을 담은 일간지의 보도까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버젓이 전시자료로 활용하는 국공립 박물관 측의 무심함이 그저 의아할 따름이다. 논란과 의혹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한번이라도 전해 들었다면, 이러한 문제성 사진을 전시자료로 채택하는 것은 그만큼 더 신중하고 확실한 검증과정을 거쳤어야 마땅한 일이 아닌가 한다.

나아가 전시회에 반복 출품되거나 관련도록을 통해 이 사진의 존재가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현실도 매우 우려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잘못된 사실과 자료가 더욱 퍼져나가고 뿌리를 내리기 이전에, 이른바 '고종황제 가족사진'은 조작된 가짜사진이라는 점이 세상에 널리 공지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박물관의 전시물품 또는 연구자료 등에서도 서둘러 '영구퇴출'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누군가의 잘못된 욕심 때문에 공연히 '영친왕' 사진까지 오려붙여 조작사진을 만드는 바람에, 사료가치가 높은 멀쩡한 원본사진까지 마치 쓰레기 사진처럼 취급되게 만들어버렸다는 것은 두고두고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덧붙이는 글
이른바 '고종황제 가족사진'은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의 상설전시관 및 '흥선대원군과 운현궁사람들' 전시장, 그리고 국립고궁박물관 등에 진열전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진이 조작된 증거는 너무도 명백하므로 해당 박물관에서는 마땅히 이에 대한 진위검증과 아울러 전시공간에서 퇴출하는 조치를 내려주시기를 기대합니다.


기자소개 : 이순우 기자는 <그들은 정말 조선을 사랑했을까?>와 <테라우치 총독, 조선의 꽃이 되다>의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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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3-08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일절날 역사박물관에 갔을 때 이 문제에 대해 열변을 토하며 항의하신 남자분이 계셨다. 혹 그 분이 이 글 쓰신 분???
 

[오마이뉴스 2007-03-08 15:00]    

[오마이뉴스 조화유 기자] 어느날 한 방송뉴스를 보니 "매니페스토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화면에는 '매니페스토 지지단체장 네트워크'라 쓴 현수막 앞에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서있었다. 현수막에 쓰인 14자 가운데 9자가 영어다.

네트워크는 대충 '전국망'이란 뜻으로 잘 알려진 영어라 치더라도 매니페스토는 처음 듣는 소리다. '매니페스토 지지단체장 네트워크'가 무슨 뜻인지 아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나도 '매니페스토운동'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무슨 운동인지 몰랐다. 신문에도 똑같은 제목이 붙어있는데, 기사를 읽기 전에는 무슨 내용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매니페스토] 영국영어에서만 '공약'... '공약실천 확인운동'이 낫다

나중에 알고보니 정당들과 선거 후보자의 공약이 나중에 정말로 실천되는가 확인해보자는 것이 매니페스토 운동이라고 한다. 그런 내용이라면 '공약실천 확인운동'이라고 해도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데, 왜 굳이 영어를 섞어'매니페스토운동'이라고 하는지 알 수 없다.

사실 '매니페스토(manifesto)'는 '정치적 선언'이란 뜻이다. 예를 들어 19세기 공산주의 이론가 맑스와 엥겔스의 합작품인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에서의 '선언'이 메니페스토다. 영국에서는 '선거공약'이란 뜻으로도 쓰이지만, 미국영어에서는 그렇게 쓰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선거공약을 '플랫폼(platform)'이라 한다.

영국에서만 통하는 단어의 의미를 가져와 '매니페스토 운동'이라고 한 것도 그렇지만, 설명을 해주지 않으면 무슨 뜻인지 알수가 없는 명칭을 굳이 왜 쓰는지 묻고 싶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모든 사람이 금방 알아들을 수 있는 '공약실천 확인운동'이라고 고치도록 권한다. 꼭 영어가 들어가야만 품위와 권위가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이른바 한국 지식사회에 너무 많은 것 같아 안타깝다. 좀 심하게 말하면 이런 건 언어적 사대주의다.

[DTI] 정확히는 'DTIR'... '소득대비부채비율'이 쉽고 정확

또 다른 예를 보자.

한 방송뉴스에서 "앞으로의 주택 대출은 기존의 집 가치 대신 대출자의 소득수준, 즉 DTI 기준으로 완전히 바뀌게 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 뉴스에서 "대출자의 소득수준 즉 DTI 기준으로"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DTI는 '소득수준'을 가리키는 영어 약자인 것 같다. 그렇다면 굳이 DTI란 영어를 쓸 필요가 없을 터인데, 계속 DTI를 네번이나 더 썼다. 그러면서도 DTI가 무엇인지 한번도 설명하지 않았다. DTI의 뜻을 아는 사람만 이 뉴스를 듣고 모르는 사람은 듣지말라는 투다.

DTI는 정확히 'DTI비율'이라고 하든지 'DTIR'이라고 써야 맞다. 'DTIR'은 주택담보대출 신청자의 소득대비 부채비율(Debt To Income Ratio'의 약자다. 여기서 부채란 대출자가 연간 상환해야하는 원리금 합계를 가리킨다.

DTIR을 한국에서는 '총부채상환비율'이라고 하는 모양이지만 '소득대비부채비율'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 번역이 될뿐만 아니라 누구나 금방 알아들을 수 있다.

미국에서는 DTIR이 대개 30%정도다. 예컨대, 연간 소득이 10만불인 사람이 집을 사려고 은행에서 돈을 빌린다고 할 때 그가 1년간 모든 금융기관에 갚아야할 돈이 3만불이상이 되면 대출을 해주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웰빙] 먹어도 살 안 찌면서 영양가도 있어야 '웰빙'?

방송언어에 있어서의 외국어 특히 영어 남용의 예는 '웰빙'과 '리베이트'에서도 나타난다.

'웰빙(well-being)'은 못 사는 것의 반대인 잘 사는 것, 아픈 것의 반대인 건강, 그리고 안전하지 못한 것의 반대인 안전이란 뜻일 뿐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웰빙이 '먹어도 살 안 찌고 영양가 있는'이나 '잘 먹고 잘 사는'이란 뜻으로 쓴다.

언제는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바라지 않은 것처럼 새삼스럽게 '웰빙'을 아무데나 갖다붙이는 이유를 알수가 없다. 정확한 뜻도 모르면서 그저 영어가 들어가야 그럴듯해서 웰빙을 쓰는 것 같다.

[리베이트] 합법적인 돈이 왜 '리베이트'지?

또 '리베이트(rebate)'는 정당하게 합법적으로 돈을 되돌려주는 것인데도 한국에서는 '불법적으로 은밀히 건네주는 돈'의 뜻으로 쓰고 있다. 예를 들면 공무원이 업자에게 높은 가격으로 수의계약을 해주고, 업자로부터 사례금조로 몰래 받는 돈을 리베이트라고 쓰고 있다. 이런 검은 돈은 리베이트가 아니라 '킥백(kickback)'이라 한다.

우리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을 외국어로 대신하는 것까지는 좋으나 그 뜻을 제대로 알고 쓰자는 얘기다.

[로드맵] '청사진' '지침' '길잡이'가 더 좋다

방송은 물론 신문도 '로드맵(roadmap)'이란 단어를 많이 쓰는데, 청사진이나 지침, 길잡이같은 말 놔두고 굳이 일반 대중이 알아듣지 못하는 로드맵을 써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최근에 한 TV 기자는 "통일장관의 이번 발언이 핵문제 해결에 레버리지로 사용하려는 의도인지 불분명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지렛대'란 좋은 우리말 놔두고 왜 꼭 '을레버리쥐(leverage)'란 영어를 발음을 틀리게 하면서까지 쓰는지 모르겠다.

[AI] 한국만 쓰는 정체불명의 약자

얼마 전 조류독감이 국내에서 발생했을 때 한 방송사는 보도 중 계속 'AI'란 영어만 사용했다.

'AI'는 '에이비언 인훌루엔자(Avian Influenza)' 즉 조류독감의 약자인데, 미국 방송 아나운서들도 이를 줄여서 쓰지 않고 있다. 토플성적 세계 최하위권의 한국에서만 'AI'라고 줄여 쓰고 있다.

[네가티브 선거운동] '인신공격성 선거운동'이 훨씬 정확해

요즘 언론은 또 "야당 대선 주자들이 '서로 네가티브 선거운동을 한다'고 비난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네가티브 선거운동이란 용어는 미국의 '네가티브 캠페인(negative campaign)'에서 잘라온 것 같은데, 이것도 '인신공격성 선거운동'이라고 하면 모두가 다 알아들을수 있는데 굳이 영어를 쓰는 이유를 모르겠다.

사실 영어 네가티브 캠페인 자체도 정확한 용어가 아니다. 네가티브(negative, 부정적)의 반대는 포지티브(positive, 긍정적)이다. 경쟁자의 결점이나 부족한 점을 부각시켜야 자기가 이기는 상황에서 선거운동을 어떻게 긍정적으로만 할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네가티브 선거운동'이란 용어보다는 우리말 '인신공격성 선거운동'이 훨씬 더 정확한 용어라고 생각한다.

[골 세러모니] 미국에서도 영국에서도 없는 말

베이징에서 개최된 동계 아시안게임 시상대에서 한국 선수들이 "백두산은 우리땅"이라고 쓴 카드를 들고 '깜짝쇼'를 벌였을 때 한국 언론은 '백두산 세리모니'라고 보도했다. 또 축구선수들이 골을 넣고 그 기쁨을 표현하는 것을 '골 세리머니'라고 보도하는 것도 보았다.

그러나 '세러모니(ceremony)'란 기념식 같은 '의식'을 가리킨다. 미국에서 30년 이상 살았어도 나는 세러모니가 '골 세리머니'에서와 같이 쓰이는 예를 본 일이 없다. 축구의 본고장 영국에서 쓰는 말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영국인에게 물어보니 자기도 '골 세러모니'는 들어본 일이 없다 한다.

'세러모니' 대신 '셀러브레이션(celebration, 축하)'을 쓰면 또 모르겠는데, 세리머니라니 적당한 단어 같지 않다. 차라리 '깜짝쇼'란 말로 대신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다.

뉴스가 알아듣게 방송돼야 뉴스지

아울러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한국 방송 언어가 어려운 한자어를 너무 많이 쓴다는 사실이다. 방송 뉴스 앵커들과 기자들은 누구나 알아듣기 쉬운 구어체는 놔두고, 어려운 문어체, 그것도 한자어로 구성된 말들을 남용하고 있다.

쉬운 우리말을 쓰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일부러 어려운 한자어나 외국어를 골라 쓰는 것은 아닐까? 옛날부터 방송인들이 써온 말투를 아무 생각없이 그대로 본받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잖아도 방송 시청율이 낮아지고 있는 이 때 방송사들은 스스로 시청자들을 쫓아내는 것은 아닌지 한번 깊이 반성해볼 일이라고 생각한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서울의 한 어린이 놀이터에서 사고가 났을 때 한 TV 방송 뉴스 앵커는 이렇게 말했다. "안전사고 방지는 안전불감증의 척결이 관건입니다."

그냥 사고면 사고지 안전사고는 무엇이며, 또 안전불감증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척결과 관건은 또 무엇인가? "항상 조심하고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아야 사고는 막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면 되는 것이다.

이런 예는 수도 없이 많다. 위성을 통해 KBS·MBC·SBS·YTN 등 한국의 방송뉴스를 시청하면서 발견한 문어체들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은데, 내가 쉬운 말로 고쳐보았다.

- 이번에 치어죽은 개도 유기견이었습니다.
→ 이번에 죽은 개도 버려진 개였습니다.)

- 성폭행 용의자 강씨의 여죄를 추궁 중입니다.
→ 강씨에게 다른 죄가 더 있는지 캐고 있습니다.

- 북한의 항공기와 무기가 노후되었습니다.
→ 북한의 항공기와 무기가 낡았습니다.
(기자는 '노후'란 말은 다섯 번이나 쓰면서 낡았다는 말은 한번도 안 썼다.)

- 오늘 주가 상승에는 유가의 대폭하락이 원군이었습니다.
→ 오늘 주가가 오른 것은 기름값이 많이 내린 덕분이었습니다.

- 전두환 노태우 서훈 박탈 추진
→ 전두환 노태우에게 준 훈장을 취소하기로 추진

- 군인들이 남은 주민들을 소개시키고 있습니다.
→ 군인들이 남은 주민들을 내보내고 있습니다.

- 세수 부족으로 각종 소비세 인상 러시가 예상됩니다.
→ 걷어들이는 세금이 줄어들어 각종 소비세가 줄줄이 오를 것 같습니다.

- 서울에서 열리는 세계화상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화상들이 속속 입국하고 있습니다.
→ 서울에서 열리는 세계중국계상인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상인들이 속속 입국하고 있습니다.
(나는 화상이 그림을 사고파는 사람(art dealer인 줄 알았다. 뉴스가 끝날 무렵 화면에 보이는 한자를 보고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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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3-08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지금 쏘우 타이어드해...ㅡ.ㅡ;;;;

진/우맘 2007-03-09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영어를 섞어 써야 지적으로 보인다는 무지한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 많은 듯.....ㅡㅡ;;;

진/우맘 2007-03-09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금 풀~입니다 마노아님. ㅎㅎ 바보가 아니고 배가 풀~~~~~^^;;; 졸리네요.ㅡㅡ;

마노아 2007-03-09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쿠쿠쿠, 아무래도 그렇죠? 쉬운 우리말 대신 어려운 외래어 쓰느라 용을 쓴다니까요. 저도 지금 배불러요. 미투랍니다^^ㅋㅋㅋ
 

충암고 ‘담임선택제’의 진실은?
“젊은교사 집중 배치로 강행, 생색내기용”
한겨레 이종규 기자
‘공교육의 신선한 실험’으로 주목받고 있는 서울 충암고의 ‘학급 담임 선택제’가 충분한 의견수렴과 준비 없이 이뤄져 ‘생색내기’에 그쳤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충암고는 지난 15일 학교 홈페이지를 통해 1학년 신입생들이 선착순으로 자신이 원하는 담임을 선택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학교 교사들의 말을 종합하면, 이 학교의 올해 1학년 담임 20명 가운데 기간제 교사는 9명이나 됐으며, 특히 2명은 신임 기간제 교사였다. 민아무개 교사는 “경험 많은 교사 중 담임을 원하는 교사들이 있었는데도 신분상 약자일 수밖에 없는 기간제 교사와 젊은 교사들을 집중적으로 배치한 것은 담임 선택제를 밀어부치기 위한 의도로 밖에 볼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 학교 교사는 교장을 포함해 119명이며, 이 중 기간제 교사는 26명이다.

학생들에게 주어진 정보도 부실했다. 학교 쪽은 교사 이름과 사진, 학급운영 방침을 홈페이지에 올렸는데, 학급운영 방침은 인사말 수준의 글이 대부분이었다. 한 1학년 교사는 “홈페이지 공개 하루 전날 밤 갑자기 학급운영 방침을 올리라고 해서 부랴부랴 써냈다”고 말했다.

이 학교 신입생 강아무개군은 “선배와 엄마 친구 등을 통해 선생님들에 대한 평판을 전해듣고 선택했다”고 말했다. 김아무개군은 “친한 친구들끼리 미리 한 교사를 찍은 뒤 모두 같은 반에 지원했다”며 “가장 우선적으로 본 것은 외모와 인상이었다”고 말했다.

담임 선택제가 이렇게 반쪽짜리가 된 이유는 학교 쪽이 교사들과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했기 때문이라고 교사들은 주장했다. 홍아무개 교사는 “교사들이 담임 선택제 실시 얘기를 처음 들은 것은 학생들의 ‘선택’을 불과 일주일 남겨둔 2월8일 회식 자리였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안상화 교감은 “비록 비공식적인 자리이긴 했지만 2월8일 이전에도 몇 차례 의견 수렴을 거쳤다”며 “담임 중에 기간제 교사가 많은 것은 담임을 원하는 기간제 교사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한편, 충암고에 앞서 경기 ㄱ고에서도 몇 년 동안 담임선택제를 실시하다 2005년에 폐지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학교 졸업생 신아무개(20)씨는 “2004년 입학할 때 담임을 선택했는데, 여교사와 젊은 교사, 학생들을 무섭게 다루지 않는 교사들 반에 집중적으로 지원하거나 ‘끼리끼리’ 한 반에 몰리는 등의 문제점이 생겨 이듬해부터 폐지됐다”고 말했다. 이종규 기자 jk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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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3-07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간제 교사의 비율이 거의 22%. 흐음... 담임선택제라..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