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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한옥
[한겨레 2007-03-28 05:09]    

[한겨레]
서울 종로구 가회동 31번지, 어깨를 맞대고 늘어선 한옥 가운데 유독 높이 솟아 눈에 띄는 기와집이 있다. 대부분의 한옥은 담장이 처마 바로 아래까지 가리고 있지만, 이 집은 담장 위로 한옥의 대부분이 드러나 있다. 콘크리트로 지은 1층 건물 위에 한옥을 2층으로 얹은 것이다. 이 집은 2000년부터 시작된 서울시의 ‘북촌 한옥마을 가꾸기 사업’에 따라 보조금 3천만원과 융자금 2천만원을 지원받아 2004년에 원래 있던 한옥을 철거하고 새로 지은 집이다. 이 집처럼 콘크리트 건물 위에 한옥을 얹은 집은 가회동 31번지에만 4채가 있다.

이처럼 ‘기형적인’ 한옥이 북촌에 들어서는 것에 대해, 주민들 사이에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20년째 북촌 한옥마을에서 살아온 최금옥씨는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새로 지어지는 한옥들은 전통 한옥의 기본 구조와 동떨어진 엉터리 한옥”이라며 “한옥마을 가꾸기 사업이 오히려 한옥을 망치고 있다”고 말했다.

김우성 서울시 북촌사업팀장은 “한옥 원형을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지만, 이곳의 집들이 문화재는 아니기 때문에 내부를 개조하거나 2층으로 변형시키는 것을 법적으로 막을 수 없다”며 “집주인들이 자발적으로 한옥의 겉모습이라도 지키도록 유도하려면 어느 정도 타협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 사이에 자리잡은 북촌 지역은 조선시대부터 고위 관리들의 주거지로 유명했다. 지금까지 북촌에 남아 있는 한옥들은 대부분 1930년대를 전후해 개량된 것들이다.

유신재 기자 oh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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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3-28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게 뭐야ㅡ.ㅡ;;;

맑음 2007-03-28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도 더 높이 올리면 안 되나요? ㅋ~ 작년 봄까지 장작 20여 년을 넘게 기왓집에서 살았었는데. 불편해도 전 한옥 구조가 더 좋은 것 같아요. 100% 한옥이 얼마나 될까요? 제가 꼬맹일 때부터 마루청도 뜯어내고(확장과 보일러 시공 때문에) 없던 옥상도 만들고 해서 무늬만 한옥이였지만 그 집(동네 전체가)도 재개발 때문에 곧 사라져요. 결국 기왓장만 남은 한옥이였지만, 어릴 땐 그 기왓장 위를 걸어다니고 햇볕도 쬐고 그랬는데. 므흣, 그래서 가끔 꿈에서 무협영화처럼 제가 이 집 저 집 지붕 위로 쑹쑹~ 날아다닌다는...@^^@

홍수맘 2007-03-28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ㅇㅇ에서 하는 일은 늘 저런 현상들이 생기는 걸까요?

비로그인 2007-03-28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북촌 한옥마을!! 꼭 언젠가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완전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아, 정말. 마노아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기억이 났습니다. (웃음)

마노아 2007-03-28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맑음님, 보통 겉은 한옥집 구조를 갖고 있어도 내부는 사용하기 편하게 많이 고치는 모습을 보곤 했는데, 사진 속의 오른쪽 집은 많이 어색해요. 사용자 마음이나 뭐라할 수 없는 거고, 각 개인에게 맡길 문제가 아닌데, 저 모습을 보니 조금 속상해요^^;;; 저도 어릴 적에 지붕 위에서 많이 놀았답니다. 날아다니진 못했어요^^ㅋㅋ
홍수맘님, 좀 제대로 된 행정을 보여줬음 해요..;;;;
엘신님, 북촌 한옥마을이 남산 한옥마을하고 다른가요? 남산은 가보았지만 정작 한옥마을 조성해 놓은 것은 싱겁게 보고 나왔어요^^;;;

antitheme 2007-03-28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른쪽 집을 보니 달마야 서울가자에 나오는 빌딩 옥상의 절이 생각나네요.

마노아 2007-03-28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때 옥상 위의 절은 센스로 보였는데 지금 저 집은 안습으로 느껴져요^^;;;

비로그인 2007-03-28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복궁. 시간이 멈추어 있는 듯한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공기를 마실 수 있다면 -
북촌 한옥마을에서도 가능하겠지요. 남산 한옥마을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북촌 한옥마을의 옛모습에서 오는 정취는 상당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뽀송이 2007-03-28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엄마야~~ 국적불명의 한옥??

마노아 2007-03-28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엘신님, 북촌한옥마을을 검색해 보니 울 언니 가게 근처더라구요. 나중에 기회되면 가보려구요. 멋질 것 같아요. 날 좋은 날 나들이 삼아 가는 것도 멋질 듯합니다^^

마노아 2007-03-28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뽀송이님, 외계 한옥 같아요^^ㅎㅎ
 

[경향신문 2007-03-28 08:24]    

국보 1호 숭례문(남대문)의 잡상(雜像·어처구니)이 훼손된 채 방치되고 있다.

잡상이란 귀신을 쫓고 건물의 위엄을 표시하기 위해 지붕에 올리는 작은 흙 인형. 숭례문의 경우 9개씩 한 세트로 구성되는데 이중 내림마루 왼쪽 6번째 것이 떨어져 나가고 없는 것이 27일 경향신문 취재 결과 확인됐다.

숭례문 관리는 문화재청과 서울 중구청이 나눠 맡고 있다. 그러나 문화재청과 중구청 모두 언제 어떤 이유로 잡상이 떨어져 나갔는지 파악하지 못한 상태다. 특히 문화재청은 지난해 7월 한 시민으로부터 잡상 한 개가 보이지 않는다는 신고를 받았지만 지금껏 복원하지 않아 문화재 관리에 허점을 드러냈다.

문화재청 김성도 사무관은 “지난해 숭례문 잡상 훼손에 관한 민원이 접수돼 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서울 중구청에 통보했다”며 “오는 7월 숭례문에 대한 대대적인 공사 때 함께 복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하늘에 떠도는 잡귀를 물리치는 잡상은 건물의 품격에 따라 수(5~11개)를 달리했다. 일반 건물에는 보통 5개를 올리지만 숭례문에 9개, 경복궁 내 경회루에는 11개가 있다. 잡상이 많을수록 건물의 품격이 높은 것이다.

〈오창민기자 risk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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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3-28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어처구니 없네..;;;

맑음 2007-03-28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이름이 잡상이군요. 사진만 보고 경복궁인 줄 알았어요. 작년 연말에 처음으로 경복궁을 관람(?)헀었거든요. 경복궁에도 훼손된 잡상이 있던데. 잡상이 많을수록 건물의 품격이 높은 것이라, 또 하나 더 알고 가네요.^^

홍수맘 2007-03-28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서재를 방문하다 보면 제가 모르던 많은 사실을 알게 되요. 오늘도 '잡상'을 알고 가는 시간이랍니다. ^ ^.

비로그인 2007-03-28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럴수가. 도대체 누가 왜 ?!!!

마노아 2007-03-28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처구니 이야기라고 동화책이 있는데 아주 재밌어요. 아직 못 보셨다면 함 보셔요~ 참 재밌는 그림에 재밌는 내용이었답니다^^ 경복궁 관람! 저도 오랜만에 가고 싶어요. 은근히 넓어서 다리 꽤나 아프지요^^;;;
홍수맘님, 우리말 '어처구니'로도 불러주세요. 정말 정겨운 이름이에요^^
엘신님, 그러게나 말입니다. 가보로 물려줄 생각인가? ㅡ.ㅡ;;;

씩씩하니 2007-03-28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씨..너무...안타깝다,,,,,진짜,,이게 뭐래요 말두 안되는 일..
그나저나 씨는 뭐래요....제 수준이.이것밖에 안되나봐요 이상황에 대한 저의 감정이라고만 보아주세요...
참,,문화재청도 우습고,,,문화재들이 잘...보존 되었으면...

마노아 2007-03-28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렇게 되었다는 것도 모르고, 신고가 들어와도 방치하고... 너무 무책임하죠. 훼손한 사람도 나쁘구요. 체쳇..ㅠ.ㅠ

짱꿀라 2007-03-28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문화재가 숭례문만 있는게 아니랍니다. 무수히 많고 많이 있답니다. 복원을 하라 보고서를 올려도 예산이 부족하다는 둥 안하는 것이 태반이랍니다.

마노아 2007-03-28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충분히 그럴 것 같아요. 애석하게두요ㅠ.ㅠ
 

“일본말 털고 용례 찾자” 한국어사전 독립운동
수준 미달인 채 몸집만 불려온 사전들
조선총독부가 만든 ‘조선어사전’ 자료삼아
“사전을 보면 그 시대·학문 보인다”
수천권 수집해 일제 한국어 공백 메우려 고투
한겨레 임종업 기자
» 옥스퍼드사전, 웹스터사전 같은 한국어사전이 우리한테는 왜 없는걸까. 박형익 교수는 우리 사전의 수준이 국력에 비해 창피스러울 정도라고 말했다. 몸피만 불려와 깊이가 떨어진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그런 비판에 당장 되돌아오는 말은 “당신이 한번 만들어 봐!” 우연히 사전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박 교수는 이제 막다른 골목 앞에서 마음이 바쁘다.
한국의 책쟁이들 / (22)‘사전 모으는 이상한 교수님’ 박형익 교수

중고생이 있는 집이면 영한사전 한권은 있다. 영어가 외국어인 까닭에 그것 없이 공부를 할 수 없기 때문. 공부깨나 한다면 손때가 까맣게 묻었을 터다. 하지만 한국어사전 없는 집은 꽤 될 것이다. 한국어는 모국어인 탓에 그것 없이 공부할 수 있거나 그렇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은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경기대 국어국문학과 박형익(55) 교수다.

“사전이 수준 미달인데다 사전이 필요없는 교육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눈에 한국어사전은 국가 경쟁력에 비해 창피스러울 정도로 수준이 낮다. 뜻을 모르거나 아리송한 어휘를 찾아보면 궁금증을 속시원하게 풀어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다른 사전을 찾아보아도 별 수 없다. 그 사전이 그 사전이어서 약속이나 한 듯 뜻풀이가 비슷하다.

실제로 많이 쓰이는 한국어사전에서 ‘사전’을 찾아보면 비슷한 골격의 뜻풀이를 깔작깔작 바꾸어 싣고 있을 뿐이다. 또 동의어로 실은 사림, 사서, 어전, 석사서는 쓰이지 않을 뿐더러 출처도 불분명한 것들이다. (표 참조) ‘사전박사’ 박 교수의 집. 출간 순으로 정리된 사전 서가를 보면 한국어사전은 몸집 불리기 쪽으로 진화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자니 우리말이 아닌 것들, 예컨대 일본말들을 삽입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1920년 식민통치를 위해 <조선어사전>을 발간했다. 1911년 책임자 小田幹治郞을 포함해 16명(일본인 6, 한국인 10명)이 작업을 시작해 5만8000항의 어휘를 조사했다. 애초 일본인과 한국인을 위해 2개 국어로 원고를 만들었으나 “조선인을 위해서 특히 조선어사전을 작성할 필요가 크지 않다”는 이유로 한-일 대역사전으로 바뀌었다. 초판은 1천부를 찍어 관련기관에 배포되고 보급판은 8년 뒤인 1928년에 찍었다. 그런데 해방 뒤에 발간된 한국어사전을 만들 때 이 사전은 기초자료 역할을 톡톡히했다. 사전 전문 출판사인 ㅁ사에서 흘러나온 <조선어사전>은 그 실태를 여실히 보여준다. 어휘 머리맡 대부분이 빨간 색연필로 체크되어 그것들이 그 출판사에서 낸 사전에 표제어로 고스란히 옮겨졌음을 웅변하고 있다.

국력에 비해 창피할 정도


“한국어사전은 서로 변별력이 없어요. 영어는 옥스퍼드 사전과 웹스터 사전이 아주 달라요. 뜻풀이뿐 아니라 용례도 각별하죠. 별도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고교학습용 영한사전에는 단어마다 대부분 예문이 딸려있는데 한국어사전은 최근에야 <국립국어연구원 표준국어대사전>(두산동아)과 <연세 한국어 사전>(두산동아)에서 일부 채용했을 뿐이다.

“형용사, 부사, 동사는 의미 변별을 위해 반드시 용례가 따라야 합니다.” 말을 바꾸면 용례없는 풀이는 사실상 소용없다. 이는 대학입시에서 논술평가 기준이 공개되지 않는 것과도 통한다. 어휘가 적확하게 쓰여졌는가, 문장이 적절한 어휘의 조합으로 구성됐는가, 그 문장들이 논리적으로 연결돼 전체적으로 일관된 구조를 갖는가 등을 평가하려면 이를 평가할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누구라도 동의해 기준삼을 만한 한국어사전이 없다. 그런 까닭에 하나의 논술문을 두고 심사자마다 평가 편차가 크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심사기준과 평가결과를 쉽게 공개하지 못하는 게 아니겠는가.

“사전이 언중의 의식수준과 사회의 필요성에 비해 수준이 낮은 것은 아무래도 학계의 연구와 지원이 따르지 못하는 탓이죠.”

박 교수의 전공은 사전학이 아니라 본래 어휘문법론이었다. 파리7대학에서 ‘한국어 여격동사의 구문 분석’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은 ‘주다’ 동사에 세 용법이 있음을 밝혔다. 목적어에 구체물(사전, 가방)이 올 때는 여격동사, 추상명사(감명, 창피)가 올 때는 사동기능 동사, 구박·연락·자극 등 동명사가 올 때는 형식동사가 된다는 것. 이 분석을 위해 동사 정리 작업을 하면서 한-프 동사사전을 만들었다. 사전의 늪에 빠지게 된 첫 단추다.

“사전을 보면 만든 이, 시대, 학문의 정도가 보입니다. 국어학 연구 수준을 그대로 반영하지요.”

한국어사전을 본격 수집한 지 10년이 넘었다. 1970년대 이전에 나온 것을 집중적으로 모아 현재까지 1300여권을 모았다. 70년대 이후 것을 합치면 얼마나 될까라는 질문에는 다른 데 정리돼 있다면서 즉답을 하지 못했다. 한자자전과 백과사전, 어휘자료는 1945년 이전에 나온 것을 수집대상으로 하는데 그것 또한 만만치 않아 1000권에 이른다. 아마 자신의 사전 및 어휘 관련 자료가 국내에서 가장 많을 거라고 했다.

“한국어사전 편찬사가 통사적으로 정리돼 있지 않고, 사전 간의 상호관계 역시 규명되지 않고 있어요. 게다가 19세기 말부터 일제 강점기의 한국어 실태는 공백지대나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도 섣불리 달려들지 않아요. 품이 엄청나게 들고 골치 아프니까요.” 그의 수집은 그러한 공백을 메우려는 노력이다.

그는 강의시간 외에는 거의 컴퓨터 앞에서 자료를 입력하거나 정리한다. 사람 만나는 시간도 아깝다는 그는 하루종일 활자와 씨름하느라 눈을 혹사한 탓에 시력이 무척 좋지 않다. 그래서 책상 앞에서 작업할 때 여분의 안경을 이마에 걸친다. 자료를 찾아 서가를 뒤질 때 쉽게 바꿔쓰기 위해서다. 입력은 단순한 반복작업. 제자들한테 일부 맡길 수 있지 않느냐는 말에 한자가 많고, 진력나는 일이라 싫어하는 것 같다면서 마춤한 제자가 하나 있는데 요즘 통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고 전했다.

유일한 유식시간은 헌책방 가는 길. 그는 헌책방계에서 ‘사전을 모으는 이상한 교수님’이다. <보통학교 조선어사전>(심의린, 이문당, 1925)을 지방의 한 헌책방에서 찾아내 한국인이 만든 최초의 단행본 사전임을 밝혀냈다. 그는 요즘도 스트레스가 쌓이면 책방을 찾는데 사전 비슷하게 생긴 고서를 보면 가슴이 찌르르하다고 말했다.

책방길에 유에스비(USB) 메모리는 필수 휴대품. 낯선 물건을 만나면 그것을 컴퓨터에 꽂아서 자신이 구입했는지 여부를 확인한다. 그 안에는 에이포 300쪽 분량의 사전목록과 140쪽 분량의 어휘자료가 입력돼 있다. 10년이상 정교하게 다듬어와 이제는 어느 정도 틀이 잡혀 사전편찬사를 얽을 단계에 이르렀다. 서지학 관련자나 어휘사 연구자들이 탐을 낸다는 말에 ‘한벌 카피해서 줄 수 있느냐’고 운을 떼자 택도 없는 소리 말라는 표정으로 웃었다.

강의 빼곤 하루종일 활자와 씨름

서지메모리는 계속 한줌이지만 현물자료는 한옥 전체를 뒤덮었다. 메모리 주인은 파리지옥의 파리처럼 자료에 갇혀 ‘자기 줌 속에 갇힌’ 모양새. 일층 연구실은 메모리 속의 자료가 발간시간 순으로 정리돼 있고 이층은 방방이 2차 자료로 가득하다. 틈마다 책이 빼곡이 들어서 거의 포화상태다.

자료 가운데 특이한 것은 척독류. 1910년 이래 출간된 ‘편지투 백과’들은 당대 어휘연구에 아주 좋은 자료란다. 본문 상단, 또는 권말에 붙인 ‘낯선 어휘’ 뜻풀이가 일종의 간이사전이었다. 현재 200여권을 모았는데 어휘와 더불어 당대인의 문장습관 분석에도 유용하리라 본다. 그리고 한자자전. 한자의 어석 외에 해당 한자를 포함한 단어와 뜻풀이를 포함하고 있다. 가나다 순이 아니라 한자 부수 순으로 찾아야 하지만 엄연한 한국어사전이다. “여기에는 신기하게도 오랜 운서의 전통이 살아있어요. 거기에 현대식 사전편찬 방식을 흡수한 것이니 ‘전통과 현대의 만남’이랄까요.” 이들 어휘는 자생적으로 형성된, 토종 뜻풀이로 당연히 한국어사전에 반드시 반영해야 한다는 게 박교수의 생각이다.

» ‘사전’ 뜻풀이 비교

“한국어사전에서 일본어, 죽은말을 털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과학적인 뜻풀이와 용례를 추가해야 합니다.” 어휘의 사용빈도를 조사해 빈도가 높은 어휘의 조합으로써 뜻풀이를 하고, 문맥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예를 찾아내 용례를 붙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렇게 하면 마구잡이로 흐르는 언어행위를 다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다.

그는 <현대 한국어 동사 구문사전>(홍재성 외, 두산동아), <한국어 학습용 어미-조사 사전>(이희자 이종희, 한국문화사)을 좋은 본보기로 들었다.

그는 <독립신문> 제1호에 난 <한영자전>과 <한영문법>(언더우드) 광고를 보여주면서 말했다. “당시 사람들한테 이것은 빛이었을 겁니다. 사람마다 다르게 쓰는 한글을 ‘이렇게 쓰세요’ 하고 정리해준 것이니까요.” 그의 작업은 일종의 독립운동일까. 그동안 쌓인 게 많았던지 늦은 점심 반주로 소주를 시켰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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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좌측통행을 해야할까?
[MBC TV 2007-03-25 21:30]    
[뉴스데스크]

● 앵커: ‘좌측통행을 하시오’, 애들 동요에까지 나오는데요. 이렇게 어릴 적부터 배워왔기 때문인지 무슨 원칙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왜 왼쪽으로 걸어야 할까, 생각해 본 분은 많지 않습니다. 게다가 오른쪽으로 걸어야 한다는 주장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김희웅 기자입니다.

● 기자: 인천국제공항 출국장, 한 노인이 딸과 손자를 거느리고 외국여행길에 앞장섰습니다. 왼쪽 자동문 앞에 섰지만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딸은 아버지를 오른쪽으로 밉니다.

● 노인: (들어오실 때 어떻게 습관으로 들어오신 거죠?) 그냥 들어온 거죠. (왼쪽으로, 그런데 마냥 서 계시던데) 글쎄, 나는 열릴 줄 알았지. (왼쪽 문이니까) 네...

● 기자: 국제적인 관리에 맞춰서 공항출구는 오른쪽이 들어가는 문으로 돼 있습니다. 좌측보행이 익숙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헷갈리기 십상입니다. 등산을 할 때도 좁은 길에서는 오른쪽으로 서서 산행을 하는 게 관행이 됐습니다.

● 김태섭(등산객): 평소에 보통 오른손을 많이 쓰잖아요, 짐 같은 것을, 그러니까 옆에 사람 안 걸리고. (오는 사람이?) 오는 사람하고 안 부딪치게 되니까...

● 기자: 횡단보도는 지난 1999년부터 오른쪽 방향에 화살표를 그려 넣었습니다. 가능한 한 차에서 멀리 떨어져 안전하게 건너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이처럼 이미 좌측보행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곳은 한두 곳이 아닙니다.

● 황덕수 이사(교통안전공단): 아주 간단한 원리야, 신체적인 특성이, 탁구 칠 때도 이렇게 하잖아요. 불편하잖아요.

● 기자: 좌측보행은 일제시대 때 정해진 원칙으로 지금까지 유지돼 왔습니다.

외국은 대부분 오른쪽으로 걷습니다. 미국, 중국처럼 차들이 오른쪽으로 다니는 나라는 물론이고, 영국이나 일본처럼 차가 왼쪽으로 다니는 나라도 우측보행이 원칙입니다.

● 마르타 보르다(콜롬비아 관광객): 처음 오면 외국인들은 걷는 방향을 바꾸는 방법을 익혀야 하더라고요. (안 그러면요?) 다른 사람들하고 부딪히죠.

● 기자: 안전이라는 측면에서도 좌측보행이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복잡한 인도에서 좌측보행을 하게 되면 차를 등지고 걷게 됩니다. 차를 마주보고 걸을 수 있는 우측보행보다 사고의 위험성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 김상윤: 뒤에서, 등 쪽으로 오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차가 안 보이니까요. 뒤에서 어떻게 올지 모르죠.

● 기자: 경찰은 이미 우측보행으로 바꾸는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고, 국회에는 관련 법안이 상정돼 있습니다.

MBC뉴스 김희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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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3-26 0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기도 하구나...

비로그인 2007-03-26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직히, 인간은 본능적으로 오른쪽으로 가는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런데 운전을 할 때는 자꾸만 왼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노아 2007-03-26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른손잡이가 많아서 그런 걸까요? 저도 계단 오르내릴 때 오른발부터 내뻗는 습관이 있어요^^;;

antitheme 2007-03-27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 어디선가 읽은 글에 사람들의 좌측보행은 일본식의 잔재이고 차량의 우측통행은 미국식을 들여와서 꼬여버린 거라는 걸 본게 기억납니다. 따라해도 한쪽 것만 일관성 있게 할 것이지..

마노아 2007-03-27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일관성'이 참 없네요..;;;;
 

고구려 유민 산동반도에 ‘제’ 나라 세웠다
[한겨레 2007-03-22 19:57]    

[한겨레] 책·인터뷰 / 중국속 고구려 왕국, 제’ 쓴
지배선 교수

“특종을 한 기분이랄까요. 흥분해서 책을 쓰기는 처음입니다.”

<중국 속 고구려 왕국, 제>(더불어책)를 쓴 연세대 지배선(60) 교수(역사문화학과)는 중국역사서 <당서> <자치통감> <책부원구> <태평어람> 등에서 고구려 유민이 세운 ‘제’나라의 흔적을 찾아내 55년 흥망사를 재구성해 냈다.

“이정기-이납-이사고-이사도 등 4대가 765~819년에 걸쳐 중국 산동반도 일대를 통치했어요. 그들 자신은 물론 당 조정에서도 ‘제’가 고구려인의 나라라는 의식이 뚜렷했습니다.”

제나라의 강역은 최대 15개주 18만㎢로, 통일신라보다 약간 크고 한반도보다 작다. 2대 이납 때인 782년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제로 하고 도읍인 운주를 동평부로 개명했다. 문무관료인 백관을 임명해 나라의 틀을 잡고 지방행정 단위를 주로 나누어 행정책임자로 자사를 두었다.

“당은 이정기, 이납에게 중서문하평장사라는 관직과 함께 살인에 대한 면책권인 ‘철권’까지 주었어요. 제의 사법권을 인정한다는 뜻이고 당과 제는 국가연합이란 성격을 띠게 된 거죠.”

제땅은 신라, 발해와 당 사이의 교역로. 이정기와 이납, 이사도에게 육운해운압신라발해양번등사라는 관직이 주어진 것은 제가 3국간의 무역을 관장했다는 증거로 본다. 거기에다 소금, 철, 구리의 산지로 막대한 재화를 쌓아 당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분석한다. 법령이 하나처럼 공평한데다 부세마저 균일하게 가벼워 백성들이 다투어 모여들었다고 구당서는 전한다. 고구려가 공식적으로 멸망한 668년 이후 금방 사라진 것이 아니라 상당히 오랫동안 다른 형태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사도는 궁궐, 능침, 종묘를 만들었어요. 당의 제후국이 아니라 독립국임을 대외적으로 선포한 거지요. 당은 작위에 합당할 정도로 자제하라고 부탁하는 선에서 그쳤습니다.”

이사도는 수차례 낙양을 공격하고 제나라 정벌을 주장했던 재상 무원형을 암살했다. 하지만 낙양공략이 실패하고 이웃 절도사가 피살되면서 3개주를 떼어주고 전쟁을 피하자는 분위기가 일었다. “고구려 여인들은 병사가 수십만인데 왜 땅을 떼어주느냐면서 반대합니다. 싸우다 지면 그때 주어도 늦지 않다면서요.”

이씨 왕조는 당의 집중공략과 내부자 반란으로 무너진다. 전후 고구려인 2~3천명이 당에 의해 살해됐다고 지 교수는 말했다. 이는 중국쪽에서 고구려를 완전히 이민족으로 인식했다는 확실한 증거라고 본다.

“제나라를 중국에서는 흉려(凶麗), 일본인 학자는 괴뢰집단이라고 폄하하고 있어요. 우리 사서에서는 딱 한마디 언급할 뿐입니다.”

7월에 당 운주절도사 이사도가 반란을 일으키자, 헌종이 장차 토벌하고자 하여 조칙으로 양주절도사 조공을 보내와 우리 군사를 징발하였다. 왕이 칙지를 받들어 순천군장군 김웅원에게 명해 갑옷을 갖춘 군사 3만명을 거느리고 가서 돕게 하였다.(삼국사기 본기 헌덕왕 11년)

“우리의 숱한 유학자들이 구당서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알았을 거라고 봅니다. 하지만 중국 영향력이 커서 언급하지 않았을까 추측해요. 부끄러운 일이죠.”

한국과 중국에서 모두 잊혀진 고구려 유민의 존재를 찾아내는 것은 우리의 몫이 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 교수의 서술방식은 원사료를 제시하고 이를 당대의 시대배경적 지식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동원해 재해석하는 식이다.

“고선지, 흑치상지 휘하에 고구려, 백제 유민들이 많았다고 주장한 중국인 학자한테 물어봤어요. 근거 사료가 있느냐고. 무슨 사료가 필요하냐, 당연한 것 아니냐고 말하더군요.” 사서는 당연한 사실까지 기술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인디애나 객원교수 시절(1999~2000) 고선지와 흑치상치를 연구하는 미국학자를 만나 자극을 받았다면서 앞으로 유목기마민족과 우리민족과의 관련성을 캐볼 생각이라고 전했다.

“한국사는 개별사가 아닙니다. 주변국가의 역사와 유기적으로 연결해 연구해야 합니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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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해신의 이사도가 떠오른다.  장군과 제왕도 어여 읽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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