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 예수
칼릴 지브란 지음, 임경민 옮김 / 태동출판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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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렸을 때, 그러니까 중학생 때로 기억한다.  교회 주일학교에서 오후 예배 시간에는 예배보다는 레크레이션에 가까운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스피드 게임을 했었다.  그때 내 친구가 받아든 카드에는 "인자(人子)"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당시 문제를 낸 전도사님은, 이 문제가 아주 고난이도로 아마 맞추기 힘들 거라고 예상하셨다.  그러나 게임은 너무 싱겁게 끝났다.  왜냐하면 그 친구의 여동생 이름이 '인자'였고, 그 친구의 질문은 "내 동생 이름!"이었다.

그때의 에피소드가 떠오른 것은 이 책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 예수"  한자로 풀면 "인자, 예수"가 될 테지.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담담했다. 격한 감정을 토로하는 일도 없었고, 오버하는 일도 없었고, 그저 물 흐르듯이 잔잔히... 지나치지도 넘치지도 않게 시종 동일한 느낌을 유지했다. 예수님을 만났던, 혹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또한 동시대 사람으로서 예수님과 아주 작은 연관이라도 있는 사람들이, 그들이 만났던 예수, 신의 아들이라고 불린, 그러면서 동시에 사람의 아들인 예수를 만난 자신의 감정과 일종의 '후기'를 엮은 글이다.

작가는 각 사람들의 캐릭터와 특징에 맞게, 그들의 성별과 연령, 직업 그 모든 것들을 고려하여 각기 다른 색깔의 이야기들을 담았다. 한 번도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그들의 목소리로, 그들의 시각으로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 같아 남다른 기분이 들었다.


한 번 상상해 본다. 내가 만약 그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라면 어땠을까. 지금의 나는 물론 크리스찬이기 때문에 100%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기는 힘이 들지만, 이 책의 사람들처럼, 혹은 영화 속의 그네들과 같은 입장이 되었을 때 내가 바라보는 '예수'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지...... 모르긴 해도, 몹시 특별한 사람으로 기억했을 것 같다. 저자 칼릴 지브란도 그와 같은 긴 상상의 시간을 가졌으리라. 그리고 자신이 만난 '예수'를 표현했을 것이다. 때로 마리아의 입장에서, 때로 옆집 아낙네의 모습으로, 때로 세리의 모습으로......


신앙이 없는 사람이 이 책을 읽으면 어떤 느낌을 가질지, 나로선 잘 상상되지 않지만, 지극히 종교적인 냄새를 풍기지 않으므로 가볍게 읽어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신'의 아들 예수가 아닌, '인간'의 아들 예수를 만나볼 좋은 기회가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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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정호승 / 열림원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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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를 참 인상 깊게 보았는데, 그 다음에 출간된 시집인가 보다.  심부름 다녀올 일이 있어서 지하철에서 봐야지.. 하고 가방에 집어넣은 시집이다.  그런데 한번에 가는 버스가 있어서 버스를 타게 되었다.  버스 안에 앉아서 책을 보자니 울렁증이 생겨 눈을 감았다.

눈 감고 잠이 들었는데, 뭔가 묵직한 느낌이 들어 눈을 떠보니, 50대 아주머니께서 내 다리에 기대어 서 계시다.  이 자리에 앉으시라고 비켜드리고 차에서 내렸다.  때마침 지하철역이 보인다.  지하철을 타고, 아까 읽던 뒷부분부터 다시 시집을 펴들었다.  목적지는 쉬이 도착해고 내 안에서 시어들은 춤을 춘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정호승 시인은 '외로움'에 대해서 줄곧 이야기한다.  그가 달팽이를 얘기할 때에도, 꽃을 얘기할 때에도, 눈은얘기할 때에도 시인의 정서는 변하지 않는다.

"윤동주의 서시"라는 작품 말미에는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인가//사랑한다는 것은 산다는 것인가>라고 맺는다.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고, 산다는 것은 또 외로운 것이니, 사랑하는 것도 곧 외로운 것이다. 언어유희처럼 들리는 이 말이, 어쩐지 나는 마음에 와 닿는다.  나의 해석이 그의 해석과 어찌 다를까는 중요치 않다.  나 역시 외로운 사람이니, 외로운 사람으로서 내게 들어서는 시를 받아들이면 그뿐이다.

"정동진"이라는 시에서 <우리가 누가 누구의 해가 될 수 있겠는가//우리는 다만 서로의 햇살이 될 수 있을 뿐//우리는 다만 서로의 파도가 될 수 있을 뿐//누가 누구의 바다가 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햇살이 되지도 못하면서 해가 되려고 했던, 파도가 되지도 못하면서 바다를 꿈꾸었던 나를 돌아보게 한다.  시인은 일상의 작은 깨달음조차도 이같은 시적 언어와 표현으로 남다른 감흥을 받을 테지... 어쩐지 부러워서 시새움이 났다.

"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역시 인상적이었다.  너에게 전화를 했지만 너는 받지 않는다.  그리 전화하고 받지 않는 전화에 실망할 때마다 석가탑이 무너지고 다보탑이 무너지고 청운교, 대웅전이 무너진다.  석등의 맑은 불도 꺼지자 화자는 그대로 종루로 달려가 스스로 종메가 되어 힘껏 종을 울린다.  여전히 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사랑하여 애끓는 마음을, 닿지 않는 마음에 아픈 심정을 적절한 비유로 잘 묘사했다.  일순, 그렇게 종메가 되어 힘껏 칠 만큼 누구를 사랑해 보았는가 자문해 본다.  내 마음은 불국사에 석굴암까지 무너지는 듯하다.

작년 가을에는 직장 컴퓨터 모니터에 "수선화" 전문을 적어서 붙여놓았다.  나뿐 아니라 우리 부서 여자분들에게도 돌리며 함께 시를 나누었다.  지금도 몹시 인상적인 시어들이 내 발목을 붙잡는다.  이 시집의 큰 제목인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도 이 시에서 나온다.  날 가장 먹먹하게 만든 구절을 옮겨본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하나님도 외롭다는데, 산그림자조차 외롭다는데, 나의 외로움이 혼자만의 것이라고 아파할 이유가 없다.  함께 아파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 위로가 되고 안심이 된다.  그조차 외로운 까닭이다.

뒷부분의 시는 외로움을 넘어 '쓸쓸함'을 노래한다.  외로움이 곧 쓸쓸함을 동반하고, 쓸쓸하다고 느끼는 것은 곧 외롭다는 증거다.

외롭고 차가운 계절 이 가을에, 그러나 외로워서 마음이 덜 외로운 어느 밤에 이 시집을 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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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커피 우리는 코코아
이의용 / 장락 / 199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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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한 선생님은 도덕 선생님이셨다.  나로서는 몹시 독특한 스타일을 가지신 선생님으로 보였는데, 수업이 시작되면 아무 말씀도 없이 필기를 주욱 하신다.  칠판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그 필기를 다 마치시고는 칠판 한 옆에 서서는 가만히 기다리신다.  우리가 필기를 마칠 때까지.  물론 그때도 말씀은 없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가 너무 순진해서 떠들지 않았거나, 아니면 선생님의 포스가 장난이 아니었거나, 혹은 둘 다 작용된 걸지도 모르겠다.  요즘같은 시절 교실에서 학생들이 아무 말 없이 필기만 하길 바란다면... 음... 어마어마한 트라우마가 있지 않는 한 힘들 것 같다.

하여간, 그렇게 우리가 필기를 다 마치면 대략 30분 정도가 흐른다.  그러면 남은 시간 동안 이야기를 하시는데, 우리 수업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건지 절대 알 수 없는 어떤 이야기를 하신다.  그때 들었던 얘기 중에는 지금도 기억하는 얘기들이 꽤 있다.  세상에 공짜란 없다랑 깨어진 병의 금은 없앨 수 없다, 돌을 지고 물을 건너는 사람들 등등....

아무튼, 이야기는 진행되고, 한참 듣다 보면 결국에 왜 그 얘기를 시작했는지 알 수 있는 시점이 다가온다.  결말에 가서는 우리 수업과 꼭 상관있는 얘기가 되고 마니깐.

그때도 선생님은 다독을 하셨다.  당신께서 읽고 있는 책 종류를 간혹 얘기하실 때가 있고, 우리가 스승의 날에 선물한 도서상품권을 무척 기뻐하셨지만,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쓰겠다고 말씀하셨다.

당시 나는, 선생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그 이야기들은 대체 어디서 나오나 궁금했다.  책인 것은 알았지만 어떤 책인지까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우연히 이 책을 찾고는, 나는 얼떨떨하게 웃었다.

그 무렵 내가 들었었던 많은 이야기가 이 책에 실려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촌스러운 제목의, 촌스러워 보이는 책 안에 말이다.

추억을 되새기며 책을 읽었는데, 솔직히 여러모로 실망했다.  그때만큼의 감동은커녕 공감할 수 없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모파상의 '목걸이'같은 경우 출전을 표시하지 않았고, 제목도 왜 엄마는 커피고 우리는 코코아라는지 연관성을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추억을 다시 꺼내지 않고 그냥 추억으로 남겨두었더라면, 내가 궁금해했던 이야기들의 원천지는 더 신비롭고 아름답게 남았을 것을, 우연히 만난 책에서 오히려 실망을 느끼고 말았으니 참으로 재밌는 우연이다.

물론, 선생님께서 해주신 다른 이야기들(이 책에서 나온 게 아닌...)은 여전히 내게 아름답게 포장되어 있다. 아주 가끔은, 내가 아이들에게 해주는 이야기로 둔갑해서 말이다.

이 책은 이제 절판되어서 찾을래도 찾을 수 없는 책이 되었지만, 그게 아니래도 이 책을 굳이 읽을만한 독자는 이제 별로 없는 듯하다.  그게 다행일까, 불행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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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2006-09-15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삼국유사를 읽을 때 학교다닐적에 선생님이 이야기 해 주신게 정말 많더라구요..
그렇게 이야기로 시작하신 선생님들의 수업은 졸립지도 않았어요..
눈 땡그랗게 뜨고 한마디도 안 놓쳤던 기억입니다..

치유 2006-09-15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08520

마노아 2006-09-15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제가 지금 보고 있는 숫자도 딱 고거예요. 동시에 같은 숫자 본다는 게 넘 신기해요^^
이야기 해주신 선생님이 확실히 인상에 남지요? 저도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이야기 많이 해요^^ㅎㅎㅎ
 
살아남은 자의 슬픔 브레히트 선집 1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김광규 옮김 / 한마당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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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가 누구인가를 미리 알고서 작품을 접하게 되면, 그 작가에 대한 선입견으로 작품을 읽기도 전에 지레 짐작으로 평을 하고서 첫 장을 펴게 되는 예가 있다.  또한 비슷한 감정으로 어떠 어떠하리라... 라는 식으로 기대를 하게 된다.  그러나 때로 어떤 작품은 그 작가가 누구인지, 그가 어떤 시대를 살았는지, 이 작품을 쓰게 된 배경은 어떠한지를 알고서 접근하는 것이 작품의 이해에 훨씬 도움이 될 때가 있다.  브레히트의 시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그러했다.


19세기 말에 태어나서 전쟁의 폐허를 경험하고 나치 치하에서 탄압도 받고, 긴 망명 세월을 보내고 동독에서 사망한 브레히트는, 그가 체험한 세대가 공유한 기억으로 인해 철저히 리얼리스트가 되었다.  아마도, 그 시대를 살았던 지식인 혹은 예술인으로서 시대의 아픔에 동조하지 않고 홀로 외길을 걷는다면, 그것은 현실의 도피이거나 비겁한 자기 부정으로 내비치기도 쉬웠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브레히트의 아픔이, 그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남에게 보이기 위한 가식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작품은 작가가 살았던 그 시대상을 투영할 수밖에 없음을 다시 한번 느꼈을 뿐이다.


눈 속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구조 요청을 보낸 어린 아이들의 모습을 소년 십자군에 비유했던 것, 날기를 원했던 재단사와 그를 부정한 주교의 모습, 화가로 묘사한 히틀러, 무차별로 군대에 끌려간 남자들의 모습, 망명지에서 입국 심사를 받는 이주자들의 모습 등, 하나하나 관념적인 단상들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사람들의 모습이 시 속에 녹아 있었다. 


시인의 작품 연대별로 구성을 취한 이 시집은 작가의 세월과 그가 이동한 거리를 함께 이동하며 독자들에게 눈에 보이듯 그려주고 있다.  마지막에 역자의 작품 해설과 배경 설명 등이 주석처럼 달려 있는데 이 또한 읽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번역을 통해서 전달되어지기에는 ‘시’라는 장르가 워낙 섬세하여서 그 미적 가치가 충분히 전해지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  그것은 어느 누구가 번역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우리의 한계일 수밖에 없다. 

 

역자는 브레히트가 서독에서 작품 생활을 하지 못한 것을 서독과 브레히트 자신, 그리고 우리 모두의 비극이라고 말을 했는데, 그가 그 같은 극한 상황 속에 놓여 있기 때문에 이 같은 시도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만약 그가 좀 더 여유 있고, 좀 더 안락하며 덜 위험한 주변 환경을 가졌다면 이보다 말랑말랑하고 부드럽게, 덜 날카로운 그런 시가 나왔을 지도 모른다.  물론, 브레히트 자신으로서는 간절히 서독을 원했을 테지만 이제 수십 년이 지나고도 여전히 읽혀지고 또한 감동을 주는 그런 시를 남겼다는 것으로 그는 위안을 삼아야 할 것이다.  비록, 그 위로도 결국은 우리들 자신이 대신 받고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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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당신
김용택 지음 / 큰나(시와시학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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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는다는 것은, 때로 쑥스럽고 때로 어깨 으쓱해지는 일이기도 하다.  많이, 그리고 자주는 아니지만 시집을 가까이 하게 될 때 내 가슴에 꽃 한송이 더 피우는 것 같고, 내 인생에 뭔가 향기 한자락을 더해주는 기분이 드니, 시는 실로 위대하고 아름답다.

이 책은 48편의 사랑 시와, 단 한편의 이별시를 수록했다.  편집조차도 시적이랄까.

대체 이런 시를 쓸 수 있는, 그리고 이런 사랑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시인의 감성이란 어떻게 생긴 것일까.  게다가 이런 감성을 끌어내기 위해서 간접경험만으로도 가능한 것인지, 혹은 시인의 직접경험이 만들어내는 것인지 궁금하다.  만약 후자라고 한다면 시인이 겪었을, 그리고 만났을 사랑이란 얼마나 절실하고 지극한 것일까...

사실, 시를 있는 그대로 감상해야 하건만, 이런저런 호기심과 계산들이 머릿속을 떠다녀서 시를 감상해야 할 마음밭의 준비가 잘 되지 않았다.  가슴으로 읽어야 하는데 눈으로, 머리로만 읽으니 제대로 된 감상이 될 턱이 없다.  게다가 시간을 두고 음미해야 하는데, 소설책 보듯 시간 순서로 휙휙 넘겼으니 반성할 일이다..;;;;

하여간, 순백의 느낌으로 다가온 이 시집, 제목부터 참 좋은 책... 내게 있어 "참 좋은 당신"이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을 떠올려 본다.  분명 있다.  그 고마움과 사랑스러움에 바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사람이, 고맙게도 있다.  꼭 이성일 필요가 없는 그 사람이 새삼스레 고마워져서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진다. 

 

내가 그렇게 부르듯이, 그 사람도 나를 "참 좋은 당신"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런 사람이 내가 될 수 있다면 정말로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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