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남기철 옮김 / 이숲에올빼미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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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가 유리구두 한 짝을 떨어뜨리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그래도 왕자는 신데렐라를 찾을 수 있었을까? 제 아무리 왕자라 해도 지난밤 무도회에서 만난 소녀 한 명을 찾는 건 불가능하겠지. 신데렐라는 어쩔 수 없이 재투성이 소녀로 평생 살아가게 될 거야. 못된 계모와 심술궂은 두 언니의 등살을 받으면서.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를 읽는 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신데렐라가 잃어버린 유리구두 한 짝이 그녀에게 행복의 씨앗이었다고.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클라인-라이플림 우체국에서 일하는 크리스티네. 한창 젊은 나이이지만 그녀의 삶은 꿈과 거리가 멀었다. 전쟁으로 아버지와 오빠를 잃은데다 엄마마저 병으로 앓아누워서 우체국과 집을 오가는 가난하고 평범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행복이란 걸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고 지내던 어느 날 크리스티네는 한 장의 전보를 받는다. 젊은 시절 아름다운 모델이었던 이모는 불륜 상대남자의 이혼을 부추기다 도리어 사고를 당해 미국으로 떠났는데 바로 그 클레르 이모가 남편과 스위스로 여행을 왔다면서 언니인 크리스티네의 엄마를 초대를 한 것. 하지만 크리스티네의 엄마는 오랜 병 때문에 여행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크리스티네가 대신 여행을 떠나게 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것도 아픈 엄마를 두고 혼자 떠날 수 없지만 오랜만에 쉬면서 바깥세상 구경도 하라는 엄마의 설득에 마지못해서.




이모의 초청으로 스위스의 휴양지 엥가딘에 도착한 크리스티네는 오스트리아 시골과 전혀 다른 모습, 그야말로 휘황찬란한 별친지에 들어서자마자 주눅이 든다. 멋지고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에 비해 초라한 자신의 모습에 자신감을 잃는다. 그런 조카의 모습이 가엾고 마음에 걸린 이모는 크리스티네에게 자신의 옷을 빌려주고 미용실에 데려가 머리를 손질하는 등 한껏 단장을 시킨다. 이후 몰라보게 달라진 크리스티네. 그녀는 더 이상 우스꽝스럽고 촌스러운 시골 처녀가 아니었다. 완벽하고 아름다운 아가씨로 탈바꿈한 것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예전과 다르다는 걸 느낀 크리스티네는 조금씩 자신감을 갖는다. 조용하고 세련된 분위기에 맞게 당당하게 행동할 수 있게 되고 그런 자신을 ‘폰 볼렌양’이라 부르며 다가오는 이들과의 만남을 즐기게 되었다. 어느새 호텔 사교계의 스타로 떠오른 크리스티네. 그러나 그녀의 화려한 변신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크리스티네를 못 마땅하게 여겼던 이에 의해 그녀의 신분이 탄로가 나면서 어쩔 수 없이 고향인 오스트리아의 시골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짧지만 다른 이들의 주목을 받고 화려한 변신을 경험했던 크리스티네. 그녀에게 고향은 더 이상 정겨운 곳이 아니었다. 이렇게 누추한 곳에서, 볼품없는 사람들과 어떻게 살았을까 의아할 뿐이다. 오랜 병을 앓던 엄마마저 세상을 떠나고 나자 크리스티네는 모든 것이 지겹기만 했다. 그러다 한 명의 남자를 만난다. 형부의 전우였던 페르디난트. 크리스티네는 가난하지만 어딘지 반항적인 기질의 페르디난트에게 이끌리면서 그와 함께 삶을 마감하려고 하는데...




뛰어난 소설가로 알려진 슈테판 츠바이크. 그의 소설은 1차 대전을 전후로 한 시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책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시대만 다를 뿐 지금 우리의 상황과 너무나 흡사하다. 시골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던 순박한 소녀가 화려한 도시의 불빛에 빠져 본래의 자기 모습을 잃어버리고 전혀 다른 이가 되어버리거나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한 나머지 목숨을 끊는 이들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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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란1 2011-12-04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요즘 체스에 빠져사는데요. 하루에 한판 이상은 두고 있어요. 재미있습니다.한번 해 보세요. 나무로 된 체스판 사서 두 아들이랑 즐겨보세요. 가끔 남편과도 ^.^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 오가와 요코 컬렉션
오가와 요코 지음, 권영주 옮김 / 현대문학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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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수학자였지만 불의의 사고로 기억이 80분밖에 지속되지 않았던 사람이 생각납니다. 자신의 한계를 알기에 그는 자신이 입는 옷과 집안 여기저기에 메모지로 도배를 하듯 했지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더 이상 만날 일이 없어 속이 후련하던 수학, 수식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 준 소설 <박사가 사랑한 수식>. 평범하지 않은 박사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일상을 바라보며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는데요.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저자 오가와 요코의 새로운 이야기가 출간되었습니다.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인데요. 왼손으로 고양이를 안고 오른손에 코끼리의 꼬리를 쥔 소년이 깊은 바다 속을 잠수하는 듯한 모습은 호기심과 함께 이번엔 과연 어떤 이야기일지 기대를 불러 왔습니다.




소년은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붙은 채 태어났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알리는 첫 울음마저 터뜨리지 못한 아기에게 수술이 행해졌습니다. 원래 붙은 것 마냥 꼭 맞물린 입술은 절개한 다음 정강이 피부를 이식해서 붙였는데요. 그 때문에 소년의 입술에선 솜털이 자랐고 자연히 또래 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소년에겐 부모도 친구도 없었어요. 할아버지, 할머니, 남동생이 유일한 가족이었는데요. 그런 소년에게 어느 날 운명적인 만남이 다가왔습니다.




학교 풀장에서 죽은 남자에 대해 알고 싶어 찾아간 버스 회사의 독신자 기숙사. 소년은 그곳 마당에서 ‘회송’버스를 개조해서 살아가는 거구의 남자를 만나는데요. “서두르지 마라. 꼬마야”하고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남자를 통해 소년은 나무로 만든 왕을 쓰러뜨리는 게임, 체스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체스 테이블 아래로 기어들어가 체스말 중 하나인 ‘폰’이란 이름을 한 흑백점박이 고양이를 안고서. 하지만 단 것을 좋아하던 마스터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면서 소년은 큰 상처를 입습니다. 몸집이 커지는 것에 두려움과 공포를 품은 나머지 스스로 성장을 멈추게 된 거지요. 입술은 원래 맞붙어서 태어났던 때처럼 여간해선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어느 날 한 남자가 소년을 찾아옵니다. 그는 소년에게 퍼스픽 해저 체스클럽에서 나무 인형을 조종하며 체스를 해달라고 제안합니다. 누구에게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도 없고 자신의 체스 실력을 뽐낼 수 없는 일이지만 소년은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소년이 체스의 바다에 잠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지요. ‘반상의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알렉산드르 알레힌 인형, ‘리틀 알레힌’이 되어 소년은 우주를 구성하는 입자수보다 많은 10의 123제곱수에 이르는 고 8X8 모눈의 바다를 깊이, 자유롭게 유영하기에 이릅니다. 상대를 제압하고 이기기 위한 체스가 아니라 시를 짓듯 아름다운 체스를 펼치는 ‘반하의 시인’으로 불리게 됩니다.




운명처럼 만난 마스터와 체스를 통해 자신만의 인생과 삶을 펼쳐나간 소년의 이야기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 이 책은 독특하게도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이름’이 없습니다. ‘리틀 알레힌’ ‘마스터’ ‘미라’ ‘늙은 영양’처럼 그저 그를 상징하는 것이 주어졌을 뿐인데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데 전혀 어려움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각각의 인물과 본문에 수시로 등장하는 체스경기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작지만 결코 후퇴하지 않는 용사 ‘폰’을 좋아한 소년. ‘비숍의 기적’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기보를 남긴 리틀 알레힌. 그의 이야기를 만나고 돌아서면서 가슴 한 켠이  따뜻한 온기로 가득차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체스는 모르지만, 킹, 퀸, 비숍, 나이트, 룩, 폰의 역할도 규칙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의 체스 테이블 앞에 앉고 싶어집니다. 오늘밤 폰의 목에는 낡은 은색 방울이 달려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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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시에 매혹되다 - 한시에 담긴 옛 지식인들의 사유와 풍류
김풍기 지음 / 푸르메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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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는 누구냐? 원더걸스?” “아이고, 이모. 몇 번을 말해요. 소녀시대라니까요!”

며칠 전 친정아버지 제사가 있어서 친정에 들렀습니다. 제사음식을 준비하면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려니 아이돌이 수시로 등장하더군요. 요즘 연예인들이 예쁘고 늘씬해서 보기엔 좋은데 워낙 서로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구별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더라구요. 사정이 이러하니 그들이 부른 노래는 더욱 심합니다. 아무리 곱씹어도 알 수 없는 의미 없는 낱말들의 연속, 신변잡기 적인 내용. 그건 마치 외국어로 된 노래를 듣는 기분입니다. 이런 걸 세대차이라고 하겠지요.




텔레비전을 잠근 지 6년...불과 6년이란 시간이 이렇게 세대차이를 불러왔으니 오래전 한시는 어느 정도인지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요즘 젊은 청년들의 생활과 감성을 모르고서는 21세기 노래를 알 수 없듯이 몇 백 년 전의 시대상황과 당시 사람들의 감성, 생활, 정서를 노래한 한시를 현대의 저, 더구나 한자도 잘 모르는 제가 제대로 이해하기란 어쩌면 무리일지도 모릅니다. 지금의 제가 어느 정도인지 너무나 잘 알지만 그럼에도 한시에 미련이 남았습니다. 학창시절엔 고문시간이 그렇게 싫었는데...참 이상하지요?




한시에 대한 알 수 없는 동경만으로 그동안 동양고전과 한시에 관한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만큼 쉽게 읽히지가 않았어요. 하루에 조금씩 며칠을 읽다가 도중에 그만 덮어둔 책이 몇 권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한시에 담긴 옛 지식인들의 사유와 풍류’라는 부제를 한 <옛시에 매혹되다>란 책을 손에 들고서도 고민이 됐습니다. 제가 과연 이 책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저자는 옛시를 ‘고전문학과 풍류’ ‘부채이야기’ ‘차를 마시며’ ‘절의 정신’ ‘문학과 여행’ ‘이별과 문학’ ‘책과 사람’ ‘봄노래’ ‘꽃의 문화사’ ‘질병과 몸’ ‘변방의 노래’ ‘장마의 계절’ ‘비온 뒤의 산을 오르며’ ‘정원 이야기’ ‘대나무 향기 속에서’ ‘은거의 즐거움’ ‘밤비 내리는 소리’ 이렇게 17개의 주제어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는데요. 제일 먼저 풍류에 대한 이야기로 문을 엽니다. ‘풍류’를 외국어로 번역할 때 ‘멋’ ‘결’ ‘고움’ 등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풍류’는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우리 고유의 감정이고 개념이라고 말하면서 선조들이 어떤 상황에서 풍류를 노래했으며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전해줍니다. ‘정신의 깊숙한 곳에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풍류’라고요.




부채에 담긴 사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옛날 단오때 부채를 선물했다는 건 알지만 조선의 사신이 청나라를 찾았을 때 무언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기면 부채를 선물했다는 건 처음 알게 됐는데요. 요즘은 선풍기나 에어컨이 있어서 무더운 여름날 부채를 보기 드물지만 그 옛날엔 부채가 대나무를 손질하고 종이를 붙이는 것 이상으로 여러 가지 수공이 가해져서 무척이나 귀한 물건이었다고 합니다. 그러고보니 얼마전 책상 뒤로 떨어진 책을 찾다가 거기서 몇 년 전 다니는 절의 스님께서 손수 만들어 주신 부채를 발견했는데, 귀한 부채를 함부로 다룬 것 같아 갑자기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랑과 이별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노래의 소재였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고 떠난 이를 아쉬워하는 한시를 만날 수 있었는데요.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바로 연암 박지원의 시였습니다.




우리 형님 얼굴은 누구와 비슷했나

선친 생각날 때마다 형님을 보았었지

이제 형님 생각나면 어디서 뵈올까

의관을 갖춰 입고 냇물에 비춰봐야겠지.(107쪽)




‘그립다’ ‘슬프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이 시에서는 먼저 떠난 아버지와 형님을 그리워하는 박지원의 마음이 오롯이 느껴집니다. 꿈에도 그리운 아버지와 형님을 만나기 위해 의관을 차려입고 냇물에 자신을 비춰보는 연암의 모습이 선하게 떠오릅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결코 잊혀지거나 지워지지 않을 진한 그리움이 배어나왔습니다.




책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절대 이해불가인 정도도 아니었습니다. 저자가 소개해준 한시를 만나고 있으려니 옛사람들에게 있어 한시를 짓는 일은 일상이 아니었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기보다 속으로 잠재워 한시로 조용히 읊으며 다스렸던 옛사람들. 문득 그들의 삶의 자세를 닮아가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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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
최성일 지음 / 연암서가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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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이었습니다. 최성일의 <어느 인문학자의 과학책 읽기>를 만났습니다. 지금은 무관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한때 과학도였던 저는 인문학자는 과학책을 어떻게 읽고 이해하는지 궁금했습니다. 학창시절 <코스모스>를 인상 깊게 읽었다는 저자는  우리 일상이 과학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 자신이 읽었던 책을 통해 모색하고 있었는데요. 저자가 본문에서 언급한 책 중에 막상 읽은 건 몇 권 밖에 되지 않지만 저자의 책읽기를 통해 새로운 걸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구요. 좀 더 깊이있는 책읽기, 비판적이고 추론적인 책읽기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책의 저자가 지난 7월, 지병을 앓다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제게 새로운 도전의식을 일깨워준 저자의 죽음에 충격과 놀라움, 안타까움이 밀려왔 습니다. 얼마전에 그의 마지막 책을 만났는데요. 그 어떤 수식어도, 부제도 없이 단 한 줄 <한 권의 책>이란 제목만이 적힌 책을 손에 들었을 때 그 느낌이 여느 때와 달랐습니다. 지금까지 숱하게 많은 책을 읽었고 그 중에 저자가 이미 유명을 달리한 책도 무수히 많았건만 이번과는 달랐습니다. 왠지 모를 설레임과 두려움이 뒤섞인 채 책장을 펼쳤을 때, 제가 만난 건 세상을 떠난 남편을 대신한 아내의 글이었습니다. ‘남편의 유고집이 되고 말았다’는 문구를 보는 순간 왜 그다지도 마음이 아프던지... 남편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쓴 아내의 글을 통해 그동안 몰랐던 저자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책을 너무 좋아해서 외출을 줄일 정도였다는 것과 자신은 그렇게 책을 좋아했음에도 아이들에게 독서를 강요하지 않는 아버지였다는 것과 지저분한 손으로 책을 볼 수 없어 늘 손을 씻었다니 책을 대하는 저자의 마음가짐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서평이라고 할 수도 없는 서평을 쓰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숱하게 많은 서평집을 읽었습니다. 이름난 저자의 책, 내공이 깊은 그들의 서평을 보면서 저의 글에 무엇이 부족한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고. 그들이 읽었던 책을 나 역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수첩에 길고 긴 목록을 적어 넣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전 어딘가 주눅이 들어 있었지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최성일, 저자의 글은 저를 주눅 들게 하지 않았습니다. 분명 제가 읽지 않은 처음 만나는 책인데도 그의 글의 흐름에 무사히 안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 곰곰 생각해보니 저자의 글에는 독자를 현혹시키는 수식어가 없고 단정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장도 어렵지 않아서 짧은 글 속에서도 독자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책의 내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예를 들어 제일 먼저 소개되어 있는 책 <즐거운 불편>은 저자가 ‘11가지 물질과 편리함을 일상하게 멀리하는 실험’에 관한 것인데 이 책을 읽지 않은 저는 예전에 읽었던 <굿바이 쇼핑>을 떠올리며 저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고 얼마전에 참가했던 박물관 강좌를 바탕으로 <밤의 일제 침략사>를 이해할 수 있었으며 지인들과의 독서모임에서 <불편해도 괜찮아>라는 책으로 인권에 관해 열띤 토론을 했기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시민불복종>이란 책이 낯설게 다가오지 않았답니다.




처음 만난 책인데도 이 정도인데 저자와 저의 공통분모, 함께 읽은 책은 어느 정도였겠습니까.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기념식에 참가하기 위해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 들렀던 청년의 이야기가 담긴 <노 맨스 랜드>에 대한 저자의 글을 읽으며 예전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고 야구를 사랑하는 소년들의 성장소설인 <배터리>에서는 우리만의 야구성장소설을 꿈꾸기도 했으며 ‘<태양의 아이>를 읽으며 눈물을 흘리지 않은 자는 결코 상대하지 않’겠다는 대목을 보며 ‘저두요! 제 생각도 그래요’하고 공감의 눈길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저의 공감을 받아줄 저자가 세상에 없으니...




책에 관한 책을 읽으며, 남은 책장이 줄어드는 걸 ‘아쉽다’고 생각하기는 처음입니다. 길지 않은 삶을 책과 함께 치열하게 살아간 저자의 글, 그의 생각을 좀 더 만나고 싶었는데 말이지요. 마지막 책장을 덮고 다시 앞으로 돌아갑니다. 공감하는 글귀, 생각하게 하는 대목에 줄을 긋고 읽고 싶은 책, 구입해야 할 책에 포스트잇을 붙여둔 걸 보면서 불현듯 저자는 밑줄도 자를 대듯 반듯하게 그었다는데...하는 생각이 밀려듭니다. <한 권의 책>을 통한 저자의 책사랑, 제게 많은 걸 일깨워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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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로 산다는 것 - 우리 시대 작가 17인이 말하는 나의 삶 나의 글
김훈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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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쌍, 30여개의 눈을 바라본다. 나와 시선을 마주하는 이가 있는가하면 아래로 시선을 향하거나 눈을 감은 사람, 독특한 안경을 쓴 탓에 그 속의 눈을 바라볼 수조차 없는 사람이 있다. 표정도 각양각생이다. 웃는 눈을 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무표정인 사람, 오히려 독자인 나를 관찰하듯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몇몇의 이름은 단박에 알아냈다. 나머지는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나중에 자세히 보니 사진 옆에 자그맣게 이름이 있었다) 알고 싶었다. 얼굴 중에서 드러난 건 오로지 눈뿐이지만 개성적인 시선과 모습, 표정을 지닌 17명의 사람들. 그들의 공통분모인 다름아닌 소설가였기에. 그들을 알고 싶었다. 소설가인 그들의 삶이 궁금했다.




<소설가로 산다는 것>. 제목에서부터 강하게 끌렸다. 소설가로서의 일상은 어떨까? 늘 알고 싶었다. 그런데 책이 담고 있는 것은 ‘우리시대 작가 17인이 말하는 나의 삶 나의 글’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소설가로서의 삶이라기보다 글을 쓰는 방식, 일상이었다. 예상과 다른 전개가 처음엔 조금 아쉬웠지만 어찌 보면 내겐 더 이득이었다. 소설가들에겐 글 쓰는 것 자체가 일상이고 삶일 테니까.




책에는 우리 시대의 작가 17명(김경욱, 김애란, 김연수, 김인숙, 김종광, 김훈, 박민규, 서하진, 심윤경, 윤성희, 윤영수, 이순원, 이혜경, 전경린, 하성란, 한창훈, 함정임, 가나다순)이 자신의 소설과 글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어떤 순서로 볼까? 고민이 됐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순서대로? 아서라. 니가 아는 작가가 얼마나 된다고. 말이 되는 소릴해... 그래, 맞어. 그냥 순서대로 읽자.




처음으로 만난 김경욱은 일본작가의 자살에 대한 얘기가 흥미로웠지만 왠지 어려웠고(조만간 그의 <위험한 독서>를 읽으려고 했는데 왠지 각오를 해야 할 듯...) 중고서점에서 구한 <언어학사>라는 책 속에서 예전에 그 책을 소유했던 연인들의 흔적을 발견하고 전화까지 걸고 마는 김애란, 그녀에게선 왠지 정이 느껴졌다. 고교시절 멍청한 이름의 밴드를 결성했던 전력을 지닌 김연수는 글을 쓸 때 언제나 노래와 음악을 찾아헤매고(그의 <7번 국도>에서도 비틀즈의 ‘Route 7’란 가공의 노래가 나왔다) 김인숙은 마치 퍼즐을 하듯 머나먼 타국을 여행하면서 그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이야기를 자아냈다. 박민규는 그의 소설만큼이나 솔직하고도 파격적이었고 ‘추억’이란 단어와 잘 어울리는 이순원은 역시 어린 시절의 꿈과 추억, 경험들이 이야기의 씨앗이라는데 그가 앞으로 그려낼 사람들이 누구일까 궁금해진다.




소설가들이 털어놓는 자신만의 창작론과 일상은 17명 작가의 개성만큼이나 각양각색이고 흥미로웠는데 그 중에서도 김훈과 심윤경이 가장 인상에 남았다. 오십 지천명의 나이를 넘겨서 소설을 시작한 이후로 굵직굵직한 작품을 연이어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가리켜 ‘이야기꾼이 아니’라고 하는 김훈. 그는 자신의 시선이 닿는 장면, 귓가에 머무는 소리들을 글로, 모국어로 나타내고자 하는 천상 이야기꾼이었다. 별자리점에서 나타난 운명처럼 글을 쓰는 심윤경. 그녀가 생물학도였다니. 미처 몰랐다. 그녀에게 생물학보다 문학이 더 잘 어울린다고 말해준 것이 그녀의 남편이었다는 대목에서 또 한 명의 생물학도인 나는 갑자기 실험을 해보고 싶어졌다. 나한테 생물학과 문학 중에서 뭐가 어울리냐고 남편에게 한번 물어볼까? 보나마나 뜬금없는 소리한다고 핀잔이나 늘어놓을테지.




책읽기의 폭이 좁은데다 내공도 깊지 못해서 17명의 작가 모두의 이야기를 공감하고 가슴에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그들을 만나면서 내 속엔 하나의 질문이 자리를 잡았다. 난 왜 작가가 되고 싶은 걸까?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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