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풍론도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남희 옮김 / 박하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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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올해도, 역시. 눈 구경 한 번 못하고 겨울이 지날 모양이다. 사는 곳이 따뜻한 남쪽 도시인데다 바닷가와 가까운 곳이라 다른 동네에선 눈이 와도 하늘에선 눈송이 하나 떨어지지 않는다. 어쩌다 눈이 오더라도 잠깐 흩뿌리는 정도거나 밤새 조금 내리고 말아서 눈 내리는 날의 정취를 느끼지 못할 때가 많은데. 눈과 인연 없는 동네에서 사는 것의 보상이라도 되려는지 요즘 읽는 책마다 눈, 눈, 눈이다. 이순원의 <첫눈>, 요 뇌스뵈의 <스노우맨>, 히가시노 게이고의 <질풍론도>까지. 눈은 펑펑 내리다 못해 눈 무더기에서 뒹구는 격이 되어 버렸다. 이런 걸 대리만족이라고 해도 되려나?

 

이제 책 이야기를 해보자. 저자는 히가시노 게이고.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다. 사람의 심리를 절묘하게 파헤친 사회파 추리소설부터 일상의 따뜻함이 묻어나는 소설까지 저자의 이름 그 자체가 베스트셀러 보증수표다. 그가 겨울 분위기가 완연한 작품을 내놓았다. 그것이 바로 <질풍론도>. '질풍', 몹시 빠르고 거세게 부는 바람. ‘론도’, 자주 반복되는 주제부와 사이의 삽입부로 이뤄진 음학의 형식으로 경쾌한 춤곡에 쓰인다. 즉, 바람이 거세고 빠르게 리드미컬하게 분다? 이 정도로 해석하면 될 듯하다.

 

소설은 눈이 내리는 고요한 날, 누군가 나무 밑동의 눈을 파서 무언가를 숨기는 것에서 시작된다. 자신이 묻은 것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 작은 갈색 테디 베어 인형을 걸어둔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됐다는 걸 확인한 남자는 눈 쌓인 설원을 경쾌하게 활주한다. 그리고 회심의 미소. 남자가 숨긴 것은 과연 무엇일까.

 

한편 다이호대학의 국립감염증 연구소는 조용히 술렁이기 시작한다. 구리바야시 연구원이 연구소의 실험실 금고에 보관 중이던 생물병기가 일부 사라진 걸 알아챈 것. 같은 시각, 도고 부장은 자신에게 도착한 메일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메일 발신자는 연구소에 근무하던 구즈하라. 그는 자신이 담당하고 있던 생물 병기 K-55를 훔쳤고 그것을 의문의 장소에 감췄음을 밝힌다. 문제는 생물병기인 K-55가 지극히 적은 양으로도 호흡기로 감염되어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탄저균을 초미립자로 가공한 것이다. 그래서 만약 외부에 노출될 경우 탄저균보다 더 엄청난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강력한 무기다. 그것을 구즈하라가 훔쳐내어 돌려받고 싶으면 3억 엔을 내놓으라고 만약 자신의 요구를 거스르거나 일정시간이 지나면 물건의 안전은 보장하지 못한다고 협박한다.

 

 

갑작스런 사태에 구리바야시와 도고는 당황한다. 자칫 잘못하면 대량 감염으로 번질 수 있기에 구리바야시는 경찰에 신고할 것을 종용하고 도고 부장은 탄저균을 초미립자로 가공한 것 자체가 불법이기에 조용히 마무리 짓기를 원하는데. 그런 와중에 뜻밖의 연락을 받는다. 구즈하라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요구 금액을 낮춰서라도 구즈하라로부터 K-55를 무사히 건네받는 것이 최선이라 여겼기에 그들은 순간 당황한다. 이제 어떻게 찾지? 눈 쌓인 들판에 나무, 그리고 갈색 테디 베어가 찍힌 사진 몇 장, 이것만 보고 여기가 어딘 줄 알고?

 

K-55 보관용기가 섭씨 10도 이상 되면 깨어지는데다 위치를 나타내는 발신기의 밧데리조차 제한되어 있고 그 전에 K-55를 되찾아야 하는 절대절명의 순간을 맞았다. 도고는 구리바야시에게 특명을 내린다. 어떻게 해서든 K-55를 찾아오라고. 과연 구리바야시는 K-55를 무사히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사건이 터지자마자 범인이 사망해버리는 바람에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지방 한 도시의 스키장, 그것도 사람들의 통행이 제한된 구역의 드넓은 설원의 어딘가에 감춰진 K-55를 구리바야시가 어떻게 찾아낼지에 주목해서 책을 읽어나갔다. 그런데 이야기는 생각했던 것보다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추리소설은 언제나 마지막 순간에 닥칠 대반전을 은근히 기대하며 읽기 마련인데 다소 느슨한 느낌이랄까? 문제의 생물 병기가 외부에 노출되는 순간 인근 사람은 물론 더 먼 곳까지 퍼지는 대재앙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긴장감을 갖게 하는 유일한 요소였다고나 할까? 지금까지 읽었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중에서는 평이한 느낌이 들지만 그래도 이 겨울, 새하얀 설원을 스키, 혹은 스노보드를 타고 리드미컬하고 경쾌하게 활주하는 기분을 책으로나마 만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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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 MINI+ 전집 세트 - 전6권 셜록 홈즈 MINI + 전집
아서 코난 도일 지음, 꿈꾸는 세발자전거 옮김, 시드니 패짓 외 그림 / 미다스북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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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작년 이맘때였던 것 같다. 말로만 듣던 <셜록>을 처음 봤다. <셜록 홈즈>시리즈는 이미 초등학생 때 모조리 섭렵해버려서인지 이후로는 그다지 흥분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큰아이를 위해 장만했던 <셜록 홈즈>를 다시 읽어보기도 했지만 예전만 못했다. 해서 사람들이 너도나도 “셜록” “셜록”하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왠 뒷북?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러다 늦은 밤, 우연히 보게 된 <셜록>. 아, 이건 정말이지 대~박! <셜록>은 셜록 홈즈를 21세기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한 영국드라마인데,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셜록 홈즈와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셜록 홈즈’였다. 분명 유전자는 같지만 완전히 다른 환경과 베네딕트 컴버배치라는 배우를 만나면서 셜록 특유의 독특하면서도 괴팍한, 천재적인 면이 더욱 돋보였다. 한마디로 ‘깔맞춤’한 듯한 느낌? 그래선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도 마치 처음 만나는 것마냥 신선하게 다가왔다. 발음에서 미국식 영어와는 사뭇 다른 영국식 영어와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대사를 이해하고 따라가기가 처음엔 낯설기도 했지만 <셜록>시즌1과 시즌2를 보면서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스릴과 흥분이 스멀스멀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리고 시즌3가 언제쯤 나올까. 이제나저제나 기다릴 때 만나게 된 책, 그것이 바로 <셜록 홈즈 MINI +>이다.

 

<셜록 홈즈 MINI +>의 첫인상은 ‘MINI’, 작다는 거다. 성인치고는 손이 작은 내가 한 손으로 쥐어도 될만큼 작고 앙증맞다. 이래서 제목이 ‘MINI’인가? 그럼 ‘+’ 요건 또 뭔가 했다. 그런데 의문은 바로 풀렸다. Mini(내 손에 작은 책으로), Memory(영원히 기억될), Masterpiece(불후의 명작을 읽으며)의 첫 글자를 따서 ‘M’, 여기에 학습적인 요소가 더했기에 ‘+’를 붙이게 되었다고 한다.

 

하나의 의문이 풀리자 또 하나의 의문이 생겼다. 셜록 홈즈에 대체 어떤 학습적인 요소를 더했다는 거지? 이건 책장을 넘기면서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본문을 읽다보면 중간중간에 ‘붉은색의 굵은 고딕체’로 된 단어를 볼 수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수능의 국어에서 자주 출제되는 단어라고 한다. 수능국어 빈출 단어라고 하니까 왠지 어려울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다. <셜록 홈즈 MINI +>의 ‘주홍색 연구’를 기존에 출간된 H출판사의 <주홍색 연구>와 비교해보니 H출판사에서는 ‘나는 봄베이 부두에 내리자마자 내가 배속된 부대가 이미 적지 깊숙이 들어가 있다는 을 알았다.’라는 대목이 <셜록 홈즈 MINI +>에서는 ‘나는 봄베이에 도착하자마자 제5연대가 산지 통로를 이용해 이미 적진 깊숙이 전진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로 표기되어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구어체를 문어체로 번역했다는 것 외에는 큰 차이점이 없었다.

 

구어체를 문어체로.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사소한 것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알고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흔히 영유아기의 아이들을 기르는 부모가 범하기 쉬운 실수 중에 하나가 바로 아이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라고 한다. 금쪽 같은 아이를 위해서라면 아이가 혀짧은 소리로 “까까”라고 하는 모습이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이쁘더라도 그대로 “까까줄까?”라고 할 것이 아니라 “간식 먹고 싶어? 과자 줄까?”라고 해야 한단다.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고급언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조금씩 이끌어주는 것, 좀 더 성장한 아이와는 일상 속에서 대화할 때도 가끔은 주어, 목적어, 보어, 서술어를 넣은 ‘완전한 문장’을 아이가 구사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도 부모의 역할이라고 논술강좌 선생님께서 강조했던 기억이 난다.

 

생활 속에서 구술, 논술을 연습하고 훈련하라는 건데 <셜록 홈즈 MINI +> 시리즈가 좋은 교재가 될 듯하다. 전제, 유용, 정황, 근거....등의 단어(때로 한자까지 더해진)들을 흥미진진한 셜록 홈즈 이야기로 만나면서 익숙해지면 이후 다른 문장과 다른 주제를 담은 글 속을 만나더라도 이미 숙지하고 있는 단어가 있기에 해당 내용을 유추하고 추론해낼 수 있지 않을까.

 

<셜록 홈즈 MINI +전집>은 모두 여섯 권이다. 예리한 관찰력을 지닌 천재탐정 셜록 홈와 그의 조력자인 왓슨이 처음 만게 되는 <주홍색 연구>를 시작으로 홈즈와 왓슨의 환상적인 콤비가 돋보이는 <바스커빌 가의 개>, <공포의 계곡>, <네 사람의 서명>과 같은 장편과 ‘코난 도일 선정 베스트 단편 12작품’이 수록된 <베스트 컬렉션 12>, 네 개의 장편을 원문으로 접할 수 있는 <The Best Novels Collections>도 곁들여져 있다. 크기가 작아서 소지하기에도 간편하다. 가방에 두세 권을 넣어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 다만 중년의 내게는 본문의 글자가 작아서 안경을 끼고 봐야 하지만 그거야 나이가 들어서인데 어쩌겠는가.

 

“엄마, 셜록 옛날에 다 읽었다 안했어?”

“어, 다 읽었지”

“근데 왜 또 읽어?”

“어? 궁금하니까. 읽어보고 싶으니까.”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다시 읽을 때는 무언가 계기가 필요하다. 뒤이어 벌어질 사건과 전개상황을 알기에 시시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이전에 미처 알지 못했던 단서나 실마리, 복선을 접하지 않을까 기대가 되기도 한다. 기다리고 기다려서 드디어 만나게 되는 <셜록 시즌3>와 함께 조만간 출간될 <셜록 홈즈 Y 베스트 컬렉션>. 정말 기대된다. 두근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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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주의 인물
수잔 최 지음, 박현주 옮김 / 예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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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Lee)는 헨들리가 폭탄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그를 얼마나 싫어했는지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날것의, 한 번도 파헤쳐보지 않은 생각의 광맥이 폭발로, 순간 훤히 드러나버렸다. - 11쪽.

 

책은 시작부터 초 강경수로 나왔다. 폭탄이 터졌고. 폭발로 인해 누군가(헨들리)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지만. 리(Lee)는 헨들리를 싫어한다. 아니, 미워한다.

 

에이, 뭐야. 답이 나왔네. 리가 범인이네!

딩동댕~!하면 좋겠지만 그러면 이야기가 안된다.

아~니. 그럼 뭐야? 누구냐고.

바로 그 ‘뭐’이자 ‘누구’인지를 찾아내기 위한 책이다. <요주의인물>은.

 

소설의 주인공은 리. 육십 대 후반의 수학자이자 대학교수다. 냉소적이고 사교성이 없는 백발의 교수는 대체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없는 법. 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검은 잉크로 채운 몽블랑 만년필을 손에 쥐고 기다렸다. 학생들이 교수실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그래서 자신에게 상담을 요청하기를. 언제나 교수실 문을 살짝 열어두고서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지만 학생이 리의 방을 찾는 일은 없었다. 학생들은 리를 외면했다. 옆방의 헨들리는 달랐다. 젊음과 빛나는 재능을 겸비한 교수가 머무는 공간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헨들리와 학생들이 이야기를 나누거나 간혹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은 벽 너머의 리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런 날들이 이어지면서 리는 헨들리를 미워하게 됐다.

 

그런 어느 날, 헨들리에게 소포가 하나 배달된다. 두꺼운 마분지로 만든 작은 상자 에는 개봉하면 터지도록 설계된 폭탄이 들어있었다. 연구실에서 혼자서 조용히 상자를 열어보던 헨들리는 엄청난 폭발에 말려들었고 옆방의 리는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폭발로 아수라장이 된 가운데 누군가 처음으로 리의 연구실로 들어왔다. 폭발물 처리반이었다.

 

작은 도시의 대학에서 벌어진 폭발 사건은 미국 전역을 뒤흔들었고 학교 역시 충격으로 어우선했다. 그리고 사건 이틀 후 리에게 발신인이 분명하지 않은 편지가 도착한다. 리를 ‘자네’라 칭하면서 ‘오랫동안 자네를 인정하고 존경해왔다’는 ‘옛날 동료이자 친구’의 편지에 리는 혼란에 빠지고. 어느새 자신이 사건의 ‘요주의인물’이 되어 버린 것을 알게 되는데....

 

누가 폭탄을 보냈는가. 범인의 목적은 무엇인가. 소설은 이 두 가지를 추적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리는 ‘옛날 동료이자 친구’라는 범인을 찾기 위해 지난 과거, 오래전의 친구 게이더와 그의 아내였지만 리와 사랑에 빠져 두 번째 아내가 된 아일린을 비롯한 과거 속의 인물과 일들을 돌아보게 된다. 기회의 땅 미국에서 이민자임을 거부하고 미국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쳤던 리. 그런 그에게는 가족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40여 년이 지났음에도 미국이란 나라는 자신을 여전히 미국인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지 않는 사실을 깨닫고 좌절한다.

 

소설은 갑작스런 폭발로 아수라장이 된 현실과 리의 과거가 서로 엇갈리고 겹치듯이 진행되는데 템포가 무척 느리다. 폭발 사건의 범인을 추척해 가는 미스터리적인 요소가 있긴 하나 전체적인 작품에서 볼 때 그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지루할 만큼 길게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다 보면 어느새 다음 굴곡에 다다라 있었다. 미국이란 사회에 스며들고자 했지만 물 위에 뜬 기름처럼 외면당한 이의 좌절과 처절한 회한, 회오와 같은 심리를 저자는 마치 미세한 결을 들여다보듯 세밀하게, 때로는 지나치다 싶을만큼 철저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책의 저자인 수잔 최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한국계 소설가라는 것과 이전에 출간된 작품이 국내에 번역되기도 한 미국 문단에서 주목받는 작가라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됐다. 이것뿐이었다면 난 아마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거다. 읽을 책이 얼마나 많은데, 내 나이에 몇인데, 섣부른 모험은 하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만 표지를 보는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무성한 잎을 떨구고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나무들이 줄지어 선 거리의 벤치에 지팡이를 짚고 앉은, 검은 안경 외에 누군지조차 알아볼 수 없는 사람. 갑자기 그가 품고 있는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한없이 소슬한 거리에 외로이 앉은 그의 옆에 앉아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어졌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결코 쉽지 않은 책이었다. 하지만 ‘참을성 있는 독자에게는 충분한 보상을 주는 작품’이라는 번역자의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며칠 전에 봤던 인터넷 기사에 따르면 소설을 읽으면 뇌의 특정 부위에 변화가 나타난다고 한다. 뇌세포의 변화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마치 소설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느끼게 한다는데 이런 현상은 책을 읽고 나서도 며칠동안 지속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책을 읽는 내내, 책장을 덮고 나서도, 그리고 지금 이순간도 나는 왠지 삭막하고 스산한 벌판에 외로이 서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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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내와 결혼해 주세요
히구치 타쿠지 지음, 김해용 옮김 / 예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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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참 얄궂다. 내 아내와 결혼해달라니? 이 남자, 제 정신 맞나? 자초지종은 모르겠지만 암튼 심보, 한 번 고약하네.

 

 

<내 아내와 결혼해주세요>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멀쩡하게 잘 있는 자신의 아내를 다른 남자와 결혼시키려 하다니... 아니, 밝은 한낮의 거리를 눈을 감은 채 한가로이 거니는 책표지를 보니 이 사람, 아내를 족쇄라고 여기나? 예전에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를 읽으면서 남자들의 심리가 참 얄궂다는 생각을 했는데 <내 아내와 결혼해주세요> 이것도 만만찮다. 첫인상만 따지고 보자면 이 책은 분명 꽝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뭔가 있지 않을까란 궁금증이 비집고 올라왔다. 그래. 분명, 뭔가가 있을 것이야. 그렇지 않다면야... 이 남자, 정상이 아니지...

 

 

소설의 주인공은 일본 예능방송을 주름잡는 베테랑 방송작가 미무라 슈지. 방송 관계자들이 모두 감탄할 수 있는 프로그램, 단 한 명의 시청자라도 편안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 만드는 일에만 전력을 다했다. 그것도 무려 22년간이나. 그런 그에게 어느 날 느닷없는 경고 사인이 켜진다. 그가 췌장암 말기, 그것도 6개월 시한부 생명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가 20년간 기획과 대본을 집필해온 프로그램마저 다음 봄철 개편을 기약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는데 그때까지 남은 기한이 공교롭게도 6개월.

 

 

순식간에 일과 가정, 양쪽에서 벼랑 끝으로 내몰리지만 그는 괜히 베테랑이 아니었다. 기존의 프로그램에서 절묘하게 변화를 준 포맷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절벽으로 내몰린 상황에서 급반전을 꾀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숙제가 남았으니. 아내 아야코와 아들 요이치로에게 자신의 병에 관해 어떻게 털어놓을 것인가 하는 거였다.

 

 

테이블 위에 아이디어 수첩을 펼치고, 만년필로 먼저 ‘앞으로 남은 6개월을 어떻게 살 것인가 기획’이라고 적어 보았다.

대개는 남은 시간을 가족과 지내며 간병 속에서 죽어 간다. 내가 생각하는 건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사라지고 난 후에 아내와 아들이 웃을 수 있는 기획이다. 그게 어떤 기획인지는 아직 전혀 알 수가 없다. 상당히 힘든 숙제다. -32~33쪽.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슈지. 도무지 해결책이 나올 것 같지 않자 그는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에서, 새로운 방송 프로그램 기획안을 세우듯 하나하나 점검하고 계획을 세워나간다. 자신이 없어도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아내를 결혼시켜야겠다고. 급기야 결혼상담소를 통해 아내 몰래 아내의 결혼 활동에 돌입하게 되는데...

 

 

“한 가지 물어봐도 돼요? 왜 아내의 결혼상대를 찾으려는 거죠?”

“그건.”

“그건?”

“좋은 가족이기 때문에, 내가 없어져도 끝내고 싶지 않아요. 좋은 프로그램은 사회자가 바뀌어도 계속되잖아요.” - 190쪽.

 

 

자석에 이끌리듯 만남을 거듭하던 남녀가 사랑에 빠져서 결혼하고 그렇게 함께 한 세월이 있기에 어느 한 쪽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야 하는, 그것도 마지막 순간이 예정된 이의 마음이 어떠할지는 솔직히 상상하는 것조차 힘겹다. 그래서 한정된 시간까지 가족과 함께 할 시간, 추억 쌓기를 하기보다 남은 가족의 행복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슈지의 모습이, 그 간절함 때문에 몇 배나 더 안타깝게 다가왔다.

 

 

기적은 없었다. 마지막이 예정된 삶이었기에 슈지는 그 길을 걸어갔다. 미무라 슈지 기획 ‘아내의 결혼활동’이 갑작스런 돌발상황에 의해 처음의 계획대로 진행되지는 않았지만...슈지와 아야코. 그리고 그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의 도움으로 멋진, 만족할만한 마무리를 짓는다.

 

 

시한부 삶을 살아가는 남편과 아내, 가족의 이야기이기에 이것만으로도 소설은 감동적이다.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보는 듯 톡톡 튀는 유머도 눈길을 끈다. 그렇다고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결말이 어떠하리라는 거, 이야기가 어떻게 어떤 수순으로 흘러가리라는 걸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저자가 어디쯤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을 거란 것도. 하지만 그러면 뭐하겠는가? 어느 틈엔가 함정 깊숙이 빠져서 훌쩍훌쩍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통속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 밉지 않다. 이 책 덕분에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모처럼 감성에 솔직해질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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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팅 게임 - 백만장자의 상속자 16명이 펼치는 지적인 추리 게임!, 1979년 뉴베리 상 수상작
엘렌 라스킨 지음, 이광찬 옮김 / 황금부엉이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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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 7월 4일,‘바니 노드럽’으로 서명된 편지가 여섯 통 배달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당신이 항상 꿈꾸어 오던 미시간 호반의 최신식 호화 아파트를 임대해 드립니다’는 편지를 받은 사람은 환상의 선셋 타워로 찾아온다. 부대시설과 전망 등을 모두 갖춘 최고급 아파트를 저렴한 임대료로 이용할 수 있다는 말에 사람들은 그곳에 입주하게 된다.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유인되었다는 것도 모른채.

 

선셋타워에서 부모님과 언니와 함께 살고 있는 13살의 소녀 터틀은 할로윈데이를 맞아 몇 몇 사람과 내기를 한다. 자신이 절벽 위의 낡은 집, 15년 동안이나 아무도 살지 않아서 유령의 집으로 불리는 웨스팅 저택에 들어가면 1분당 2달러를 받기로 한 것. 걷어차기 선수로 불리는 왈가닥 소녀 터틀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감추고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오고 만다. ‘유령 아니면 유령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을 거라 짐작했지만 설마 시체를 발견하게 될 줄이야...

 

다음날 신문은 문제의 시체이야기로 떠들썩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터틀이 발견한 시체의 신원이 13년 전 행방을 감춘 수수께끼 사업가 새뮤얼 W. 웨스팅이며 웨스팅제지주식회사를 설립한 그의 재산이 자그마치 200만 달러가 넘는다는 것과 생전에 종이 제왕으로 불렸지만 그의 말년은 불행과 비극으로 마감하게 된 것을 전했다. 그 기사를 본 터틀은 의문을 갖는다. 밝혀지지 않은 무언가가 있는 게 틀림없다고.

 

그후 선셋타워으로 또다시 편지가 배달된다. 모두 열여섯 통의 편지에는 당신이 ‘새뮤얼 W. 웨스팅의 유산 상속자 중 한사람으로 지명’되었으니 웨스팅 저택에서 있을 ‘유언장 낭독에 입회’해달라는 것이었다. 선셋타워의 입주민들과 그 주변인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유산 상속자’라는 말에 당황하면서도 속속 웨스팅 저택으로 모여들고 변호사에 의해 웨스팅의 유언장이 낭독된다.

 

그런데 그 유언장의 내용이 놀라웠다.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을 ‘나의 조카 열여섯 명’이라고 한데다 자신은 ‘자연사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었는데 그 범인은 바로 ‘너희들 중 한 명’이니 살인자를 찾아내 자백을 받아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16명이 두 명씩 팀을 짜서 일명 ‘웨스팅 게임’을 해서 이긴 사람에게 자신의 유산을 상속하겠다고 제안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당황해 하면서도 웨스팅이 제안한 게임에 뛰어들게 되는데... 과연 열여섯 명의 유산상속자의 정체는 무엇이며 웨스팅을 살해한 범인은 누구일까? 또 누가 웨스팅의 유산을 상속받게 될까

 

웨스팅 회장이 지시한 게임의 방식과 힌트를 가지고 범인을 추리해나가는 소설 <웨스팅 게임>은 이야기의 구성이나 형식면에서는 사실 평범하다. 저마다 다른 직업과 연령의 사람들이 의문의 사건에 얽히면서 사건을 더욱 오리무중으로 몰아가는 이야기는 추리소설에서 흔히 등장하는 형식이니까. 다만 그것을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찾아가는가. 이것이 포인트인데 책에서는 힌트에서 연상되는 단어로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일종의 ‘퍼즐’처럼 진행된다.

 

‘백만장자의 상속자 16명이 펼치는 지적인 추리게임’이라는 부제와 ‘뉴베리 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에 망설임 없이 읽기 시작한 <웨스팅 게임>. 그런데 크게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우선 단어를 마치 암호나 퍼즐처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게 그다지 신선하게 다가오지 않았는데 이건 아마도 ‘언어의 차이’때문이 아닐까 싶다. 영어에 능숙하다면 원서를 찾아볼텐데 아쉽다.

 

하지만 이 책의 가장 큰 아쉬움을 꼽자면 바로 번역이다. 평소에도 책의 오탈자를 잘 찾아내는 편이긴 하지만 이번엔 그 정도가 심했다.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있는 집’ ‘뜨끈뜨끈한 빨간 피를 뚝뚝 흐르고 있었지’처럼 번역의 오류로 보이는 문장과 오탈자가 곳곳에 띄었고 문장부호 생략처럼 편집상의 실수로 짐작되는 부분도 많아서(중반부터는 메모하는 것도 포기할 정도였으니) 교정을 제대로 보긴 한걸까? 의문이 들었다. 이후 재개정판이 출간될 때는 이런 부분들이 수정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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