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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 - 폐허를 걸으며 위안을 얻다
제프 다이어 지음, 김현우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무슨, 남자가....?” “여기서 남자가 왜?”
다른 부모,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두 성인이 결혼을 하고 한 가정을 이룬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예삿일이 아니다. 남편과 난 혈액형만 같을 뿐, 모든 점에서 반대였다. 야외촬영. 난 “생략하자”, 남편은 “하자!”고 했다. 신혼여행. 난 “어디든 푹 쉬다 오자”, 남편은 “해외로, 명소는 당연히 둘러보고”였다. 여느 커플과는 정반대의 반응에 난 툭하면 무슨 남자가 그래?를 연발했고 남편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 내가 졌다졌어. 결국 우리는 야외촬영을 했고 해외로 신혼여행을 갔다. 하지만 야외촬영 내내 어색한 웃음을 연발하다 얼굴에 쥐가 날 정도였던 난 그 후로 카메라는 쳐다보기도 싫어졌고 우리와 다른 기후(툭하면 비가 오는), 먹거리의 나라로 떠난 신혼여행에선 가이드의 빡빡한 일정을 따라다니다가 심한 몸살감기에 걸려버렸다. 신혼여행이 끝나고 돌아오면서 난 불평을 늘어놨다. “여행가서 꼭 그렇게 바쁘게 다녀야 돼? 느긋하게 멍하니 있으면 안돼? 호텔 수영장에 수영은커녕 발 한 번 못 담그고 이게 뭐야?”
그린 올리브빛, 이불 밖으로 쑥 튀어나온 맨발.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를 보면서 십수 년 전 티격태격 하면서 다녔던 신혼여행이 떠올랐다. 첨엔 이 책이 정말 ‘요가’책인 줄 알았다. 나처럼 게으르고 매사에 귀찮아하는 사람을 위한 요가책일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 책이 나와 그냥 스쳐지나갈 인연이 아니었나보다. 우연히 표지에서 ‘여행 산문집’이란 문구를 보게 됐고 전혀 안 어울릴 것 같은 요소의 조합이 호기심을 유발했다.
모든 길이 통한다는 로마에서 저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자랑스럽게(?) 털어놓는다. 그냥 공통점이 있고 통하는 어떤 여행객을 만나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하는데 서술방식이 독특하다. 소설로 치면 1인칭도, 2인칭도 아닌 전지적 작가시점에 가까운 느낌? 분명 두 사람이 대화를 하고 있는데 대화 내용보다는 그 순간 자신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고 자주 방문한 술집이 어떤 곳이며 어떤 사람들이 찾는지 말한다. 마치 저자가 여행객이 아니라 그곳에 오랫동안 살고 있고 그 곳을 찾은 여행객들을 지켜보고 관찰하면서 떠오른 생각과 느낌을 글로 풀어내는 것 같다. 심지어 명소를 찾은 자신의 행동과 느낌마저 다른 이가 관찰하는 것처럼. 여행한 지역의 역사적, 고고학적 의미에 대해 알려고 애쓰지 않는 자신을 오히려 ‘무지의 고고학’이라며 퉁치듯 넘겨버린다.
작가는 무위도식하는 순간에도 작가. 도대체 하려는 말이 정확히 무언지 알 수 없는 글을 줄줄이 늘어놓기 일쑤였지만 일순 분위기를 바꿔버리는, 단박에 사람의 시선을 빼앗고 가슴에 묵직한 무언가를 떠안겼다. 우연히 보게 된 사진에서 랩티스 마그나, 고대 유물의 폐허를 마주한 그는 당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리비아로의 여정에 나섰다. 도착하자마자 시종일관 투덜대던 저자는 폐허, ‘구역’ 안에 들어서자마자 그곳의 시간과 공간에 압도되고 암스테르담에서 바지를 뒤집어 입는 황당한 액션에 폭소를 터뜨리려는 찰라 또 한 방 날린다.
바닷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내가 원하던 상태였다. 역사를 지리처럼 경험하는 것, 시간적인 것을 공간적인 것으로 경험하는 것 말이다. 바람은 시간의 숨결이 되어 서둘러 지나간다. 반면 고요함은, 멈춰버린 시간의 황홀감이 된다. - 71쪽.
마흔이 지나면 온 세상이 오리가 지나간 자리의 물결처럼 되는거야. 마흔이 지나면 인생은 원래 낭비하기 위해 있는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 - 149쪽.
로마에서 시작해서 리비아, 태국, 암스테르담, 캄보디아, 파리, 디트로이트.... 저자는 세계 여러 곳을 찾아 머물면서 겪은 일화들, 때론 웃음이 터지고 때론 섬뜩한 일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저자는 순간 떠오르는 상념, 생각들을 놓치지 않고 풀어내고 있다. 그런 글을, 여정을 때로 고개를 젓고 때로 공감하며 읽다보니 어느새 궁금해졌다. 내 안에도 ‘폐허’가 존재하겠지. 내게 있어 ‘구역’은 어떤 걸까. 내 안으로의 여행을 떠날 시점이 다가온 걸까.
‘오, 이건 뭐지?’하며 펼쳐든 책,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또 다시 내뱉었다. ‘이건 뭘까?’ 여행서? 아니다. 본문에서 사진(한 챕터당 작은 흑백사진 하나)을 구경할 수 없다니. 지금까지 어떤 여행서도 이렇지 않았다. 그래서 여행 산문집인가? 했지만 자유롭게 썼다고 모두 산문집이라고 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그제야 저자가 서두에 털어놓은 말이 생각났다. ‘이 책에 적은 일들은 모두 실제로 있었던 일이지만, 그중 몇몇은 내 머릿속에서만 일어났다.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들 역시 내 머릿속에서만 일어나지 않았을 뿐이다.’ 뭘까. 이 책은. 암튼 정체가 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