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잊지 말아요 - 아들이 써내려간 1800일의 이별 노트
다비트 지베킹 지음, 이현경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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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트 지베킹. 저자의 이름은 낯설지만 그의 책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나를 잊지 말아요>라는 제목보다 ‘아들이 써내려간 1800일간의 이별 노트’라는 작은 글귀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자에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그에게 1800일은 어떤 날들이었을지 궁금했다.

 

 

책은 불길한 꿈으로 시작된다. 언어능력이 크게 떨어지고 기억을 잃어가는 저자의 엄마는 어느 날 저자에게 이렇게 묻는다. 너는 누구냐고. 엄마 아들이라고 말하는 저자를 그녀는 뜨악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녀는 치매를 앓고 있었다.

 

 

“나는 다시 아기가 될 거야.”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는 엄마는, 때론 남편과 결혼한 것마저 잊은 엄마의 이야기를 영화로 제작하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신은 다시 아기가 될 거라고. 아름답고 지적이었던 엄마가 다시 아기가 되어 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저자는 조금씩 엄마의 과거를 마주한다. 부모님이 처음 만나 사랑이 싹트고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고 조금 부족한 듯 검소함이 몸에 배인 생활, 조금씩 늘어가는 엄마의 메모들이 아버지의 은퇴를 전후로 엄마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빼곡하게 자리잡게 되는데...

 

 

엄마가 눈을 떴다. 엄마는 우리가 마지막 사진을 찍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는 것을 감지했을까? 엄마의 시선이 공허해 보였다. 엄마는 사진작가가 뒤에 없는 카메라와도 같았다. - 324쪽.

 

 

치매 발병은 곧 가정의 위기다. 많은 이들이 이렇게 생각한다. 최악의 경우 가정이 해체되는 불행을 초래하는 것이 치매라고. 일상의 수많은 추억과 기억을 잊어버리고 가족의 존재마저 잃어버리면서 급기야 사랑하던 가족들도 피폐하게 망가져버리는 게 치매라고 여겼는데 책에서 마주치는 광경은 그렇지 않았다. 무덤덤했던 말테 교수는 진실한 남편이 되어 아내를 간호했고 저자와 삼남매는 고통스러운 가운데에도 되도록 엄마와 함께 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최후의 순간은 급작스럽게 다가오고야 만다.

 

 

<나를 잊지 말아요>는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인 저자가 치매를 앓는 엄마를 카메라에 담기 시작해서 떠나보내기까지 1800일간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리고 당시의 영상은 <나의 어머니 그레텔>이라는 제목으로 제작되었는데 몇 년 전 국내의 ‘국제 다큐 영화제’의 작품으로 소개되었다고 한다. 기회가 닿으면 그 다큐 영상을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발코니의 새가 이제 엄마의 영혼을 다른 세계로 데려가는 상상을 했다. 이제 엄마는 자유로워졌다. 그르렁거림도, 끙끙대는 신음도, 슬픔도 더 이상 없을 것이다. -3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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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12년
솔로몬 노섭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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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텔레비전에서 <뿌리>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단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뒤이어 계속 이어지는 시리즈물이었는데요. 흑인을 잡아서 노예상인에게 팔아넘기려는 노예사냥꾼들로 인해 아프리카의 작은 마을이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됩니다. 그 와중에 쿤타킨테(이름이 아직도 기억나는)라는 흑인 청년이 노예사냥꾼에게 잡히고 마는데요. 손이 쇠사슬에 묶였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온 몸으로 울부짓듯 거부하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성인이 되고 그 영화의 원작이 있다는 걸 알고 책을 구입했지만 아직도 읽지 못했어요. 지금까지 몇 번이고 책읽기를 시도하긴 했지만 표지를 넘기고 본문에 들어서는 순간 맞닥뜨릴, 자유를 빼앗긴 채 노예로 살아가는 이들의 참혹하고 끔찍하고 충격적인 이야기가 어떨지 알기에 선뜻 손이 안가더군요.

 

하지만 그 날은 예고없이 다가왔습니다. 계기는 얼마전 개최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노예 12년>이 작품상을 수상하면서부터였습니다. ‘노예수입이 금지된 184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뉴욕에서 납치돼 12년을 노예로 산 흑인 음악가 ‘솔로몬 노섭’의 실화‘를 영화화했다는 기사와 원작인 <노예12년>이 출간됐다는 소식이 접하고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날 제 손엔 어느새 책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물론 <뿌리>와 <노예12년>이 책제목도 저자도 다르긴 하지만 그건 크게 중요치 않았습니다. 줄곧 거리를 유지해왔던 서사, 이야기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 제겐 더 큰 의미가 있었으니까요.

 

‘자유인으로 태어난 나는’으로 시작된 책은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솔로몬 노섭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웃마을의 처녀 앤과 결혼한 노섭은 운하보수공사를 시작으로 운송사업과 목재벌목, 농장, 마차의 마부로 일하면서 살아가는 세 아이의 아빠였어요. 풍족하지 않아도 사랑하는 아내와 보기만 해도 기쁨이 샘솟는 아이들이 있었기에 노섭은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노섭의 삶에 갑작스런 전환점을 맞고 맙니다. 당시 노예장사로 벌어들이는 돈이 엄청났기에 흑인이라면 어느 누구도 ‘노예’의 위험에서 절대적으로 안전하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요. 바로 거기에 노섭이 말려든 거지요. 서커스단의 공연에 바이올린 반주를 해주면 큰돈을 주겠다는 백인, 해밀턴과 브라운의 말에 속아 넘어가서 그들을 따라나서는데요. 가족의 곁을 떠나 워싱턴으로 간 노섭은 곧바로 납치되고 맙니다. 갑작스런 사태에 노섭은 자신이 자유인이며 가족도 있다고 몇 번이고 강조했지만 가혹한 고문과 학대는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악명 높은 노예상인에 의해 루이지애나로 팔려가고 마는데요. 자유인이었던 노섭이 노예 플랫이 되었다가 다시 자유인으로 돌아오기까지 자그마치 12년의 세월동안 그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예상했던 대로 <노예 12년>은 읽기가 무척 힘겨웠습니다. 예전에 비슷한 내용을 영화로 봤고 책이 담고 있는 이야기, 결말이 어떠하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어서 덤덤하게 책읽기가 가능하리라 여겼는데요. 노예 수용소를 비롯해 목화밭, 사탕수수 밭...등의 장소에서 자유를 빼앗긴 노예들에게 자행되는 착취와 억압은 제 상상을 훨씬 벗어난 것이어서 자신의 삶 중에 추억하기조차 두려울 12년의 세월을 세세하게 글로 남긴 노섭이 더 대단하더군요. 그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오히려 생생하게 살려낼 수 있었다는 것이...

 

‘솔로몬 노섭이 플랫이 되기까지의 시간, 단 하루. 플랫이 솔로몬 노섭이 되기까지의 시간, 12년’ 뒷표지에 적혀 있는 글귀입니다. 솔로몬 노섭의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참혹했는지 단번에 알 수 있게 합니다. 현재는 사라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어딘가에서 여전히 노예와 다름없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걸 알기에 <노예 12년>은 많은 이들이 꼭 읽어봐야할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책의 판형이 작은 편인데다가 본문의 행간이 좁고 글자 크기도 작아서 중년의 독자가 읽기에는 여러모로 불편하지 않나 싶습니다. 개정판이 출간될 때는 이런 점들이 개선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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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거리 창비청소년문학 58
김소연 지음 / 창비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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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다시 동화를 읽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마음을 동화 속에서 엿볼 수 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을 것 같은 아이들의 변화무쌍한 생각이,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심리가 그림책과 동화 속에 녹아들어 있었다. 엉뚱하지만 신선한 재미를 주고 아련한 추억 같은 책을 만나면서 어느새 동화를 아이들보다 더 즐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작가 김소연은 붉은 한복에 꽃신을 신은 소녀가 그려진 표지가 시선을 사로잡은 <꽃신>을 통해 처음 만났다. 조선 시대에 실제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과 당시의 상황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는 읽고 나서도 한동안 여운으로 남았다. 세상물정 모르는 명혜가 신학문을 배우고 자신의 꿈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모습을 담은 <명혜> 역시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두 작품 모두가 과거의 역사, 주인공의 성장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감동이나 메시지는 지금의 우리에게 전하는 의미가 크다고 생각했다. 역사동화 작가인 김소연을 뇌리에 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 또 하나의 작품, <야만의 거리>. 이전의 작품이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동화라면 <야만의 거리>는 일제 식민지 시대가 배경인 청소년과 성인을 위한 문학, 소설이다. 이야기는 평안북도의 작은 산골 마을에서 시작된다. 겨울잠 자는 우렁이를 파내는 아이들의 무리를 곁에서 지켜보는 소년. 여덟 살의 동천이다. 산으로 들로 쏘다니는 아이들의 놀이에 괜히 트집을 잡지만 속 마음은 동천도 그 무리에 끼고 싶은 것.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양반인 아버지와 천한 신분의 어머니를 둔 동천은 신분제가 없어졌다 해도 흙투성이 산골 아이들의 무리에도, 양반집 도련님이 될 수도 없다. 그저 서당을 다니며 글을 읽히고 있었는데, 몇 년 후 갑자기 서당이 문을 닫게 된다. 대일본제국의 교육령에 따라 인근 마을에 소학교로 등교해야 한다는 거였다. 이어 서당의 아이들이 강제로 귀밑머리를 잘리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소학교로 가게 된 동천은 월반을 하며 공부에 매진한다. 그런 동천에게 일본인 선생 다케다 시로는 ‘세상은 교과서에서 배운 것보다 훨씬 넓고 다양하다’며 미래로, 세상으로 나갈 욕심을 가지라며 용기를 준다. 어느 날 동천은 다케다를 통해 지구의와 세계 여러나라의 모습, 사진이 담긴 책을 보게 되는데 낯설고 방대한 세계의 모습에 매료되면서도 불확실한 미래에 마음은 한결 무거워진다,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하지만 작은 마을에서의 삶은 그 변화를 실감하지 못한다. 하지만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었고 그 흐름의 소용돌이 속에서 동천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여정을 계획하는데....

 

 

이후 책은 일본에서의 동천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헌책방에서 일을 하며 대학에 가고 무엇보다 동천의 삶을, 운명을 바꾸게 할 인물을 만나게 된다. 그로 인해 동천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게 될지... 2부 <승냥이>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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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 장편 전집 Y 시리즈 세트 - 전4권 셜록 홈즈 장편 전집 Y시리즈
아서 코난 도일 지음, 꿈꾸는 세발자전거 옮김, 시드니 패짓 외 그림, 박기완 감수 / 미다스북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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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돌아왔다. 시즌2, 건물 옥상에서 추락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모두를 충격과 혼란에 빠지게 만든 셜록. 매사에 자신만만하고 시니컬한 그가 한결 업그레이드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인 그는 방대한 지식과 날카로운 판단력으로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순식간에 간파해낸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가리켜 고기능 소시오패스라고 당당히 칭하는 그의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군침 도는 음식을 탐하듯 시즌3를 섭렵하고 나니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시즌4를.

 

 

지난 연말에서 올해 초로 이어지는 날들을 <셜록 홈즈 MINI> 시리즈와 함께 했다. 한 손으로 너끈히 쥘 수 있는 작은 사이즈의 책은 휴대하기가 좋아서 외출할 때마다 주머니에 한 권씩 넣어 다니며 읽었다.

 

 

그리고 얼마전 <셜록 홈즈 장편 전집 Y>시리즈를 만났다. ‘Why’의 발음과 ‘Youth’의 첫 글자에서 따온 말 <셜록 Y>시리즈는 이전에 읽었던 <MINI>시리즈와 같으면서도 다르다. 수록된 작품이 같고 붉은색의 수능 필수 어휘도 같다. 그럼, 뭐가 다르냐. 가장 큰 차이점은 <Y시리즈>시리즈에서는 각각의 페이지에 표시된 붉은색의 수능 필수 어휘를 오른쪽 페이지에 세로로 길게 따로 공간을 만들어서 알기 쉽게 설명해놓았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MINI 시리즈 중 주홍색 연구>에서 ‘나는 봄베이에 도착하자마자 제5연대가 산지 통로를 이용해 이미 적진 깊숙이 전진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대목의 단어 ‘도착’과 ‘사실’을 <Y시리즈>에서는 각각의 단어가 어떤 뜻인지, 비슷한 말과 반대말, 영어 단어(발음기호), 어떤 한자로 표기되는지 등을 꼼꼼하게 짚어주는데 이런 과정을 통해 해당 단어가 문장 속에서 어떻게 해석이 되는지도 알 수 있다. 그런 다음 ‘필수어휘 심화학습’에서는 앞에서 나온 어휘들을 수능과 관련지어 다시 한 번 설명해 놓았는데 한자를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풀어놓은 부분이 눈에 띈다. 설명이 길어지는 부분에서는 ‘더 자세히 @@쪽’이라고 표시를 해두어 찾아보기도 수월하다.

 

 

내가 어릴 땐 본문 중에서 모르거나 헛갈리는 단어를 찾아 그 뜻을 조사해가는 속제가 종종 주어졌다. 당시 전과를 가진 친구들은 숙제를 쉽게 해결했지만 난 그렇지 못했다. 언니들이 쓰던 전과는 교과서가 바뀌면서 본문의 내용이 달라진 경우도 있어서 정말 난감했다. 그럴때면 단어의 뜻을 찾기 위해 전과를 처음부터 끝까지 샅샅이 뒤졌던 기억이 난다. 당시엔 힘들고 하기 싫었던 그런 것들이 어쩌면 국어를 공부하는 방법, 독해력을 기르는 기본 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간혹 추리소설은 저급한 통속문학이라고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다. 추리소설을 뭐하러 읽느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이 <셜록 홈즈 Y>시리즈를 보면 사정이 달라진다. 처음엔 일단 흥미를 갖고 책을 읽고, 두 번째 모르는 단어나 어휘를 확인하고, 세 번째 각각의 단어와 어휘가 문장 속에서 어떻게 해석되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추리소설을 통해 어휘와 올바른 독해력을 기를 수 있다니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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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글 쓴 남자, 안개 속의 살인
시마다 소지 지음, 이윤 옮김 / 호미하우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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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너무나 넓어서 내가 읽어야 할 책도, 만나야 할 작가도 많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시마다 소지. 그를 처음으로 만났다. <점성술 살인사건>을 비롯해서 <기울어진 저택의 범죄>,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 등 지금까지 유명한 작품이 많이 출간됐지만 정작 만나지 못했다. 일상 속에서 해야 하는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먼저 해버리는 그릇된 습관이 몸에 배어서일까. 책읽기도 그랬다. 읽어야지,하는 책보다 읽고 싶다,는 책에 먼저 손이 갔다. 새해부터는 책 읽기의 패턴을 좀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고 그 다짐 덕분에 시마다 소지와의 인상적인 만남을 갖게 됐다.

 

짙은 밤안개가 내려앉은 날 밤. 낡은 자전거를 끌고 마을을 순찰하던 다나카 순경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가로등에 방금 지나간 사람의 얼굴이 비쳤는데 어딘가 이상했다. 한밤중에 검은색의 사각 고글을 쓴 것도 이상했지만 그보다 렌즈 속에 비치는 남자의 눈이 붉게 물들어 있는게 아닌가. 더욱 충격적인 건 고글 안의 피부가 마치 뜨거운 열에 녹아내려 검붉은 근육이 노출된 것처럼 보였다. 어딘가 기괴하고 괴이한 모습이지만 다나카는 그것이 짙은 안개로 인한 환상일거라 여기고 지나치고 만다. 하지만 담배 골목에서 벌어진 담배 가게의 주인이 살해되는 사건이 터지면서 그것이 환상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범행 현장은 포장이 벗겨진 새 담배들로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었다. 그리고 빳빳한 5천 엔짜리 신권이 한 장 발견되는데 지폐의 위쪽에 노란색 줄이 그어져 있는게 것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다. 하지만 현장에서 고글을 쓴 20대의 남자를 봤다는 목격자의 말에 다나카는 좀전에 자신과 마주쳤던 사람을 떠올린다. 수사팀은 담배골목의 나머지 두 가게에서도 노란 줄이 그어진 5천 엔짜리 신권을 발견한다. 그리고 뜻밖의 말을 듣는다. 비오는 날 유령이 담배를 사러 온다고.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노인의 말이지만 무언가 의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유령은 뭐고, 지폐의 노란 색 줄은 도대체 무얼까.

 

한편 ‘나’는 중학교 때 인적이 드문 마을의 숲에서 의문의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한 끔찍한 기억을 갖고 있다. 극심한 공포와 혐오감이 뒤섞인 일은 누구에게 알리지도, 도움을 요청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고스란히 트라우마로 남게 된다. 짙은 어둠에 잠식된 마음은 서서히 병들어가기 시작했는데 특히 안개가 끼는 늦은 밤엔 고글을 쓰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부분적으로 기억이 끊기고 환각과 환청에 시달리게 되는 일도 잦았다. 그러던 어느날 스미요시 화학연구소에서 푸른 섬광과 함께 핵분열의 연쇄반응에서 일어나는 임계사고로 인해 그는 물론 함께 작업하던 사람들이 방사능에 노출되는 피폭을 당하게 되는데...

 

어디에나 떠도는 이야기가 있다. 내가 어릴 적엔 공동묘지였던 곳에 학교를 지어서 비오는 날에는 귀신이 나온다거나 동네에 빈집으로 방치된 집 앞을 지날 때는 원통하게 자살한 원혼의 부름에 홀릴 수 있으니 귀를 막고 지나야 된다...등 상상할 수 있는 갖가지의 괴담들이 있었다. 그런 것처럼 소설도 마을에 떠도는 괴담에 검은 고글을 쓴 피부가 녹아내린 의문의 인물이 벌이는 미스터리한 살인이 아닐까 했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줄곧 이것들이 과연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의문을 품었는데. 그런 것들이 조금씩 가지를 뻗어나가고 서로 연결이 되고 급물살을 어느새 소설은 예상치 못한 결말로 치닫고 있었다.

 

<고글 쓴 남자, 안개 속의 살인>읽는 내내 우울했다. 어딘가 질척한 곳에 발을 딛고 서 있는 것처럼 불쾌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언뜻 발을 빼고 싶지만 그마저도 할 수 없어 오도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못하는 상황이라고나 할까. “당신은, 나인가?”하고 누군가 속삭이는 소리가 맴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결코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했지만 이젠 인정해야겠다. 시마다 소지, 그에게 완전히 휘둘리고 말았다는 걸. 이 느낌이 사그라들기 전에, 그를 또 한 번 만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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