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정원 - 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
김용석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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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변화 가능성이 있다면 나는 다른 길을 선택할 것이다. 전 국민에게 설문 조사를 하면 99%쯤 같은 대답을 할지도 모르겠다. 나이와 직업, 성별, 재산과 무관하게 자신의 삶을 성찰해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타인과의 관계나 사회적 위치를 포기하고 자신의 전 생애를 보람있고 가치있게 만들어 볼 수는 없을까. 모두가 꿈꾸지만 어쩌면 아무도 갈 수 없는 유토피아처럼 우리는 항상 가보지 못한 길이나 뒤에 남겨진 길에 대한 아쉬움을 숙명처럼 짊어지고 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
                   -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책읽기와 산책보다 더 즐거운 일이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 일을 하겠다. 현실적인, 아니 사회적인 욕망들과 무관한 순수한 내적 욕망들은 지나치게 사치스럽다. 스스로에게 던져 본 질문들이지만 이기적인 욕망에 불과하며 비현실적이기도 하다. 때때로 너무 쉽고 간단한 일들이 현실에서는 아득하게 보일 때가 있는 법이다. 근처를 어슬렁거려 보지만 현실은 여전히 만만치가 않다.

  철학의 정원을 꿈꾸는 철학자는 행복해 보인다. 김용석은 <철학정원>에서 고전을 읽는다. 삶이란 무엇인가, 왜 태어났는가를 묻는 대신 지금의 나는 누구일까, 행복과 행복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함께’ 또 ‘따로’인 인간의 조건, 우리는 얼마나 놀 줄 아는가, 지팡이의 다른 쪽 끝을 집어 올린다면, 어떻게 ‘불확실성’과 공생할 것인가 등에 관한 끊임없는 질문들 속을 주유하며 사색에 잠기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잠시 현실을 있고 싶다면 이 책을 보라.

  마흔 일곱 권의 책과 여덟 편의 영화로 ‘철학’을 시도하는 이 책은 동화, 문학, 영화, 철학, 정치/사회/문화 사상, 과학으로 나누어 다양한 산책로를 만들어 놓았다. 책 한 권을 들고 조용한 가을 낙엽을 밟는 기분으로 저자와 대화를 나누면 좋다. 고전을 통해 철학을 한다는 말은 두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놓칠 위험도 안고 있다. 반대로 제대로 읽은 고전은 현실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모든 장면에서 ‘사유하는 몸짓’으로 되살아나야 한다. 저자의 목적이 그것이라고 하지만 절반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둬야겠다. 한 권의 책으로 그러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위험한 욕심만 접는다면 저자를 따라 산책을 나서도 좋겠다.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소개하거나 이해시키거나 해석하는 책은 재수 없다. 참고서나 수험서가 아닌 다음에야 책을 수단으로 이용할 필요는 없다. 미처 읽어내지 못한 행간의 의미를 찾아내고 다른 사람들의 느낌과 반응이 궁금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김용석은 ‘고전으로 철학하기’라는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시범을 보일 테니 따라해 보라는 말이다.

  철학적 사고란 끝없는 질문의 연속이라고 믿는다. 창의적이고 도발적인 생각과 새롭고 낯설게 바라보는 훈련은 현실 속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다만 우리가 선택하지 않고 외면할 뿐이다. 21세기에도 애국조회는 계속되고 있으며 두발 단속 때문에 학교에 등교하지 않는 아이들과 씨름하는 교사가 있고, 돈으로 온 나라의 고관대작들을 떡 주무르듯 하는 재벌 총수가 있으며, 5초에 한 명씩 10세 미만의 아이가 굶어 죽어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어쩌면 나는 눈뜬 장님으로 귀머거리로 벙어리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제 발 밑 일도 모르는 주제에 하늘의 일을 알려고 하십니까(P. 407 <테아이테토스>)”라는 플라톤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바로 내 주변의 사람들 내 앞날도 모르는 주제에 하늘의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은 또다른 오만과 편견을 키워나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고 펠리니의 <길>을 보고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들여다 보았지만 김용석이 말하는 ‘고전으로 철학하기’는 멀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어디 사는 일이 생각만으로 되는가. 이렇게 또 하루 부딪치고 내일에게 희망을 묻고 책에서 책을 찾으며 검은 밤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은 아닌가.


071106-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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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1-06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이 책 읽으셨네요^^ 저두 마지막 몇꼭지 남기고 앞부분은 읽었는데.
'돈으로 온 나라의 고관대작들을 떡 주무르듯 하는 재벌총수가 있으며' 이부분에서 오늘
어떤 교수님은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나쁜 것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돈 있는 사람이 피해자에게 물질적으로 손해배상을 해주는 것으로 피해자와의 합의를 이끌어내면 법질서의 회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고.
국가기관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당사자의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 무시할 수 없는거라고요.
돈있는 사람들이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것도 1심에서 사회적파급효과 때문에 실형을 선고하고, 피고인은 불복해서 항소하고, 그렇게 미결구금일수가 길어지면서 사실상 형집행을 받은 것과 같은 효과가 있기 때문에 양형에서 참작사유가 되는- 짜여진 시나리오라고요.
근데 그거 바꾸어 말하면, 없는 사람은 몸을 사리고 살아야 하고, 있는 사람은 지멋대로 행동해도 된다는 말. 아닐까요?

sceptic 2007-11-07 08:28   좋아요 0 | URL
피해자에게 물질적으로 손해배상을 해주는 것으로 피해자와의 합의를 이끌어내면 법질서의 회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는 말이 논리적으로 합당한가요? 법의 목적이 과연 그러한가요? 씁쓸하게 우울해지는데요...

이건희나 김용성 같은 사람들은 김승현처럼 돈이 곧 힘이라는 사실을 폭력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도, 현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잘못됐다는 교훈대신 부러움을 유발하고 좀 더 많은 돈을 욕망하도록 만들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황소걸음이라도 현실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맹목적인 희망만으로 심하게 갑갑증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재밌는 전공을 하시네요. 넓고 깊게 그리고 소수자의 입장에서도 고민해주셨으면 좋겠다는 당연한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2007-11-07 2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07 2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HOW TO READ 비트겐슈타인 How To Read 시리즈
레이 몽크 지음, 김병화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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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지깽이를 들고 칼 포퍼를 위협했다는 선정적인 내용 때문에 처음 읽은 책이 <비트겐슈타인은 왜?>였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칼 포퍼는 전체주의와 폭력에 의한 혁명을 혹독하게 비판하며 ‘닫힌 사회’로 규정지었다. 개인주의를 옹호하고 점진적인 개혁에 의한 ‘열린사회’를 꿈꾸었던 이 책의 저자는 초청 강연을 위해 캠브리지에 대학을 방문했다. 10분에 비트겐슈타인이 한 판 뜨자고 덤빈 이유가 궁금해서 펼쳐든 책으로 기억한다.

  철학자의 삶과 기질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으로 시작해서 천재라고 명명되는 이유가 궁금했다. <논리-철학 논고>를 읽으면서 참 독특한 형식과 내용의 철학책이라고 생각했다. 반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명제를 분석하는 장은 어차피 내 능력 밖의 범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포기하고 흐름을 따라 읽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구절을 멋대로 해석하며 전혀 다른 상황에도 적용해보며 내가 얼마나 용감하고 무식하게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에 대한 호기심과 사유의 흐름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얼마전 <청갈색책>에 도전했으나 비슷한 낭패감을 맛보았고 다른 방법을 고민하며 날개를 접었다.

  서점에 갔다가 눈에 띠는 ‘How to read……'시리즈를 보고 다시 <How to read 비트겐슈타인>에 또 다시 현혹됐다. 도대체 이 철학자의 매력은 무엇일까? 지극히 개인적인 호기심에서 출발했지만 그의 철학이 주는 매력은 독특하다. 특히 ‘언어에 대한 감각과 개념에 대해서 조금씩 그 의미들을 짚어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이 책에게 감사한다. 하나의 텍스를 간접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에 개인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깨지더라도 일단 부딪히고 만져보고 냄새 맡고 엉겨봐야 짐작이라도 할 수 있다. 그러고 나면 뭔가 아쉽고 부족한 부분들이 보인다. 그때, 이런 종류의 책들을 접하면 가뭄에 단비처럼 거의 모든 것들이 흡수되고 이전의 남아있던 의문들과 모호함이 안개처럼 사라진다.

  나머지 시리즈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들의 저작을 읽지 않고 이 책들을 읽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간접적인 독서에 불과하다. 다른 사람이 읽은 내용의 해설을 엿듣고 그 텍스트를 읽은 것으로 착각하거나 오히려 주관적인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할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후기 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적 탐구>보다 오히려 그가 생의 마지막에 관심을 가졌던 ‘심리철학’이 보고 싶어졌다. 기회가 될 때마다 부딪히며 생각하고 한 줄 한 줄 음미하는 즐거움을 가질 수 있다면 기꺼이 비트겐슈타인에게 손을 내밀고 싶다.

  철학에 관한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생각하며 철학을 떠났던 비트겐슈타인이 단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는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이 있었다는 사실이 새롭다. 이것은 그가 살았던 시대와의 갈등과 고민 속에서 철학의 문제를 단지 해결해야할 과제 정도로 여겼던 그의 생각들을 짐작하는 데 또 하나의 상상력을 발휘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말할 수 있는 것과 보여줄 수 있는 것들 사이의 간극을 아직도 확실하게 정리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언어와 사물과의 관계, 사물들과 사실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그가 가졌던 깊은 고민과 철학적 해결 방법들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준 고마운 책이다. 이 책의 저자 레이 몽크는 영구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비트겐슈타인의 전기도 썼다. 한 인가의 삶과 사상에 대해 지극한 애정과 객관적인 시선으로 독자들에게 이해의 폭과 깊이를 더해 주는 좋은 안내서를 제공해 준 그에게 감사해야겠다.

  책의 형식과 분량은 가볍다. 비트겐슈타인의 첫 리뷰인 <케임브리지 리뷰>에서부터 <철학적 탐구>에 이르기까지 연대기별로 발표된 저작들을 인용하면서 그의 핵심 사상을 설명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사이사이 그의 생애를 사상과 연결시키고 있지만 평전이 아니기 때문에 간략하게 정리하며 그의 철학적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데 관심과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 대표적인 부분들을 발췌하고 그 부분들이 전체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은 레이 몽크의 해설이 전부일 수 없겠지만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날카롭고 예리한 분석과 객관적인 관점을 유지하는 글쓰기는 읽는 사람들에게 깊은 신뢰감을 갖게 한다. 잘 차려진 밥상이 아니라 숟가락 같은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는 책이지만 숟가락 없이 밥을 먹기도 곤란하다. 좋은 숟가락은 맛있는 밥을 위해 준비된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070705-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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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갈색책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진중권 옮김 / 그린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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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에 대해 알고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면 그 사람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 “이가 아프다.”라고 말했을 때, 타인은 나의 고통을 느낄 수 있을까?

  관념론과 실재론의 두 축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근대 철학의 기본 토대를 뒤흔들었던 비트겐슈타인의 사유는 철저하게 ‘언어’에 근거하고 있다. 언어가 지시하는 의미와 역할은 늘 그 한계를 보이고 엄밀하고 명징한 분석과 구분으로부터 모든 사유는 출발한다. 하나의 사물에 대해 우리가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이름을 불러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을 우리가 얼마나 확실한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명칭 자체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해 의심을 거둘 수가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통한 사유의 방식을 두 권의 책을 통해 탐구하기 시작한다.

  <청갈색책>은 제목이 없는 강의 노트이다. 제자에게 자신의 강의를 기록시켜서 청색 표지와 갈색 표지로 복사본 몇 부만 남기고 그 중 하나를 스승인 버트란드 러셀에게 보낸다. 그것이 출판되어 ‘청색책’과 ‘갈색책’이 되었고, 한 권으로 묶여 <청갈색책>이 되었다. 이 책은 <철학적 탐구>가 나오기 전에 비트겐슈타인의 사유의 단초를 읽어낼 수 있는 책으로 의미를 지닌다고 하는데, <철학적 탐구>를 읽어보려다 미루고 있어 내용은 알 수 없다.

  개인적인 지식과 이해력의 한계 때문에 자괴감이 들었다. 한 권의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 단순히 글자와 어휘를 아는 정도의 문식성은 문제가 되지 않는 책이다. 그의 주저인 <논리-철학 논고>는 오히려 나름대로 재미있게(?) 읽었다.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겠지만 철학적 사유의 단초들을 읽어낼 수 있었고,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내용의 구조와 분량과 상관없이 치밀하고 조직적인 구성이 읽는 사람을 압도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상황에 따라 되새겨 볼만한 내용으로 기억하고 있다. 반복해서 읽어봐야 할 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은 강의 형식의 노트라고 그런지 몰라도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다. 자유분방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쏟아내며 자신의 생각의 흐름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체계가 잡혀있지 않아 강의를 듣는 입장이 아니라 기록된 활자로 번역되어 읽어야하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았다. 비트겐슈타인이 사용하는 언어 자체가 어렵고 난해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와 사유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끊임없는 질문과 탐구 과정을 따라가기 어렵다.

  언어의 인간을 다른 종과 구별하게 해주는 유일한 수단이라면 철학적 사유는 당연히 언어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언어철학적 관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에 끼친 영향력이 무엇이든 이 철학자가 말하고 싶었던 사유의 방식이나 과정들이 몹시 궁금하다. 혼자 책을 보고 이해하고 사유하는 것의 한계가 분명하고 절실하게 느껴지게 한 책이다.

  기회가 된다면 세미나든 강연회든 체계적으로 알고 싶은 호기심이 생긴다. 연구 공간 ‘수유+너머’ 같은 곳이든, 철학아카데미든 찾아가야 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남겨진다. 책이 지니는 한계는 소통의 문제로 남는다.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과 행간의 의미들을 찾으려는 노력들이 필요하다. 절실하지 않으면 끝까지 버틴다. 호기심이 생기고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다른 분야의 학문이나 다른 책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라도 욕심이 생기지만 언제가 될 지는 알 수가 없다. 누구든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인문학이나 철학 강좌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해 본다.


070622-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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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정체성, 어떤 여성이 될 것인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17
이현재 지음 / 책세상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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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위의 반은 여성이다. 남성에 반대되는 개념의 성에 대한 구별이 아니라 예외적인 종족으로 인식되어 온 것이 여성이다. 보통 인간이라는 개념 속에 여성이 포함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멀지 않은 시대의 이야기다. 여성들이 투표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서구 유럽의 경우도 20세기 초, 중반 이후의 일이다. 인류가 문화를 발전시켜 오면서 성숙한 사회의 단계로 진입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출발점 중의 하나가 여성의 문제일 것이다.

  학문으로서 ‘여성학’이 붐을 이루고 남녀 차별 철폐가 사회적 이슈가 되어 여성들의 권익이 신장되고 있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여성들의 위상은 달라졌다. 가시적인 변화들은 인식의 변화가 가져온 결과들이다. 그러나 과연 여성의 문제는 제대로 파악되었는가? 어디서부터 어떤 방법으로 접근할 것인가? 숱한 논의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답보 상태이거나 인식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 부분들에 대한 해결 방법은 무엇인가? 여성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아니, 여성으로서의 나는 누구인가?

  이런 수많은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결국 철학에게 부탁한다. <여성의 정체성>은 여성철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여성’의 문제이다. 저자 이현재는 ‘인정이론’을 통해 여성의 문제에 접근한다. 지금까지 여성의 문제를 논의했던 기준과 방향을 점검하고 철학이 어떻게 여성의 정체성을 확립해 줄 것인가에 대한 접근 방식이 논리적이고 차분하게 이루어진다.

  주체로서의 여성은 다른 여성과의 동일성과 차이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결국 ‘여성의 정체성은 타자를 배제하는 논리에서 타자를 인정하는 논리로 나아갈 때 실현될 수 있다.’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지금까지 여성주의가 오해를 받았던 부분을 점검하고 어떤 여성이 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보부아르는 여성의 인간화를 첫 번째 목적으로 삼았다. 여성도 남성과 같은 인간으로 인정받는 것조차 힘들던 시대 상황을 고려하며 1세대의 출발로 본다. 이후 세 명의 걸출한 이론가를 차례차례 거론한다. 길리건의 ‘보살피는 여성’, 이리가레이의 ‘하나가 아닌 여성’, 버틀러의 ‘성적 이분법 허물기’가 그것이다. 세 사람은 조금씩 다른 방향에서 여성의 문제를 바라본다. 남성의 타자로서만 존재했던 여성의 문제가 철학 안에서 보다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입장에서 그 차이를 인정하는 장면들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이 해결되기 위한 필요 조건은 여성들 간의 연대 가능성이다.

  백인 중산층 여성과 흑빈 빈곤층 여성은 과연 연대가 가능할까? 감성적이고 관습적인 연대는 이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낯선 자들과 반성적으로 연대할 때 여성들의 진정한 연대가 가능하며 현실은 분명한 모습으로 바뀔 것이라는 전언들에 공감한다. 여성이 여성 스스로를 배제하고 연대 가능성이 희박한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공동체적 연대 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내게는 일종의 코뮌으로 읽혔다. 국가와 계층을 초월한 전지구적 여성들의 연대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다. 다만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조직과 실천의 문제는 그리 만만치 않아 보인다.

  타자를 협동적 행위자로 인정하고 여성들 스스로 그 가능성을 열어갈 때 사회적 인식과 또 다른 타자인 남성들의 인식도 변화할 것이다. 다만 여성으로서 역할과 사회적 주체로서 당당히 서야 하는 여성들의 혼란과 갈등은 몇몇 이론가들의 주장으로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삶은 연습이 없고 정답을 알 수가 없다.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스스로 결정해야 하지만 잔다르크나 클로델의 경우처럼 분열된 여성의 모습은 과거를 대표하는 여성으로만 볼 수는 없다. 현재 진행형으로 지속되는 수없이 많은 문제들을 생각해보면 여성의 문제가 남성들의 문제라는 사실을 쉽게 확인 할 수 있다.

이렇게 여성주의는 철학과 만났다. 나는 이 만남을 통해 타자 배제의 논리, 희생 논리를 극복할 수 있는 여성의 모습을 꿈꾸었다. 이것은 단순히 여성주의에 새로운 이념적 장치를 마련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미래를 위한 새로운 철학의 탄생을 의미한다. 인정 이론을 통해 재구성된 여성철학은 다가올 여성의 세기에 새로운 사고방식을 제공할 것이다. - P. 165

070618-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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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철학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남경태 지음 / 들녘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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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철학자도 아닌 사람이 이야기하는 철학은 특별하다. 그 특별함은 철학을 바라보는 눈과 철학을 이야기하는 방식에서 온다.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주관적 해석이 개입되지 않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어차피 철학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그것을 다루는 태도 또한 한 개인의 주관과 객관이 뒤섞이게 마련이다. 그것은 다양한 책들 속에서 나름의 빛깔과 향기를 지니며 그 책의 특징이 된다.

  남경태의 <철학>은 독특하다. 이 책의 특징을 먼저 살펴보자. 넓은 범주에서 살펴보면 서양 철학사를 다루고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시대 구분에 의해 통시적 관점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의 기원과 출발에서부터 가지를 치고 잎을 피워나가는 과정을 상세하게 그리고 알기 쉽게 설명하면서도 철학의 주변을 한 번씩 짚고 넘어간다. 그 과정이 번잡스럽거나 잡다하지 않고 필요한 부분에서 언급되는 사회 문화적 상황이나 정치 경제적 여건들이 철학에 미친 영향을 언급하는 정도다. 깊이가 없어 보이지만 큰 맥락과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는다.

  두 번째 특징은 철학을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크게 5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세계론의 관점을 1부에서 이야기한다. ‘대상’이 그것이다. 세상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한 호기심과 고민에서 출발한 철학의 면면들을 살펴보고 2부에서는 인간론이라는 큰 주제로 철학의 역사를 더듬는다. ‘주체’에 해당되겠다. 인간과 종교의 관계와 철학의 역할을 집중적으로 점검하며 데카르트 이후 ‘인식론’을 중심으로 3부를 구성하고 있다. ‘주체-인식-대상’의 축을 세계론과 인간론 그리고 인식론의 발달 단계에 따라 철학자들의 주장과 핵심 개념을 엮어가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고 모호한 말장난에 속은 느낌도 없다. 4부에서는 세 단계의 결론이고 기존 인식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으며 5부에서는 가타리와 들뢰즈 그리고 하버마스에 이르기까지 지금, 이 순간의 철학적 문제들과 미래에 대한 전망을 논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역사 시대별로 구분하여 백화점식으로 철학자들을 소개하고 그들의 철학적 특징과 개념을 소개하는 것으로 끝나버릴 염려가 없다.

  세 번째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적인 조직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개념들이 미끌어지고 가로지르면서 철학의 전반적인 문제들을 통찰하고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과 개념들이 2,500년을 가로질러 철학사 곳곳에 그 흔적들을 묻어놓고 있지만 현대 철학으로 넘어오면서 그 영향력과 범주들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전에 보지 못했던 현상이나 개념들이 전면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한 과정들을 저자는 종횡무진 철학사를 넘나들면서 합종연횡을 시도하고 있다. 깊이는 알 수 없으나 단순하고 피상적인 지식과 얄팍한 개념의 이해만 가지고서는 가당치도 않은 작업이다. 거기에 이 책의 장단점이 모두 녹아 있다.

  철학에 관한 입문서로 손색이 없는 책이다. 그러나 철학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게는 수박의 모양과 색깔만 보이고 맛을 본 적이 없다는 아쉬움을 깊게 남기는 책이기도 하다. 수많은 철학자들의 개념과 용어들이 난무하고 그들의 말이 짧은 구절로 인용되기 때문에 감질나서 미쳐버릴 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흠이 있다면 깊이와 넓이를 이야기하면서 부분적으로 옥의 티가 보이기도 한다.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한 적이 없는 소크라테스를 그렇게 소개하는 부분 같은 대목이 그렇다.

2500여 년에 걸친 방대한 서양 철학사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인간이 세계에 관한 올바른 앎을 얻는 과정”이라고 요약된다. 여기 포함된 세 가지 계기, 즉 ‘인간-인식(앎)-세계’를 해명하는 것이 철학의 과제다. 더 근대적인 형태로 변환하면 ‘주체-언어(또는 감각, 경험)-대상’으로 표현할 수 있다. - P. 545

  저자의 에필로그 앞부분이다. 이 책은 ‘사람이 알아야할 모든 것’이라는 시리즈의 부제를 달고 있지만 사람이 모른다고 해서 특별할 것도 없는 ‘철학’이야기다. 하지만 알고 모르고의 차이를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이 책이 가진 특별함에 손이 갈 것이다. 단편적인 것들을 섞고 뒤집어 하나로 통합하는 관점이나 ‘가로지르기’가 2% 부족했던 독자들에게 적합한 책이다. 두 번쯤 더 읽어야겠다. 저자가 에필로그에서 말한 탈현대 그 후의 철학이 궁금하다. 예의주시하며 읽어나가는 재미도 남다를 것 같다.

철학의 비판적 기능 역시 앞으로도 불변일 것이다. 철학은 탄생할 때부터 눈에 보이는 것의 배후에 있는 진리를 탐구하는 자세를 견지했다. 진리를 확정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해도 보이지 않는 것을 탐구하는 철학의 정신은 필연적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비판을 전제로 한다. 언어의 모호함을 악용한 권력 행사를 비판하는 탈현대 사유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 P. 548

  개별적인 철학자들의 담론을 읽어나가면서 오래 기억될만한 문장이다. 철학이 비판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현실을 주도하며 진보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철학이 아니다. 새로운 세계의 변화를 수용하고 세계를 이끄는 새로운 사고의 틀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철학에 기댈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철학이 지닌 고유의 역할과 기능이 아니라 철학을 통해 우리가 가져야할 태도이며 가능성이다. 그것이 진정한 철학은 아닐까 싶다.


070508-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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