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생각이 내 생각이 되지 않으려면 - 내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필로소피 클래스
오타케 게이.스티브 코르베유 지음, 김윤경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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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과 번식을 위한 생리적 욕구는 본능이다. 자연 선택에 의한 적자생존 DNA는 인간의 1차적 욕망을 자극한다. 학습과 경험이 필요 없다. 하지만 본능적 욕구를 넘어선 고차원적 욕망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보고 듣고 배우며 익히고 자연스럽게 내면화된 존경과 자아실현의 욕구는 후천적 의지에 따른다. 짜장면을 먹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짜장면을 먹고 싶다는 자유 의지나 욕망이 생길 리 없지 않은가.

변연계의 지배를 받는 감정, 즉 애정의 욕구는 생존과 번식에 필수적 요소다. 이성을 지배하는 전두엽의 발달은 우리가 ‘생각하는 존재’라는 신화를 창조했다. 근대 이후 종교와 맞선(?) 과학은 이성의 빛을 따라 걸었고 현재의 눈부신 문명을 이뤘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특징으로 손꼽는 ‘생각’은 어떤 과정을 거쳐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도구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은 생각하는 힘을 길러 온전한 자유인으로 거듭날 수 있으나 식욕, 성욕처럼 절대 사라지지 않는 본능과 달리 ‘이성’은 적극적 노력과 오랜 시간이 걸리는 힘겨운 자기와의 싸움이다. 그래서, 혹은 귀찮아서 스스로 생각하는 대신 남의 생각을 받아들인다.

오타케 게이와 스티브 코르베유는 남의 생각이 내 생각이 되지 않으려면 김수영의 말대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철학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행동과 실천이 철학의 종착역이라는 선언이 아니라 누구나 철학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몸 철학을 전제로 한다. ‘옳음’이나 ‘대답’이 아니라 ‘프로세스’가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는가?” 이 책은 어쩌면 이 질문에 대한 정교한 질문의 연속이며 앎과 삶을 연결하려는 노력이다.

대중적 철학서는 대개 철학사에 대한 이해, 철학자의 삶과 사상, 철학 개념에 대한 설명, 적용과 실천 등에 집중한다. 2차 저작물들의 특징은 쉽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철학과의 거리를 좁히는데 주된 목적을 둔다. 그러나 이 책은 철학 입문서가 아닌 철학 개념 정리와 실천적 워크북에 해당한다. 정리, 해체, 탐구, 발전, 재생, 창조 등 여섯 가지 철학 수업은 ‘보는 것은 세계와 관계를 맺고 세계를 바꿔나가는 일’이라는 수업 준비를 통해 가능하다. 주로 근, 현대 철학자들의 핵심 개념을 짧은 분량으로 정리하고 삶의 문제와 직결되는 부분을 짚어준다. 적극적인 참여와 적용 문제는 독자의 몫이다. 좋은 책은 손 놓고 입 벌린 독자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대신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라고 독려한다.

수업을 진행하듯 커리큘럼 소개라는 머리말에서 저자는 “철학을 ‘알아두어야 할 지식’으로 전달하는 일은 철학하는 것이 아니다. 철학을 하는 데는 반드시 신체가 필요하다. 철학한다는 것은 헛된 논의가 아니라 ‘행위’다.”라고 말한다. 지식이 육화되는 과정은 사람마다 다르다. 직접 경험을 통해서만 삶의 지혜를 깨닫는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한계를 뛰어넘기 어렵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내가 직접 봤다니까~’, ‘분명히 본인한테 직접 들었기 때문에~’로 시작되는 신념에 가까운 확신은 의심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그 생각의 빈틈을 채우려는 지식과 정보에 대한 욕심보다 중요한 건 ‘관점’이다. 지식과 경험을 정리하고 해체하며 탐구하고 발전시켜 재생하고 창조하는 작업은 철학자의 고유 업무가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과 태도다.

비판적 관점을 상실한 정보 수용, 맹목적 신뢰와 지지, 변함없는 신념과 자기 확신이야말로 철학의 최대의 적이다. 아니, 동굴에 갇혀 그림자만 바라보면서도 충분히 행복하고 즐거운 삶이다. 아는 게 힘이 될 때보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믿고 싶은 심정은 낮은 자존감에 기인한다. 무엇이 바람직한 것인지, 누구를 위한 말과 행동인지, 본질적인 목적과 이유가 어디를 향하는지 ‘생각’하는 건 고통스럽고 적극적인 노력과 변화 의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실은 때때로 우리를 슬프게 하지만 철학은 지속적으로 나를 의심하는 태도다. 온몸으로 내 삶을 밀고 나가는 힘의 원천은 1차적 본능을 넘어 인간다운 삶과 더 나은 미래를 위한 2차적 의지에서 나온다. ‘뭣이 중헌디?’ 이 질문에 정답은 없다. 그러나 최소한 옳고 그름이 아니라 다름과 차이에 대해서는 생각해야 한다.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해서. 그것이 철학하는, 아니 생각하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작은 이익이자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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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 평화론 - 하나의 철학적 기획, 개정판
임마누엘 칸트 지음, 이한구 옮김 / 서광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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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철학적 기획’이라는 부제가 붙은 임마누엘 칸트의 『영구 평화론』에 영구는 없다. 현실적으로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듯, 평화는 멀고 전쟁은 가깝다. 칸트가 말하는 인류의 영구 평화는 이상적 소망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갈등과 투쟁의 역사가 인류 문명을 이룩하는 데 토대가 되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 잠시 호흡을 멈춘다. 과연 법과 질서를 준수하는 세계 시민 사회의 평화는 가능할까.

홉스는 자연 상태를 전쟁의 상태로 보았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상태.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도 마찬가지 논리가 성립한다. 국제법이 없는 자연 상태의 세계질서는 상상보다 동물적일 수 있다.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현실은 말할 것도 없고 역사가 이를 충분하고 남을 만큼 증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적, 철학적 접근을 시도하며 갈등과 전쟁이 아닌 ‘평화’를 위한 칸트의 고민은 높이 살 만하다.

칸트가 말하는 공화정의 세 가지 원리는 법의 지배, 삼권분립, 대의 제도다. 이 조건이 갖춰진 국가가 국가 간 영구 평화를 위한 첫 번째 확정 조건이다. 그렇다면 공화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국가와 공화정을 채택한 국가 간의 전쟁은 피할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또한 영구 평화를 위해 칸트는 국내법, 국제법 그리고 세계 시민법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영원한 평화의 가능성을 이론적으로 논증하려는 칸트의 노력은 현실 적용 문제에 설득력을 잃는다. 이론적 논문에 불과하다고 치부하기엔 현실이 참혹하고 영구 평화가 가능하다는 주장에 동의하기엔 지나치게 이상적이다. 역사는 인류가 야만 상태에서 국가로, 그리고 세계주의로 점차 진보해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과정은 치열한 투쟁과 야만의 시간을 거쳤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정치와 도덕의 관계에서 (1) 행하라. 그리고 변명하라. (2) 만일 당신이 그것을 했거든, 부정하라. (3) 분할하라. 그리고 지배하라. 이 세 가지 원칙은 정치가들이 사용하는 궤변들이다. 권력을 거머쥔 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술책이다. 이런 일반적 처세술은 정치에서 도덕이 부재한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전혀 도덕적이지 않은 정치인에게 가장 숭고한 가치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개인과 정파적 이익, 기득권 보호를 위한 노력이 뻔히 보여도 눈감고 표를 던지는 사람들에 대한 비난보다 우선 그러한 현실을 거부하는 태도와 고장 비판적 감시 기능에 대한 점검이 필요한 게 아닐까.

칸트의 영구 평화론은 ‘예비 조항’ 여섯 가지와 ‘확정 조항’ 세 가지를 제시한다. 예비 조항은 “~~를 해서는 안 된다”라는 형식이고, 확정 조항은 “~~를 하여야 한다”라는 형식이다. 금기와 당위는 하나의 거대한 꿈이다. 먼 훗날 제1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맹,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합과 유럽연합의 결성으로 구현되는 칸트의 원대한 이상은 아직 미완성이지만 국제 평화와 안전 유지를 위한 철학적 기초를 정립했다는 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칸트가 주장하는 실천 철학의 형식적 원리는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게 할 수 있도록 행위 하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정치는 도덕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것이 영원한 세계 평화의 근본적 토대다. 또한 칸트는 “영원한 평화를 보증해 주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예술가인 자연”이라고 말한다. 이때의 자연은 현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이념으로서의 자연이다. 역자 이한구는 기계론적 자연이 아니라 반성적 판단력의 대상이 되는 유기적 전체로서의 자연이라고 분석한다. 이기적, 감정적 동물인 인간에게 기대가 너무 큰 칸트의 잘못은 아니다. 우리는 어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포기한 적이 없다. 전쟁과 평화도 마찬가지다. 영구 평화가 아니라 일시적 평화라도 좋다. 평화를 위한 노력 혹은 평화를 향한 발걸음이 중요하다. 변명하고 부정하고 지배하려는 자들의 말과 행동을 걸러내고 일상에서 평화를 위한 노력이 무엇인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국가 간의 평화는 국민들의 생각과 태도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개인보다 더 위험해 보이는 성찰 없는 정치인과 정부는 전쟁보다 위험하다. 일상을 무너뜨리고 꿈과 희망을 빼앗는 자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길고 긴 법 고전 산책이 끝났다. 마무리가 칸트의 영구 평화론이라는 건 아이러니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놓칠 수 없는 희망 고문 같은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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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정신
샤를 드 몽테스키외 지음, 이재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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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스키외가 말하는 법은 모든 이법 이전에 존재하는 ‘자연의 법’으로서 새로 만들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상태도 되돌려야 하는 것이다. 그 궁극적 토대는 루소처럼 ‘사회계약’이라는 인간 사이의 합의가 아니라 신의 지혜에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 완벽한 종교적 실현은 기독교에 의해 가능하다. 정치적 자유는 오직 법 이후에 존재하며 오직 법에 의해 결정될 뿐이라는 주장은 프랑스 혁명 이전 중세적 가치관의 끝물에 놓인 금수저의 한계를 확인할 수 있다. 볼테르는 몽테스키외보다 다섯 살 연하고, 디드로와 루소는 23~24년 후에 태어났으니 완전히 다른 세대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단초를 제공했을 『사회계약론』과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을 비교할 수 없으나 사회를 보는 관점과 태도의 차이는 분명하며 법과 사회의 관계 설정도 전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갖는 의미는 법의 정신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성과 실정법 사이의 간격을 이해한다는 주장이다. 개별적 존재로서 기능하는 다양한 개체들 사이의 합의된 질서와 규칙을 법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실정법에 대한 기본적인 정의와 태도와 달리 자연법과 만민법은 공화정(귀족정과 민주정을 포함한 개념으로 사용), 군주정, 전제정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적용될 수 있는데 몽테스키외는 이 책에서 그 정체들 사이의 차이와 적용의 문제를 꼼꼼하게 들여다본다.

로마는 처음에 혼합된 귀족정체였다가 혼합된 민주정체로 바뀌고 영국의 정체는 공화국의 성격을 상당히 지는 ‘혼합형 군주정체’다. 몽테스키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 방법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중도 군주제 형태를 띤 프랑스의 현실 정체와 유럽의 현실을 비교한다.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관찰하며 그 차이와 혼용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정치법과 종교법 그리고 정체에 따른 법의 의미를 분석한다. 전제정치(두려움)는 귀족적 전제정치와 국민적 전제정체로, 군주정체(명예)는 귀족정체와 민주정체로 나눌 수 있다. 공화정(덕성)은 이런 요소들이 뒤섞여 나타날 수도 있다. 몽테스키외는 미래를 예측하거나 더 나은 정체를 제안하는 대신 각 정체의 특징과 법의 역할을 설명하는데 치중한다. 물론 자유와 이성이 작동하는 범위와 한계, 그것이 제한받을 때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도 잊지 않는다.

재미있는 주장 중 하나는 풍토이론이다. 유럽과 아시아 더운 지역과 추운 지역을 대비시켜 과학적 결정론이라기보다 운명론에 가까운 자의적 주장은 위험해 보인다. 물론 당대에 이와 유사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몽테스키외도 샤르댕의 《여행기》를 인용하며 자기 생각을 펼친다. 그러나 이는 결정론이라기 보다는 입법자들이 이러한 풍토에 맞서 효과적으로 법을 제정, 운용해야 한다는 주장에 가깝다. 법의 정신은 풍토에 대한 혹은 일반적으로 물질적 원인에 대한 도덕의 승리여야 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입법권과 집행권 그리고 사법권의 분리 이론은 이 책의 핵심 사상이다. 권력은 절제되고 중단될 수 있어야 하며 당연히 조화를 이룰 때 가장 이상적으로 작동한다. 권력 분립은 현대 민주주의 정치 체제의 핵심 중 하나다. 1789년 인권선언문 16조, “인권이 확실하게 보장되지 않거나 권력이 분리되지 않는 모든 사회는 헌법을 갖고 있지 않다.”라는 선언은 대한민국의 짧은 정치사와 오늘의 현실을 성찰하게 한다. 국민의 대표인 입법기관을 존중하지 않는 집행권자 대통령, 집행자들에게 영향을 받아 사법농단을 일으킨 판사들, 독립성을 상실한 입법권자들의 행태를 우리는 매일 목도하고 있다. 보수와 진보 따질 것 없이 진영 논리에 매몰되거나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만 날고기는 모습은 대한민국의 정체를 의심케 한다. 몽테스키외가 주장한 대로 삼권 분립의 균형과 견제가 이뤄진다면 적어도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겠으나 비대한 대통령의 권한과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입법권과 사법권 또한 문제가 심각하다.

해설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몽테스키외를 사회학의 선구자로, 프랑스혁명의 선구자로, 자유주의의 선구자로 내세우는 것은 너무 성급한 해석이다.” 쓸데없이 덧붙여진 과장된 의미 부여와 지나치게 부풀려진 오독이 때때로 아전인수식 해석을 낳는다. 이는 아마도 몽테스키외가 전하고 싶은 생각과 주장이 방대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서문에서 “나는 이 책을 수도 없이 시작했고, 수도 없이 포기했다.”고 고백하며 “20년 동안 나는 내 책이 시작하고, 커지고, 앞으로 나가고, 끝나는 것을 보았다.”고 설명한다. 이 지난한 시간 동안 유럽을 여행하고 세상을 경험하며 생각이 바뀌고 사회를 보는 관점도 달라진다. 역사에 대한 평가는 물론 법이 갖는 역할과 의미도 일관성있게 유지될 수 없을 만큼 긴 세월이다. 전체 6부 31편으로 구성돼 있지만 내용은 1~13편(1~2부), 14~25편(3~5부), 26~31편(6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각각 구체적인 내용과 구성을 살피는 건 내 관심사가 아니나 다소 복잡하고 체계적이지 못한 면이 있으나 정치 체제에 따른 사회의 특징과 법의 의미를 살피려는 노력, 삼권 분립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논리적 주장, 당대 사회를 토대로 종교와 사회의 관계 그리고 법의 역할에 대한 깊은 고민과 그 결과는 이후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 사람에게 영감을 주고 생각의 화두를 삼기에 충분해 보인다.

몽테스키외(1689~1755)는 16세인 1715년 백부의 고등법원 판사직을 세습한다. 배타적 특권 계층으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몽테스키외는 자신의 계급적 지위와 기독교적 윤리에 바탕을 둔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1748년 60세가 되어 펴낸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분류한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이 아니라 공화정, 군주정, 전제정이라는 세가지 정치체제를 중심으로 자신의 경험과 사유의 결과를 당대 현실에 맞춰 서술하고 있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공화국은 ‘덕성이 필요하고, 군주국에는 ‘명예’가, 전제국에는 ‘두려움이’이 필수적인 조건이라는 주장이 인상적이다.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이제 민주주의가 인류의 대세로 자리잡았으나 그 정체와 무관하게 인간과 사회, 그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충돌은 오늘 우리가 가진 법의 정신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자연법, 만민법, 정치법, 종교법, 실정법 등 몽테스키외가 분류한 법들의 종류와 특징, 그 법들 사이의 논리적 모순과 현실 적용 문제를 적용하려는 데 이 책의 목적이 있는 건 아니다. 또한 법은 만들고 집행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의 것도 아니다. 시민들의 생각과 태도가 반영된 철학적 고민의 결과다. 정치 체제와 법의 정신은 바로 나, 우리가 만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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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권리를 위한 투쟁 문예 인문클래식
루돌프 폰 예링 지음, 박홍규 옮김 / 문예출판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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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고시로 상징되는 ‘불멸의 신성가족’(김두식)은 이제 정치 권력의 정점에 섰다. 청산되지 못한 일제 잔당들이 또다시 헤게모니를 거머쥔 채 경찰, 검찰, 사학은 대한민국 사회의 근간을 위태롭게 한다. 이념과 진영 논리의 문제가 아니다. 상식과 현실은 그들만의 리그에 편입된 지 오래지만 언론과 대중은 비판적 안목없이 현실의 문제와 원인을 파악하지도 못하고 생존 경쟁에 매몰된다.

21세기에 들어 한국에서 전통적인 암기식 수험 중심의 법학을 타계하기 위해 학제적 방법을 통한 사회 현실의 인식과 사회개혁의 일환으로 로스쿨이 도입되었다. 그러나 예링이 지적한 대로 기계법학의 폐단은 여전하다. 거대한 고시학원으로 변질된 로스쿨은 한국의 수험법학 혹은 보수법학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너무 고급일지 모르지만, 그런 천박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예링의 『법과 권리를 위한 투쟁』을 읽을 필요가 있다는 박홍규의 맺음말로도 이 책의 의미는 충분히 설명된다.

“19세기 사람 예링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황당무계한 이따위의 현실, 즉 수사와 재판이 판검사와의 연줄이나 권력과의 관계로 움직이는 이 더러운 현실에서는 그런 연줄이나 뒷배가 있는 사람들만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 소송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고, 정의를 지키는 법이니 재판이니 하는 소리는 그야말로 그런 자들을 위한 헛소리에 그칠 것이다.” 판검사는 ‘권력을 위한 투쟁’을, 변호사는 ‘고수입을 위한 투쟁’을, 로스쿨 학생들은 ‘출세를 위한 투쟁’을 가열차게 멈추지 않는 현실에서 ‘법과 권리를 위한 투쟁’은 가능할까. 아니, 시민들의 권리를 위한 투쟁이 아니라면 법은 ‘법치주의’를 외치며 밥그릇을 챙기는 자들의 몫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예링의 지적이 오늘 우리 현실에도 유효하다는 사실이 뼈아프다.

1872년 빈 대학을 떠나며 강연한 내용이 근간이 되어 출판된 이 책은 Recht, 법 혹은 권리가 개인과 공동체를 위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보수적인 개념법학에 대한 비판으로 써 내려간 짧은 글은 강렬하고 인상적이다. 현실에서 우리가 겪는 경찰과 검찰 혹은 변호사의 면면에 대한 평가와 비판은 ‘법과 권리’를 대하는 시민들의 태도와 관점으로 바뀐다. 절대, 기득권을 내려놓거나 내부적인 변화와 개혁을 기다리는 헛된 꿈을 꾸지 말라. ‘투쟁에서 너의 법과 권리를 찾아라’는 예링의 모토는 시대와 상황과 무관한 삶의 태도와 방법으로 읽힌다.

예링은 “법과 권리의 목적은 평화이고, 평화에 이르는 수단은 투쟁이다.”라고 선언한다. 이 단호한 문장에 숨은 역설과 함의는 일반 시민들을 향한 가장 중요한 조언이다. 권리를 위한 투쟁은 권리자 자신의 의무이며 이 의무를 지키지 않는다면 공동체의 질서와 법체계가 무너질 것이라는 주장은 추상적이고 이념적인 법학을 현실로 끌어내려 인간의 권리감각을 일깨우고 법의 존재 이유와 현실적인 문제해결의 단초가 된다. 국가공동체의 의무의 기본이 시민 개개인의 권리를 위한 투쟁이라는 지적은 로마법에 근간을 이루는 시대정신의 재해석이다.

단순 명료한 주장에 군더더기가 없고 셰익스피어의 샤일록을 등장시켜 유대인의 편견과 재판관의 결정을 비판하는 대신 법이 추구하는 목적과 방향을 다시 점검한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합의에 따라 법은 계속해서 신설, 개정, 폐지된다. 법은 선악의 문제를 다루지 않으며 인간의 권리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250여 년 전 예링의 생각이 여전히 상식으로 자리 잡지 못한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지만, 너무 늦지 않게 우리 모두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소송 만능주의, 재판 제일주의로 예링을 오독하는 하는 사람은 없겠으나 21세기 법기술자들이 판치는 세상은 예링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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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 타자윤리학
김연숙 지음 / 인간사랑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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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의 전통은 인간의 이성을 중심으로 선, 빛, 능동성, 형상, 완전성 등에 긍정적 시선을 보냈다. 반대 항에 놓인 감성, 악, 어둠, 수동성, 질료, 불완전성 등은 지양한다. 근대의 인식론적 패러다임도 주체/객체, 이성/감성, 정신/물질의 이분법은 지속된다. 고대의 존재론적 이분법이나 최근의 인식론적 패러다임의 이분법은 이성에 우월한 가치를 부여한다. 플라톤에게 감성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몸은 영혼의 감옥이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정념을 이성에 의한 조정과 통제의 대상으로 평가했다. 현대인은 이러한 사유의 틀에서 자유롭지 않다. 과학기술 중심의 교육체계는 물론 인문, 사회 분야도 ‘과학’을 붙여야 마땅한 대접을 받는다. 신 중심 사회에서 이성 중심 사회로의 이동은 인류를 이성적 존재로 거듭나게 했으며 야만에서 문명사회로 나아가게 했다. 그러나 숱한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주체 중심의 존재론은 윤리학에 치명적 약점을 초래했다. 이 지점에서 레비나스의 타자윤리학은 후설의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반기를 든다.

“감성의 주체를 강조하는 레비나스의 윤리학을 감성의 윤리학, 타인의 호소에 귀기울이는 타자의 윤리학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라는 김연숙의 평가는 이 시대의 윤리학을 다시 점검하게 한다. 자아와 타자의 윤리적 관계는 무식해서 용감한 누구 말마따나 자유와 평등의 원리가 적용될 수 없다. 대개 윤리학은 비대칭을 전제되기 때문이다. 타자의 불행에 대한 도덕적 책임에 있어 인간의 몸과 감성 측면에 주목한 레비나스는 몸적 존재로서 타인의 호소와 요청에 노출된 존재론적 자아의 윤리에 대해 우리에게 묻고 있다.

김연숙은 사르트르의 적대적 타인관을 비판하며 “도덕성(la conscience morale)은 이성적인 의지나 이성적인 자유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고 이웃을 환대하는 태도, 이웃의 삶을 나의 삶보다 더 중시하면서 이웃을 환대(hospitalité)하는 태도 속에 있는 것이다. 요컨대 레비나스는 자유를 자율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도덕적 자유는 타자의 타자성(altérité du l'autre)에 정향되어져야만 한다.”라고 정리한다. 타자의 타자성에 정향되지 않는 도덕적 자유는 심하게 말하면 현대사회에서 합법적으로 저지르는 범죄에 해당한다. 기울어진 저울에 균형점은 수학적 평균일 수 없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대한민국의 윤리학은 정치와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공동체가 유지되는 도덕 규범조차 뿌리채 흔든다. 아니, 타자윤리학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타자는 타인과 다르다.

타자―

(외재성)

환경적 물질의 세계

대상화 가능, 자기화의 영역―향유의 관계

타인

열망과 초월의 대상―형이상학적‧윤리적 관계.

자아 안으로 동일시할 수 없는 무한성을 내포함

열망과 초월의 대상이지만 타인의 얼굴을 통해서 나타남

기후, 환경 문제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며 인구 80억 시대를 열었다. 주기적으로 인류의 삶을 위협하는 전 세계적 팬데믹과 그 후유증은 직접적으로 우리 삶에 위협으로 작용한다. 정치인들의 부작위는 범죄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 침묵하고 외면하는 사람들이 실정법을 위반하는 자들보다 더 위험하다. 구체적인 호명, 수많은 비명과 아우성을 듣지 못하는 무능이야말로 이 시대의 패륜이다.

욕구와 고통은 완화될 수 없고 만족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열망은 절대 채워지지 않는다. 최소한의 욕구를 인간적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거나 고통받는 사람들을 외면하는 자아 혹은 사회는 지속 불가능하다. 가족 이기주의 너머에 놓인 불행을 외면하는 자아의 행복은 불가능하다. 레비나스는 자아와 타자를 연결해주는 것이 ‘초월’이라고 했다. 형이상학적 타자성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초월에로의 이행, 절대적으로 다른 타자에로 향해가는 움직임, 이행이다. 레비나스는 이같은 초월의 운동이야말로 형이상학적 관계, 윤리적 관계라고 말한다. 너와 나의 배타적 친밀성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타자에 대한 윤리적 응답, 도덕적 책임은 모든 인류에게로 확대된다. 이 같은 점에서 레비나스는 “제대로 질서 잡힌 정의는 타자와 더불어 시작한다(la justice bien ordonnée commence par autrui)”라 말한다.

서양철학의 전통을 넘어선 레비나스의 타자윤리학은 동양 윤리와 닿는 면이 많다. 이 책은 그린비 출판사에서 ‘레비나스 선집’(전6권)이 나오기 17년 전인 2001년에 출간된 책이다. 연구자의 꼼꼼한 해설과 원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당대 철학적 사유, 서양 철학과의 비교 등 공시적, 통시적 측면에서 레비나의 사상과 타자윤리학을 치우침 없이 소개하고 분석하고 있다. 자본에 종속된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간과한 점이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모든 철학적 사유와 사회학의 논의가 그러하듯 “그래서 어쩌라고?”와 같은 구체적 실천방안에 대한 진지한 논의와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고민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언제나 그것이 궁금하다.

타자윤리에서 열망은 유한한 자아가 무한한 존재의 타자를 대하는 방법이다. 타자를 열망하는 태도는 타자를 자기 안으로 통합시키거나 자기화하는 작용이 아니라 타자를 향하여 자기 자신을 열어 젖히고 헌신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열망과 초월은 자아의 열림, 개시, 내 집의 현관문을 열어주고 타자를 환영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타자에게로 열려진 문, 그것은 타자에 대한 초월적 열망과 일치한다. 그리고 그것은 타자와의 충만한 관계,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 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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