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와 21세기 - 1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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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대가 변해도 그 가치가 변하지 않는 것이 고전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확인하게 하는 책들이 많다. 노자가 바로 그렇다. 김용옥의 <노자와 21세기>는 22세기든 23세기든 변하지 않는 세상과 삶에 대한 가치를 전해준다. 김용옥의 해설한 노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노자’가 전하는 인간 삶의 정수 때문이다. 고리타분한 고전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책장을 넘겨보자.

고전을 해석하는 방식은 풀이하는 사람의 개인적 성향이나 삶에 대한 가치관, 세상을 보는 눈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도올 김용옥은 노자를 풀이하기 전에 ‘동아시아 문명의 새로운 축’이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풀어내고 있다. 도올은 책의 서두에서 21세기의 3대 과제를 ‘인간과 자연환경, 종교와 종교, 지식과 삶’의 화해로 제시했다. 이렇게 거시적인 안목에서 세계사의 흐름을 전망하는 태도는 ‘노자’를 풀이하고 이해하는 기준이 된다. 수백년, 수천년 전의 사상을 오늘에 되새기는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텔레비전의 폐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만큼 부정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러나 텔레비전을 영향과 효용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 김용옥은 변명처럼 EBS를 통해 ‘노자’를 강의하게된 배경을 길게 설명하고 있다. 단순히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수만은 없겠지만 김용옥의 텔레비전을 통한 강의는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고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식의 대중화는 가능한가라는 물음에 대한 방법으로 선택된 텔레비전이라는 매체가 과연 그 기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어쨌든 가장 파급력 높은 매체를 통한 김용옥의 강의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노자와 21세기 1>에서는 ‘노자도덕경’이라는 책에 대한 해설이 길게 붙어 있다. 1973년에 발견된 백서帛書와 1993년에 출토된 죽간竹簡의 연구 성과까지 아우르고 있다는 점에서 ‘노자’에 관한 한 가장 최근의 정확한 해설을 곁들였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오랜 시절을 거치면서 가감된 부분들에 대한 설명은 노자의 근본 정신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기회가 되었다. 구절 풀이에 대한 이견과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여러 가지 논의 자체가 일반인들에게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다만 ‘노자’가 전해주는 의미들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여전히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도올 특유의 어법이 그대로 느껴지는 이 책은 쉽고 즐거운 마음으로 ‘노자’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1권에서는 우선 6장까지를 해설하고 있다.

道可道, 非常道;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名可名, 非常名.         이름을 이름지우면 그것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無名, 天地之始;         이름이 없는 것을 천지의 처음이라 하고,
有名, 萬物之母.         이름이 있는 것을 만물의 어미라 한다.


노자의 핵심 사상인 ‘도道’를 제 1 장에서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의 일상적 사유를 뒤집는 역설이다. 도를 도라 하면 도가 아니라고 하면 우리는 그것을 뭐라 불러야 하나? 아니 부르지 말고 규정짓지 말고 한정하지 말라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일상과 유리된 모든 가치는 의미없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도道’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싶다면 이 책에 한발 다가서게 된다. 워낙 긴 시간동안 많은 사람에게 소개됐고 알려진 책이지만 진지하게 다시 한번 돌아보는 시간은 즐겁기만 하다.

天地不仁,                       천지는 인자하지 않다.
以萬物爲芻狗;                 만물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
聖人不仁,                       성인은 인자하지 않다.
以百姓爲芻狗.                 백성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
天地之間, 其猶橐蘥乎!      하늘과 땅 사이는 꼭 풀무와도 같다.
虛而不屈, 動而愈出.         속은 텅 비었는데 찌부러지지 아니하고 움직일수록 더욱 더 내뿜는다.
多言數窮, 不如守中.         말이 많으면 자주 궁해지네. 그 속에 지키느니만 같지 못하네.


제 5 장의 내용이 맘에 와 닿아 옮겨 적어본다. 천지는 인자하지 않고, 성인도 인자하지 않다는 말에 공감하는 이유는 뭘까 생각해 본다.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짝사랑은 부질없다. 세상 만물이 있는 그대로의 성질을 드러낼 뿐 자연은 결코 인간을 배려하지 않는다. 성인도 마찬가지다. 시혜적인 입장과 시선으로 동등하지 않은 관점으로 백성을 바라보는 성인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인상적인 부분들은 특별한 해설이 없어도, 아니 해설이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하지만 있는 그대로 사유의 단초를 공한다. 노자와의 즐거운 대화가 계속 될 수 있도록 천천히 음미해야겠다.


061104-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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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11-04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용옥 씨를 보고 있으면, '도는 도고, 삶은 삶이다'라는 생각도 들어요.(헤헤)

sceptic 2006-11-04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올이 도인은 아니죠...^^
 
소피의 세계 (합본)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장영은 옮김 / 현암사 / 199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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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춘기 시절 가장 지독한 고민과 그리움이 있었을까? 문예반 활동을 하던 무렵 학교 축제에 그녀가 찾아왔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동아리에 가입하고 이 맘때 여학교와 시 합평회를 한 차례 가졌었다. 그해 여름 심상사에서 주최한 청소년 문학캠프에서 그녀를 두 번째 만났었다. 시화전에 출품한 판넬위에 노란 들국화가 붙어 있었다. 9월이었다. 열일곱 소년의 가슴에 봄이 왔다. 대학 3학년때 그녀는 시집을 갔다. 사춘기하면 떠오르는 얼굴이다.

  누구나 그러했듯이 아마 그 무렵부터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세상은 어떤 곳일까’…… 그 시절 책방에서 뒤적이던 ‘쇼펜하우어 인생론’이나 ‘니체 인생론’은 아직도 책꽂이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힘겨웠던(?) 사춘기를 가끔씩 떠올려준다. 그때 이 책 ‘소피의 세계’를 만났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을 하며 내내 책을 읽었다.

  생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과 막막함을 경험해 본 사람은 허무주의자가 되거나 실존주의자가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고민과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우리는 철저한 감각적 현실적 존재로 생을 맞이하게 된다. 보편적 삶의 모습이고 그것이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요슈타인 가아더는 교사답다. 가르쳐 본 사람은 안다. 아는 것과 가르치는 것의 분명한 차이를. 깊이 고민해보지 않았거나 관심이 없을 수 있는 철학의 문제들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기 위한 그의 고민과 노력이 감동적이다. 마치 공부하기 싫어하는 학생들에게 동기를 유발하고 공부에 재미를 붙일 수 있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려주려는 것처럼 말이다. 현학적 취미나 지식의 허영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현존재의 모습을 이런 방식으로 보여주는 책은 없었다. 인문학의 기본 소양을 文․史․哲이라고 하지만 두 장르가 결합되는 경우는 대개 문학과 역사다. 철학과 문학의 만남은 작가의 사상에 반영된 주제의식의 발현이거나 작품 내적 구조의 치밀한 구성일때가 많다. 이렇게 직접 철학을 이야기하기 위해 소설의 형식을 빌린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 시도가 가상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훌륭하게 성공하고 있다. 소설속에 두 주인공 소피와 힐데의 역할 인식은 다름아닌 소설을 읽고 있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심연으로 내려가 나를 바라보는 행위와 그 의미 찾기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삶의 숙제 같은 것이기도 하다.

  고3 3월 모의고사에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관한 지문이 출제되었다. 학생들의 반응은 대단했다. 그에 따른 문제들은 오답율이 50%를 넘었고 깊은 좌절과 한숨의 공감이 넓게 퍼져 나갔다. 윤리 시간을 통해 암기한 단편적 철학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물론 이 책을 읽은 학생이 있었다면 정답을 맞췄을 거라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청소년기에 읽고 고민해야할 문제들과 경험해야할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다.

  중앙 공원의 분수가 하늘 높이 솟아 오르고 있다. 하늘은 흐리고 일요일의 오후는 한가로울 것이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가, 세상은 무엇으로부터 생겨 났을까? 수수께끼같은 질문들은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를 진지하게 혹은 즐겁게 해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2005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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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1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thanks to~

sceptic 2007-11-22 09:5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님도 즐겁게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수련 옮김 / 인간사랑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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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가 살고 있는 21세기를 한 세대, 아니 22세기의 후세들이 어떻게 정리하게 될지 궁금하기도 하고 흥미롭기도하다. 물론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게임과 같이 우리가 만들어 가야할 미래는 아득하고 막막하기만 하다. 전지구적 환경의 변화는 경제, 정치, 군사, 환경, 특히 문화적 징후들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을만큼 급박한 변화와 조정을 거치고 있는 상태다.

  수 백년 간 지속된 인류의 사상적 변모는 사회변동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사회정치적 배경과 인간의 사유방식은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세상을 인식하고 우리를 돌아보는 철학방식은 중심개념과 논의의 초점이 하나로 일치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근대 이후 ‘다양성’이라는 가장 두드러진 특성을 보여주는 일련의 현상들은 계급의 붕괴와 시민사회의 발달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각종 예술과 문화의 주체로서 당당하게 참여하게 된 ‘민중’들의 힘이 발휘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0여년 전의 일일 뿐이다. 그래도 그 변화의 속도를 정신을 차릴 수 없을만큼 급진적이며 변화양상 또한 파격적이다. 그 숱한 변화와 다양한 문화 현상 속에서 현대인의 사유 특징을 나름의 방식대로 읽어낸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슬라예보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이라는 책은 1989년에 출판된 그의 초기작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지젝 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고민과 사유 방식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의 사상적 배경과 문화 해석의 논리들이 어디서 출발하고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는지 선명하게 보여주는 그의 대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제 1부 증상에서는 마르크스가 어떻게 증상을 고안해냈는지를 살펴보고, 그의 증상에서 증환으로 나아가는 방식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는 프로이트와 알튀세르, 카프카의 작품이 동원되며, 헤겔식 농담과 영화 ‘타이타닉’을 동원하여 이해를 돕는다. 물론 문화 현상들이 지젝의 이론을 대변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론과 언어 형식에 매몰될 수 있는 개념들을 이해하기 위한 방식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제 2부 타자 속의 결여에서는 ‘케 보이’와 ‘당신은 두 번 죽는다’는 제목으로 이데올로기의 정체성과 왜상, 동일시, 욕망의 그래프를 통해 본격적으로 지젝의 사상을 배경이 되는 라캉의 이론들을 꼼꼼히 분석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포스트 구조주의자’라는 총체적 분류방식을 거부한 지젝은 라캉의 누빔점과 타자의 개념의 오독을 지적하고 있다.

  마지막 제 3부 주체에서는 실재의 주체 개념을 확인하고 ‘메타언어는 없다’는 후기 구조주의자들의 유명한 명제를 분석하며 지젝 나름의 주체와 실재 사이의 개념을 확립하고 있다. 그것은 라캉이 말한대로 상징계와 상상계의 모호한 구분과 구별되는 실재계에서 존재하는 주체의 역할과 개념을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읽은 지젝은 뼈와 살에 달라붙지 않았다. 이물감을 느낄만큼 거부감이 들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내 안에 소화되어 내재화 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것은 개념과 언어때문이었다. 철학의 대상자체가 ‘언어’로 귀착되기 시작하고 모든 사유 방식의 근원이 되는 ‘언어’에 대한 분석과 해석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20세기 언어 분석철학부터 시작된 이 기나긴 여행은 언제쯤 또다른 변화와 도전을 겪게 될지 알 수 없다. 지난 세기 가장 명민한 철학자로 일컬어지는 비트겐슈타인의 관한 <비트겐슈타인은 왜?>라는 책을 보았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지젝의 사상적 배경과 변모과정을 설명한 <누가 슬라예보 지젝을 미워하는가>를 통해 대강의 모습을 그리고 시작한 책읽기였지만 선명한 개념과 인식 방법을 체득하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마르크스든, 헤겔이든, 라캉이든 그들의 개념을 재해석하고 있는 지젝이든 인류의 사상적 진보는 계속될 것이며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귀기울여 들어보고 21세기에 그려나갈 우리의 모습이나 지나온 20세기를 정리해서 현재를 살아가는 ‘누빔점’을 삼을 수 있다면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지만 내게는 좀 더 정밀한 책읽기와 사유가 필요한 듯 싶다.


2005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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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의 대가들 - 역설과 위트, 논리와 상상력의 39가지 철학우화
로베르토 카사티.아킬레 바르치 지음, 이현경 옮김, 김영건 추천 / 열대림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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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또 복권 당첨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사람들은 당첨될 확률을 수학적으로 계산하거나 거기에 투자하는 돈과 시간과 노력이 헛됨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반면, ‘거꾸로시’의 시민들은 필요할 때 즐겨 복권을 산다. 거의 모든 복권이 1유로에 당첨된다. 물론 돈을 잃을 경우도 있으며 최대 백만 유로를 잃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될 확률은 ‘똑바로시’의 시민들이 로또 1등에 당첨될 확률만큼 적기 때문에 누구도 걱정하지 않고 복권을 산다. 재미있는 발상이다. 세상을 조금만 뒤집어 생각하면 얼마나 즐거운 일이 가득한가.

  로베르토 카사티와 아킬레 바르치는 사회과학과 철학을 전공한 사람들로 이 책의 내용들은 대부분 이탈리아의 ‘라 스팜타’지에 실렸던 우화들이다. 전체 8라운드의 논쟁 주제들로 묶어 각 주제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생활속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등장 인물은 ‘그’와 ‘그녀’ 그리고 ‘참견쟁이’ 셋이 대부분이다. 셋은 끊임없이 의견 충돌을 일으키며 서로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며 논쟁을 주도한다. 사고하는 주체에 대한 논쟁, 의식과 정체성에 대한 논쟁, 삶에 있어 우연성이 주는 논리적 가능성에 대한 논쟁, 시간과 공간에 관한 논쟁, 언어와 실재, 언어철학과 형이상학에 관한 논쟁, ‘대다수’라는 용어가 가진 모호함에 관한 논쟁, 논리적 역설에 관한 논쟁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논쟁의 중심에 <논쟁의 대가들>이 서 있다. 그 대가들은 우리 모두의 참여를 기다린다.

  여기에는 어려운 철학적 용어도 관념의 세계를 설명하지도 않는다. 다만 우리에게 지금까지 가져왔던 모든 편견과 습관적으로 부딪혔던 문제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라고 충고한다. 날짜 변경선과 적도가 만나는 지점으로 여행을 하거나 단 한명의 완벽한 표본이 가지는 여론 조사가 얼마나 위험한 지 보여주는 것은 일상 생활 속에 숨어 논리적 오류들을 교묘하게 철학적 주제와 연관 짓는다.

  하루하루 세상을 살아가며 만나게 되는 문제 상황들 속에서 얼마나 이성적이고 비판적 시선을 가지고 사건과 사물을 명확하게 인식할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다. 그것은 끊임없는 지적 훈련과 사유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그 훈련 과정이 우리의 교육과정 속에는 없다. 그래서 감성적이고 무의식적인 편견에 사로잡힌 판단과 오류가 우리들 생활 곳곳을 지배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습관적인 사고 방식의 틀을 벗겨주는 재미있는 ‘철학 교과서’의 역할을 충분히 할만하다.

  어렵고 딱딱한 주제와 낯선 용어가 주는 거부감을 없애주면서 자연스럽게 관습적 사고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예를 들어 ‘위약효과(placebo effect)’를 눈치챈 환자와 약사와의 대화를 통해, 예측 불가능한 방문의 가능성에 대한 대화를 통해 생활속의 논리적 오류를 보여준다. 물론, 그것은 단순히 보여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논쟁과 논쟁 사이에 불필요하게 생각될 수도 있는 생각 상자를 통해 다시 한번 관점을 설명하고 핵심을 유도한다.

  한 마디로 이 책은 우리 안에 숨어 있는 무감각한 오류를 일깨워 논리와 상상력의 즐거움을 알려준다. 그 방법으로 끊임없는 역설과 위트를 사용하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게 상황속에 빠져들게 하는 매력을 지닌다. 출퇴근길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혹은 머리 아픈 수험생들도 39가지의 철학우화중 한편을 가볍게 읽어내는 것으로 시원한 이성의 휴식을 가져 볼 수 있겠다.

  세상에 쏟아지는 수많은 철학 서적과 인생에 관한 허다한 책들 속에서 보물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내 입맛에 맞는 스타일과 방법을 제시하는 책을 고르는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논쟁의 대가들>이 최상의 책은 아니지만 분명 색다른 신선함을 준다는 사실에는 동의해야 할듯 싶다.



2005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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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글자의 철학 - 혼합의 시대를 즐기는 인간의 조건
김용석 지음 / 푸른숲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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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의미를 밝히고 찾아내는 고단한 작업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철학자라고 믿는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인간’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사유하고 고민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그 의미를 되새기고 관찰하며 분석한다. 그래서 우리는 철학자의 말에 귀 기울여 미처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들과 공감하는 부분들을 짜맞추어 보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미소를 짓기도 한다.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가 다 철학자인지 모르겠다.

  철학자 김용석을 처음 만난 것은 <깊이와 넓이 4막 16장>이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혼합의 시대’라는 새로운 개념을 들고 나타난 이 생소한 철학자는 현대적 의미의 전방위적 대응력과 소화력을 자랑한다. 다양한 텍스트와 문화사의 흐름을 짚어내고 있는 역작으로 손색이 없다. 그리고 내 머리의 한계가 그러하듯이 잊고 있다가 최근의 발간된 <두 글자의 철학>을 접하고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공감과 깨달음의 메시지를 보내본다.

  저자는 어느 순간 의미심장한 깨달음을 얻는다. 두 글자! 그렇다.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두 글자들 속에 숨어 있는 비밀과 진실들을 찾아 나선다. 마치 ‘숨은그림찾기’ 하듯이 철학의 발견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간과했던 두 글자들 속에, 혹은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개념들 속에서 의미를 찾아낸다. 어떤 용어나 개념에 대한 명확한 규정과 자리 매김은 철학의 기본적 덕목이다. 저자는 일단 주변에 흩어진 두 글자를 모은다. ‘생명, 자유, 유혹, 고통, 희망, 행운, 안전’은 ‘인간의 조건’으로, ‘낭만, 향수, 시기, 질투, 모욕, 복수, 후회, 행복, 순수’는 ‘감정의 발견’으로, ‘관계, 이해, 비판, 존경, 책임, 아부, 용기, 겸허, 체념’은 ‘관계의 현실’로 묶어 냈다. 나열된 스물 여섯 개의 개념만으로도 충분히 독자들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그것 자체가 하나의 의미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저자 특유의 사유 방식과 각 개념에 대한 해석과 실례들이 덧붙혀져 읽을만한 텍스트로 손색이 없게 된다.

  한국의 ‘슬라보예 지젝’이라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그의 개념은 영화와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문화 텍스트를 도구로 설명된다. 다소 모호하거나 지나치기 쉬운 개념들에 대한 설명이 현실성있게 다가온다. 어렵고 딱딱한 철학을 생활 속으로 불러내는 일은 ‘철학의 대중화’를 위해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두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눈꺼풀을 잡아당기는 철학 서적은 일반인을 위해서는 무의미하다.

“길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라는 왕자의 물음에 여우는 답한다.
“참을성이 있어야 해. …… 처음에는 내게서 좀 떨어져 이렇게 풀밭에 앉아 있어. 난 너를 흘끔흘끔 곁눈질해 볼 거야. 넌 아무 말도 하지 마. 말은 오해의 근원이지. 날마다 넌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앉을 수 있게 될 거야…….”
  여우는 왕자에게 다른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는 한 술 더 떠,
“언제나 같은 시각에 오는게 더 좋을 거야. …… 이를 테면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흐를수록 난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4시가 다 되면 흥분해서 안절부절 못할거야. …… 네가 아무 때나 오면 몇 시에 마음을 곱게 단장해야 하는지 모르잖아. 의식(儀式)같은 게 필요하거든.”

  이 대목을 읽은 독자들에게 저자는 묻고 있다. 이 동화에서 “어린 왕자는 여우를 길들였다.”라고 되어 있는데, 누가 누구를 진짜 길들인 것일까?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생각해보는 사소한 일들이 즐겁다. 그리고 이렇게 오래된 추억같은 이야기를 읽다가 가슴이 먹먹해졌다. ‘관계의 현실’ 부제가 우리 모두의 자화상을 보여주는건 아닌지. 거울을 들여다보며 나를 비롯한 우리를 점검하고 반성해 보는 의미있는 이야기들, 아울러 그 인식으로부터 실천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은 아닌지 싶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늘을 바라본다.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바라본다. 오늘은 구름이 잔뜩 끼어 있고 공기의 흐름도 완만하다. 사실, 두 글자로 철학을 하든 세 글자로 철학을 하든 그게 무슨 특별한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살아 숨쉬고 있는 이 공간과 시간 속에서 다시한번 나를 돌아보고 우리를 생각하는 자세와 현재를 통해 미래를 내다보는 차 한 잔의 여유가 소중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2005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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