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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판 사나이 ㅣ 열림원 세계문학 5
아델베르트 샤미소 지음, 최문규 옮김 / 열림원 / 2024년 3월
평점 :
실존 인물이자 친구인 출판업자 에두아르트에게 보내는 샤미소의 편지도 모자라 푸케의 편지까지 덧붙인 ‘픽션’이라니. 이러한 장치들 – 액자 구성, 편지 형식 등은 소설의 한계, 어차피 서로 꾸며낸 이야기, 공상과 상상에 기댄 허구, 실제하지 않는 인물과 사건이라는 작가와 독자 사이의 암묵적 합의에 도전하는 장치다. 목적은 단 하나, 이 이야기가 진짜 거짓말인지, 거짓말 같은 진짜인지 헷갈릴수록 ‘재미’있기 때문이다. 신뢰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가 오랫동안 독자들에게 ‘실제’로 착각하게 하거나 적어도 실제일 수도 있다는 기대 혹은 의심을 갖게 했다면 충분한 효과를 거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회색 옷을 입은 사내에게 그림자를 파는 순간, 편지는 무용지물이 되고 개연성 없는 허구, 어른을 위한 우화라는 사실이 금세 드러난다. 노력에 비해 효과는 거의 없는 셈이다. 어쨌든 페테 슐레밀이 샤미소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고백과 하소연은 읽는 내내 독자들에게 먼 옛날 혹은 아주 먼 곳에서 실제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의문으로 자신을 속이는 효과를 얻는다.
금화와 바꾼 그림자의 상징 혹은 알레고리를 두고 80쪽 가까이 해설해야만 했는지 찬반이 팽팽했다. 본문(130쪽)에 비해 해설과 보론의 분량이 너무한 거 아닌가. 정답을 찾기 위해 소설을 읽는 게 아닌데 그간의 해석과 논의들을 상세히 알아야 하는가. 개별 독자의 해석과 상상력 혹은 오독의 자유를 무참히 짓밟는 건 아닌가. 의도가 무엇이든,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든 대부분의 독자는 끝까지 읽었으리라. 그래서 ‘그림자’는 금화를 주고도 살 수 없는 혹은 팔 수 없는 것에 대한 교훈인가, 잃어버린 시간이나 양심일까, 공동체가 공유하는 암묵적 가치일까. 무엇 때문에 사는 동안 지켜야 하는 그림자보다 죽은 후에야 가져가겠다는 영혼을 지키려 하는가. 아니, 영혼은 무엇이며 사후세계는 존재하는가.
열두 명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각자의 생각과 추측 혹은 기대가 뒤섞이거나 무너지는 동안 각자 새로운 생의 감각들을 찾는 시간은 아니었을까. 오직 모를 뿐이기에 여전히 질문을 던지고 답이 없는 삶에 의문부호만 보태는 건 아닌가. 결국, 그림자를 되찾지 못한 슐레밀은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 나서거나 그 상처로 절망하는 대신 장화를 신고 세계를 누비는 호모 노마드의 삶을 택한다. 자연으로 회귀하는 인간의 숙명, 아니 물질적 순환 구조에 대한 순응, 그도 아니면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처럼 보이지 않는 무언가 있을 거라는 막연한 환상 혹은 희망 따위가 삶의 고통에서 구원해줄 환각제로 작용하는 건 아닐까.
메피스토펠레스처럼 영혼을 팔라고 유혹하는 회색옷 입은 사내는 악마가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는 보편적 현대인의 모습이 아니냐는 도발적 질문처럼, 자본주의 사회의 교환가치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우리들의 자화상이 악마를 닮았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낭만적 문제해결방법은 현실도피일까. 낭만주의 예술 동화이면서 19세기 본격적인 자본주의 태동기의 사회소설이라면 지나친 해석일까. 봉건 영주제가 물러나고 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자리 잡는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는 반영론적 관점은 정호승의 『연인』, 안도현의 『연어』처럼 따뜻한 어른 동화로 읽으려는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 걸까. 프랑스 혁명으로 고향을 떠난 작가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대신 독일사회에 동화되어 경계인, 전달자, 매개인의 역할에 충실한 듯하다. 수많은 구전 동화, 신화와 전설과 민담들에서 모티프를 차용했다고 하더라도, 이야기의 통일성이 부족하고 장화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작동했더라도 우리에겐 여전히 현실을 견딜 수 있는 이야기가, 내일을 꿈꿀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냥 그렇게 때로는 꿈을 꾸며, 상상을 즐기고, 일탈과 변주를 즐기고, 비록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짜릿하고 아쉬운 설렘을 느낄 수 있다면 충분하지 않은가. 소설은,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기대를 줄이고 한계를 명확히 하면 실망 대신 고마움과 감사한 마음이 든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을 바라보는 건 금화가 없어도 되지 않은가. 어느 시인의 말대로 세계는 유한하며 그 인식의 한계는 개인의 앎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는 데 공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소설은 앎이 아니라 현실 원칙에서 벗어난 쾌락 원칙을 따른다. 언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