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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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한 소수의 작가보다 고요한 다수의 작가에 주목하는 독자들이 많다. 존 윌리엄스와 헷갈릴만큼 줄리언 반스의 목소리는 반옥타브 낮다. 적어도 내겐 그렇게 들린다. 우연히 소설과 미술책 몇 권을 읽다가 제목에 ‘우연’이 들어 있어 손이 갔다. 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보다 같은 제목의 황인숙 시집을 먼저 읽은 것처럼 닐이 시간을 거슬러 엘리자베스 핀치를 추억하며 그의 삶을 추적하자 문두스가 파라두를 따라 가는 여정이 먼저 떠올랐다. 어차피 소설이 누군가의 삶, 어느 순간의 진실, 어떤 공간에 비밀을 밝히는 것이라면 인간과 시간과 공간이 어떻세 서로 다르게 조합되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여기-나’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대학에서 ‘문화와 문명’을 가르치는 엘리자베스 핀치Elizabeth Finch(EF)는 독신으로 살다 세상을 떠난다. 강의를 듣던 닐은 EF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년 간 일년에 두 세번쯤 75분 정도 점심으로 파스타를 먹는다. 두 번 이혼했으며 자식이 셋인 닐은 EF가 세상을 떠나고 자신에게 그녀가 책과 기록을 남겼다는 사실을 알고 EF의 오빠 크리스토퍼 핀치와 친구들에게 EF에 관해 묻는다. 그러다 율리아누스와 에픽테토스를 만난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인용하며 서른 한 살에 죽은 J(율리아누스)의 삶을 추적하는 과정은 액자 속의 액자처럼 소설의 중층 구조를 이룬다. 그가 살던 시대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인류의 역사를 톺아보는 이야기는 EF의 생각을 추론하는 형식으로 작중 화자 닐이 서술한다.

소설에서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분명하게 들린다. EF와 닐 그리고 크리스토퍼 핀치와 닐의 친구들 몇몇이 등장하지만 소설의 주인공은 EF도 닐도 아니다. 두터운 액자 속에 엽서만한 그림처럼 율리아누스가 놓여 있다. 저 머나먼 과거의 이야기, 인류의 역사를 뒤흔들만한 작은 사건과 한 인간에 대한 오해. 가정법으로 후회를 곱씹는 어리석음이 인간의 숙명이라면 줄리언 반스는 EF를 통해 율리아누스 혹은 이후의 수많은 닐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보다.

안다고 달라지나. 모른다고 불행한가. 활자를 따라 걷는 사람들에게 아주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를 들려주는 작가들에게 매료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흔들림없는 편안함은 침대가 과학이라 외치는 어느 가구 회사의 슬로건이 아니라 불안과 공포를 숙명처럼 안고 사는 현대인의 꿈인지도 모른다. 이미 정해진 길을 걷고 싶다면, 이미 결정된 미래를 알고 살던 시대를 우리는 이미 통과하지 않았던가. 자유를 누리려면 불안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법이다. 배교자로 낙인찍힌 율리아누스의 이야기가 아니라 왜 타인을 향한, 아니 다른 종교에 대한 분노와 멸절을 누가 가르쳤을는지 묻고 있는 줄리언 반스의 목소리는 크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이 반종교,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위해 쓰여지지 않았다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EF와 닐의 이야기로도 충분하고 율리아누스가 아니어도 소설은 성립한다.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EF 삶이든, 고대 로마의 황제 이야기든, 남은 생을 또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는 닐이든 상관없다. 비온 뒤에 해가 떴고 우리도 또 내일을 살아야 할 테니, 소설 속의 인물들과 현실을 살아내야 하는 우리는 별반 다르지 않은 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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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 열린책들 세계문학 104
줄리언 반스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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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역사를 연구한 60대 류시현은 『역사를 읽는 법』 머리말에서 “계속 여러 책을 읽고 있다. 그렇지만 역사가 무엇인지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겠다. 게다가 역사가의 역할과 임무가 무엇인지에 관해 여전히 고민하게 된다.”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책을 마무리하며 맺음말에서 “생각을 유연하게 하고 싶다. 생각이 유연한 것은 균형 감각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삶, 나의 판단, 나의 결정 등을 정답이라고 주장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다짐한다. 한 생을 다해 역사를 통찰한 연구자의 말이라고 하기엔 자기 주장이 없어 겸손하게 들리지만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로는 지나치지 않다. 균형과 절제를 잃은 관점과 태도는 폭력과 증오를 낳고 상대를 인정하는 기본기를 상실하기 마련이다. 도대체 역사란 무엇인가.

줄리언 반스는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보태 소설적 ‘허구’를 빚어낸다. 한없이 자유롭고 무한한 가능성이 펼쳐진 소설과 달리 역사는 객관적 사실 여부를 고증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진실은 해석의 문제이나 사실은 합의의 과정이 아닐까. 이 책이 출간 당시 서점 역사 코너에 전시됐다는 웃지못할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줄리언 반스는 왜 소설의 제목을 세계 역사라고 했을까.

노아의 방주, 시오니즘과 테러, 체르노빌 원전 사고, 타이타닉호 침몰, 달 착륙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에서 소설처럼 떠오르는 장면에 숨을 불어 넣었다. 역사적 사실과 다른 소설적 진실이라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차치하더라도 독자에겐 호기심과 재미 이상의 무언가를 요구하는 듯하다. 이 글을 읽고 아무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게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라고 강요하듯 줄리언 반스는 역사의 한 장면을 미분하여 그 의미를 적분한다. 그 중에서도 제5장 「난파」가 인상적이다. 세네갈 원정대(1816.06.17.) 365명의 운명을 다룬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 1819>은 누구나 한 번쯤 보았던 그림이다. 영화나 드라마 보다 극적인 사건을 다룬 그림을 다시 생생한 소설로 묘사한 이유는 궁금하지 않다. 읽는 이에게 미적 황홀감을 주거나 역사를 환기할 목적이거나 현실을 재현하려는 욕망이거나 상관없이 줄리언 반스의 이야기는 과거를 소환해 현실을 살피게 한다. 물론 오래된 미래는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다.

“문학에 있어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전형으로 평가되고 있는 그의 소설과 단편들은, 무엇보다도 사실과 공상의 퓨전-매직 리얼리즘magic realism-소설이라는 포스트모던적 특징을 잘 드러낸다.”(역자 해설 「역사와 픽션을 오가며」에서, 신재실)라는 이야기를 귀담아 들을 필요는 없다. 대다수 독자에겐 이런 용어와 개념이 추상적 지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장면들을 콜라주한 줄리언 반스의 솜씨가 뛰어나 10과 1/2장의 심포니처럼 조화를 이룬 이야기들은 역사와 마찬가지로 소설도 허구에서 신화로 그것이 다시 우화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여주는 듯 신선하다. 불면의 밤을 지나 눈부신 대낮에 꿈을 꾸고 싶을 때가 있다. 현실을 부정하고 외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꿈같은 현실이 도무지 실감나지 않을 때가 많아서일까.

나는 꿈을 깼다는 꿈을 꾸었다. 꿈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꿈이었는데, 내가 방금 그런 꿈을 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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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의 시대 창비시선 495
장이지 지음 / 창비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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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손 편지를 쓴 게 언제일까. 편지의 시대라는 제목 때문에 한참 기억을 더듬었다. 파란색 펜으로 대각선으로 쓰는 버릇을 고치지 못했던 시절은 구한말쯤 되나. 키보드를 두드리고 엄지족으로 진화(?)하는 동안 내가, 아니 우리가 잃어버린 건 아날로그 감성만은 아닐 것이다. 레트로를 찾고 추억 마케팅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일도 어쩌면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아니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리라. 좋은 삶, 즐거운 생활이 아니라 견뎌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지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자주 든다. 일관성과 걱정은 상상력 없는 자들의 한계일까.

당신에게 쓰는 시는 언제나 나를 다치게 하네 쓰면 쓸수록 나는 죽음에 다가가네 수많은 통점으로 뒤덮인 글쓰기, 편지, 당신에게 쓰는 시…… 나의 수많은 기절!

_「사랑의 폐광」중에서

시집을 읽지 않으면 산소 없는 공기를 흡입하듯 활자에 질식할 수 있다. 텍스트의 안과 밖을 살피지 못하고 저자와 씨름하거나 논리의 정교함을 다투다 여유를 잃게 된다. 삭막한 마음은 메마른 모래처럼 쩍쩍 갈라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금세 봄비가 그리워지다가 신발 밑창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질척이는 흙을 떼어내곤 한다. 읽는 인간에게 시가 필요하듯 시인과 소설가는 사랑으로 숨쉬는 게 아닐까.

줄리언 반스의 소설보다 먼저 읽은 편지의 시대 탓일까. 소설의 한 구절을 오래 곱씹었다.

시인들은 나쁜 사랑–이기적이고 비열한 사랑–을 훌륭한 사랑의 시로 전환시킬 수 있는 듯하다. 산문 작가들은 이러한 놀라울 정도의 부정직한 변형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나쁜 사랑을 나쁜 사랑에 대한 산문으로 전환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인들이 우리에게 사랑을 이야기할 때 질투심(그리고 약간의 불신감)이 생긴다. - 『10과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 줄리언 반스

장이지도 그랬을까. 사랑의 폐광에 갇힌 사랑은, 편지의 시대를 돌이켜 나쁜 사랑을 훌륭한 사랑으로 전환시킨 걸까. 줄리언 반스의 내심은 질투일까 불신일까. 아니 그보다 읽는 사람들 마음에 남은 그 사랑의 흔적들은 상처일까 추억일까. 물론, 그게 궁금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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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판 사나이 열림원 세계문학 5
아델베르트 샤미소 지음, 최문규 옮김 / 열림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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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 인물이자 친구인 출판업자 에두아르트에게 보내는 샤미소의 편지도 모자라 푸케의 편지까지 덧붙인 ‘픽션’이라니. 이러한 장치들 – 액자 구성, 편지 형식 등은 소설의 한계, 어차피 서로 꾸며낸 이야기, 공상과 상상에 기댄 허구, 실제하지 않는 인물과 사건이라는 작가와 독자 사이의 암묵적 합의에 도전하는 장치다. 목적은 단 하나, 이 이야기가 진짜 거짓말인지, 거짓말 같은 진짜인지 헷갈릴수록 ‘재미’있기 때문이다. 신뢰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가 오랫동안 독자들에게 ‘실제’로 착각하게 하거나 적어도 실제일 수도 있다는 기대 혹은 의심을 갖게 했다면 충분한 효과를 거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회색 옷을 입은 사내에게 그림자를 파는 순간, 편지는 무용지물이 되고 개연성 없는 허구, 어른을 위한 우화라는 사실이 금세 드러난다. 노력에 비해 효과는 거의 없는 셈이다. 어쨌든 페테 슐레밀이 샤미소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고백과 하소연은 읽는 내내 독자들에게 먼 옛날 혹은 아주 먼 곳에서 실제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의문으로 자신을 속이는 효과를 얻는다.

금화와 바꾼 그림자의 상징 혹은 알레고리를 두고 80쪽 가까이 해설해야만 했는지 찬반이 팽팽했다. 본문(130쪽)에 비해 해설과 보론의 분량이 너무한 거 아닌가. 정답을 찾기 위해 소설을 읽는 게 아닌데 그간의 해석과 논의들을 상세히 알아야 하는가. 개별 독자의 해석과 상상력 혹은 오독의 자유를 무참히 짓밟는 건 아닌가. 의도가 무엇이든,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든 대부분의 독자는 끝까지 읽었으리라. 그래서 ‘그림자’는 금화를 주고도 살 수 없는 혹은 팔 수 없는 것에 대한 교훈인가, 잃어버린 시간이나 양심일까, 공동체가 공유하는 암묵적 가치일까. 무엇 때문에 사는 동안 지켜야 하는 그림자보다 죽은 후에야 가져가겠다는 영혼을 지키려 하는가. 아니, 영혼은 무엇이며 사후세계는 존재하는가.

열두 명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각자의 생각과 추측 혹은 기대가 뒤섞이거나 무너지는 동안 각자 새로운 생의 감각들을 찾는 시간은 아니었을까. 오직 모를 뿐이기에 여전히 질문을 던지고 답이 없는 삶에 의문부호만 보태는 건 아닌가. 결국, 그림자를 되찾지 못한 슐레밀은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 나서거나 그 상처로 절망하는 대신 장화를 신고 세계를 누비는 호모 노마드의 삶을 택한다. 자연으로 회귀하는 인간의 숙명, 아니 물질적 순환 구조에 대한 순응, 그도 아니면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처럼 보이지 않는 무언가 있을 거라는 막연한 환상 혹은 희망 따위가 삶의 고통에서 구원해줄 환각제로 작용하는 건 아닐까.

메피스토펠레스처럼 영혼을 팔라고 유혹하는 회색옷 입은 사내는 악마가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는 보편적 현대인의 모습이 아니냐는 도발적 질문처럼, 자본주의 사회의 교환가치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우리들의 자화상이 악마를 닮았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낭만적 문제해결방법은 현실도피일까. 낭만주의 예술 동화이면서 19세기 본격적인 자본주의 태동기의 사회소설이라면 지나친 해석일까. 봉건 영주제가 물러나고 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자리 잡는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는 반영론적 관점은 정호승의 『연인』, 안도현의 『연어』처럼 따뜻한 어른 동화로 읽으려는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 걸까. 프랑스 혁명으로 고향을 떠난 작가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대신 독일사회에 동화되어 경계인, 전달자, 매개인의 역할에 충실한 듯하다. 수많은 구전 동화, 신화와 전설과 민담들에서 모티프를 차용했다고 하더라도, 이야기의 통일성이 부족하고 장화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작동했더라도 우리에겐 여전히 현실을 견딜 수 있는 이야기가, 내일을 꿈꿀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냥 그렇게 때로는 꿈을 꾸며, 상상을 즐기고, 일탈과 변주를 즐기고, 비록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짜릿하고 아쉬운 설렘을 느낄 수 있다면 충분하지 않은가. 소설은,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기대를 줄이고 한계를 명확히 하면 실망 대신 고마움과 감사한 마음이 든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을 바라보는 건 금화가 없어도 되지 않은가. 어느 시인의 말대로 세계는 유한하며 그 인식의 한계는 개인의 앎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는 데 공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소설은 앎이 아니라 현실 원칙에서 벗어난 쾌락 원칙을 따른다.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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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국을 말하다
장강명 외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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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는 메시지다’(『미디어의 이해』)라는 마셜 매클루언의 말은 언제나 유효할 예정이다. 1964년에 출간되었으나 60년간 변화된 과학기술의 급격한 변동에도 구조와 시스템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발신자-매체-수신자’의 소통 구조에서 레거시 미디어는 정보를 독점했다. 그러나 1인 미디어 시대에 접어들면서 언론의 신뢰도, 정보의 유통 시스템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수신자가 발신자로 거듭났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모두 정보 유통의 허브 역할을 하는 수신자이면서 동시에 발신자이다.

픽션인 문학의 역할과 의미가 축소된 건 미디어의 발전 속도와 그 궤를 함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설보다 흥미진진한 현실이 생중계되고, 뉴스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들이 실시간으로 전해진다. 소설은 갈 길을 잃고 중심을 잡지 못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그건 소설가의 탓이 아니라는 항변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종이 신문은 소설 유통의 중요한 통로였으며 문단권력을 주도하던 영광의 기억도 간직하고 있다. 사람들이 소설을 읽지 않는 건, 아니 책보다 재밌는 미디어가 계속 출현하는 건 소설가나 출판사의 잘못이 아니다.

‘지금-여기’ 한국 사회를 픽션으로 보여주겠다는 한 신문사의 기획이 아니러니하다. 그러나 소설, 문학이 아니라면 피상적 현실을 톺아볼 수 있는 안목은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객관적 사실 뒤에 숨은 진실은 어떻게 말해질 수 있을까. 양극화된 정치와 이념 사회로 회귀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개탄한들 사람들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소란스럽고 자극적인 미디어다. 텍스트를 통해 상상하며 생각에 잠기고 이면의 진실을 찾기 위한 노력은 귀찮기만 하다. 하지만 ‘~카더라’ 통신도 하루 이틀이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진실은 드러나는 법이라지만 왜곡된 사실과 숨은 진실이 끝내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흔하다. 사람들은 지연된 정의는 관심이 없듯,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지금-여기가 중요하다.

결국,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아니라 이야기로 만들어졌을 때 명징해지는 은유와 상징이 아니라면 이 책은 읽을 필요가 없다. 장강명의 「프롤로그 소설 2034」부터 최진영의 「식단 삶은 계란」까지 21편의 짧은 이야기로 드러나는 한국 사회의 현실은 독자 개인의 관점과 태도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 문제가 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개인과 대중이 문제다. 문제가 없는 게 아니라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태도가 문제다. 과연 그런가. 현실의 인식 방법은 소설이 아니라도 좋다. 다만, 무엇을 향해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는 사실에는 모두 동의해야 한다. 여기는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

어느 시대든 소설은 시대의 거울 역할을 해왔다. 개연성 없는 허구에 몰입하는 독자층이 두터워지는 건 시절 탓일까. 웹소설과 환타지가 현실에 대한 외면은 아니겠으나 현실 극복 의지라고 볼 수도 없다. 본격, 순수 소설이 우월감을 갖던 시대도 끝났다. 소설은, 아니 문학은 이제 과거의 빛나는 왕관을 내려놓고 지금-여기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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