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AI와 공부한다 - 우리가 알고 있는 교육의 종말
살만 칸 지음, 박세연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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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뎀으로 PC 통신에 접속하던 기억은 인터넷과 스마트폰 시대로 말끔히 지워졌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거쳐 유튜브가 지식과 정보의 유통 패러다임을 바꿔놓아고 이제 생성형 AI 활용 단계에 접어들었다.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으니 관심을 가져야한다는 의무감도, 시대에 뒤처지는 게 아닌가 싶은 불안감도 아닌 적응과 필요의 문제가 되었다. chatGPT나 Gemini가 인간의 삶을, 아니 인간의 사고와 감정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예측하기 어렵다. 아날로그의 추억을 공유한 마지막 세대가 21세기에 마지막으로 생존했었다는 기록이 먼 훗날 어떻게 읽힐까.

살만 칸은 세계적인 수준의 교육을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교육재단의 설립자다. MIT에서 수학과 전기공학, 컴퓨터과학을 전공학고 하버드경영대학원에서 MBA 를 취득한, 방글라데시 부근 벵골 사람 살만 칸이 보는 AI는 활용해야할 도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교육의 동반자다. 좋은 질문이 좋은 답을 얻는 방법이다.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이 어떤 식으로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학습을 가능하게 할까. AI는 이제 획일적이고 수동적인 공교육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기능을 갖췄다. 단순히 교사들의 수업자료 제작에 도움을 주고, 업무를 덜어주는 차원이 아니라 맞춤식 개별학습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꿈을 꾸게 한다. 그랜드 투어를 시키며 개인 교습을 시키던 유럽의 귀족들이나 도제식 수업으로 될성부른 나무의 떡잎부터 가르쳤던 양반교육은 근대이후 국민교육 제도 안에서 경쟁과 서열화의 어두운 그림자를 남겼다.

누구나 홈스쿨링에 투자할 만한 시간과 노력을 갖출 수 없고, 학교교육의 문제를 인식했다고 1:1 개인 학습으로 전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살만 칸은 AI의 활용여부에 따라 개인의 발달단계와 학습 능력에 따른 ‘공부’가 가능한 방법들을 제시한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12년간 전국의 동갑내기들이 기계처럼 1년에 한번씩 계단식으로 학습능력이 향상하거나 모든 과목에서 고루 흥미를 나타내는 건 불가능하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운영되는 국가수준의 교육과정과 학년제를 모두 무너뜨릴 수도 없다. 이제 무엇을 상상하든 실현가능한 현실의 토대가 마련되었으니, 남은 숙제는 과감한 선택과 방법의 변화다. 중지를 모으고 고민하며 합의하고 실천하는 데까지 또 얼마나 많은 갈등과 충돌이 벌어질까. 그렇지 않으면 늘 그러하듯 ‘지금 이대로!’

AI 시대에 인간에게 남겨진 일은 얼마나될까. 아니 ‘나’는 무엇으로 나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인강 시대에 접어들었으나 수백억 연봉을 받는 1타 강사가 셀럽이 되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살만 칸은 어떻게 바라볼까. AI보다 똑똑하거나 잘 가르칠 수 있는 교사가 있을까. 물론 기본 전제는 학습자 개인의 자발성이다. 상상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시대를 살면서도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관습적 사고에 젖어 있다면 AI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 교사와 협력하는 AI, 교육의 목적과 방법을 뒤바꿀 AI, 시험과 진학과 자격증에 근본적 문제를 일으킬 AI,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무력화시킬 AI, 일자리와 미래 전망을 뒤흔들 AI에 대해 이제 조금 진지하고 적극적으로 생각할 시점이 되었다. 아니, 더이상 외면할 수 없는 시간이 찾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술의 이면, 눈부신 인공 지능 시대를 살아내는 힘은 여전히 인간다움이다. 오랜 시간을 견딘 인류의 지혜와 삶의 문제들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방법과 태도를 변화시키는 건 도구의 활용보다 근본적인 질문과 철학적 고민들이다. 켜켜이 먼지쌓인 고전과 역사적 과정을 살피는 혜안은 기막힌 요약과 음성 대화로 즉답을 내놓는 퀴즈식 지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제 인류가 지향해야할 읽기와 쓰기의 미래도 혁명적 변화가 도래했음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어느 시대에나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막막해진다. 변화를 감지하고 흐름을 읽으려는 이유가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경쟁에서 낙오하지 않기 위해서일까.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너머를 고민하는 ‘공짜 공부’, 고민의 출발지점이 달라 살만 칸의 이야기에 힘이 실린다. AI 시대의 자기계발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 언젠가 겪어야할 변화의 과정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선택할 것이냐의 문제를 담고 있고 있는 인문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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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의 시대 - 종교의 탄생과 철학의 시작
카렌 암스트롱 지음, 정영목 옮김 / 교양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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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라는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시대를 통찰하거나 삶의 의미를 고민하기 위해서는 거시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통시적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와 문명발달의 흐름을 파악하는 건 지금, 여기 를 확인하기 위한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역사는 현재를 살피는 원인이며 오래된 미래다.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의 신의 역사는 객관적성이 돋보인다. 종교인이 쓴 신과 종교에 대한 글은 신앙생활의 일환일 것이다. 신의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다. 서로 다른 문화와 전통은 인간의 무지와 공포에서 출발한다. 수많은 신들이 존재하던 시대를 지나 유일신의 시대로 접어들며 유럽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문화로 대표되었다.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은 불교나 힌두교와 양상이 다르다. 시대와 상황을 반영한 교리는 21세기에도 문명의 충돌을 일으키며 각자의 길을 걷고 있다. 근대 이후 과학에게 내준 권위와 아우라를 되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종교의 힘, 신의 역할이 줄어든 적도 없다. 일상에서 정치, 사회에 이르기까지 뿌리 깊은 역사와 문화적 토양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류 문명은 언제,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중국과 인도, 그리스와 페르시아는 문화적 교류 없이 각자 문명을 구축하며 철학과 종교가 발전했다. 야스퍼스는 이 시기를 축의 시대Achsenzeit’(역사의 기원과 목표, 1949)라 명명했고 카렌 암스트롱은 이를 세분화하며 기원전 900~200년에 이르는 시기를 축의 시대에서 톺아본다. 신화의 시대를 거쳐 자연의 보편법칙을 살핀 후에 인간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과정이 인류 문명의 발달 과정이다. 이제 그 관심과 지향점이 사라진 시대를 맞이한 걸까. 폭력과 혼돈의 시대에 다시 축의 시대를 소환한 저자의 의도는 마지막 부분에서 읽을 수 있다. 세분화한 시기마다 그리스와 중국과 인도와 페르시아 지역에서는 예수, 소크라테스, 공자, 석가모니, 모하메드 등 숱한 인물들이 명멸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보존된 고전classic은 우리가 접하는 사상과 문화와 예술로 남아있다.

 

축의 시대가 드리운 길고 넓은 그림자 안에서 우리는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인공지능 시대를 고민하면서도 인간의 지성과 감성은 여전히 축의 시대를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과 달리 인간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존귀하게 여기게 된 건 아마도 축의 시대를 거치면서 형성된 인식적 태도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것이 종교와 철학 혹은 윤리라는 이름으로 문화와 전통 속에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아니 무엇을 위해 사는가. 시대를 통찰하는 눈, 현재를 살피는 안목, 미래를 전망하는 관점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그래서 가장 기본적인 질문들 앞에서 주저하거나 길을 잃고 헤맨다. 어쩌면 안개가 자욱한 새벽길에 서서 방향을 잃은 사람이 아니라 선명한 갈림길 앞에서 고민하는 사람이 더 괴롭다. 길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망설인다면 나오미 배런과 카렌 암스트롱의 이야기가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결국 각자가 선택한 목표와 방향, 삶의 지향점이 다를 테니까. 그러나 누적된 시간과 인간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동안 자연스럽게 각자의 문제가 해결되는 순간을 맞이할 수있다. 그렇지 않으면 읽을 이유도, 생각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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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질 - 현대 과학이 외면한 인간 본성과 도덕의 기원
로저 스크루턴 지음, 노정태 옮김 / 21세기북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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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 인류의 역사는 이 질문에 답하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뇌과학과 진화생물학이 첨병에 섰다. 독서 모임을 하기 전에 chatGPT로 정보를 검색하는 시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게 지식과 정보일까. 생물학적 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진 않을 터. 영국의 철학자 로저 스크루턴은 리처드 도킨스 ‘밈’ 이론 등 생물학적 인간론은 물론 공리주의와 도덕적 문제로 환원시킨 피터 싱어와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 존재를 규명한 존 롤스까지 치열한 논쟁을 거친 ‘인간의 본질’에 관한 논쟁은 계속될 것이다. 이 책은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고유한 인간성에 대해, 타인과의 관계, 현대 윤리학의 오해, 신성한 인간적 삶에 대해 고민한다. 물론 정답이 없어 가능한 질문들이다. 아니, 질문하지 않는 인간들을 향한 경고다. 대개 인간의 본질은 생각보다 높이 평가하기 힘들다. 그 평가의 기준과 관점에 따라 다르겠으나,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태도가 본질을 흐리게 하는 대부분의 원인이다. 단단한 합리화, 논리적 착각 속에서 비판과 비난 사이를 헤매는 사람들을 위해 2013년 프린스턴대 특별 강연 내용이 도움이 좀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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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사는 세계 - 책, 책이 잠든 공간들에 대하여 페트로스키 선집
헨리 페트로스키 지음, 정영목 옮김 / 서해문집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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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부터 본격적인 독서를 시작한다고 가정해 보자. 일주일에 한 권씩 1년에 50권, 70세까지 한 주도 거르지 않는다면 60년간 겨우 3,000권이다. 책이 그렇다. 공부도 그러하다. 뭔가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 죽을 때까지 노력해도 안 된다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패배 의식이 아니다. 그래서 겸손은 태도나 예의가 아니라 절망적 필연이다. 개인차가 있겠으나 3년에 1만 권을 읽었다는 무의미한 자의 자기 자랑을 제외하면 선구안의 중요성이 더더욱 절실해지기 마련이다.

어쩌다 책을 가까이 한 자들은 책에 관한 책을 놓지 못하고 남의 서가에 꽂힌 책등을 흘깃거리거나 읽은 책 목록을 기웃거리거나 책과 관련된 에피소드에 탐닉한다. 헨리 페트로스키는 책이 사는 세계, 즉 ‘책꽂이’ 이야기로 책 중독자들을 매료시킨다. 북엔드부터 도서관 서고에 이르기까지 책이 놓인 자리와 방법에 관한 역사적 고찰은 그대로 책의 역사이자 인류의 지적 탐험기에 가깝다. 두루마리 파피루스에서 지금 우리가 보는 형태의 책까지 발전 과정은 문명 발달사와 그 궤를 같이 한다.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워 보이는, 책등이 보이게 책을 세워 꽂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 전 이야기가 아니다. 놀랍다. 도서관의 설계와 책꽂이의 설계와 서고의 수서 방식에 관한 이야기들은 덕후들의 뒷담화에 가깝다. 전혀 ‘안물안궁’인 사람들에겐 폭력에 가까운 책일 수도 있겠다.

근대 이전까지 책을 읽고 쓰는 사람은 한정적이었며 일종의 계급적 특권에 가까웠다. 읽고 쓰는 일은 아무에게나 허락된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지식이 권력이었던 시대를 기억조차 못하는 세대다. 차고 넘치는 정보와 지식의 홍수 사이에서 허우적거리며 모두 읽고 누구나 쓰는 시대다. 그래서 책이 사는 세계는 오히려 향수에 가깝다. 물성을 가진 책은 얼마나 유지될까. 마치 종이돈을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사라진 것처럼, 종이책을 들고 읽는 사람은 특별한 취미를 가진 소수로 분류될 날도 멀지 않았을까 싶다.

책에 미쳐도 평생 겨우 몇천 권이 전부다. 코끼리 뒤꿈치를 더듬다 끝난다. 분야별로 줄기와 흐름을 파악하는 데도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덤벼들면 눈이 침침해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짧다, 인생이. 알라딘의 ‘so many books, so little time’이 새겨진 굿즈로 스스로 위로하는 방법 외엔. 그래도 책장을 넘기는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씩 계속 나아갈 수 있지 않은가.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 분들에게 일독을 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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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의지는 없다 -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자유 의지의 허구성
샘 해리스 지음, 배현 옮김 / 시공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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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자유 의지Free Will’가 없다니 무슨 말인가. 독서 모임이나 종교와 과학 논쟁에서 심심찮게 반복되는 ‘자유 의지’는 철학의 영역을 벗어나 각자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설명하기 시작한지 오래다. 숱한 심리 심리실험과 진화 심리학이나 진화 생물학에 뇌과학이 가세해서 논란을 증폭시킨다. 이게 다 ‘호르몬’ 탓이라는 의학적 태도만큼 위험해 보이는 샘 해리스의 ‘자유 의지는 없다’라는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철학과 신경 인지과학을 공부한 저자는 단호하게 “자유 의지란 단연코 환상이다. 우리의 의지는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사고와 의도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도 없는 배경 원인으로부터 발생한다. 우리는 스스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유를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말한다. 앨프리드 R. 밀러는 현대 과학이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한 이유를 설명했으니 논쟁은 진행 중이라 할 만하다. 신경과학과 심리학은 인간의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 두 사람은 똑 같이 생리학자 생리학자 벤저민 리벳Benjamin Libet의 실험을 소개한다. “인간이 자신이 움직이기로 결심했다고 느끼기 300밀리세컨드 전부터 뇌의 운동피질에서 활동이 나타난다는 것을 뇌파검사EEG를 사용하여 보여준 것으로 유명하다. 또 다른 연구소에서는 기능성 자기공명영상장치fMRI를 사용하여 이 연구를 확장했다. 피험자들은 스크린에 나타나는 무작위 순서의 글자들로 구성된 ‘시계’를 보면서 두 개의 단추 중 하나를 눌러야 했다. 그들은 어떤 단추를 누를지 결정하는 순간 어떤 글자가 보이는지 보고했다. 실험자들은 피험자들이 그 결정을 의식적으로 내리기 ‘7~10초’ 전에 어떤 단추를 누를지에 관한 정보를 포함하는 뇌 부위 두 군데를 발견했다.” 샘 해리스는 이 실험을 근거로 자유 의지가 없음을 선언한다. 과연 그런가. 인간의 행동은 무의식과 사회심리학에서 주장하는 상황 논리가 인간의 행위를 촉발한다면 인간의 선택과 갈등은 이미 결정된 행동에 이르는 과정 혹은 예비 단계에 불과하며 우리는 각본대로 인생을 연기한단 말인가.

자연법칙과 우연은 자유 의지와 무관하다. 그러나 생각과 의지 그리고 적극적인 노력과 선택의 문제를 자유 의지와 무관하다고 설명할 방법은 없다. 그것은 자유 의지의 의미와 범주에 대한 이해가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만약 자유 의지가 없다면, 범죄자의 도파민을 감옥에 가두고 자유 의지가 없는 대통령의 계엄령은 처벌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해야 한다. ‘자유 의지가 없다는 환상은 그 자체가 환상이다.’

샘 해리스의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자유로운 존재가 아닐뿐더러, 스스로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롭다고 느끼지 않는다.”라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살아가면서 겪는 선택의 한계, 무의식적 행동과 원치 않는 결과들, 발버둥 쳐도 바뀌지 않는 현실을 돌아보면 정말 의지와 노력 따위가 허망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결정론적 세계관을 받아들인다면 운명론자들의 말대로 태어나는 순간 정해진 삶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면 그뿐이다. 사회적 계급과 자기 삶의 역할에 충실하라는 중세적 세계관이다.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를 받아들이라는 역술가의 조언만큼 당황스런 자유 의지는 없다는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할 이유와 필요를 느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거의 모든 주장과 이론에는 반론이 존재한다. 없다면 곧 나온다. 정반합의 변증법적 사고와 패러다임의 전환에 대해 헤겔이나 토마스 쿤의 주장 그리고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 대한 칼 포퍼의 주장이 떠오른 건 아마도 21세기판 인간 말종론, 아니 종말론처럼 읽혔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이론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물리학의 끈 이론과 달리 밝혀지지 않는 뇌과학이나 심리 실험으로 ‘진리’를 주장하는 모든 논의는 진행ing 상태다. 듣지 않는 사람, 단언하는 인간, 나만 옳다는 인간 혹은 그 집단들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현대인의 질병은 불안과 고독보다 심각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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