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제니 오델 지음, 김하현 옮김 / 필로우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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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산텔라는 “일을 미루는 사람이 그러듯이 결코 직선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한 가지 일에서 등을 돌려 다른 일로 향했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일은 차츰차츰, 조금씩 진행될 뿐이다. 아무것도 구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지식을 손에 넣고 욕망을 채울 수 있으리라.”(『미루기의 천재들』)는 말로 세상의 모든 미루기의 천재들을 빙자한 게으름뱅이에게 용기를 주었다. 일찍이 마르크스의 사위 폴 라파르그가 주장한 『게으를 수 있는 권리』는 자본주의형 인간의 탄생을 예고했음이 틀림없다. ‘개미와 베짱이’는 모든 게으른 자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베짱이처럼 굶어 죽을 처지라는 극단적 사례가 아니라면 우리는 얼마나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피땀 흘려 일해야 하는가. 욕망의 크기를 줄이고 삶의 방법과 태도를 바꾸면 전혀 다른 세상이 열리지 않을까. 고대 철학자들이 말한 행복의 조건과 현대인의 행복은 그 결이 다를까. 관습적 사고를 깨뜨리는 제목을 달고 등장하는 수많은 도발적 책들을 가끔 집어 든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류의 책은 보지 않았으나 각종 배신 시리즈와 전복적 사고를 유도하는 책은 마다할 이유가 없다. 깊이와 넓이가 어느 정도 확보되어 주관적 편향에 흐르지 않는다면 저자의 경험과 생각의 조각들은 대체로 밴드왜건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 수도 있다. 생각 없이 살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오래된 금언이 ‘나’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믿는 수많은 헛똑똑이를 위해 이런 종류의 책은 멈추지 말고 정수리에 찬물을 들이붓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렇게 열심히 살 필요가 있나?”라는 깨달음은 촌각을 다퉈 ‘노오력’의 끝을 본 사람이 뱉을 수 있는 질문이다. 가보지 않은 길을 예측하고 추론만으로 진리를 확신할 수는 없다. 하루 3시간만 일하면 충분하다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나 인류의 역사는 노동 시간 단축의 역사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리오 휴버먼에게 현대인의 삶은 자본으로부터 소외된 기계적 노동자, 중세의 농도의 삶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내세우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자발적 노예로 살아가기 쉽다. 자본주의 욕망과 가상세계의 밈들이 현대인의 뇌를 점령한지 오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은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천정에 자기 망상을 투영하거나 방바닥에 엎드려 장판을 디자인하는 법과는 거리가 멀다. ‘열심히’ 안 해도 ‘잘’하면 되는 나이와 위치가 되는 일의 기쁨과 슬픔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무언가 계속하고 있는 것’이라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제니 오델의 데뷔작은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매력적이다. 누가 얼마나 열심히 사는지 그 치열함으로 부와 권력이 나눠진 시대를 나는 알지 못한다. 더구나 현대인의 하루, 평범한 사람들의 인생에 노력과 열정이 빠져 좌절하거나 실패하는 경우도 드물다. 도대체 우리는 어떤 삶을 원하는가.

손바닥 안에 네모난 화면을 들여다보면 그 어떤 환각제보다 강렬한 세상이 펼쳐진다. 욕망을 자극하고 쾌락을 주며 웃음과 눈물을 창조한다. 디지털 디톡스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의 생각에 동의하기 어렵지 않은가. 그게 좋으면 그만인 세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이라는 말은 일시적으로 소비될지언정 변화를 일으킬만한 트렌드로 자리잡긴 어렵다.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고 공원에 앉아 새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꽃이 지고 바람이 부는 계절을 느끼는 일은 대개 일시적 휴식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하루하루 우리 삶을 돌아보면, 그 시간이 누적되어 자기 인생이 된다고 해도 괜찮은가. 왜 다르게 살 순 없을까. 정말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고,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인가. 저자는 독자를 다그치지 않는다. 조용한 목소리로 쓸모없음의 쓸모에 생각해보라고 속삭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그 자리에서의 저항”이며, 이는 곧 “스스로를 자본주의적 가치 체계에 쉽사리 이용당하지 않는 모습으로 만드는 것”이다. 자기만의 저항법은 매우 중요하다. 각자 선 자리가 다르다. 바틀비처럼 아무 힘도 없어 보이는 사람도 자신의 위치에서 자기 삶을 단단하게 지켜내려는 저항은 그 자체로 숭고하다. 저자는 상업적 소셜 네트워크, 즉 관심 경제에 관심을 집중한다. 지금, 현재 우리의 삶을 특징짓는 여러 가지 요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관심 경제다. 디지털 디톡스가 필요한 시대를 살면서 그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개인적 성공과 성취가 어떠하든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긴 매우 어렵다. 생산성이라는 신화에서 벗어나 저항, 유지, 회복, 돌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시점이다. “악당은 상업적 소셜미디어의 침략적 논리이며, 이득을 취하려고 우리를 불안과 질투, 산만한 상태에 머무르게 하는 소셜미디어의 금전적 동기다. 더 나아가 악당은 이러한 플랫폼에서 자라나 오프라인의 자기 모습과 실제로 살아가는 공간에 대한 사고방식에 악영향을 미치는 개인주의와 퍼스널브랜드 숭배다.”(20쪽)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은 없다.(15쪽) 바쁜 일상에서 잠시 맛보는 휴식은 달콤하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재충전하는 시간도 소중하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만들어 가는 건 자기 자신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사치도, 시간 낭비도 아니다. 오히려 의미 있는 생각과 발화의 필수 요소다. 자기 삶의 소중함을 자각하는 순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은 세상의 기준과 세속적 성공에서 벗어나 조금 다른 삶을 꿈꾸는 사람들의 태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건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 획일적 욕망을 꿈꾸는 세상에서 무지개처럼 다양한 빛깔로 살아가는 건 멋진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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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얼굴들 - 빛을 조명하는 네 가지 인문적 시선
조수민 지음 / 을유문화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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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빛이다. 우리가 눈으로 구별하는 모든 사물은 빛으로 윤곽을 드러낸다. 반사된 색으로 컬러를 구분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고유의 빛깔로 오해한다. 태양과 조명처럼 발광체를 제외하면 모두 반사체에 불과하다. 스스로 색을 만드는 게 아니라 흡수할 수 없는 색을 되비칠 뿐이다. 우리는 사과를 볼 수 없다는 선언부터 생각을 뒤집고 관습적 사고에 경종을 울린다. 사물에 대한 감각적 인지 기능이 얼마나 오해의 산물인지 알게 되면 모든 것이 낯설다. 본다는 행위는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진실이라 믿지만 눈과 빛을 이해한 후에는 모든 게 의심스럽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들은 이야기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빛으로 세상을 읽는 조명디자이너 조수민의 『빛의 얼굴들』은 개인적인 취향을 저격한 책이다. 전복적 사고, 낯설고 신선한 관점, 새로운 지식과 정보, 대상에 대한 저자의 애정, 일정한 거리두기를 통해 객관적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태도까지 읽고 싶은 책의 요소를 두루 갖췄다. 조수민은 빛과 조명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깊다. 오랜 ‘업력’ 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공부와 관찰은 객관적 설명만으로도 읽은 이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며 깊은 관심을 유도한다. 빛은 직진한다는 단순한 사실에서부터 달이 반사체라는 사실까지 빛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며 저자는 빛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특히, “이 시간 동안 이 각기 다른 두 가지 하늘빛은 하늘을 뒤덮으며 하루 중 그 어느 때보다 근사한 장면을 연출한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이 땅 위의 모든 존재를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만들어 주는 이 아름다운 빛의 시간을 우리는 ‘골든아워Golden hour’라고 부른다.”는 설명에 공감하며 하루에 두 번 지구가 빚어내는 빛의 향연에 공감했다. 단순히 석양을 좋아한다는 시각적 현란함을 넘어 골든 아워가 주는 위로와 감동이 인간의 생체 리듬과 맞물려 어떤 의미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골든 아워 : 태양이 뜨고 지기 약 30분 전후, 일광이 금색으로 빛나는 황혼의 시간을 일컫는 말. 사진, 영상, 분야에서 주로 사용되는 용어로, 매직 아워Magic hour라고 불리기도 한다. ‘라디오나 텔레비전 방송에서 청취율이나 시청률이 가장 높은 시간’ 또는 ‘심장마비나 호흡 정지, 대량 출혈 등의 응급 상황에서 인명을 구조할 수 있는 금쪽같은 시간’이라는 의미로도 사용한다.

직사광과 천공광에 대한 설명은 집안 곳곳에 천편일률적으로 배치된 형광등과 간접 조명 효과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밝기에 따른 느낌과 분위기는 빛의 색감, 눈의 피로, 사물의 형태까지 영향을 준다. 맑은 하늘에 햇빛이 쨍한 날과 회색 구름으로 뒤덮여 흐린 날의 차이는 생각보다 단순하지만 그 의미와 활용은 인공 조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사람들의 99퍼센트는 빛을 의식하지 못하지만, 100퍼센트는 빛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라는 조명 디자이너 제니퍼 딥턴이 새삼스럽다. 읽을수록 우리가 아는 빛과 내 삶에 영향을 주는 빛은 조금 다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했다. 빛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 빛이 공간을 채우는 방법, 공동체 사회에 미치는 빛의 영향에 대해 차분하게 설명하는 저자의 목소리는 높지도 크지도 않다. 감성에 호소하지도 않고 개인적인 취향을 직접 드러내는 부분도 많지 않다. 오랫동안 조명을 디자인하며 생각하고 느낀 빛에 대한 철학과 좋은 조명에 대한 생각을 드러내고 있지만 주장과 설득이 아니라 설명과 조언에 가깝다.

수천만 원짜리 루이스 폴센의 조명이 아니어도 좋다. 수입산 명품 조명이 아니면 어떤가. “좋은 조명은 비싸지만, 좋은 빛은 비싸지 않다.”라는 저자의 말은 비싼 조명을 산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빛 환경을 얻는 것도 아니며, 좋은 빛을 얻기 위해 무조건 고가의 조명을 사야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조명의 재료와 가격이 아니라 공간에 어울리는 조명의 위치와 배열이 좋은 빛을 만드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무와 동식물의 기름, 석탄과 석유의 시대를 지나 전기로 빛을 만드는 시대가 되었다. 인류의 밤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밝아졌으며, 어둠을 밝히는 일은 이제 더 이상 부유층만의 특권이 아니다.” 오히려 빛 공해가 인류의 밤을 괴롭힌다. 눈부시게 밝고 환한 빛은 문명발달을 상징한다. 그러나 불면과 각종 질병을 유발하기도 하고, 자연의 순환에 맞춰진 인간의 생체 리듬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기도 한다. 적절한 빛, 좋은 조명은 우리 삶에 매우 중요한 요소다. 알면 사랑하게 된다. 빛과 조명에 대한 앎이 사물과 세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더 나은 삶에 영향을 준다. 조수민이 말한 빛의 얼굴들은 생각보다 다양하고 아름답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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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체가 되고 싶어 - 유쾌하고 신랄한 여자 장의사의 시체 문화유산 탐방기 시체 시리즈
케이틀린 도티 지음, 임희근 옮김 / 반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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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이렇게 정의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내려놓음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삶의 본질인 놀이를 회복하는 것.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금이 바로 그때임을 안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나를 얽어매고 있는 구속과 생각들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

아름다운 마무리는 스스로 가난과 간소함을 선택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또한 단순해지는 것.

아름다운 마무리는 살아온 날들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것.

그리고 아름다운 마무리는 언제든 떠날 채비를 갖춘다.

처음이 있으면 끝이 있고 시작이 있으면 마무리가 있다. 사람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 삶의 시작이 탄생이라면 마지막은 죽음이다.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고민만큼 어떻게 죽을 것인지에 대한 준비를 소홀히 할 수 없다. 마지막이 준비된 사람은 삶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 유언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일 뿐이다. 유산 분배가 아름다운 마무리일 수도 없다. 육체적 존재로서 자신의 몸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깊이 고민해 본 적이 없다. 단순히 화장이나 수목장 정도를 생각해봤을 뿐이다.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했고 마무리에 대해서도 유언을 한 지 오래지만 ‘좋은 시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비우고 내려놓고 단순해지고 자유롭고 간소하게 언제든 떠날 채비를 하라는 법정 스님의 말은 죽음이 임박한 사람에게는 필요 없는 충고다. 건강한 사람의 삶의 태도와 방법에 대한 조언에 가깝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한 장례지도사는 젊은 여성이었다. 장례 절차와 방법에 빈틈이 없는 일처리 방식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껴지는 고인에 대한 예와 진정성 있는 태도가 내게 감동을 주었다. 케이틀린 도티의 『좋은 시체가 되고 싶어』를 읽으면서 그분을 떠올렸다. 장의사로 일하면서 첫 책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만큼 당연한 좋은 시체가 되고 싶다는 말이 깊은 울림을 준다. 도대체 좋은 시체란 무엇인가.

미국 콜로라도주 크레스톤에서는 야외에서 장작더미로 시체를 태운다. 열린 하늘 아래 주변을 환하게 혹은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며 타오르는 상상을 했다.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한 마무리인가. 좋은 시체가 되고 싶다는 바람은 전망 좋은 묘지 터, 후손들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명당자리, 화려하고 커다란 조형물로 치장된 산소에 묻히는 일이 아니다. 저자는 인도네시아 남술라웨시 토라자, 멕시코 미초아칸, 노스캘로라이나주 컬로위, 스페인 바로셀로나, 일본 도쿄, 볼리비아 라파스, 캘리포이나주 조슈아트리의 장례식을 찾아간다. “죽음이여, 그대는 우리를 이긴 줄 알지만 우리는 장작을 불태우며 노래 부른다.”라는 인도 영가가 울려 퍼지는 장례식장에서 지면, 영혼은 자유로움을 느끼는 저자의 모습이 그려진다.

한 인간의 삶을 마무리하는 산 자들의 의식은 엄숙하고 숭고하지만 그것을 무엇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는 공동체의 전통과 문화 의식을 대변한다. 매장, 화장, 자연장 등 어떤 방식이든 시체는 자연으로 돌아간다. 육체는 분해되고 다시 우주의 순환고리 안에 편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랄 만큼 짧은 시간 안에, 미국의 장의업은 지구상 다른 어떤 나라의 장의업보다 더 값비싸고 더 산업적이며 더 관료적으로 변했다. 우리가 가장 잘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다면, 그건 슬픔에 잠긴 유가족을 고인으로부터 떨어뜨려놓는 일일 것이다.” 한국의 장의업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애도와 작별의식보다는 장례 물품의 등급과 가격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고인의 마지막에 최선을 다하려는 유가족의 슬픔이 클수록 장의업은 번창한다. 미국 장의사가 비판하는 장례 문화를 인정하더라도 대한민국의 전통과 문화를 일시에 뒤바꿀 수 없다. 다만 좋은 시체가 되려는 준비와 노력은 황망한 죽음 앞에서 허둥대는 유가족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지 않을까.

“서양의 장의사는 ‘존엄성’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미국에서 제일 큰 장례업체는 심지어 그 단어로 특허까지 받았다. 존엄성이란 대개 입 다무는 것, 강요된 침착함, 엄격한 형식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지하에 마련된 장례식장에서 육개장을 대접하는 우리 장례 문화는 존엄한가. 망자에 대한 예의와 유가족의 슬픔이 조화를 이루는가. 자연장을 치르는 조슈아트리에서 저자는 “나는 인생의 30년을 짐승의 살을 먹으며 보냈다. 그런데 내가 죽고 나서 그 짐승들이 반대로 나를 먹는 것은 왜 안 된다는 말인가? 나도 하나의 짐승 아닌가?”라고 묻는다. 살아 있을 때 고민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자신의 몸은 좋은 시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죽음 그 자체와 별개의 문제가 아닌가. “죽음을 둘러싼 우리의 두려움, 수치심, 슬픔을 소독할 수 있도록 햇빛 속으로 끌고 나오는 어려운 작업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이제 우리 모두 어려운 작업을 시작할 때가 아닐까. 멀지 않은 일이다. 미리 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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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의 힘 - 윤리학-정치학 잇기
주디스 버틀러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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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는 『공화국의 위기』에서 권력power과 폭력violence이 확실히 구분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둘은 일심동체다. 가정 내 부모, 자식 간의 위계질서, 군대와 직장 내 직급과 직책, 국가 기관에 의한 공권력 등 권력은 폭력을 내포한다. 이때 폭력은 물리적 힘뿐만 아니라 언어 폭력, 시선 폭력, 냉소와 무관심, 심리적 억압, 가스라이팅 등 종류를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형태를 포함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일상적 권력은 ‘노오력’에 의한 당연한 권리로 둔갑하기 십상이다. 견제받지 않으려는 검찰, 감시받지 않는 언론, 국민을 의식하지 않는 국회에 이르기까지 민주국가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갑질과 권력 남용은 일상이 되었으며 그것이 폭력인 줄도 모르고 매일 폭행당하며 사는 시민들의 무감각은 놀랄 만하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젠더 이론가인 주디스 버틀러에게 폭력은 불평등, 능력주의, 혐오와 닿아 있다. 오랫동안 동성애와 여성주의 운동 최전선에서 혁신적이고 전복적인 사유와 실천으로 신뢰를 쌓아온 저자의 ‘비폭력’은 일관성 유지하며 새로운 정치철학과 윤리학에 화두를 던진다. 주디스 버틀러는 “비폭력은 바로 폭력장 안에서 윤리적 사안이 된다.”라고 주장한다. 비폭력은 평화주의자의 개념적 선언도 아니고 일상에서 말하는 범법행위를 넘어 윤리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는 문제다. 비폭력의 범위와 한계는 개인과 사회마다 기준이 달라 여전히 논쟁 중이다. 하지만 저자는 “폭력을 가하는 것이 극히 정당해 보이고 당연해 보이는 바로 그 순간에 (의무적 선택지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가능한 선택지로 주어지는 저항적 실천이 비폭력”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비폭력은 수동적, 소극적 대응 방식이 아니라 매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태도라는 의미다.

두 가지 측면에서 비폭력을 정의하면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전투적 평화주의”라고 불렀던 그것을 공격적 비폭력으로 재검토해볼 수 있으리라고 주장한다. 갈등과 논쟁을 외면하고 좋은 게 좋은 거니 덮고 넘어가자는 태도와는 전혀 다르다. 전투적 평화주의를 ‘공격적 비폭력’이라는 표현하는 지점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들리는 두 단어의 조합이야말로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그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그간 인류가 걸어온 야만의 세월은 특정 시대의 정치 형태와 전통과 문화 때문이 아니다. 지금, 오늘을 사는 나와 우리가 목도하는 현실은 인간의 내면에 숨은 이기적 욕망과 자본주의에 물든 탐욕적 태도가 그 자체로 폭력이다. 노력한 만큼 벌고, 능력이 닿는 한 많이 가질 수 있는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에 동조하는 못 가진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요란하다. 평등의 가치는 침묵을 지키고 오로지 정의롭지 못한 자유, 그들만의 자유, 교묘하게 포장된 자유가 공정과 정의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뒤덮고 있다.

주디스 버틀러는 평등에 참여하지 않는 비폭력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다른 누군가의 생명을 지킨다는 고귀함, 전쟁을 반대한다는 평화주의에 머무는 추상적 비폭력은 현실 개선의 구체적 실천 방안을 내놓지 못한다. 비폭력의 힘은 저항과 실천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페미니즘 투쟁과 트랜스젠더 투쟁은 서로 이어져야 한다. 여성 살해를 성테러sexual terror의 일환으로 이해한다면, 이 두 투쟁은 서로 이어져 있을 뿐 아니라, 이 두 투쟁과 퀴어 투쟁, 동성애 혐오와 싸우는 모든 사람들의 투쟁, 지나치게 높은 비율로 폭력과 방치에 노출되어 있는 비非백인들의 투쟁도 모두 이어져 있다.” 폭력이 사회적 불평등의 악화 요인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불평등한 위치에 놓인 노동자, 소수자의 권리 강화, 폭력에 대한 강력한 처벌 등 제도적 장치를 주저하는 이유가 뭘까. 주권자는 누구의 편에서 어떤 정책에 동의하며 누구의 말에 귀 기울이며 현실 개선 노력에 의지를 보이는가. 안타까운 일이지만 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위로하며 적응하며 사는 게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비폭력을 힘과 연결한다는 것, 비폭력 실천을 폭력이 아닌 힘(저항과 생존의 연대 협력에서 표면화되는 힘)과 연결한다는 것은, 비폭력이 약하고 무익한 수동성이라는 관점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거부하는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실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폭력이 정당화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내줘야 할까. 일상의 폭력들, 어쩌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폭력적 현실 앞에서 그래도 ‘희망’은 있다는 말로 눙치면 그만일까. 누군가는 점진적인 변화와 노력을, 누군가는 근본적인 혁명과 개선을 이야기하지만 역사를 되돌리고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자기주장에 힘을 실어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도 있다. 누군가 무슨 말을 하든 판단과 선택은 각자의 몫이지만 선거철에 철새들에게 현혹되지 말고 숨 쉬듯 비판적 관점을 유지해야 한다. 언제나 위험과 폭력은 내가 선이요, 진리라는 착각에서 비롯되는 법이다. 성찰하지 않고 겸손함을 모르는 위선은 그 자체로 타인을 향한 폭력이다.

비폭력의 힘을 주장하는 주디스 버틀러의 깊고 넓은 사유를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니 어쩌면 매번 내 삶의 태도와 우리가 사는 현실을 찬찬히 돌아보게 된다. 조금 더 멀리 내다보며 다양한 형태의 폭력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의식하지 못하는 무지의 폭력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태도라고 생각한다. 비폭력은 공격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윤리적 삶의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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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케르 -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What's Up 3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진우 옮김 / 새물결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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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케르 Ⅰ: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1995)

『아우슈비츠의 유산: 기록과 증언. 호모 사케르 Ⅲ』(1998)

『예외 상태. 호모 사케르 Ⅱ-1』(2003)

『왕국과 영광: 경제와 통치의 신학적 계보학을 위하여. 호모 사케르 Ⅱ-2』(2007)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3부작 중 첫 번째에 해당하는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은 거대한 서평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했다. 배경 지식 없이 책 읽기가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 아래 적어 놓은 책들의 계보는 ‘생명 정치학’이라 명명할 만한 사상의 축대를 쌓기 충분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미셸 푸코와 한나 아렌트와 칼 슈미트가 주축을 이룬 인간과 사회에 대한 고찰은 그대로 호모 사케르 탄생에 바탕을 이룬다. 조르조 아감벤은 이 책에서 “호모 사케르란 사람들이 범죄자로 판정한 자를 말한다. 그를 희생물로 바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지만 그를 죽이더라도 살인죄로 처벌받지는 않는다.”(156쪽)라고 정의한다. 태어나는 순간 차별 없이 모두 시민이 되는 세상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았다. 피부색, 성별, 재산 유무, 출신 성분, 사회적 계급이 다른데 어떻게 똑같은 인간일 수 있는가. 평등이라는 개념은 인류 역사에서 희한하고 기발한 최근의 발명품이다. 말하자면 왕은 거지에게 갑질할 수 없으며 둘의 목숨값이 같다는 주장이 상식이 된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는 그 과정과 결과에 경의를 표하지도 않고 책임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배려와 혜택이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는 것처럼 자유와 평화도 자연스러운 환경으로 착각하기 쉽다. 고대 그리스의 호모 사케르도 정치 체제와 사회 제도에서 유래했다. 노예와 여성은 물론 외국인은 시민이 될 수 없던 시대에 시민은 특권층이었다. 신에게 바쳐질 희생 제의에 사용할 수는 있으나 죽여도 죄를 묻지 않는 자는 누구일까.

“사케르Sacer란 건드렸을 경우 자신이나 남을 오염시키는 그런 사람 혹은 사물을 가리킨다. 여기서 ‘신성한’ 또는 (대략 유사하게는) ‘저주받은’이라는 이중적 의미가 유래한다. 사람들이 지하 세계의 신들에게 바친 죄인은 성스럽”지만 저주받은 존재라는 뜻이다. 이 논의의 시작과 끝은 다시 수용소로 모인다. 깔때기처럼 아우슈비츠로 모여드는 현대 사상의 계보는 서구 유럽의 철학적 전통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선과 악, 인간과 자연, 삶과 죽음, 이성과 감정, 관념과 유물 등에 대한 성찰과 반성은 끝없는 혼돈과 파괴로 치닫는다. “나치 치하의 유대인은 새로운 생명정치적 주권의 특권적인 부정적 준거였으며, 따라서 죽여도 처벌받지 않지만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는 생명을 대표한다는 의미에서 호모 사케르의 명백한 사례였다.”는 단 하나의 문장을 다시 읽을 수밖에 없었다. 현대판 호모 사케르는 유대인으로 마감됐을까. 인간은 그리 지혜로운 동물이 아니다. 망각과 합리화의 능력을 갖춘 존재다. 주권이 가진 퓌시스와 노모스의 이중적 속성은 호모 사케르를 바라보는 양가성을 증명한다. 예외는 일종의 배제다. 생명 혹은 인간으로서 ‘예외’에 해당하는 존재가 가능한가. 인류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예외인가. 유색인종은 백인의 예외인가. 장애인은 정상의 예외인가. 성소수자는 이성애자의 예외인가. 비기독교인 기독교인의 예외인가. 시민은 권력자의 예외인가. 노동자는 자본가의 예외인가. 청소년은 어른의 예외인가. 노인은 젊음의 예외인가……

하나의 프레임에 갇힌 사람의 아집과 독선이 주체적이고 신념에 찬 태도로 칭송받기도 한다. 아감벤이 주장하는 호모 사케르는 어디에나 있었지만 아무 곳에도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없는 게 아닌가. 아감벤은 근대 생명정치의 패러다임으로 인권과 새로운 노모스를 정리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이 존재할까. 얼마 전에 석방된 ‘조두순’은 어떤가.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존재가 아닐까. 어느 시대에도 호모 사케르는 존재하는 게 아닐까. 죄는 미워해도 인간은 미워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사형제 존폐 논란은 언제 끝날까. 범죄자를 옹호하는 말로 아감벤을 오독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만일 오늘날에는 명백하게 규정된 하나의 호모 사케르의 형상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 모두가 잠재적인 호모 사케르들이기 때문일 것이다.”라는 말은 새겨 들을 필요가 있다. 언젠가, 누구든 우리는 모두 잠재적 호모 사케르가 될 수 있다는 경고 앞에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경계를 허무는 일, 아니 경계를 지우고 구별 짓기를 끝내는 날은 아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의 욕망과 비인간적 속성조차 인간의 본성으로 치환하고 그 적응 노력을 자기계발로 선망하는 시대다. 좋은 삶, 내 삶의 가치는 숨은그림찾기처럼 점점 더 어렵고 난해해진다. 비슷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 윌리를 찾는 일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이 돼 버렸다.

* 『호모 사케르』에서 아감벤이 인용, 소개한 책들

아리스토 텔레스 『형이상학』 『정치학』『니코마코스 윤리학』『영혼론』

미셸 푸코 『앎에의 의지』『성의 역사』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혁명론』『전체주의의 기원』

플라톤 『필레보스』『프로타고라스』『법률』『국가』

칼 슈미트 『정치 신학』『노모스』

알랭 바디우 『존재와 사건』

가타리, 들뢰즈 『천개의 고원』

발터 벤야민 『운명과 성격』『폭력 비판론』『서한집』

홉스 『리바이어던』

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카프카 『법 앞에서』『소송』『노트』

칸트 『도덕 형이상학』『실천 이성 비판』『공동 판결에 관해』

하이데거 『철학에의 기여』

장 뤽 낭시 『무위의 공동체』

바타이유 『에로스의 눈물』

페르슈어 『인종 위생학』

칼 빈딩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의 제거에 대한 승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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