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강상진.김재홍.이창우 옮김 / 이제이북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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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가는 동안 왜 사느냐는 질문을 심장 박동수 만큼 하게 된다. 숨쉬는 모든 순간에 묻는다. 왜 사느냐고, 무엇 때문에 사느냐고. 인류가 살아오는 동안 축적된 모든 지식으로도 아직까지 이 한 문제를 풀지 못했다. 우매한 인간들! 수 천 년 전에 살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기대는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행복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아들 니코마코스에게 전해주고 싶은 아비의 심정을 헤아릴 필요는 없는 책이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책을 통해 인간 윤리의 목적과 궁극을 설명하지 않는다. 사유하는 방식과 윤리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접근 방식을 보여준다. 내가 읽은 것은 바로 그것이다. 누구에게나 가장 관심있는 ‘행복’의 문제로 이 책은 시작한다. 과연 행복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얻어질 수 있으며,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느낌이어야 하는가.

행복은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되는 것일 게다. 탁월성을 획득하는 데 아주 불구이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종류의 배움과 노력을 통해 행복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 36

 배움과 노력을 통해 배움을 성취할 수 있다는 말에 희망을 가져 본다. 누구나 행복할 수 있다는 결론. 그것은 탁월성을 통해 가능하다고 한다. 이전에 덕(德)이라고 번역되었던 모호한 개념을 탁월성이라고 말한다. 흔히 윤리의 문제를 선과 악의 개념을 나누는 것으로 생각한다.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가. 절대적인 선과 악은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에 부딪히면 그 굴레와 속박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저자는 이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행복과 탁월성의 문제를 ‘좋음’을 기준으로 이야기한다. 

 악덕과 중용에 대해 말하는 기준은 모호하고 상대적이다. 동양 고전에서 말하는 중용과 거리가 먼 이 중용의 개념은 인간 윤리의 중간값을 말한다. 선과 악에 중간이 아니라 개별적인 인간 행동의 규범을 정의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절제와 용기는 지나침과 모자람에 의해 파괴되고 중용(mesotes)에 의해 보존된다. - P. 55

라고 말한다. 절제와 용기가 완벽하게 통제되는 인간은 없다. 지나침과 모자람도 상대적이다. 그렇다면 결국 윤리라는 것은 사회적 합의와 개인의 판단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인가. 실제로 현실에 존재하는 특별한 가치나 지향점을 윤리의 기본으로 볼 수 없다. 누구에게나 절대적인 가치가 있듯이 그것은 타인에게 상대적인 가치에 불과하다. 물론 모두가 합의할 만한, 혹은 의미심장한 지적도 눈에 띤다.

무절제한 사람에게 문제가 되는 촉각은 신체 전체에 관련한 것이 아니라 특정 부분들에 관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P. 115

 행복과 즐거움의 문제를 신체에 한정시킬 때 전체와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은 기준과 방법이 간명하며 동의할 만하다. 시대적 가치와 분리될 수 없는 윤리가 있을 수 없다. 현재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에 주목해야 하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도 아니고 철학적 깨달음도 아니다. 진정한 행복과 즐거움에 이르는 방법이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과 접근 방법이다.

 공감적 이해와 실천적 지혜로부터 비롯되는 행복을 꿈꾸어 볼 뿐이다. 사람 생김새만큼 다양하게, 개인에게 주어진 모든 조건에서 ‘행복’은 시작된다. 그곳에서 사랑이 생긴다.

‘사랑을 구하는 사람’은 즐거움 때문에 상대방을 사랑하고 ‘사랑을 받기만 하는 사람’은 유익 때문에 상대방을 사랑하는데, 이런 일[불평]들은 자신들이 사랑하게 된 이유가 된 것들을 갖지 못할 때 생겨난다. - P. 315

그 사람이 없으면 그리워하고 그의 현전을 열망할 때 에로스적 사랑을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선의를 가진 사람이 되지 않고는 친구가 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선의를 가진 것만으로 친애적 사랑을 하는 것은 아니다. - P. 327

 아리스토텔레스는 경험적 요소와 상식에 호소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듣는 사람에게 호소력이 있게 전달되는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이야기는 두고두고 새겨둘 만한다. 우리가 고전에서 얻을 수 있는 깨달음과 가치가 현재적 유용성에 있다면 먼지 묻은 책갈피를 들춰 고전의 향기를 음미하는 자세는 분명해진다. 그것은 실제 적용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틀을 변화시키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용기는 산을 옮기는 것보다 어렵다고 믿는다. 그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 깨어있는 존재로서의 의미를 확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두고 두고 한 문장 한 문장을 새겨둘 만한 부분과 전체적인 논리망에 갇힐 수 있는 위험성을 극복하는 것은 풀어야할 숙제이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사람이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이 행복에 있다는 데 일정부분 동의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천천히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070207-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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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발바닥 2007-02-07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식의 힘님 리뷰를 읽으니 이 책도 읽어보고 싶네요. 철학에 관한 초심자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인가요?

sceptic 2007-02-07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리뷰가 친절하지 못했나보네요...일기처럼 그냥 쭉 생각나는대로 써버려서...용어의 개념과 새로운 번역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이를테면 '덕'을 '탁월성'으로 번역한다든지 하는...새롭고 정밀한 느낌이 든다고 하는데 다른 판본을 꼼꼼하게 읽어본 적이 없어 비교는 불가능합니다. 전체적인 내용이나 흐름이 만만치 않습니다. 오프라인 서점에서 몇 페이지 읽어보시고 판단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저도 초심잡니다.

짱꿀라 2007-02-08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광사에서 나온 책과는 느낌이 어떤가요.

sceptic 2007-02-08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판본 비교가 불가능합니다. 다만 부록으로 실린 해석들과 용어 설명으로 미뤄 짐작하고, 다른 책에서 인용됐던 개념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해석이 신선하다는 정도입니다.
 
광기의 역사 나남신서 72
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옮김 / 나남출판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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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미쳤다는 표현 속에 이렇게 많은 함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미심쩍은 눈초리와 의심스런 생각을 갖긴 했다. 질병으로서 미쳤다는 표현과 흔히 일반적인 용어로 미쳤다는 말은 차이가 많다. 정상에서 벗어난 것을 일상에서는 미쳤다고 표현한다. 현대 의학에서 미쳤다는 표현은 쓰지 않지만 뇌의 이상이나 다양한 정신질환자를 우리는 흔히 미쳤다고 표현한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하면 미친 것이다. 그럼 나는 정상일까? 우리는 모두 정상의 범주 안에 놓여있나?

흔히 의미있는 작업들이라고 하면 인간 사회에 충격을 주거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분야에 대해 언급하는 책들이 야간 산행에서 만난 등불처럼 반갑다. 누가 처음이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들은 선명한 자국을 남긴다. 그런 의미에서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는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고전시대의 광기의 역사’라는 원제를 줄여서 번역했지만 특정 시대의 ‘광기’에 집착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광기의 역사>로 읽어도 무난하다. 이 책은 책 자체가 갖는 의미와 저자의 명성을 무시하고 읽을 수 없어서 책을 읽는 내내 빛의 간섭현상 같은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감시와 처벌>로 번역된 ‘감옥의 역사’로 이 책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푸코의 사유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책이었다.

고전주의에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광기’가 어떻게 다루어졌으며 어떤 방법으로 처리되었는지 왜 중요한가? 그것은 인간의 이성을 들여다보는 또다른 프리즘의 역할을 한다. 17세기와 18세기의 광기가 19세기와 어떻게 다른가? 현재 우리가 받아들이는 광기는 무엇인가? 책을 읽는 동안 끊임없이 밑줄을 치며 잠깐씩 반복해서 읽어보았지만 쉽게 정리할 수는 없었다.

일반적으로 광기는 종교적 관점과 도덕적 관점에서 접근되기 시작했다. 쉽게 말하면 이성이 아닌 비이성의 관점이냐 도덕의 관점이냐가 중요하다. 어떤 관점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서 광기에 대한 태도와 대응 방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두 가지 관점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도 처리 방법이 전혀 다른 것도 아니지만 그 사회가 지닌 ‘광기’에 대한 태도는 인간 이성의 역사를 조망할 수 있는 잣대가 된다.

구빈원에서 출발해서 현재의 정신병원에 이르기까지 푸코가 추적하고 싶었던 광기의 역사는 ‘인간 이성의 역사’의 다른 이름이다.

지혜에 비하면 인간의 이성은 광기일 뿐이었고, 사람들의 얄팍한 지혜에 비하면 신의 이성은 광기의 본질적 움직임 안에 놓여 있다. 큰 차원에서는 모든 것이 광기일 따름이고, 작은 차원에서는 전체가 그대로 광기이다. - P. 92

이 책을 읽는 내내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다. 나는 미쳤나, 정상인가. 여러 가지 시대적 배경을 중심으로 광기에 대해 설명하고 분석하고 있지만 현재의 관점에서도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사회적 의미와 태도가 달라졌을 뿐 광기는 여전히 우리 주변에 다양한 형태로 내재되어 있다.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을 뿐이다.

숱한 역사적 자료와 텍스트를 넘나드는 푸코의 사유를 통해 ‘광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은 소설을 읽는 것처럼 단숨에 읽어야 한다. 호흡이 끊기거나 단절되고 나면 하나로 집중하기 어렵다. 니체와 고흐, 아르토를 예를 들며 책의 ‘인간학의 악순환’으로 책을 끝내고 있는 저자의 의도는 예술에서 나타나는 광기가 사회적인 부분과 어떻게 다르게 수용되는지 묻고 있는 듯하다.

사회가 수용할 것인가 배제할 것인가에 따라 광기의 운명은 갈라진다. 광기를 어쩌자는 것도 어떻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의 역사를 통해 인류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본다. 인간이 인간일 수밖에 없는 조건인 ‘이성’에 반해 ‘비이성’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는 ‘광기’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실재 현실에서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푸코가 고민했던 생각의 끄트머리를 짐작할 수 있다. 제 정신으로 살기 힘들 것 같았던 역사를 돌아보면 정상으로 분류된 사람들이 미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미친게 미친게 아니라 정상이 비정상인 사람들과 세상 속에서 고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고민은 어떤 것인지, 더욱 혼란스럽기만 하다.

용어와 개념이 낯선 부분들과 심각한 번역투의 문장(우리말 구조와 어순이 망가져버린)들이 문맥을 흐려놓고 이해를 방해하는 부분들은 어쩔 수 없는 한계일 수도 있겠지만 어렵지 않은 부분들도 어렵게 느껴지게 하는 방해 요소가 되었다.

광기는 다만 이성의 날카롭고 비밀스러운 힘일 따름이다. - P. 96

광기는 ''착각''의 가장 순수하고 가장 완전한 형태이다. - P. 105

광기는 이성의 완전한 부재인데, 사람들은 광기를 ''이성적인 것의 구조''라는 바탕 위에서 그러한 것으로 곧장 인식한다. - P. 317

광기는 진실과 인간의 관계가 혼란되고 흐려지는 바로 거기에서 시작된다. 광기가 일반적 의미와 특별한 형태들을 띠는 것은 바로 이 관계의 파괴와 동시에 이 관계로부터이다. - P. 400

광기는 설령 보호시설 밖에서 결백을 선고받는다 해도 어김없이 보호시설에서 처벌받게 된다. 광기는 오랫동안, 적어도 오늘날까지는 도덕의 세계에 유폐되어 있다. - P. 767


광기에 대한 무수한 정의들과 분석들을 통해 푸코가 생각하는 광기가 아니라 우리가 인식해 왔던 광기의 역사를 재점검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광기도 결국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070103-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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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삶을 만나다
강신주 지음 / 이학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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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철학이 무척 바쁘다. 철학이 바빠진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우리들 삶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철학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그래도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싶을 때 철학에 기대기도 한다. 철학이 바쁠 만도 하다.

강신주의 <철학, 삶을 만나다>는 제목이 너무 뻔해서 식상할 정도다. 철학이 영화도 만나고 예술도 만나고 바쁜 생활 속에 이번에는 당연히 만나야 할 ‘삶’을 만났다. 철학의 역할과 기능을 따져 볼 필요는 없다. 학문적 대상으로 아카데미즘에 매몰되어버린 철학이 세상 밖으로 걸어나온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철학자는 감옥에 갇힌 수인이 아니라 생활인이다. 우리들 삶 속에서 깨달음을 얻고 새로운 시각으로 사물과 사람을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새로움과 낯선 생각을 나누어 주고 고정관념을 하나 둘 쯤 깨뜨려주면 그만이다.

모든 사람이 다 철학자다. 철학이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생활 속에서 당연히 마주치는 일들이 많다. 그 마주침과 부딪힘 속에서 습관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던 문제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다르게 바라보고 거기서 작은 깨달음을 얻고 우리들의 행동이 달라진다면 가장 훌륭한 철학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철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의 관점이 중요하다.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가. 아니 어떤 관점에서 사람과 사회를 바라보는가는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관점이나 시점은 세상을 보는 전제 조건에 해당한다. 전제가 잘못될 경우 전체가 틀려버린다. 물론 다양하지 못한 하나의 관점은 가장 경계해야할 시선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화점식으로 나열된 다양한 논의들도 재미없다. 뚜렷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히면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다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그런 책을 만나는 건 독자에겐 축복이다.

이 책은 전체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철학적 사유와 인문학적 경험들을 통해 철학의 흐름을 짚어주고 2부에서는 사랑과 가족 이데올로기 그리고 국가와 자본주의에 대해 설명한다. 일상에 매몰되어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부분들에 대한 거시적 조망이다. 늘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매일 가족과 부딪히면서 그것들 자체에 대해 깊이 고민하거나 생각해 보지는 않는다. 그래서 관계가 어긋나거나 부자연스러울 때는 이유를 모른채 불만에 가득 차거나 화가 난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합리적으로 사유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철학은 우리에게 많은 얘기들을 건넨다. 그 말들이 어렵지도 딱딱하지도 않다면 금상첨화다. 저자는 쉬운 말로 독자와 대화를 시도한다.

쉽다는 것이 가볍거나 얇다는 말과 상통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방법의 문제일 뿐이다. 숨많은 철학자와 고전을 쉽게 풀어 인용하고 씨줄과 날줄로 묶어 절적하게 배치하는 것은 당연히 저자의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거기에 자신의 철학적 성찰까지 담아내야 한다. 가벼운 내공으로 만만하게 시작할 일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철학, 삶은 만나다>는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마지막 3부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과 즐거운 주체로 살아가기 그리고 타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대한 부분이 이 책의 핵심이다. 철학사를 안다고 해서 철학책을 읽었다고 해도 삶과 유리되어 있다면 쓸데없다. 머리와 가슴이 따로 국밥이라면 무의미하지 않은가. ‘타자’라는 놀음판의 ‘따짜’와 다르다. 철학에서 사용하는 타자의 개념을 몰라도 좋다. 다만 ‘타자는 나의 미래!’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크리스마스가 되면 사람들은 많은 선물을 주고받는다. 데리다는 선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어떤 상호 관계, 반환, 교환, 대응 선물, 부채 의식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무언가를 기대하거나 대가를 바라는 선물은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다. 진정한 선물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행복하다. 내와 타인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나와 세상과의 관계를 점검하는 것은 살아 숨쉬는 동안 끊임없이 해야하는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이다.

한 해가 저물어 가고 또 한 해를 맞이하면서 산다는 것은 쉽게 규정되지 않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구하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방법을 찾고 고민하는 시간들이 조금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 생각들이 가슴과 다리로 이어진다면 좋겠다. 생활 속에서 주어진 상황 속에서 참여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 본다.


061223-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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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와 21세기 - 3 - 완결편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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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읽는다고 해서 현실의 내가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자괴감. 하루 이틀 노력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는 낭패감. 어쩔 수 없이 현실에 발딛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과연 고전이 주는 지혜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善行無轍迹,                         잘 가는 자는 자취를 남기지 아니하고,
善言無瑕謫,                         잘 하는 말은 흠을 남기지 아니한다.
善數不用籌策,                     잘 헤아리는 자는 주산을 쓰지 아니하고,
善閉無關楗而不可開,         잘 닫는 자는 빗장을 쓰지 않는데도 열 수가 없다.
善結無繩約而不可解.         잘 맺는 자는 끈으로 매지 않는데도 풀 수가 없다.
- 27장

고수의 세계는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다는 공통점에 대해 공감할 것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동작과 입으로 하는 말과 사유의 흐름에 막힘이 없고 자연스럽다. 하수는 고달프다. 시간과 노력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더욱 힘들어진다. 부단한 극기의 과정과 대상에 대한 열정만이 그러한 경지를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러나 완벽주의에 대한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예를 들어 잘 하는 말은 흠을 남기지 않는다고 했는데 흠을 남기지 않는다는 말은 논쟁적인 장면에서는 불가능하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은 모두에게 나쁜 사람이다.

樸散則爲器,                       통나무에 끌질을 하면 온갖 그릇이 생겨난다.
聖人用之, 則爲官長.         성인은 이러한 이치를 터득하여 세속적 다스림의 우두머리 노릇을 한다.
故大制不割.                       그러므로 위대한 다스림은 자름이 없는 것이다.
- 28장

그릇의 효용은 비어있는 공간에서 비롯된다. 깍고 다듬고 파내어 비어진 공간만큼 그 그릇의 가치는 인정받는다. 비워야 얻을 수 있는 지극히 자명한 이치 앞에 고개가 숙여진다. 온전한 모습 그대로 끊임없이 이기적 욕망을 드러내는 자화상을 보는 것같아 부끄럽다. 정현종 시인의 시 <잃어야 얻는다>를 읽다가 두고 두고 인용했던 기억이 새롭다. 양손에 떡을 쥐고 떡이 무겁다고 불평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道常無名.                                       도는 늘 이름이 없다.
樸雖小, 天下莫能臣也.                 나무는 비록 작지만 하늘 아래 아무도 그를 신하로 삼을 수 없다.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賓.         제후 제왕이 이 통나무를 잘 지킨다면 만물이 스스로 질서지워질 것이다.
-32장


이름을 부르는 순간 모든 것들은 규정된다. 관계가 형성되는 것도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노자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통나무와 이름은 도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세상과 인생의 이치를 깨닫는 것은 과연 삶의 태도와 가치를 바꿀 수 있을까? 스스로 그러하다고 생각했으나 아직도 멀었다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고미숙의 선언대로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知人者智, 自知者明.                        타인을 아는 자를 지혜롭다 할지 모르지만, 자기를 아는 자야말로 밝은 것이다.
勝人者有力, 自勝者强.                    타인을 이기는 자를 힘세다 할지 모르지만, 자기를 이기는 자야말로 강한 것이다.
知足者富, 强行者有志.                    족함을 아는 자래야 부한 것이요, 행함을 관철하는 자래야 뜻이 있는 것이다.
不失其所者久, 死而不亡者壽.        바른 자리를 잃지 않는 자래야 오래 가는 것이요,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자래야 수하다 할 것이다.
-33장

이 세상에 가장 두려운 존재는 자신이다. 가학적 삶의 태도를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지나쳐도 좋지 않다. 과연 나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한다는 것의 한계는 무엇인가. 알 수 없다. 숭산 스님의 말처럼 ‘오직 모를 뿐!’

道常無爲, 而無不爲.                    도는 늘상 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아니함이 없다.
-37장

노자의 ‘道經’ 37장은 이렇게 끝이 난다. 38장부터 81장까지의 ‘㥁經’은 도경의 깊은 이해만으로도 충분히 그 경지를 이해할 수 있다는 도올의 말을 믿어야 할 것이다. ‘道’라는 것이 대체 뭐길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어느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가. 그 깊고 깊은 사유의 흐름을 꼼꼼히 따라가며 도올의 도움을 받았지만 암흑 속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불빛도 없다. 현실에서 찾아지지 않는 ‘길’에 대한 아쉬움과 스스로에 대한 미련스러움에 화가 나기 때문이다. 이성과 감성으로 해결되지 않는 삶의 이치와 ‘道’의 경지는 내 몫이 아닐 수도 있고 우리들 모두의 곁에 함께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렴풋한 느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반성적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렇게 어둠이 창 밖에 당도해 버리고 나면 반드시 빛이 있기 마련이다.


06111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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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1-13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때 선(善)이 '착하다'도 되지만 '잘'이라는 말도 된다는 걸 배웠어요.친구들끼리 농담으로 공부를 잘해야 착한 어린이가 되는거라 이야기했던것이 생각납니다.

sceptic 2006-11-13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농담이 진담되는 현실이 좀 황당하기도 하죠...공부와 거리가 멀었던 어린 시절이라 쫌 많이 찔리네요...
 
노자와 21세기 - 2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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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와 21세기> 2권은 7장부터 24장까지의 내용이다. 인상 깊은 구절들을 적고 F9를 누르면서 한자로 변환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모든 사람이 그런지 알 수 없지만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수많은 독자들이 보이는 다양한 반응들은 그들의 삶의 형태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만큼이나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天長地久,                              하늘은 너르고 땅은 오래간다.
天地所以能長且久者,               하늘과 땅이 너르고 또 오래갈 수 있는 것은,
以其不自生,                           자기를 고집하여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故能長生.                              그러므로 오래 살 수 있는 것이다.
- 7장


피 흘리며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유덕화의 모습과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아스팔트를 다리는 오천련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영화 <천장지구>는 깊은 인상을 남긴 청소년기의 영화다. 자기를 고집하지 않는 유일한 상태가 사랑의 빠진 인간의 감정이 아닐까? 비극적 사랑이 보여주는 안타까움에 관객들은 가슴을 졸였었다. 노자가 다시 태어나 이 영화를 보면 기겁할 일이겠지만 자기를 고집하지 않는다는 것은 시대와 상황을 불문하고 도달하기 힘든 경지다. 바람직한 상태나 상황과 현실은 늘 괴리가 있는 법이다. 그것이 학문의 세계이든 사랑이든.

上善若水.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水善利萬物而不爭,              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
處衆人之所惡,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하기를 좋아한다.
故機於道.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 8장


노자 도덕경에서 자주 인용되는 가장 대표적인 구절 중의 하나지만 역시 기가 막히다.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에 곳에 처하려는 노력은 인간에게 가식일 수 있다. 대상과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진정한 ‘道’의 실체는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연스러움을 인간이 닮고자하는 것은 쉽지만은 않다. 누구나 그럴 수 없다. 겉멋 든 표현이나 구호가 아니라 실천의 구절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떻게 하면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단순 무식한 노력과 기본적인 심성에만 기댈 수는 없다.

五色令人目盲,                       갖가지 색깔은 사람의 눈을 멀게하고,
五音令人耳聾,                       갖가지 음은 사람의 귀를 멀게하고,
五味令人口爽.                       갖가지 맛은 사람의 입을 버리게 한다.
- 12장


색과 소리와 음식은 판단을 흐리게 한다. 때로는 인간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욕망들을 경계하는 이런 표현들이 거북하다. 에피큐러스 학파의 진정한 쾌락이 금욕주의로 흐르듯이 지속 가능한 영원한 쾌락을 위한 자기 극복은 필요하다. 하지만 범인들의 입장에서는 고문이다. 내 방식대로 현실의 모습 속에서 노자를 이해하고 풀이하는 나같은 수많은 독자들은 어쩌란 말인가. 맘에 새기고 뼈에 사무쳐도 실천할 수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외물에 미혹하지 않는 경지는 하루 이틀에 완성될 수 있는 내공이 아니다.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감각을 키우는 것이 단지 훈련만으로 가능하다면 조금씩 흉내내고 싶다.

大道廢, 有仁義.               큰 도가 없어지니 인의가 있게 되었다.
慧智出, 有大僞.               큰 지혜가 생겨나니 큰 위선이 있게 되었다.
六親不和, 有孝慈.            육친이 불화하니 효도다 자애다 하는 것이 있게 되었다.
國家昏亂, 有忠臣.            국가가 혼란하니 충신이라는 것이 있게 되었다.
- 18장


인간을 억압하는 제도와 관계의 구속이 아니라 자유로움에 근거한 통쾌한 역설! 바로 이런 구절이 노자의 백미가 아닐까 싶다. 인의, 지혜, 효와 자애로움 그리고 충신을 뒤집어 바라보는 시원한 발상의 전환이 돋보인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우리에게 던져주는 18장의 의미는 색다르다. 가슴으로 읽는 구절이 다르겠지만 이 구절은 발상과 표현에 주목한다.

絶學無憂.                        배움을 끊어라! 근심이 없을지니.
- 19장


공부하기 싫은 놈들을 위한 최고의 변명이 될 수 있으니 주의요망! 그 깊은 뜻을 헤아려야 한다.

希言自然.                        말이 없는 것이야말로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故飄風不終朝,                  그러므로 회오리 바람은 아침을 마칠 수 없고,
驟雨不終日.                     소나기는 하루를 마칠 수 없다.
孰爲此者? 天地!               누가 이렇게 만들고 있는가? 하늘과 땅이다!
- 22장


한 편의 시와 같이 아름다운 부분이다. 회오리 바람이든 소나기든 천지가 만든 것은 영원할 수 없으니 인간이야 말해 무엇하랴. 논란이 많은 해석에 대해 도올은 자신의 주장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어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나같은 문외한이야 어느 판본을 인용해서 비교하든 중요하지 않다. 미미한 해석상의 오류도 그렇다. 다만 지금, 여기 나의 문제를 비춰보는 거울의 역할을 할 따름이다. 어차피 모든 독서의 과정은 지독하게 이기적이다.


061108-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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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1-08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올이 TV에 나와 묘한 억양으로 강의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어려운 내용이지만 재미있었고 실생활과 상관없이 듣고 즐길 수 있었어요.
이 글 중간 중간에는 저와 의견이 다른 부분이 있지만 마지막 문장은 제가 책을 파고 들때마다 하는 생각입니다.

sceptic 2006-11-09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차피 모든 독서는 지극히 개인적인 과정을 거쳐 사회화의 과정을 거치기도 하니까요. 특이한 억양만큼 외모와 생각도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다만, 일반적이라는 통념에 대해서는 재고해봐야겠지만요.

비로그인 2006-11-10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올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는데요,학문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서만은 본받고 싶더군요.

sceptic 2006-11-12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연합니다. 세상과 학문에 대한 날선 목소리는 본받을만하죠.